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타인의 삶
예술과 인생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보는 관객이자 행동하는 주체로서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바라보게 되며, 때때로 이를 통해 변화할 힘이 생긴다는 것. 우리의 삶은 예술을 통해, 타인의 존재를 통해 선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악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인생이란 무대를 구현한 연극 <타인의 삶>에도 언제나 내가 아닌 타인이 존재한다. 특히 주인공 ‘게르트 비즐러’는 그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것이 임무이며, 심지어 ‘청각’으로만 이를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제약까지 존재한다. ‘듣기’로만 타인의 삶을 재구성해야 하는 드라이만의 상황은, 한정된 시공간 속 주어진 장치들로 나머지 여백을 상상하는 연극 관객의 상황과 닮아있다.
<타인의 삶>의 막이 오르면, 관객은 마주 보게 놓인 두 개의 의자를 만난다. 주인공 비즐러는 대학에서 죄수 227번을 그 의자에 앉혀 손깍지를 접어 다리 아래로 넣어두게 하고 몇 시간이 넘도록 심문하여 진실을 털어놓도록 하는 과정을 재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관객 또한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 된다. 우리가 그 수업을 들으며 느낄 수 있는 것은 비즐러에게 결여된 것이 ‘공감’이라는 점이다. 비즐러에게 완벽하게 타인인 심문 대상의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타인의 삶’은 심문을 끌어내기 위한 이용 대상일 뿐이다. 그루비츠의 손에 이끌려 보러 간 연극을 쓴 극작가 드라이만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비즐러는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루비츠와, 마찬가지로 건너편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드라이만으로부터 같은 인상을 받는다. 드라이만에 대해 비즐러가 내린 첫 평가는 ‘오만하다’라는 것이었다. 당의 지시로 공연 내내 달린 깃발에 불만을 표하고, 연극 <공장의 안티고네>를 쓴 사람. 비즐러에게 드라이만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무언가를 내면에 감춘 존재이며 그의 삶은 감시가 필요한 대상에 불과했다.
극중 드라이만이 쓴 것으로 설정된 연극 <공장의 안티고네>는 손상규 연출이 재구성한 가상의 작품이다. 국가의 법과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티고네’는 공연에서 공장장을 향해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질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규칙’이라니? 내가 무서운 건 당신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무관심이야. 우리는 기계가 아니에요. 우리 한 명 한 명은 숫자가 아니라, 부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요! 그걸 보지 못한 당신은 - 당신이 아무리 잘못이 없다고 해도, 당신이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도 - 이 비극의 동조자야!”
그 손가락질은 마치 박스석에 앉아 있는 비즐러에게 향하는 것처럼 연출된다. <안티고네>는 비즐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며, 이를 통해 체제의 명령에 충실했던 비즐러가 유지해 온 ‘연약한 존재에 대한 외면(혹은 무지)과 인간성의 부재’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드라이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체제에 순응하기를 택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자들과 어울리며 저항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에둘러 희곡으로 써냈다. 사건들 이후로 연이어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비극을 통해 각성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순응, 좌절, 각성, 저항의 흐름에서 두 사람은 제법 닮은 구석이 있는 타인이다.
Ⅱ. 타인의 관계
밀착 감시를 하던 비즐러는 햄프와 크리스타의 관계를 목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서에 기록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는 기록하지 말고 따로 자신에게만 보고하라는 그루비츠의 말에 이내 수긍하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의 ‘개입’을 택한다. 크리스타가 햄프의 차에서 내리던 순간에, 드라이만이 그 광경을 목격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 연인은 숨겨왔던 불편한 진실을 불현듯 마주하게 된다.
연극 <타인의 삶>은 목격 이후의 상황을 두고 "비즐러의 ‘예상과 반대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고요한 침묵과 뜨거운 포옹으로 서로를 위로했다."라고 서술한다. ‘예상과 반대로’라는 부분이 흥미롭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인간의 공감과 연대를 마주한 순간이라면, ‘선한 영혼’을 마주한 건조한 영혼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그렇다. 방금 표현한 것처럼 비즐러는 ‘건조한 영혼’이었다. 이는 햄프 장관이나 그루비츠처럼 일관적으로 악한 영혼과는 다르다. 권력을 입은 악한 영혼은 전형적이고, 우습고, 지루하다. 그러나 건조한 영혼은 변화할 수 있고, 그렇기에 찬란하고 흥미롭다. 그래서 비즐러는 지금 시대에도 주목해 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단절과 불신이 팽배한 냉혹한 동독 - 그리고 어쩌면 현대 -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비즐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좋은 방향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드라이만 역시 과거 건조하고 예민한 영혼이었다. 그를 보듬어주고 선한 영혼으로 이끈 것이 예르스카다. 예민했던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연주를 들려주며 위로하자 이해받는 것 같았던 드라이만은 예르스카의 품 안에서 엉엉 울어버렸다고 회고한다. 그의 공감과 연민은 드라이만을 살아있게 만들었고, 다시금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은, 드라이만 뿐만 아니라 이를 듣고 있던 비즐러에게도 울림을 주었다. 음악이라는 예술과 예르스카라는 타인의 이야기가 또 다른 타인을 움직인 것이다.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지 않을까?” 드라이만이 이 말을 하는 순간, 도청하던 비즐러와 눈이 마주치는 듯하다. 연출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것으로 ‘타인의 삶이 나의 삶이 되는 순간, 혹은 경계가 섞이는 순간’을 묘사했다. 언제나 연민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슬픔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 살고, 온전히 이해받은 사람은 마침내 더 좋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해하려는 존재’ 역시 그렇다. 드라이만과 비즐러의 관계가 이를 보여준다.
Ⅲ. 좋은 사람
다시 말해 이해받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 관객의 환호성과 애정어린 시선을 받은 배우가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역시 하나의 무대 위에 펼쳐지는 연극이 아니던가. 비즐러는 국가보위부라는 무대에서 동독을 위해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배우이자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도청하는 관객이었다.
비즐러는 작전명 ‘유충 만들기’의 희생자로서 7년간 연출을 금지당한 연출가 예르스카의 삶을 읽었고, 그의 죽음을 도청 도중 듣게 된다. 그 순간, 어쩌면 처음으로 비즐러는 자신이 속한 슈타지(국가보위부)라는 '차갑고 음울한 무대'를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직접 지은 시를 멈칫거리면서도 낭독한다.
“푸른달이 뜬 12월의 어느 날 / 콘크리트 아파트 음침한 로비에서 조용히 /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네. 나의 고요하고 특색 없는 집이, / 차갑고 건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 / 그때, 축구공을 차면서 어린 소년이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네. / 동그랗고 아주 낡은 축구공 / 그리고 소년이 나를 올려다 봤을 때, -”
그 무대 갇히지 않고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된 것은 우연히 만난, 축구공을 차던 한 아이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아이는 슈타지가 나쁜 사람들이라고 들었다면서도, “근데 아저씨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확신하는 타인의 선한 믿음을 보여준다. 때로는 나를 잘 모르는 이의 믿음과 이해가 더 큰 원동력이 될 때도 있다. 그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지켜보는 사람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크리스타와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이다. 당신이 예술 그 자체이기 때문에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 위로 덕분에, 크리스타는 그날 밤 햄프가 있는 호텔이 아닌 드라이만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연민과 위로가 타인의 삶을 바꾼 (아마도) 첫 번째 경험일 것이다.
Ⅳ. 과도기
저항하지 못했던 과거의 드라이만은 예르스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죽으면 끝이니 살아는 있으라는, 무책임하고 뻔한 햄프의 말을 조금 바꾸어 “확실한 희망을 주더라고….”라고 말하며 그를 다독일 뿐. 그런 드라이만이 예르스카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그로부터 이해받았던 기억은 지금의 드라이만이 저항할 용기를 내도록 만들었다.
이후 드라이만이 ‘자살률 통계’에 대해 비장하게 읽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 장면은 예르스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독이 숨기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다룬 글이었다. 도청을 당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드라이만과 동료들은 그의 집에서 붉은색 잉크와 받은 타자기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글은 서독의 슈피겔지에 실려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큰 용기를 낸 사람이 바로 비즐러다. 그는 크리스타가 연기를 그만둘 위기에 처해 타자기가 드라이만의 것임을 고했을 때도, ‘타인을 위해’ 고발이 아닌 보호를 택한다.
그럼에도 크리스타의 죽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좌절은 비즐러보다 더 큰 존재, 즉 ‘동독 그 자체’가 만들어낸 비극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타의 투신 장면은 그 일련의 흐름이 물 흐르듯 이어져 더 충격적이다. 비즐러는 상관이 지켜보는 아래 크리스타가 타자기의 행방을 고발하도록 유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이들을 지키고자 서둘러 드라이만의 집으로 가 타자기를 훔쳤다. 그러나 직후 그루비츠가 현장 방문을 나와 정확히 크리스타가 토로한 위치의 바닥을 열어보려는 순간에, 큰 굉음과 빛이 번쩍이고,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잡을 새도 없이 뛰어내린다. 그 사이에 단 몇 초의 틈도 없다.
비즐러는 무대 앞에 쓰러지듯 앉으며 허망한 눈빛으로 ”대체 왜….“를 반복적으로 읊조린다. 대놓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비즐러가 무너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인 것도 같다. 이후 그루비츠가 받은 마지막 보고는 수기로 작성되었다. 그 종이에는 드라이만이 슈피겔지에 보낸 글에 썼던 것과 동일한 붉은 잉크가 묻어있다. 당연하게도 그루비츠는 비즐러를 의심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어 한직으로 보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비즐러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꼴이다.
Ⅴ. 지켜보던 사람
서독과 동독이 통일이 되고 다시 드라이만의 희곡이 공연으로 올라간 날, 드라이만은 공연을 끝까지 보고 나오지 못한다. 크리스타의 연기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공연 도중 극장을 나온 것은 햄프 전 장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위선적으로 크리스타라는 배우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뿐, 정작 그녀를 죽음으로 몬 행위에는 죄책감이 없다. 드라이만은 많은 말을 생략한 채 그에게 단 한 가지만 묻는다. 모두가 도청을 당했는데, 왜 자신만 도청하지 않았느냐고.
마침내 드라이만은 햄프로부터 자신이 누구보다도 철저한 감시를 당해왔음을 알게 된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드라이만을 비웃던 햄프가 나가면서 천장의 줄을 당기는 시늉을 하는 순간, 그동안 드라이만을 추적해 온 도청기기의 선들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린다. 그중 하나를 잡아 당겨보자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드라이만은 경악하고, 절망한다. 감시당했던 그 기나긴 세월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드라이만은 자신을 도청한 기록을 요청한다. 파일 하나를 받으며 그나마 얼마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양옆으로 쏟아지는 나머지 대량 파일들과 나부끼는 수많은 문서가 눈앞에 펼쳐진다. 드라이만은 허탈한 심정으로 하나를 주워 읽어보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 사랑, 예술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기록되어 있는 기록을 읽으며 힘겨워하던 그는, 좌절의 부분에 이르러 가짜 보고서를 써준 동일한 감시자로부터 계속해서 보호받아 왔음을 알게 된다.
공모를 하고 있던 순간이 전부 희곡을 쓰는 순간들로 덮어씌워져 있는 가짜 기록, 그리고 마지막 비즐러의 보고에는 ‘수기로 두 번 고쳐 쓰고 빨간 잉크가 남아 있는 흔적’이 있다. 이내 드라이만은 타자기를 숨긴 남자를 마주했던 찰나를 기억해낸다. 그제야 드라이만은 깨닫는다. HGW XX/7이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둘이 부딪히는 장면은 전과 동일하게 반복되지만, 비즐러가 타자기를 훔쳐 가방 안에 넣는 직접적인 장면은 드라이만의 자각 이후 보여진다. 반복과 변주, 그리고 찰나의 번뜩임으로 연출이 묘미를 제대로 살린 부분이다.
비즐러의 가짜 보고서 내용이 펼쳐지고 드라이만이 감시자에게 사실은 보호받아 왔음을 알게 되는 장면은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난 희곡을 쓴 적이 없습니다!”라는 드라이만의 경탄, 해당 대사를 기점으로 비즐러가 꾸며낸 보고를 위한 희곡 이야기가 윤나무 배우의 열연으로 한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진다. 작가도 아닌 자가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사까지 짜내어 만든 그 연극이, 관객이 울게 만든다.
Fin. 지켜주는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게 되면, 필연적으로 애정이 따라온다. 고요한 관찰 끝에는 시끄러운 감정들이 남는 법이다. 게르트 비즐러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는 게오르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를 '들었고', 지켜보는 사람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공연을 보는 우리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일까. <타인의 삶>을 선보인 손상규 연출은 연극의 제한적인 특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이를 공연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물리게 만들었다. 배우로서도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는 만큼, 이번 연출을 할 때도 인물 내면의 감정을 끌어내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는 윤나무, 장승조, 임수향, 김정호, 이호철, 박성민 캐스팅이었다. 총 6인의 배우가 등장하며 한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기도 한다. 그중 게르트 비즐러 역의 윤나무 배우는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 실력을 입증했고,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통해 홀로 무대 위에 서며 다시 한번 실력을 증명했다. 그는 분명 혼자서도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있는 배우다.
이번에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침묵과 눈빛만으로 복합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윤나무 배우의 에너지는, 관찰자로서 조용히 지켜보아야 하는 배역의 특성을 살리는 연출과 조화를 이루었다. <타인의 삶>에서 윤나무 배우는 건조하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그의 연기에서는 비즐러 내면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사회주의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던 그는, 타인의 삶에 녹아있는 슬픔, 아픔, 죽음, 그리고 사랑과 연대를 마주하면서 공감과 이해를 알아간다. 배우는 정교한 연기술로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며 눈가에 슬픔이 고이고 동공이 확장되다가 조용히 한 방울의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순간을 구현해낸다. 덕분에 한없이 건조하던 비즐러의 영혼이 가랑비에 젖듯 점점 촉촉해지는 것이 관객에게도 닿는다.
“예술은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이해는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타인의 삶은,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공연을 마칠 때쯤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게 되면, “나는 그동안 얼마나 큰 보호를 받아온 것인가!”라는 드라이만의 대사는 큰 울림을 준다.
드라이만은 그를 찾아가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본다. 비즐러가 드라이만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처럼, ‘관객의 관객’이 되어 그를 상처입히지 않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대신에 드라이만은 몇 년 뒤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보호한 비즐리에 관한 책을 출간한다. 비즐러는 그 책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바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가 “이건 저를 위한 선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연극<타인의 삶>은 끝이 난다. 이 이야기가 인생의 관찰자인 ‘관객’을 위한 이야기라고 밝히면서. 여기서 ‘저’는 일평생 드라이만의 삶을 지켜보던 관객 비즐러를 지칭하므로. 이 연극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들이 섞여 만들어가는 관계의 힘에 대해 말했다. 선의로 이어진 관계는 이토록 끈질기게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