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는
결말 및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원해 줄 인력들은 산불을 끄러 갔고, 이젠 통신도 두절됐다.
호포 출장소의 ‘범석’과 ‘성애’는 노인들뿐인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놈을 쫓아 산으로 향했던 청년들과 ‘성기’는 되려 놈들의 사냥감이 되어 버린다.
무지가 빚어낸 불행의 씨앗은 입장의 차이를 거쳐 온 우주의 비극이 되고야 만다.
Synopsis
무지에서 심어진 씨앗
의문의 상처를 단 채로 대낮의 길 위에 소가 죽어 있다. 손톱자국 같은 것이 나 있지만, 소의 몸을 가를 정도의 손톱자국이라는 건 의아함만 불러일으킨다. 곰이라기엔 너무 크고, 그렇다고 달리 짚이는 것도 없다. 그때 청년 하나가 북에서 호랑이가 내려온다더라, 해술이 아저씨가 그랬다더라, 하고 말을 얹는다. 지뢰밭을 뚫고 호랑이가 어떻게 오냐는 범석의 핀잔에도 사람들은 "해술이 아저씨가 그랬으면 그런 거다"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해버린다.
그리고 잠시 뒤, 차 안에서 성기가 정말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묻자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그런 사람을 만난 적도 없다고. 다 함께 웃는다. 시놉시스가 말한 '무지가 빚어낸 불행의 씨앗'은 이렇게 웃음 한 번으로 심어진다.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마을 곳곳에서 참혹한 광경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이 죽어 있고, 건물이 부서져 있고, 벽이 뚫려 있다. 호랑이의 소행이라기엔, 아니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불러올 수 없는 괴생명체의 출현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80년대의 '호포'라는 작은 항구 마을. 산불 때문에 상부 지원은 불가능하고, 긁어모을 수 있는 예비군은 열한 명이 전부다.
어쩌면 이 설정 하나로 마을 사람들의 무기 소지도, 좀처럼 모이지 않는 인력도 설명이 되고, 주인공들이 사실상 맨몸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환경이 완성된다.
보이지 않는 공포
영화는 계속해서 질주한다. 괴물의 형체는 한참이나 보이지 않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와 부서진 마을 풍경, 프레임 밖에서 날아드는 자동차만으로 관객의 긴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그 인내는 낚시 상점 앞에서 한 번에 회수된다. 유리창 너머 어둠 속으로 덕기가 끌려 들어가고, 총성에 분노한 무언가가 지붕을 뚫고 솟아올라 덕기의 시신을 손에 쥐고 휘둘러 춘호를 죽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만든 장면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미지의 공포가 현존하는 공포가 되었을 때, 공포는 오히려 사그라들었다. 외계 생명체치고는 상당히 인간에 가까운 형체였고, 생각보다 노련하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인간은 생각보다 빠르고 튼튼했다. 감독이 이 크리처의 외형에만 삼 년을 들였고, 한눈에 외계인으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이질감을 노렸다고 하니 인간과 닮은 형체는 실수가 아니라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산은 적어도 내게는 먹히지 않았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놓고 등장시킨 몸이 결국 팔다리 넷 달린 것일 때, 한껏 부풀어 올랐던 상상력에는 바람구멍이 난다.
인간들은 괴물을 총과 탄으로 상대한다. 그런데 그 괴물은 타격을 입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줄 만큼은 휘청이지만, 이 영화를 끝내버리지는 않을 만큼만 다시 일어나 달려온다. 성애의 유탄발사기가 세 발째에 기어이 다리 하나를 잘라내지만 그마저도 놈을 멈추지는 못한다. 그 정교하게 조절된 타격감은 생물의 반응이라기보다 러닝타임의 반응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속도감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요소이긴 했다.
해부대 위에 오르지 못한 진실
그러는 동안 이 영화가 조용히 쌓아 올리는 것이 하나 있다. 다리 밑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에 산탄총을 갈겨 살아남은 주민을 겨눈 것도, 정육점 문 너머의 인기척에 난사해 애먼 경석을 쓰러뜨린 것도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숲에서도 마찬가지다. 쏘지 말라는 성기의 명령을 무시하고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은 청년들이었다. 그리고 추격전의 정점에서, 조준경 너머의 괴물이 울고 있는 얼굴을 본 범석은 끝내 쏘지 못하고 놓친다. 결국 그 첫 번째 외계인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총이 아니라 지나가던 탱크로리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인간이 확실하게 죽이는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거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다.
탱크로리에 깔린 사체는 창고로 옮겨진다. 일반 톱으로는 표피도 뼈도 갈리지 않아 전기톱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몸이 열린다. 보건소장은 장기의 구성과 다리 관절의 형태를 살핀 끝에 우리가 아는 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누가 봐도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이 아는 건 결국 자기 몸뿐이다. 손가락이 몇 개인지, 관절이 어디서 꺾이는지, 장기가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지.
그리고 이 장면의 대목은 결론이 아닌 그 뒤에 붙는 짧은 대화에 있다. 범석이 그게 울더라고 말하자 보건소장은 의아해할 뿐이다. 저 존재에게 내면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가 해부대 위에는 올려둘 자리가 없어서, 그렇게 한 번 언급되고 지나간다. 인간은 열어보고 나서야 겨우 알아본다.
그 아이의 값이 80만 원이었다. 외계 생명체들이 숲에서 마을까지 내려온 이유는 잃어버린 새끼를 찾기 위해서였고, 양배가 그 새끼를 죽인 이유는 80만 원은 받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관자놀이에 한 발. 마네킹과 박제가 널브러진 마당을 지나 냉동고에서 꺼내 보여주는, 자기 키보다 작고 초록빛이 도는 사체. 앞서 창고에서 본 것과 손가락도 관절도 똑같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범석은 자신이 하루 종일 쫓아다닌 것이 새끼를 잃은 부모였음을 알게 된다. 그 앞에서도 양배는 실실 웃으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는 표정을 거두지 않는다.
온 우주의 비극이라는 시놉시스의 문장과 80만 원 사이의 거리, 이 영화가 진짜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낙차다. 거대한 사건의 원인을 파고들면 이유는 늘 이렇게 비슷하고 단순하다.
그 이유가 드러난 뒤부터 관객은 더 이상 온전히 인간의 편에 서서 영화를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들의 공간을 침범하는 인간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거대한 존재와 정면으로 맞붙는 대신 아이를 돌려주고 협상을 시도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다만 이 답답함의 출처를 인물들의 어리석음으로만 돌리면 영화를 절반만 본 셈이 된다.
관객이 저들을 못 보는 것은 카메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범석의 시야에 묶여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저들을 못 알아보는 것은 자기 몸 말고는 다른 자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이 저들의 사정을 모르는 것 역시 범석이 모르기 때문이다. 눈앞의 위협을 치우는 일이 급한 시야에는 그 위협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영화는 관객을 그 좁은 시야 안에 가둬두고, 나중에 가서야 무엇을 못 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알려주는 방식은 대사다. 함선이 불타며 산으로 추락한 뒤 남은 외계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마베이요는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라도 칼리를 살리겠다고 말하고, 조르는 꿈속에서 들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을 읊조린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목은 처음부터 마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것만이 아니라, 죽은 아이를 되살리려는 저들의 것이기도 했던 셈이다.
좋은 마무리였기도, 어쩐지 아쉬운 마무리이기도 하다. 두 시간 반 동안 이미지로만 쌓아 올린 것을 마지막 몇 분의 대사가 친절하게 번역해주었다. 시야를 좁혀두는 데 그렇게 공을 들여놓고, 정작 그 시야를 여는 일은 자막에 맡긴다.
그 대사 뒤로 갑작스럽게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이 영화에 다음이 있으리라는 예감을 받게 된다. 감독은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속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인간들이 그렇게 날아가고도 계속 살아남는 것도, 축제 같은 환호 한가운데서 양배의 핸들 조작 하나에 허무하게 도로로 떨어진 성기가 쿠키 영상에서 기어이 다리를 절며 일어서는 것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된다.
다만 성기의 그 죽음만큼은 속편의 사정과 무관하게 좋았다. 외계인이 아니라 앞으로 뛰어든 고양이가, 그리고 그 고양이를 피한 인간의 손이 그를 죽인다.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이 전부 그 한 장면에 있다.
나홍진의 동화, 인간의 SF
돌이켜보면 이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나홍진의 영화에서 사람을 죽여온 것은 언제나 악의보다 무지였고, 확인되지 않은 말이었고, 겁에 질려 앞당겨 당긴 방아쇠였다. 감독 스스로 이 영화를 지나치게 착한 동화라고 소개했다는데, 악행을 저지르는 쪽조차 거창한 악의가 없다는 뜻으로 읽으면 과연 그렇다. 달라진 것은 규모다. 시골 마을의 오해가 이번에는 종과 종 사이의 문제가 되었고, 무전이 닿지 않는 반경 안에서 벌어지던 일이 대기권 바깥까지 이어진다. 소재는 SF지만 사고방식은 여전히 이 감독의 것이다.
이 영화의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얕은 영화라기보다 얕게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영화다. 모든 동기가 뻔하고 당연한 것들로 꾸려져 있어 관객은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고도 끝까지 갈 수 있다. 그 설계가 누군가에게는 완벽한 몰입의 조건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더 파고들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김빠짐이 된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지만, 그것이 실패의 증거인지 선택의 결과인지는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박진감 넘치는 속도, 희열이 느껴지는 액션, SF적인 감각까지 외계인으로 살려낸 영화의 등장은 한국에서 분명 반가운 일이다. <괴물> 같기도 하고 <아바타> 같기도 하고 <매드맥스> 같기도 한데, 배경은 한국의 80년대라 어쩐지 향수가 어린 익숙한 풍경이 함께 따라온다. 삶은 감자를 건네주는 무장 노인들의 흰색 트럭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성애에게 범석이 내놓는 대답도 그렇다. 자기도 모르겠다고, 그냥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고 마음이 이상할 뿐이라고. 이 문장이 영화가 인간에 대해 내린 가장 정직한 진술이 아니였을까.
이해가 막히는 지점 없이 뻥 뚫린 도로를 달리는 듯한 <호프>는 오랜만에 극장에 가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다양한 해석과 평가에 지쳐 스트레스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다만 끝까지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추천하지만 다른 종에게는 굉장히 비추천하는 영화 <호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