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Opinion] 여성의 삶과 노동을 다시 읽기 - 연극 '역행기' [공연]

'역행기'가 그려내는 여성과 노동

by 노미란 에디터
2026.09.14 12:28
이 브라우저에서 최근 읽은 글입니다.
      이전에 읽던 글입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은, 그 사람이 살아온 경험을 나열하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삶이 어떤 시대와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

           

      연극 ‘역행기’는 여성의 노동과 삶을 수메르 신화와 엮어 풀어낸다. 수메르 신화 속 여신 인안나는 지하 세계를 정복하려다 저승의 여왕이자 자신의 자매인 에레쉬키갈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후 다시 살아나 지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대신해 지하 세계에 남을 존재가 필요했고, 인안나는 자기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던 남편 두무지를 그 자리에 남긴다. 그러나 극에서 재구성된 인안나는 강력한 여신이 아니라, 스스로 땅에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무력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자신을 대신해 지하 세계에 남을 사람을 데려올 수도 없으며, 자신도 그곳에 남고 싶어 하는 인안나는 자신의 상황을 바꿀 힘조차 갖지 못한 개인이다. 그런 인안나 앞에 기억을 잃은 채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는 할머니, 엄마, 언니가 나타난다. 이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안나를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131.jpg


       

      무력한 개인이었던 인안나의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확장된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는 여성의 노동과 돌봄 문제로 연결된다.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한 엄마 밑에서 자란 주머니,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결국 미싱 일을 하게 된 에레쉬, 백화점에서 웃으며 물건을 팔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핑크, 그리고 여러 일터를 오가다 결국 자신의 방에 갇혀버린 인안나까지. 이 여성들의 삶에는 시대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 여성 노동의 문제가 겹쳐 있다.

       

      그렇기에 인안나가 자신이 발붙이고 있던 집의 바닥으로 내려오는 일은 단순히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움직임만이 아닌, 바닥 아래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를 의미한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가족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들은 끊임없이 위로 움직였다. 그러나 현실과 여성이기에 주어진 제약은 이들을 계속해서 바닥으로 밀어낸다. 결국 바닥 아래에 도착한 이들의 이야기를 인안나가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묻혀 있던 이들의 삶을 밖으로 꺼낸다. 역행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인 동시에 이미 지나가 버린 여성들의 삶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무대 연출은 바닥 아래의 신화 세계를 구체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관객의 상상에 많은 부분을 맡기는 전략을 택한다. 무대 위에는 극의 초반과 후반부에 움직이며 상승과 하강을 나타내는 장치만이 존재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여러 밀실과 쓰레기 산과 같은 공간, 키갈과 같은 환상적 존재는 직접 보이기보다는 극 중 서술자이자 기록자인 둡을 통해서 제시된다. 인물의 행동 역시 배우가 그대로 재현한다기보다는, 특정 동작을 반복하는 배우에게 둡의 서술이 행위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배우의 제한된 동작은 극중 인물이 바깥세상에 있었을 때 여성 노동자로서 겪었던 경험을 보여준다. 제한된 동작을 반복하는 배우와 비어 있는 무대는 이들의 실제 모습과 무대 위 모습을 대조해 바라보게 만듦으로써 환상 속 세계에서도 여전히 얽혀 있는 속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한다.

       

      텍스트와 무대 위 재현의 불일치는 관객이 끊임없이 극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동시에, 상당한 피로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작품은 구체적인 재현 대신 보이는 모습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관객이 상상으로 채우도록 한다. 덕분에 기억이 대부분 지워진 채 희미한 감정과 생각만이 남은 인물들의 현재를 단순한 서사로 환원하지 않고 바라보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잠깐이라도 극의 리듬을 놓치는 순간 이야기를 따라잡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중간 돌멩이의 장면처럼, 관객이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는 대사들도 있었다.

       

      이 과거의 모호하고 애매한 서사와 장면을 확실하게 엮어 주는 존재가 극 중에서 서술자이자 기록자로 등장하는 ‘둡’이다. 인안나는 지하 세계에서 나온 후 가족과 자신의 이야기를 둡에 기록한다. 둡은 희미해진 여성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으며, 동시에 관객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나의 매체이다. 인안나의 여정에 둡은 늘 함께하고 있으나, 둡은 이들의 삶을 함께 경험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모든 일이 끝난 후 이를 기록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인물의 현재를 함께 살아간다기보다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읽는 듯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KakaoTalk_20260914_092125900.jpg

       

       

      거리감이 존재함에도, <역행기>의 이야기에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본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여성의 노동과 더불어, 이들은 서로에게 어머니이거나 딸이거나 언니였지만, 동시에 각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했다. 어머니, 아내, 딸로만 여겨지고 싶지 않았고, 가족에게 자신의 삶을 완전히 내어주고 싶지 않았던 이들은 끝까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대립한다.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도 인안나를 바깥으로 보내기로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벌어졌던 일이 다음 세대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결국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것은 완전한 이해도, 과거의 상처에 대한 해결도 아닌, 다만 자신이 겪은 일을 다음 사람에게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라질 수 있었던 누군가의 삶을 다시 기록해 남겨두려는 마음. 이것이 ‘역행기’에서 이야기하는 여성 연대의 한 모습이다. 신화 속에서 죽음을 맞았던 인안나는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 지하에 남겨두는 대신,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위로 올라간다. 그렇게 <역행기>의 ‘역행’은 과거로 내려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바닥에 남겨졌던 여성들의 삶을 현재로 다시 끌어올리는 일이 된다.


       

      노미란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ART insight]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행복들
      2. 02 [Opinion] 낭독극의 매력에 대하여 [공연]
      3. 03 [Opinion]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무대를 위해 [공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