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다이어리에 무엇을 적는가. 누군가는 고통을, 누군가는 행복을, 누군가는 꿈을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을 적고 공유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일 수도, 잊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고통스러운 기억은 어떠한 형식의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는다. 기록이 남더라도 나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보았을 때 살아나는 복합적인 감정이 버겁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유독 부정적인 감정은 인정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여기, 자신의 고통을 밖으로 꺼내어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이가 있다. 바로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의 ‘키키’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키키는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는 인물이다. 공연은 키키가 의사로부터 ‘경계성 인격장애’를 진단받는 것으로 시작해, 변증법적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공연은 독특하게 키키라는 ‘게스트’가 4명의 ‘호스트’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토크쇼의 형태를 띠고 있다. 4명의 호스트는 키키의 ‘토크쇼’가 시작되는 순간, 키키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성은 <유미의 세포들>의 ‘세포’를 연상시킨다. 이들은 극 중에서 단순히 여러 역할을 맡는 것을 넘어 키키의 분열된 내면이나 그녀가 ‘붙잡고 싶었던’ 혼란스러운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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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은 '최태이 배우'의 키키를
기준으로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Ⅰ. 붙잡고 싶은 모든 것들
키키는 붙잡고 싶은 것이 많고, 작은 자극에도 지독한 통증을 앓아 괴롭다. 새롭게 취직한 서점에서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불안에 떤다. 직원 중 하나가 포스기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데, 그녀는 연습을 하는 도중에 실수를 한다. 직원은 다시 해보라고 일러주며 추임새처럼 ‘홀리쉿’, ‘오마이갓’을 외친다. 별것 아닌 혼잣말이지만, 불안이라는 화염방사기를 달고 다니는 키키에게는 그 말이 마치 호통처럼 들린다. 작은 불꽃도 커다란 불길로 번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때때로 사소한 일이 커다란 불안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순간 내 안의 ‘화염방사기’는 자꾸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도망치게 만든다. 키키에게는 그런 도피처 역할을 하는 ‘안락한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금은 헤어진 전 애인. 키키는 자신의 애인이 그의 전 연인과 하우스메이트로 지내며 결과적으로 셋이 함께 산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불안감을 느낀다. 자꾸만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각, 그리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바람을 피울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그 반대편에는 또 다른 극단의 불안이 있다. 그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싶다는 욕구, 그러니까 키키는 자신의 불안을 그나마 해소해 줄 수 있는 애인의 품이라는 자극적이고 익숙한 도피처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이 관계는 건강한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능성 없는 관계는 끝낸다.’
문득 그 문구를 보며 키키는 “나를 옥죄고 있던 관계를 끊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내디딘 변화의 첫발은 쉽지 않았다. 그만 만나자고 말했지만 막상 “그래”라는 답이 돌아오자, 그녀는 다시 돌아가 그를 붙잡고 싶어진다. 이 세상에 나를 받아줄 사람이 또 있을까, 사실 내 잘못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이런저런 후회가 밀려온다. 이는 섹스의 충동으로 이어진다. 키키의 불안은 자해와 섹스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 익숙한 해소 방법은 또다시 집착과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굴레에 갇히게 만들었다. 사실 수단이 다를 뿐, 건강하지 않은 방식이나 상대를 향한 과한 의존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흔히 벌어지곤 하기에, 이 장면 역시 많은 공감을 산다.
Ⅱ. 새로운 변화의 바람
그럼에도 키키는 오래 만나온 연인과의 관계를 끊어낸다. 대신 그녀는 새로운 연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물론 새로운 사랑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첫 만남에 호감을 보이다가도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면 대부분은 욕을 하거나 도망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도중 키키는 ‘테일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만남을 이어간 지 일주일이 되던 날, 키키는 깊은 관계를 맺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며 자신의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해 고백한다.
“일종의 감정조절 장애야. 감정이 수시로 변하고, 작은 일에 격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버림받는 걸 극도로 무서워해서 집착하고, 심해지면 자해를 하기도 해.”
테일러는 그 말에 다른 이들과 달리 도망가지 않고 병명의 의미를 물어봐 준다. 그리고 “네가 노력하고, 심지어 나아지고 있다며. 나도 공부해 보지 뭐.”라며 만남을 이어가기로 한다. 상담사 에단의 권유로 ‘한 달간의 섹스 금지령’을 받은 키키는 그렇게 테일러와 함께 처음으로 육체적 관계에 종속되지 않은 건강한 정서적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버튼 하나 누르듯 ‘한순간’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키의 기분은 끊임없이 낙하와 상승을 반복한다. 그녀는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 트리거가 눌려 현 애인과도 다투며 시간을 가지게 된다. 화를 내다가도 다시 매달리는 자신에게 키키는 “끔찍하다”라고 말하고, 상담사 에단은 이렇게 말한다. “키키는, 분명히 나아지고 있어요. 키키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는 거예요. 그 마음을 인정하고, 위로해 줘도 돼요. 잘못된 감정은 없어요.” 변화와 성장은 커다란 의지로,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키키는 자신을 끔찍한 새끼라고 저주하면서도, 전처럼 칼을 찾지 않고 놓아준다. 얼음을 쥐고 녹을 때까지 참고 버틴다.
한편, 키키는 새로운 사랑과 함께 새로운 일도 시작한다. 새 회사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사소한 실수와 거절에도 불안에 떨지만, 회사 사람들은 그런 키키를 다정하게 받아준다. 절단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요구와 다른 모양으로 종이를 잘라 키키가 걱정할 때, 상사는 절단기를 고쳐두겠다고 답하며 실수를 타박하지 않는다. 상담 시간 때문에 직원의 부탁을 어렵게 거절할 때도, 퉁명스럽지만 다정한 말투로 “내일 해도 된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실제로 전 회사와 전 애인이 키키를 홀대하고 과하게 타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낮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친절해진’ 사람들이 생긴 현재와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차이는, 키키 내면의 변화와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Ⅲ. 나의 일부를 인정받는다는 감각
키키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의 가족들이 모인 한 워크숍에서 가까운 사람의 지지와 인정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녀는 엄마에게 자신의 인격장애와 고통을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지만, 엄마는 차마 딸이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서로 이해의 편차를 좁힐 수가 없자, 모녀의 상담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랩으로, 노래로 말다툼 같은 대화를 지속한다. 그리고 그 끝에 마침내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고통을, 인격장애를, 인정한다.”
‘나’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이해와 인정, 그리고 나의 뿌리인 타인의 진심 어린 인정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조차 버거운 세상에서 타인과 ‘온전히’ 연결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해를 갈망하고 인정을 기대한다. 생각보다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은 더 큰 절망감을 준다. 자신이 지닌 정체성을, 가장 소중한 부분을 가까운 가족, 연인, 친구에게 계속해서 부정당한다고 생각해 보라. 키키에게 뿌리가 되는 타인은 가족, 즉 엄마였다. 부모의 인정은 단순히 진단명을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를 긍정하는 첫걸음이 된다.
아마 키키도 감정의 파도를 100%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 파도를 타는 법을 익혔고,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안다. 극의 마지막에 우리는 처음에 관객들을 맞이했던 그 키키를 다시 만나게 된다. 터벅터벅 느린 걸음이지만 계속해서 나아간 키키,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연습하는 키키.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 다르다. 그런 키키의 얼굴을 마주하며, 관객 역시 불안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에 한 발짝 내딛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나만의 다이어리 속 한 페이지’를 마주하게 된다.
Fin. 당신의 ____ 다이어리
첫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이제 당신은 다이어리에 무엇을 적고 싶은가? 누군가는 ‘불안’을, 누군가는 ‘우울’을, 누군가는 ‘행복’을 빈칸에 채워 넣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고통의 감정을 ‘앓게’ 만든 이유를 찾아 적어보기로 했다. 그것을 마주하고, 강물에 흘려보낼 것이다. 키키가 불안의 감정을 흘려보내며 놓아주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도 그렇길 바란다.
어떤 형태의 감정이든, 어디에서 기인한 감정이든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기 위한 가장 치열한 첫 단계일 테니. 외면했던 것을 마주한 당신은 기어코 당신이 될 것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당신 말이다. 자, 이제 소중한 당신을 위해, 우리만의 다이어리를 써 내려갈 시간이다. “1단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