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앉은 좌석은 2층 A블록으로 왼쪽 사이드였는데, 콘서트홀이라 1층 좌석과의 거리가 더욱 넓게 느껴지고, 위로는 층고 높은 천장과 벽들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시야였다. 아래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눈에 들어오며, 시선을 들면 희기도 노랗기도 한 그 조명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다.
노을이 드리워질 무렵, 호수면에 일렁이는 반짝이는 포말 조각을 닮은 빛들이 길게 연결된 마이크 선을 비춘다. 캐러멜색의 굽이굽이 굴곡 있는 벽들. 비어 있던 옆 객석 너머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선선하고 고요한 바람. 그 바람을 타고 넘어오는 현악의 소리. 놀랍도록 조용했던 사람들과 2악장. 유려하게 소리를 만들어내는 솔리스트.
2025년 2월 19일
맨 처음엔, 작년의 바람이 2026년 7월 3일의 겹으로 되돌아왔구나 싶었다. 무엇을 말하고자 내게 이리 또 왔는가 묻고 싶어, 프로그램 노트를 펼쳤다.
음악 속에서 우리가 마주해온 것은 늘 서로 다른 층위들이었다. 작곡가의 시간, 연주자의 호흡, 그리고 청중의 감각.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와 카메라타 솔의 〈겹의 미학〉은 그 겹들을 따라가며 음악의 본질을 비추어 왔다. 지난 〈겹의 미학 II〉가 음악을 인간을 비추는 ‘거울’처럼 바라보았다면, 이번 〈겹의 미학 III〉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확장되는가.
하나의 선이 있다. 가느다란 숨처럼 시작된 선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자신의 길이를 늘리고, 결을 바꾸고, 다른 선들과 만나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겹의 미학 III〉은 그 선이 어떻게 태어나고, 흔들리고, 마침내 겹이 되어 공간 전체로 번져가는지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에서 시작된 선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명의 기척으로 머문다. 이어 브람스 이중 협주곡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 두 개의 선이 각자의 방향으로 흐르다가도 서로 기대며 점점 더 넓은 감정의 곡선을 그린다. 마지막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2번에 다다르면 더 이상 선은 하나의 층에 머무는 것이 아닌, 쪼개지고 엮어지며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확장된다.
지휘자 서진, 첼리스트 엘다르 사파라이예프, 카메라타 솔,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예술감독 김응수가 함께 만들어내는 이번 공연은 선율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끝내 무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바꾸는 시간이다.
“하나의 소리는 어떻게 세계가 되는가.”
어푸어푸 푸념하면서도 이 글을 이 무자비한 여정 사이에 끼워 넣는 나를 보면, 나도 참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사무엘 바버, 현을 위한 아다지오
억눌려 있었다. 그러니까 내 눈높이에 맞게 손을 죽 뻗어 보면, 이건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의 이야기였다. 무언가로부터 눌려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냥 애초부터 아래쪽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것이다.
제 힘으로 뒤집으면 될 일이 아니던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애초에 향해진 방향을 거스를 필요가 있나? 그늘 쪽에 시선을 두고, 일부러 앙상한 살가죽 위에 빼곡한 척추뼈가 다 보이도록 웅크려 있는 것이다. 그러기로 택한 것이다.
왜? 소리가 따라붙는 자리에는 땅으로 향하는 이마 위 물줄기가 있다. 뚝-뚝- 땀이 떨어진다. 그들이 노래하고 있는 자리에는 누가 서 있는가? 저 자세로 오래도록 버텨온 사람이 있다.
아무도 몰라주는 마음, 그 채로 살기로 한 사람, 글로도 남기지 못하고 잊힌 이가 있다. 맑은 해가 있는 것도 모르고 떠나버린 마음이 있다. 애잔하다고 말하기도 죄스러운 숭고함이 있고, 그렇다고 내가 저 상황을 타개시켜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유일하게 소리 하나가 ‘나는 그럴 기운이 없다’는 명분 하나로 그를 위로하는 장면을 그저 바라만 봤다.
참, 중간에 비올라 소리가 잘 들려서 좋았다. 비올라가 노래하는 목소리가 눈에 보였다.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 가단조, 작품번호 102
처음 보는 첼로였다. 처음 보는 연주자면 당연한 거 아니겠냐는 말로 들리겠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다른 얘기다. 들려오는 소리가... 내가 아는 첼로랑 결이 좀 다르게 들렸다.
그러니까 저 나무가 이 나라의 것처럼 잘 안 들렸다. 나랑 다른 인종의 사람을 만나면 가장 맨 처음 드는 인식 정도겠다. 저 첼로가 이국의 악기, 내가 모르는 숲속에서 자란 나무,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결의 첼로. 리듬감. 그런 게 나도 모르게 확 체감이 되어서 신기했다.
정말 순수한 의도로 ‘와, 처음 보는 첼로(사람)이다.’ 그 생각으로 1악장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두 번째는 카메라타 솔에 시선이 갔다. 그들은 X자 형태로 서서 소리를 가운데로 모아 노래한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당기고 버티는 모양새였다.
X의 왼쪽 상단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설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가장 맨 끝점에는 연주자들의 욕심이 있다. 무슨 욕심인가? 음악에 대한 끝없는 갈망, 어떻게든 완벽한 연주로 닿고자 하는 그 순수한 집착이 한가득 자리한다.
근데 오른쪽 점의 ‘결과물’을 보면? 그 열망이 겉면에 티가 하나도 안 난다. 그러니까 관객이 듣는 소리에는 그저 ‘음악’만 있다. 편안한 여정과 원래 이 정도는 한다는 식의 순도 높은 합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결과치가 완전히 내려놓아진 채로 있으니, 저 간극의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를 몰랐다. 저렇게 욕심들 많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소리에는 욕심이 하나도 없지? 딱 봐도 온갖 사람 안에는 힘이 가득한데, 소리 안에는 힘이 없어. 희한했다.
보통 협연곡을 보면 나는 협연자나 지휘자의 가장 큰 선을 두고 바라보는 편인데, 여기 또 하나의 호적수가 나타났다. 유달리 내가 봤던 공연 안에서는 단원들이나 지휘자가 협연자의 캐릭터를 맞춰주거나, 조금 더 빛날 수 있도록 기세를 누그려 놓는 기분을 많이 받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협연 1, 협연 2, 지휘자, 오케스트라가 각각 적정 비율로 제 할 일을 대단히 적절히 해내고 있다.
근데 또 서로를 향해 그다지 다정하지도 않다. 각자 앞만 보고 프로답게 직진한다. 그러니 나머지 하단의 두 개의 점이 채워진다. 하나는 협연자들이고, 하나는 지휘자가 위치한다.
이렇게 완성된 X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표식을 세워서 바라볼 수는 없다. 이런 식이면 협연자와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간다고 오해할 것이 아닌가. 바닥에 눕혀서 봐야 한다. 그들은 서로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각자 제대로 하자고!
흥미로웠던 건, 이날의 바이올린, 그러니까 김응수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다. 이렇게 맑은 소리 안에 사람이 안 보일 수 있나 싶었다. 보통 소리가 분명하면 밝다, 흰색이다, 어떻다 말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제 속내를 다 안 보여주는 소리가 있나.
그러니까 인간미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 안에 소리만 일렁인다. 초연하지도 않고, 욕심도 없고,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저 ‘번뜩’이기만 한다. 조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다. 뭐지? ‘빛자락’만 있다. 색이 없고... 이렇게 길이 분명한데... 놀라운 일이기도 하겠다.
벨러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2번
개인적인 기쁨을 말해볼까? 나는 이 곡을 통해 이제 버르토크의 민속적 선율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고요해지는 구간에서 내가 머릿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구간’—버르토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들었던—특유의 그 이명 같은 지점이 이 협주곡 안에서 딱 지나가더라.
이것 말고도 또 즐거움이 있다. 이 외계인들의 만담 같은 그의 곡을 즐기는 법을 완전히 깨우쳤다. 무엇인가? ‘시야’를 포기해라. 눈을 감으면 된다.
특히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장막을 드리워야 한다. 생각해 봐라. 클래식 음악을 향유하기 위해선 그 연주가 진행되고 있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작은 홀에서 들을 곡이 있고, 우중충한 날에 듣기 딱 좋은 곡이 있다.
버르토크의 곡은 아주 깜깜한 블랙홀 안에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저 깔아놓은 빛길이 다 보인다. 버르토크의 노래가 얼마나 세련된지 알아보라고 설명만 해봤자 의미가 없다. 우리가 단번에 인식하기엔 남몰래 깔아두었으니, 사방에 소음이 가득하고, 온갖 화려한 장식물과 조명이 있으면 그가 잘 안 보이고, 그만의 음색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거의 이 곡이 진행되는 내내 눈을 감았다. 세상이 새카매지니 그가 걷는 길이 다 보였다. 특히나 김응수 바이올리니스트는 소리 겉면의 하이라이트가 높기 때문에 길잡이의 역할에 충실히 임한다.
그만 따라가면 최소한 길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 길잡이가 그려놓은 세계는 꼭 조용한 곳에서 봐야, 까만 밤에서만 봐야 더 빛을 발한다. 우리가 직접 초대장을 내밀어야만, 기꺼이 그곳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쳐야만, 그의 요동치고 가녀린 감각의 세계를 보여준다.
흥미롭다. 이 흥미로움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오직 소리만이 묘사할 수 있는 추상화가 있다. 물감으로도 옮겨 담을 수 없고,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악기와 악기 사이에서만 발현되는 그 복잡한 도형과 흐름이 있다. 그러니까 사라지며 기록되는 작품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내가 향하고 있는가 종잡을 수 없는 틈에 순간마다 나타나는 하프 소리. 현악기의 울컥거림. 회오리 소리. 도대체 폭풍우를 몇 번이나 일으키는지. 갑자기 우주 여행은 왜 시켜주는지. 텔레비전 화면에서 회색 점이 가증스럽게 튀어 다니는 그곳에 나를 왜 빠뜨려 놓는지.
하지만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소용없다. 이 곡은 ‘장면’ 자체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음악인가, 그들이 어떻게 해내고 있는가 같은 판단 자체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냥 듣고 있다는 행위, 뭔가 저 아래로 나타나고 있다는 순간을 탐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눈을 감아야 한다. 연주자들이 다음 음을 긋기 위해 팔을 움직이고 숨을 내뱉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다.
악기와 사람 사이, 도구와 악기 사이, 숨과 악기가 닿는 구간. 가장 그 근처에서 다음 여정을 나아가기 직전을 목격하지 않는 것. 그저 소리와 나만을 남겨놓고 연주자들에게서 벗어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버르토크의 노래를 부담감 하나 없이 내 안에 새겨 넣을 수 있다.
뭐 그러려면, 그들이 연주를 이미 잘하고 있긴 해야 한다. 나는 그전의 두 곡을 통해 그들에게 ‘귀’만 열어놓으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마음 편히 그리할 수 있었다.
버르토크의 곡을 듣고 낯설어했던 처음이 많이 떠오르기도 했고, 이제는 수집할 구간을 알아서, 내가 좋아할 만한 소리를 집어 들기 시작한 내가 웃기기도 했다. 흐름을 잃어버리는 재미를 알아버리다니, 나도 취향이 참 독특하다 여기며, 나는 편안히 버르토크의 품 안에서 휴식을 취했다.
2층에 앉은 나는 눈을 감고 좌석 의자에 머리를 완전히 기댄 채 누워서 무대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 저 소리가 공기 중을 타고 이곳까지 내게 닿는다. 익숙한 얼굴이라 반가웠다.
공연이 끝이 나고 나는 그들이 묻는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겹의 미학 III〉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갔다지. 음악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확장되는가. 글쎄, 그 시작점을 알 필요가 있을까? 눈을 감으니 자연히 보이더라. 도착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