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래 공수거는 개개인의 인생에서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진리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중요한 것을 남겨놓고 싶은 본능이 있다. 지키고 싶은 의미, 금기, 아름다움, 문화가 세월의 바람에 쓸려가지 않도록 기록하고 보존한다. 죽어서 가져갈 수는 없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 남겨 후손들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할 수는 있다. 그것의 매우 오래된 형태가 전통문화유산들일 테다. 오래 전 장인이 만든 청자와 달항아리, 아이에게 입혀 준 고운 옷, 제자에게 전수된 소리와 춤, 갓을 만드는 방법, 단청 안료의 색을 배합하는 비율, 나라의 큰 행사를 기록한 책과 그림, 성곽 그 자체와 그것의 축조 방식 기록 등이 모두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전통에 담긴 선조의 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어릴 적 배운 전통문화는-소고춤과 한복 입고 외우던 꼬마신랑,각시 춤과 부채춤을 기억하시나요…- 부정할 수 없이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현대에 들어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데에 또 하나 중요한 공을 세우는 매체가 있으니 이는 바로 사진이다. 전통문화를 이어가려면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어야 한다. (있는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보존, 연구 예산까지 마련할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는 이미지의 세상에 살고 있고, 디지털 사진은 손쉽게 퍼져나간다. ‘국가대표 문화유산 사진작가’ 서헌강은 우리 문화유산의 멋을 기록하고 그것을 알리는 일을 30여 년간 해왔다. 도서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가다>는 서헌강 작가의 직업 인생을 담았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공간의 이야기를 찍다’는 고궁, 왕릉, 성곽, 불탑이 있는 절터의 사진과 촬영기를 보여준다. 오래된 공간이 현대인들에게도 산책, 명상, 배움, 삶의 공간이 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2장 ‘사람의 이야기를 찍다’에서는 국가무형유산보유자와 종가 후손들처럼 전통문화를 직접 이어가는 이들의 노고와 정신을 소개한다. 3장 ‘유물의 이야기를 찍다’에서는 작가가 각각의 역사적 배경과 물리적 특징을 가진 유물들과 어떻게 교감하며, 각 유물의 아름다움을 어떤 기술로 포착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4장 ‘삶의 이야기를 찍다’는 서헌강 작가의 사진 인생의 시작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자산을 직업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등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서헌강 작가의 '일몰의 종묘' 사진
서헌강 작가가 말하는 사진작가의 자세는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거친 후 현장에서 기회를 잡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기다림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 끈기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일몰의 종묘 사진을 찍기 위해 5년을 기다렸다. 그가 생각하는 종묘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밤의 신령스러운 고요함이 퍼지는 가운데 신실에 촛불이 켜지자 종묘에 모셔진 영혼들이 아늑하게 기거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일몰 시간의 종묘’였기 때문이다. 종묘 공사와 맞물려 일몰 시간에도 문이 열리면서 단 5분의 시간이 작가에게 주어졌다. 작가는 조명을 활용해 촛불이 켜진 신실의 안온함을 연출하고 종묘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냈다.
책에 의하면 사진작가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포착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적정한 날씨와 시간대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노력이 바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주는 촉매이다. 어둑한 시간대에 조선왕릉을 찍어야 할 때 능 위로 소복히 쌓인 눈의 빛 반사로 한층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던가, 화성 봉수대를 찍을 때 타오르는 횃불 대신 일출의 붉은 하늘을 활용한 일이 그렇다. 단순히 눈 온 다음날, 해가 뜨는 시간을 지켜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적절한 적설량과 빛이 잘 반사되는 시간대를 알아야 했다. 불처럼 뜨거운 하늘빛을 만드는 습도 때문에 그전날 비가 내렸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작가가 문화유산 사진작가로서 가진 가치관 중 하나는 문화유산을 과거의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깊이 위에 얹어진 현대인 삶의 따뜻한 숨결까지 사진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헌강 작가의 문화유산 사진에 담긴 '과거와 현대의 공존'이라는 시각은 실제로 해당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이 문화유산이 만들어진 당대의 맥락과 오늘날까지 그것을 보존해 온 과거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할 정도로 일방적인 해석이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피사체가 되는 문화유산과의 교감과 깊은 대화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 제목이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었다.
즉 ‘우리 문화유산이니까 중요하지’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을 넘어 ‘현대와 호흡하며 교감하는 곳이니까 중요하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p.74
문화유산과 교감하지 않으면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조상들의 마음과 이야기가 담긴 문화유산을 휴식하고 놀이하는 문화로 즐기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까지 한 장의 사진에 함께 담아야 그 문화유산의 매력이 발휘된다. p.174
우리 조상들의 후손이자 현대 한국인으로서 우리 유물들에 적극성을 크게 보여도 지나침이 없을 영역은 해외반출문화재들의 환수 분야가 아닐까 한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29개국의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26년 1월 기준으로 국외 소재 문화유산은 25만여 점에 달한다.(p. 205) 비공식적으로 반출되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문화재들까지 더하면 더 많은 수가 될 테다. 그러나 문화재 환수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병인양요 약탈품임이 분명하고 박병선 박사의 발견 당시 방치되어 있던 조선왕조 외규장각 의궤조차 반환을 요청하니 떼제베 고속철도 기술을 사는 대가로 반환이 아니라 ‘영구 임대’의 형식으로 국내에 돌아오지 않았는가.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촬영할 때 서헌강 작가는 이 작업을 ‘이미지 환수’라고 부르며 막중한 사명감을 느낀다. 다시 이 유물들을 찍으러 오기도 어려운 일이라 그는 하루에 수백 점의 문화유산들을 반복적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오기 힘든 작품들, 외국의 수장고에 있어 한국의 일반 시민들이 직접 볼 길이 요원한 작품들을 혼자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휴식할 시간도 아까웠던 것이다. 이런 사명감 아래서 작업한 분들 덕분에 타국에 있는 작품들의 존재와 형태를 알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작업에 진심인 서헌강 작가의 긍정적인 영향력은 국가무형유산보유자(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의 초상 사진과 작품 사진 촬영기에서도 드러난다. 서 작가는 그 사진들을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에 실어 우리 장인들의 내력과 작품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당초 1년을 계획했던 이 코너가 인기를 끌며 4년간 유지되었고 더 많은 장인을 알릴 수 있었다. 이 시리즈의 기사는 작가의 사진전으로도 이어졌고, 국가무형유산보유자 선생님들이 새로운 구매자를 만나는 계기도 되었다. 나도 내 글로 내가 사랑하는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힘을 보태 줄 수 있다면 참 기쁘고 뿌듯할 것 같다.

필자가 화성행궁 방화수류정에 갔을 때 찍은 사진. 썸네일의 사진도 그렇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공들여 만든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시간을 최대한 늘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특히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그 욕구가 강렬해진다. 이 책을 읽으며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의 작업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전통 나침반인 윤도처럼 새로 알게 된 우리 전통도 많았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 봉분에 왜 억새가 심어져 있는지와 같은 역사 지식도 얻어갈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의 흥미로운 기술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다음에 사진전을 관람한다면 촬영과 편집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고 가서 더 즐겁고 자세하게 감상하고 싶어졌다.
작가의 오랜 직업 인생을 담은 책이라 이 후기 글에는 소개하지 못한 정보나 일화도 많다. 국내 대표 문화유산 사진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찍은 고화질 사진도 70여 장 수록되어 있어 눈이 즐거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거나, 전통 보존과 유지에 왠지 모를 애절함과 갈급함을 느낀 적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오래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공감이 갔던 문장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만 글을 마칠까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문화유산 촬영 현장에 들어설 때면 항상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간에서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그 역사의 흐름 가운데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 감격스럽다. p.170
어떻게 한 시대의 정신이 이토록 섬세하게 담아서 이어져 왔을까. 아마 그 문화유산들을 보는 사람들, 나아가 그것들이 담긴 사진을 보는 사람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pp.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