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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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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라이브㈜

 

 

삶을 살며 상처를 안 받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고통과 맞서 싸우는 건 당연히 겪는 통과의례다. 아픔을 마주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아픔이 찾아오면 보태지도 숨기지도 않고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솔직하고 용감한 부류다.


반면 누군가는 상처를 입어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군다. 아픔을 못 느끼거나, 혹은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방법을 몰라 회피하는 것이다. 반대로 아픔을 남들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에 몇 배로 괴롭고, 분노하며 고통에 달려들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뮤지컬 <아몬드> 주인공 ‘선윤재’, 후자는 ‘곤이(윤이수)’다. <아몬드>는 작은 편도체를 갖고 태어나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는 윤재, 소외감·불안·슬픔에 상처투성이가 된 곤이의 성장극이다.


흔히들 10대, 사춘기를 ‘예민한 시기’라 표현한다. 신체적·정신적으로 매일 성장하는 시기, 즉 몸도 마음도 미완성일 땐 자연스레 감정 기복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호르몬의 변화, 사회적·학업적 전환기를 맞는 10대엔 당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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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라이브㈜

 

 

그렇지만 청소년이 말하는 ‘어른들’, 즉 사회는 10대들의 민감함을 이해해 주는 척하면서도 기준선을 벗어나면 비난한다. <아몬드>의 윤재처럼 슬픔 앞에서도 표정이 없거나, 곤이처럼 아프다고 온몸으로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어른들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다. 눈에 안 거슬리는 착한 아이들만 사랑해 주는 건 예로부터 모든 어른이 그랬다.


뮤지컬 <아몬드>에선 곤이 아버지 윤 교수(윤권호), 학교 선생님이 그렇다. 윤 교수는 어릴 때 잃어버렸다가 찾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성장한 곤이를 임종을 앞둔 아내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는 병원을 오가며 만난 윤재를 친아들 곤이 대신 아내 앞에 내세운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을 속이고, 곤이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편 학교 선생님은 윤재를 격려해 준답시고 반 아이들에게 그의 불행을 무심하게 드러낸다.


윤재의 불행은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할머니를 잃고, 엄마는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는 곤이 아버지와는 달리 윤재가 ‘착해 보이지 않아도’, ‘괴물’ 같아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윤재는 어릴 때 감정 표현 불능증을 진단받았지만, 엄마와 할머니에게 감정을 배우며 성장했다. 운동을 책으로 배운 것과 같지만, 그래도 윤재는 그들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으면 그 사람을 따라 하란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는 윤재는, 곤이의 거친 언행을 거울처럼 흉내 낸다. 곤이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는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곤이는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인상 쓰거나 피하지도 않는 윤재가 어이없다. 뒤늦게 윤재의 사연을 알게 된 곤이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살인범에게 덤비지도 않고,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않고, 혼자가 됐어도 아무렇지 않게 살기 때문이다. 윤재를 이해하고 싶은 곤이는 나비를 찢으며 그의 감정을 시험한다. ‘겉으로 볼 땐’ 윤재는 동요하지 않는다. 곤이는 죄 없는 나비를 죽음으로 몰아가며 스스로의 영혼에 또다시 상처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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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라이브㈜

 

 

두 아웃사이더 앞에 또 다른 아웃사이더가 나타난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육상부의 유일한 부원인 ‘이도라’다. 도라의 육상부 활동은 부모님에게도 이해받지 못하지만, 달리는 게 마냥 좋기만 하다. 윤재와 가까워지는 도라는 표정 없고 말도 서툰 그 안에 잠든 따뜻함과 통찰력을 알아본다. 도라는 그렇게 윤재의 마음을 안아준다.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에겐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며 세상 사는 법을 배웠다. 곤이를 만나곤 전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곤이의 사나운 표정 뒤에 숨겨진 여린 속내를 발견한 윤재는,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이 다르단 것도 알게 된다. 도라에게선 누군가를 사랑하면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는 것,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지러워진단 걸 배운다. 그렇게 아이는 어릴 땐 가족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커서는 친구와 우정을 쌓고, 더 성장해선 연애 감정을 알며 어른이 되어 간다.


엄마와 할머니의 사랑은 비옥한 토양이고, 곤이와의 우정은 씨앗이며, 도라와의 첫사랑이 씨앗에서 튼 푸른 새싹이 됐다. 윤재는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곤이 대신 칼에 맞으며 피를 쏟아낸다.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순간, 윤재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라서야 감정이란 꽃이 피어난 것이다. 자신과 곤이를, 세상을 이해 못 하던 윤재는 그렇게 온몸으로 아픔을 느끼며 타인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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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라이브㈜

 

 

2022년 초연 당시 대극장에 올라왔던 뮤지컬 <아몬드> 재연은 중극장인 NOL 유니플렉스에서 공연 중이다. 초연 12명에서 8명으로 재정비된 배우진은 거의 퇴장 없이 여러 역할을 연기한다. 또한 배우들은 소설 <아몬드> 구절, 즉 윤재의 회고록을 읽기도 하며 극 이해에 도움을 준다. 윤재는 겉으로 볼 땐 표정도 감정 진폭도 없지만, 원작에서 발췌한 문구의 상당수가 대사·나레이션으로 삽입돼 극을 보며 그의 마음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벤허>, <베르사유의 장미>, <한복 입은 남자>의 곡을 쓴 이성준(브랜든 리)이 <아몬드>의 곡을 만들었다. 전혀 다른 윤재와 곤이처럼, 그들을 상징하는 넘버들 또한 색깔이 달라 음악 또한 장르가 풍성하다. 특히 록 음악이 연상되는 곤이의 강렬한 넘버들은 거칠고 반항적인 그의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줬다.


소설 <아몬드>는 윤재의 속마음을 따라가는 서술로 진행돼 담백하고, 무덤덤하고, 때론 차갑게도 느껴진다. 뮤지컬 <아몬드>는 반대다. 따뜻하고, 정겹고, 투박할 정도로 정직한 연출이지만 친절함과 진정성이 있다. 재연에서 돋보이는 배우들의 일인다역, 원작 및 초연과 달리 후반에 도라까지 구두 공장에 따라가는 장면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윤재 속마음 나레이션을 통해 그를 더 잘 이해하고, 무대를 누비며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며 이야기 외적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곤이 대신 칼을 맞는 윤재가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무대 벽면이 열리며 밝은 조명이 쏟아지는 장면은 극의 클라이막스이자 마음을 울리는 연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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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라이브㈜

 

 

‘난 너를 사랑하겠노라. 그것이 죄가 될지 독이 될지 혹은 달콤한 꿀이 될지 영원히 알 수 없어도 우리는 함께 기나긴 항해를 멈추지 않으리.’


‘사랑하겠노라’ 넘버 가사 일부다. 원작 소설에선 윤재가 의미도 모르고 읽는 책의 문구로 나오지만, 뮤지컬에선 커튼콜까지 반복되며 불린다. 죄가 되고, 독이 될 수도 있지만 달콤한 꿀이기도 한 ‘사랑’은 극의 주제이자 정서이기도 하다.


집안 반대를 이겨내고 윤재 아빠를 사랑한 윤재 엄마, 딸의 선택에 실망했지만 돌아와 손자까지 품어준 윤재 할머니, 살인범에게서 윤재를 보호한 엄마와 할머니, 아빠도 삼촌도 아니지만 윤재를 지켜주는 이웃이자 엄마 친구 심 박사, 편견 없이 윤재에게 다가와 사랑을 알려주고 따뜻함을 일깨워준 도라, 모두가 외면하는 곤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대신 칼에 찔린 윤재, 마음에 칼을 품고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랑받고 싶은 몸부림이었던 곤이까지.


<아몬드>의 인물들은 다치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죄가 되고 독이 되는 사랑을 했지만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상처 입는 걸 기꺼이 감당하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아몬드>는 윤재와 곤이의 성장극이면서도 극 중 모든 인물, 또 관객을 성장시키는 극이기도 하다. 이런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죄가 될지, 독이 될지, 달콤한 꿀이 될지 알 수 없는 사랑을 하더라도 기나긴 항해를 포기하지 말라고. 결말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조차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며 인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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