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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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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뮤지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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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의 세 번째 귀환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제작 섬으로 간 나비)가 지난 12월 23일 개막했다. 2022년 초연 당시 깊이 있는 서사와 세련된 연출로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은 이 작품은 2023년 재연과 2024년 독일 쇼케이스 공연을 연달아 올리며 원작의 나라 독일에 역수출한 화제작으로 또다시 관심을 모았다. 관객들의 성원 속에 3년 만에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더욱 깊어진 세계관과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를 통해 관객들을 철학과 사색의 세계로 초대할 것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중세 수도원 ‘마리아브론’을 배경으로 정신과 이성을 대변하는 ‘나르치스’와 본능과 감정을 상징하는 ‘골드문트’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린다. 마리아브론의 수습 교사 나르치스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찾아온 어린 소년 골드문트는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이끌린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동경하며 본받고자 하지만, 나르치스는 그가 자신과는 다른 기질을 타고났으며 수도원 생활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둘은 친구가 되고, 나르치스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나서게 된다.


 

 

두 갈래 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첫 넘버는 감옥에 갇힌 골드문트가 회한에 잠긴 채 부르는 <죽음>이다. ‘나는 왜 태어나 나는 왜 죽는가’라는 질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두고 떠오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한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답을 알려줄 이름을 떠올린다. ‘나르치스’. 오래전 헤어져 이제는 ‘서로의 길 끝에 선’ 그의 정신적 스승이다. 이 간절한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나르치스가 고해 사제로서 그의 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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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원작 소설은 한국에서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는 작품의 핵심이 되는 대비를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제목이다. 분석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의 나르치스와 충동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골드문트는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이라는 두 세계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세계 사이의 균형이다. 


그는 교사이면서도 자신보다 3살 어린 골드문트를 ‘친구’처럼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르치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골드문트의 말에 나르치스는 ‘수도원의 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너의 세계는 여기가 아냐’라는 말은 수도원이 나르치스의 세계이듯 골드문트에게도 자신의 세계가 있으며, 둘의 차이는 위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로 석방된 골드문트가 나르치스를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로 데려가는 장면에서 둘의 관계는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담을 거침없이 뛰어내리며 경사길도 단숨에 내려오는 골드문트와 달리 나르치스에게는 거친 길이 버거워 보인다. 골드문트는 그런 나르치스를 이끌며 자신의 세계를 다정하게 안내한다. 수도원에서와 정반대로, 수도원 바깥에서는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두 인물, 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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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이는 곳곳에서 형상화된다. 회색 석조 건물 안에서 눈에 띄는 골드문트의 밝은 금발, 베이지색 셔츠, 갈색 바지는 네 번째 넘버 <금빛의 새>처럼 새장에 갇힌 황금색 새 한 마리를 연상시킨다. ‘넌 회색의 세상과 어울리지 않아’라는 나르치스의 대사는 골드문트를 둘러싼 돌기둥을 새장의 쇠창살처럼 보이게 한다. 반면 나르치스의 검은 사제복은 무채색의 수도원과 한 몸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각 인물의 속성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도 인상적이다. 나르치스의 노래는 감정 표현이 두드러지지 않고 기교가 절제된 정직함이 돋보인다. 손짓이나 안무와 같은 움직임도 많지 않다. 반면 골드문트의 노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고저가 확실하다. 특히 하이라이트에서 터져 나오는 힘에 압도될 때가 많았다. 다채로운 동작과 격정적인 퍼포먼스는 나르치스가 느끼는 풍부한 감정을 대변한다. 또 둘이 듀엣으로 등장하는 넘버들을 감상하며 지와 사랑 그 자체를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로 이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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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만한 지점은 원작자인 헤세에 대한 것이다. 이 작품의 원작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세의 다른 소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와 공통 분모가 많다. 좀처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섬세한 주인공의 삶을 뒤흔드는 다른 소년 혹은 남성과 교회, 신학교, 수도원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종교적 모티프 등이 그 예이다.


이는 작가인 헤세의 성장 배경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역시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로 해석된다. 헤세는 14세에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학교에 입학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이듬해 도망쳐 나왔다. 이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등장하는 마리아브론 수도원과 그곳을 떠나는 골드문트의 행적과 관련 있는 듯하다. 결국 헤세는 시계 부품 공장 수습공으로 일하다가 서점 점원으로 근무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삶의 안정을 찾았다. 이 역시 마리아브론을 떠난 뒤 견습 조각가가 된 나르치스를 연상시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中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이다. 헤세의 작품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아를 찾아가는 방황과 성장의 기록’이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너에게 부족한 건 오직 너 자신이야.”라는 나르치스의 대사로 암시된다. 나르치스는 자신이 골드문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오직 잠든 그를 깨우는 일뿐이라고 말한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알을 깨고 나오듯,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인도를 통해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의 기억을 되찾는다. 집시였던 어머니의 피가 자신에게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나서 방랑을 시작한다. 


바깥세상에서 여러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던 골드문트는 백작 부인과의 교제를 들켜 투옥되었다가 나르치스의 도움을 받아 사면받는다. 페스트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죽음의 허무에 잠식당한 그에게 나르치스는 죽음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과 탄생의 이면이 파멸과 죽음이라는 말은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경험이 자연의 순환이자 하나의 흐름임을 보여준다. 인도학자인 외할아버지와 불교학자인 외삼촌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동양의 사상에 심취했던 헤세는 부처를 모티프로 삼은 소설 『싯다르타』를 쓰기도 했다. 그의 소설들을 잘 살펴보면 삶이란 무상한 것이며 만물이 연결되어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숨어있다.


 

 

너를 사랑해



또한 이는 『데미안』에서 등장하는 아브락사스, 즉 선과 악을 모두 포괄하는 신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성과 감정, 삶과 죽음, 종교와 세속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완성은 결말에 있다. 수도원에 돌아와 조각을 계속하던 골드문트는 마리아 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방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나르치스의 곁을 떠난다. 남겨진 나르치스는 <죽음>의 리프라이즈 넘버 <마리아>를 부른다. 골드문트가 그리워하던 나르치스는 결국 골드문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골드문트가 남기고 간 자신 안의 사랑을 깨닫고 오열하듯 노래하는 나르치스의 모습은 강렬한 여운을 준다. 하지만 난 나르치스는 늘 골드문트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형태가 변화했을 뿐이다. 골드문트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신이 주신 자신의 사명이라 믿었던 나르치스의 사랑은 아가페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골드문트와 친구가 되어 정신적 교감을 나눌 때의 사랑은 필로스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골드문트가 남긴 ‘안녕’이란 말에 한참이 지나서야 홀로 ‘안녕’이라 되뇌는 나르치스의 사랑은 에로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골드문트를 향한 갈망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나르치스의 말은 그의 사랑이 일종의 욕망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이야기한 에로스의 기원이 완전함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최초의 인간이 반으로 갈라진 뒤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둘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지닌 존재이자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존재니까.


죽음을 앞두고 다시 자신을 찾아온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고해>를 부르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각자의 길 끝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한 그들은 ‘운명의 길을 따라 거대한 원으로 연결’된다. 이성과 지성이라는 두 세계의 양극단에 서 있던 그들이 마침내 합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죽음과 허무에 고뇌하던 골드문트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나르치스는 모든 것이 사라진 뒤 다시 홀로 남았다. 그러나 둘의 세계는 이미 사랑으로 채워졌고, 영원히 비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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