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후의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 이름을 몇 줄 읊을 줄 알지만 그 책들을 거진 다 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명성의 무게와 책의 실제 무게감 때문에 시도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단테 알리기에리가 집필한 그 유명한 <신곡>도 내게는 ‘시도가 힘든 고전’ 중 하나였다.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신곡> 연극이 올려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극은 내가 집중력과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하며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눈앞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매체다. 지루하면 덮기 쉬운 책과 달리 극장에 들어간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내용을 보게 되니 연극으로써 단테 <신곡>과의 시작점을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곡>의 줄거리에 익숙해지기만 해도 얻는 것이 있고, 고전을 현대 연극이 어떻게 소화하고 재해석하며 연출했는지를 감상하는 또 다른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또한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람한 공연들이 다들 좋았기 때문에 장소에 대한 믿음도 이번 연극을 보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나진환 연출의 연극 <신곡>은 세종문화회관 S 씨어터에서 상연되었다. S 씨어터는 본관 뒤로 넘어가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극장이었다. 지하에 파고드는 느낌이 들 만큼 길고 긴 계단은 아니었지만 세 번 쯤 꺾이는 계단을 걸어내려가며 마침 오늘 볼 연극 소재인 지옥이 흔히 지하세계로 묘사되지 않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정동환 배우의 무대 인생 55년을 기념하는 공연이기도 한 연극 <신곡>은 정동환 배우와 극단 피악의 배우들로 채워졌다. 정동환 배우는 한윤춘 배우가 분한 단테의 스승이자 인도자인 베르길리우스 역을 맡아 관록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제외한 8명의 배우들이 지옥의 형벌 집행자와 죄수 등 여러 역할을 겸하며 극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연극은 인터미션이 있는 2막 구성으로 총 상연 시간은 145분이었다. 1부는 통으로 지옥 이야기, 2부도 과반이 지옥도의 묘사이다.

산 채로 지옥에 들어온 단테를 지옥의 집행자들, 하수인들, 지옥의 유해한 기운으로부터 보호하는 이는 다름 아닌 단테의 스승 베르길리우스이다. 작가 단테가 실제로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은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시를 배운 것은 아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크나큰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를 작중 단체의 스승으로 등장시킨다.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의 존재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이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전통을 계승했음을 시사한다.* 단테의 원작이 ‘지옥-연옥-천국’으로 전개되듯 연극도 그 순서를 따른다. 2부의 후반부는 연옥과 천국에 간 단테를 비춘다. 연옥 부분은 연옥의 의미를 깨달은 단테가 그 의미를 베르길리우스에게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연옥까지만 함께할 수 있었던 베르길리우스 대신 단테를 천국으로 이끄는 이는 단테의 지고한 사랑이었던 베아트리체이다. 단테는 그녀의 인도 아래 하나님의 사랑과 빛에 대해 깨닫는다.
연극은 단테의 <신곡> 속 '기독교 관념 안의 지옥도' 재현에 제일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였다. 강렬한 몸짓을 자신들의 연극 언어로 삼는 극단 피악. 그런 피악의 배우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몇 가지 사물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며 지옥의 풍경을 구현한다. 지옥에 온 죄인들을 연기할 때 배우들은 누드톤의 옷을 입은 채다. 이 살색 붕대 같은 의상은 관객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 그들의 몸을 헐벗은 몸으로 착각하길 유도한다. 마치 서양 근세 종교화에 나오는 망자들의 영혼처럼 죄인들은 나신인 상태다. 아무런 방어력 없는 비루하고 상처 입은 몸들은 끊임없는 형벌의 고통 때문에 끝없이 꺾이고 뒤틀리며 비명을 지른다. 춤과 몸부림, 기행 사이의 동작들이 연극 내내 이어진다.
세분화된 지옥마다 형벌과 그 광경을 묘사하는 걸 보고 있자니 한국의 저승시왕도 같은 시각 전통과 <신과 함께> 같이 전통을 차용한 국내 콘텐츠도 떠올랐다. 연극 <신곡> 안에 나온 여러 지옥 중 인상 깊은 지옥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살자들이 가는 지옥이다. 단테는 지옥을 순례하다 간혹 죄인들에게 말을 건다. 그는 어떤 죄를 지어 이들이 이곳에 온 것인지, 그리고 여기에 자신과 같은 이탈리아 사람이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작가 단테가 <신곡>을 집필할 당시 이탈리아는 격한 정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 정쟁에 의해 추방 당했기 때문에 작가가 살던 현실의 어두움이 서사시 속 단테의 질문에 묻어나는 것이다. 정치가였던 창작자로서 단테는 아마도 ‘이 모든 정쟁의 끝은 결국 지옥이겠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오자면, 자살의 죄를 범한 이들이 나무가 되어 고통 받는 이 지옥에서 단테와 대화를 나눈 죄인은 두 명이다. 한 명은 생전 반역의 누명을 쓴 남성인데 그는 치욕스러운 삶을 더 이어갈 생각이 없어 자결했다. 다른 한 명은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 자해를 시작한 소녀다. 소녀는 자해에 중독되었다가 결국 자살 시도가 성공해 죽어버린 경우였다.
저 시대에도 이미 자기 파괴의 뒤틀린 쾌감과 자해 중독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이 자살자의 심리를 읽는 것이 근대 심리학 이후로 가능했을 거라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연극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이지만, 나는 이 부분을 통해 사람 사는 것은 시대와 지역을 떠나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파악된 심리를 죄로 보느냐, 병리적 현상으로 보느냐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 차이가 때로는 많은 자유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자괴감을 많이 경감시켜 궁지에 몰린 사람이 다른 행보를 걷도록 돕기도 한다.
자유하니 말인데, 기본적으로 지옥의 죄인들은 모두 선택권이 없지만 자살한 자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더더욱 자유의 박탈이라는 의미에 치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 이 지옥의 죄인들은 나무 형태로 속박되어 몸을 옴짝달싹 못한다. 나무가 된 자살자들로 구성된 숲 위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괴물 새 하르퓌이아들이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을 괴롭힌다. 벌의 형식에서 이것이 신이 준 생명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 데에 대한 형벌임이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지옥은 불비가 내리는 지옥이었다. 불비를 맞으면 피부가 타들어가므로 죄인들은 쉼 없이 손으로 불티 맞은 자기 몸을 때리며 몸부림을 쳐야 한다. 전자의 지옥이 예상치 못한 당대인의 통찰, 자살에 대한 그 당시의 관점이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다면 후자의 지옥은 배우들의 여러 ‘고통에 아우성치는 몸 연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죽음 이후 추는 죽음의 춤 같은 그 기이하고 안타까운 몸짓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독교인 단테가 서양 중세까지의 학문 전통을 종합하여 <신곡> 을 쓴 만큼 <신곡>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요소도 등장한다. 신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요소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인간 여자의 두상에 새의 몸을 한 하르퓌이아, 인간 남자의 상체에 말의 하체를 한 켄타우로스 등은 그리스 신화 속 반인반수인데 기독교의 지옥에서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고 그들을 감시하는 현장 관리자 같은 역할을 한다. 이는 인도 신화에 있던 아수라, 야차 등의 팔부중 같은 존재가 불교에 흡수되어 그 큰 체계 안에서 부처를 수호하는 존재로 변모했던 것을 떠올리게 했다. 문화와 문화가 합쳐진 흔적을 훑어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신곡>의 기독교적 지옥에는 형벌 집행자로 기능하는 반인반수 외에도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도 등장한다. 황금양모를 빼앗아 온 모험 영웅 이아손, 트로이 전쟁에서 지략으로 그리스 연합에 승리를 안긴 이타카의 영웅 오딧세우스 등이 그 예이다. 영웅이었던 그들은 후대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형벌을 받는 죄인이 된다.
고대 그리스와 단테가 살던 기독교 문화권의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이미 관점의 차이가 발생 했듯, 21세기 관객인 나로서는 단테의 <신곡> 줄거리를 따라가며 죄인들 중 일부에게살짝 연민이 들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천국으로 가는 문은 좁은 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13세기 이탈리아의 기독교 문화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로 보는 것 중에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병리적 상태에서의 왜곡된 시야로 내리는 선택으로 보이는 사안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옥 안에서도 죄인들의 태도가 갈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단테를 보고 너도 결국 지옥에 오게 될 테니 두고 보자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너는 이걸 잊지 말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제대로 살아보라는 죄인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이미 받고 있는 벌의 종류와 강도는 다르다 하지만 똑같이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는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한낱 인간이니… 신의 뜻이 무정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면 그것이 불경하게 느껴져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의 사후세계는 그 최종적인 영원성 때문에 더욱 무겁고 두렵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언제고 억울함과 부당함을 던질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최소한 자기 손으로는 자신에게 죄를 씌우지 않는 것일 테다. 죽어서 영원히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으려면 이승에서는 죄 짓지 않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비록 편안함을 원하는 인간이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언제가 마지막날인지를 모른 채 살고 있더라도, 계속해서 빛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원작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전달한 연극은 결말에서 모든 것의 해답은 사랑임을 외치며 관객에게 해답 혹은 희망을 준다. 정답 없는 인생을 이고 지고 목숨 다하는 날까지 살아내려면 세상에 정을 붙여야 한다. 내가 익힌 세상과의 소통 경로를 통해 공감과 연민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살이에 좁아지고 탁해진 마음을 의식적으로 환기해 주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인간들이 만들어 낸 예술적인 한 순간, 한 점, 한 편이 당신의 마음을 환기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연극 <신곡>을 보고 단테의 세상에 들어가 그 조각배 끝을 얻어 타고 죄의 결과를 보며 과거와 지금을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마음을 또 한 번 정갈하게 다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