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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방황하는 인간, 가르쳐질 수 없는 진리 [도서/문학]

『싯다르타』, 끝없는 방황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

by 서연화 에디터
2026.08.3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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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한 길을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방황’이란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어쩌면 할 수도 없는 것이 되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끝없는 방황으로 가득 차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안개에 가려진 듯 앞이 막막해지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뜻밖의 길이 눈앞에 드러나기도 한다. 매일이 구름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숲을 걸어가는 기분과도 같다. 때로는 이토록 터무니없이 길을 잃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길을 잃을 자유가 가져다 주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방황은 청년의 권리라고 하신 말씀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다. 불안과 걱정을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나는 끝없이 방황하는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 오히려 이 세상과 부딪히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오롯한 나 자신이 되는 순간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욱 길을 잃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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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황에는 수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망설이고, 좌절하고, 도망치고, 때로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서 나는 나를 알아가고, 영원히 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어찌 보면 방황은 청년만의 권리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 가 말해주듯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한 완벽할 수 없으며, 헤매고 잘못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인생이라는 모험의 끝에서 발견한 내가 끝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수도 있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것이 있고, 나만의 꿈이 있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낭만이 아닐까? 낭만이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낭만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열심히 방황하며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고, 자신만의 낭만을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형이상학자의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모든 꿈의 조각을 모아 한 조각의 용기를 펼치고, 인생이라는 모험 속에서 낭만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것의 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싯다르타의 줄거리



    『싯다르타』의 주인공이자, 바라문 가정에서 자란 싯다르타는 기존의 지식과 가르침만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느끼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이 되어 고행의 길을 걷는다. 이후 부처 고타마의 가르침을 접하지만, 깨달음은 타인의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제자가 되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그는 자아를 초월하려 했던 지금까지의 삶이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었음을 깨닫고, 감각과 현실의 삶을 직접 경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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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싯다르타는 카말라와 상인 카마스와미를 만나 사랑과 부를 경험하며 속세의 삶에 빠지지만, 결국 그 삶의 공허함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린 채 강가로 향한다. 그곳에서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지내며 강물의 소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끊임없이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후 아들까지 떠나보내며 사랑과 고통을 직접 경험한 그는 마침내 타인의 삶과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고, 모든 존재의 단일성을 깨달아 진정한 평온과 열반에 이른다. 마지막에는 오랜 친구 고빈다와 재회하여 자신의 깨달음은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할 수 없으며,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감각과 사유 그리고 사랑 – 싯다르타의 생애



    싯다르타는 사유와 감각이라는 두 극단을 오가며 갈등하다가 마침내 그 경계를 넘어서는 길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방랑하고 순례하며 끊임없이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야 했다.  


    청년기의 싯다르타는 사유를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육체의 감각을 억압하고, 정신의 독립을 얻기 위해 고행에 전념한다. 그러나 자아를 초월하고자 했던 노력은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해탈을 얻지 못한 채 그 방법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후 그는 다시 자신의 존재를 되찾기 위해 감각에 집중한다.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우고 향락과 쾌락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현실의 삶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감각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사색을 게을리하고 향락에 빠져 또다시 자신을 잃어버린다. 두 길 모두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만으로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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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싯다르타에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카말라와의 관계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들을 통해 처음으로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 동시에 사랑하기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고통도 경험한다. 아들의 운명을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났던 과거를 떠올리고, 자신 역시 과거에 아버지에게 같은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가르침을 얻는다. 아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그는 마침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랑은 감각과 사유라는 양극단의 경계를 넘어 그를 열반으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선종과 교종 – 싯다르타와 고타마



    싯다르타는 초기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름에서 비롯된 인물이다. 그런데 헤르만 헤세는 이 이름을 두 인물, 즉 싯다르타와 고타마로 나누어 설정한다. 두 사람 모두 깨달음에 도달한 현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고타마는 자신의 깨달음을 가르침과 설법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달하려 한다. 반면 싯다르타는 타인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으며, 직접 경험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는 불교의 여러 수행 전통 가운데 교리와 경전을 중시하는 입장과 직접적인 수행과 체험을 중시하는 입장의 대비를 연상시킨다. 특히 후대의 선종에서는 문자와 교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수행과 참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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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헤세가 고타마와 싯다르타를 서로 다른 인물로 설정한 것은 불교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깨달음의 방식을 문학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고타마가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려 한다면, 싯다르타는 가르침에서 벗어나 직접 진리를 경험하려 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결코 고타마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타마를 깨달음에 도달한 현인으로서 존경하며, 마지막에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생각과 고타마의 가르침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싯다르타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 자체도 고타마의 가르침을 접했기에 형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헤세가 고타마보다 싯다르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고 해서 특정한 종파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는 싯다르타의 여정을 통해 진리를 찾는 방식 자체에 집착하는 것 역시 진리에 대한 집착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교리냐 수행이냐의 구분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스스로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하나이다



    사실 싯다르타를 움직인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은 단 하나,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이 없었다면 그는 자아를 찾기 위한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직접 참선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자 했기에 그는 몸소 세상과 부딪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침내 자신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반면 고빈다는 주어진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지만, 싯다르타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헤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유와 감각, 가르침과 경험이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세상의 일원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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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교리를 통해 지식을 쌓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완벽하게 구분된 길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실수하고, 방황하고, 때로는 잘못된 길을 걷기도 하면서 삶의 고통 속에서 배우고 성장한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처럼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말은 진리가 전달될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 ‘진리는 가르침만으로 얻을 수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에게 싯다르타가 던지는 질문



    싯다르타는 존재에 대한 탐구와 사랑의 본질을 잊어버린 현대인에게 일종의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를 탐구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이야말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싯다르타는 진리를 쫓는 끝에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수많은 실수와 과오를 저지른 자신을 책망하지만, 그러한 모습 역시 ‘나’라는 존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 과정은 비록 험난했지만, 그가 얻은 자유와 평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나 역시 세상에 쫓기듯 살아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늘 조급하고 불안하며 공허한 감정에서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다시 일상의 과제에 쫓겼고, 주어진 의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나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갔다. 그렇게 떠밀리듯 살아가다 보니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 쉽게 고통받고 동요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모르기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살아가는 데 방향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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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을 알고, 더 나은 ‘나’를 향해 어디로 걸어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아 탐구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면 그 길에서 잠시 벗어나더라도, 넘어지더라도 다시 털고 일어나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면 된다.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없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나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무한책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어쩌면 자기 존재를 탐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나와 세상’의 관계를 온전히 탐구하기 어렵다. 이전까지 ‘나’의 내면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외부세계 속에서의 ‘나’를 알아가는 단계가 필요하다.


    싯다르타는 진정한 사랑을 알기 전까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만나면서 사랑을 경험하고, 동시에 사랑으로 인한 아픔도 겪는다. 그는 이전부터 강물을 통해 세상의 일원성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직접 사랑을 경험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은 후에야 그 깨달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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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사랑은 나와 세상의 관계를 인식하게 하고, 그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진리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참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혐오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혐오, 타인에 대한 혐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등 그 모습은 다양하다. 나는 이러한 혐오가 결국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잊어버린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온전한 사랑, 즉 관용과 자비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넘어 세상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을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는가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어보면서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헤세는 책을 통해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 진리에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책을 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전달하려는 진리 역시 가르침만으로는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 결국 독자인 내가 직접 삶을 경험하고, 생각하고, 부딪혀보아야만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통찰하는 깊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생각과 경험,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도, 무작정 경험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직접 세상과 부딪히고 그 경험을 다시 사유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신만의 지혜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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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언젠가 싯다르타처럼 끊임없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도상에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길을 잃더라도 다시 길을 찾고, 때로는 잘못된 길을 걷더라도 그 경험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끝없이 나 자신과 세상을 탐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이며, 끝없는 방황 속에서도 삶의 낭만을 잃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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