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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없앤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가 [도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by 김민주 에디터
2026.08.2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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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활자를 읽는 일을 좋아한다. 소설을 읽으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 역시 그런 책이었다. 사유재산과 화폐가 없고, 모든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노동하는 나라가 구체적인 제도와 생활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현실과 다른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흥미로웠다.

 

하지만 읽을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유토피아는 무언가를 없애 이상을 실천한다. 그런데 없어진 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지 않다.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유재산을 없앤 뒤 남은 기준     

 

토머스 모어는 1516년 『유토피아』를 통해 당시 잉글랜드의 현실을 비판했다. 1부에서는 인클로저로 토지를 잃은 농민이 생존을 위해 도둑질을 하고, 국가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상황을 다룬다. 2부에서는 그와 대비되는 가상의 국가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사유재산도 화폐도 없고, 필요한 물건은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분배된다.


특히 금과 은을 다루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유토피아인들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외국 사신들이 금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찾아오자 오히려 그들을 노예나 죄인으로 생각한다. 현실에서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물질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사라졌을까.

 

그렇지는 않다. 유토피아인들은 자연이 준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화장이나 장신구로 몸을 꾸미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자연이 준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꾸미려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부의 위계가 사라진 자리에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몸’이라는 기준이 생긴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아름다움에 기준을 세우는 순간 그 기준에 가까운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클레이토스가 인체의 이상적 비례를 정리한 ‘카논(Canon)’ 역시 자연스러운 인체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이상적인 몸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규정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기준점을 찾는다.

 

 

 

건강한 몸만 누릴 수 있는 쾌락

 

쾌락에 관한 부분 또한 마찬가지다. 유토피아인들은 육체적 쾌락을 여러 종류로 나누며, 건강한 신체 상태에서 오는 즐거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전히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쾌락은 즐거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라고 부릅니다."
 

 

건강은 단순히 좋은 상태가 아니라 쾌락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몸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유토피아의 기준이 가진 한계가 드러난다. 이 사회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을 조롱하는 것을 비난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완벽한 사회를 설계했지만, 그 사회가 말하는 ‘결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관된 기준을 갖지 못한다. 결핍을 없애려고 할수록 오히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인지 구분하게 되는 셈이다.

 

 

 

유토피아의 도시와 스포르친다

 

이러한 ‘이상적인 질서를 구체적인 공간으로 설계한다’는 발상은 동시대 르네상스의 이상도시 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필라레테의 스포르친다가 그 사례다.

 

이상도시 스포르친다(Sforzinda)는 건축가 필라레테(Antonio di Pietro Averlino)가 구상했다. 스포르친다는 실제로 건설된 도시가 아니라, 필라레테가 15세기에 구상한 이상적인 도시 계획이다. 별 모양의 외곽과 원형의 해자,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방사형 도로 등 기하학적인 질서가 도시 전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시의 질서가 형태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우연과 혼란에 맡기는 대신,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먼저 정하고 그 안에 사회를 배치한다. 이상적인 사회를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도시 역시 이와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섬의 형태부터 도시의 배치, 노동과 생활 방식까지 일정한 규칙 아래 놓여 있다. 유토피아는 단지 ‘좋은 사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계한다. 그러나 질서가 명확해질수록 그 질서에서 벗어난 것은 더 선명해진다. 이상적인 도시의 형태가 정해지는 순간, 그 형태에 들어맞지 않는 도시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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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가장 가시적인 문제는 유토피아의 국경 밖에서 나타난다.

 

유토피아는 필요한 토지를 활용하기 위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신들의 법을 따르지 않는 원주민을 몰아낸다. 저항할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화한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땅을 다른 사람이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연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용병으로 고용하는 자폴레트족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노골적이다. 유토피아인들은 전쟁에서 자폴레트족이 죽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 대목에서 유토피아 내부의 평등과 외부에 대한 태도 사이에 큰 차이가 생긴다. 내부에서는 사형을 폐지하고 노동을 통해 죄를 갚게 하면서도, 국경 밖의 사람들에게는 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어슐러 K.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 구조가 더 잘 보인다. 오멜라스의 행복은 지하실에 갇힌 한 아이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 차이는 그 대가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르 귄은 시민들에게 그 아이를 보여주지만, 모어는 유토피아 외부의 희생을 사회 내부의 문제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결국 유토피아의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이 생긴다.

 

 

 

읽는 사람의 자리에서

 

유토피아는 사유재산과 화폐를 없앴지만 가치의 기준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부의 위계를 지운 자리에는 몸의 기준이 들어섰고, 건강을 쾌락의 조건으로 삼은 자리에는 결핍된 몸에 대한 구분이 생겼다. 공동체 내부의 평등은 국경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모순이 유토피아라는 상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사회를 구체적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에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고, 무엇을 바깥으로 밀어냈는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사람, 공간을 활자로 만나는 일이 좋다. 다만 이제는 그 세계를 조금 다르게 볼 것 같다. 이전에는 새로운 세계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를 주로 보았다면 『유토피아』를 읽고 나서는 그 세계가 무엇을 없애고 그 자리에 무엇을 세웠는지도 살펴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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