[Opinion] 당신의 밤도 밝아질 겁니다. - 최은영 ‘밝은 밤’ [도서]

글 입력 2022.11.1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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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는 것이 꺼내 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최은영 ‘밝은 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볼 때나 아문 상처가 흉터로 남은 것을 볼 때, 여러 마음으로 인해 지쳐 마음이 없이 잠시 쉬고 싶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 동안의 흔적을 옷은 얼룩으로 그리고 냄새로 남긴다. 빨래하면 대부분 얼룩도 사라지고, 냄새는 섬유유연제의 향만 남는다. 마음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 심정이 어떤지 알아서 그 문장을 읽는데 가슴이 아렸다. 동시에 주인공의 사연이 궁금했다. 그 후, 북카페에서 ‘밝은 밤’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읽었다.


그동안의 내 마음이나 생각들이 문장과 이야기로 명쾌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읽으면서 속이 시원했고, 위로가 많이 됐다. ‘밝은 밤’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 마음 다 알아.’, ‘그래서 그랬던 거지?’, ‘많이 힘들었겠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책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난 청자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화자가 된 것 같았다. 나의 이야기를, 마음을, 생각들을 말하고, 책은 공감과 이해의 눈빛으로 나를 보며 가만히 들어주는 듯했다. 이윽고 ‘내 책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시기에 감사하게도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우연히 ‘밝은 밤’의 글귀를 만나고, 관심이 생기고 내 곁에 오기까지 모두 운명 같았다. 


그래서 더욱 아껴 읽고 싶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밝은 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다음 이야기에 대해 궁금함보다 아쉬움이 더 커서 잘 읽다가 갑자기 책을 덮는 행동을 반복했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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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은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최은영 작가는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이며,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은 예리한 시선에서 비롯된 문제의식과 섬세하고 깊은 문체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부분을 읽을 때는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특히 해결과 변화가 필요한 문제지만, 쉬쉬하는 분위기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던 부분을 최은영 작가는 시원하게 짚어준다. 좋지 않은 관행에 익숙해지고 안주하는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게 손을 들고 ‘이거, 문제입니다!’라며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작가다. 


술술 읽히는 쉬운 문장이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문장에 스며든 작가의 메시지가 보이고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는 손길과 깊은 눈빛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작가의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친근함에 끌리다가 나중에는 깊이에 감탄한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는 것 같다. 나도 최은영 작가의 장점이자 매력을 좋아한다.

 

처음 ‘쇼코의 미소’를 만나고 그때 기억이 매우 좋아서 그 문장을 쓴 사람이 최은영 작가라는 걸 알고,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한 건 한 번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찾아서 읽기에는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북카페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글을 읽으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사라졌다. ‘믿고 보는 00’이라는 말이 있듯, 최은영 작가는 믿고 읽는 작가라는 나만의 공식이 생겼다. ‘밝은 밤’은 ‘쇼코의 미소’보다 인상 깊었고, 더 큰 감동을 내게 안겨줬다. 개인적으로 ‘쇼코의 미소’보다 ‘밝은 밤’의 문장들이 더 많이 가슴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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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은 지연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증조모-할머니-엄마-나(지연)로 4대에 걸쳐 여자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는 작가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이야기라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 속 곳곳에 작가의 남다른 애정이 묻어있었다.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동화 속 할머니처럼, 지연의 할머니는 지연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줬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동화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지연의 증조모, 할머니, 엄마의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것들을 숨김없이 담은 옛날이야기였다. 작가의 예리한 시선과 용기가 돋보였던 부분이었다. 


지연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공감했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지연을 제외한 세 여자가 살아온 시대는 내가 살아온 시대와 아주 달랐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은 좋지 않은 관행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가 그걸 먹고 나가서 애인과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요리하는 일에 정이 떨어졌다. 식재료를 다듬고 씻고 양념하고 굽고 찌고 끓이고...... 애써서 그 모든 과정에 몰두했던 일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따위 짓이나 하고 다닐 그를 위해 왜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었지. 마음을 다해 한 일을 경멸하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 그전에는 몰랐었다. - 최은영 ‘밝은 밤’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중략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중략.


그랬니, 그랬구나, 나도 마음이 아프다....... 아주 단순한 말로라도 엄마가 내게 공감해주기를 나는 기대했을까.


“많이 취한 것 같다. 쉬고 내일 보자.”


엄마가 재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괴로운 나, 슬픈 나와는 함께하려 하지 않았지. 단  한 순간도. 나는 익숙한 분노를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엄마를 바라보면서 어떤 잔인한 말을 할지 마음속에서 골랐다. 

 

- 최은영 ‘밝은 밤’

 

 

지연은 남편의 외도 때문에 이혼 후, 희령이라는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새 직장과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편의 외도와 이혼이라는 상처를 잘 극복하고 무난하게 지내는 듯 보였지만, 사실 지연은 아직 아파하는 중이었다. 그런 지연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지연의 친구들은 보란 듯이 잘 사는 게 전남편에 대한 복수라는 말을 했다. 위로의 말이었겠지만, 그 말은 지연을 더 몰아붙였다. 지연의 이혼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상처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의 태도는 지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지연은 친구들과 부모, 그리고 전남편과의 기억이 있는 곳에서부터 멀리 달아났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희령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지연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증조모와 할머니를 마음속으로 위로하면서 자신도 위로했다. 


그러나 지연은 다시 무너졌다. 원인은 지연의 부모였다. 특히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더 컸다. 이혼 후, 엄마와 보이지 않는 갈등이 더욱 깊어졌지만 서로 회피했다. 정확히는 지연이 항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엄마에게 맞춰줬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지연은 용기 내어 그동안 묵혀둔 응어리를 토해내지만, 여전히 차갑고 회피하는 엄마의 태도에 지연은 더욱 상처받았다.

 

할머니의 이야기와 지연의 이야기는 어둡고, 쓸쓸하고 무서운 밤 같았다. 그런 밤이 계속됐지만,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밝은 밤처럼 빛이 있었다. 작가는 현실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곳곳에 심었다.


작가는 가부장적인 남성들이 대부분이던 시대였지만, 새비 아저씨를 통해 그렇지 않은 남성도 있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여성은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하고, 결혼해서 남편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던 시대에도 희자를 통해 그런 삶을 살지 않은 여성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증조모는 그 당시의 관행에 순응한 인물이었지만, 이를 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잘못된 중론에 딸이 휩쓸리지 않길 바랐다. 중요한 순간에는 바른말을 할 줄 알았고, 필요할 때는 이를 드러낼 줄도 알았다. 


자식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고 방관하며, 본인들의 체면과 감정만 생각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은 지연의 부모에 비해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알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막냇삼촌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모든 부모가 지연의 부모 같지 않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남들 앞에서 울거나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지연의 엄마는 남들 앞에서 소리쳤다. 그리고 지연과의 문제를 더는 회피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희령에 갔던 지연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를 대면했다. 그리고 엄마와의 문제를 직면했다. 엄마와 제대로 싸우면서 엄마의 솔직한 심정을 알게 됐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통해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야기의 끝이 다가올수록 단단했던 매듭이 점점 풀리고,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던 지연은 조금씩 회복해갔다. 이야기는 매듭이 풀리고, 완전히 회복한 지연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중으로, 그러나 전보다 많이 좋아진 모습으로 끝났다. 오랫동안 단단하게 묶여있는 매듭과 오래된 상처는 빠르게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난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불빛들이 하나, 둘... 모이면, 결국 밤은 밝아질 거라는 작가의 희망적 메시지가 더 강하게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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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라온 환경과 겪은 경험들, 그리고 그로 인해 느끼는 것들로 인해 내가 만들어졌고, 과거의 나가 모여 지금의 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가족도, 타인도 현재의 그 사람이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하게 되면서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게 됐다. 


지연도 그랬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를 이해했으며, 이해는 용서가 되었다. 자신에게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으며 조금씩 달라지는 엄마를 보면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상처를 준 건 아니었다고 확신했다.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지연이기에 지연과 나를 동일시하며 읽게 됐다. 그래서 상처를 외면하다가 대면하고, 감정을 터트리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을 이해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장한 지연을 보며 나도 함께 성장한 것 같았다.

 

사람은 자라온 환경, 경험으로 인해 ‘나’가 만들어진다. 같은 환경과 경험을 겪었어도 선천적으로 가진 성격에 의해 서로 다른 유형의 ‘나’가 탄생한다. 경험이 없어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깨달으며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객관화를 못 하고 깨닫는 것이 없어서 제자리인 사람이 있다.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은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이렇게 경험의 유무 그리고 경험 후 깨달음의 유무에 따라 각각 다르게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모여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빛이 하나둘... 모이면 밤도 밝은 밤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상황적으로만 표현한 건 아닌 것 같다. 경험, 생각과 감정, 깨달음, 실천이라는 불빛이 모이면 같은 ‘나’라도 좀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다는 응원의 마음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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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라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와 ‘밝은 밤’이 운명처럼 만난 건,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 성장했다고,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뒤통수를 친다. 나는 그랬다. 그래서 배우고, 성장하다가 지치고 힘들면 쉬고 그러다 다시 배우고 성장하기를 반복하는 게 인생이라고 (감히) 믿고 있다.


따라서 지연이 겪은 과정을 이미 거쳤고 한 층 성장했다고 해서 ‘밝은 밤’이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과정은 지나온 사람이기에 더욱 필요했고, 자기 의심이 있는 나에게 이 책이 다시 확신을 줬다. 그리고 초심 잃지 말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작가의 바람대로 ‘밝은 밤’이 필요한 나에게 잘 도착한 것이다.


‘밝은 밤’이 슬프거나 힘든 하루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곳곳에 있었던 불빛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좀 더 나은 ‘나’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길 바란다.


이 책이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도 ‘밝은 밤’이 잘 도착하여, 밝은 밤을 맞이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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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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