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나는 길을 걸을 때 바닥보다 벽을 자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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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래된 흔적이 남은 곳들을 좋아한다.

 

덩굴이 얽힌 골목, 서울 한편에 남은 낙후된 동네, 종로구 주변의 빛바랜 건물들. 수원 팔달구 행궁동의 낮은 지붕들이 수원화성과 어우러지는 풍경도, 경주의 한옥 사이를 걷는 일도 나를 즐겁게 한다. 옛 문화유산이 카페나 사람들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한참을 멈춰 서곤 한다. 색이 바랜 정도, 깨진 모서리, 줄눈 사이 이끼 같은 것들. 그것들이 그 건물이 견뎌온 시간을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프로그램도 길을 걸으며 옛 건물 몇 채를 구경하고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투어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거리의 벽돌만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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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앞에서 출발한 투어는 한 시간 반 남짓 동안 정동 곳곳의 근대 건축물을 지나갔다. 배재학당의 옛 교사(校舍), 덕수궁 돌담을 낀 좁은 골목, 100년 전 외국 공사관이 서 있던 자리까지. 걷는 내내 들었던 해설에서는 같은 단어가 반복되었다.

 

[붉은 벽돌]

 

처음에는 정동 일대 건축물의 공통적인 자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배재학당의 인쇄 기술, 도편수 심의석의 벽돌 건축 과정이 차례로 이어지자, 같은 단어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해설사는 기술 그 자체보다 "왜 하필 정동이었는가"를 묻고 있었다. 활판 인쇄술이 들어온 자리에, 벽돌집이 들어선 자리에,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 짜맞추려 했던 사람들의 결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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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비평가 케네스 프램튼(Kenneth Frampton)은 이를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라는 말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는 어디서나 비슷한 형태의 산업화한 도시에 맞서, 지역 고유의 역사와 환경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핵심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내는 데 있다. 벽돌 한 장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질문되어야 할 무언가였다.

 

그제야 벽돌이 유심히 관찰할 대상으로 다가왔다. 정동제일교회 앞에 섰을 때, 같은 붉은빛이 또 한 번 눈에 들어왔다. '여기도 같은 색이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어진 건물들을 마주했을 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섦이 친밀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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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의 붉은 벽돌은 모두가 같은 시대를 가지지 않는다. 정동제일교회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건물이지만, 정작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던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반대로 지금 미술관이 들어선 본관 건물은 1928년 일본이 경성재판소로 지은 시설이었다. 같은 시기, 같은 거리에 서 있던 붉은 벽돌이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 벽을 쌓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게 된 셈이다.

 

해설을 들으면서, 나는 붉은 외벽을 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비바람을 맞은 벽돌은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고, 한쪽 모서리는 누군가 손으로 쓸고 지나간 듯 둥글게 닳아 있었다. 저 벽이 누구의 손에 쌓이고, 누구의 발길에 닳았는지는 벽돌 자체가 말해주지 않는다. 벽돌 하나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겹쳐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떤 건물을 '남길 만한 것'으로 골라내는 일은 곧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지를 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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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를 다녀온 뒤, 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안의 교육과 외부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서로 체험의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 안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정제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에 가깝다. 그러나 거리를 걸으며 같은 벽돌을 반복해서 마주치는 경험은, 정보가 아니라 장소에 대한 기억을 몸에 새기는 일에 가까웠다.  정동의 골목을 걷고, 같은 색의 벽돌을 몇 번이고 마주치면서, 나는 비로소 이 동네를 '아는 곳'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음 속에서 놓친 문장들, 흩어졌다 다시 모이던 발걸음까지도 어쩌면 그 '알아봄'의 일부였을지 모른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보보다, 걷다가 부딪히고 놓치고 다시 따라잡는 과정에서 남는 인상이 더 오래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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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가 끝나고 며칠 뒤, 나는 수원 팔달구 행궁동에 있는 한 카페에 갔다. 수원화성박물관 근처 옛 살림집을 개조해 만든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 나는 한참 외벽 앞에 서 있었다. 붉은 벽돌이었다. 정동에서 본 것과는 다른 색, 다른 결의 벽돌이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 벽돌이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같은 색이라도 같은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자연스럽게 들었다.

 

정동에서 얻은 것은 어쩌면 정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도시를 보는 방법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지나치던 벽 하나에도 누군가의 결정과, 그 결정이 통과해 온 시간이 쌓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알아채는 순간, 낯선 거리는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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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정동투어]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이 운영하는 지역 연계 해설 프로그램이다. 대한민국 국적 만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무료로 신청할 수 있고, 정동 일대를 약 1시간 30분 동안 문화해설사와 함께 걷는다. 해마다 미술관의 의제에 맞추어 해설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며, 신청과 운영 일정은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매 회차 새로 안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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