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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 - 플리백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를 설명해줄 단 한 사람이 필요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by 최승윤 에디터
2026.08.0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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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플리백 (fleabag)’. 직역하자면 더러운 몰골(을 한 사람) 또는 지저분한 짐승이다.

 

극의 시작은 그가 일자리 면접을 보고 있는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면접관은 이 회사에 성희롱 관련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묻고 플리백은 능청스럽게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면접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려온 탓인지 내내 더워하는 기색을 보이던 그는 돌연 상의를 올려 자신의 속옷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여성을 보며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성적 어필을 한다. 두 번째, 몸의 열기를 곧바로 성적 욕망으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상한 여자.

 

그러나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플리백을 단순히 우습고, 더러운 욕망에 목마른 사람이라고 욕하며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행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에 치중해서는 안 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농담에 웃음이 나오지 않는 순간이 온다. 연극은 시작과 끝에 동일한 장면을 가져다 놓는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그렇다면 관객은 달라져야만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플리백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존재로 남게 되는가. 여전히 더럽고 가볍고 이상한 여자, 그뿐인가.

 

 

연극 「플리백」 시놉시스

 

FLEABAG플리백: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

 

플리백(Fleabag), 이름처럼 어딘가 망가져 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런던의 한 골목에서 파산 직전의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하며, 엉망진창인 일상을 버티듯 살아간다.

 

가족과의 관계는 어긋나 있고, 사랑은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가족과 연인,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까지,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웃음 뒤에 감춰진 슬픔과 상실, 균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는데…

 

웃음과 침묵 사이, 가장 솔직한 고백이 시작된다.


 

무대 위에 놓인 여러 모양과 크기의 의자는 플리백이 어떤 인물을 데려와 앉힐지에 따라 상황과 공간이 변화한다. 전 남자친구 해리, 캠프에서 만난 주황 머리 남자, 릴리…. 거의 대부분이 플리백과 성적 관계를 맺은 인물들이다. 전 남자친구 해리와 헤어지고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 쥐를 닮은 남자는 다른 인물과는 달리 ‘처음’ 만나게 된 순간부터 그 상황을 지켜볼 수 있다. 따라서 플리백이 처음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을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아볼 수 있고 이는 아주 단순하다. 성관계를 하는 것이다.

 

플리백은 모든 인물과 성관계를 맺으려 하고 그 목적을 최대한 빠르고 조급하게 이루어내려 한다. 목적을 취하려는 그의 모습은 과하게 집착적이며 이것은 보는 이들의 불쾌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불쾌감에는 반드시 작품의 의도가 존재한다. 그가 수많은 인물과 성적 관계를 맺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화법은 그간 보여지던 여성 인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쉬쉬하며 숨기던 이야기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분명히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플리백이 성관계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동시에 그만큼 삶에서 여성이 얼마나 성적으로 소비되기 쉬운지 또 성적 대상이 되기 쉬운지에 대한 공포도 함께 떠올려볼 수 있다.

 

플리백은 성관계라는 목적을 빠르게 ‘이루고’ 싶어 하는 모습과 달리 정작 관계하는 상황에서는 그다지 감흥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욕망에 의심이 가지게 된다. 그의 욕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성관계’인지, 아니면 그 관계를 통해 상대가 나에게 느끼는 ‘필요성’인지.

 

이쯤에서 우리는 플리백이 어째서 성관계를 통해서만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비정상적인 접근방식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의 외로움에 대해 파고들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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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백은 엄마가 없다.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와는 사이가 요원하다. 언니와는 일 년에 가끔 아빠가 신청해 준 페미니즘 강연에서 만난다. 언니는 핀란드에서 좋은 일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가지 못한다. 술에 취해 노골적인 성적 농담을 하는 마틴과 결혼해 가정이 있고, 의붓아들이 언니와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들은 열다섯 살이다. 자꾸 언니의 욕조에 따라 들어가려고 한다.

 

플리백은 마틴이 술에 취했을 때 자신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는 사실을 언니에게 말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플리백이 성적 욕망에 지배된 여자로 비춰지는 것과는 별개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시선이 얼마나 가볍고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술에 취한 플리백이 아빠의 집 문을 두드렸을 때 그가 아빠에게 한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딸이 아니라 음란물 사이트에서 나를 봤으면 어땠을 것 같냐.’이다. 플리백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그 어떤 사람도 곁에 없다. 이러한 부재가 만든 외로움이 결국 플리백의 비정상적인 사고를 만들어냈다.

 

사람을 곁에 두고 자신을 떠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성관계’이다. 따라서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자신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일에 앞장서는 결과를 낳는다. 앞선 상황에서 자신을 버린 아빠 앞에서 꺼낸 말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 되묻는 말과 같다. 이후 카페의 단골손님 조 앞에서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자신을 만지라고 말하는 장면 역시 자신을 떠나지 않길 바라는 절박함에서 또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는 카드를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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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플리백의 이러한 모습은 어디서 출발하게 되었을까. 해리보다 이전에 만났던 남자 친구는 플리백에게 가슴과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낼 것을 요구한다. 회사에 있던 플리백은 장애인 화장실 칸에 들어가 사진을 찍어 보낸다.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무감각한 표정이다. 환호하며 다시 찍어서 보내달라는 남자 친구의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거부할 법도 하지만 반발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들어준다. 그리고 남자 친구는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인간관계를 지속해 가는 방식의 첫 단추, 배움을 잘못된 방식으로 얻고 그것이 계속되어 온 결과물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그러므로 플리백이 등장시키는 인물 대부분이 남성인 이유는(릴리라는 여성도 존재했지만 이 역시도) 이러한 방식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플리백이 직설적인 화법을 가졌고 강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해서 간과하게 되는 것은 그는 한 번도 극 속 인물에게 화를 내거나 강하게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플리백은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이다. 전 남자친구 해리도 그가 갑자기 떠났을 뿐 플리백은 이별의 결정권이 없었다. 그러나 관객은 플리백의 수동성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농담과 수위 높은 화법을 내세워 그가 발산하는 발칙한 모습에 주목하기 쉽다.

 

플리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보이는 상황뿐만 아니라 그 바깥의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우선 언니의 남편 마틴이 뱉는 성희롱을 통해서 세상에서 여성이 받게 되는 시선과 대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플리백은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다. 그러므로 그가 계속해서 이러한 선택을 하고 이것이 수용되어졌을 법한  환경과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카페의 단골손님 조 앞에서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자신을 만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간 플리백이 만나온 남성들은 높은 확률로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을 벗는 행동은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는 플리백의 예상과는 달리 고개를 돌린 채 옷을 입으라며 따뜻하게 말해준다. 플리백의 상황은 어딘가 달라졌다. (이후 언급 할) ‘부’와의 기억과 더불어 조의 반응은 플리백이 점차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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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자면 쥐를 닮은 지하철 남자가 기니피그를 발로 차버렸을 때다. 외로움 때문에 붙잡고 있었던 남자가 갑작스레 보인 폭력성은 플리백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던 ‘부’와의 관계도 드러난다. 플리백은 기니피그를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작은 가게에서 그 기니피그를 샀던 때, 부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부는 플리백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다. 죄책감을 가지는 대상임과 동시에 성적인 접촉 없이도 ‘인간관계’가 이루어진 유일한 사람이다. 부가 플리백에게 했던 말 중 플리백에게 남은 말은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이유에 대한 답 역시 부는 함께 말해준다.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하는 플리백은 기니피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말을 한다. 기니피그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꼭 다른 기니피그를 곁에 두고 함께 키워야 한다고. 혼자 살게 두면 외로워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이 작은 동물은 결국 부와의 기억과 추억을 간직한 대상이자 플리백의 외로움 역시 상징한다.-

 

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간중간 플리백은 부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기에는 “안녕! 부예요.” 명랑한 음성메시지만 흘러나온다. 실수는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저질렀기에 실수다. 스스로 실수임을 자각했다면 그 즉시 그 행동을 멈추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동안에는 실수임을 알지 못한다. 닿지 않을 전화를 계속 거는 이유는 유일한 친구이자 위로의 기억을 안겨준 ‘부’에 대한 그리움과 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부에게 저지른 잘못(부의 남자 친구와 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저질러진 잘못을 두고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플리백은 간절히 필요했다.

 

전 남자 친구 해리, 주황머리 남자, 릴리…. 플리백은 그가 잤던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며 하나씩 의자를 넘어뜨린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문제를 온몸으로 느낀다. 슬플 때도 지루할 때도 자위를 한다고 말하던 플리백은 이제 기니피그를 품에 안고 흐느낀다. 차라리 이 모든 것들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성’만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던 그의 욕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외로움으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를 극 속 다른 인물처럼 ‘걸레!’라고 비난하거나 가볍게 바라볼 수 없다. 기니피그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관객은 그의 고백을 듣는 청자이자 함께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플리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예상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 여자가 원해서 한 게 아닌가, 오히려 저 여자는 자신이 성적 대상이 되기를 바라고 즐기는 것이 아니냐, 솔직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게 아니냐, 그런 목소리들 말이다.

 

물론 그를 옹호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부재한 플리백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식으로 왜 이것이 선택되었는가이다. 그 이유를 파고들면 플리백이 마주하고 있는 이 사회의 분위기와 인식,  그리고 플리백의 결핍까지 다양한 문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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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플리백」은 2026년 6월 19일부터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된다. 주인공이자 유일한 등장인물인 플리백 역에는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배우가 맡았다. 관람을 마치고 알게 된 사실은 배우마다 플리백의 의상이나, 사용되는 소품이 다르다는 점이다. 내가 관람한 김규남 배우의 플리백은 별다른 소품 없이 무대 위에 놓인 여러 의자들만으로 극의 상황을 이끌어낸다. 어떤 배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요소를 느껴보는 것도 이 극의 큰 재미 요소가 될 것이다.

 

극이 막을 내린 후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다. 플리백의 ‘성적 농담’을 웃음으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농담 속에서 이 사람이 겪었어야 하는 상처와 세상의 시선과 폭력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작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웃음이 나올 구석을 찾기 어렵다. 외롭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그는 농담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택했다. 대사의 수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날것의 언어들은 지켜보는 이들을 불편하고 수치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외면했던 문제들을 눈앞에서 느끼고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수의 속성과도 닮아있다. 떠올리면 수치스러워 묻어두게 되는 실수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을 드러내어 바라보고,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가끔씩 상기해야 한다. 연필 끝에는 지우개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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