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문동에는 성기훈도, 덕선이도, 둘리도 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산다."
지역 활성화를 위한 주민 주도의 문화 기획 워크숍이 쌍문동 백운시장에서 열렸다. '잃어버린 것들의 계보'라는 이름의 이 워크숍은 매주 토요일 2시간씩, 6명 내외의 소규모 인원이 모여 네 차례에 걸쳐 각 주제를 탐구한다. 로컬, 돌봄, 생태, 공동체라는 단어들이 왜 지금 의미를 가지게 됐는지, 어떤 역사적·구조적 문제에 응답하는 것인지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자리다.
첫 번째 회차는 네 가지 주제 중 '로컬'을 다뤘다. '장소는 어떻게 다시 의미를 가지게 됐는가'라는 질문 아래, 모더니즘이 장소를 어떻게 균질화했는지, 이에 응답한 철학자들은 무엇을 말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떤 예술적·커뮤니티적 시도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워크숍이 열린 쌍문동과 백운시장이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시도해볼 만한 기획들까지 논의했다.

# 모더니즘이 지운 것들 — 장소의 부재와 균질함
서울 강남의 스타벅스와 부산 해운대의 스타벅스는 같다. 메뉴가 같고, 인테리어가 같고, 컵이 같다. 전 세계 공항은 더 극단적이다. 어느 나라에 내려도 같은 면세점, 같은 패스트푸드, 같은 조명이 기다린다. 이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느낌을 준다. 그 '무언가'가 바로 장소성(placeness) — 특정 장소만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 역사, 관계, 냄새, 소리 — 이다. 모더니즘은 이것을 비효율로 취급하고 지워왔다.
장소가 균질화된 과정에는 세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첫째, 근대 도시계획은 기능 중심으로 도시를 설계했다. 그 처음은 프랑스의 파리였다. 파리 구도심 전체를 허물고 격자형 고층 아파트 단지로 대체하는 브아쟁 계획이 제안된 것이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고방식이 전 세계 도시계획의 표준이 되었다. 집이 기계라면 동네는 부품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공장이 된다. 이 논리로 전 세계 도시의 구도심이 철거되고, 규격화된 아파트 단지와 쇼핑몰이 들어섰다.
둘째, 20세기 모더니즘 도시는 자동차를 위해 설계되었다. 넓은 도로, 주차장, 교외 주거지, 쇼핑몰이 세트로 등장했다. 자동차 도시는 걷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걷기가 사라지자 우연한 만남이 사라졌다. 골목에서 이웃을 마주치는 일이 없어졌다. 셋째, 신자유주의 경제가 확산되면서 장소는 부동산 가치로 환산되었다. 오래된 동네가 저평가된 자산으로 '발견'되고, 자본이 유입되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밀려났다. 뉴욕 소호, 런던 쇼어디치, 서울 경리단길과 성수동이 이 과정을 공유한다. 지역 고유 문화가 장소의 브랜딩에 소비된 뒤 사라지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마르크 오제는 이처럼 균질화된 공간을 '비-장소(non-place)'라고 불렀다. 공항,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은 기능적으로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 관계도, 역사도, 정체성도 없는 공간이다. 장소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은 구체적이다. 특정 장소에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와 감정(집단 기억), 이웃이 서로를 돌보는 비공식 네트워크(사회 안전망), 그 지역의 기후와 식물과 동물에 대한 경험적 지식(생태적 지식), 그리고 '나는 어디서 온 사람이다'라는 감각(정체성의 닻).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비-장소에서 보내며 이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 로컬의 실천들 — 예술적·커뮤니티적 시도
이론적 논의를 넘어, 워크숍에서는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로컬 운동의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이 운동들의 공통점은 장소의 고유성을 자원으로 삼되, 그것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경제화하려 한다는 점이다.
로컬 운동의 선구적 사례는 198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우푸드 운동이다. 음식 저널리스트 카를로 페트리니는 로마의 스페인 광장 앞에 맥도날드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이 운동을 시작했다. 슬로우푸드는 단순한 미식 운동이 아니었다. 지역 음식을 지키는 것은 지역 농부의 삶을 지키고, 지역 생태계를 지키고, 지역 문화를 지키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운동의 정신은 슬로우시티, 로컬 마켓, 파머스마켓, 로컬 소비 운동 전체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도 마르쉐@혜화, 서울새벽시장 같은 파머스마켓이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운영되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지역 경제 순환의 장이 되고 있다.
소규모 프로젝트들도 주목할 만하다. 동네 지도 만들기 워크숍은 주민들이 함께 자신의 동네를 손으로 그린 지도를 만드는 프로젝트로, 전문가 없이 주민이 직접 장소 전문가가 되는 과정이다. 인쇄 지도나 앱이 아닌, 주민의 기억과 애착이 담긴 지도를 만들면서 장소에 대한 대화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로컬 진(Zine) 발행은 상업 광고 없이 주민과 크리에이터가 직접 편집·제작하는 동네 소식지로, 부산 «로컬레터», 전주 «전주를 말하는 법» 등 전국 각지에서 발행되고 있다. 플랫폼 없이도 지역의 목소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대규모 사례로는 일본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가 있다. 구리 제련소 오염으로 쇠락한 인구 3,000명의 섬을 현대미술 성지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로, 마을 빈집을 예술 공간으로 바꾼 '이에(家) 프로젝트'에서는 주민이 직접 참여했다. 예술이 지역을 살린다는 명제를 세계에 증명한 사례다. 한국에서는 어반플레이가 서울 익선동·연남동에서 빈 상가를 로컬 크리에이터에게 연결하고 골목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동네 문화 기획사'라는 새로운 직업 모델을 제시했다. 강릉은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커피 문화가 뿌리내리며 독립 카페들이 집적되어, 단일 기획자가 아닌 커뮤니티 전체가 만든 로컬 정체성의 사례가 되었다.
2010년대 한국에서는 경제 불황 속에서 취업 대신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늘면서 '로컬 크리에이터' 운동이 본격화됐다. 독립 서점, 로컬 잡지, 로컬 카페, 공유 공간 등이 등장했고, 이 운동의 특징은 로컬을 낭만화하지 않고 비즈니스와 결합한다는 점이다. 지역의 고유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그것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경제화한다. 지역을 살기 좋게 만들면서 동시에 먹고 살 수 있는 모델을 만들려는 시도다.
# 쌍문동과 백운시장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
리포트를 함께 읽은 뒤, 워크숍 후반부는 실습과 토론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쌍문동 백운시장에서 실제로 어떤 기획이 가능한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쌍문동이 가진 자원과 위기를 짚어가며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쌍문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예술가 단체 아트다락의 이다미 대표였다. "쌍문동은 사실 한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많이 호명된 동네 중 하나예요. 둘리가 살던 동네이고, 덕선이가 살던 동네이고, 성기훈이 살던 동네잖아요. 이 동네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이미 수많은 사람들 안에 축적되어 있는 거죠"라고 이다미 대표는 말했다.
실제로 «아기공룡 둘리»의 작가 김수정은 자신이 젊은 시절 거주했던 쌍문동을 만화의 배경으로 삼았고, 2015년에는 둘리뮤지엄이 개관했다. «응답하라 1988»의 감포면옥과 쌍문약국은 지금도 쌍문동에 남아 있으며, «오징어 게임»의 백운시장 팔도건어물은 드라마 속 상우 어머니의 생선가게 촬영지다. 이다미 대표는 "이 콘텐츠 자산을 단순한 관광 명소화가 아니라, 장소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라며 드라마 촬영지를 잇는 로컬 워킹 투어를 제안했다.
둘리 이야기가 나오자 쌍문동에서 나고 자란 서울다락의 김선민 감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둘리길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마침 이틀 전에 '둘리사우루스'라는 신종 공룡이 국제 학술지에 보고됐어요. 아기공룡 둘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발견지는 전남 신안군이지만, 둘리–쌍문동의 연결고리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면 둘리길 걷기에 재미있는 층위가 하나 더 생기는 거죠"라고 김선민 감사는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방향을 한 걸음 더 넓혔다.
"그리고 쌍문동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이 동네가 북한산 자락이에요. 우이천이 흐르고, 근처 버스 정류장 이름이 '약초원'이에요. 실제로 이 동네에는 산악인도 많고, 약초를 캐러 다니는 분들도 계세요. 이런 생태적 자산이 쌍문동의 로컬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역의 약초꾼 선생님을 모셔서 함께 북한산을 등반하는 모임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토론의 방향이 전통시장 쪽으로 옮겨가면서, 쌍문동 소재의 백운시장에서 책방 생활용품을 운영하고 있는 백승석 대표가 아카이빙의 문제를 꺼냈다. "백운시장은 1970년부터 보따리 상인들이 하나둘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이에요. 60여 개 점포가 있었고요. 그런데 이 시장이 위치한 쌍문동 460번지 일원은 최근 재개발 대상지로 선정돼서, 2025년 2월에 통합심의를 통과했어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뭘까요"라고 백 대표가 물었다.
그가 제안한 것은 시장 소리 지도 만들기였다. "방앗간에서 쌀을 도정하는 소리, 뻥튀기 집에서 뻥튀기를 만드는 소리, 생선을 파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동네 주민들이 떠드는 소리. 이 소리들이 이 장소에만 존재하는 소리예요.
재개발이 되면 이 소리들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사라지기 전에 채집하고 기록하자는 거죠"라고 그는 설명했다.
#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이 무르익을 무렵, 아트다락 소속 강윤희 도예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가 지금 로컬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로컬의 매력이 알려지면 결국 외부 자본이 들어오고, 임대료가 오르고, 원래 그 장소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밀려나는 거잖아요"라고 강윤희 도예가는 말했다.
그가 짚은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역설이었다. 인스타그램 명소가 된 골목은 '로컬'이 브랜드가 되면서 로컬의 본질이 소비된다. 어반플레이의 익선동 프로젝트가 로컬 기획의 비즈니스 모델을 증명한 동시에 젠트리피케이션 유발 논란에 휩싸인 것은 이 긴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역 소멸 이야기도 그래요. 전국에서 절반 가까운 지역이 소멸 위험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로컬 운동은 그 소멸을 막기 위한 건가요, 아니면 소멸 자체를 다르게 바라보자는 건가요. 적은 인구로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라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자리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결국 백운시장도 재개발 대상지예요. 우리가 지금 소리를 기록하고 산책로를 기획하자고 하는데, 이 장소가 사라질 수 있다는 긴장 속에서 하는 일이잖아요. 기록은 중요하지만, 기록만으로는 장소를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한편, 이번 행사는 책방 생활용품이 주최했고, 서울다락·아트다락이 주관했으며, 스푼앤포크가 장소를 협찬했다. 책방 생활용품은 쌍문동 백운시장에서 철학을 통해 세상의 여러 문제들을 바라보고자 만들어진 헌책방이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기증으로 이루어진 서가가 있으며, 기증 서가의 수익금은 지역 커뮤니티 사업에 사용된다.
서울다락은 백운시장을 중심으로 시니어 채용과 소규모 창업을 지원하는 사회적 협동 조합니다. 마을 축제인 '백운다락장' 등을 운영하며, 플로깅·러닝·영화 감상·보드게임 같은 생활밀착형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지역 커뮤니티 조직이다. 아트다락은 서울다락의 조합원들이 모여 설립한 예술 단체다.
스푼앤포크는 백운시장 내 유휴공간을 활용해 청년 창업을 지원한다. 기사가 발행된 2026년 3월을 기준으로 총 5개의 스토어가 열렸으며, 매주 일요일마다 1개의 팝업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