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안에서 엄마와 딸이 다툰다. 그러다 돌연 딸은 달리는 차에서 문을 열고 내려버린다. 딸은 분홍색 깁스를 한쪽 팔에 하고 다닌다. 이 소녀의 이름은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다.
스스로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 소녀는 가정도 사랑도 우정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동시에 맞물리는 순간이 존재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상처를 주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생긴다. 이러한 모순이 영화 전반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이 지점이 이 영화를 현실, 즉 저마다의 청소년기 시절을 비추어 보게 한다.
흔히들 이 영화를 청춘영화라고 부르지만 여느 청춘영화와는 달리 핍진성이 높다. 청소년기의 시간을 낭만화하기보다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좋아하는 남자와 첫 키스를 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에 취했던 날, 집에 돌아와 엄마는 왜 방을 치우고 나가지 않았는지 다그친다. 집안과 바깥의 상황이 분명히 분리되는 상황, 그러나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균열들. 인생 처음 느끼는 짜릿한 감각을 온전히 누릴 새도 없이 엄마는 레이디 버드의 개인 공간을 쉽게 넘어온다. 영화의 장면들은 매순간 현실의 내밀한 구석을 꼬집어 보여준다.
깁스를 풀게 되는 순간, 그리고 남자친구가 대니에서 카일로 바뀌는 순간을 기준점으로 두고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엄마와의 어긋난 대화는 계속된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랑과 우정 속 균열은 그 시기가 끝나면 행복의 단계로 넘어오지만 엄마와 딸의 관계는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살펴보면 단순히 레이디 버드가 ‘사춘기’가 왔다고 표현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아침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레이디 버드는 내가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부엌을 어지른다며 그냥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달걀이 안 익었다고 말하고 다시 엄마는 그럼 네가 해먹으라고 답한다.
레이디 버드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엄마의 통제와 간섭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화가 난다. 엄마는 자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빠인지 엄마인지 알 수 있다. 엄마는 노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엄마가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반면에 엄마는 딸에게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가정의 속사정들을 전부 짊어지면서 생활비를 벌고, 빨래나 요리 등의 집안일까지 전부 도맡아 하고 있다. 이것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대화가 계속 다툼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한 가지 더, 레이디 버드가 샤워를 마치고 수건 두 개로 몸과 머리를 감싸고 나왔을 때 엄마는 수건 두 개를 쓸거면 세탁기를 어느 때에 미리 돌려놓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역시도 엄마는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맡고 있고 레이디 버드의 생활은 그에 따라 통제와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선 부엌에서의 상황과는 달리 레이디 버드는 비교적 엄마의 말을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프라이를 먹을 때는 대니라는 남자친구를 만났을 때, 수건에 대해 말할 때는 카일이라는 남자친구를 만났을 때다. 이 두 시기는 명확히 구분된다. 두 시점 사이에는 레이디 버드가 지나온 시간이 존재한다.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렸을 때 마냥 천사같고 아름다운 생각들만 떠올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미치도록 증오하고, 가장 큰 사랑을 알려준 사람이자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 개인이 아닌 그 누구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가정의 속사정이 저마다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 속에서 당사자만 이해하고 거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와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하다가도 예쁜 옷을 발견하면 바로 화색이 돌고, 딸에게 차갑게 말하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목소리 톤이 밝아지는 엄마의 모습과 사정이 관객에게 결코 낯선 상황이 아닐 것이다. 아주 익숙하고 또 일상적이다.
레이디 버드는 엄마에게 화를 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엄마를 말할 때는 항상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남자친구에게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처럼 엄마와 딸의 관계는 1차원적으로 바라보고 설명할 수 없다. 언제나 모순과 함께 간다.
결국 언제나 자신에게 안 된다고 말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엄마를 답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제 부모님의 용돈을 받고 살아가는 어린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가정사, 어른들의 사정을 감춘다. 그것이 가난이든 누군가의 외도 사실이든 말이다. 레이디 버드의 경우에는 가난이다. 엄마와의 말다툼을 할 때 레이디 버드는 아빠가 실업자가 되었다는 것과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을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레이디버드는 그간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될 때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알지 못했기에) 사 달라는 물건을 사주지 않는 엄마가, 방을 치우라고 잔소리하며 노크하지 않는 엄마가, 가려는 대학에 가지 못하게 하는 엄마에게 분노하게 된다. 그렇지만 레이디 버드는 동시에 알고 있다.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희생하고 있는지도. 따라서 엄마가 아무리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엄마는 레이디 버드에게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
대학교 합격 사실을 숨겼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는 레이디버드가 떠나는 날까지도 그에게 차갑게 군다. 레이디 버드가 차에서 내리고 홀로 운전을 하던 엄마는 점차 눈물이 고이는 복잡한 얼굴로 공항 탑승 입구를 찾아가지만 이미 딸은 떠난 후다. 우리는 그 표정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사정과 감정이 압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이토록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영화는 보여준다.


레이디 버드가 연극부 시험을 볼 때 부르던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은 자신에게 안 된다고 말하고 그는 이러한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동안 살아온 동네를 떠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영화의 도입부 학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직접 만든 포스터에는 몸은 새, 얼굴은 자신인 그림이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새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는 그 어떤 제약 없이 하늘을 마음껏 누비는 모습이다. 레이디버드, 즉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지금껏 살아온 동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담겼다.
그러한 레이디 버드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순간이 온다.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 고향을 떠나게 될 때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고향에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레이디버드’. 그러나 타지에서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붙잡게 된다. 고향에 있을 때는 당연하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타지에서는 자신이 계속 붙잡고 있어야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아름다운 동네, ‘새크라멘토’의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의 도입부에 두 번 등장한다. 크리스틴이 하교할 때, 그리고 엄마가 병원에서 퇴근하는 차 안에서. 당연시 여겨지던 익숙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인식과 의식은 이렇게 영화의 도입에서,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에 한 번 더 생겨난다.

레이디 버드가 연극부에 들어가서 부르는 노래에도, 수학 선생님이 채점표를 잃어버려 학생들에게 점수를 물을 때도 영화는 내내 ‘진솔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진솔함이 각 인물들에게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한 요점이 된다.
자신을 지켜주겠다며 스킨십을 거부하던 대니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레이디 버드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대니가 동성애자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 때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따라서 레이디 버드가 일하는 카페에 대니가 찾아왔을 때 레이디 버드는 그간 그가 느꼈을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며 두 사람은 포옹한다.
대니와 헤어지고 벽지에 카일이라는 새로운 남자의 이름이 적힌다. 연극부 선생님이 바뀌고 레이디 버드는 깁스를 푼다. 레이디 버드의 절친은 줄리에서 제나가 된다. 제나와 친해지기 위해 레이디버드는 자신이 좋아했던 선생님의 차에 골탕을 먹이기도 하고 살고 있는 집을 거짓말하기도 한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들의 눈치를 살피던 레이디 버드가 그들에게 진솔해지는 순간은 ‘프롬에 가겠다’고 말할 때다. 그 기점으로 레이디 버드는 줄리의 집에 찾아가 다시 화해를 하고 프롬 파티를 즐긴다.
상황은 스스로 진솔해지거나, 사실이 들통나는 방식으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로 상황은 이루어져 있다. 보통 후자의 경우에는 상황이 유순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양한 진솔함과 마주하면서 레이디 버드는 점차 이 시기를 지나 다음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 그는 가게에 들러 담배와 복권, 성인 잡지를 산다. 가족 중 누군가 데리러 와야 했던 그 전의 등하굣길과는 달리 레이디버드는 운전면허를 따고, 개인 휴대전화가 생기고, 카일의 이름도 벽지에서 지운다. 그리고 타지의 대학으로 떠난다. 새로운 동네의 성당에 들어가 성가대의 음악을 듣는 레이디버드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 음악과 공간은 가톨릭 학교에 다녔던 ‘그’ 시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로소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는다. 고향에 대한 기억과 아름다움은 그곳에 머물 때가 아닌 그곳을 떠날 때 비로소 완성되고 깨닫는다. 어쩌면 떠나야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전부를 설명하지 않아도 전부를 알 수 있는, 혹은 조금이라도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기억이 존재하는 시기를 다룬 영화, 그레타 거윅 감독의 「레이디 버드」다. 여전히 그 시간 속에 있는, 혹은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 모두가 이 영화를 보고 만날 수 있는 '나'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