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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환희의 얼굴'은 인물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섬세하게 다뤄낸다. 2시간 가량의 상영시간 동안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라는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주인공 환희는 사랑스러운 연인이기도, 안쓰럽고 정감 가는 제자이기도, 어쩔 땐 눈치 없고 소름 끼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의 행동과 말투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은 마치 소설의 챕터를 넘기듯 에피소드 형식으로 전개된다.
1장 소설가의 집
환희는 평소 존경하던 작가 난영의 집에 찾아가서 속 얘기를 터놓는다. 난영은 환희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며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언뜻 보면 그녀의 직업이 소설가가 아닌 심리 상담사처럼 비추어 보일 정도다.

환희의 고민은 남자 친구가 유학을 떠날 지도 모른다는 것. 수년 간의 유학 끝에 제주로 돌아오면, 환희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지만 믿을 수가 없다. 헤어져야 하는지, 계속 만나야 하는지 고민인 환희. 20대 연애에서 흔히 할 법한 고민이다. 난영은 환희에게 '패배자의 수호신'이라는 의미가 담긴 부적 키링을 건넨다. 여행길에서 산 키링이라고 말하는 난영. 환희는 고맙다며 난영의 집을 나서지만, 그날 밤 되돌아와서는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거절하는 난영에게, 환희는 키링을 다시 돌려준다.
"이건 선생님께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난영, 키링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린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제주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지만, 환희가 마주하는 얼굴들은 매섭고 뾰족하다. 환희는 그들의 모서리에 찔리기도, 찌르기도 하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낮은 돌담길, 파란 하늘, 맑은 바다가 화면에 담기지만, 그 정중앙에 서 있는 환희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환희는 난영을 기댈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난영 또한 자신이 환희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자 한다. 정확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딱, 거기까지인 관계. 환희가 돈을 빌려달라고 얘기하는 순간부터, 난영에게 환희는 더 이상 안쓰러운 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돈을 빌리기 위해 '허리가 다쳐서 아르바이트를 못 나간다'라는 거짓말을 하는 영악한 여자애일 뿐이다.
나쁜 뜻이 아니라며, '패배자의 수호신'이라는 의미의 키링을 건네준 난영. 정작, 환희가 자신에게 키링을 돌려주자 몹시 기분 나빠한다. 둘 중 누구도 잘못했다고 볼 순 없지만 묘한 불편함이 감돈다. 씁쓸한 기운을 머금고 영화는 다음 챕터를 향해간다.
2장 프랑스 요리처럼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챕터다. 환희는 2년간 일하던 백반집을 그만두고, 프랑스 디저트를 취급하는 고급 레스토랑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오래도록 일해온 주방장 기정은 환희를 살뜰하게 챙긴다. 음료수를 마시라며 권하고, 아침을 차려준다. 환희는 그런 친절이 어색하지만 웃으며 받아들인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는가 싶던 어느 날 낯선 손님이 찾아온다. 백인 남성과 함께 들어온 젊은 여자. 아직 영업 전이라 안내하는 환희에게, 그녀는 알고 있다는 듯이 '사장님을 만나러 온 것뿐'이라고 얘기한다.
"저 여기서 일했었어요."
여자는 자신이 이곳에서 꽤 오래 일했던 직원이라 소개하며, 자리를 비운 사장님에게 쪽지를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쪽지에는 불어가 쓰여 있다. 여자가 떠난 후, 기정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기정은 여자가 자신의 일자리를 대체할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기정을 연기한 황미정 배우의 연기가 작품에서 가장 돋보였다. 서운함을 애써 참는 목소리, 두려움을 억누르는 떨림, 홀로 술을 마시며 지새우는 밤까지. 모두 현실에 있을 것만 같아서 눈물이 났다. 기정을 응원하며 영화를 감상하는데, 다행히도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 단언한 기정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환희가 자진하여 일을 그만둔 것이다. 앞선 챕터에서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불안함을 쏟아냈던 환희가, 기정 앞에서는 꽤 의젓하고 담담한 어른 같아 보인다.
3장 꿈과 희망의 나라
환희는 남자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 좁은 침대에서 꼭 붙어 자고, 주부습진으로 빨갛게 까진 손에 연고를 발라가며 치료한다. 남자 친구 앞에서 환희는 사랑받는 평범한 여자 같다. 적당히 철없고, 적당히 성숙한. 그렇게 깨려야 깰 수 없을 것만 둘 사이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남자친구의 엄마가 갑자기 집에 찾아온 것.
환희는 그녀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 애써 유지해 온 일상을 깨트릴 것만 같다. 환희의 불안은 현실이 된다. 그녀는 이렇게 살지 말고, 유학을 가라며, 7,000만 원 상당의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주고 떠난다. 환희는 남자 친구가 잠든 사이, 몰래 통장과 인감도장을 챙겨 은행으로 향한다.
누구를 만나든 밝게 인사를 하고, 남자 친구를 사랑해서 불안해했던 환희가 그의 통장을 들고 떠나는 장면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과연 환희는 7,000만 원을 인출해서 달아날까? 아니면, 도로 제자리에 돌려놓을까.

그들이 사는 집 벽에 걸린 에펠탑 사진을 보면, 프랑스에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단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남자 친구가 진짜로 프랑스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둘 사이에 미묘한 균열이 생긴다.
환희가 말하는 꿈과 희망의 나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환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자세한 건 영화를 통해 확인하길 권한다.
4장 환희의 얼굴
마지막 챕터에서 환희는 빨간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있다.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 창백한 겨울이라지만,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제주를 떠나 서울에 왔다. 작은 독립 서점에서 주최한 낭독회에 참가하려 했지만, 소설책을 읽느라 지각해 버렸다. 주인장은 그녀를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낭독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환희.
낭독회가 끝나고 몇 안 되는 독자들이 떠나간다. 환희는 조심스레 작가를 만나러 들어가는데, 환희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작가는 다름 아닌 난영이다.
처음에는 환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난영,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누구세요…?"
영화에서 '4년이 흘렀다'라는 것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이 장면을 보고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관객을 당황케 하려는 감독의 의도였을까?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초반에는 난영이 환희를 끝까지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4년 흘렀고 둘의 마지막 인사가 좋지 않았으니 구태여 기억 속에 남기지 않을 법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둘은 어색한 대화를 이어간다. 환희는 그녀의 신작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너무 좋았다며 칭찬을 늘어놓는다. 난영은 솔직히 독자들이 이번 신작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고, 책방 주인장 지인들이 온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어쩐지, 4년 전보다 솔직해진 난영이다. 환희와 난영의 역할이 뒤바뀐 것만 같다. 난영은 어딘가 초연하고, 환희는 들떠 있다.
환희는 혹시 자신을 생각하고 소설을 쓴 것이냐고 묻는다. 그렇게 생각되는 지점들이 많았다고. 난영은 곤란해하지만, 잔뜩 기대하는 환희의 눈망울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러곤 말한다.
그건 네가 아니야.
그렇지만 소설 속에 우리 모두의 얼굴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난영. 아쉬워하는 환희를 뒤로한 채, 난영은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헤어진다. 환희는 홀로 책을 읽으러 떠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들었던 생각은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가, 였다. 우리는 살아가며 다양한 사람을 조우하고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나에겐 나쁜 사람이 누군가에겐 천사 같은 인물일 수도, 나에게 선한 이가 다른 누군가에겐 악마가 될 수도 있는 법. 환희의 얼굴은 우리에게 한 가지 표정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일깨운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도 입꼬리를 올려 은은한 미소를 짓는 삶. 여러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난영은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이 환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쩔 땐 환희이고 어쩔 땐 환희가 아니었을 테니까.
전반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었다. 불어로 적힌 쪽지의 의미, 남자 친구와의 관계 등 꽤 여러 지점에 의문이 남았다. 작품의 여백이 매력적일 순 있으나, 한 편으로는 감독이 관객의 상상력에 거는 기대가 꽤 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감독이 모든 걸 다 말해줄 필요는 없고, 어쩌면 여운을 남기기 위해 빈 공간을 두었단 생각도 든다. '환희의 얼굴'은 화려한 영상미나 극적인 서스펜스적 요소를 지니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재현한 듯 소름 끼치게 현실적인 장면을 담아낸다.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소설을 읽는 듯한 독특한 연출과 잔잔한 흐름이 몹시 귀했다. 각 에피소드에 담긴 의문점을 풀어나가는 방식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았으나, 뒤따라오는 여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계절이 막 바뀌기 시작했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다.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더웠다가도 밤이 되면 쌀쌀해서 움츠리게 된다. '환희의 얼굴'은 지금과 같은 환절기에 어울리는 영화이다.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는 날씨처럼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못한 마음의 온도가 느껴진다. 환희의 다양한 페르소나는 내 안에 너무도 많았던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준다. 나 또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고, 환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