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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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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에 다녀왔다. 오늘 연극명은 좀 길다.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이하, 사랑의 죽음).’ 제목에서 이미 이 연극이 몹시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럼에도 왜 나는 스스로 선택했을까 이것을. 실은 그것만이 지금 내 감상, 자유롭고 파괴적이되 지극히 개인적일 수가 있는 나의 이 감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이다. 


나는 분노와 경멸과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며 공연장을 빠져나온다. ‘아아- 정말이지 싫다, 너무나도 싫어, 그러면서도 그대를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머릿속에선 이렇듯 감정과 사유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고, 나는 조금 걷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쏟아지는 생각들을 그 단계 너머로 조금 더 뻗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산 허리를 걸어 내려오며, 푸른 녹음을 바라보느라 내 머릿속의 생각은 빠르게 진전되고 이내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번 후기를 어떻게 써내려야 할지 감이 잡혔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한 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서 팜플렛을 읽으며 연극을 기다렸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나머지 한쪽 귀로는 ‘오늘 전석이 매진’이라는 들뜬 스탭들의 잡담과 좌석 안내하는 소리, 그리고 나무 계단을 부닥이는 뭉툭한 구두굽 소리가 들려온다. 기다리는 동안의 이 어수선한 소란은 언제나 감미롭다. 허나 내가 사랑하는 이 소란을 깨며 어딘가 불길한 공연 안내가 울려 퍼진다. “본 공연에는 자해, 유혈이 표현된 장면 등 다소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읽다 만 팜플렛을 덮고,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한다. 불쾌한 표현이 보통 내포하는 본능적 거부감보다는, 대개 그러한 장면들은 불필요하고 도발적이며 과장되다 생각하기 일쑤였던 까닭이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극은 불쾌한 고주파의 소리를 내며 시작을 알린다. 투우사의 천처럼 붉고 보드라운 커튼이 열렸다 닫히고, 반라의 사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채  멈추어 있다. 세 번의 막 전환, 시끄러운 고주파의 소리, 이해할 수 없는 사내의 포즈. 소리는 나를 자극해 예민케 했고, 이에 나는 이 소리의 존재 의의를 찾기 시작한다. 필요한 것이었는가!


나는 많은 것에 있어 인과를 따진다. 그러므로 이 불쾌는 왜 여기 존재하는가 하는 따위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 참았고, 그동안 눈을 굴리어 무대를 모조리 뜯어보았다. 마침내 불쾌감이 불쾌함으로 변모되기 전, 내가 유보한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것의 이유를 찾아댔고, 그 존재 의의는 연극 내적으로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내의 세 번째 포즈를 끝으로 일시에 정적이 찾았고, 우리의 주인공 벨몬테가 등장한다. 이내 나는 이것이 뜬금없고 불필요하다 생각했고, 관객을 자극해 불쾌감을 유발하려는 의도라고 판결 내렸으며, 그것 자체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불쾌와 그것의 판결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가, 아니면 좁고 편협한 생각에 지나지 않음인가, 아니 실은, 그렇게 판단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불쾌와 불편에 대해 내가 규정하듯, 나 또한 그렇게 규정될 수밖에 없지 않음인가. 그렇다면 나는 세간으로부터 주어질지 모를 폄하와 빈정거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침묵하고 거짓 웃음과 과장된 찬미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꺼이 욕하고 다시 욕보여야 하는가. 이는 연극의 시작과 동시에 나를 찾은 테마이고, 내가 오래도록 골몰한 테마이며, 이번 연극을 관통하는 내 감상의 관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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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몬테는 역사상 유명한 투우사이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이상한 춤을 추다간, 다리털을 민다. 아니, 면도칼로 자기 무릎을 긋는다. 미세하게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종아리를 모조리 적신 다음 바닥을 물들였다. 그리고 투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이하, 기억에 의존하므로 불완전함을 고려해주길. 

 


‘투우는 축제가 아니라 죽음을 위한 광기이다. 내가 바라는 건 소의 거친 뿔이 기쁘게 내 배를 관통하는 것이고, 그것이 투우에 필요한 전부. 누가 멀쩡한 두 다리가 투우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말했나, 투우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러한 죽음을 원하는 광기이다. 그러므로 나는 행운아이다, 그러한 죽음을 바랄 수 있는 나는. 투우는 존재의 방식이고, 또한 사랑의 방식. 그것은 의지로 행함이 아니라, 그것을 치열하게 바라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은, 그 죽음을 스스로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그녀는 앉아서 격렬하게 춤을 춘다. 그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아니 그것을 전혀 의도치 않는다. 강짜로 버둥이며 아무렇게나 흔들어대는 몸짓, 같았다. 그러다간 땅바닥에 쓰러져 눕고, 절규한다. 그녀는 울면서 노래를 부른다. 가슴을 두드린다, 허벅지를 때린다,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목을 조른다. 죽음과 자기파괴에 대한 지향을 그려내려는 것 같았다. 


다시 의자에 앉는다. 그녀의 다리는 온통 피범벅이다. 손등을 긋는다. 빵을 뜯는다, 다리에 흐르는 피에 빵을 찍고, 입에 넣고 씹는다, 손등을 허벅지에 닦는다. 빵을 뜯어 이번엔 손등에 흐르는 피에 찍는다, 먹는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고, 이마에 피가 묻는다. 정신없는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그때 다섯 사내가 아기들을 안고 등장한다. 살아있는 아기들은 음산하고 시끄러운 노랫소리에 이내 객석을 메울 만큼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린다. 다섯 명의 아기가 저 마다의 박자로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배경에 흐르고 있는 노래의 빈 공간을 채운다. 1막 끝.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방법뿐. 우리는 육신이란 십자가에 묶여 있다. 우리는 육신이란 십자가에 묶여 있다. 우리는 육신이란 십자가에 묶여 있다. 더 올라야 할 곳이, 더 살아내야 할 것이 있을까. 소여, 나를 죽여줘. 그 뿔로 내 배를 꿰뚫어줘. 죽고 싶어, 왜냐면 나는 살고 싶으니까. 우리는 죽으며, 살아가. 살아간다는 것은 거듭해서 죽어가는 것. 그건 비극이 아니야. 진짜 비극은 출생이지. 나는 점점 더 슬퍼져. 나는 점점 더 슬퍼져. 나는 점점 더 슬퍼져. 내가 그리운 건 네 따뜻한 손길이 아니야. 그리워, 너의 강간이. 나를 꿰뚫던 너의 강간이.'

 

 

막이 다시 열린다. 검은 소와 벨몬테가 서 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물씬 풍긴다. 벨몬테는 향로를 흔들고, 연기는 풍성하게 피어올라 객석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향로를 내려놓고, 보자기에 싼 책을 꺼내어 소 앞에 마주한다. 그리고 독백이 시작된다. 배경을 이루는 스크린 위에는 ‘절망의 시작, 에밀 시오랑’이라고 적혀 있다. 그녀는 투우를 흉내내기 시작하고,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주 커다란 북소리, 피부와 심장에 직접 닿을 정도로 커다란 고동이다. 


리뷰를 위해 찾아보니, 에밀 시오랑의 실제 저서는 ‘절망의 시작’이 아닌 ‘절망의 끝에서’이다. ‘그는 절망과 고독과 죽음에의 희구, 허무와 염세에 편집적으로 천착했다’는 작가 소개가 눈에 띈다. 이는 본 극의 작가, 아니 연출가 안헬리카가 생각하는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고,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원문을 변형 차용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우울과 고독에 휘감긴 채 삶의 허무와 염세에 천착하는 사람의 모습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를 내가 강렬히 경멸하는 것은 몰이해로부터 생겨나는 무관심함도, 대척 관계에 대한 배타적 적의도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잘, 어쩌면 너무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멸은 동족혐오이자 내가 그것, 허무와 염세와 우울을 스스로 대해온 방식이다. 


나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범람하는 감정 그 자체를 좋아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때 감정은 우리의 정신을 변형시키고 속여, 그럴듯한 낱말들로 우리를 위무하고 나아가 기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기는커녕 그런 자신에게 매료된 나머지, 실재하는 세상과 자연적인 본능으로부터 유리된 채 서서히 자신을 역행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부정하여 거부하고, 차라리 지금의 현실이자 비극적인 처지를 받아들여 긍정함에 따라,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바라는 것은 얼만 한 모순인가! 오 인간의, 인간만의 코미디인가! 


물론 그것을 거짓 사상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이 여러 인간으로부터 동시에 관찰되는 하나의 패턴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며 인과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동료 인간들이 그것을, 모순을 경멸하고 저항하기를 바라왔다. 살아있는 존재가 삶이 아닌 죽음을, 마찬가지 사랑이 아닌 혐오만을 이 온몸으로 바란다는 말… 말, 그 한없이 가벼운 말은 터무니없는 모순이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자살하지 않는가, 자살에 대한 찬가는 이 땅에 널리고 널렸다. 혹자는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본능에 휘둘린 채 내린 피동적인 행위가 아닌, 순수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라 말하며, 자유 의지의 극치라고도 말한다. 이 세 치 낱말이 부여하는 자긍과 자부심 속에 기쁘게 죽어버리지 않고 뭘 했는가! 


왜 이적지 죽어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왔는가! 실천 의지가 없는 이따위 말이라니, 바라 마지않는다는 죽음 대신에 쓸모없는 혓바닥이나 놀리며 자신과 사람들을 기망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그대는 죽을 자신이 없어서라는 변명 대신에, 죽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살고 싶다고 말해.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던 죽음에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고 싶음이라고, 오히려 너무나도 잘 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원했기 때문에 거꾸로, 그 방법을 몰라 두려워 울다 지쳤음이라고 말해. 살고 싶었기 때문에 죽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러므로 끝내 살고 싶음이라고 명확하게 말해. 울면서, 빨갛게 충혈되고 퉁퉁 부은 눈으로 말해 주. 


결정권 없이 피투된 우리 존재, 모든 생명은 주어진 삶을 어찌 됐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비극은 주어진 삶의 지금, 즉 현실이 아닌 출생이었다는 작가의 말에 일정 동의한다. 허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죽음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참이나, 현실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폭력적으로 삶의 예찬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좋아서, 살아볼 만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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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너의 강간이”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말을 시작으로, 벨몬테는 미친 짓을 시작한다. 팔을 아무렇게나 뻗고, 입으로는 “버버버버-” 하며 어리석은 소리를 낸다. 다시 한 번, 전혀 미학적이지 않은 몸짓이었고 작가는 그것을 의도했다. 그녀의 의도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자기 몸을 두들기고 쥐어뜯고 소의 조형물에 목을 감싸 안고, 또 갑자기 윽박지르는 것을, 죽음과 강간에 대한 찬미, 무의미하고 해체적인 찬가를 10분 동안 반복한다. 


소 앞에서 발광을 하다간 느닷없이 벽으로 가서 양 주먹으로 쾅쾅 친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 앞에 엉덩이를 흔들고 팬티를 벗는다. 입으로는 푸르르르 하는 소리를 낸다. 땅에 눕는다. 다리를 벌린다. 가슴을 풀어헤친다. 이런 무의미한 몸짓에 신물을 느낀다. 막이 내려가고, 관객 몇이 자리를 뜬다. 


이것은 투우와 삶, 나아가 사랑을 동일시하려는 은유의 시도이다. 삶도, 투우도 그것에 있어 승리하기 위해선 두려움을 각오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각오를 넘어 그것, 소의 뿔에 자신이 관통되기를 소망해야 하며, 그래야 소의 날카로운 뿔과 삶의 거친 풍파를 향해 거꾸로 흔들림 없이 돌진할 수 있다는 것. 허나 그것은 승리를 위함이다.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벨몬테. 나는 살기 위해 죽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실 생존과 승리를 위함이라고. 정말로 꿰뚫리길 원했다면, 그것만이 전부이자 진실이라면, 그대는 왜 아직도 나른한 죽음을 택하지 않았는가. 


한편 사랑도 마찬가지인가? 그대는 투우와 삶을 넘어, 사랑을 일전의 모순에 융화시키려 한다. 소에게 가랑이를 벌려 자신을 정복하고, 무참히 짓밟게 한다. 정말 사랑도 그러한가? 사랑도 그 정 반대편의 것, 폭력과 지배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라고 내게 말하려 하는가? 그러나 사랑이 온통 온유하고, 다정하고, 따스운 것만이 아닌 것처럼, 그 반대편도 아니이며, 오히려 개중에는 후자로부터 더욱 멀지 않은가? 


사랑이 그 정 반대편의 것인 강간으로 완성된다고, 또는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성취된다고 내게 말하려 하는가? 여인의 사랑이 남근에 의해 꿰뚫림으로써 완성된다고 내게 말하려는가? 여인의 사랑은 마지못한 수줍음과 파헤쳐지길 원하는 비밀에의 침묵이며, 사내의 사랑이란 그 거짓 반대를 무릅쓰고 우직하게 꿰뚫어 쟁취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라고, 또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는가? 내 그대를 대신하여 그 사이에 멀고 복잡한 논리를 얽어볼 순 있겠지만,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시도이다.


“아-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 늘 해오던 생각이지만, 돈 주고 바보짓을 보는 기분은 최악이야. 허나 더욱 열이 받는 것은, 저 무작위한 혼돈 위에 부여된 사람들의 찬사와 평론가들의 비평, 그로 인한 나의 자기 검열이야. 저것 또한 성역에 놓여 있는가? 작품은 설명하려 하지 않고, 이제 내가 알아서 해석해서 그 의미를 끼워 맞춰야 하지. 다름과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니까. 참 쉽고, 참으로 건방지군. 


나는 소위 현대예술이라며 산만하고 정신없고 미친 척을 하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그것을 의도한 것이라 당당하게 말하지만 실은 그 표현과 전달에 실패한, 더구나 그 실패를 관객에게 떠넘기는, 성역의 반열에 든 이 건방지고 나태하고 오만한 작태가 싫다.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상징을 무대 위에 던져놓기만 할 뿐, 아무런 연관성도 제시하지 않은 채 날 더러 알아서 해석하라 하는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은 문제없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을 두고 아름다움이라고 우격다짐하는 것. 박수를 쳐야만 하는 것, 하지만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이것. 


그대도 내게 설파하려 하는가? 무의미의 의미, 추함의 미학, 역설과 일부 반례를 통한 논리 전도, 다양성이라는 낱말의 절대적 비호 하에 아무렇게나 끼워 맞춘, 우스꽝스러운 사상의 행진을? 보통과 일반이란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성과 그것의 전복을 위한 대칭 반전의 시도를? 나는 그런 언어 논리를 좋아하지 않고, 그런 나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고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사람이며, 신체적으로도 남성이다. 이제 나는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변호하기를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고 몰락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2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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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헬리카(연출가 본인), 다른 이야기를 할 순 없겠어? 너의 글이나 사랑에 대한 것 말고, 다른 것을 말할 순 없겠어? 아무도 그런 것엔 관심 없다고.” 

 

나는 사랑받기 위해 글을 쓴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연극으로 사랑을 구걸해왔고, 이런 이상한 글을 써왔고, 나는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것이 현실의 좆같음이다. 


내 글은 쓰레기다. 내 글의 수준은 독자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내 글도 유명 작가와 평론가들에게 읽히기를 원하나, 내 글을 읽는 건 페미니스트와 멍청이, 여자, 호모, 말 많은 허풍쟁이와 파리의 허영심 높은 머저리들뿐. 


넌 그들을 역겨워해. 하지만 그들은 너를 사랑하고, 그들만이 너를 사랑하지. 넌 그들의 찬사가 쓰인 편지를 받고 웃어. 그리고 그 찬사의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지지. 너는 대작가들이 너의 글을 읽어주길 원하지만 너의 수준은 떨어졌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는 역겨워한다. 


네가 원했던 건 남자와 여자의 사랑. 너는 사랑받기 위해 일하고, 너는 사랑받기 위해 일하고, 너는 사랑받기 위해 일하고, 하지만 일을 멈추면 더이상 누가 너를 사랑하지? 넌 계속해서 글을 쓸 거야. 구원을 위해, 사랑을 위해. 예술과 삶의 형벌, 결국 터져 버릴 거야.’


파리에 내 연극을 올리고 싶지만 파리는 돼지 같은 머저리로 가득하다. 이 돼지들은 권리만을 폭식한다. 의무 없는 권리를 계속해서 삼켜댄다. 위선적이고 멍청하고 역겨운 자들과 빌어먹을 수평주의, 오만과 자만을 탐식하는 이 나라. 그들은 너를, 너의 예술을 싫어한다. 예술의 가치는 이미 노동보다 아래이다.

 


3막은 스틸컷에서 강렬한 미장센을 담당하던, 소의 해부된 단면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하지만 주인공 벨몬테, 혹은 연출가 본인인 안헬리카가 그 주위를 서성이곤 그냥 다시 올라가 버린다. 그리고 독백을 시작한다. 독백이 많고 대사량과 발성은 발군이라, 휘갈겨 쓰면서도 따라가기 벅찼다. 3막의 독백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보이며, 그것은 다분 자기혐오적이다. 나는 작가의 대사를 들으며, 이상하게 작가와 화해하기 시작한다. 동질감을 느끼며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위에서 읊었던 나의 경멸과 자기검열, 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은 선입견에 지나지 않았다. 


내 선입견과 달리, 작가는 무의미의 역설과 논리 전도를 설파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은 불쾌감을 의도적으로 유도해놓고 자학적 자기고백을 시작한다. 내 경멸보다 깊은 혐오가 그녀의 입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나의 감정은 눈 녹듯 흩어지기 시작한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글을 썼으나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그녀의 발칙함에 심히 놀랐다. 이렇게나 투명하고 직설적이며, 파멸적인 경멸이라니. 그에 공명하여 나의 경멸 또한 세상에 이끌리듯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리뷰는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솔직한 것이, 발칙한 것이 좋다, 무턱대고 내뱉는 무지와 혐오가 아니라면, 그것이 경멸일지라도. 허나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내가 망설이는 것은 이뿐이다. 내 안에서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혐오와 경멸의 간극을, 내가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망설인다. 혐오가 아닌 경멸, 차라리 그것은 내게 있어 용인된다. 무엇에 비하여? 무언으로 강제되는 올바름과 그에 대한 침묵과 거짓에 비하여. 그리고 그러한 솔직함이란 다분 자기파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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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이번 연극을 관통하는 나의 관점은 솔직함과 자기 파괴 사이의 딜레마이다. 두려움으로 침묵하고 거짓 웃음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꺼이 욕하고 다시 욕보여야 하는가. 살기 위해선 위험 앞에 침묵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그 위험을 향해 달려들어야 하는가. 그녀는 발칙함을 택했다. 그때 비로소 연극의 주제의식이 내게 닿는다. 살기 위해선 거꾸로 죽음을 향해 달려들어야 한다는 말이. 이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겪었을 공포의 절반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역설은 성공한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경멸을 있는 그대로 꺼내어 정면으로 돌파했고, 이렇듯 인정받아 여기 먼 나라에까지 닿은 것일 테니 말이다. 그 모습은, 아니 그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그려내고 싶었던바, 투우 같았다. 


다시금 노래가 시작되고, 괴성과 괴상한 안무는 재개된다. 객석을 향해 뒤돌아 팬티를 벗고 엉덩이를 깐다. 한 사내가 외팔 외다리의 남자를 안고 들어선다. 그를 벨몬테에게 내려놓고, 벨몬테는 그 외팔의 남자를 껴안는다. 막이 전환되고 소는 죽어 있다. 소는 트리스탄이고 자신은 이졸데라고 말한다. 그리고 키가 큰 아프리카 흑인이 전통 복장을 한 채 막으로 들어선다. 둘은 함께 껴안고 오래도록 왈츠를 추고, “사랑해, 헤이즐”이라는 글귀를 끝으로 연극은 끝이 난다. 


결말에 대한 해석은 모호했지만, 내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3막을 기점으로 변화한 나의 태도이다. 나는 분노와 경멸과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며 공연장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나는 흥분 상태였고 내 머릿속에서는 연극의 마지막 한 줄 평이 얽어지고 있었다. ‘투우, 사랑을 위해 경멸하고, 살기 위해 죽다.’ 그녀의 관객에 대한 발칙한 경멸은 거꾸로 사랑을 쟁취했다. 그녀의 경멸이 오롯이 사랑을 위함이었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나의 경멸은 그러하다. 그런 생각을 끝으로 남산을 걸어 내려온다. 온전한 사랑도 아니, 온전한 경멸도 아니, 그 사이의 오묘한 긴장상태를 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리뷰를 끝마친다. 폭발하듯 감정을 분출하고 6시간은 자각 없이 지나 있다. 연극이 유발한 폭발적인 사유는 이만하면 충분히 옮겨진 것 같다. 오늘의 공연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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