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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옥씨부인전> 속 성윤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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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씨부인전>은 도망노비 구덕이(임지연 분)가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 준 옥태영이 화적들에게 죽자, 옥태영 행세를 하게 되고 외지부로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옥태영이 혼인하게 된 성윤겸 캐릭터(추영우 분, 1인 2역)는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 천승휘(원래 이름은 송서인) 캐릭터와 얼굴이 같은 도플갱어 설정이지만, 승휘보다 ‘덜 남성적’이라고 캐릭터 소개에서 명시된다. 이러한 설정은 드라마 <옥씨부인전>이 참고하고 있는 이항복(‘오성과 한음’ 속 오성)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유연전> 속에서 ‘진짜 남편’ 유유가 왜소하고 목소리가 얇다는 언급과 ‘대를 이을 수 없다’는 가출 이유 때문에 지금으로 따지면 성소수자였을 것이라는 후대의 추측이나 해석을 차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옥씨부인전>에서 성윤겸이 동성애자라는 설정은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자임을 알게 되어 집을 뛰쳐나와 전기수가 된 천승휘(송서인)가 옥태영의 남편인 성윤겸의 행세를 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조성하기 위한 ‘빌드업’에 가깝다. 근대 이후의 제도화된 도덕 경제를 반영한 연인 사이의 배타적 성 독점이라는 모노가미의 로맨스 문법 속에서, 가짜 옥태영이 된 구덕이가 혼인 상태에서 천승휘와의 배타적 로맨스를 흔들림 없이 쭉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제도 상 남편을 게이로 설정해 ‘다른 헤테로 로맨스’의 가능성을 뿌리 뽑은 것이다.

 

극 중에서 성윤겸은 옥태영(구덕이)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옥태영(구덕이)도 자신이 도망노비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둘은 일종의 ‘계약 결혼’이자 ‘위장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성소수자 아이들을 모아 무예를 훈련시키는 애심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이것이 ‘역모’라는 누명을 쓰면서 성씨 가문은 명예와 부를 잃고 윤겸의 아버지의 죽음에도 기여하게 된다. 성윤겸이 자신의 뜻을 위해 가출하듯 떠나고, 그의 동생 성도겸을 포함한 성씨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옥태영(구덕이) 옆에는 성윤겸 행세를 하기로 결정한 천승휘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주요 서사가 되었다. 청나라에서 동생 성도겸의 설득에도 윤겸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러한 태도 때문에 성윤겸은 시청자들에게 ‘실질적 빌런’으로 대우받았다. 방송 영상이나 뉴스 댓글에는 성윤겸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하고 이를 구실로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담은 글과, ‘무분별한 PC’라며 미디어 속 ‘다양성’의 등장 자체를 반기지 않는 반응이 많았다.

 

‘게이 혐오’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이성애 결혼을 한 유부 게이 신화 속 부정적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따온 것 같기도 한 성윤겸 캐릭터가 비난받았던 이유인 ‘가족을 등한시하고 의절했다’는 것은 주 양육자와의 갈등으로 탈-가정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소수자들의 삶을 비난하는 레토릭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가족 구성권이 결여되어 있거나 기성 가족과 단절되는 경우가 많은 퀴어를 향하는 혐오적 언설을 분석해보면, 개인을 탓하기 이전에 기존의 위계적이며 이성애중심적으로 조직된 가족 제도에 대한 의문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소수자의 경우, 일부의 잘못이 과잉대표되어 혐오의 대상으로 쉽게 조직화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창작진들의 이러한 설정은 실제 성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일이나 쉽게 집단적 혐오의 대상으로 범주화되는 현실에 대해 무신경한 채 단순히 소수자성을 서사를 매끄럽게 하는 장치이자 주제의 외면적 다양성만을 넓히는 수단으로 대상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소수자를 결점 없는 완벽한 존재로 그리는 것이 답은 아니고, 그들의 능력 덕분에 보상으로 '인정'이 주어지는 클리셰 역시 능력주의를 경유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지만 <옥씨부인전> 속 성윤겸 캐릭터처럼 자칫 시청자를 포함한 이 미디어를 접하게 될 대중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칫 반복되던 혐오의 수사를 유발할 수 있는 재현이 더 위험하다. 노비였던 가짜 옥태영, 구덕이와 성윤겸 캐릭터의 잠시 등장한 갈등 속 대화처럼 각자 복합적인 위치성 속에 있는 소수자와 소수자 간의 충돌이 잠시 묘사된 부분 역시 마찬가지로, 이를 피상적으로 묘사한다면 결국 인권의 가치를 분절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근대적 인간관이 유지되는 이상 해방을 개인적 성공으로 등치시키는 오독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 작품이 절정으로 향하면서, 천승휘는 성윤겸의 살해 혐의를 받아 참형이 예정되어 옥에 갇히고, 구덕이는 자신을 찾던 예전의 주인 소혜 아씨와 박준기에 의해 다시 노비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 구덕이가 박준기의 비리를 캐기 위해 간 마지막회 속 괴질촌에 이르러서야 성윤겸은 다시 이 작품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가 시도했던 대의와 복수가 실패하고 그는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받은 데다가 실어증까지 걸렸다는 것이 밝혀진다. 결국 성윤겸은 의금부에서 박준기의 비리를 밝히고, 병으로 죽기 직전 옥사에 가서 옷을 바꿔 입자고 이야기한다. 두 도플갱어의 마지막 바꿔치기로 인해 이 작품은 해피엔딩이 가능했다. 이때, 자세히 다뤄지지도 않은 채 짧은 말로만 전달되는 성윤겸과 애심단의 실패는 작품 속에서 애심단의 존재 목적과 가치 전체를 무의미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한다. 물론 '실패'는 그 실패가 어떠한 의미와 한계가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에 남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실패를 마치 윤겸의 업보인 것처럼 짧게 다루며 그 실패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기회조차 시청자들에게 주지 않았다. 이를 통해 소수자 정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윤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를 만든 창작진이 실패했다.

 

그리고 성윤겸이 만든 단체 ‘애심단’의 존재와 방향 역시 역시 퀴어 정치 (역사)의 측면에서, 그리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의 측면에서 ‘무리수’로 여겨질 수 있는 설정이다. ‘소수자들이 모여있'다고 언급되는 단체인 애심단은 마치 현 시대의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배제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현재 성소수자 인권 단체가 걸어온 길과는 거리가 멀고 퀴어 인권을 포함한 인권 운동 단체는 단일 의제 중심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창작진이 사회 운동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티가 난다. (애심단과 윤겸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망한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보면 현실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추가적으로, 이는 사극이라는 틀에서 봐도 애심단 단원들의 문신이나 그들이 의도하는 목표나 조직화되는 구조가 현대적인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려 시대에 노비들이 모여 귀족을 죽이려는 반란을 도모했다 실패한 만적의 난 같은 사건처럼 시대적인 한계를 조직적으로 뛰어넘는 목표와 대의를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고 시대적 맥락 속에서 개연성을 가지려면 성윤겸과 애심단을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 속에서 방치하면 안 되었다. 따라서 구덕이(옥태영)와 천승휘(송서인)이 기반이 되는 주요 이야기 전개를 위해 성소수자 이슈를 수단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뿐 아니라 작품의 개연성과 균형, 몰입도의 측면과도 연관된다.

 

 

 

윤해강이라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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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심단의 일원, 성소수자 캐릭터 ‘윤해강’(시스젠더 여성 배우가 연기했다) 역시 여러모로 이야기하기 복잡하다. 악공이었던 윤해강은 애심각에서 성추행 위기를 겪고, 이 과정 속에서 원치 않게 ‘비규범적인’ 몸(‘목소리와 외양이 여인 같은데, 남성의 성기가 있다’는 점이 해강을 추행한 양반의 대사를 통해서 명시된다)을 보이게 되어 ‘괴물’이라는 이유로 참형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옥태영(구덕이)은 외지부로서 해강을 변호해 해강을 살려낸다. 그 이후 해강은 좌수에 의해 칼을 맞지만 절에서 치료받고 애심단에 대해 증언하기도 한다. 후반부 해강은 성윤겸과 괴질병 환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치료하는 역할로 다시 등장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해친 좌수를 용서해주기까지 한다. 해강 같은 사례를 통해 외지부로 성장해가는 구덕이(옥태영)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캐릭터인데, 해강의 존재가 서사 내에서 단순히 ‘이용’된 것인지, 아니면 신념과 연대의 확장인지는 모호하다. 다만 사극 속 등장한 해강의 캐릭터와 해강이 겪게 되는 위기 자체로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은’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다소 기계적으로 여러 소수자 집단을 다루려고 한 결과로 인해 등장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을 쭉 시청하면서 초반에는 해강의 캐릭터가 ‘사방지’ 같은 케이스처럼 간성인지 현대의 트랜스젠더인지 헷갈렸는데, 전근대 조선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간성과 트랜스젠더, 그리고 그들의 경험이 완전히 분리되고 배타적인 범주에 속해 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해강의 퀴어한 정체성이 서구 근대의 정체성 정치의 영향을 받은 단일한 소수자 정체성에 딱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제작진이 그러한 생각까지 깊게 했다기보다는 현대의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이곳에 넣고 싶어서 사방지 사건 같은 역사 속 ‘특이하고 괴이한’ 존재로 서술된 존재들의 기록을 참고하여 대충 소수자라는 애매한 호명을 사용한 것 같다. 사실 해강 뿐만 아니라, 욕망 자체가 대군인 자신과 어머니인 왕비의 존재에 위협이 되는 <슈룹> 속 ‘계성대군’ 캐릭터, 기생이면서 동시에 무사로 살아가는 <공주의 남자> 속 조연 무영 등 기존 사극 드라마에서는 트랜스젠더 캐릭터의 재현이 있어 왔다. (그리고 <바람의 화원> 속 신윤복 같은 ‘남장 여자’ 로맨스물이나 다른 작품들까지 합치면 사극 속 ‘젠더 무법자’를 트랜스젠더퀴어로 읽는 퀴어 비평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14년 전의 ‘무영’이 제일 와닿는 재현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실제 트랜스여성 당사자인 모델 최한빛을 캐스팅해서일까? 혹은 <슈룹>에서 계성대군 에피소드나 소수자를 다루는 사극이 주로 그러하듯, 퀴어 캐릭터가 겪는 정치적 수난을 통해 퀴어를 정치화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휴머니즘이라는 (<슈룹>에서는 특히 왕비의 강한 '모성애'와 가족주의) 탈정치적 결론으로 수렴되는 한계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퓨전사극 속 퀴어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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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씨부인전>의 창작진은 노비, 퀴어라는 소수자 범주의 병렬식 나열을 통해 ‘이것까지 다뤘네?’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수도 있고, 인간의 자격, 즉 시민권/인권의 확장이라는 대의를 위해 선량한 의도로 이러한 설정을 삽입했을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같은 이전의 세계를 배경으로 근대적인 가치인 평등과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을 구현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퓨전 사극’인 시대물이 흔히 빠지게 되는 함정이 그러하듯, 이 과정 속에서 실제 그 시대적 맥락 속에서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떨어지는 설정이 등장하며 이는 ‘사극’의 특수한 장르적 문법을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구한말이 기준이라 다소 시차가 있지만) 『조선의 퀴어』에서 등장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면 어땠을까?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사극은 근대적 가치인 보편 인권 담론이 등장한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현 시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자연화하면서, 야만과 문명을 구분하는 서구 근대의 선형적인 발전의 서사를 수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점점 더 혼종적으로 발전 및 확장하고 있는 인권과 시민권의 담론,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보다는, 현대적 가치관을 가진 등장인물의 타임슬립을 주제로 했던 여러 드라마들*처럼 야만적인 ‘전-근대’와 이상적인 ‘근대’를 구분하는 것으로만 모든 논의를 끝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지점이 미디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치사회적 메시지와 맞닿는다면, 결국 진보의 기획이 아니라 결국 안전하고 체제유지적인 것으로 귀결된다. 타자화되는 소수자를 다뤘다고, 재현했다고 해서 다 ‘진보’적인 작품은 아니다.

 

얼마 전에 나온 신간인 한채윤과 루인의 『퀴어 한국사』를 살펴보면, 한국사에서 퀴어들은 존재했다. 다만 주류 사회에 타자이자 비체로 남아 이상하고 괴이한 것, 특이하고 ‘예외’의 사례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언어 없는 소외된 존재의 기록을 발굴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며, 상상력을 불어넣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예술적 창작 역시 그렇게 역사를 재-해석하는 행위의 일종이다. 역사적 창작물 속 퀴어 캐릭터들의 존재는 그러한 비규범적인 신체를 통해 지금 현재 이 시대 역시 관통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 상상력을 보여주었는지에 대한 비평을 요구하고, ‘사극’이라는 형식 속에서 어떻게 소수자 담론을 잘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창작의 영역에서의 과제를 남긴다.

 

 

* <신의>, <닥터 진>처럼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발달한 현대의 과학, 기술, 의학을 전달하면서 생존하는 드라마도 있고, <철인왕후>처럼 주인공이 현대의 사상을 전달해 제도적 개혁을 시도하는 드라마도 있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은 기술적, 문화적 시차로 인한 단순한 오락의 효과를 낳기도 했고, 서사적 장치로만 쓰이기도 했고, 무리한 설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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