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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문학을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은 것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영화]

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가처럼 살아가는 것

by 이수진 에디터
2026.09.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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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적인 예술가>

       

      과거 시집 한 권을 출간했지만 지금은 뉴욕의 우체국에서 일하는 에드 색스버거. 어느 날 젊은 예술가 마이어스가 그를 찾아온다.

      오래전 출간된 그의 시를 읽고 감명받았다며 자신이 속한 예술 모임에 초대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시놉시스만 읽었을 때 나는 꽤 낭만적인 영화를 상상했다. 잊힌 시인과 젊은 예술가들이 뉴욕의 어느 방에 둘러앉아 문학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글을 읽고, 세대를 넘어 예술에 관해 대화하는 영화. 내가 한 번쯤 상상해본 문학 살롱의 풍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에는 그런 기대를 품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글을 쓰고 읽는다. 한때 시인이었던 노년의 남자를 알아보고, 그의 오래된 작품을 기억해주는 청년들이 있다. 평생 우체국에서 편지를 분류하며 살아온 에드는 꽤 오랜만에 자신이 한때 시인이었음, 예술인이었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서 꺼내온다.

       

      이런 모임 하나쯤 있다면 좋겠다. 우리가 꿈꾸는 예술 모임이 이런 거 아닐까?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풍경의 표면이 조금씩 벗겨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가 기대했던 예술의 낭만보다는,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현실의 모습이었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이상한 모순

       

      마이어스는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는 에드에게 다시 글을 써보라고 권하고, 친척이 출판업계에 있다며 연결까지 해준다. 언뜻 보면 오랫동안 잊혀 있던 작가를 세상 밖으로 다시 끌어내려는 호의처럼 보인다. 그런데 에드가 출판사에 어떤 시인이 소속되어 있느냐고 묻자 명확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러 분야의 책을 출판하고 에이전시 업무도 한다는 식의 설명만 이어진다.

       

      실제로 담당자를 만난 순간 그 어색함은 더 분명해진다. 미팅이 예정되어 있던 당사자, 에드가 찾아왔는데도 노트북 화면 속 미팅 업무를 마저 처리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에드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를 묻기보다 회고록 이야기를 꺼낸다. 오래전 시를 썼던 사람이 지금 무엇을 쓰고 싶은지, 다시 시를 쓸 마음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지금 시장에서 무엇이 잘 팔릴 수 있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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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출판도 산업이고, 책 역시 시장 안에서 유통되는 상품이다. 그것 자체를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씁쓸했던 것은 그 앞뒤에 놓인 말들의 간극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고, 상업적인 세상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정작 한 사람의 작품을 다시 세상에 내놓는 순간 가장 먼저 작동시키는 논리는 너무나 익숙한 비즈니스의 언어였다. 에드가 기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오랜만에 만난 기회는 문학의 세계로 돌아가는 입구라기보다 그에게서 무엇을 상품화할 수 있을지 검토하는 회의실 현장이었다.

       

       

       

      기술을 거부한다는 사람의 집에 있는 알렉사

       

      마이어스의 집이 등장하면서 그 모순은 더욱 선명해진다. 뉴욕 한복판의 넓고 정돈된 집, 쉽게 손에 넣기 어려워 보이는 값비싼 책과 물건들. 책 첫번째 장에는 가격이 적혀있다. 그는 현대의 기술과 문화를 경계하고, 휴대전화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과 인플루언서 문화를 못마땅해한다. 자신들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내가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장면 중 하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등장한다. 에드에게 낭독회 전단을 건네고 배웅한 마이어스가 문을 닫자마자 홈 어시스턴트 알렉사에게 음악 소리를 높여달라고 명령하는 장면이다. 별것 아닌 행동인데 그동안 마이어스가 했던 말들을 한순간에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실 모순은 알렉사를 사용하는 데 있지 않다. 기술을 쓰면서 기술을 비판할 수도 있다. 돈이 많다고 문학을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신을 둘러싼 조건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리면서,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속물적이라고 규정하는 태도에 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세계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세계가 제공하는 부와 기술과 네트워크를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 바깥에 있는 고귀한 사람인냥 연출한다.

       

      그 장면을 지나면서 처음에는 부러웠던 예술 모임 역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하루 대부분을 노동에 내어준 뒤 남은 시간에 겨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글을 쓰고, 서로의 작품을 읽고, 예술에 대해 토론하는 삶 자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물려받은 것들 말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예술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는 분명 다른 문제인데, 우리는 종종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누군가를 읽지 않고도 추앙할 수 있는 시대

       

      영화가 가장 씁쓸해지는 것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젊은 모임의 구성원들은 에드에게 자신의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에드를 선배 시인이자 자신들을 평가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대한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적어도 그들이 에드의 시를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왜 이 자리에 초대받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임이 무너진 뒤 밝혀지는 사실은 허무하다. 마이어스를 제외한 이들은 정작 에드의 오래된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한 사람이 발견해 ‘대단한 시인’이라고 선언하자 나머지는 그 평가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에드는 어느 순간 모두가 존경하는 잊힌 천재가 되어 있었다.

       

      이 장면이 유독 현실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이것이 문학계에만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작품보다 작품을 둘러싼 평판을 먼저 소비한다. 누군가가 대단하다고 말하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유명한 사람이 좋아한다고 하면 관심을 갖고, 어느 집단이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인정할 이유를 찾는다. 작품을 직접 읽고 판단하는 과정은 가장 중요해 보이면서도 때로 가장 손쉽게 생략된다. 그래서 에드를 둘러싼 찬사는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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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시가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잊힌 천재 시인을 발견한 우리’라는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은 때때로 발견된 사람보다 발견한 사람을 더 빛나게 한다. 오래전 시집 한 권을 낸 우체국 직원을 다시 세상에 불러낸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근사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시를 읽지 않았으니 그 근사함의 중심에는 에드가 아니라 그를 알아본 자신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일과 예술가처럼 보이는 일

       

      그래서 영화를 보며 처음 품었던 생각은 조금 민망하게 되돌아왔다. ‘저런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어쩌면 문학 자체만큼이나 문학을 둘러싼 풍경을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좋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고, 책이 쌓여 있고, 서로의 글을 읽어주고, 늦은 시간까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는 분명 매력이 있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보며 ‘예술적인 삶’을 상상한다. 그런데 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젊은 예술가들은 그 미묘한 경계를 계속 넘나든다. 무엇을 쓰고 있는가보다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지, 무엇을 읽었는가보다 누구를 발견했는지가 중요해지는 순간 예술은 삶의 태도인 동시에 하나의 자기 연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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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점에서 에드의 삶은 그들과 묘하게 대비된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았다. 우체국에 출근해 편지를 분류했고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마이어스가 찾아왔을 때도 거창한 재기를 계획하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오래전 자신의 시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그 반가움 때문에 오래 닫아두었던 세계의 문을 잠시 다시 열어본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에드에게서 예술과 가장 가까운 태도를 보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가장 크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의 실패 혹은 포기를 하나의 서사로 포장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과거를 이용해 현재를 특별하게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화려한 말들로 문학을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오래전에 시를 썼고, 지금은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뒤늦은 명성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

       

      영화의 원제는 〈Late Fame〉, 말 그대로 ‘뒤늦은 명성’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명성은 생각보다 초라하다. 오랫동안 잊혀 있던 작품이 발견되고,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추앙하고, 출판 이야기가 나오고, 사람들 앞에서 다시 시를 읽는다. 한때 포기했던 꿈이 수십 년 만에 되돌아오는 이야기라면 보통 우리는 그 끝에서 화려한 재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기대를 거의 충족시키지 않는다. 뒤늦게 찾아온 명성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자신을 환대했던 사람들의 관심 역시 생각했던 것만큼 순수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의 시조차 읽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알고 난 뒤 에드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렇게 그는 처음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완전히 같지는 않다. 오랫동안 손에서 놓았던 노트와 연필을 다시 꺼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장면이 좋으면서도 허무했다. 영화는 그것을 새로운 출발처럼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에드가 다시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고, 이번에는 세상이 그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는 몇 줄을 쓰다가 다시 노트를 덮을 수도 있다. 그가 무엇을 쓰게 될지, 그것이 좋은 글일지, 누군가 읽어줄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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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생각해보면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창작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의 제안도 없고,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는 모임도 없고, 낭독회도 없고, 박수칠 사람도 없다. 자신의 명성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에드와 빈 종이, 그리고 연필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문학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예술은 그런 근사한 공간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곳에서 더 자주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쓰는 것, 그것을 이용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계산하지 않고 다시 한 줄을 적어보는 것. 에드에게 찾아온 late fame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명성이 사라진 자리에 아주 오래전에 좋아했던 일이 하나 남았다. 그것이 다시 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영화도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엔딩이 더 현실적으로 남았다.

       

      현실에서는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예술도 돈과 계급과 평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한때 품었던 꿈이 돌아온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간이 보상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간 뒤 에드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다만 이번에는 손에 연필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면 충분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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