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앞에 앉으면 나는 늘 두 개의 감각 사이에 놓인다. 하나는 정겨움이다. 장단이 몸을 밀고 당기기 시작하면, 배운 적 없는데도 어깨가 먼저 반응한다. DNA 어딘가에 남아 있는, 조상들이 이 소리로 즐거워했던 흔적 같은 것. 다른 하나는 어색함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 문맥을 놓친 가사, 웃어야 할 지점을 반 박자 늦게 알아차리는 순간들. 정겹지만 낯설고, 흥겹지만 멀다. 나는 언제나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었다.
지난 8월 27일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에서 만난 정상희의 〈엇:박〉은, 그 중간지대에 서 있던 나를 한쪽으로 확실히 밀어 놓은 소리였다. 정겨움의 극단에서 시작해 어색함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방식으로.

정박을 깨는 열 개의 이탈, 그 첫 번째 무대
〈엇:박〉은 수림문화재단이 여는 공연제 '수림뉴웨이브 2026'의 문을 여는 무대다. 2017년 시작해 올해로 열 번째 해를 맞은 수림뉴웨이브는 매년 하나의 주제어를 붙들고 동시대 우리음악의 지형을 훑어 왔다. 올해의 열쇳말은 '엇'. 엇박과 엇모리처럼 익숙한 흐름을 슬쩍 비껴가면서도 중심은 놓치지 않는, 우리음악 특유의 감각을 가리킨다. 어긋남이 곧 놀이가 되는 자리. 재단은 올해 전자음향과 화려한 편성을 걷어 내고 악기와 목소리 그 자체에 집중하는 독주 중심의 무대를 택했고, 판소리·가야금·서도소리·해금·거문고·타악·생황·피리 등 각 분야에서 자기 궤도를 그려 온 열 명의 예술가가 11월 5일까지 매주 목요일 밤을 채운다. 정상희는 그 열 명 중 첫 주자다.
첫 주자의 무대가 무엇을 고를 것인가는 늘 흥미로운 질문인데, 정상희는 「흥보가」를 꺼냈다. 정확히는 「흥보가」에서 늘 악역의 자리만 배정받아 온 놀부를 꺼냈다. 주제어가 '엇'이라면, 엇나간 인물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
왜 놀부는 놀부가 되었나
〈엇:박〉의 이야기는 놀부의 죽음 이후에서 출발한다. 후생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선 놀부는 태어날 부모를 스스로 고르게 되는데,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집안을 택하면서도 정작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은 고르지 못한다. 이 대목이 정말 즐거웠다. 놀부가 집안을 물색하며 공무원 집안, 의사 집안, 연예인 집안, 부자 집안을 차례로 늘어놓고 각 집안의 내력을 능청스럽게 읊어 나가는데, 객석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판소리 특유의 나열과 과장이 오늘의 욕망 목록과 만나자 그대로 풍자가 됐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놀란 것은 웃음이 아니라 이해였다. 판소리를 들을 때 늘 나를 가로막던 벽은 순간순간 가사를 놓친다는 것이었는데,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쓰인 가사는 자막이라도 달린 듯 또렷하게 귀에 꽂혔다.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판소리 앞에서 느낀 이질감은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시차였던 것이다. 소리는 언제나 거기 있었고, 건너오지 못한 것은 말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놀부는 금수저이자 장남으로 자란다.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기대, 동생을 돌보라는 당부, 부모가 남긴 유언, 반복되는 양보. 작품은 놀부의 심술을 타고난 악덕이 아니라 축적된 결핍의 결과로 읽는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형만 믿고 살아가는 흥보의 끝없는 부탁이 오래 눌러 둔 상처를 건드리고, 그것이 마침내 욕망과 심술로 뒤틀리며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흔드는 하나의 '엇박'이 된다.
이 해석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두고 싶다. 정상희가 시도한 것은 놀부에 대한 변명에 가깝다. 장남의 부담, 비교와 기대, 애정의 결핍 같은 오늘의 감수성을 300년 전 인물에게 투영해 그의 악행에 사연을 붙이는 일.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설득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끝내 변명으로만 남을 것이다. 나는 그 양쪽이 다 가능하다는 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정직한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놀부를 용서하라고 밀어붙이지 않고, 그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들려준 다음 판단은 객석에 넘긴다.
객석이 소리를 함께 밀어 줄 때
무대 초반, 소리꾼은 관객에게 마음껏 추임새를 넣어 달라고 청했다. 그동안 정통 판소리를 볼 때면 객석은 클래식 공연장처럼 조용했고, 추임새는 고수의 몫이었다. 그런데 객석에서 "얼씨구", "잘한다"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공연의 온도가 달라졌다. 가사를 함께 따라 부르고 소리를 흉내 내 보는 시간까지 있었는데,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도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 장이 서는 날 소리꾼이 온다는 말이 돌았다면 나 같아도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달려 나갔겠구나. 판소리가 왜 그 시대의 최고 오락이었는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납득한 밤이었다.
창작이 전통에 가 닿는 자리
프롤로그부터 제4장까지 창작 서사로 달려온 작품은 마지막 5장에서 동초제 「흥보가」의 '놀보 박 타는 대목'을 원형 그대로 불러낸다. 판소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수업 시간에 한 번쯤 들어 봤을, 가장 유명한 그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순서가 만든 효과였다. 놀부의 사연을 먼저 듣고 오늘의 판소리를 지나온 뒤에 전통으로 되돌아오니, 그 소리가 생각보다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앞선 이야기가 깔아 둔 맥락 위에서 박 타는 대목의 해학과 풍자가 새롭게 살아났다. 사이사이 고수 이상화와 정상희가 주고받는 추임새의 호흡도 이 대목의 큰 재미였다.
음악적으로 〈엇:박〉은 상여소리로 시작해 상여소리로 끝나는 순환 구조를 취한다. 삶의 끝을 알리는 장송의 소리가 동시에 죽음 너머의 시작을 여는 소리가 되는 구조. 정읍과 고흥 지역의 상여소리를 전승 자료와 현지 조사로 되살려 담았고, 김연수 명창이 남긴 「각설이타령」도 복원해 주요 음악으로 썼다. 박만순에서 송만갑, 김연수로 이어지는 계보 위에서 서로 다른 지역의 소리들이 하나의 창작 서사 안에 새로 배치되는 셈이다. 이 소리들은 옛것의 재현에 머물지 않고 삶과 죽음, 전통과 창작, 비극과 해학을 하나의 장단으로 묶어 내는 서사 장치로 기능한다.

이 정도의 재구성이 가능하려면 전통을 아주 깊이 알아야 한다. 정상희는 1987년부터 김명신 명창에게 동초제 흥보가·춘향가·적벽가·심청가와 미산제 수궁가를 사사했고, 1997년부터는 채수정 명창에게 동편제 박록주바디 흥보가와 숙영낭자전, 채정례본 진도씻김굿을 익혔다. 전북무형유산 판소리 동초제 흥보가 이수자이며, 2018년 임방울국악제와 2021년 대한민국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각각 명창부 대통령상을 받았다. 2011년 첫 완창 발표회 이후 네 시간 반짜리 〈동초제 흥보가〉를 다섯 차례, 여덟 시간짜리 〈동초제 춘향가〉를 한 차례 완창했다. 그런 소리꾼이 다시 쓴 흥보가가 지금의 판소리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오래 남았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공연 앞뒤로 마련된 토크에서는 창작 의도와 고수와의 인연, 소리꾼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사회를 맡은 천재현 위원의 안내도 작품과 소리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중 한 문장이 아직도 맴돈다. 이렇게만 여러분처럼 국악에 관심이 많다면 우리 걱정은 아무 쓸모가 없을 텐데요. 객석은 웃었고 나도 함께 웃었지만, 곱씹을수록 웃고 넘길 말이 아니었다.
이런 극을 시도하는 소리꾼이 있고, 그 소리를 들으러 오는 관객이 있고, 그중에 젊은 관객이 있고, 쉬는 날 판소리 한다는데 보러 갈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있어야 한다. 이 넷이 모두 갖춰져야 걱정이 정말 쓸모없어진다. 첫 번째는 마련됐다. 정상희 뒤로 아홉 명의 음악가가 각자의 이탈을 준비하고 있고, 수림문화재단은 그 정착을 위해 십 년째 자리를 만들어 왔다. 남은 것은 관객의 인식이다.
공연을 보며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 떠올랐다. 그 정도의 각색까지는 아니더라도, 판소리가 조금 더 일상 쪽으로 걸어 들어올 방법은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정상희의 시도는 그 먼 미래를 조금 더 높은 해상도로 그려 보인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화는 멈춰 있지 않다. 어딘가에서 활발하게 진화하고 활발하게 보존되면서, 오늘의 관객을 기다리며 부지런히 과거와 대화하는 소리가 되어 가고 있다. 판소리는 이미 한참을 달려왔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정박을 비껴간 그 한 박자를, 한 번쯤 직접 들어 보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