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글래스톤베리와 함께 영국 최고의 록 페스티벌로 꼽히는 레딩 페스티벌. 90년대 얼터너티브 브릿팝의 최정상에 섰었던 영국 밴드가 데뷔 20여 년 만에 자국 최고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섰다.
그리고 공연의 첫 곡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큰 환호와 함께 열광하며 곡의 모든 가사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곡은 평소의 셋리스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곡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객을 열광시킬 만큼 신나는 곡도 아니었다.
그 곡은 데뷔 앨범의 수록곡이자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Creep’이었다.
Radiohead 'Creep'
라디오헤드가 자신들의 최대 히트곡인 ‘Creep’을 정작 라이브 공연에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음악 팬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일화이다. 여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애초에 ‘Creep’이라는 곡 자체가 라디오헤드가 추구하던 음악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곡이었다.
그럼에도 ‘Creep’이라는 곡 하나로 인해 라디오헤드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대중들은 ‘Creep’이 라디오헤드를 대표하는 곡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공연 중 ‘Creep’만 듣고 공연장을 나가는 관객들도 있었다.
이에 라디오헤드는 음악적 커리어를 쌓아갈수록 라이브에서 ‘Creep’을 연주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공연에서 ‘Creep’을 듣는 것은 상당히 희소성 있는 경험이 되었고, 이에 관객들이 열렬한 환호를 한 것이었다. 프론트맨 톰 요크 또한 이후 한 인터뷰에서 해당 공연을 회상하며 “첫 곡으로 ‘Creep’을 연주하며 사람들이 원하는 라디오헤드가 되어 아주 제대로 해줬다”라고 언급하였다.
특히 국내에서 라디오헤드의 히트곡을 ‘Creep’ 한 곡으로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적 위상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대중들은 ‘Creep’을 제외한 라디오헤드의 곡들에 대해 굉장히 심오하고 난해하다고 평가하며, 정작 라디오헤드가 지금까지도 수많은 음악 팬들의 추앙받을 수 있게 된 명곡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Radiohead 'High and Dry'
‘Creep’이 수록된 1집 이후 발매된 2집 ‘The Bends’와 3집 ‘OK Computer’는 라디오헤드가 단순히 ‘Creep’으로 대표되는 밴드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2집에서는 ‘High and Dry’, ‘Street Spirit (Fade Out)’ 등을 통해 1집보다 한층 성숙해진 음악을 선보였다.
3집 ‘OK Computer’는 기존의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전자음악과 실험적인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라디오헤드의 음악성을 크게 확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90년대 최고의 음악 중 하나로 평가받는 ‘Paranoid Android’는 록 음악에 각종 신디사이저 텍스처를 결합한 실험적인 사운드는 물론, 쉬지 않고 이어지는 조성과 박자의 변화 등으로 기존 록의 작곡 형식을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 팬들의 사랑을 받는 ‘Karma Police’, ‘No Surprises’ 등의 곡이 널리 알려지면서 3집 앨범을 통해 라디오헤드의 이름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Radiohead 'Paranoid Android'
이후 발매된 4집 ‘Kid A’ 역시 기준의 록 음악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였음에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즉, 라디오헤드는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오해와는 달리 실제로는 대중성과 상업성까지 동시에 확보한 몇 안 되는 밴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라디오헤드의 진정한 음악적 가치는 ‘Creep’ 이후 그들이 어떠한 음악을 만들어왔는지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2009년 레딩 페스티벌에서 울려 퍼진 ‘Creep’에 관객들이 열광했던 것은 단순히 유명한 히트곡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음악적 색깔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새로운 길을 걸어온 라디오헤드가, 그날만큼은 자신들을 세상에 알린 가장 오래된 곡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순간은 ‘Creep’의 밴드로 기억되던 라디오헤드와, 그 틀을 뛰어넘어 자신들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라디오헤드가 하나의 무대 위에서 만났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