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영화인 <경주기행>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우선 나는 <경주기행>같은 범죄 스릴러물을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고, 네 모녀가 살인범을 납치해 죽이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과정이 일관성 있게 쭉 이어져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딸이라면 느낄 법한 감정들을 잘 풀어낸 점도 좋았다. 나는 장녀라 첫째 딸인 장주에게 많이 몰입했지만, 본인이 딸이라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주인공 중 한 명에게는 무조건 이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중간중간의 유머 코드도 내 취향에 잘 맞았고, 매끄러운 흐름이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경주기행>을 보며 한순간도 집중을 놓친 적이 없다.
복수의 서막
<경주기행>은 복수가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 ‘경주’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죽은 막내딸 ‘윤경주’의 이름이기도 하다. 경주는 8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후, 납치 살해되어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경주를 죽인 살인범에게 내려진 형은 고작 15년이었다. 이 사건 이후 단란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경주의 가족은 무너져버렸다. 경주의 아빠는 충격으로 자살을 택했고, 경주의 엄마 옥실은 죽은 딸과 남편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인범과 합의를 선택한다. 여기서 15년형은 우발적 범행과 범죄자의 심리 상태, 그리고 초범이라는 것까지 고려해 내려진 형이다. 한 아이와 한 가정을 무너뜨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고작 15년이라면, 그 어떤 부모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옥실은 복수를 위해 살인범인 백상현을 직접 납치해서 죽이기로 한다. 옥실은 딸들과 함께 백상현을 살해할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그가 출소한 8년 뒤 어느 날 그를 차에 태워 경주로 향한다. 처음에는 모두 경주의 복수를 위해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딸들 개개인의 입장이 나타난다. <경주기행>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그 속에 얽히고설킨 가족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동주, 영주, 장주
경주는 집안의 막내딸로 부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자란 아이다. 부모님은 경주를 유독 예뻐했던 터라, 경주와 나이 터울이 가장 적었던 셋째 딸 동주는 경주만 예뻐하는 부모님에게 서운함을 느끼며 살아왔다. 옥실은 무슨 일만 생기면 동주부터 꾸짖었고,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쌓여 동주는 성인이 된 후로도 부모의 사랑에 대한 결핍감을 안고 살아갔다. 동주는 옥실과 단둘이 있을 때, ‘경주 대신 내가 죽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 영주는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다. 옥실의 복수극에 참여하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 복수극을 현실과 동떨어진 일처럼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옥실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첫째 장주는 아빠와 경주를 잃은 후 가족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이다. ‘가족 일에 무슨 논리가 필요해’라고 말하며 옥실의 편에서 동생들을 중재하기도 하지만, 첫째로서의 부담감과 엄마에 대한 원망을 크게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각자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며, 엄마를 바라보는 딸들의 시선 역시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뭉쳐 경주로 떠난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가족애가 느껴지면서도 독립된 개개인으로 느껴지는데, 이런 지점들이 참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마음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감정 중 하나가 ‘불편함’이다. 그렇지만 나도 늘 장주의 말처럼 가족이니까, 가족 일에 이유가 뭐가 필요하냐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결국 가족은 가족이다. 계속 싸우다가도 단체 사진을 찍을 때면 사이좋게 모이는 것처럼 말이다.
완결된 복수극
이 영화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결국 ‘복수’라는 목표를 끝까지 이뤄내었기 때문이다. 다른 복수극들을 보면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거나, 주인공이 결국 범죄자를 용서하는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런데 <경주기행>은 살인범 백상현에게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다. ‘경주를 죽인 살인범’이 끝이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옥실이 백상현을 단둘이 마주했던 그 순간, 죽은 경주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 정말 많았을 것이다. 왜 경주를 죽였는지, 경주는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렇지만 옥실은 끝내 묻지 않는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듯 백상현의 입 안 가득 돌을 쑤셔 넣는다. 그러고는 백상현을 죽여버린다. 어떠한 용서도, 타협도 없이 말이다. 옥실은 마지막에 ‘너를 용서하게 될까 봐 무서웠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개 사람은 이런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 용서를 택한다. 그렇지만 그 후의 피해자의 삶은 어떨까? 용서한다고 해서 옥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뜨거운 돌덩이가 사라질까? 때로는 용서가 최선이 아닐 때도 있고, 옥실에게는 백상현을 죽이는 것만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한 복수극과 가족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냈으며, 영화 중간중간의 블랙코미디스러운 장면들도 좋았다. 마냥 씁쓸하고 무겁지 않게 완급 조절을 잘한 것 같다.
경주를 죽인 범인을 살해하고서야 가슴 속 응어리가 풀어진 옥실에게 얼마나 큰 불덩이가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옥실, 그리고 세 자매 모두가 이제는 행복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