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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황후가 된 소녀, 자유를 갈망한 인간 -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세상을 스치며 나를 지키려 했어, 언제나 간절히 자유를 갈망했어

by 이진 에디터
2026.09.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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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광이와 천재의 운명은 한 끗 차이로 갈린다. 그 차이의 이름은 ‘자유’다. 자유로운 천재는 죽은 뒤에도 영원한 천재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천재가 자유를 박탈당하면, 바로 미친 사람이 돼 남은 생을 괴롭게 버텨야 한다. 자유를 빼앗긴 미친 사람의 말은 헛소리,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은 시끄러운 발악일 뿐이다.


      동물도 가진 자유를 잃은 불행한 미치광이가 갇히는 곳은 정신병원이나 감옥만은 아니다. 황실 또한 보이지 않는 창살로 둘러싸여 있다. 숨 막히는 황실에서 육신은 달아날 수 있을지라도 정신은 새장을 벗어날 수 없다. 빼앗긴 자유를 되돌려 받을 방법은 죽음뿐이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후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 엘리자벳은 10대에 황후 자리에 올라 60세에 암살당하며 자유를 되찾았다.

       

      한 국가가 쇠락하는 시대의 왕족 혹은 황족은 비극의 상징이다. 몰락하는 제국의 가장 불행한 목격자가 됐던 그들은, 역사에도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대한제국 고종·명성황후·순종을 비롯한 황족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그랬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못하는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후손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오스트리아 제국 3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초대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 또한 마찬가지다. 18세에 즉위한 그는 60년 넘게 황제로 살았으며, 사망 2년 후 제국은 붕괴했다. 아들 황태자 루돌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상당수의 일가친척 또한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아내이자 황후 엘리자벳은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에게 암살당했다.

       

       


      마지막 순간 우리의 어둠 속 밀회를


       

      황후 엘리자벳의 삶과 죽음을 다룬 뮤지컬 <엘리자벳>은 그녀를 끈질기게 추적했던 비극이자 몰락하는 시대의 그림자를 ‘죽음’이란 캐릭터로 의인화해 전개한다. 당시 오스트리아엔 ‘엘리자벳이 합스부르크 왕궁에 죽음을 데려왔다’라는 민담이 전해졌다. 죽음은 이에 모티브를 얻어 창조한 상징적인 캐릭터다. 엘리자벳의 지난한 삶을 초월적·유혹적·관념적 존재인 죽음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하며 색다른 시선을 더한 것이다.


      실존 인물 일대기나 역사극에서 그치는 게 아닌, 죽음이란 관념을 한 인물로 만든 <엘리자벳>은 ‘관념 캐릭터’의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선 <엘리자벳> 초연 후 관념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창작되며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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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 때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하며 죽음과 처음 만난 엘리자벳은, 죽음 충동을 느끼거나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와 재회한다. 죽음은 몰락하는 시대 속에서 스러져가는 이들의 생명을 입맞춤으로 거둬들인다. 죽음은 엘리자벳의 고통과 사(死)를 향한 강렬한 이끌림, 엘리자벳과 요제프의 가문을 비롯해 오스트리아에 드리운 비극을 형상화한 관념이다. 하지만 극에선 엄연히 자유 의지와 욕망이 존재하는 캐릭터다. 극은 그의 욕망을, 엘리자벳을 향한 집념으로 묘사했다. 배우들 각각의 연기 노선에 따라, 시즌마다 달라지는 ‘사랑과 죽음의 론도’ 넘버 삽입 여부에 따라 죽음의 주된 감정은 변화한다.


      프롤로그에서 엘리자벳을 ‘사랑’했다고 증언한 죽음은 감정 없이 목숨을 수거하던 평소와 달리, 엘리자벳과 입을 맞출 땐 잠시라도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늘 검은 옷을 입던 죽음은 엔딩인 ‘베일은 떨어지고’, 즉 엘리자벳이 루케니에게 암살당해 자신에게 오는 순간 흰 예복을 입는다. 아들 루돌프 사망 후 늘 검은 상복만 입고 다니던 엘리자벳 또한 자신을 옥죄던 옷을 벗고 흰 원피스 차림으로 죽음에게 안긴다. 그녀가 입었던 ‘옷’은 코르셋과 드레스뿐만 아니라 평생 자유를 속박당한 황실, 황후란 이름의 감옥이기도 했다.


      엘리자벳과 죽음이 결합하는 순간은 결혼식을 연상시킨다. 죽음은 요제프보다 엘리자벳을 더 먼저 만났고, 그들의 결혼식에 나타나기도 했다. 죽음을 그저 인물이나 남성으로만 보면 흔한 삼각관계이지만, 비텔스바흐 가문을 좀먹은 불행과 루돌프에게도 유전된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면 죽음의 끈질긴 집착은 엘리자벳의 아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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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에 죽음이 등장하는 것은, 엘리자벳에게 평생을 따라붙는 고통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단 뜻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넘버인 ‘나는 나만의 것’은 결혼 다음 날 아침 엘리자벳이 부르는 노래다. 황실 입성은 자유와 행복의 박탈이었다.


      엘리자벳은 최후의 순간 죽음과 입을 맞추며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거머쥔다. 결합은 바로 상실로 변한다. 사랑의 환희와 상실의 고통을 처음 알아버린 죽음의 표정엔 허무와 슬픔이 스친다. 엘리자벳은 죽음으로 자유와 안식을 쟁취했다. 하지만 죽음은 엘리자벳을 가진 찰나의 순간 고통도 얻으며 자유를 잃었다. 죽음의 자유는 사랑하지 않을 자유였다.

       

       

       

      난 승리했어, 축제를 열어


       

      뮤지컬 <엘리자벳> 여섯 번째 시즌이 개막했다. <엘리자벳>은 2026년 8월 16일 서울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개막해 11월 15일에 막을 내린다. 미하엘 쿤체가 대본과 가사를 쓰고, 실베스터 르베이가 작곡한 <엘리자벳>은 19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처음 올라온 뮤지컬의 마스터피스다. 한국에선 2012년에 초연된 작품은 여러 배우와 함께 10년간 다섯 시즌을 거치며 매니아층을 형성했고, 올해는 무대·의상·캐스팅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선보였다.


      황후 엘리자벳 역할엔 린아, 박지연, 이지혜, 이지수가 캐스팅됐다. 죽음(토드) 역엔 카이, 김준수, 서경수, 고은성이 이름을 올렸으며 루이지 루케니는 박은태, 강홍석, 노윤이 연기한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엔 민영기와 박민성, 대공비 소피 역할엔 서지영과 주아가 출연한다. 요제프와 엘리자벳의 아들인 황태자 루돌프 역은 장윤석과 김우성이 연기한다. 엘리자벳 아버지 막스 공작엔 김대호, 엘리자벳 어머니 루도비카 및 볼프 역엔 장예원이 캐스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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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벳과 죽음 역은 이지혜와 김준수를 제외하고 전부 이번 시즌에 새롭게 합류하는 캐스트라 개막 전부터 큰 화제가 됐다. 오랫동안 여러 대극장 뮤지컬 무대에 오르며 내공을 쌓은 배우들이기에, 이들은 탄탄한 실력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캐릭터 노선을 구축하며 작품에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개막 한 달여가 지난 현재, 10월 말에 합류하는 박지연과 김준수를 제외하곤 모든 배우가 이미 여러 번의 공연을 마쳤다.


      <엘리자벳>이 명작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이다. 국내 여섯 번째 시즌 배우들은 각자의 개성이 담긴 음색과 압도적인 가창력을 기반으로 <엘리자벳>의 음악을 완벽하게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멜로디뿐 아니라 음악적 구성과 설계도 치밀하게 짜인 넘버들은 리프라이즈를 다채롭게 활용했다. ‘나는 나만의 것’과 ‘베일은 떨어지고’, ‘그림자는 길어지고’, ‘당신처럼’, ‘질문들은 던져졌다’, ‘날 혼자 두지 말아요’와 ‘행복은 너무도 멀리에’, ‘키치’와 ‘나의 새로운 상품(키치 리프라이즈)’ 등 핵심 넘버 대부분은 리프라이즈다.


      동일한 멜로디가 다른 상황에서 반복되는 것은, 뮤지컬은 노래로 인물의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서사를 전개하는 장르란 걸 나타낸다. 대표곡 ‘나는 나만의 것’은 극 내내 반복된다. 엘리자벳이 자유를 갈망하는 ‘나는 나만의 것’ 넘버가 ‘베일은 떨어지고’ 넘버에서도 리프라이즈 되는 건 죽음이 자유이자 안식처란 걸 상징한다. 이는 극의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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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엘리자벳을 표방하는 새 시즌의 눈에 띄는 변화는 캐스팅과 더불어 무대다. 서숙진 무대 디자이너는 이번 시즌에서 엘리자벳이 느낀 압박감과 불편함의 형상화에 공들였다.


      <엘리자벳> 여섯 번째 시즌은 작품 포스터, 엘리자벳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프로필 사진, 트레일러 영상, 무대 막까지 ‘부채’를 강조한다.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관심과 시선을 질리도록 받았던 엘리자벳은 나이가 들수록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부채는 늙어가는 엘리자벳의 흰머리와 주름뿐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감추는 무기이기도 하다.


      작품은 대칭 형태의 엘리자벳 옆모습 실루엣 배치, 엘리자벳 상징 에델바이스 머리핀 모양을 형상화한 액자 틀, 아이들을 연이어 빼앗기고 시들어가는 장면의 의상·연출 변화(‘결혼의 정거장들’ 넘버), 엘리자벳과 루돌프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의 무대·연출 변화(‘내가 당신의 거울이라면’ 넘버), 고딕풍으로 바뀐 엘리자벳 방 디자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징하는 6개의 독수리 등 여러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고딕 호러(호러와 로맨스를 결합한 문학 장르) 색 또한 품은 <엘리자벳>이기에, 무대 변화는 독특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나의 주인은 나야


       

      9월 8일 화요일 오후 7시 30분 공연엔 엘리자벳에 이지수, 토드에 카이, 루케니에 박은태가 무대에 올랐다. 2025년 12월부터 2026년 3월 초까지 공연된 EMK뮤지컬컴퍼니 창작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에 출연했던 이들은 <엘리자벳>에서 또다시 호흡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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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살에 뮤지컬 <레미제라블> 코제트로 데뷔, <스위니 토드>, <노트르담 드 파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베카>, <그레이트 코멧>, <시라노>, <그날들> 등의 대극장과 <블랙메리포핀스>, <사의 찬미>,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등의 중소극장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이지수는 이번 시즌에 새로운 엘리자벳으로 합류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1년, KBS 예능 프로그램 <안녕하세요>에 ‘뮤지컬에 미친 누나’로 출연하기도 했던 이지수는 초등학생 때 뮤지컬을 처음 접하고 꿈을 키워왔다. <안녕하세요> 출연 1년 후 대작 뮤지컬 <레 미제라블> 코제트로 주목받으며 데뷔해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이지수는 14년간 뮤지컬과 연극, 콘서트 무대를 쉬지 않고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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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꾀꼬리’ 같은 음색과 뛰어난 가창력,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인해 학생 때 성악이나 뮤지컬을 전공했을 거라 여길 수 있겠지만 이지수는 비전공자다. 어린 시절부터 뮤지컬에 미쳐 있었기에, 전공과는 관계없이 이른 데뷔를 이뤄내고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 올리며 마침내 여성 배우들의 꿈의 배역인 엘리자벳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맑고 담백한 음색이 트레이드 마크인 이지수의 엘리자벳은 1막 씨씨(엘리자벳 어린 시절 애칭) 시절의 사랑스러움과 순수함이 돋보인다. 엘리자벳은 실제로 10대에 요제프와 결혼했기에, 이지수 특유의 앳된 분위기와 천진한 연기는 씨씨 시절 장면들에 개연성과 설득력을 부여한다. 따라서 감옥 같은 황실 생활을 견디며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10대에 황후가 된 소녀, 이지수의 엘리자벳이 부르는 1막 ‘나는 나만의 것’이 더욱 가슴 아리게 들려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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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벳 넘버 중 1막 대표곡이 ‘나는 나만의 것’이라면, 2막 대표곡은 나이 든 엘리자벳이 정신병원에서 부르는 2막 ‘아무것도’다. 이지수의 아무것도에선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와 노래를 통한 연기, 그럼에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절절하게 와닿는다. 이지수는 독보적으로 청아한 음색과 탄탄한 노래 실력을 기반으로 새 엘리자벳의 탄생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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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 또한 새로운 토드로 캐스팅됐다. 카이와 <엘리자벳>은 인연이 깊다. 그는 2017년 연말부터 2018년 봄까지 엘리자벳과 요제프의 아들 황태자 루돌프의 삶과 죽음을 다룬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에서 루돌프를 연기했었다. <더 라스트 키스> ‘내일로 가는 계단’ 넘버는 그가 콘서트에서 자주 부르는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이며, 해당 곡은 2022년에 발매된 뮤지컬 음반 ‘KAI ON MUSICAL’에 타이틀곡으로 실렸다. 카이는 해당 음반에서 뮤지컬 <엑스칼리버> 초연에 함께 출연해 인연을 맺은 배우 도겸과 함께 <엘리자벳> 넘버 ‘그림자는 길어지고’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엔 도겸이 죽음, 카이가 루돌프 파트를 소화했다.


      카이는 2026년에 발매된 ‘KAI ON MUSICAL Part.2’ 앨범에서 ‘나는 나만의 것’을 독일어 솔로 버전, 죽음을 여러 번 연기했던 김준수와의 한국어 듀엣 버전으로 나눠 수록했다. 카이와 김준수의 전혀 다른 음색이 어우러지며 탄생한 아름다운 하모니와 색다른 편곡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카이는 2026년 단독 콘서트 ‘KAI in the HIDDEN PALACE’에선 <엘리자벳> 넘버 ‘마지막 춤’과 ‘나는 나만의 것’을 독일어로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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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이력만 보면 그의 <엘리자벳> 출연은 오래전부터 예견됐던 것처럼 보이지만, 캐스팅 발표 당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캐스트가 카이다. 그는 오랫동안 주로 인간, 온전한 사람이 아니어도 인간적인 감정으로 고뇌하는 캐릭터로 무대에 올랐다. 전작인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더없이 인간적이면서도 모순 가득한 상인이자 소수자 ‘안토니오’를 연기한 카이는 <엘리자벳>에서 인간이 아닌 죽음을 연기하고 노래한다. 베토벤·세종 등 실존 인물도 소화했던 카이에게, 데뷔 20년이 돼가는 현재 시점에 관념 캐릭터 죽음을 처음 연기하는 것은 파격적인 도전임이 틀림없다.


      카이의 죽음은 압도적인 크기의 성량과 성악 발성·창법을 기반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루돌프와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리프라이즈에서의 압도감은 ‘이것이 대극장 뮤지컬이다’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춤과 움직임을 최소화한 카이의 죽음은 우아하게 절제된 몸짓으로 모든 걸 계획하고 조종한다. 종말하는 오스트리아와 인간들을 감정 없이 갖고 노는 플레이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카이의 죽음은 얼음처럼 차갑다. 비극을 지휘하는 손동작과 귀족적인 인사가 돋보이는 그의 죽음은, 인간들과 루돌프를 젠틀하고 차분하게 농락한다. 이토록 냉혹한 절대자인 카이의 죽음에게 균열을 낼 수 있는 인간은 엘리자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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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는 개막 전 한 잡지 인터뷰에서 ‘아들을 잃은 엘리자벳이 자신을 데려가 달라 애원할 때, 그가 더 굳건하게 살아가길 응원하는 마음도 들었다’라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실제로 해당 장면에서 카이의 죽음은 흔들리는 속내를 내비친다. 엔딩 ‘베일은 떨어지고’에선 뒤늦게 깨달은 사랑, 인류애적 감정마저 드러내는 카이의 죽음이 표현하는 사랑은, 힘겨운 삶을 버텨낸 엘리자벳을 위한 마지막 격려와 애도일지도 모른다.


      생을 갈구한 인물들을 주로 연기해 온 카이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카이클래식’에서 ‘무대에서 여러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카이는 2026년에만 창작 초연 <한복 입은 남자>, 첫 대극장 연극 <베니스의 상인>, 신인 시절에 연기했었지만 13년 만에 역할을 바꿔 돌아오는 <두 도시 이야기>까지 출연하며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도전인 <엘리자벳>에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 캐릭터를 구축한 그는, 죽음을 연기하지만 실은 무대와 삶을 갈망하는 마음까지 녹여내며 더없이 ‘카이다운’ 죽음을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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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시즌에도 루이지 루케니로 무대에 오른 박은태는 <엘리자벳>에 네 시즌째 출연 중이다. 2012년 초연에 처음 루케니를 연기한 박은태는 2013년 재연에도 연이어 <엘리자벳>에 출연한 바 있다. 그 후 2022년엔 9년 만에 루케니를 연기하며 한층 더 깊어지고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은태는 2026년에도 디테일한 연기 노선과 날카로운 고음이 돋보이는 가창, 무대와 객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암살자이자 해설자로서 서사를 쥐고 극을 이끌어가는 힘을 보여주며 연일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고 있다.


      박은태 또한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에서 2012년~2013년 루돌프로 무대에 오른 바 있다. 루이지 루케니를 처음 연기한 시기와 루돌프를 연기한 해가 겹치는 것도 그와 <엘리자벳>의 각별한 인연을 드러낸다. 박은태는 제6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엘리자벳> 루케니로 남우조연상을, 제7회 딤프 어워즈에서 <황태자 루돌프> 루돌프로 올해의 스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2025년 첫 단독 콘서트 ‘The Curtain : Act One’에서도 ‘키치’를 부르며 <엘리자벳>과 루케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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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극장 뮤지컬 남자 주연 배우로서 압도적인 커리어와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진 박은태는 노래와 연기의 밸런스가 조화로운 배우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그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여러 얼굴과 음색을 선보여 왔다. 그는 작품마다 입체적인 캐릭터 구현, 상상도 못 한 허를 찌르는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주목받는다. <지킬 앤 하이드>에서 한 몸에 사는 두 인격인 지킬과 하이드가 대립하는 넘버 ‘The Confrontation’의 얼굴 근육 움직임, 대표작 <프랑켄슈타인> ‘난 괴물’ 넘버에서 괴물이지만 앙리의 기억을 가진 존재로 친구 빅터의 이름을 수차례 되뇌며 절규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박은태의 루케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표정이다. 대표 넘버 ‘밀크’에서의 칼로 찌르는 듯한 예리한 고음, ‘키치’에서의 익살과 냉소, 관객의 집중력을 붙드는 힘과 더불어 눈에 띄는 건 역동적인 표정 변화다. 루이지 루케니의 실제 행적 상당수가 대본에 있지만(본래 암살 목표는 엘리자벳이 아니었던 점, 신문에 난 엘리자벳 동선을 보고 쫓은 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점), 무엇을 강조하며 연기하느냐에 따라 캐릭터는 배우마다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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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크’ 넘버 초반 굶주린 민중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박은태의 루케니는, 오늘도 배달이 없다는 말을 마치곤 표정을 순식간에 바꾼다. 차갑게 웃는 얼굴은 자신이 여론을 선동하는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시위대엔 분위기를 주도하며 분탕을 벌이는 이들이 나타난다. 박은태의 루케니가 ‘밀크’에서 민중들이 자신에게 홀리게 유도하는 모습은 그러한 선동가, 혹은 ‘꾼’을 연상시킨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 넘버에서 엘리자벳 암살 시도 실패 후, 침을 뱉고 퇴장하는 것에서도 이중적 면모와 차가운 냉소가 드러난다.


      루케니를 악역이라고만 볼 순 없다. 그는 관객이 엘리자벳에 감정 이입하는 것을 막으며 의식을 깨운다. ‘나의 새로운 상품(키치 리프라이즈)’ 넘버의 ‘우린 저분들(황족들)처럼 귀한 몸이 아니니까’라는 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박은태의 루케니는 선한 얼굴 속 싸늘한 표정 변화로 공포심을 주며 극에 몰입시키는 것뿐 아니라, 엘리자벳 반대편 시선 또한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클래스를 또다시 증명했다.

       

       


      난 살 거야, 포기하기엔 아직 젊어


       

      안 돼, 안 됩니다, 안 되는 일입니다, 안 되니까. 작품엔 이처럼 안 된단 대사와 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거의 엘리자벳, 혹은 그의 아들 루돌프를 향한 말이다. 엘리자벳은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에게 자유, 이해, 존중을 요구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황실에서 달아나 여행을 다녔고, 정신병원 환자들에게 이끌렸으며, 죽은 자들과 대화하며 살아 있는 아들 루돌프를 외면했다. 세상이 엘리자벳을 이해 못 하고 안 된다 막은 것처럼 그 또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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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면 아래로 침몰하던 제국처럼, 엘리자벳 또한 죽음과 우울의 늪에 빨려 들어가는 삶을 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태어난 것, 언니 헬레네 대신 요제프와 결혼해 황후가 된 것, 자식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 암살당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던 것까지 제 뜻대로 이뤄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고 싶었기에 죽음을 계속 밀어냈고, 정치에도 관여하며 목소리를 냈다.


      오늘날 관객이 황족의 삶에 공감하는 건 어렵다. 그럼에도 살고자 발버둥 치는 인간 엘리자벳과 죽음의 기나긴 싸움을 보며 우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죽음은 우리 모두의 곁을 맴돌고 있단 것이다. 예고도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죽음의 방문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한 번만 주어진 삶이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나 자신만이 쓸 수 있다. 나 자신의 주인은 결국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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