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수), 제29회 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2026에서 열혈예술청년단의 <바디 그라데이션>을 관람했다.
2000년 창단된 열혈예술청년단은 실험과 도전을 모토로 장소 특정적 공연과 기술 융복합 공연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선보인 <바디 그라데이션>은 춤을 구성하는 움직임과 신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어떤 것이 춤인가'를 하나의 정의로 고정하기보다 춤과 춤 아닌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단계를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실제 공연에 앞서 관객은 먼저 전시 공간을 지나게 된다.
전시장에서는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가상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실제 퍼포머의 나이와 경력, 전공, 의상 등의 제한된 정보를 AI에 입력하고, AI가 나머지 신체적 특징과 움직임을 추론해 존재하지 않는 무용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상 속 무용수에게서는 섬세하게 드러난 근육과 길고 균형 잡힌 팔다리, 유연하고 아름다운 움직임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무용수다운' 모습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는 실제 퍼포머의 신체를 충실하게 재현한 결과가 아니다. AI가 축적된 학습 데이터를 토대로 결여된 정보를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성별과 나이, 인종, 직업, 예술 장르를 둘러싼 기존의 이미지와 고정관념까지 함께 반영된 결과다. 다시 말해 이 '무용수다운 몸'은 누군가의 실제 몸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무용수에게 덧씌워온 시선들의 합이었다.
전시는 그렇게 실재하는 퍼포머와 AI가 상상해낸 퍼포머 사이에 놓인 간극을 먼저 보여준다. 동시에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어떤 신체를 보고 '무용수다운 몸'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것도 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연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오히려 무용수들의 미세한 움직임에 집중하기 좋았다. 기타 소리와 함께 시작된 공연에서 처음 등장한 무용수들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춤'이라고 부르는 움직임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동작은 단순했고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다.
일상적인 몸짓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일상의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부자연스럽고, 그렇다고 명확하게 춤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마치 행동과 춤 사이의 어느 중간 지대에 머무르는 듯했다.
그러던 중 한 무용수가 순간적으로 넘어졌다. 얼핏 보면 실제 실수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넘어진 몸은 그대로 다음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실수인지 안무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던 하나의 사건이 어느 순간 춤의 일부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 전시장에서 본 것이 안무 없이도 이미 완결된 '무용수다운 몸'이었다면, 지금 눈앞의 몸은 정반대로 실수와 우연까지 끌어안으며 그 자리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동시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 움직임을 보며 다시 질문하게 됐다. '이것도 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형화된 안무를 벗어난 이 몸짓 앞에서, 자연스레 이사도라 덩컨이 떠올랐다.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꼽히는 덩컨은 정형화된 발레의 형식에서 벗어나 인간 신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다. 그러나 <바디 그라데이션>에서 마주한 움직임은 그보다도 한층 일상적인 행위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했다.
덩컨의 춤이 자유로운 움직임이면서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어진다면, 이 작품의 움직임은 때때로 의도적으로 끊기고 어긋난다. 걷거나 쓰러지는 것처럼 춤의 어휘로 쉽게 분류하기 어려운 행위까지 무대 위로 들어온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몸짓 역시 춤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겹쳐지고 흩어지는 몸
이후 작품의 제목인 '바디 그라데이션'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듯한 장면이 등장했다.
두 무용수가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에서 움직였다. 투명한 막을 통과한 두 신체의 윤곽은 서로 겹쳤다가 다시 흩어졌다. 한 사람의 몸 위에 다른 몸의 움직임이 잔상처럼 겹쳐지면서 어느 한 사람에게 속한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체가 나타났다.
앞서 전시에서 본 AI가 '무용수다운 몸'을 비교적 선명하고 완결된 형태로 구성했다면, 이 장면에서 실제 인간의 신체는 오히려 자신의 경계를 잃어갔다. 하나였던 몸은 다른 몸과 겹치며 복수의 몸이 되었고, 각각의 신체는 서로의 움직임에 의해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 순간 '바디 그라데이션'이라는 제목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라데이션은 단순히 하나의 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는 과정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한 몸과 다른 몸의 경계, 개인과 개인의 경계 역시 선명하게 나뉘지 않고 서로 스며들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추상미술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무엇을 표현하는지 하나의 형태로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겹쳐지고 흩어지는 신체의 윤곽과 움직임 자체가 특정한 감정과 인상을 만들어냈다.
움직임도 그라데이션된다
그라데이션 장면을 지나면서 무용수들의 움직임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초반의 작고 일상적인 몸짓은 점점 크기와 속도, 강도를 더했다. 단순한 행위처럼 보였던 동작은 복잡해졌고, 무용수들의 움직임에서는 이전보다 강한 에너지와 감정이 느껴졌다. 초반에는 춤인지 행동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던 신체가 점차 우리가 보다 쉽게 '춤'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이동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격렬함이 커질수록 몸이 오히려 전시장 속 AI의 몸과는 점점 더 멀어져 보였다는 점이다. AI의 몸이 처음부터 완성된 이미지로 주어졌다면, 이 몸은 격렬해질수록 더 예측 불가능해지고 더 자기만의 것이 되어갔다.
제목 그대로 움직임 자체에도 하나의 그라데이션이 존재하는 듯했다.
일상적인 행위에서 시작해 춤과 행동 사이의 모호한 움직임을 거쳐 보다 복잡하고 격렬한 춤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변화에는 어디서부터 춤이 시작됐다고 명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연에 앞서 만난 AI는 오히려 처음부터 누구보다 '무용수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길고 균형 잡힌 신체와 유연한 움직임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춤다운 것'의 특징을 충실하게 보여줬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살펴봤듯 누군가의 몸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 쌓인 편견과 이미지가 빚어낸 몸이었다.
반대로 실제 무용수들의 신체는 걷고, 넘어지고, 멈칫거렸다. 다른 신체와 겹쳐 자신의 윤곽을 잃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격렬한 움직임으로 변화했다. 완성된 하나의 신체라기보다 다른 몸과 공간, 움직임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새롭게 구성되는 몸에 가까웠다.
이처럼 인간의 몸을 독립되고 완결된 하나의 주체로 보는 대신 기술과 공간, 다른 신체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구성되는 것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포스트휴머니즘의 문제의식과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전시장의 AI가 편견을 고정된 형태로 완결시켰다면, 무대 위의 인간은 그 반대편에서 자신을 계속 미완의 상태로 열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바디 그라데이션>을 인간과 AI 중 어느 쪽이 더 '진짜 춤'을 추는가의 문제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AI가 만들어낸 몸과 실제 인간의 신체를 나란히 놓으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몸'과 '춤'의 기준 자체를 흔든다.
AI의 움직임은 춤처럼 보인다. 반면 인간의 움직임은 때때로 춤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춤을 결정하는 것은 아름답고 완성된 동작일까,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이라는 주체일까, 혹은 그 움직임을 춤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시선일까.
<바디 그라데이션>은 어느 하나를 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춤과 춤 아닌 것, 인간과 비인간, 하나의 몸과 여러 몸 사이를 오가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계를 펼쳐놓는다.
결국 공연을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하나의 선명한 답이 아니라 그 모호한 중간지대였다.
'몸은 어디까지 하나의 몸일 수 있으며, 움직임은 어느 순간부터 춤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