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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지독한 농담을 방패 삼아 살아가는 당신에게, 플리백 [공연]

당혹감을 넘어, 한 인간의 외로움과 마주하기까지

by 한우림 에디터
2026.08.05 16:40

1. 플리백Fleabag_통합.jpg

 

 

"이 정도면 청소년 관람불가를 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

 

'플리백' 연극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다행히 19세 이상만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공연을 보다보면 성적인 농담과 거침없는 욕설, 음담패설이 쉼 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원작이 블랙 코미디의 대가인 영국이어서 더욱 그 특징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어쩌면 영국에서는 이러한 성적인 유머에 많은 관객들이 웃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 공연장에서도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긴 했으나 생각보다 객석은 조용했다. 나조차 마음 편하게 웃지 못 했고, 유교적인 한국 문화에서 이런 이야기가 먹힐까 의문이 들었다. 웃어도 되는 건지, 아니면 당황해야 하는 건지 망설였던 순간이 많았다.

 

 

* FLEABAG플리백: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

 

플리백(Fleabag), 이름처럼 어딘가 망가져 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런던의 한 골목에서 파산 직전의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하며, 엉망진창인 일상을 버티듯 살아간다.


가족과의 관계는 어긋나 있고, 사랑은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가족과 연인,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까지,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웃음 뒤에 감춰진 슬픔과 상실, 균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는데…


웃음과 침묵 사이, 가장 솔직한 고백이 시작된다.

 

 

 

영국에서는 대성공, 한국에서는? 


 

연극 '플리백'은 영국에서 1인극으로 시작해 에든버러 프린지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BBC 드라마로 제작되어 시즌 2까지 이어질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최고의 블랙코미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플리백'은 이제 영국인들에게 '최고의 작품'인 셈이고 팬층도 꽤나 두껍다. 유튜브 클립이 400만회가 넘을 정도이니 말이다.

 

반면 나는 '이러한 영국의 정서가 한국인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영국은 원래 블랙코미디와 자기비하, 불편한 유머를 즐기는 문화가 있다. 이와 반대로, 한국은 아직도 유교적 정서가 생활 곳곳에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성적인 농담을 대놓고 던지고, 자신의 추한 욕망까지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인물을 나는 여전히 낯설어 했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는 객석을 뒤집어놓았을 극 속 유머가,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는 폭소보다 당혹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예상을 해본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게 라이센스 극의 흥미로운 점이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느꼈던 불쾌감과 당혹감은 몰입감으로 바뀌었다.

 

깊은 고독과 쓸쓸함을 그녀가 가벼운 농담으로 가린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웃기려고 농담을 던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외로움을 숨기기 위한 자기방어였던 건 아닐까. 지나고보니 웃음 뒤 고독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플리백은 수시로 관객을 향해 말을 거는데, 제 4의 벽을 허무는 이런 연출은 그의 쓸쓸함을 더 잘 보여주는 듯 했다.

 

 

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6).jpg

 

 

 

끊임없이 망가져도, 살아가는 여성


 

"모든 인간은 실수를 해. 그게 바로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려있는 이유야."

 

공연 중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를 꼽으라면 이것이다.

 

나는 가끔 너무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이 견디기 어렵다. 그런데 이 플리백은 내게 '조금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줬다. 우리는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배우며 살아왔지만, 플리백은 끊임없이 망가지고, 실패하고, 후회하면서도 결국 살아간다.

 

플리백은 실수 투성이다. 관계도 망치고, 감정도 숨기지 못 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후회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그녀를 평가하거나 심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추하고 숨기고 싶은 욕망까지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이는 결국 한 인간을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더불어 이를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는 시선도 충분히 가능하다. 플리백은 기존의 여성상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착하고, 순종적이고, 늘 올바른 선택만 하는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욕망을 숨기지 않고, 질투하며, 실수하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선택도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여성 캐릭터에게 도덕성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플리백은 '좋은 여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여성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기보다, 인간으로서 존재할 권리를 되돌려준다.

 

 

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1).jpg

 

 

 

배우마다 달라지는 1인극의 형태


 

1인극이라는 공연 형식 또한 인상적이었다. 나는 본래 1인극을 좋아하여 종종 보곤 하는데, 여성이 주인공인 극은 처음이어서 신선했다.

 

1인극의 매력은 무대 위에는 배우 한 명뿐이지만,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관객의 머릿 속에서는 수십 명이 상상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남자친구, 언니,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 등... 누구도 실제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배우의 말과 몸짓으로 그들의 표정과 행동이 선명히 그려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대 위에서 한 사람만 있는다는 걸 잊을 때도 많다.


공연이 끝난 뒤 다른 캐스팅의 무대 사진을 찾아보니 소품과 무대 구성이 조금씩 달랐다. 내가 본 회차는 김히어라 배우의 플리백이었는데, 그녀는 담백한 무대 위에서 배우의 에너지와 호흡만으로 80분을 끌고 가는 인상적인 집중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똑같은 텍스트를 김주연, 김규남 배우가 어떤 결로 해석했을지 궁금해졌고, 그래서 이 작품은 여러 캐스트로도 계속 봐도 좋을 공연이라고, 회전극을 돌아도 좋을 공연이라고 느껴졌다.

 

 

플리백_공연사진_김주연 (12).jpg

 

 

<플리백>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불편하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거침없는 유머에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자극적인 농담만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그 농담을 방패 삼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음담패설도, 블랙코미디도 아니었으며, '모든 인간은 실수를 한다.'는 교훈이었다. 플리백은 그 당연한 사실을, 누구보다 엉망인 한 사람의 삶으로 끝내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한우림_컬쳐리스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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