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늘 덥지 않았나요?”
오후 9시가 지난 무렵. 앙코르까지 모두 마치고 팬들과의 인사도 끝낸 뒤 만난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는 뒷목에 손을 올린 채, 무대가 있는 쪽을 한 번 뒤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관객 A―나다―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조금 당황한 채 답했다.
“(금시초문) 에?”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말과 달리 수족냉증도 없는 나의 발끝은 차가웠기 때문이다. 공연장 에어컨이 강력했구나! 싶겠지만, 딱 기분 좋게 시원한 정도였고 공연이 시작될 즈음에는 절묘하게 전원까지 꺼졌다. 그러니 몸 한구석이 춥다고 느낄 만큼 냉기가 돌았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이날의 바이올린이 급속 냉풍기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곡이었던 베토벤 때, 활을 한 번 내리기라도 하면 무슨 창을 아래로 강하게 휘둘러 찍어내리는 것마냥 ‘왕’ 하고 들이닥쳤다. 4악장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정말 코끝이 시렸고, 양팔에도 한기가 돌았다.
누구 때문일까?
더군다나 이 공연장, 헤르만아트홀. 세로로 기다랗게 놓인 공간이다. 딱 아늑한 크기의 무대 위에 풀 사이즈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놓여 있다.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 손을 내려놓거나 바이올리니스트가 왼편 어깨 위의 악기로 활을 움직이면, 그러니까 둘 중 누구든 음을 내는 순간! 아주 그냥 와앙! 하고 협조적으로 확대해 울려준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확실하게 ‘클래식 사운드’를 전해받을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좋은가?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가 활을 거의 현 위에 내려치는 수준으로 팔을 움직였을 때였다. 그때 딱―잔향이 생기기도 전에 처음 강타된 음이 강직하게 팍! 맺히고, 확!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그래, 그는 2부로 갈수록 계속 몸 안쪽에서 들끓었다. 그런데 안에서 그렇게 끓어오른 것이 밖으로 빠져나오면 결과물은 오히려 뾰족하고 마른 칼바람처럼 맨살 위를 스쳤다. 지금도 한낮의 그늘 없는 곳은 아직 뜨겁지 않은가?
그런데 이곳에는 황량한 낙엽이 흩날리고, 때로는 깊게 베이는 기운이 있었다. 한겨울이 오기 직전의 늦가을이 그곳에 먼저 찾아든 것이다.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
언제부터였을까?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가 마테오 고프릴러(Matteo Goffriller, Venedig 1715-1720)에서 프란체스코 루제리(Cremona 1667)로 악기를 바꾼 뒤, 저 ‘고드름’ 같은 기색이 더 짙고 뚜렷해졌다!
2025년의 기억 속 그의 소리와 6일의 바이올린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사람은 같은데 악기 하나가 달라졌다고, 이렇게까지 밖으로 나오는 결과물이 달라지는구나. 신기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거의 나도 함께 벽면이 된 기분이랄까?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음이 부딪치고 되돌아오다 보니, 가만히 앉아 받기만 하는 관객의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가 무언가를 내뱉을 때마다 나도 같이 받아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까지 끼얹어질 수 있다니. 그 점을 그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바이올린 소나타 제22번 A장조, K.305
‘주왕!’ 하면서 시작한 모차르트의 1악장. 딕션을 아주 그냥 똑바르게! 미련 같은 건 뒤로 두고 깔끔하게! 뭘 그려도 일자 모양으로 떨어지는구나?
깔끔하다는 건 딱 요즘 같은 새파란 하늘 아래, 흰 천을 탁탁―털어 빨랫줄에 너는 기분이다. 얼굴은 무표정인 채로. 시원한 물방울이 팔을 움직인 대로 통통―튄다.
일자 모양이라는 건 활 한 번에 들려오는 음의 모양이 길고, 똑 떨어지는 말끔한 모양새이며, 대체로 약간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녔다는 것이다. 왜 약간인가? 모차르트라 약간 ㅁ만큼만 끝을 다듬었다. 여기서 흐름을 빠르게 가져갈지언정 아기들을 울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2악장에 들어서니 헤르만아트홀에서는 진짜 활의 ‘결’이 잘 들리는구나 싶었다. 바이올린이 빗금을 긋는데, 가지런히 모여 있는 활털과 현이 맞닿는 순간 눈앞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지는 것처럼 빗결 같은 음이 난다. 이런 공간에 오면 활이 지나가는 모양까지 귀로 보이는구나.
내가 들었던 곡이 네모인 채로 태어나 동그라미로 향하는 곡이었다면,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모차르트는 네모로 태어나 삐죽한 세모로 향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제7번 C단조, Op.30 No.2
소리의 길이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어딘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내가 어림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반듯한 모양새에, 그의 활과 악기가 나와 확실히 초면―지난 2025년에 들었던 것과는 다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태 들어왔던 것보다 훨씬 훤하고 깨끗해진 바이올린이 내가 아는 사람과 번듯한 소리를 냈다.
지난 2025년,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바이올린을 떠올리면 아주 예민하면서도 눈동자는 엄청 맑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고 자란 말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의 저 아이는 그때의 걔보다 말할 수 있는 폭이 엄청 넓다. 그때의 아이는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박거나 급정거했다가도 갑자기 유려하고 유창해졌는데, 얘는 훨씬 안정적이면서도 조금 더 널찍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
뭘까? 소리가 차지하는 영역이 굉장히 넓다. 그게 뭔지 끊임없이 추측하면서 그의 왼편 어깨 위 새로운 개체를 바라본 채 2악장을 맞이했다.
이봐, 이전 같았으면 조금 더 ‘가녀’렸을 텐데 지금은 조금 더 ‘매끈’하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천천히 걷는 대목에 오니 그게 다 보인다. 더 달릴 수 있지만 악보가 말한 대로 나긋―하게 나아간다. 힘이 모자라서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낼 수 있는 것 가운데 지금 필요한 만큼만 골라 꺼내 들고 있다는 게 보였다. 흐름선을 조절하고 있다.
그 집중도가 보이니 아무 생각 없이 일요일을 가볍게 즐기러 왔던 나의 흐트러진 마음도 바로 자세를 갖췄다. 표정에도, 소리에도, 그어내는 곳곳에도 성심이 모여 있으니 마냥 풀어지려던 생각을 내려놓고 지판 위를 누르고 떼는 손가락에 시선을 길게 두었다.
바이올린이 ‘땡댕댕…’ 작은 종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아시나? 큰 소리를 내던 것이 일부러 장난감처럼 작은 소리를 내면, 나도 모르게 오래 바라보게 된다.
3악장에 다다라서는 노래함에 어떤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또각또각―베토벤다운 길을 걸을 때마다 이런 느낌을 받았다. 연주가들이 어디까지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이미 아는데도,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걸어야 하는 발자국 모양이 대체로 정해져 있는 곡 안에서 노래하는 걸 볼 때면 지금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구나 싶다.
정해진 안쪽 규율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충분히 노래한다. 이런 곡에서 들려야 하는 특유의 결이 또렷하게 구분될 때면, 연주가를 통해 작곡가의 음악이 왜 오랫동안 연주되어 왔는지를 새삼 알 것 같기도 하다.
4악장에 들어서자, 조금 전 내 발목에 묶여 있던 끈 하나가 느슨해졌음을 알았다. 그가 길을 벗어난 게 아니냐고?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더 내달릴 수 있는 포인트가 곳곳에 박혀 있어서 의자에 앉아 있는 내가 더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나를 잡아두던 것이 내게 여유 공간을 주는 게 아닌가? 매섭고 선명한 사운드가 내 한쪽 귀―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지 않은 왼쪽 귀―가 아릴 정도로, 또 코끝이 다 시릴 정도로 ‘확실한’ 음이 내게 내리꽂혔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F단조, Op.80
사실 프로코피예프가 그의 본 게임 장소였다. 그가 이 소나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는 뭐, 길게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오늘, 이 홀에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난 프로코피예프의 이 곡이 어떻게 다시금 ‘발현’될 것인가. 그 부분만 잊지 않고 담아가면 될 노릇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까 고쳐 잡았던 자세에서 그대로 굳어진 채 20분 정도를 있었다. 왜일까?
그가 위로, 아래로, 끊이지 않는 질긴 선을 오가는 구간을 노래할 때, 나는 2024년의 음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늘 재생 버튼을 눌러 화면 너머로 듣던 그 음원이 이날은 갑자기 부피를 얻었다. 내가 재생시키는 바람에 화면 위로 두꺼운 십일자 모양의 일시정지 표시가 떠오른, 바로 그 음원 속으로.
풍덩―빠져드는 것도 아니고, 미끄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뒤로 이끌려가는 것도 아니다. 딱 손 하나를 붙잡혀 까만 진흙 아래로 끌려 들어간다. 혹은 파동 하나 없는 수면 아래로, 숨 쉬는 법을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눈도 감지 못한 채 아래로 데려가진다. 어?
이미 녹음된 버전과 그렇게 동일하게 연주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만큼 연주는 ‘안정’되어 있었고, 이미 꽤 만족스러운 버전으로 남아 있는 레코딩과 유사한 길을 가긴 했지만, 무대 가장 가까운 좌석에 앉으니 정말 그 ‘음원’의 3차원 공간 정가운데에서 사방의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입체감이 있었다.
거기다 저 바이올린, 소리가 어찌나 커다란지. 홀도 홀이지만 악기라는 성대 자체가 광활해졌다. 한 번 깊이 들어간 곳에서는 못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표현할 수 있는 영역만큼은 활 한 번으로 전부 훑고 지나온다. 그 바람에 아까의 한파 기운이 푸르스름한 열기로 다 메워진다.
안에서는 분명 끓어오르는데,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여전히 차갑고 매섭다. 소리가 타오르기도 하고, 애처롭게 내려오기도 한다. 다시 발끝이 어딘가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하는 때가 오길래, 느려지는 구간이 나를 찾아왔구나 금세 깨달았다.
아, 그가 이 곡을 안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 곡이 나와 잘 맞는구나, 오래 연주해볼 수 있겠구나. 처음 그렇게 깨달은 게 언제일까? ‘시간의 누적’이, 지나간 시작점이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분명 이 소나타와 시간을 오―래 보낸 흔적은 둘이 서로에게 달라붙은 모양새로 남아 있었다. 새로 나타난 바이올린도 그걸 막을 수가 없다. 1부에서는 분명 낯을 조금 가렸는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했던가 싶을 정도로 별다른 잡념이 끼어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연주가의 퍼포먼스나 표정처럼 연주하면서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장면을 목격하는 것을 좋아해, 보통 바이올린에도 한 번, 연주가에도 한 번 시선을 나눠서 감상하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곡에서는 시각적인 측면에 내 집중도가 온전히 몰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면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빠짐없이 목격하고 있는데 왜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저기에 없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임동민도 아니고, 바이올린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라 ‘프로코피예프’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아, 프로코피예프를 안고 갈 수밖에 없겠구나. 그냥―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
그렇게 스스로 읊조리게 만드는 선율이 거기 있었다. 뭔가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거저거 따질 것 없이 작곡가의 매력을 알게 만드는 3악장이라니. 공연장에 오면, 그리고 연주가의 연주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때에 따라 진짜 생각지도 못한 문장과 생각들을 얻어가게 된다.
4악장? 그냥―들이마시느라 바빴다. 이미 지나간 악장에서 아주 깊은 안쪽까지 유도된 상태였고, 처음 이 곡을 듣기 시작한 마음의 자리에서 옮겨온 지도 오래였다. 저쪽에서 보내면 보내는 대로, 내뱉으면 내뱉는 대로, 내 귀에 꽂혀오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제는 지나간 바이올린과 안녕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하얀 점들로 이뤄진, 아주 얇고도 얇아 파르르 떨릴 것만 같던 그 실선을 지나 잘 정제된 칼날과 창이 되어 온 네가 만들어내는 온전한 또 다른 선과 기쁘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
우리는 이제 자주 보겠구나.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15
강은정 피아니스트,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
조금도 ‘장난’치는 게 아니라, 첫숨에 찔러드는 모양새다. 갈퀴로 소리를 아래에서 위로 다 끄집어낸다. 아니, 저 사람이 지금 들고 있는 게 ‘바이올린’이 맞나? 싶은 여러 겹의 소리 줄기가 세차게 그를 통해 나타난다.
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떻게 나무 안에서 물기운을 유도시킬 수 있는 거지?
소리가 되게 크다. 애초부터 목소리가 크게 태어난 사람마냥 가볍게 들어도 선명도가 높고, 소극장이 아니라 콘서트홀용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누르는 데 큰 힘을 주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활이 현 위를 쓸고 지나갈 때의 순간적인 마찰은 엄청 강력하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활털 한두 개가 힘을 받는 순간 몇 번이나 끊어졌다. 활털 한 줄이 끊기며 짧게 말려 올라가 마치 ‘높은음자리표’ 모양을 그리기도 했다. 연주자가 끊어진 털을 정리하고 나서도 한 번 더 그랬다.
이전의 바이올린에서 내가 ‘지직거리는’ 소리가 ‘번득인다’고 했을 법한 영역이 이제는 멀끔하게 정돈된다. 아름다움을 안개 속에 숨겨놓았다가 한꺼번에 확―드러내는 게 아니라, 힘줄 곳을 명확하게 조준하여 바로 그곳을 찍어 내릴 줄 아는, 가격할 줄 아는 응축된 힘이 엿보인다.
귓바퀴 근방을 화려한 소리가 에워쌀수록 어안이 벙벙했다. 번쩍이는 소리인데, 이상하게 그 끝은 자꾸 차가운 쪽으로 기울었다. 분명 얇은 바늘 소리로 우리를 찔러오던 그가 이제는 훨씬 넓고 거센 소리로 온갖 곳을 휘젓고 지나갔다.
아야야…!
앙코르, …
앙코르는 지나온 곡들 중에서는 가장 회상적이고, 색감도 가장 따뜻한 편에 속했다. 그렇다고 어디에 기대겠다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냥―하고픈 말이 있는데… 이리 전해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 정도의 마음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다정한 구절이 쓰여 있지는 않지만, 그 말이 만년필로 직접 적힌 편지지를 혼자 있을 적 바라보는 장면이 아롱―아롱 떠올랐다.
보통은 앙코르 정도는―3분 정도는―글로 남겨두지 말고 그냥 그 순간에 거기 있던 나를 위한 선물로 남겨두면 좋지 않을까? 내게 흘러들어온 것이 자연히 휘발될 수 있도록 그냥―글로 적어두지는 말자….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날은 그 곡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이 곡을 노래한 이에게 소근소근… 여쭤보니 Wagner의 Albumblatt였다.
음, 공연이 끝나고 나면 꼭 한두 곡씩 나도 모르게 다시 듣게 되는 곡을 찾는다. 그게 8월에는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이었고, 9월의 당분간은 이 앨범의 잎(Albumblatt)이 아닐까?
6일이 다 지나고, 우리에게 찾아든 마지막 선물까지 모두 넘겨본 뒤에야 이 앙코르가 바그너가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의 앨범을 위해 쓴 짧은 소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내게는 이 작은 곡이 꼭 공연 끝에 건네받은 방명록 한 장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공연장 계단을 내려와 ‘누구입니다…’ 하며 이름을 적어두고 들어온 것처럼, 이날의 바이올린도 당신께 왔다 갔다는 표식을 이렇게 남겨준 게 아닐까?
이런, 낭만을 봤나?
그럼 수첩을 건넨 그에게 오늘 공연의 소감을 여쭤볼까?
그의 대답은 늘 간단명료하게 딱! 떨어진다.
뭘까?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