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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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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맥페트리지(Geoff McFetridge)는 애플 워치 페이스, 펩시 광고판, 오레오 광고 등 유명 브랜드의 디자인을 담당하였고 나이키, 반스, 스투시부터 에르메스까지 캐주얼과 명품을 넘나드는 패션 브랜드와 협업하며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래픽 아티스트이다. 그의 작품은 깔끔한 선과 과감한 색채, 그리고 단순함 속에 숨은 위트를 특징으로 한다.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쉽게 잊기 어려운 직관적인 매력을 지녔다.

 

영화 <그녀>에서 사만다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한 것도 그의 손길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처녀 자살 소동> 같은 영화의 타이틀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그의 디자인은 우리가 모르는 새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이는 광고판,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앱의 아이콘, 혹은 거리 한가운데 붙은 작은 포스터까지. 일상의 작은 요소 안에 제프 맥페트리지의 감각이 담겨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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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는 그런 그의 화려한 작업 이력보다, 제프라는 사람이 창작과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그가 어떤 과정으로 작업을 진행하는지, 그의 대표작들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다만 제프 맥페트리지라는 인물이 살아온 궤적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집중한다.

 

그는 ‘밴드 티셔츠를 디자인하면 무대에 서지 않아도 그 무대에 참여하는 것이며, 예술가는 작업물에 이름을 쓰지 않아도 작업 그 자체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업을 단순한 직업이나 상품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그의 태도가 잘 드러난 대목이다. 작품에 대한 그의 자신감과 책임감도 묻어난다.

   

영화 속 제프의 곁에는 그의 아내 사라가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예술과 생계 사이에서 고민했다. 하지만 사라는 주저 없이 그에게 예술을 하라고 북돋아 주었고, “예술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이 말은 그의 창작 철학을 세우는 기둥이 되었고, 자신감을 심어준 결정적 순간이었다.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예술적 동반자이자 정신적 멘토인 셈이다. 그는 사라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이렇듯 화목한 가정과,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커리어를 두루 갖춘 그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면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작품을 꺼내 제작진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림 안에는 지하 벙커 안에서 식탁에 둘러앉은 그의 가족이 있다. 자신의 그림을 들여다보던 그는 갑자기 눈물을 보인다.

 

그 작품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제프의 두 딸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자, 이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아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두 딸은 슬픈 이별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큰 아픔과 상실을 가족이 함께 나누는 그 순간, 제프는 역설적으로 ‘가정 안에서 보호받는 감각’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이를 바깥세상과 단절된 지하 벙커의 식탁 풍경으로 옮겨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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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통해, 그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와 감추고 싶을 수 있는 부분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성숙한 예술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기에 작품을 보고 그렇게 눈물지을 수 있다. 이런 솔직함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내면을 다듬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라고 하면 뒤죽박죽한 생활, 예민함, 혹은 세상과의 불화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제프 맥페트리지는 전혀 다르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러닝을 즐기고, 햇빛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화사한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는 딸들과 함께 웃으며 춤을 출 줄 아는 다정다감한 아버지이며, 자신을 몰아세우고 현재에 몰두할 줄 아는 예술가이고, 동시에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들 줄 아는 비주얼메이커(visual maker, 영화 내 맥페트리지의 표현에서 발췌)이다.

 

한 사람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모두 보게 되면 그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제프 맥페트리지를 잘 몰랐지만, 지금은 그의 작업뿐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까지 애정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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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는 세계적인 그래픽 아티스트의 성공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어떻게 웃고, 울고, 달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지를 담담히 따라간다. 제프 맥페트리지의 그림과 디자인은 그 모든 순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단순히 멋진 이미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기분이 든다. 예술은 결국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창구라는 것. 이 영화는 이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증명한다.

 

이것은 제프의 사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통로이며, 창작자가 세상에 던지는 작은 메시지이자 관람자가 그것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창구다. 그림, 음악, 문학, 영화 등 형태와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은 사람의 삶과 감정을 담아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창작자를,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한다. 예술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경험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이자 삶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설 때쯤, 우리는 조금 더 제프를, 그리고 조금 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제프 맥페트리지의 이야기를 담은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는 2025년 8월 13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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