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일에 있어 두말할 필요 없을 만큼 당연한 것들이 존재한다면, 예컨대 여름의 푹푹 찌는 더위가 몰고 오는 짜증스러움이나 수고스러움이라든지, 한편 그런 것이 있음으로 해서 서로 낯선 사람들은 더불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말없이 당연한 것들이라면 힘주어 설명할 필요도, 설득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뿐더러 어쩜 서로 다른 우리는 바로 그런 당연한 것들을 빌어 조심스러운 이야기들을 건네볼 수나 있지 않았나. 사람들이 어색할 때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와 같지 않을까. ‘오늘 날씨가 좀 심하죠? 온난화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가 봐요.’ ‘그러니까요, 혼쭐이 났지 뭐예요.’
이런 어여쁜 수줍음의 배경을 감싸고 있는 당연함들. 예컨대 여름의 더위가 직설적으로 가리키고 있는바, 어떠한 해석도 필요 없이 그저 느껴지는 이 ‘감각’들에 항상 어깃장 같은 의문을 대는 취미가 내게 있어, 그게 이 느닷없는 서론의 까닭이고 무더위가 됐건 그게 무어건 기어이 그 속에서 반대되는 것을 찾는 나는 아마 청개구리이다. 또한 공평히도, 그저 피부로 와닿는 모든 ‘좋음’ 가운데에서도 숨어 도사리는 것들을 미리 헤아리는 나는 정녕 청개구리 같다. 허나 오늘 후자, 즉 ‘좋음’에 대한 반론은 차치하도록 하자. 내 기분이 퍽 즐거웠기 때문이다.
종로5가역을 나오자마자 들른 빽다방엔 에어컨은커녕 고장 난 선풍기 하나 놓여 있었을 뿐이고, 허리 마디를 분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타박거리고 있었으며, 받아 든 컵 홀더는 삽시간에 눅눅해져 컵 표면에 올올이 굵은 구슬땀을 빠질빠질 맺어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기어이 담배 한 모금을 태워야 하는 나로서는 여름이 성가시기 그지없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소리를 내지르는 느낌, 비명을 내지르게 하는 아스팔트의 아지랑이를 타고 연기는 겨울보다 빨리 흩어진다. 정신을 아뜩케 하는 이 열사의 고통을 사랑한다. 기면증 약으로도 다 깨워내지 못하는 속 깊은 안개를 미칠듯한 열기는 거두어갔으니, 나는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그래, 어찌 온통 사랑할 수만 있으랴, 다만 미워하는 동시에 진정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연극 ‘플리백’은 종로5가를 내리자마자 있는 ‘두산아트센터’에서 상영하고 있다. “싸구려 숙박 업소”를 뜻하는 연극 명이 이미 대놓고 함의하고 있듯 썩 유쾌하지는 않은 이야기일 터이나, 한편 포스터에 대문짝 만한 실린 주인공들의 사랑스런 미소로 미뤄보아 어째 익살스레 풀어나가 보려는 심산인 듯하다. 몇 가지 연극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적어도 좋음에서 그에 상응하는 나쁨을, 그리고 나쁨에서도 그에 반대되는 좋음을 찾는 나로서는 그저 코드가 잘 맞는 것이리다. 내가 찾는 곳은 가운데 자리, 어느 한 가지로써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곳.
객석으로 입장하기 전, 동행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은 즐거운 일, 티켓은 두 장 모두 내 손에 쥐인다. 그녀는 정각에 맞추어서나 도착한단다. 미리 지연 입장하는 방법 등을 알아보았다. 인포는 9분 후 지연 입장이 가능하단다. 지금껏 연극 시간을 가까스로 맞춰 숱한 버저비터를 던져댔건만 막상 지연 입장은 처음이라 흥미로웠다. 포토 존 앞에 숱하게 사진 찍던 사람들도 죄 사라지고, 극장 바깥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마치 오늘 연극이 없던 것처럼, 마치 토요일 등교한 학교처럼. 주말에도 교정에 빗질하는 수위 아저씨들 같이 스태프 몇 명만이 제자리를 빙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멀찍이서 뛰어왔다. 아직 시작이 2분이 남았기에 우린 뛰어도 보았지만, 입장은 이미 마감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극장 바깥에서 연극을 구경했다. 입구 근처의 저화질 스크린과 잘 들리지 않는 스피커 소리를 째려보았다. 리뷰를 써야 한다는 조바심, 그러나 얼굴도 잘 아니 보이고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아 애만 탔다. 그리고 내 타는 감정을 굽어보았다. 내 안엔 두 명의 사람이 있어, 느끼는 나와 그것을 관찰하는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는 느끼고 한편 또 다른 나는 그것을 헤집어보곤 하였으니 나는 초조한들 초조하지 아니하다. 우리에 갇힌 채 출전을 벼루는 투우 같이, 콧김을 울리며 지축을 다짐하는 준마와 같이, 초조함이 고조하는 갈증을 느낀다, 갈증은 탐닉케 하고, 나는 관객 스스로가 연극을 탐하는 것보다 더 깊은 관람을 가능케 하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막이 바뀌는 어둠을 틈타, 스태프의 인도를 받아 자리를 찾았다. 여인 하나가 너른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독백 연기인가, 더없이 좋구나, 하고 생각한다.
*
줄거리를 죄다 읊는 건 그만두도록 하자. 그리 다짐한들 잘되지 않을 나를 알지만, 그건 그다지 멋이 없을 뿐 아니라 이번 연극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절묘하게 활용한 탓에, 서사 전개가 선형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 이야기를 시간순에 따라 정돈된 글로 옮기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만, 극이 멋지게 꼬아둔 구조의 절묘함을 글로 쫙쫙 펴 다림질을 한 듯이 재바르게 정돈한들, 이 연극을 담아낼 수 없기에 무용하다. 왜냐하면 분열되어가는 자아를 노래하며, 그러한 사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이 서사의 단층 구조를 단선적으로 표함으로써 멋쩍은 꼴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오히려 그것은 ‘받아 쓰는 이’로서의 내 역량 부족만을 드러낼 뿐이다. 즉, 이 연극의 서사는 멋진 단층화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말로써는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이렇듯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돼 서로 결 다른 서사의 지층이 단층을 쌓듯 중첩되고, 관객은 지금 이야기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다 알지 못한 채 멍하니 배우의 입만 치어다 보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이 그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에 일말의 어려움은 없었는데, 독백 연기의 성패는 배우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이고, ‘김주연’ 배우는 능히 그것을 행했다. 그저 배우가 능히 우리의 관심을 훔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일어나는 방식. 아무런 예측도 해석도 불가, 홀린 듯 그녀에게 이끌려 따라가다 보니 시간은 끝나 있고, 되짚어 볼 때에 모든 퍼즐이 이미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정교한 설계라니, 작가와 연출가에게 이른 찬사를 보낸다.

1막의 어둠이 끝나 막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너른 카페에 혼자 앉아 느닷없이 섹스 이야기를 꺼낸다. 성욕이 무지하게 많은 여인인가 했지만, 극은 그러한 납작한 선입견을 유도해 놓곤 곧잘 부정한다. “아, 요즘따라 섹스를 참을 수 없어. 어제도 폰허브를 켜서 자위를 왕창 했지. 분명히 성욕은 아닌데, 그 생각을 견딜 수 없어. 성욕보다, 누군가 내 몸을 원한다는 느낌. 나라는 존재를 욕망한다는 그 느낌, 아-” 이에 곧잘 몇 여인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리뷰에서 써먹었으니 생략. 그녀와 내가 한때 더없이 친밀했던 만큼 나는 저 감각에의 생생한 소묘를 길이 간직하고, 내 몸으로서는 차마 느낄 수 없는 저 감각을 할 수 있는 한 깊이 이해한다. 연극의 시작과 동시에 느닷없는 섹밍아웃을 당했지만, 나는 이미 저 캐릭터의 전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곧잘 연민했다.
연극은 이상 성욕자인 그녀의 삶을 다룬다. 그녀는 자각 없는 중증 마조히스트이고 속으로 경멸하는 남자와도 기꺼이 어울릴 뿐 아니라, 속물 같은 사내들에게도 섹슈얼한 추파를 던지곤 했다. 하물며 자신이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존재의 남자에게까지도. 그녀는 자신을 참을 수 없다. 어째 기회만 생겼다 하면 부러 물건을 떨어뜨리고는 ‘아찔한 힙라인 자세’로 유혹하는데, 정작 유혹의 당사자는 자각조차 못 하는 꼴이 초라하면서도 해학적이라마는, 그것을 연기한 배우의 형상이 설득력을 반감하는 것이 이 극이 지니는 유일한 옥의 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일방적이고 납작한 권선징악 이야기로 빠르게 전락하지 않고 역설의 균형을 획득하는 지점은 아마 여기에 있지 싶다. 그녀는 다른 이의 존엄, 말하자면 가장 소중한 친우의 남자를 탐하고 유부남을 유혹할 만큼 ‘그의 그녀들’이 지니는 존엄에 터무니없도록 무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잃게 되는 자신의 존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심했다. 유부남은 그녀의 애널을 억지로 탐한 다음 날, 그녀가 당연하듯 건넨 연락에 냉정한 선을 그었다. ‘어젯밤은 일이 그렇게 흘러갈지 몰랐다. 나도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다.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라 친구 사이라면 얼마든지 우리는 다시 볼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곤란할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기막힌 것은 그녀가 냉정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녀의 대응에 있었다. “와-, 진짜 컸는데, 그게 어떻게 다 들어갔지?” 하며 희희덕거리는 그녀는 자신을 존엄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기에 일말의 좌절도 자기연민도 겪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중요한 무언가를 철저히 상실해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유쾌하게 굴 수가 있는 ‘플리백’의 저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치르는 대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플리백’, 즉 싸구려 숙박업소가 된다.

물론 누굴 탓할 수 있으랴, 애초에 이건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 그러나 이 연극이 가리켜 드러내려는 것은 이상성욕과 도덕 불감증에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즉 존재의의와 허무에 대함이다. 그녀에의 도덕적 단죄는 내 몫일 필요도 없이 이미 그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치르고 있었기에, 제4의 벽 너머, 멀찍이서 공정히 바라볼 수 있는 관객인 나에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대두한다. 물론 저게 허구가 아니라 내 친구의 일이었으면 막말로 로킥 스무 대는 넘게 맞았을 것이다.
그녀는 잊고 미루고 외면하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쳤고, 마치 ‘참존가’에서 사비나가 그러하듯,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일”에 중독된 채 멈추지 못할 도주의 나선에 오른 것 같다. 그녀에게 마땅히 스스로 슬퍼할 자격이 없었던들, 실로 그녀에겐 아무런 자격도 없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그런 당연한 감정적 반응이 결여된 것은 전혀 다른 사실을 가리킨다. 그녀는 자신을 희화화함으로써 내면화된 자기혐오를 뒤틀리게 발산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자기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단죄하는 듯하다.
그러나 정녕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있을까?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처럼, 마치 싸구려 숙박업소 취급을 받는 것에 있어 일말의 동요도 느끼지 못할까? 그러므로 그녀에겐 오로지 끝없이 차오르는 욕구불만과 무심함과 유쾌함만이 존재하며,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이 모든 것은 지연된 것일 뿐이고, 그러므로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일들이다. 다만 미뤄왔던 것이 한꺼번에 왔을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얼만한가. 한 번에 한 가지씩을 꼬박 대면하기도 벅찬 것이 인간일진대 말이다.

관심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열망,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필수불가결한 이 욕망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다. 사람에 저마다 높고 낮음인즉 정도의 차이만이 자리할 뿐, 어느 하나 빠짐없이 열망을 품고 있음을 오래 보아왔다. 목소리와 말투, 몸짓과 손끝 하나하나로부터, 심지어 대화의 소재마저 그 안 깊숙한 곳에는 “사람을 향한 열망”이 비밀히 자리해있음을 보아왔다. 나아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니는 떨림과 깊이 수그려 감춘 눈빛은, 저 열망의 반대편으로 뻗어진 그림자임을. 그러므로 여느 누군가 사람의 가운데 서 훤칠한 이야기를 일삼는 때에도, 지금 이 순간 저 이가 모두의 주목을 사기 위해 고심했을 숱한 밤들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선 참 서글픈 사랑 이야기이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관심과 사랑은 인간을 지독히도 긍휼하게 만드는 듯하다. 구걸하는 걸인처럼 관심을 구가하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가. 그럼에도 주어지는 한 줌 관심에 부끄러움도 다 모르고 활짝 피어나는 얼굴은 최고로 비극적이다. 철저한 고독의 가능성을 모르는 사람은 저기 코웃음을 흘릴 것이나 그건 이미 가진 자의 행복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내가 보아온 세계에는 외로운 인간들로 더욱 아득했다.
어쩜 그래서 사람은 도망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제아무리 다가가려 애쓰고, 마음 열어 교감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왔지만 번번이 실패했음에, 그러나 우리가 도망치는 것은 한 겨울 무쇠 벽 같은 사람들의 저 냉랭함보다도, 그 앞에서 처절히 무력했던 자신의 존재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난 여름이 좋다. 외투를 벗기는 햇살처럼, 무더위는 사람들의 꽁꽁 웅크려 감추어둔 마음을 드러내곤 하기에. 그 안에 짜증과 경멸이 있다 해도 좋다. 나는 세상 앞에 자기 마음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 좋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내 안에 사랑과 경멸이 두루 있다 해도 좋다.
도망치는 인간, 미스 ‘플리백’은 스스로 고백했듯 성욕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사람의 관심을 살 수 있는 방식이 ‘성적 접촉’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내로서 다음 말을 꺼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껏 열렬히 토론한바, 여인에겐 고약한 선택지란 딜레마가 있는 듯하다. 육체적 접근이라는 달콤한 선악과, 얼마든지 쉽게 꾀내일 수 있지만, 그 결과 얻게 되는 것이 빈 껍데기뿐인 사랑. 그러나 택할 수 있기에 고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이 주제가 지니는 넌센스이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나는 여전 단정 짓지 못하겠다, 내가 그 숱한 고독 가운데 사무칠 제 황금으로 빛나는 선악과가 내 눈앞에 놓여 있더라면, 분연히 그것을 거절할 수 있었을는지. 이는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 바깥의 일이므로, 나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일랑 그만두고 의문으로 남기기로 한다.
이상, ‘관심을 향한 굶주린 열망과 성욕이란 선악과’라는 주제에 대해 감각적으로 이해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아무런 오해 없이 조리 있게 설명할 만한 언어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런 연극은 대체하기 어려운 위상과 의의를 성취하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한 없이 기묘하고 서글픈 것들은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보여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연극이 ‘보여준 것’에 대한 내 마땅한 찬사가 충분하지 싶다. 오늘의 연극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