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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홍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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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연극이 다중 우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 공연장에 가면 몇천 년 전 그리스 비극을, 또 다른 공연장에 가면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한 동시대 연극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질문하게 된다. 2026년인 지금 100여 년 전 이야기를 만나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 시대에 딱 들어맞지 않는 인물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연극 <홍도>는 이 질문에 나름의 방식으로 답한다. 이 작품은 공감 대신 인물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거리 위에서 우리는 인간 홍도를 만난다.
![Apr 10 2026-[홍도]예지원-19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0193801_ipbsnkss.jpg)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홍도
연극 <홍도>의 원작은 임선규의 희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극단 청춘좌가 1936년 7월에 동명의 연극 초연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전무후무한 흥행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영화와 음반으로도 제작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관객들에게는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제목으로 더 친숙할 것이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통속극의 구조를 따른다. 주인공 '홍도'는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으로 일하는데, 그 이력이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홍도는 오빠 친구인 '광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광호의 약혼녀였던 '혜숙'과 시댁 식구들의 계략으로 부정한 여자라는 오해를 받고 만다. 결국 사랑을 잃은 홍도는 혜숙을 칼로 찌르고 형사가 된 철수에게 체포되며 작품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선악 구도가 분명하고, 삼각관계나 시집살이 등의 상투적인 전개가 돋보이는, 전형적인 통속극이다.
철수 홍도야. 네가 밤잠을 자지 않고
웃기 싫은 웃음을 웃어 가며
더러운 기생이라는 천대를 받아 가며
이 오래비를 공부시켜 놓은 것이,
결국에는 이 오래비 손에 묶여 가려고
이 오래비를 공부시켜 놓았던 것이냐? 홍도야.
- 임선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한국 희곡선 1》(민음사, 2015, 233쪽)
홍도를 체포하는 철수 대사는 이 비극의 애상감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이 지점에 이르러 홍도는 일반적인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연극 <홍도>에서 홍도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정해진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철수의 대사를 듣고 있자면 홍도의 비극이 예견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에서는 기생 일을 하는 홍도와 학교에 다니는 철수의 일상을 보여 주며 작품의 포문을 열었다. 반면 연극 <홍도>는 홍도가 기생이 되는 선택을 하는 순간부터 보여 준다. 선택으로 시작해 그 선택으로 인한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홍도를 그려 내는 과장된 무대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 연극이 원작의 상투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연극성을 강조하는 고선웅 연출의 평소 스타일과도 맥을 같이하는데, <홍도>에서는 이 연극성이 상투성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홍도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양식적이고 과장된 연출을 통해 이것이 ‘극’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때 무대는 ‘몰입의 공간’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공간’이 된다.
김교은 무대 디자이너가 만든 무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무대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돌계단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작은 무대가 구획되어 있다. 거기에는 돌의자가 놓여 있어, 삼중 무대 구조를 이룬다. 인물들은 큰 무대, 작은 무대, 더 작은 무대를 오가고, 관객은 돌계단을 따라 움직이는 인물의 동선에 주목하게 된다. 홍등, 사람 인(人) 자의 천장 오브제는 홍도와 광호의 결혼을 기점으로 1막과 2막을 나누며 연극에 형식미를 더한다. 무대 하수에 있는 노란색 꽃 오브제는 광호가 홍도에게 건넨 노란 가락지의 색채와 대응된다. 이곳은 1930년대의 사실적인 세계가 아닌, 2026년에 만들어 낸 연극적 세계이다.
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도 양식적인 연기를 펼친다. 몇 장면에서 배우들은 객석을 향해 대사를 발화하고, 과장된 걸음걸이, 액션, 감정 표현을 보여 준다. 전형적인 인물들은 이 과장에 힘입어 더욱 상투적으로 조형된다. 이야기에 몰입될 수밖에 없는 후반부의 전개에서도 거리 두기는 계속된다. 작품은 이 모든 것이 연극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몰입의 무게를 던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무대 위에 스태프가 등장해 배우들에게 꽃더미를 건네주고, 광호 아버지가 죽은 혜숙에게 "너도 일어나서 부채질 해."라고 말하며 비극에 빠진 관객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다.
노래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홍도와 기생 친구들이 노래를 부른다든지, 혜숙이 성악을 한다든지 하는 장면은 다소 당황스럽다. 아무 반주도 없이 노래 부르는 모습에 약간 민망해지기까지 한다. 이는 노래가 뮤지컬처럼 서사를 밀고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극의 흐름을 한번 끊고 인물과 거리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생뚱 맞게 들리는 배우의 노래는 감정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만든다. 1930년대의 서사를 몰입도 있게 재현하는 대신, 두 시대 사이의 감정적 간극을 그대로 노출하려는 시도이다.
![Apr 10 2026-[홍도]예지원-20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0193016_ulsqelpl.jpg)
오늘도 홍도는 울어야 한다
이 과장된 톤으로 전하는 1930년대 통속극에는 분명 통속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홍도가 돌이키지 못할 선택을 하고, 죄수가 되어 오빠에게 끌려가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장미꽃을 날리며 홍도를 축원해 준다. 원작에서 "자율찬(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표현되는 이 장면은 연극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다. 꽃을 비처럼 맞으며 관객 앞으로 나와 서는 홍도를 보고 있으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연민을 느낄 수 있다.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 말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질문이 뒤따른다. 왜 이 인물은 이렇게까지 무너져야 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사회에서 기생이라는 직업은 사라졌지만, 직업, 계층, 성별 등을 둘러싼 다양한 주홍 글씨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홍도>의 문제의식은 오늘날과 공명할 여지가 있다. 다만, 홍도를 '주홍 글씨를 안고 사는 사람들'로 확장시켜 읽기에는 극의 통속성이 너무 강력하다. 홍도에게 느끼는 연민은 '그래도 이것은 부당하다'보다는 '그래서 이렇게 불행했구나'에 가깝다. 사회 문제를 투영시켜 분노와 성찰을 하기에는 홍도를 둘러싼 부당함이 이미 통속성의 문법 안에 있기 때문이다.
![Apr 09 2026-[홍도]최하윤-10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0193856_vwcvtdkn.jpg)
솔직히 말하자면, 옛날에 이와 비슷한 공연을 보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때의 논조로 말하자면 <홍도> 역시 비판을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연적을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런 작품이 올라오느냐고 말하기는 쉽다. 홍도의 상황과 지금 삶의 풍경을 일대일 대응해서 따지고 보자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100여 년의 시간을 넘어 무대에 다시 안착한 <홍도>를 만나며, 비극을 표현해 내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작품은 오래 전의 통속적인 비극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 이때 관객이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연민이며, 이 연민은 우리 시대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오랜 여운을 남긴다. 연극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드는 이러한 연민의 정서에는 분명 미학적 성취가 있다.
그래서 홍도는 오늘도 울어야 한다. 1930년대 당대의 사회 인식을 보여 주는 욕설을 들어야 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구박받아야 한다. 기생이라는 지난 이력에 끝끝내 발목을 잡히며, 사랑에 속고 돈에 울어야 한다. 1930년대 공연장에서와 달리, 2026년의 공연장에는 홍도에 오롯이 이입하지 못하는 관객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 눈물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역시 의미 있을 테니.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무엇이 비극을 만드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며, 재미있었다고 박수를 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다중 우주 같은 연극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Apr 10 2026-[홍도]예지원-218.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0192635_zvihdces.jpg)
<참고>
임선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한국 희곡선 1》(민음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