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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전공 수업을 들을 때마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류의 역사는 길고, 수업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한 줄짜리 짤막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필연적으로 쌓여가고, 나중에 직접 찾아봐야지 하는 생각은 과제와 시험으로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쉽게 잊힌다. 이원율의 <위험한 그림들>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그 한 줄짜리 문장들이 이야기가 되고, 그림으로 시각화되어 한 권의 책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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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연대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한 인간, 한 시대가 극한의 선택 앞에 섰던 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탄탄한 사료 위에서, 역사가 침묵하는 빈틈은 근거 있는 상상으로 채우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작하는 글'에서 작가가 건네는 말이다. 첫 번째 순간,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부터 작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짧은 단편, 혹은 소설의 줄거리를 단숨에 읽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맞아. 내가 이래서 역사를 좋아했었지.


책에 실린 그림들과 마주하며 오히려 나의 기억들을 되짚게 되었다. 크리스토파노 델 알티시모의 <살라딘의 초상화>를 보면서는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살라딘과 리처드에 대한 역사책을, 쥘 외젠 르네프뵈의 <갑옷을 입은 오를레앙성의 잔 다르크>에서는 중학생 때 보았던 잔 다르크를 다룬 만화를 떠올렸다. 에마누엘 로이체의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은 수능 세계사를 공부하며 미국 독립의 역사를 열심히 외우던 순간을 생각나게 했고, 일리야 레핀의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을 통해 올해 초 읽었던 질병의 역사에 대한 책을 복기하게 됐다. (아들까지 살해한 이반 4세의 광기가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연대기의 강박에서 벗어난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이 그림을 통해 조망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역사가 아니다. 단지 그 오랜 세월의 순간에서, 불현듯 화폭에 담긴 이야기들을 포착해낸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전공 수업에서도 한 줄짜리 문장으로 나오고 그쳤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는 한 장(章)을 가득 메우는 주체가 된다.


예컨대, 드니 푸아이아티에의 조각으로 보는 스파르타쿠스의 난. 아직도 버리지 못한 세계사 수능특강 한 부분에는 겨우 이렇게 적혀 있을 뿐이다.

 

 

② 로마 공화정의 위기

• 정치적 혼란 : 귀족파와 평민파의 권력 투쟁, 노예 반란(스파르타쿠스의 난) 등

 

 

그리고 날개 부분에 짧게 설명이 등장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난

기원전 73년 검투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동료들을 이끌고 로마에 맞서 봉기하였다. 이 사건은 약 3년 동안 지속되면서 로마 사회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원율 작가는 몇 장에 걸쳐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에 담긴 당시 로마 검투사들의 현실,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경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의 승리, 크라수스 군과의 전투와 스파르타쿠스의 전사. 2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그들의 마음을 어렴풋 짐작해보려 애쓰게 되다. 결연하게 서있는 듯한 조각상 사진을 마주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불과 백몇십 년밖에 지나지 않은 동학농민운동도 떠올리게 된다. 연대기의 강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런 뜻일까. 2천 년이 넘는 옛 이야기와 2백 년도 되지 않은 근현대가 만나고 머릿속에서 겹치다가 다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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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어떠한가. 수능을 준비하면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전공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겨우 9일 만에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십대 후반의 나이에 끝내 사형당한 소녀. 마치 그 삶처럼, 너무 방대한 연대기 앞에서 이름을 갖지도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눈앞에 있다.


불현듯 단종이 떠올랐다. 그들이 살아온 삶은 전혀 다르지만 어른들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은 지독하게 똑같다. 단종의 사망은 1457년, 제인 그레이의 사망은 1554년이다. 백여 년의 차이를 두고 동양의 소년과 서양의 소녀는 때이른 잠에 들어야 했다. 그림 속 눈이 가려진 제인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문득 영화 속 단종의 슬픈 눈을 떠올리고 멈칫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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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의 경계를 넘어 만나는 그림 속 역사는 어렵지 않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그 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 피차 인간이기에, 때로 시대와 대륙을 초월하여 만나고 겹쳐지는 이야기들.


역사라는 단어에 얽메이지 않고 다만 책의 그림들을 따라가자. 그 순간순간들이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만났던 기억들, 내가 이미 알고있던 누군가의 삶들. 그림을 보다보면 살아가며 잠시 묻어두었던 그런 파편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그 모든 파편들을 모아 역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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