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6월 19일부터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라이선스 초연되는 연극 <플리백(Fleabag)>은 영국의 배우 겸 작가 피비 월러-브리지(Phoebe Waller-Bridge)가 집필하고 초연한 1인극으로,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어 에든버러 프린지 신작상(Fringe First Award)’을 수상하는 등 비평과 대중성 모두를 잡은 작품이다. <플리백>의 한국 라이선스 공연은 제47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연출가 류주연이 연출을 맡았고, 한국 연극계에서 이 작품의 등장은 최근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1인극이라는 형식적 트렌드의 흐름에 부합한다. 독특한 형식을 가진 이 연극은 ‘블랙 코미디’, ‘드라마’, ‘스탠드업 코미디’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연출과 배우에 따라 같은 텍스트임에도 다른 감각으로 해석되어 텍스트에 내재한 맥락을 더욱 다양하게 경험될 수 있게 한다.
이 연극의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플리백(Fleabag)’은 벼룩(flea)과 가방(bag)의 합성어로, 영어권에서 관용어로 ‘(행실, 태도를 포함해서) 더러운 사람’, ‘누추하고 초라한 사람’, ‘문제투성이’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 연극은 작품의 제목이자 이름처럼 불완전한 한 여자의 내면을 다루며, 무대 위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자신의 삶과 일상을 고백한다. 언뜻 보기에는 유쾌하고 자유로우며 개방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의 내면에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 가족과의 갈등, 관계의 허무함이 자리한다. 해소되지 않는 욕망과 죄책감, 자기 파괴적 충동을 반복해서 겪는 불안정한 상태의 주인공은 자신의 암담한 상황을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연극 <플리백>은 회사에서 면접을 망치는 플리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플리백은 원래 친구 ‘부(Boo)’와 함께 운영하던 기니피그 컨셉 카페를 홀로 이어가지만, 연인의 불륜으로 인해 낙담한 친구가 사고로 죽게 되고 기니피그 카페 역시 어려워져 계속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상황을 마주한다. 극 중반에 밝혀지는 비밀은 주인공이 사실 ‘부’의 연인의 불륜 상대였다는 사실이며, ‘부’가 이를 모른 채 죽자 플리백은 죄책감과 자기 혐오를 안고 살아간다. 또한 주인공은 가족과의 갈등, 불안정한 연애, 충동적인 성적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공허함을 메우려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새어머니, 언니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그들은 주인공을 온전히 지지하지 않는다. 언니와의 관계는 안정감과 불안정을 오가는 긴장으로 가득하며, 언니가 기니피그 카페를 이어가기 위한 돈을 주기로 했지만 언니의 남편 ‘마틴’이 자신에게 치근덕거린 일을 고백하자 언니는 플리백이 먼저 접근했다는 ‘마틴’의 말을 믿고 주인공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플리백은 카페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고, 카페의 단골이었던 노인 ‘조’에게도 관계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결말 부분에서 플리백은 첫 장면에서 등장했던 면접을 다시 시작하고, 면접관에게 손가락 욕설을 날리며 이 연극은 끝을 맺는다.
이 연극 속 플리백은 개별적인 불안전함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와 순간적인 쾌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로 인해 자기 파괴적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그의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오히려 주변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고립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온다. ’욕망’이라는 외양의 관심과 ‘돌봄’(care)을 원하는 주인공은 그러한 대상이 되기 위해 성적인 관계에 집착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불안은 인간은 타자를 요구하는 존재라는 근원적 취약성과, 가부장제의 성적 이중규범 속에서 젠더화된 취약성으로 인해 강화되고 생성된다. 연극 속 플리백의 집착과 불안은 일견 보기에 답답해 보이고, 플리백의 모습과 태도는 중독증이나 강박 같은 병리적인 존재로 여겨지기 쉬운 모습을 하고 있고 ‘각성되지 못한 존재’, 혹은 이 사회 속에서 ‘의존적인 존재’, ‘주체적이지 못한 존재’, 혹은 (그가 성적 관계에 집착한다는 측면에서) ‘남미새’라는 멸칭이 사용되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 이때 플리백이 처해 있는 욕망과 집착, 그리고 이를 통해 반복되는 비합리적인 선택의 양가성을 보지 못한다면 단순한 선/악, 지혜/어리석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로 텍스트를 판독하게 된다.

20세기 후반 영미권 사회의 정동 정치를 연구한 로런 벌렌트의 『잔인한 낙관』(2024, 후마니타스)에서는 사람들이 품은 ‘좋은 삶’에 대한 희망과 욕망, 애착이 오히려 삶을 더 어렵게 만들고 주체를 소진시키는 상황을 ‘잔인한 낙관’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후기 자본주의 이후 위기가 일상화되고 ‘안정성’이 붕괴한 상황 속에서 주체들은 애착을 놓는다면 자신의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기반이 사라지고, 계속 붙잡으면 더욱 황폐한 삶을 살게 하는 모순적인 이중구속으로 인한 ‘답보 상태’에 처해 있다. 플리백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대사들은 이러한 ‘잔인한 낙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는데, 그는 사랑, 가족의 인정, 카페 운영(직업)을 통해 공허함을 메우려 하지만 그 욕망들은 그를 구원하기보다 더 깊은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유발한다. 관계를 지향하는 욕망과 생존 전략이 사실상 자기 파괴적 결과로 이어지는 순환 루프 속에서, ‘실패자’, ‘중독자’, ‘환자’, 혹은 ‘피해자’로 호명되는 ‘병리적 주체’가 된 주인공은 합리성의 언어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선택을 지속한다.
사람들은 이 연극을 왜 ‘해석하기 어렵게’ 느끼는 것일까? 주권적 행위 주체성과 합리적 선택에 대한 전제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 만연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도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플리백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은 의지적 행위로서의 ‘각성’, ‘의존’을 거부하고 ‘임파워링’의 대상이 되는 것 혹은 신자유주의적 ‘노력’이라는 세속적인 대안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플리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 벌렌트에 의해 ‘측면적 행위성(lateral agency)’이라고 이름 붙여진, 복잡하고 모순적인 욕망과 자아, 신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하고 불순한 행위성은 어떻게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 전유될 수 있을까? 플리백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적 자원이 가지는 정치적 임계는 어디일지, 병리적 주체는 어떻게 저항적 주체로 독해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 역시 남는다.

마지막으로, 연극 <플리백>이 독특한 점은 무대 위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형식의 독백이 반복되는 1인극이라는 점이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 트라우마와 그 증상들, (기니피그 ‘힐러리’를 언급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연쇄와 내면화 등 거칠고 흥미로우며 영혼을 파고드는 언어가 배우 한 명의 대사와 몸짓으로 모두 표현된다. 선행되는 작품 설명을 참고하자면 이러한 1인극의 형식은 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효과라고 설명되며, 이는 관객을 주인공의 불안과 욕망 속으로 ‘연루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완전한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관객은 오히려 의도적인 불편함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불편의 정동은 해소되지 못한 채 관객을 따라가게 된다. 이러한 장치는 동시대의 연극이 해야 할 본질적인 역할, 즉 규범적인 현실과 상식에 질문을 제기하는 기능을 극대화하며 명확한 해답을 주기보다 균열과 불편함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가능성의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 ‘블랙 코미디’의 특성과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이 모두 작동하는 연극 <플리백>은 극적인 환경에 있는 주인공에게 직접적인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을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독특한 연극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