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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는
연극 '플리백'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런던의 한 골목, 파산 직전의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여자 '플리백'이 있다. 섹스와 농담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그녀는 면접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상의를 벗어버리고, 성공한 언니와는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한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나날의 연속이다.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누추한 곳'을 뜻하는 '플리백(Fleabag)'이라는 이름처럼, 작품은 어딘가 망가지고 불완전한 한 여자의 내면을 거침없이 벗겨낸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일상 뒤에는 관계의 단절과 외로움, 공허함과 좌절감이 쌓여 있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에서 처음 올려진 ‘플리백’은 유수의 상을 휩쓸며 화제작으로 떠올랐고, 2016년 동명의 TV 시리즈로 제작되어 에미상과 골든 글로브를 수상하며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2024년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 상영으로 국내 관객과 처음 만났고, 올해 세계 최초 공식 라이선스 공연으로 한국 초연의 막을 올린다.
본 공연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오는 9월 6일까지 이어진다.
플리백 -술 -섹스 -농담 = 0
진중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플리백의 거침없는 입담과 안하무인한 태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녀가 면접장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된다. 하필 성희롱 소송으로 몸살을 앓는 회사, 자기 딴에는 생계가 걸린 중요한 자리지만 그녀는 질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기만 한다. 결국 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해 니트를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그대로 속옷을 드러내고 만다. 이너를 입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플리백은 1인 다역으로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소환하며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는다.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남자친구, 그 사이사이 몸만 스쳐 지나가는 상대들, 있으나 마나 한 가족까지. 그나마 마음을 나누던 동업자 '부'는 남자친구의 외도에 경각심을 주려 자전거 앞으로 뛰어들었다가 도리어 목숨을 잃었다. 설상가상 카페마저 폐업 위기에 놓여 있다.
자조적인 독백을 듣고 있으면, 술과 섹스와 농담은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든 도피처에 가깝다. 취하지 않고 우습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삶은 이미 무겁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플리백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마치 내일이라도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처럼, 그래서 섹스를 할 때만이 살아있다고 느껴질 만큼 말이다.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
도저히 버틸 수 없이 버거운 날이면, 플리백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택시비뿐이다. 아버지는 바람이 나 새 가정을 꾸렸다. 그런 아버지라도 찾아가는 딸에게 그는 영혼 없는 몇 마디 말만 건낸 뒤 다시 돌려보낸다. 방탕한 생활, 경제적으로 온전히 자립하지 못한 딸에게 잔소리 한 번 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 또한 시간 낭비인 것처럼 말이다. 잘못을 직면하지 않으면 반성할 기회조차 생기지 않는다.
플리백의 삶에 처음으로 용서를 가르쳐준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부'였다. 플리백이 생일 선물로 건넨 기니피그 한 마리는 훗날 두 사람이 함께 기니피그 카페를 차리는 계기가 되었다. 카페 함께 일하던 어느 날, 플리백은 신문에서 한 헤드라인을 발견하고는 농담거리 삼아 소리 내어 읽는다. 열한 살 소년이 학교 햄스터를 학대해 소년원에 보내졌다는 기사다. 늘 그렇듯 웃어넘기려는 플리백과 달리, 부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는다. 기니피그를 끔찍이 아끼는 그녀이지만, 아이를 가둔 처분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기니피그를 끔찍이 아끼는 부이지만, 뜻밖에도 소년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플리백이 반문하자 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하잖아. 그게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려 있는 이유야.
혈육보다 더 많은 시간과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때로는 가족보다 가깝듯, 부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가족보다 플리백에게 더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한 줄기 빛 같은 관계를 망가뜨린 것 역시 다름 아닌 플리백이었다. 부의 죽음을 촉발한 것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이었고, 그 여자는 다름 아닌 플리백이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를, 플리백은 스스로 배신한 셈이다.
잘못은 꼬리의 꼬리를 문다.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와 카페에서 관계를 맺던 중, 케이지를 빠져나온 기니피그 힐러리를 쥐로 착각한 남자가 그를 걷어차버린다. 온몸이 상한 힐러리는 간신히 숨만 붙어 이를 덜덜 떨고, 그 고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플리백은 힐러리를 품에 안고 스스로 숨을 거두게 한다.
난 모든 걸 망쳐버리는 사람이에요.
친구도 친구가 사랑했던 기니피그도 곁에 없다. 추억이 담긴 카페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한다. 가족에게조차 돌아갈 수 없는 그녀는 스스로 안식처를 걷어차고 또 괴로워한다. 누군가는 혀를 차고, 누군가는 가슴 아파할 것이다. 정답은 없다. 죄를 지은 것도 플리백이고, 상처 받은 것도 플리백이니까.
플리백을 용서할 것인가
극 중반까지 관객은 철저히 관찰자의 자리에 머문다. 플리백(김히어라)은 관객에게 종종 말을 걸지만, 좀처럼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 종종 실소하고 때로 박장대소하더라도, 문란하고 경우 없는 그녀의 삶에 선뜻 동참하고 싶어지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릴 수 있다. 누군가는 끝내 플리백과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관찰자로 남을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그녀의 방백 어딘가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치고, 결국 그녀를 용서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관객은 결국 플리백을 넘어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플리백’은 그녀를 처음 그 면접실로 다시 데려간다. 플리백은 면접관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끊어졌던 면접은 다시 재개된다. 무너진 사람을 단죄하는 대신, 다시 살아갈 기회를 쥐여준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화목한 가정도, 끈끈한 우정도, 순전한 사랑도 변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릴 수는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우개도 다르지 않다. 연필로 쓴 글과 그림은 지울 수 있어도, 그 자국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다만 얼룩진 바닥은 걸레로 닦아낼 수 있고, 자국이 남은 종이 위에도 다시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 엎질러진 물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단 한 번, 용서받을 수 있다면 한 사람은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좋고 나쁨을 잴 수는 없어도, 분명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