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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트인사이트</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link>
<description>아트인사이트 – 문화예술은 &#039;소통&#039;입니다 - ART insight</description>
<lastBuildDate>Wed, 12 Aug 2026 19:41:53 +0900</lastBuild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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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Review] 미래의 나 옆에 미래의 나 옆에 미래의 나 -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001</link>
<description><![CDATA[2분 후의 미래에 휘둘리다가 70분이 순삭되어 버린 건에 대하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어느 날 TV 속의 내가 나에게 말을 건다.“나는 2분 후 미래의 나야. 넌 지금 2분 후의 미래를 보고 있어. 이 TV는 미래를 보여주는 타임 TV야.” </p>
<p>  &nbsp;  </p>
<p>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p>
<p>  &nbsp;  </p>
<p>이번 주 로또 1등 당첨 번호를 물어볼 것인가? 내일 어떤 주식 종목이 오를지 물어볼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될지 물어볼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런 질문은 다 소용이 없다. 잊지 마시라. 이 타임 TV에는 ‘2분’이라는 제한이 있다.</p>
<p>  &nbsp;  </p>
<p>그럼 이제 당신은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타임 TV를 통해 2분에서 더 2분 뒤, 그보다 더 2분 뒤, 또 그보다 더 2분 뒤... 이렇게 더욱 먼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p>
<p>  &nbsp;  </p>
<p>이 황당하고도 기발한 물음에 가장 유쾌한 답을 내놓는 영화가 있다.</p>
<p>&nbsp;</p>
<p>  &nbs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65520_lzdodzfk.jpg" alt="티저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nbsp;  </p>
<p>&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2020년 제작된 일본의 SF 영화로, 7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타임 루프를 주제로 짧고 굵게 진행되는 소동극이다.</p>
<p>&nbsp;</p>
<p>‘드로스테 효과’란 한 화면 속에 동일한 화면이 작게 삽입되어 재귀적으로 무한 반복되는 효과를 일으키는 기법을 뜻한다. 양쪽으로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에 섰을 때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안쪽으로 무한히 반복되어 보이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817_pwuxhvvr.jpg" alt="Droste_Cacao_-_Pastilles_blikje_van_250_gram,_foto_1 (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361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드로스테 효과’는 네덜란드의 코코아 브랜드인 ‘드로스테(Droste)’의 포장지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 영화에도 그 포장지 디자인이 상징처럼 등장한다. 단순한 상표 이름을 넘어, 고작 2분이라는 짧은 시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한히 확장되는 이 영화의 리듬을 가장 완벽하게 요약하는 키워드인 셈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TV 속의 TV 속의 TV를 타고, 무한히 확장되는 2분의 시간</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831_vbvngbte.jpg" alt="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nbsp;  </p>
<p>주인공 ‘카토’는 한 건물 1층에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기타를 연주하고 밴드에 열정을 갖고 있는 평범한 남성이다. 그는 우연히 건물 2층에 있는 자신의 방 TV와 1층 카페의 TV가 2분의 시간 차를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챈다. 카페의 TV는 지금으로부터 2분 후의 미래를 보여준다. 카토는 얼떨떨해하지만, 카페 직원과 카토의 지인들은 엄청난 발견이라며 저마다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고 들뜬다.</p>
<p>&nbsp;</p>
<p>하지만 그들은 곧 ‘2분 후의 미래를 보는 것’의 한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2분으로는 로또 당첨 번호도 알 수 없으며,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을 방법도 알 수 없다.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한계를 해결하고자, 2층 방의 TV와 1층 카페의 TV를 마주 보게 만들어 과거와 미래가 끝없이 연결되는 ‘드로스테 효과’를 만들어낸다.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845_qhyvmgeu.jpg" alt="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  &nbsp;  </p>
<p>  &nbsp;  </p>
<p>‘TV를 통해 2분 후의 자신을 만난다’는 설정은 분명 참신하다. 그러나 이 설정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견인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감이 있다. 하지만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참신한 설정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인물들과 예상 못 한 돌발 상황을 연이어 등장시키며 설정의 힘을 키우고 70분간 유쾌하게 달려간다. 일본 코미디 특유의 아기자기함과 따뜻함이 돋보이는 본 작품은 초반 장면에서 지루함을 느끼던 관람객도 후반에는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p>
<p>&nbsp;</p>
<p>&nbsp;</p>
<p>  &nbsp;  </p>
<p><span style="font-size: 18px;"><b>거대 자본도, 특수효과도 필요 없는 '원테이크'의 마법</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856_uufmpqxi.jpg" alt="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왓챠피디아 등의 감상평에서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을 두고 일본의 원테이크 좀비 영화 &lt;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gt;(이하 ‘카멈’)를 떠올리는 관객이 다수 확인되었다. ‘카멈’을 매우 좋아하는 필자 역시도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을 즐겁게 관람하였다. ‘카멈’은 전문 영화 제작사가 아닌, 극단 겸 영화학교의 워크숍 개념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 역시 일본 교토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극단 유럽기획’이 야마구치 군타 감독을 필두로 제작하였다. 본 작품의 제작비를 위해 진행된 크라우드 펀딩은 모금 하루만에 목표액을 모두 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p>
<p><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p>
<p>전문 영화인이 아닌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작품이라서일까?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거창한 특수효과나 거대 자본 없이도 관람객을 소리 내어 웃음짓게 만든다. 빌라 건물 안에서의 한정된 전개와 아이폰 촬영, 의외로 SF의 문법을 따르는 요소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끝나는 엔딩까지. 엔딩을 본 후에 뒷맛 없이 깔끔하고 유쾌하게 극장 문을 나설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나 눈에 띄는 원테이크 촬영 기법은 관람객이 카페 안에 함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몰입감을 높이고, 영화의 위트와 통통 튀는 매력을 강화한다.</p>
<p>&nbsp;</p>
<p>&nbsp;</p>
<p>  &nbsp;  </p>
<p><b><span style="font-size: 18px;">내가 지금 있는 곳은 미래의 과거가 아니야</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927_lnvrevxv.jpg" alt="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nbsp;  </p>
<p>카페 직원과 지인들이 2분 후의 미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생각하며 환상에 부푼 것과 달리, 주인공 카토는 미래를 본다는 행위에 시종일관 저항감을 드러낸다. 내가 지금의 나로서가 아닌, 미래에 종속된 ‘과거’가 되어 미래가 이끄는 대로 휘둘리게 되는 것을 염려해서다. 실제로 등장인물들은 2분 후의 미래를 봐버린 이상, 2분 후의 자신은 그 미래를 거스를 수 없는 ‘인과율’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p>
<p>  &nbsp;  </p>
<p>미래를 알게 되는 것은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의 자유의지를 묶어 놓는 족쇄일까? 이것에 대한 주인공의 답은 영화에서 확인하길 바란다.</p>
<p>&nbsp; &nbsp;</p>
<p>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출발하여 귀엽고 유쾌한 SF 활극을 보여주다 종극에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며 마무리되는 영화,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다가오는 8월 18일 정식으로 개봉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65908_ctvakozv.jpg" alt="컬처리스트양혜정.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양혜정]]></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7:06:23 +0900</pubDate>
</item>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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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Review] 상자 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어있을까 - 상자 속의 양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000</link>
<description><![CDATA[시나리오 만의 여백을 느끼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2830_chctbldx.jpg" alt="대원-상자속의양-표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7px;" />
   </p>
</div>
<div>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div>
<div>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div>
<div>보통 일반인이 영화를 접하는 방식은 영상을 통해서다. 직접 두 발로 영화관에 걸어가 2시간에서 3시간 남짓 집중하거나, 알고리즘을 통해 갑자기 뜬 영화의 짤막한 영상을 접한다.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의 머리로부터 떠오른 상상을 완벽하게 시각화한 것을 만나게 된다. 살을 덧붙이거나 더 채울 필요 없이. 간혹 빈틈이 있거나 발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제작자가 의도한 것일 테니 우리가 할 일은 보기 좋게 흡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영화 한 잔을 마시게 된다. 이게 보통의 우리가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다.</div>
<div>
   <br />
</div>
<div>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어떨까? 감독이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서사를 바탕으로 대사와 지문을 뼈대 삼아 구축한 시나리오는 영화의 설계도라 볼 수 있다. 집을 짓기 전 대들보같은 역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빈 공간이 많다. 아직 완성도가 채워지기 전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 말인 즉슨, 최소한의 정보량을 가지고 개개인이 떠올릴 수 있는 상상의 폭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인물의 대사와 상황에 대한 설명만으로 개개인이 떠올리게 되는 장면은 모두 달라진다. 감독과 같이 이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기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만약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다면, 이 시나리오집은 관객이 독자로 나아가게 하는 연결끈이 된다. 직접 보았던 장면을 활자로 다시 접하며 곱씹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문장이 어떻게 실제가 되는지 감상하며 말이다.</div>
<div>
   <br />
</div>
<div>나의 경우에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 말인 즉슨, 영화의 전부를 본 적은 없지만 얼추 내용에 대해서 익히 보고 들은 적이 있었다. 가끔 추천으로 올라오는 짤막한 영상까지도.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의 주가 되는 배우들이 어떤 톤과 색깔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알고 있지만, 그 작품의 깊이에 대해서는 헤어리지 못했다. 그런 사람에게 시나리오 집은 빈 장면들을 속속들이 채워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나는 이번 시나리오 집을 그렇게 접했다. 분명 아는 장면이 나올 때에는 매우 반가워 머릿속으로 선명한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보지 못한 장면에 대해서는 온전히 나의 상상력에 기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흐름으로 시나리오를 읽다보면 유난히 인상깊은 부분이 등장했다. 갑자기 나를 멈춰 세우는 방지턱은 갑자기 다가왔다.</div>
<div>
   <br />
</div>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div>&nbsp;</div>
   <div>어머니 [점검하러 왔는데 애가 여기를 좋아해서요. (먹을 수도 없는데)]&nbsp;</div>
   <div>
      <span style="white-space: pre;"></span>이츠키는 자리에 일어서서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div>
   <div>오토네 [몇 년 되셨어요? 그러니까 ...... (죽게 된 이후로).]</div>
   <div>어머니 [2년 됐어요...... 차 사고였는데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요.]</div>
   <div>
      <span style="white-space: pre;"></span>자신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div>
   <div>오토네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츠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았는데... 그걸 하는게 지금 삶의 보람이에요.]</div>
   <div>
      <span style="white-space: pre;"></span>이 말과 함께 이츠키에게 웃음을 보이는 어머니.
   </div>
   <div>&nbsp;</div>
   </blockquote>
<div>&nbsp;</div>
<div>해당 장면에서는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나에게는 사회적인 시선을 너무나 많이 받은 나머지, 최대한 순진하게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익숙해졌을 법한 아픔이지만, 매번 새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을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사람들의 무지하고 천진하며 애달퍼하는 질문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죽은 아들을 대체할 안드로이드와 함께 살게 될 부부의 미래를 그려보이는 이 인물에게서는 다양한 감정이 엿보인다. 사고로 갑자기 잃어버린 아이를 향한 그리움, 그 아이와 똑같은 생김새를 한 로봇을 향한 애틋함, 죽은 아들을 이렇게 대체해도 되는지에 대한 도덕적인 망설임. 그 중에서도 가장 비춰보이는 것은 이미 사라진 아이를 인조적으로라도 되살려 눈 앞에 존재하게끔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다.</div>
<div>
   <br />
</div>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div>&nbsp;</div>
   <div>노부요 [뭔 생각으로 저런 걸...]</div>
   <div>오토네 [(평온한 척을 하며) 지금 전국에 3천 명이나 있대.]</div>
   <div>노부요 [아직 젊은데 한 명 더 만들면 되지.]</div>
   <div>...</div>
   <div>노부요 [(안뜰을 보며) 잘도 만들어졌네...]</div>
   <div>오토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div>
   <div>노부요 [너무 진짜 같아서 괜히 섬뜩하지 않니?]</div>
   <div>&nbsp;</div>
   </blockquote>
<div>&nbsp;</div>
<div>오토네의 엄마 노부요는 예상치 못하게 죽은 손자를 쏙 빼닮은 안드로이드 카케루를 만나고 당황해한 것도 잠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털어놓아버린다. 말은 곧 비수가 되어 오토네의 가슴에 꽂히게 되고, 계속해서 창과 방패의 싸움이 이어진다.</div>
<div>
   <br />
</div>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div>
      <div>&nbsp;</div>
      <div>노부요 [이거 (레몬 나무).]</div>
      <div>오토네 [으응...]</div>
      <div>노부요 [베어 버려. 이 나무 말이야.]</div>
      <div>오토네 [뭐?]</div>
      <div>노부요 [베어 버리라고.]</div>
      <div>오토네 [무슨 소리야. 이 나무는...]</div>
      <div>노부요 [싫어도 날마다 생각날 거 아냐.]</div>
      <div>오토네 [싫지 않거든.]</div>
      <div>노부요 [그러고 사니까 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div>
      <div>&nbsp;</div>
      </div>
   </blockquote>
<div>&nbsp;</div>
<div>여기서 주목할 것은 죽음의 대수로움이다. 이미 손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마음 속에서 정리를 끝낸 노부요와 달리 오토네에게는 죽은 아들에 대한 미련이 존재한다. 아직 더 해줄 게 많았는데,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리고 계속되는 그 날에 대한 후회. 그 후회가 겹겹이 쌓이고 덩어리져 결국 안드로이드를 집에 들이게 되는 상황이 찾아오자 아들의 형상에 대한 오토네의 사랑과 집착은 심해진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서서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죽음에는 올바른 때가 없고, 모든 일은 인과관계를 따져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이미 떠나보낸 자와 떠내 보내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은 가늠할 수도 없이 크다. 전국에 3천명이나 있다며 안드로이드 입양에 대해 대수로운 모습을 보이는 오토네는 아들에게 찾아온 죽음만큼은 결코 대수롭게 넘기지 못한다. 미련이 넘친다. 무엇이라도 붙잡아 빠져나간 빈자리를 채우고자 발버둥치며 그 종점이 바로 아들의 겉모습을 빼닮은 사람 아닌 무언가다. 바로 이것이 대수로움의 모순이다.</div>
<div>
   <br />
</div>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div>
      <div>&nbsp;</div>
      <div>오토네 [... 괴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나요?]</div>
      <div>오사나이 [마음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런 식으로 보였다면 그건 당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nbsp;</div>
      <div>
         <span style="white-space: pre;"></span>새로운 관을 붙이자, 액체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내장이 움직인다.
      </div>
      <div>오토네 [나의 감정...]</div>
      <div>오사나이 [(눈으로 상처를 보면서) 어차피 이 애는 당신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div>
      <div>&nbsp;</div>
      </div>
   </blockquote>
<div>&nbsp;</div>
<div>과거의 카케루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안드로이드를 보며 오토네는 소름끼쳐 하며 진심을 내뱉어 버린다. 그런 짓을 하는 아이는 엄마 애가 아니라는 말에 카케루 안드로이드는 아들의 모습을 보이는 대신 돌연 계약을 종료하겠냐는 말만 종용하며 모자지간의 관계에서 계약자와 피계약자의 관계로 변환한다. 오토네는 결국 혼란에 휩싸이고, 엄마 역할을 그만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카케루는 윗층에서 떨어져 버리며 스스로를 해하는 행동을 한다. 그를 고치기 위해 방문한 엔지니어 오사나이는 안드로이드의 감정에 대해 묻는 오토네에게 친절한 동시에 냉철하게 답한다. 결국 카케루는 오토네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 아들에게서 보고 싶었던 모습을 대신해서 얻고자 하는 오토네와 그에 상응하여 반응하는 안드로이드는 결국 인간 사이의 감정 교환이 아닌, 입력과 출력에 제한된다. 그 관계를 알아버린 오토네의 깨우침은 추후 카케루를 놓아주게 되는 시발점으로 작동한다.</div>
<div>
   <br />
</div>
<div>상자 속의 양은 죽은 아들을 완벽하게 재현한 안드로이드를 입양한 부부의 이야기를 담는다.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 함께 나누었던 추억의 물건들. 그러나 어떤 기술도 상실의 본질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 죽은 이는 돌아올 수 없다는 잔인한 진실 앞에서, 부부의 눈 앞에 놓인 안드로이드 역시 점차 낯선 기계로 보이기 시작한다.</div>
<div>
   <br />
</div>
<div>때로는 화면 속 영상보다 텍스트의 여백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상자 속의 양 역시 그렇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이어지는 시나리오의 문장들 사이로 직접 자신만의 여백을 채워 넣으며, 이 이야기의 결말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div>
<div>&nbsp;</div>
<div>&nbsp;</div>
<div>&nbsp;</div>
<div>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53436_vppcemwn.jpg" alt="컬쳐리스트 조유진.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조유진]]></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5:34:38 +0900</pubDate>
</item>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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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Review] 결국 양은 상자 밖으로 나오게 된다 - 도서 &#039;상자 속의 양&#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1</link>
<description><![CDATA[AI든 인간이든 서로에게 좋은 안녕이란 무엇일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ff0000;">이 글은</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ff0000;">영화 〈상자 속의 양〉의</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ff0000;">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 ">  &nbsp;  </p>
<p>  &nbsp;  </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만약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최근, AI로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복원해서 유족에게 보여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무대 위 고인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움직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족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영상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멈췄던 기억이 있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일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간절한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마음이 드는 이유를 그때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p>
<p>  &nbsp;  </p>
<p style="text-align: justify;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상자 속의 양》 각본집을 읽으면서 그 영상이 떠올랐다. 책 후반에 감독이 직접 밝힌 비하인드에 따르면, 이 영화의 시작은 “생성형 AI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감독은 인터넷에서 본 중국의 기사 하나에서 이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는데, 그 기사는 컴퓨터 화면상에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비즈니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내용이었다.</p>
<p>  &nbsp;  </p>
<p style="text-align: justify; ">만약 정말로 AI 기술을 통해 그리운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그 기술을 기꺼이 이용하기를 택할까? 그 기술로 복원한 모습이 외양과 목소리는 같다고 해도, 그 상대를 과연 내가 알던 사람과 겹쳐 볼 수 있을까? 각본집 《상자 속의 양》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nbsp;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33755_pmmzawbu.jpg" alt="대원-상자속의양-표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7px;" />
</p>
<p>&nbsp;</p>
<p>&nbsp;</p>
<p>영화에서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 오토네(아내)와 켄스케(남편)는 죽은 사람의 부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AI 휴머노이드 서비스를 통해 죽은 아들과 똑 닮은 ‘카케루’를 데려온다. 이 아이를 받아들이는 부부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p>
<p>&nbsp;</p>
<p>오토네는 카케루를 데려온 첫날부터 아이를 껴안고 잠들며, 휴머노이드인 카케루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을 켄스케에게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진짜’ 카케루를 대하듯이.</p>
<p>&nbsp; &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dashed rgb(102, 102, 10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
      <b>&nbsp;</b>
   </p>
   <p>
      <b>켄스케</b>: 저녁밥 어쩔래?
   </p>
   <p>
      <span style="white-space:pre"></span>&nbsp; &nbsp; &nbsp; &nbsp;&nbsp;<span style="white-space:pre"></span>&nbsp; (갑자기 표정이 바뀌는 오토네)
   </p>
   <p>
      <b>오토네</b>: 지금 밥 얘기는 하지 마.
   </p>
   <p>
      <b>켄스케</b>: ?
   </p>
   <p>
      <span style="white-space:pre"></span><span style="white-space:pre"></span>&nbsp; &nbsp; &nbsp; &nbsp; &nbsp; (오토네, 카케루의 귀를 두 손으로 막는다.)
   </p>
   <p>
      <b>오토네</b>: <span style="font-size: 14px;">(작은 목소리로)</span> 카케루는 못 먹으니까…
   </p>
   <p>&nbsp;</p>
   </blockquote>
<p>&nbsp;</p>
<p>반면, 켄스케는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에게 본인을 아빠 대신 아저씨라 부르라고 말한다. 이렇게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를 자신의 ‘진짜’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는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에게 주입된 기억 정보를 통해 자신이 과거 아들을 잃었을 때의 사건을 조사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p>
<p>&nbsp;</p>
<p>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켄스케 역시 생전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를 보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렇게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음을 추스르고,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를 돌려보내지 않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이기로 결정한다.</p>
<p>  &nbsp;  </p>
<p>각본은 등장인물의 대사와 지문으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죽은 아이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가 ‘전원’이 들어온 뒤에 두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면, 그는 여전히 죽은 아이의 복제품에 불과할까, 혹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두 사람은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를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밤, 어떤 마음으로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을까.</p>
<p>  &nbsp;  </p>
<p>&nbsp;</p>
<p>  &nbsp;  </p>
<p>
   <span style="font-size: 18px;"><b>두 번째 안녕은 '진짜'로 안녕</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상자 속의 양》은 단순한 AI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넘어, 가족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성찰해보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오토네, 켄스케와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 이 셋의 관계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관계는 바로 오토네와 그의 엄마, 노부요의 관계였다. 어린 시절 오토네는 노부요에게 “엄마 역할 관둘래”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오토네에게 오랜 상처로 남았고, 오토네는 자신은 절대 노부요 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에게 똑같은 말을 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p>
<p>  &nbsp;  </p>
<p>각본집에서는 노부요가 어린 오토네에게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토네가 왜 그 말을 자신의 아들에게 했는지 또한. 이 대목의 불친절함이 그 대사를 오래도록 곱씹도록 만들었다.</p>
<p>&nbsp;</p>
<p>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가족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오랜 시간 지속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여기서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의외의 지점에서 서로 겹쳐 보인다는 점이었다.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가 과거 기억을 데이터 삼아 태어나 그 기억을 토대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오토네 또한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를 살아간다.</p>
<p>  &nbsp;  </p>
<p>비슷한 면이 있는 두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오토네는 쉽사리 그렇게 되지 못한다. 반대로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주입했던 기억에서 멀어지며 동료 휴머노이드와 다른 인간 친구를 만나 새로운 경험을 쌓아간다.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는 오로지 과거의 기억으로만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과거로부터 먼저 벗어나는 쪽은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이다.</p>
<p>&nbsp;</p>
<p>영화 후반,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는 결국 오토네와 켄스케의 곁을 떠난다. 다른 AI 휴머노이드와 인간 동료 들과 함께 숲속에 자신의 집을 짓는다. 죽은 아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결국 다시 부모의 곁을 떠나는 셈이다.</p>
<p>  &nbsp;  </p>
<p>다만 처음의 이별과 두 번째 이별은 다르다.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아이를 잃었지만, 이번에는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보내준다. 한 번 잃었던 아이를 휴머노이드로 만들면서까지 애써 받아들인 두 사람에게 어쩌면 두 번째 이별은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가 자신들이 기억하는 아이와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끝내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 것까지가 두 사람이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p>
<p>&nbsp; &nbsp;&nbsp;</p>
<p>《상자 속의 양》이라는 제목은 《어린 왕자》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각본집에서도 오토네가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 언급하는 대목은 비행사가 상자 하나를 그린 뒤 어린 왕자에게 그가 원하는 양이 그 상자 안에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54854_ldmwokii.jpg" alt="[크기변환]common.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nbsp;</p>
<p>&nbsp;</p>
<p>상자 속의 양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보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대로 상상할 수 있다. 오토네와 켄스케, 두 사람에게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도 처음에는 그런 존재였을지 모른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아이의 모습만이 담긴 존재, 죽은 아이의 빈자리를 채워줄 존재. 하지만 카<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루는 결국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상자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부모를 떠나고, 자신이 살아갈 집을 직접 짓는다.</p>
<p>  &nbsp;  </p>
<p>
   <span style="color: #000000;">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죽은 사람을 AI로 되살릴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그리워했던 사람을 똑 닮은 존재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존재가 내가 기억하고 규정하던 사람과 다르게 느껴진다 해도 나는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span>
</p>
<p>
   <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
</p>
<p>
   <span style="color: #000000;">어쩌면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두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까지 이해하고 품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두 번째 이별은 첫 번째 이별과는 다르다. 카</span><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케</span><span style="color: #000000;">루를 자신들의 곁에 두면서 상실을 채우는 대신, 아이가 선택한 삶을 존중하고 보내주는 것. 어쩌면 두 사람과 한 휴머노이드는 그때 진정한 가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span>
</p>
<p>
   <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
</p>
<p>
   <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전지영]]></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21:55:0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7</guid>
<title><![CDATA[[Opinion] 찰나의 순간 [만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7</link>
<description><![CDATA[우리는 찰나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나가 버린 찰나를 품은 채 또 다른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font color="#191919" face="Pretendard Variable, Noto Sans KR, Malgun Gothic, AppleGothic, 돋움, dotum, sans-serif"><span style="font-size: 16px;">*</span></font>
</p>
<p style="text-align: center; -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span style="color: #191919; font-family: " pretendard="" variable",="" "noto="" sans="" kr",="" "malgun="" gothic",="" apple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6px;"="">본 글은</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span style="color: #191919; font-family: " pretendard="" variable",="" "noto="" sans="" kr",="" "malgun="" gothic",="" apple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6px;"="">네이버 웹툰 &lt;청춘 러브썸&gt;의</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span style="color: #191919; font-family: " pretendard="" variable",="" "noto="" sans="" kr",="" "malgun="" gothic",="" apple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6px;"="">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 -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span style="color: #191919; font-family: " pretendard="" variable",="" "noto="" sans="" kr",="" "malgun="" gothic",="" applegothic,="" 돋움,="" dotum,="" sans-serif;"="">&nbsp;</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 -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span style="color: #191919; font-family: " pretendard="" variable",="" "noto="" sans="" kr",="" "malgun="" gothic",="" applegothic,="" 돋움,="" dotum,="" sans-serif;"="">&nbsp;</span>
</p>
<p>최근 여유가 생겨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잠시 놓고 있었던 나만의 여가 시간을 다시 보내게 되었다. 바로 웹툰을 보는 일이었다. 학창시절에는 무슨 요일에 어떤 웹툰이 연재되는지까지 외워가며 열심히 웹툰을 챙겨 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회차가 올라오는 날이면 괜히 하루가 기다려졌고, 한 주를 보내는 작은 즐거움 중 하나가 웹툰을 보는 일이었다.</p>
<p>&nbsp;</p>
<p>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던 웹툰을 다시 찾아보다가,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의 후속작을 발견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웹툰은 바로&lt;청춘블라썸&gt;의 후속작, &lt;청춘 러브썸&gt;이다.</p>
<p>&nbsp;</p>
<p>대학생이 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중에서 유독 오래 눈에 밟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소망이다.</p>
<p>&nbsp;</p>
<p>&lt;청춘블라썸&gt;에서 하민은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투신자살을 한다. 그가 남긴 상처는 동생 재민에게도, 그와 청춘의 한때를 함께했던 소망에게도 깊게 남는다. 시간이 흘러 재민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대학생활을 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반면 소망은 오랜 시간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하민과 함께했던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두 사람에게는 같은 과거가 있지만, 그 기억을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p>
<p>&nbsp;</p>
<p>소망이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어쩌면 찰나의 아주 짧은 시간이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그렇구나. 우리도 분명 연인이었겠구나."</p>
   <p>&nbsp;</p>
   </blockquote>
<p>&nbsp;</p>
<p>하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던 그 시절. 그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청춘의 한 부분을 함께 보냈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하민이 떠난 뒤 소망의 삶에서는 오히려 가장 긴 시간이 되어버린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찰나의 순간이란 대체 무엇인가.</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찰나의 순간이란 대체 무엇인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문득, 찰나의 순간이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검색하던 도중, 국립 국어원에서 이런 질문을 찾아볼 수 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0423_sfxgkgxm.png" alt="2026-08-12 19;03;54.PNG" style="width: 604px; height: 302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찰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또는 매우 짧은 시간을 뜻한다. ‘순간’ 역시 아주 짧은 동안을 의미한다. 두 단어의 뜻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에 ‘찰나의 순간’은 의미가 중복<span style="text-align: left;">된 표현이지 않은가? 우리는 왜 굳이 같은 의미를 두 번 겹쳐서 말할까. ‘찰나’만으로도 충분하고, ‘순간’만으로도 충분한데 우리는 종종 ‘찰나의 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이에 대한 답변은 이러했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두 단어의 의미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p>
   <p>&nbsp;</p>
   <p>그러나 '찰나'가 나타내는 시간이 '순간'이 나타내는 시간보다 더 짧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찰나라고 하는 순간'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에는 '찰나의 순간'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right; ">-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찰나라고 하는 순간, 어쩌면 너무 짧아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찰나가 지나가 버리는 순간이라면, 우리는 그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한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고, 영상을 찍고, 일기를 쓰고, 그때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다시 불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남겨두고 싶어서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우리의 삶도 결국 수많은 찰나의 연속이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누군가와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친구들과 아무 이유 없이 웃었던 순간, 유난히 예뻤던 어느 날의 하늘, 좋아하는 노래를 처음 들었던 순간. 그때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시간의 길이와 기억의 크기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몇 년을 함께한 사람보다 짧은 만남 하나가 오래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수없이 반복했던 일상보다 단 한 번의 장면이 더 선명하게 남을 수도 있다. 그렇게 찰나였던 순간 하나가 때로는 앞으로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p>
<p>&nbsp;</p>
<p>그리고 같은 기억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기억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때 참 좋았지’라고 생각하면서 또 다른 좋은 순간을 만나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 기억은 발판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p>
<p>&nbsp;</p>
<p>소망에게 하민과의 기억이 그랬던 것처럼.</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기억은 사람마다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재민이가 걱정하더라고요. 자신은 소망 씨 덕분에 지금을 살아가는데, 소망 씨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을까</p>
   <p>아직도 과거에 남아있는 건 아닐까 (..<span style="text-align: left;">.)</span></p>
   <p>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그래도 아마 모두 같은 마음 아닐까요? 소망 씨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요.</p>
   <p>재민이도, 나도, 원장 쌤이랑 가을이도, 다들."</p>
   <p>&nbsp;</p>
   <p>"... 근데 무서우면 어떡해요? 너무 행복해져서 하민이에 대한 걸 잊어버릴까 봐. 안 그래도 나한테 남은 건 점점 흐려지는 기억 따위 밖에 없는데."</p>
   <p>&nbsp;</p>
   </blockquote>
<p>&nbsp;</p>
<p>소망이 하민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잊는 것이 두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하민을 잊어버리는 순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마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망은 그 시간을 계속 기억한다. 하민과 함께했던 자신의 청춘까지 놓아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면 기억하는 것과 과거에 머무르는 것은 같은 것일까? 기억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과거를 모두 지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나온 순간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우리의 일부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기억과 함께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일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우리는 지나간 찰나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소망 씨가 남기고 싶은 건 하민 씨에 대한 기억이죠? 하민 씨 말고 소망 씨 이야기를 하는 건 어때요?</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픈 기억을 꼭 잊어야 할 필요는 없다지만, 이렇게 계속 얽매여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소망씨의 바람을 담은 이야기로 새로 쓰죠."</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 시즌2 78화</p>
   <p>&nbsp;</p>
   </blockquote>
<p>&nbsp;</p>
<p>결국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은 어쩌면 기록한 순간보다 충분히 살아낸 순간일지도 모른다.</p>
<p>&nbsp;</p>
<p>함께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웃고 싶을 때 마음껏 웃는 것. 그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p>
<p>&nbsp;</p>
<p>그렇게 살아낸 찰나는 시간이 지나도 우리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찰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찰나의 순간’은 어쩌면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찰나도 순간이고, 순간도 찰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짧은 시간을 말하면서도 같은 의미를 한 번 더 덧붙인다. 지나가 버릴까 봐, 너무 빨리 사라질까 봐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그런 찰나가 있다. 누군가는 그 순간을 발판 삼아 다음 계절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조금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나간 찰나를 품은 채 또 다른 찰나를 살아가야 한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p>
<p>&nbsp;</p>
<p>그래서 나는 소망을 단순히 과거에 갇힌 불쌍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소망에게 하민이와 함께했던 찰나는 그녀의 삶을 멈추게 한 기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청춘을 온전히 보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소망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잊는 법이 아니라,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는 법을 찾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망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청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소망이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방법은, 우리가 찰나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과도 닮아 있을 것이다.</p>
<p>
   <br />
</p>
<p>우리는 찰나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나가 버린 찰나를 품은 채 또 다른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주하]]></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14:30:2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0</guid>
<title><![CDATA[[Opinion] 어제 먹은 물고기가 왜 저기에?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0</link>
<description><![CDATA[1,500년 전 제사상에 오른 물고기가 오늘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우리들의 밥상》을 둘러보며 든 생각은, 유물과 예술을 가르는 기준이 사물의 특별함이 아니라 그것이 견뎌낸 시간이라는 것이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pan style="font-size: 18px;"><b>국립중앙박물관 《우리들의 밥상》을 보고</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 한가운데서 조금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nbsp;분명 어제 먹은 저녁과 비슷한 상이 유리장 안에 놓여 있었다.&nbsp;청어와 방어,&nbsp;복어.&nbsp;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유물’이라는 이름표가 붙는 순간,&nbsp;그것들은1,500년 전의 밥상이 되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3743_inrgxcxp.jpg" alt="IMG_1833.JPG" style="width: 700px; height: 372px;" />
</p>
<p>&nbsp;</p>
<p>&nbsp;</p>
<p>《우리들의 밥상》은&nbsp;2026년&nbsp;7월&nbsp;1일부터&nbsp;10월&nbsp;2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nbsp;1층 특별전시실&nbsp;2에서 열리는 특별전이다. 51개 기관이 협력해&nbsp;488건&nbsp;684점을 선보인다.&nbsp;규모만 보아도 이 전시가 단순한&nbsp;‘먹거리 소개’에 머물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nbsp;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한국인의 식생활을 따라가며 곡식과 그릇,&nbsp;조리 도구와 밥상,&nbsp;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자리에 담았다.</p>
<p>&nbsp;</p>
<p>그런데 전시를 걷다 보니 음식보다 오히려 그것을&nbsp;담고,&nbsp;썰고,&nbsp;바라본 흔적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먹다 남긴 것이 유물이 되는 순간</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큰 항아리에는 청어와 방어,&nbsp;돌고래,&nbsp;복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담겨 있었다.&nbsp;이는 망자를 위한 제사에 올려졌던 음식으로 밝혀졌다.&nbsp;살아 있는 사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nbsp;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절차 속에서 마련된 음식이었던 셈이다.&nbsp;그렇게 항아리 속에 담겼던 음식은&nbsp;1,500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날 유물이 되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0545_bnslkmqp.jpeg" alt="731253025_963776506687568_1899202635767933759_n.png.jpeg" style="width: 700px; height: 875px;" />
</p>
<p>&nbsp;</p>
<p>&nbsp;</p>
<p>이 장면에서 박수근의&nbsp;1952년작 &lt;도마 위의 굴비&gt;가 떠올랐다.&nbsp;전시는 이 작품을 부산 기장군 고촌리에서 출토된&nbsp;3~4세기 목제 도마 추정 유물과 나란히 배치했다.&nbsp;박물관이&nbsp;‘1,700년을 넘어선 만남’이라 설명하는 이유다.&nbsp;삼국시대의 도마와 박수근이 그린 도마가 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순간,&nbsp;도마라는 사물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의 부엌 곁을 지켜왔는지 실감하게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0606_upztkixc.jpg" alt="06.jpg" style="width: 700px; height: 588px;" />
</p>
<p>&nbsp;</p>
<p>&nbsp;</p>
<p>김홍도의 &lt;주막&gt;과 &lt;새참&gt;,&nbsp;김득신의 &lt;강가에 모여 먹고 마시다&gt;에서는 시선이 음식에서 사람으로 옮겨간다.&nbsp;국밥을 뜨는 나그네,&nbsp;새참을 둘러앉은 일꾼들,&nbsp;강가에서 술잔을 나누는 사람들.&nbsp;무엇을 먹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누가,&nbsp;어디서,&nbsp;누구와 먹었는가이다.&nbsp;밥상은 가장 사적인 행위인 동시에 한 시대의 삶과 관계를 드러내는 풍경이 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흔적을 남기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전시장에서 본 음식과 그 흔적을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작품들이 떠올랐다.</p>
<p>&nbsp;</p>
<p>1960년,&nbsp;다니엘 스포에리는 여자친구 키치카가 먹고 남긴 아침 식사 자리를 그대로 판에 고정해 &lt;키치카의 아침 식사&nbsp;I&gt;을 만들었다.&nbsp;반쯤 먹은 빵과 커피잔,&nbsp;흘러내린 음식물 자국까지 지극히 평범한 아침 식탁 전체가 작품이 되었다.&nbsp;식사를 마치면 치워졌을 흔적을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다.</p>
<p>&nbsp;</p>
<p>김청진의 &lt;서울특별시&gt;도 마찬가지다.&nbsp;일상에서 소비하는 음식과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 이 작품을 생각하면,&nbsp;음식은 꼭 물질로 보존되어야만 기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nbsp;누군가에게는 햄버거 포장지에 불과한 것이 카메라 앞에서는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nbsp;음식은 사라지지만,&nbsp;그 순간을 바라본 시선은 사진으로 남는다.</p>
<p>&nbsp;</p>
<p>스포에리와 김청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식사의 순간을 붙잡는다.&nbsp;두 작품을 떠올리고 나니 서봉총의 항아리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0819_teylogbf.jpg" alt="10.jpg" style="width: 659px; height: 773px;" />
</p>
<p>&nbsp;</p>
<p>&nbsp;</p>
<p>서봉총의 음식 역시 지금은 한 끼를 넘어선 무언가가 되어 있다.&nbsp;오랜 시간을 통과하며 유물이 된 것이다.&nbsp;스포에리가 식사 뒤의 흔적을 작품으로 붙잡고,&nbsp;김청진이 소비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면,&nbsp;서봉총의 항아리는&nbsp;한때의 음식이 시간 속에서 유물로 남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p>
<p>&nbsp;</p>
<p>서로 다른 시대와 방식이지만,&nbsp;세 장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nbsp;음식 자체보다&nbsp;음식을 둘러싼 시간과 흔적이 우리에게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유물과 예술을 가르는 것</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그렇다면 유물과 예술작품을 가르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특별함이 아닐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1059_fpmqthrx.jpg" alt="IMG_1845.JPG" style="width: 700px; height: 438px;" />
</p>
<p>&nbsp;</p>
<p>&nbsp;</p>
<p>전시장 속 물고기가&nbsp;1,500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무게로 특별했을까.&nbsp;망자를 위한 제의에 오른 음식이니 아무렇게나 마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nbsp;그러나 그것을 준비한 사람에게는 죽은 이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련한 음식이었을 뿐,&nbsp;훗날&nbsp;‘유물’이라 불리리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nbsp;특별했던 것은 물고기 자체만이 아니라&nbsp;그것이 오랜 시간을 견디며 남았다는 사실이다.</p>
<p>&nbsp;</p>
<p>결국 사물의 의미는 그것이 존재했던 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nbsp;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시선이 더해지면서 같은 사물은 음식이 되기도 하고,&nbsp;그림이 되기도 하며,&nbsp;사진이 되기도 하고,&nbsp;유물이 되기도 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span><span style="font-size: 18px;"></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p>
<p>&nbsp;</p>
<p>냉장고에 남은 반찬,&nbsp;배달 음식 영수증,&nbsp;식사를 찍어 올린&nbsp;SNS사진.&nbsp;지금은 너무 흔해서 굳이 남길 이유조차 없어 보이는 것들이다.&nbsp;하지만&nbsp;1,500년 뒤 누군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한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p>
<p>&nbsp;</p>
<p>서봉총의 물고기도,&nbsp;박수근의 굴비도,&nbsp;스포에리의 식탁도,&nbsp;김청진의 사진도 처음부터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nbsp;누군가는 그것을 먹었고,&nbsp;누군가는 바라보았으며,&nbsp;누군가는 남겼다.&nbsp;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평범했던 한 끼는 기억과 기록의 대상이 되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0916_vpzvsutm.jpg" alt="IMG_1876.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9px;" />
</p>
<p>&nbsp;</p>
<p>&nbsp;</p>
<p>특별함은 사물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nbsp;그것을 바라보는 시간과 시선 속에서 뒤늦게 만들어진다.</p>
<p>&nbsp;</p>
<p>《우리들의 밥상》은&nbsp;‘한국인은 무엇을 먹어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지만,&nbsp;내게는&nbsp;‘우리는 지금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p>
<p>&nbsp;</p>
<p>전시장을 나서며 처음의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았다.</p>
<p>&nbsp;</p>
<p>
   <b><i>‘어제 먹은 물고기가 왜 저기에?’</i></b>
</p>
<p>
   <b><i>&nbsp;</i></b>
</p>
<p>어쩌면 그 물고기가 저기에 있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nbsp;내가 먹은 물고기가 아직 저기에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 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강가에 모여 먹고 마시다〉, 〈도마 위의 굴비〉, 〈각종 해산물이 담긴 큰 항아리〉</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221856_bahxwact.jpg" alt="김민주.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class="isSelectedEnd">&nbsp;</p>
<p class="isSelectedEnd">&nbsp;</p>
<p>
   <em></em>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민주]]></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21:42:1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4</guid>
<title><![CDATA[[Review] 우리는 왜 아픈 순간에 웃을까 - 플리백]]></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4</link>
<description><![CDATA[배우 김규남의 1인극으로 만난 불완전한 청춘의 초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632_uglmgrno.jpg" alt="플리백_메인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0px;" /></p>
<p>&nbsp;</p>
<br />
<p>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간다. 가족에게는 딸이 되고, 친구에게는 비밀을 나누는 사람이 되며, 연인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존재가 된다. 관계의 단절이 단순히 한 사람을 잃는 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누군가가 떠나면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던 자신의 일부도 사라진다.</p>
<p><br /></p>
<p>연극 &lt;플리백&gt;은 관계가 하나씩 무너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하고 웃기는 한 여성을 통해 현대인의 고립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플리백의 소란스러운 언어 이면에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건네지 못한 슬픔과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p>
<p><br /></p>
<p>공연장에 들어서자 무대 위에 놓인 수십 개의 의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크기와 높이, 색상과 형태가 모두 다른 의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한 채 연결되어 살아가는 하나의 사회망처럼 보였다. &lt;플리백&gt;에서 의자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특정한 장소가 되기도 하며, 플리백과 타인을 이어주는 관계의 매개체가 된다. 그녀가 어떤 의자에 앉고 누구를 향해 몸을 돌리느냐에 따라 보이지 않는 인물과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수십 개의 의자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711_ygkdcsrk.jpg" alt="1. 플리백Fleabag_통합.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9px;" /></p>
<p>&nbsp;</p>
<p><br /></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배우 김규남의 플리백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727_aystklvl.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6.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46px;" /></p>
<p>&nbsp;</p>
<p>&nbsp;</p>
<p>&lt;플리백&gt;을 찾은 직접적인 계기는 배우 김규남이었다. 평소 즐겨 보던 유튜브 채널 ‘띱’에서 그는 특유의 표정과 정확한 코미디 감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짧은 영상에서 보여준 리듬감이 긴 호흡의 무대에서는 어떻게 확장될지 궁금했다. 짧게 편집된 영상 속 캐릭터가 아닌, 홀로 무대를 책임지는 배우 김규남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p>
<p><br /></p>
<p>&lt;플리백&gt;은 한 명의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인극이다. 플리백은 연애와 가족, 친구 부(Boo), 파산 직전의 기니피그 카페에 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김규남은 여러 의자를 오가며 목소리와 표정, 시선과 몸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을 불러낸다. 해리와 대화할 때, 언니와 충돌할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마주할 때마다 서로 다른 관계의 긴장과 온도가 한 사람의 몸을 통해 구현된다.</p>
<p><br /></p>
<p>모든 인물이 플리백의 기억과 재현을 통해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은 철저히 그녀의 시선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녀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과 외면하고 싶은 장면, 과장하거나 축소한 감정이 한 사람의 연기 안에 중첩된다. 1인극이라는 형식이 플리백의 고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이유다.</p>
<p><br /></p>
<p>작품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리듬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플리백은 성적 경험과 실패한 연애, 가족과의 갈등, 면접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까지 거리낌 없이 늘어놓으며 자신의 실패마저 웃음의 재료로 바꾼다.</p>
<p><br /></p>
<p>영국식 정서에서 농담과 빈정거림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기 위한 우회적인 표현으로 자주 활용된다. 슬픔을 웃어넘기고, 외롭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더욱 태연한 얼굴을 한다. &lt;플리백&gt;의 유머 역시 플리백이 수치심과 상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세운 정서적 방어막에 가깝다.</p>
<p><br /></p>
<p>배우 김규남은 자신의 플리백을 “가장 시끄러운 고립”이라고 표현했다. 플리백은 잠시도 쉬지 않고 관객에게 말을 걸지만, 정작 자신의 삶 속 인물들과는 진실한 감정을 나누지 못한다. 가족과 연인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감추면서도, 극 중 인물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관객이 그녀가 솔직해질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는 사실은 이 유쾌한 독백을 역설적으로 쓸쓸하게 만든다.</p>
<p><br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하나의 이야기가 된 기억의 파편들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743_hpwabhfn.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공연의 서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가족에게로 이동하고, 카페에서 벌어진 사건을 말하다가 죽은 친구 부의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채 제시된다.</p>
<p><br /></p>
<p>이러한 파편적 구성으로 인해 중반부에는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고 리듬이 다소 느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비극을 향해 모이면서, 서사의 파편화 자체가 플리백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p>
<p><br /></p>
<p>플리백은 가장 아픈 기억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웃길 수 있는 에피소드를 먼저 꺼내놓고 그 아래 묻힌 죄책감에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는다. 관객을 웃기는 동안에는 자신도 비극의 중심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p>
<p><br /></p>
<p>그녀는 타인에게 비난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희화화하고, 관계가 자신을 버리기 전에 스스로 관계를 망가뜨린다. 거침없는 성적 농담과 냉소적인 태도는 자유분방함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이 망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위장이다.</p>
<p><br /></p>
<p>김규남이 플리백에게 “이제 그만 웃겨도 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는 인터뷰가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도 이 때문이다. 플리백은 재미있는 사람이기를 멈추는 순간 자신의 수치와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김규남은 정확한 코미디의 리듬을 유지하다가 짧은 정적과 흔들리는 표정만으로 그 방어막에 균열을 만든다. 관객의 웃음이 멎는 순간, 플리백이 필사적으로 감춰온 외로움이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p>
<p><br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의자가 쓰러진 뒤 남은 한 사람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759_asxsehet.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작품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무대 위 의자들이 하나씩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친구 부는 세상을 떠났고 남자친구 해리는 플리백을 떠났다. 파산 직전이었던 기니피그 카페는 결국 문을 닫고, 단골손님 조 역시 더는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카페에 데려온 남자에게 걷어차인 기니피그 힐러리는 심하게 다치고, 플리백은 울면서 힐러리를 품에 안은 채 직접 숨을 끊는다.</p>
<p><br /></p>
<p>공연 내내 의자는 플리백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장소였다. 의자가 쓰러지는 장면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관계들이 모두 무너졌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회망처럼 보였던 의자들은 단절된 관계의 잔해가 되고, 그 폐허 한가운데 플리백만이 홀로 남는다.</p>
<p><br /></p>
<p>힐러리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왜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힐러리는 죽은 친구 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그런 힐러리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완성하는 행위는 남은 애착마저 파괴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자기처벌에 가깝게 보인다.</p>
<p><br /></p>
<p>플리백은 가장 친한 친구인 부의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었고, 이를 알게 된 부는 남자친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위장 교통사고를 시도하다 세상을 떠났다. 플리백은 이 사실을 곧바로 고백하지 못하고 농담과 다른 기억 사이에 숨겨두었다가 공연의 말미에야 진실을 드러낸다.</p>
<p><br /></p>
<p>그녀는 자신이 짊어진 죄책감을 감당할 언어와 방식을 찾지 못한 사람에 가깝다. 부의 죽음 이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관계를 망가뜨리고, 타인의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에게 남은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845_lulcrlps.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8.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br />“다들 언제쯤 깨달을까. 우리가 가진 건 결국 서로뿐이라는 걸.”<br />&nbsp;
</blockquote>
<p>&nbsp;</p>
<p>플리백은 욕망하고 실패하며, 상처받는 동시에 타인에게도 상처를 준다. 작품은 그런 그녀를 갑작스럽게 구원하거나 반듯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저 모든 관계가 쓰러진 자리에서도 한 인간이 여전히 살아 있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남겨둔다.</p>
<p><br /></p>
<p>우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이 있다. 대부분은 그것을 능숙하게 숨긴 채 괜찮은 사람처럼 하루를 보낸다. 플리백은 특별히 이상해서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살아가는 고립을 더욱 소란스럽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인물인지도 모른다.</p>
<p><br /></p>
<p>배우 김규남은 한 사람의 몸과 목소리만으로 웃음과 침묵, 욕망과 수치심, 고립과 연결을 오가는 플리백의 내면을 밀도 있게 구현한다. 한 사람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다시 텅 비게 만드는 1인극의 힘을 경험하고 싶다면 연극 &lt;플리백&gt;을 만나보길 권한다.</p>
<p><br /></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0445_abeslzkf.jpg" alt="20250915045948_bcifpgbt.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소희]]></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01:09:4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2</guid>
<title><![CDATA[[Opinion]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도서/문학]]]></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2</link>
<description><![CDATA[『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회와 자신의 삶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지만,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실존적 한계를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생생함과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신의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한 낯선 풍경 속에서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지독한 고독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이 된다면, 과연 나의 영혼이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일까.</p>
<p>
   <br />
</p>
<p>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세 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생과 사를 새롭게 고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부터 오히려 생생한 실존의 감각으로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은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이었던 뫼르소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실존의 여정을 담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1117_oulttipf.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154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자기 자신의 삶에서의 이방인</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뫼르소는 마치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랑도, 결혼도, 직업도,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니컬한 인간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판단하기에는 그는 오히려 상당히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사회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도 않으며, 허무주의자도 비관론자도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p>
<p>
   <br />
</p>
<p>아무 이유 없이 화물차 뒤를 쫓아가거나,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즉각적이고 순수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공허하거나 무감각한 인물이 아니라, 오로지 ‘살아 있음’ 그 자체에 집중하며 살아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머나먼 미래도 아닌 현재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곧 그의 삶 전체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의식 속에서 거의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사형을 앞둔 그는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뫼르소는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냉소적인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인간인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002_toknqruy.jpg" alt="이방인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nbsp;</p>
<p>&nbsp;</p>
<p>그러나 그는 동시에 매우 무관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며 “나는, 원래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감정은 어떤 사건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뫼르소에게는 자신의 감정과 그것을 체험하는 방식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은 그를 스쳐 지나갈 뿐,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감정조차 그에게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고, 그가 직접 말하듯 그의 의식에는 육체적 욕구와 현재의 감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한다.</p>
<p>
   <br />
</p>
<p>그렇기에 뫼르소에게는 대부분의 것이 서로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자신의 행동을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듯한 중립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것과 저것, 이것이 아닌 것과 저것이 아닌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를 두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신과 특별히 관계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뫼르소는 사회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도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사회에서의 이방인</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카뮈가 남긴 한 편지에 따르면 뫼르소는 ‘거짓말하지 않는 인간’이다. 처음에는 종잡을 수 없는 낯선 인물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감정을 꾸며내거나 사실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p>
<p>
   <br />
</p>
<p>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뫼르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p>
<p>
   <br />
</p>
<p>뫼르소는 마치 돌이나 바람, 바다처럼 존재한다. 그는 거짓말하지 않고,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판단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너와 나 사이에 어떤 판단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대신 ‘지금’이라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는 타인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고, 느낄 뿐이다.</p>
<p>&nbsp;</p>
<p>그러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면을 쓰고, 때로는 거짓말하며, 서로를 판단하고 또 판단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에 맞추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특정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뫼르소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규범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지 못한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의 변두리에 놓인 이방인이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1136_kcawodob.jpg" alt="14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3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br />
</p>
<p>그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후 열린 재판은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재판에서 뫼르소는 태양과 육체적 감각에 의해 순간적으로 아랍인을 살해한 인물에서, 마치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한 냉혹한 범죄자로 재구성된다. 특히 재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인 자체만이 아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 장례식 다음 날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등이 그의 인격을 판단하는 증거로 사용된다. 사회는 그가 실제로 어떤 인간인지보다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했는지를 기준으로 그를 판단한다.</p>
<p>&nbsp;</p>
<p>거짓말하지 않는 뫼르소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진실과 무관한 방식으로 판단되고, 결국 사형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재판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긴 재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판단받으며 살아간다.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회가 만들어낸 ‘판단된 삶’과 자신의 ‘진실한 삶’을 혼동하기도 한다.</p>
<p>
   <br />
</p>
<p>그러나 판단의 잔인함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반드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뫼르소의 변호사는 재판을 두고 “이것이 이 재판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지만,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뫼르소가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판받고 사회가 만들어낸 논리에 따라 처단되는 모습은, 사회적 판단이 지닌 기만성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의 재판에는 어쩌면 ‘타인을 함부로 재판하지 말라’는 질문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이방인에서의 탈출</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뫼르소는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에서도 무관심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삶으로서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p>
<p>
   <br />
</p>
<p>모든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관망하기만 하던 그는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는 순간, 억눌려 있던 감각과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단순하고 즉각적이기만 했던 그의 삶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지평선과 맞닿는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846_autotybx.jpg" alt="카뮈 2.jpg" style="width: 680px; height: 1024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인식한다.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고, 과거의 날들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방인이었던 그의 태도는 삶에 대한 애착과 함께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세 번의 죽음과 삶의 자각</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 소설은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에서 반복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 이 세 번의 죽음은 소설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양 끝에 놓여 있다면, 그 사이에 놓인 아랍인의 죽음은 두 죽음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p>
<p>
   <br />
</p>
<p>어머니의 죽음은 처음에는 뫼르소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건의 충격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간이 흐른 뒤 가랑비에 젖듯 천천히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뫼르소는 후자에 가까운 인물처럼 보인다. 소설의 끝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문득 떠올린다.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통해 죽음이 그의 삶에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죽음의 스산한 기운이 안개처럼 그의 삶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634_rusdziyb.jpg" alt="카뮈 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5px;" />
</p>
<p>&nbsp;</p>
<p>
   <br />
</p>
<p>어머니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느슨하지만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랍인을 살해하기 직전 뫼르소는 장례식 때와 같은 태양을 의식한다. 이 장면에서 태양과 죽음의 기억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이러한 감각적 경험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사형을 앞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 역시 죽음을 앞두고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p>
<p>
   <br />
</p>
<p>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즉흥적이고 현재에만 집중하던 뫼르소의 의식에는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각인된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이다. 소설 전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말 역시 이러한 죽음의 자각과 연결된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다는 사실과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만 궁극적인 의미를 남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과 사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더 이상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죽음에서 삶으로</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결국 뫼르소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사형수이다. 피할 수 없는 진실한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운명의 종착지가 반드시 허무주의나 자살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단 한 번뿐인 삶의 생명력을 더욱 치열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615_xrwrdgxb.jpeg" alt="카뮈 5.jpeg" style="width: 700px; height: 942px;" />
</p>
<p>&nbsp;</p>
<p>
   <br />
</p>
<p>언젠가 죽을 존재인데 삶을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언젠가 죽을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삶을 더욱 소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에 정해진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p>
<p>
   <br />
</p>
<p>뫼르소는 어둡고 컴컴한 죽음이 오히려 밝고 따뜻한 생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주는 존재임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계기가 된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작가의 생애</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한 살이 되기도 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포도 농장 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카뮈는 17세였던 1930년 폐결핵에 걸리면서 처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이후에도 평생 여러 차례 결핵이 재발했고, 그때마다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고, 이후 진로를 수정하여 진보적인 일간지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p>
<p>
   <br />
</p>
<p>1937년은 카뮈가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첫 번째 결혼 생활의 실패와 공산당과의 결별을 경험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대학교수 자격시험에도 응시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재발한 폐결핵의 치료와 요양을 위해 알프스 지방에 머문다. 그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의 경험이 그의 세계관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403_hvaenfmy.jpeg" alt="카뮈 3.jpeg" style="width: 678px; height: 452px;" />
</p>
<p>&nbsp;</p>
<p>&nbsp;</p>
<p>당시의 메모에서 그는 ‘결혼’과 ‘출세’ 등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목표와 자신이 얼마나 무관한지를 인식한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이방인』의 뫼르소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와 연결된다.</p>
<p>
   <br />
</p>
<p>1939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가 몸담았던 신문은 폐간되었고, 1940년 카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향한다. 햇빛으로 가득한 알제리의 바다에서 벗어나 음울하고 낯선 대도시 파리에 던져진 카뮈에게 파리는 실제로 이방인의 공간이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알제와 오랑의 저녁,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던 평온함을 그리워한다고 썼다.</p>
<p>
   <br />
</p>
<p>이러한 점에서 『이방인』은 단순히 허구적인 인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햇빛 찬란한 알제리의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는, 자신이 익숙하게 속해 있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이 된 작가 자신의 경험과 그리움, 그리고 삶에 대한 사유가 일정 부분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나가며</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유명한 문장은 『이방인』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간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어 죽음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비로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p>
<p>
   <br />
</p>
<p>어차피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결국 죽음에 도달할 것이라면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방인』은 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반드시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확실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단 한 번뿐인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p>
<p>
   <br />
</p>
<p>뫼르소는 삶의 익숙함에 묻혀 자신의 삶에서조차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사회의 규범에도, 자신의 감정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은 채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생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주는 광채를 발견한다. 사형을 앞둔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음산한 기운 앞에서 그는 자신이 지나온 날들이 이미 활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자체로 소중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544_nlhpmpnw.jpg" alt="카뮈 4.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77px;" />
</p>
<p>&nbsp;</p>
<p>&nbsp;</p>
<p>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소설 전체에 깊이 깔려 있다. 그러나 카뮈는 빛과 그림자를 병치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익숙함에 속아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히려 생명의 빛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빛은 더욱 밝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삶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강렬하게 일깨울 수 있다.</p>
<p>
   <br />
</p>
<p>꽃이 진 자리에 단단한 열매가 맺히듯, 삶이 꺼져가는 죽음의 순간에도 새로운 인식과 가능성이 피어날 수 있다. 결국 『이방인』은 단순히 사회에서 소외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조차 멀어져 있던 한 인간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 현대의 이방인들에게 건네는 하나의 삶의 찬가라고 할 수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70926_wcrztwyg.jpg" alt="아트인사이트 에디터 명함.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서연화]]></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23:58:0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9</guid>
<title><![CDATA[[에세이] 시대의 미감으로부터 도망쳐 나와]]></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9</link>
<description><![CDATA[1992년의 지현 씨처럼, 일흔의 할머니처럼, 서촌의 횟집 사장님처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41110_gunmechi.jpg" alt="[크기변환]시대의 미감.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i>저 간판들이랑 SNS 화면이랑 좀 닮은 것 같지 않아?</i>
</p>
<p>
   <br />
</p>
<p>하루는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번잡하고 피로한 형형색색의 간판들을 보며 감상을 나누던 와중이었다. 조잡한 유행어로 만들어진 입간판, 누가 더 크고 요란한지 대결이라도 하려는 듯 건물의 외벽을 잡아먹은 수많은 네온사인과 간판들. 거기에 적힌 글자들은 눈을 어지럽게 했고, 그 글자들이 담아내고 있는 특유의 정서는 - 말하자면 미(美)에 관한 사회적 압박, 학벌에 대한 선망, 모든 것을 수익화하려는 자본주의의 면면 등은 - 그 배로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풍경이요 누군가에겐 신선하고 이국적인 장면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런 간판들이 선사하는 광경을 몹시도 싫어했다.</p>
<p>
   <br />
</p>
<p>
   <i>그러니까, 저 간판들이나 인스타그램 탐색 탭이나 유튜브 메인 화면이나 다 똑같은 느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i>
</p>
<p>
   <br />
</p>
<p>그 말에는 과연 맞는 구석이 있었다. 자극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빨갛고 노랗고 파란 원색의 자막들. 요란한 썸네일들. 출처도 저의도 의심스러운 신조어를 빌려 만든 제목들. 그리고 그 너머의 한없이 가벼운 내용물들. 정돈되지 않은 거리의 간판들과,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인스타그램의 탐색 탭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유튜브 메인 화면의 느낌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그뿐일까.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썸네일로 가득한 웹툰이며 콘텐츠 플랫폼의 화면도, 가십으로 가득한 인터넷 뉴스 기사며 언론사 메인의 화면도 결은 같았다. 친구는 이를 일컬어 ‘시대의 미감’이라고 했다. 이 시대가 지닌 감수성. 이 시대의 미감. 그 까끌까끌한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면 약간의 절망을 맛볼 수 있었다.</p>
<p>
   <br />
</p>
<p>어지럽기 짝이 없는 간판들을 싫어하듯, 어지럽기 짝이 없는 SNS 화면 역시도 나는 매한가지로 싫어했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잉 목록이나 유튜브 구독 목록 따위의 것들은 좋게 말하면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되 나쁘게 말하면 개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시대의 미감’이 너무나도 싫어서, 내가 싫어하지 않을 수 있는 대상만이 화면에 남도록 알고리즘을 철저히 관리했다. 시대의 미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보다 따뜻하고 깨끗하고 올곧은 것들에 둘러싸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런 것들만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더랬다.</p>
<p>
   <br />
</p>
<p>저열한 악의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악의에 맞서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았다. 사고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NGO들, 의로운 관심을 호소하는 시민단체와 모임들, 또는 분연히 일어나는 한 명의 시민이 남긴 글 같은 것들. 암만 악의는 강성하고 선의는 미약해 보인대도, 사람이 세상에 난 이래 억겁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악이 선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린 적은 없지 않느냐는 말을 상기하려 노력했다.* 올곧은 그들은 해학과 유머러스함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어서, 댓글로 또는 메시지로 쏟아지는 저급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으며 유쾌하고 트렌디한 맞이 콘텐츠로 응수했다. 주눅들지 않고 선을 이어 나가는 그들의 흔적이 나는 너무나도 고마웠다.</p>
<p>
   <br />
</p>
<p>우연히 시야에 흘러들어온 ‘과거의 낭만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책의 앞날개며 뒷날개에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귀를 적어 선물한 1992년의 지현 씨. 민중의 사랑에 연연하지 말고 네 시를 씩씩하게 써 나가라는 편지를 적은 1998년의 정연 씨. 1988년은 진원이 너의 해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이름 모를 사람. 언제나 기타를 창 삼아 스틱을 각목 삼아 저항하기를 멈추지 말 것을 후배들에게 부탁하는 1980년의 까마득한 옛 동아리 선배. 연약한 종이에 펜으로, 연필로 적어낸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굳건히 세월을 가로질러 올 수 있었던 온기들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잊힐 뻔했던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고 모두의 앞에 멋지게 내보여 준 그 사람들에게도 나는 마찬가지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p>
<p>
   <br />
</p>
<p>과거의 이야기를 글로 모아 내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들을 정성껏 모아 내보여 주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담백한 콘텐츠가 내게는 현세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아이들도 편지를 쓰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해서, 일흔 번째 생일에 편지를 받는 대신 손녀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는 한 할머니.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못했던 사학 공부를 예순이 넘어 다시 시작하며 딸과 매일같이 역사를 주제로 수다를 떤다는 할아버지. 다 쓴 달력 뒤에 시를 필사해 매달 바꾸어 붙여 둔다는 서촌의 한 횟집 사장님과, 독서 모임에 자신을 초대해 주면 회를 나누어 주겠다는 횟집 사장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대단히 낭만 있는 책을 읽는 날 사장님을 초대하려 한다는 서점의 사장님.</p>
<p>&nbsp;</p>
<p>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악독한 이미지와 활자와 영상 따위가 사방에 넘쳐흐르는 와중에 정말 우연히 이런 정갈한 이야기들을 마주할 때면, 괜스레 질척한 해변가에서 진주 한 알을 찾은 것만 같은 즐거움과 안도감을 느꼈다. 책갈피를 꽂아 두듯 그런 이야기들을 따로 모아 두며 어쩌면 이런 일화들 또한 시대의 미감은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어 보았다. 얼핏 잘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분명히 곁에 살아 숨쉬고 있는, 내가 견디지 못하는 시대의 미감 반대편의 또 다른 시대의 미감.</p>
<p>
   <br />
</p>
<p>앞으로도 나는 이런 올곧음과 깨끗함과 따뜻함을 찾아 헤맬 것이다. 정보의, 자극의, 원초적 쾌감의 홍수 속에서 개의치 않고 물살을 거스르며 진주 같은 이야기들을 아득바득 그러모을 것이다. 한때 누구에게 비는지조차 모르면서 몸을 묻고 간절히 빌었던 내용대로, 내가 영영 사랑하지 못할 것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쳐 내가 사랑할 만한 것들로만 주위를 채울 수 있게 발버둥칠 것이다. 내가 미워해 마지않는 시대의 미감으로부터 도망쳐 내가 사랑해 마지않을 시대의 미감을 조각조각 모아 볼 것이다.&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분연히 일어나는 시민의 손을 잡아 함께 의로운 관심을 던질 것이다. 1992년의 지현 씨처럼 책의 앞날개에 축하한다는 장문의 글을 적어 생일을 맞은 이에게 선물할 것이다. 일흔의 할머니처럼 아끼는 누군가를 향해 계속 편지를 써 줄 것이다. 다 쓴 달력 뒤에 시를 필사하는 사장님이 계시는 서촌의 횟집에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장님을 초대하려 하신다는 또 다른 사장님이 계신, 간판 없는 서촌의 서점에 언젠가 꼭 들러 볼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 &lt;미래의 골동품 가게&gt; 발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그린]]></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4:14:3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8</guid>
<title><![CDATA[[Opinion] 6펜스를 던지고 달을 쫓는 당신에게 - 달과 6펜스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8</link>
<description><![CDATA[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말하는 낭만과 예술, 그 본질적 갈망에 관하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2505_ysgmnury.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182px;"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서머싯 몸의 대표작 《달과 6펜스》는 런던에서 안정적인 가정과 직업을 꾸리고 살아가던 중년의 남성, 찰스 스트릭랜드의 충격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는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내와 자식,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모두 뒤로한 채 파리로 떠나버린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화자는 그를 설득하고 추궁하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세속의 평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직 창작에만 몰두한다.</p>
<p>&nbsp;</p>
<p>이 소설의 제목인 ‘달’과 ‘6펜스’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극명한 두 세계를 상징한다. 발아래 떨어진 은화 한 닢인 ‘6펜스’가 현실과 세속, 재물과 안락함을 의미한다면, 밤하늘에 아득히 떠 있는 ‘달’은 이상과 예술, 낭만과 영혼의 갈망을 뜻한다. 《달과 6펜스》는 결국 6펜스의 세계에 안주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이 어떻게 머리 위의 달을 발견하고, 그 숭고한 빛을 향해 자신의 모든 삶을 던졌는가를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를 풀어낸다.</p>
<p>&nbsp;</p>
<p><br /></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인간을 움직이는 두 개의 세계</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21055_gehscden.png" alt="달과 6펜스 이미지 2.png" style="width: 700px; height: 523px;" /></p>
<p>&nbsp;</p>
<p>&nbsp;</p>
<p>대부분의 인간은 발밑의 6펜스를 줍는 데 몰두하며 살아간다. 매일의 생계와 사회적 관계, 안락한 삶이 주는 온기는 예나 지금이나 성공적인 삶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p>
<p>&nbsp;</p>
<p>그러나 6펜스가 지배하는 현실의 질서 속에서 우리는 문득 거대한 이질감을 느끼곤 한다. 보장된 정답처럼 보이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낯선 옷을 입은 듯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순간이다. 서머싯 몸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과 이상을 향한 끌림을 이렇게 묘사한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i>&nbsp;</i></p>
   <p><i>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i></p>
   <p><i>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nbsp;</i></p>
   <p><i>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했지만</i></p>
   <p><i>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nbsp;</i></p>
   <p><i>&nbsp;</i></p>
   <p><i>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i></p>
   <p><i>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nbsp;</i></p>
   <p><i>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클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i></p>
   <p><i>&nbsp;</i></p>
   </blockquote>
<p>&nbsp;</p>
<p>타인의 눈에는 더없이 안락하고 정돈된 6펜스의 삶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 오는 낯선 세계일 수 있다. 세상이 말하는 정답을 품에 안고서도 매일 밤 어딘가로 유배당한 듯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보장된 삶의 터전을 뿌리치고 파리로, 그리고 타히티로 향했던 발걸음은 일상의 탈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 그 머리 위의 달을 향해 영혼이 본능적으로 감행한 눈물겨운 이주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세속적 계산을 향한 낭만적 저항</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21104_kpeppepe.png" alt="달과 6펜스 이미지 3.png" style="width: 700px; height: 523px;" /></p>
<p>&nbsp;</p>
<p>&nbsp;</p>
<p>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질감을 확인한 순간, 현실의 논리는 무력해진다. 6펜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숫자로 계산하고 평가한다.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따지는 것이 현실의 순리다. 파리에서 스트릭랜드를 만난 화자 역시 그에게 삼류 화가로 전락할 위험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무모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돌아온 스트릭랜드의 대답은 세속적 계산을 단칼에 베어버린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i>&nbsp;</i></p>
   <p><i>“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i></p>
   <p><i>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i></p>
   <p><i>다른 분야에서는 뛰어나지 않아도 별로 문제 되지 않아요.</i></p>
   <p><i>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i></p>
   <p><i>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i></p>
   <p><i>&nbsp;</i></p>
   <p><i>“이런 맹추 같으니라구.”</i></p>
   <p><i>&nbsp;</i></p>
   <p><i>“제가 왜 맹추입니까? 분명한 사실을 말하는 게 맹추란 말인가요?”</i></p>
   <p><i>&nbsp;</i></p>
   <p><i>“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i></p>
   <p><i>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i></p>
   <p><i>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i></p>
   <p><i>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i></p>
   <p><i>&nbsp;</i></p>
   </blockquote>
<p>&nbsp;</p>
<p>스트릭랜드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물에 빠진 사람이 숨을 쉬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은 ‘생존의 본능’이었다. 삼류가 될지언정, 안락한 삶을 잃어버릴지언정, 머리 위의 달을 바라보지 않고는 영혼이 맞아 죽을 것만 같은 열망.</p>
<p>&nbsp;</p>
<p>소설 속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삶을 둘러싸고 사후 형성된 전설을 떠올리며 이것이야말로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이라고 말한다. 대중이 이 기이한 인물에게 열광하는 이유 역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현실의 계산을 뛰어넘고자 하는 낭만적 정신 그리고 이를 행하는 이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자신만의 '달'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향한 응원</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21112_gwrykccr.png" alt="달과 6펜스 이미지 4.png" style="width: 700px; height: 523px;" /></p>
<p>&nbsp;</p>
<p>&nbsp;</p>
<p>이처럼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진짜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일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세속적 기준에서 볼 때 타인에게 인정받는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은 때로 무모함이나 탈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머싯 몸은 끝내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발견해 내는 이들의 여정을 이렇게 축복한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i>&nbsp;</i></p>
   <p><i>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i></p>
   <p><i>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i></p>
   <p><i>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i></p>
   <p><i>&nbsp;</i></p>
   <p><i>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i></p>
   <p><i>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i></p>
   <p><i>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i></p>
   <p><i>마침내 그는 그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i></p>
   <p><i>&nbsp;</i></p>
   </blockquote>
<p>&nbsp;</p>
<p>이 이야기는 결국 광기 어린 예술가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특수한 인물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매일 발밑의 6펜스와 머리 위의 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고 있으니. 그렇게 《달과 6펜스》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발밑의 동전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평생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고독을 무릅쓰고라도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달을 바라볼 것인가.&nbsp;</p>
<p>&nbsp;</p>
<p>자신만의 달을 찾아 떠나는 유랑의 길은 고되고 외로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영혼이 명하는 대로 삶이라는 화폭 위에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마침내 도달한 달의 세계에서 당신의 삶 역시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기를.</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21553_mgnqdxws.jpg" alt="최수경 에디터.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수경]]></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2:11:5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002</guid>
<title><![CDATA[[Review] 시간 속에 시간 속에 시간이 만든 역설 -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002</link>
<description><![CDATA[2분의 시차로 연결된 모니터가 만들어낸 시간 루프 속에서, 인물들은 정해진 미래에 순응하며 일확천금을 좇는다. 그러나 주인공 카토는 그 반복된 미래에 저항하며,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진짜 현실을 되찾아간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한 번쯤 거울 앞에 거울을 든 나를 보거나 엘리베이터에 마주 본 거울 속 한없이 그 속에 있는 나를 찾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끔 그 속에 어떤 기이한 존재가 나올지 모르는 두려움도 가진 채)</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033_nbokzuwv.jpg" alt="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nbsp;</p>
<p>&nbsp;</p>
<p>이를 ‘드로스테 효과’(Droste
effect)라고 한다. 이미지 안에 같은 이미지가 작게 반복되어, 마치 무한히 이어지는 듯 보이는 시각적 재귀 현상으로, 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반복되는 루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지 해상도와 표현 범위에 따라 반복이 제한된다. 당신은 그 무한대의 어떤 나를 발견하려 하였는가?</p>
<p>&nbsp;</p>
<p>영화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이 효과를 타임 루프에 차용했다. 주인공 ‘카토’는 우연히 2층의 자신의 방 모니터와 1층 자신의 카페 TV가 2분
시차를 두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방과 카페를 오가며 나눈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방 모니터 속 자신은 2분 뒤의 카페 내의
자신과 카페 TV 속 자신은 2분 전 자신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카페를 방문한 친구들과 알바생 알게 되며 이 타임 루프를 탐험하게 된다.</p>
<p><br /></p>
<p>그러다 한 친구가 재밌는 ‘Paradox(역설)’를 생각해 낸다.&nbsp;방과 카페의 모니터를 서로 마주 보게 하여, 타임
루프 속 드로스테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시점으로부터 카페 화면은 2분 전, 4분 전, 6분
전뿐만 아니라 2분 후, 4분 후, 6분 후의 미래 또한 보게 되며 일명 ‘드로스테 TV’를 만들게 된다.</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248_gwdnmdva.jpg" alt="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nbsp;</p>
<p>&nbsp;</p>
<p>2분이라는 시간의 차이밖에 사용하지 못하다가 이러한 역설을 만들게
되면 다들 뭐를 먼저 하고 싶은가?</p>
<p>&nbsp;</p>
<p>무엇이 가능할지 모르나 역시 ‘돈’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알바생과 친구들은 로또와 같은
일확천금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미래에게 물어본다. 공교롭게도 미래의 자신들이 지정된 장소로
가면 돈다발을 얻을 수 있다고 듣게 돼, 주인공 ‘카토’를 제외한 사람들은 이 역설이 마냥 재밌는 사람들은 순순히 그 돈을 찾으러 간다.</p>
<p><br /></p>
<p>이런 상황이 주인공 ‘카토’는
왠지 맘에 안 드는 듯했다. 초반에 그는 2분 뒤 미래의
내가 관심있는 옆집 여자에게 자신의 기타 공연을 제안했을 때 성공했다는 미래와 달리 거짓이었다는 미래를 보게 된 이후로 그리 이 상황을 탐탁치
않았다. 또한, 그의 친구들은 모두 미래 자신들의 이야기에
따라 paradox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순순히 미래를 따르는 모습을 그저 지켜봤다.</p>
<p><br /></p>
<p>그러다 결국 이 드로스테 TV는 시간 경찰 2명에게 들키고 만다. TV로 모순된 시간을 제지하기 위해 시간 경찰은
주인공 ‘카토’와 옆집 여자에게 기억을 지우는 약을 권유한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먹은 후 잠든 상태이다) 그들은 드로스테 TV 속 미래를 보여주며, 카토와 옆집 여자가 2분 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는 것을 보여준다.</p>
<p>&nbsp;</p>
<p>하지만 그러한 정해진
미래에 대항하듯 카토는 요원들의 행위를 제지하고 모순된 미래에 의해 요원들은 사라지게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552_ayxqdrlr.jpg" alt="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br /></p>
<p>&nbsp;</p>
<p>드로스테 TV로 인해 그들은 끝없는 패러독스들을 만들었다. 분명히 드로스테 효과를 통해 무한대의 시간을 자유로이 이용하는 듯 보여주지만,
막상 그들은 보여주는 과거와 미래에 따라 순순히 미래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순된
시간을 바로잡기 위해 온 시간 경찰들 또한 현실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기대어 어긋난 시간을 고치지 못했다.
그렇게 드로스테 속 우리가 끝없이 미래를 좇는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유기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과오만 남기지 않을까. 마치 엘리베이터의
드로스테 속 반복되며 작고 희미해지는 내가 대체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는지 기어코 발견하고 싶은 초라한 내가 남게 되는 것처럼.</p>
<p>&nbsp;</p>
<p>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70분 동안 영화는 현실만을 바라는 카토의
시점을 원테이크로 이끌어 간다. 그렇게 패러독스를 해소하고 현실로 돌아온 카토는 옆집 여자와 정해진
미래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들을 만들어 간다. 과거 카토의 제안을 거절한 옆집 여자였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눠 보니 통하게 되며, 결말이 내려진 미래가 아닌 앞으로의 현실을 기대하게 만든다.</p>
<p>&nbsp;</p>
<p>이미 다양한 영화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작품이 많았지만, 제한된
장소에서 어렵지 않고 재치 있게 시간의 역설을 만들어낸 영화라고 생각된다. 해당 영화는 평단의 호평을
얻게 되며,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9%를(2026/07/15 기준) 기록하고,
제25회 판타지아영화제에서 관객상-베스트 아시아(금상) 및 베스트 데뷔상 특별 언급,
제25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넷팩상, 제39회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흰색 까마귀상과 비평가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도 잇달아 작품성을
인정받은 화제작이다. 오는 8월 19일에 개봉하니 그들의 70분간 발랄한 시간을 따라가 보길 바란다. </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70518_dslebumi.jpg" alt="티저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정현]]></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7:09:5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3</guid>
<title><![CDATA[[리뷰] &#034;저 집에 언제 가나요...?&#034; 영원한 방랑자 오디세우스 - 오디세이아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3</link>
<description><![CDATA[신의 노여움을 산 이타케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1343_dltvrboe.jpg" alt="45_오디세이아_앞.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0px;" />
</p>
<p>&nbsp;</p>
<p>&nbsp;</p>
<p>요 근래 아주 핫한 영화가 있다. 바로 <b>&lt;오디세이&gt;.</b> 우리에겐 낯설면서 또 친숙한 이름이다. 어렸을 적 그리스 로마 신화는 아름다운 그림체와 비극적인 줄거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 또한 정말 즐겨 읽었던 책이다.</p>
<p>&nbsp;</p>
<p>성인이 되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정식으로 공부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 모든 인간상을 담고 있었다. 즉,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nbsp; 과거에 일어났지만 현재에도 적용될 수 있는 지금도 살아있는 이야기다.</p>
<p>&nbsp;</p>
<p>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lt;오디세이아&gt;를 사랑한다. 나는 그러나 영화를 보기 전 책을 먼저 접하기로 했다.&nbsp;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lt;오디세이아&gt;는 신의 노여움을 산 이타케의 왕 <b>오디세우스</b>가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그렸다.</p>
<p>&nbsp;</p>
<p>&lt;오디세이아&gt;는 크게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이루어져 있다. <b>인간, 신, 그리고 비극.</b> 이타케의 왕 오디세우스. 그를 사랑하는 신 <b>아테나</b>와 그를 싫어하는 신 <b>포세이돈</b>. 전쟁 이후 그가 고향에 돌아가는데 10년의 세월이 흐른 비극. 인간은 무모하고 신은 인간을 애증하고 그들은 그렇게 비극을 만든다.</p>
<p>&nbsp;</p>
<p>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지혜를 믿고 많은 무모한 행동을 한다.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외눈박이 거인 <b>폴레피모스</b>의 동굴을 들어가고 그를 죽여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 모두를 위험에 빠드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 자신을 돛대 묶기도 한다. 인간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들을 신의 탓으로 돌린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dashed rgb(102, 102, 10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nbsp;<br />“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신들을 향해 끊임없이 원망의 탄식을 쏟아놓는구나! 마치 자기들이 당하는 불행이 모두 우리 신들 때문인 것처럼 말이야!” _190쪽<br />&nbsp;</blockquote>
<p>&nbsp;</p>
<p>하물며 신들 또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고 또 증오한다. 아테나는 자신의 삼촌의 증오를 알면서도 오디세우스를 계속 도우려 한다. 포세이돈은 이미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노여움으로 인해 10년을 떠돌았음에도 만족하지 않는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dashed rgb(102, 102, 10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nbsp;<br />“당신이 겪어야 할 고난이 아직 모두 다 끝난 게 아니에요!” …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영원한 생명과 젊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지금껏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역경을 견뎌왔소. 만약 신들께서 아직도 내게 내리실 고난이 더 남아 있다면, 내 그 나머지도 모두 기꺼이 견뎌낼 작정이오!" _202쪽<br />&nbsp;</blockquote>
<p>&nbsp;</p>
<p>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 그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비극이다. 그러나 비극을 맞이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무모하면서도 한편으론 굉장히 영웅다웠다.</p>
<p>&nbsp;</p>
<p>&lt;오디세이아&gt; 중반부터는 그의 아들 <b>텔레마코스</b>가 등장한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를 떠나 있는 동안 그의 부인 <b>페넬로페</b>에게 구혼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의 집을 차지하여 식량을 거덜 냈다. 어린 텔레마코스는 당시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훗날 아테나의 도움으로 진정한 어른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을 돕는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구혼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자신의 고향,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온다.</p>
<p>&nbsp;</p>
<p>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사랑하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른 남자가 자신을 죽이는 비극을 맞이한 <b>아가멤논</b>보다는 덜하겠지만, 20년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오디세우스의 비극도 만만치 않다.</p>
<p>&nbsp;</p>
<p>신의 노여움이란 이유를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느껴진다. 감히 그 운명의 장난을 온전히 감내하겠노라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가져야만이 그 모든 것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p>
<p>&nbsp;</p>
<p>오디세우스는 무모하다 할 정도로 용기있고 신념이 강한 지혜로운 인간이었다. 비극을 비극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 오디세우스를 알려준 책 &lt;오디세이아&gt;였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차론]]></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00:13:1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003</guid>
<title><![CDATA[[Opinion]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아픔을 보내는 일 [사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003</link>
<description><![CDATA[같은 나임에도 겨울에 읽었던 시처럼 무언가를 말하게 될 줄 알게 되었다. 아픔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간처럼 가만히 보내는 것이라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아침마다 꺼지지 않는 알람 소리, 누군가가 쉽게 뱉은 말 한마디, 지하철역 빼곡하게 자신의 시간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 끝나지도 않는 장마.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법이다. 일말의 믿음도 쉽게 가지지 않는 성격이라는 뜻이니까. </p>
<p>&nbsp;</p>
<p> 그게 병이 될 것 같다고 이따금 되새겼다. 겨울이 되면 계절성 통증-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겨울만 되면 이상하게 병이 생겼으므로-에 시달렸다. 그러다 일이 터진 것이다. 간단한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고, 덩달아 의사의 표정까지 좋지 않았다. 목과 쇄골 사이에 두 개의 악성종양이 있다고 했다. 이미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고도.</p>
<p>  &nbsp;  </p>
<p> 11월에 그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어느 교차로에서, 살면서 처음 와 본 길에서 나만 혼자 서서 울었다. 12월에는 4시간의 수술을 받았다. 가장 먼저 수술실에서 나와 든 생각이 춥다는 것이었다. 그놈의 추위. 2월에는 격리된 곳에서 방사선 치료를. 그러니까 시간이 쌓이는 줄도 모르고 우는 날들이 늘어났으며 회복이라는 단어가 마치 희망과 비슷한 결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p>
<p>  &nbsp;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82846_lrebsmyy.jpg" alt="KakaoTalk_20260812_181816739.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48px;" /></p>
<p>&nbsp;</p>
<p>&nbsp;</p>
<p> 올해의 겨울을 떠올린다. 블로그에 나의 예민함에 대해, 불안에 대해 “정말 8월이 되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을 써두었다. 백은선 시인의 시집 &lt;&lt;비신비&gt;&gt; 속 &lt;네 잘못이 아니야&gt;를 읽고 남긴 표현이었다. “8월이 되면 말야 8월이 되면 뼈아프게 혀끝을 맴돌던 말을 꺼낼 수 있을까?”라는 문장.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나의 성격을 탓했다. 밤마다 뜬눈으로 나에 대해 생각하던 시간도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를 쉽게 잘라내지 못했던 시간도 나의 잘못이 되어 쏟아졌달까.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nbsp;  </p>
<p> 8월이다. 유난히 지독한 온도를 견디면서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끔은 미워하고. 그러다 나에 대해 생각한다. 아픔을 겪고 나서 몇 개의 계절을 보냈는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들은 크게 아프고 나면 인생의 방향이라든지 삶의 태도라든지 그런 것들이 뒤바뀐다는데. 나는 여전히 겨울을 두려워하고 예민함을 잃지 못했으며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p>
<p>  &nbsp;  </p>
<p> 물론 내가 이 정도의 안정까지 오게 된 것에 나의 지분은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진단을 받고 누구는 나를 혼자 두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보게 했으며, 누구는 일부러 내가 없는 곳에서 펑펑 울었다고 했으며(후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누구는 끊임없이 나의 생사를 확인했다. 가만히 있어도 지나갈 겨울이었음에도 마음에 부스터가 달렸달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nbsp;  </p>
<p> 같은 나임에도 겨울에 읽었던 시처럼 무언가를 말하게 될 줄 알게 되었다. 아픔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간처럼 가만히 보내는 것이라고. </p>
<p>  &nbsp;  </p>
<p>  그렇게 깊은 물도</p>
<p>  언젠가 다 마르고</p>
<p>  사막이 될 거라고</p>
<p>  &nbsp;  </p>
<p>  8월이 되면 말야</p>
<p>  8월이 되면</p>
<p>&nbsp;</p>
<p>  뼈아프게 </p>
<p>  혀끝을 맴돌던 말을</p>
<p>  꺼낼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  &nbsp;  </p>
<p>  백은선, &lt;비신비&gt; 중</p>
<p>  &nbsp;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nbsp;</p>
<p>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아픔을 보내며.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수민]]></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8:33:3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2</guid>
<title><![CDATA[[Opinion] &#039;아오이 유우&#039;라는 이유로 시작된 기다림 - T셔츠가 마를 때까지 [드라마]]]></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2</link>
<description><![CDATA[이름만으로도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배우, 내게 그런 배우는 아오이 유우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3650_hrlthwns.jp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7 오후 2.36.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게 어떤 배우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이름만으로도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배우, 내게 그런 배우는 아오이 유우다. 작년 공개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lt;아수라처럼&gt;도 마찬가지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만으로도 작품을 볼 이유는 충분했지만, 오랜만에 드라마 속 아오이 유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반가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18년 만에 지상파 드라마 주연으로 돌아온 <t셔츠가 마를때까지=""> 역시 아오이 유우라는 이유로 선택한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갑작스러운 사고를 계기로 배우자의 숨겨진 비밀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멜로 드라마다. 하지만 첫 화를 보고 난 뒤에는 배우보다 이야기가 나를 더 붙잡고 있었다.</t셔츠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즘 드라마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시즌 하나를 끝낼 수 있다. 나 역시 몰아보기를 좋아해 마지막 화까지 단숨에 달리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매주 한 편씩 공개되기 때문에 한 주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한 화만 내보낼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다음 화 공개 날짜를 확인하고 방송 시간을 기다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그 기다림 덕분에 일주일 동안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상상하는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그 시간마저 드라마를 즐기는 과정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3814_iitlaoac.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7 오후 2.37.28.png" style="width: 700px; height: 1038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lt;티셔츠가 마를때까지&gt;</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t셔츠가 마를때까지=""></t셔츠가>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center;">본문에는</p>
<p style="text-align: center;">작품의 주요 내용에 대한</p>
<p style="text-align: center;">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3712_sdacdccn.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7 오후 2.38.11.png" style="width: 700px; height: 461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야기 중심에는 코인 세탁소가 있다.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우연히 마주친 두 남녀는 서로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버스 사고로 각자의 배우자를 잃게 된다. 남자는 배우자의 숨겨진 관계를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여자 주인공에게 전하는 순간 드라마는 첫 화의 막을 내린다. 두 사람은 첫 화에서 그저 제목 그대로 빨래가 마를 때까지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처럼 보였던 시간은 단 한 번의 반전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3730_alspcqdx.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7 오후 2.39.21.png" style="width: 700px; height: 455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세탁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어떤 만남이 이어졌는지 상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단순히 숨겨진 진실을 궁금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배우자의 비밀이 더욱 가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진실을 물어야 할 당사자가 이미 세상이 떠났다는 사실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더 이상 확인 할 수 없는 기억과 마주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을 찾아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오이 유우가 연기하는 인물 역시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고, 이츠키라는 여성과 남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사고가 난 버스 안에서 왜 두 사람이 함께 있었는지,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은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3918_aeplkcfe.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7 오후 2.38.02.png" style="width: 700px; height: 455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3화에서는 남편이 사고 직전 버스에서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진실을 기다리게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정말 누구였는가, 그리고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직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절반도 지나지 않았다. 총 8주라는 긴 시간 안에 남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섣불리 평가하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아오이 유우를 만나기 위해 시작한 작품이 어느새 한 사람의 마음과 관계의 균열을 바라보는 이야기로 다가오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3945_nquvvdll.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7 오후 2.39.04.png" style="width: 700px; height: 361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보다는 좋아하는 배우를 매주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고, 오랜만에 다음 화를 기다리게 만들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충분히 흥미롭다. 어떤 결말에 닿게 될지, 혹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결말을 향해 기다리는 시간 역시 이 드라마가 내게 남긴 또 하나의 경험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oKHagLObrZc?si=lFtfCzYGLwXJrIjB"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드라마의 OST를 맡은 haruka nakamura 음악을 들으며 다음 화를 기다린다. 지난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고, 다음 화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그려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그렇게 또 다음 주 목요일을 기다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24234_kumboauw.jpg" alt="손혜림.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손혜림]]></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2:41:0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5</guid>
<title><![CDATA[[Review] 상실의 빈자리, 그리고 믿음 - 상자 속의 양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5</link>
<description><![CDATA[형체 없는 믿음 속에서 느껴지는 사랑]]></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4053_pnqafuei.jpg" alt="대원-상자속의양-표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7px;" />
</p>
<p>&nbsp;</p>
<p>&nbsp;</p>
<p>지난 6월 10일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lt;상자 속의 양&gt; 각본집을 읽어 보았다. 가족과 사회의 문제를 다뤄온 고레에다 감독의 이번 신작은 사뭇 달랐다. 휴머노이드 로봇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꺼내 들고 SF 장르에 도전했기 때문이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상자 속의 양』은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가 죽은 아들과 똑같은 외모와 목소리를 지닌 휴머노이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멈춰 있던 가족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과 현실, 상실과 사랑의 경계에서 가족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인공지능의 발전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에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젠 일상생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과제 첨삭을 위해 사용하던 AI는 이제 클릭 한 번이면 과제 하나를 통째로 완성해 주기도 한다. 이런 인공지능의 발전이 편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진다.</p>
<p>
   <br />
</p>
<p>이런 상황 속에서 인공지능의 윤리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lt;상자 속의 양&gt;의 카게루가 그 대표적인 예다.</p>
<p>
   <br />
</p>
<p>카게루는 건축가 부부 오토네와 켄스케의 아들로, 불의의 사고로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던 부부에게 아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카게루와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를 입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게루와 똑 닮은 로봇은 외형과 말투뿐만 아니라 아이의 기억까지 그대로 갖고 있었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결국 카게루 로봇을 입양하여 함께 살게 된다.</p>
<p>
   <br />
</p>
<p>죽은 아들과 똑 닮은 휴머노이드가 다시 집으로 찾아온다는 건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카게루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존재를 카게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부부의 기억 속 카게루와 휴머노이드 카게루 사이에는 결국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를 자각하는 순간 부부의 마음은 어땠을까. 카게루와 같은 외형에 같은 기억까지 가지고 있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상자 속의 양을 꺼내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p>
<p>
   <br />
</p>
<p>
   <b>“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b>
</p>
<p>
   <br />
</p>
<p>형체 없는 믿음. 참 잔인하다고 느껴지지만, 결국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게 되는 것이 인간 마음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진실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괴리감을 알면서도 인간은 계속 믿음을 이어간다. 과거의 카게루를 놓지 못하는 부부. 그리고 점점 자신만의 자유의지를 갖게 되는 카게루. 이들을 연결 짓는 건 과거의 기억과 현재에 대한 작은 희망뿐이다.</p>
<p>
   <br />
</p>
<p>그렇지만 결국 부부는 카게루를 보내준다. 휴머노이드 로봇과의 계약을 종료하게 된 것이다. 카게루의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와 이별할 때, 이들이 느낀 감정은 가족애였을까.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슬픔이었을까. 어떤 형태이든 이들이 함께했던 순간만큼은 진실된 마음이었을 것이다.</p>
<p>
   <br />
</p>
<p>카게루와의 이별은 부부에게 새로운 시작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그날에 멈춰 있던 부부에게 휴머노이드 카게루가 찾아왔고, 이 아이와 함께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와의 이별이 모여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멈춰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형체보단 본질에 집중하는 것을 고레에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p>
<p>
   <br />
</p>
<p>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각본집으로 처음 읽어보게 되었는데, 내 마음대로 상상해서 영화의 장면을 그려나가는 게 재밌었다. 그리고 글로 읽으니 대사를 곱씹으며 한 장면씩 상상할 수 있어서, 오히려 영화를 깊게 음미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p>
<p>
   <br />
</p>
<p>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 각본집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을 직접 상상하고 대사를 천천히 곱씹으며 작품을 따라가는 시간은, 영화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깊게 만나는 경험이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014106_ttmvalnz.jpeg" alt="네임카드.jpe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희정]]></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01:40:3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96</guid>
<title><![CDATA[[Review] 이해받지 못한 실수들에 대하여 - 연극 &#039;플리백(Fleabag)&#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96</link>
<description><![CDATA[살아가기 위한 한 여자의 거친 몸부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2192206_ndqnyytg.jpg" alt="플리백_메인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0px;" />
</p>
<p>&nbsp;</p>
<p>&nbsp;</p>
<p>한 여자가 급하게 면접장으로 뛰어들어왔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은 데다 여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에 바르고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것도 아니다. 급기야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상의를 들어올려 속옷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완벽하게 망친 면접 현장 같다.</p>
<p><br /></p>
<p>여자는 최근 친구 '부'를 잃었다. 기니피그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동업자이기도 했다. 부는 다른 여자와 잔 남자친구에게 죄책감을 안겨줄 심산이었지만 계획과 다른 사고가 나며 세상을 뜨고 만다.</p>
<p><br /></p>
<p>주인공은 망하기 직전인 기니피그 카페를 홀로 운영하고 있는 와중 가게를 정리해야 하는 위기를 직면했고, 교제해온 남자친구는 그녀를 떠났다. 주인공은 그에 대한 외로움을 해결하고자 지하철에서 만난 쥐를 닮은 남자와 가까이 지낸다. 단순한 친교와는 좀 다르다. 주인공은 그와 성관계를 맺으려 한다.</p>
<p><br /></p>
<p>연극 &lt;플리백&gt;은 이렇듯 사람을 사귀는 방식이 다소 뒤틀려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플리백(Fleabag)은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누추한 곳' 등을 뜻하는데, 제목에 걸맞게 주인공은 극 중 다수의 시간에 성적인 농담을 던지거나 이해해기 어려운 행동을 보이며 '문제가 많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p>
<p><br /></p>
<p>문제투성이인 인물은 우리를 '왜'로 이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를 만났을까, 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등으로 말이다. 이를테면 주인공은 전에 사귄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몸을 촬영한 사진을 보낸다. (행동 자체에서 문제가 있지만) 그의 남자친구는 흥분해서 "더 보내달라"고 요구하고, 그에 따르지만 주인공의 표정을 봤을 때 원하는 행동은 아니어 보인다.</p>
<p><br /></p>
<p>주인공이 지나치게 성과 관련된 일들을 벌이는 것 또한 그렇다. 그녀는 음담패설을 던지거나 여러 인물과 했던 성관계에 대해 묘사하거나 밤이 다 가도록 음란물을 보며 혼자 성행위를 하기도 한다.</p>
<p><br /></p>
<p>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행위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순간의 감정을 외면하거나 직면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하게 되는 (그녀가 생각하기에) 우스꽝스러운 개그 같기도 하다.</p>
<p><br /></p>
<p>그래서 주인공이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왜가 주인공의 외로움에 있다고 생각한다.</p>
<p><br /></p>
<p>주인공은 극 내내 온전하게 의지할 곳이 없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둘뿐인 가족인 아빠와 언니랑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가까이 지내는 것도 아니다. 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수차례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다. 전 남자친구는 이상한 성적 욕구를 해결해줄 것을 종용했다.</p>
<p><br /></p>
<p>그런 배경 때문에 주인공의 모습이 단순 욕망 분출이 아니라 자기를 좀 봐달라는 몸부림으로 다가왔다. 그 몸부림으로 인해 비극이 이어졌음이 드러나는 지점이 있음에도, 그녀를 더는 '플리백'으로 보기 어려워진다.</p>
<p><br /></p>
<p>6월 19일 첫 무대를 올린 한국 초연작 '플리백'은 90분 간 인물 하나가 극을 이끄는 여성 1인극이다. 이번 공연에는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등 3인의 배우가 플리백의 모습을 보여준다.</p>
<p><br /></p>
<p>원작은 피비 월러브리지(각본을 쓰고 배우까지 했다)의 블랙 코미디 드라마(영국)라고 한다. 원작은 보지 않았으나 한국으로 들여오면서 로컬라이징을 어느 정도 했으리라 짐작한다.</p>
<p><br /></p>
<p>연극 속 농담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어느 정도 의도한 설계인 것 같다), 주인공이 너무나도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왠지 이 연극은 그럼으로써 완성되는 것 같다. 많은 실수들이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p>
<p><br /></p>
<p>결국은 문제투성이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의 여지를 남기고 작품은 막을 내린다. 주인공은 부에게 들은 사람이 실수를 하는 이유, 그리고 연필 뒤쪽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까지. 지우개의 존재가 강조되는 이유는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p>
<p><br /></p>
<p>이야기 외에도 1인극이다 보니 주변 인물을 흉내내는 방식으로 여러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수진]]></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09:01:1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9</guid>
<title><![CDATA[[Review] 저항마저 소비되는 시대 - 뱅크시 BANKSY : Still Here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9</link>
<description><![CDATA[웃음과 풍자로 권력과 자본주의를 비트는 뱅크시. 그러나 그의 저항마저 하나의 브랜드가 된 시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뱅크시의 작품은 익숙하다. 풍선을 향해 손을 뻗는 소녀,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자, 무표정한 원숭이. 미술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보았을 이미지들이다.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이토록 대중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그래서 뱅크시를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139_qfiiggxr.jpg" alt="image-7.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하지만 《BANKSY : Still Here》를 보고 나니 그의 정체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를 보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것은 다른 질문이었다. 왜 그의 작품은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을까. 왜 몇십 년 전 거리의 벽에 등장했던 풍자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이렇게 쉽게 겹쳐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것은, 자본주의와 권력을 비판하던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우리는 티켓을 사고 거대한 백화점 안의 전시장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뱅크시의 작품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 밖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그의 풍자 안에 들어가 있다는 기분이 든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웃음; 생각보다 날카로운 언어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전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섹션 가운데 하나는 ‘유머는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라는 문장으로 소개된 공간이었다. 뱅크시는 분노를 직접적으로 외치기보다 웃음과 풍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의 유머는 마음 편하게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웃기지만 조금 더 바라보면 불편해지고, 결국 내가 무엇을 보고 웃었던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219_wbguvqct.jpg" alt="image-9.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lt;지금은 웃어라(Laugh Now)&gt;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샌드위치 보드를 목에 건 채 서 있다.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표정도 없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이상할 만큼 섬뜩하다. 보드에는 이런 메시지가 적혀 있다. 지금은 웃어라.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p>
<p>&nbsp;</p>
<p>원숭이는 뱅크시의 작품에서 인간 사회를 비추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 인상이 더욱 선명해진 작품이 &lt;위임된 의회(Devolved Parliament)&gt;였다. 인간 정치인들이 있어야 할 의회에 침팬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심에 선 침팬지가 바나나를 들고 있는 모습까지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침팬지들로 가득한 의회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228_ulcbcblb.jpg" alt="image-10.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정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제도가 언제나 합리적으로 작동하는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민을 위해 움직이는가. 뱅크시는 긴 설명 없이 인간 대신 침팬지를 의회에 앉혀놓는 것만으로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보고 웃었는데, 결국 웃음의 대상이 침팬지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어진다. 좋은 풍자는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을 향해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웃음이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향하고 있는 것.</p>
<p><b>&nbsp;</b></p>
<p>
   <b>&nbsp;</b>
</p>
<p>
   <b>&nbsp;</b>
</p>
<span style="font-size: 18px;"><b>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함께 놓는 방식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lt;할머니들(Grannies)&gt;도 기억에 오래 남았다. 두 명의 노년 여성이 평온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얼핏 보면 너무나 일상적이고 전통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고 있는 옷과 천에는 전혀 다른 세계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평생 불량배’, ‘펑크는 죽지 않았다’와 같은 반항적이고 도발적인 문구들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405_sloexycp.jpg" alt="image-14.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재미있는 것은 그 대비였다. 우리가 흔히 할머니라는 존재에서 떠올리는 것은 전통, 안정, 보수성 같은 이미지다. 반면 펑크는 저항과 반항,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를 상징한다. 뱅크시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이미지를 한 화면 안에 자연스럽게 가져다 놓는다.</p>
<p>&nbsp;</p>
<p>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사람과 세대를 얼마나 쉽게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하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됐다. 젊음은 진보적이고 노년은 보수적이라는 구분, 어떤 세대는 변화의 주체이고 어떤 세대는 그것을 방해한다는 식의 구분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반항은 젊은 사람만의 전유물도 아니며, 나이를 먹는다고 한 사람이 품었던 생각과 태도가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p>
<p>&nbsp;</p>
<p>뱅크시의 작품은 이런 고정관념을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들에게 뜨개질 바늘을 쥐여주고 그들이 만드는 천 위에 펑크의 언어를 새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익숙한 이미지에 작은 균열 하나를 내는 것. 어쩌면 풍자가 가진 힘은 바로 그 작은 어긋남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저항을 사고 싶어 줄을 서는 사람들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이번 전시에서 가장 머리를 ‘땡’ 하고 맞은 것 같은 느낌을 준 작품은 &lt;페스티벌(Festival, Destroy Capitalism)&gt;이었다. 작품에는 히피들이 줄을 서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Destroy Capitalism’, 즉 자본주의를 파괴하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사기 위해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506_bzlbdncu.jpg" alt="image-1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처음에는 재미있는 장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웃음보다 씁쓸함이 먼저 남았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문장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자본주의를 거부하겠다는 사람들이 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선다. 저항의 언어조차 가격표가 붙는 순간 소비의 대상이 된다.</p>
<p>&nbsp;</p>
<p>이 작품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문화가 떠올랐다. 한때 주류 사회에 저항하던 펑크와 힙합, 그래피티와 스트리트 문화는 이제 패션과 광고, 명품 브랜드가 가장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반항적인 태도조차 하나의 스타일이 되고, ‘남들과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상품을 구매한다.</p>
<p>&nbsp;</p>
<p>그렇다면 체제에 대한 저항은 어디까지 체제 밖에 존재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가 티셔츠에 인쇄되어 판매되는 순간, 그것은 비판인 동시에 상품이 된다. 저항의 상징이 소비 가능한 이미지가 되는 순간 체제는 그것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흡수해버린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752_uxlgprue.jpg" alt="image-13.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이 작품이 유독 날카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작품 속 사람들을 쉽게 비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가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소비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결국 작품 속 줄을 서 있는 사람들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 뱅크시의 풍자는 그렇게 다시 관객에게 돌아온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저항은 어떻게 가장 비싼 브랜드가 되었을까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뱅크시 자신에게도 돌아간다. 자본주의와 미술시장을 끊임없이 비판해온 그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p>
<p>&nbsp;</p>
<p>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lt;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gt;가 낙찰된 직후 액자 속에서 파쇄된 사건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은 파쇄되면서 &lt;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gt;라는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술시장의 권위와 예술의 상품화를 조롱하기 위한 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건은 작품의 시장가치를 더욱 높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526_twphpzai.jpg" alt="image-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이보다 뱅크시다운 역설이 있을까 싶다. 시장을 조롱했는데 시장은 그 조롱마저 가치로 환산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행위조차 다시 자본주의 안에서 거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p>
<p>&nbsp;</p>
<p>거리의 벽에 몰래 그림을 그리던 익명의 그래피티 작가는 이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그의 새로운 작품이 발견되면 언론이 움직이고, 작품이 그려진 벽은 관광지가 되며, 한때 지워져야 할 낙서였던 그림은 보호막을 씌워 보존해야 하는 자산이 된다. 뱅크시가 비판했던 시스템이 이제 뱅크시라는 이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p>
<p>&nbsp;</p>
<p>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뱅크시가 그 모순에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이 상품이 되고 자신의 저항이 브랜드가 되는 상황까지 다시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체제 밖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 역시 그 체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그 안에서 계속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뱅크시의 작업은 단순한 반자본주의 선언보다 훨씬 복잡하게 느껴졌다.</p>
<p>&nbsp;</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결국 남는 것은 하나의 생각이다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전시를 보면서 유독 오래 기억에 남은 뱅크시의 말이 있었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단 하나의 독창적인 생각은 의미 없는 명언 천 개보다 가치 있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전시를 모두 보고 난 뒤 이 문장이 뱅크시라는 작가를 꽤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매일 수없이 많은 말과 주장, 메시지를 접한다. 사회를 비판하는 말도 넘쳐나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선언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잠깐 읽히고 금세 사라진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607_nvhilynn.jpg" alt="image-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반면 뱅크시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이미지로 만들어 사람들의 기억에 남긴다. 정치인을 비판하는 긴 글 대신 침팬지를 의회에 앉히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는 대신 ‘자본주의를 파괴하라’는 티셔츠를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을 그린다. 설명보다 먼저 이미지가 들어오고, 웃음이 먼저 터진 뒤 질문이 남는다.</p>
<p>&nbsp;</p>
<p>어쩌면 독창성이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명하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것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여주는 것.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것. 뱅크시가 가진 힘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BANKSY : Still Here》라는 제목처럼 뱅크시는 여전히 여기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던졌던 질문들이 남아 있다. 전쟁은 왜 계속되는가. 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소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가. 그리고 저항조차 상품이 되어버리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가.</p>
<p>&nbsp;</p>
<p>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들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뱅크시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다뤄온 전쟁과 권력, 빈곤, 소비사회의 문제들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씁쓸하다. 작품이 시대를 초월했다기보다, 작품이 비판했던 현실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53718_bfnhrqxq.jpg" alt="image-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전시장 밖으로 나오면서 결국 뱅크시가 누구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 앞에서 웃고 있던 내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나는 왜 웃었고, 어느 순간부터 왜 웃을 수 없었을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보고 감탄한 뒤 전시 굿즈를 구경하는 나는 작품 속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p>
<p>&nbsp;</p>
<p>아마 뱅크시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벽 위에 하나의 장면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다음 생각하는 일은 그것을 본 사람의 몫이다. 가면 뒤에 누가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가면 덕분에 우리는 작가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지도 모른다.</p>
<p><br /></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수진]]></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15:38:0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2</guid>
<title><![CDATA[[Review] 사람들은 왜 실수를 할까요? - 플리백]]></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2</link>
<description><![CDATA[슬픔에 빠져 허우적 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악하는 한 사람이 영원히 혼자]]></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090415_svzitrqd.jpg" alt="1. 플리백Fleabag_통합.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9px;" />
</p>
<p>
   <br />
</p>
<p>
   <br />
</p>
<p>책의 첫 문장에 매료되어 단숨에 완독했던 책이 있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그해 봄 나는 약간 정신이 나가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right; ">- 김사과, 『풀이 눕는다』, p9</p>
   <p>&nbsp;</p>
   </blockquote>
<p>&nbsp;</p>
<p>이전에도 김사과 작가의 책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특유의 독특함에 밀려 끝까지 가지 못했는데, 『풀이 눕는다』만은 이 한 문장의 힘에 이끌려 곧장 마지막 장까지 갈 수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화자가 약간 정신이 나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채로 책을 펼친 셈이니까.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빠르다.</p>
<p>
   <br />
</p>
<p>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두 번째로 느끼게 해 준 작품, 연극 &lt;플리백&gt;이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01632_dipygasa.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ᅵᆷ히어라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 (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극은 면접 장면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면접에 늦고, 뛰어오느라 더워진 채로 앉아 있다가, 급기야 상의를 벗어버릴 뻔한다. 심지어 본인이 잘못했으면서 면접관과 말다툼까지 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 나는 이 첫 장면에서 이미 &lt;플리백&gt;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앞으로 인터미션 없는 80분 동안 내가 따라갈 인생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는 걸, 굳이 설득당하지 않고 그냥 피부로 인정하기. 그래서 곧장 극 속으로 빠져드는 것.</p>
<p>
   <br />
</p>
<p>그리고 역시나, 이 극도 주인공을 나처럼 대한다. 주인공은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이 극에서 그녀는 그저 플리백일 뿐이다. 플리백(Fleabag)은 영어권에서 오래 쓰여온 표현으로, 직역하면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누추한 곳. 맞다. 실제로 그러하다. 파산 직전의 카페를 간신히 굴리면서, 관계에 중독된 것처럼 남자를 쫓고, 일상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다. 한심한 인간이라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정도의 삶.</p>
<p>
   <br />
</p>
<p>그런데 의외로 나는 초반부터 슬픔을 느껴서 그녀에게 이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극의 극초반, 면접 장면 직후에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나오고, 버스 정류장의 한 남성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고는 그 남자에 대한 서사를 마구 풀어내는데, 그때 자전거 한 대가 쌩 지나간다. 그 벨소리 하나에 그녀는 다른 생각으로 바로 전환된다. 바로 가장 친한 친구였던 부의 죽음.</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자살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완전 사고도 아니었던 거야.<br />&nbsp;</blockquote>
<p>&nbsp;</p>
<p>부는 작고 귀여웠으나 질투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에게 관심을 끌 겸 죄책감도 줄 겸 조금 다치기 위해 달리는 자전거에 뛰어드는 무모한 서택을 했는데, 그렇게 그녀는 자전거와 자동차에 세 번을 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 자의나 타의 그 하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사라졌다. 그 애매함을 평생 홀로 감당하며 이제는 자전거 소리만 나도 그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삶을 사는 주인공.</p>
<p>
   <br />
</p>
<p>그때부터 그녀는 나에게 슬픔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보였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점점 극을 볼수록, 그건 슬픔뿐만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슬픔과 고독과 그리움과 무능함과 사랑받고 싶음과 자책과 괴로움에 빠져...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악하는 한 사람이 영원히 혼자, 혼자 있는 이야기.</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01606_zeiyscgp.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주연 (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사랑받고 싶어의 캐릭터화</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 극은 그녀가 자해하듯 살아가는 것을 1인칭 시점에서 아무 포장 없이 보여준다. 가족에게도 세상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도 버려지기만 하는 삶. 왜 이렇게 사는가 싶으면 그녀는 본인 입으로 원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고 목놓아 외친다.</p>
<p>
   <br />
</p>
<p>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제3의 벽을 깨고 자조적이고 쓰라린 농담을 관객인 우리에게 간절하게 던진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나 정말 웃자고 하는 얘기야.</p>
   <p>정말 가볍게 웃어줄 수 있어?<br />&nbsp;</p>
   </blockquote>
<p>&nbsp;</p>
<p>웃어줄 수도 없고, 안 웃어줄 수도 없다. 사랑받고 싶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한 줌의 웃음쯤은 주고 싶은데, 같이 웃어버리면 나는 그녀가 자기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동의해버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 웃음 하나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짠한 감정과 가까운 여러 감정이 동시에 드는데, 이 방백의 방식마저 그녀의 캐릭터와 너무 잘 어울린다.</p>
<p>
   <br />
</p>
<p>본인이 선택한 삶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면 그녀가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상처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이 사람은 남을 찌르지 못하고 자기를 찌른다. 마치 그것만이 살아 있는 자신의 유일한 책무인 양, 거기에는 아주 성실하다. 그렇게만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사람답게 못 사는 것만이 최소한의 사람다움이라는 듯이.</p>
<p>
   <br />
</p>
<p>극을 다 보고 나면,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플리백의 서사를 전부 알게 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왜 그녀가 이토록 자기파괴적으로, 더 자신을 찌르고 해치며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그리고 그다음에 이런 생각이 따라온다. 이런 그녀가 앞으로 잘 살기를 응원해야 하나? 어쩌면 사실은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닐까?</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그리고 지금 여기, 당신.</p>
   <p>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 최진영, 『원도』, p239</p>
   <p>&nbsp;</p>
   </blockquote>
<p>&nbsp;</p>
<p>하지만 나는 『원도』에서나 플리백에서나.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독자이자 관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01703_wcvbcmqv.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규남_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세 명의 배우, 세 개의 무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lt;플리백&gt;은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그해 프린지 신작상(Fringe First Award)과 더 스테이지 베스트 1인 공연상을 받았고, 이듬해 런던 소호 시어터 앙코르 공연으로 영국 비평가협회 최우수 유망 극작가상, 오프 웨스트엔드 최우수 여자 연기상과 최우수 신인 극작가상까지 가져갔다. 2016년 BBC와 아마존에서 TV 시리즈로 만들어져 에미상 3관왕, 골든 글로브 2관왕을 기록했다고. 그런 극의 무려 한국 초연작이다.</p>
<p>
   <br />
</p>
<p>그런데 이번 초연에서 내가 제일 흥미롭게 본 건 수상 이력이 아니라 캐스팅 설계 쪽이었다.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세 배우가 한 인물을 나눠 맡는데, 그냥 배역만 나눈 게 아니라 무대 구성과 LED 화면, 조명, 음향까지 배우별로 다르게 디자인했다는 것. 관객과의 소통에 능한 김히어라의 회차는 원작의 스탠딩 코미디 형식에 가장 가깝게 짜였고, 무대 경험이 오래된 김주연의 회차는 소품을 여럿 두고 드라마성을 높였으며, 김규남의 회차는 그 둘 사이에서 여러 개의 의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고 한다.</p>
<p>
   <br />
</p>
<p>이 설계는 꽤 영리하다고 느껴졌다. 1인극은 애초에 배우 한 사람의 몸과 목소리에 전부를 거는 장르인데, 그 사적인 성격을 무대 디자인 층위까지 끌고 올라가 아예 공연의 조건으로 못 박아버린 셈이다. 관객에게는 재관람의 이유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배우에게는 '누구의 플리백인가'를 스스로 정의할 여지가 생긴다. 이길준 프로듀서가 "배우들의 생각을 최대한 반영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대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테다. 캐스팅 홍보가 아니라 프로덕션 구조 자체가 만들어낸 차이라는 점에서, 1인극이라는 장르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식으로도 퍽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01225_cwbmpcki.png" alt="플리백 크레딧.pn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혼자 남겨진 것 자체로 삶이 속죄인 사람에게</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사람들은 왜 실수를 할까요? 그게 바로 연필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래요."</p>
   <p>"하, 그거 농담이에요?"</p>
   <p>"(하늘을 보며) 모르겠어요<span style="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font-size:="" 13px;"="">⋯</span>"</p>
   <p>&nbsp;</p>
   </blockquote>
<p>&nbsp;</p>
<p>결말은 방향 다소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살아라'라는 작가의 직접적 메시지로 느껴졌다. 한 번 실수를 한 사람도 재고와 갱생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평생 속죄를 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실수가 있지⋯⋯&nbsp;난 이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플리백은 모두가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도 평생 자기혐오에 빠져 괴로움에 살 것 또한 알기에.</p>
<p>
   <br />
</p>
<p>류주연 연출은 이 극을 두고 관객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냥, 그녀가 건강하게 괴로워하길 바란다. 괴롭지 말라고는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박한가? 그런데 어떡해. 혼자 남겨진 것 자체만으로 이미 삶이 속죄인 플리백에게, 그리고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경멸하는 우리에게.</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잠시만 울고, 자책은 짧게. 대신 오래오래 잊지는 말고.</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 드라마 &lt;당신이 잠든 사이에&gt;</p>
   <p>&nbsp;</p>
   </blockquote>
<p>&nbsp;</p>
<p>그래도, 살자 우리.</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00357_oikambcx.jpg" alt="컬쳐리스트 명함.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주영지]]></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09:09:5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7</guid>
<title><![CDATA[[Review] 상자에서 꺼내진 양은 정말 양이 맞았을까 - 도서 &#039;상자 속의 양&#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7</link>
<description><![CDATA[상자를 열어 아는 게 힘일까, 열지 않고 모르는 게 약일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I의 발전이 빛의 속도만큼 빨라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챗GPT로 내가 기획한 걸 한 번 검토받는 정도였는데, 어느샌가 기획 자체를 AI와 하고 있고, 이제는 코딩도 AI가 대신 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하면 빠질 수 없는, 인간을 본 떠 만든 안드로이드나 인간성을 탑재한 휴머노이드처럼 상상 속에서나 마주할 만한 일들이 이젠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껴질 따름이다.</p>
<p>
   <br />
</p>
<p>그럴 때마다 항상 드는 의문이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가치관, 정체성을 담은 AI나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낸다면, 그 행위의 윤리성을 과연 어떤 잣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원래의 사람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AI가 스스로 학습을 진행한다면 말이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다―</p>
   <p>&nbsp;</p>
   <p>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어떤 가족의 이야기.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아이를 대신해서 받아들인 것은 휴머노이드였다.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가족의 시간. 그러나 이 가족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미래'였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인간 드라마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고레에다 감독의 그림 콘티 및 [[상자 속의 양]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록</p>
   <p>&nbsp;</p>
   </blockquote>
<p>&nbsp;</p>
<p>주인공 코모토 오토네와 켄스케는 건축가로 일하는 부부다. 두 사람은 2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여전히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토네는 갑자기 집에 찾아온 자신의 엄마 때문에, 켄스케는 파친코를 하다 시간을 놓친 탓에 사고가 벌어졌다고 여기며 각자의 죄책감에 갇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다른 가정의 휴머노이드를 마주한 두 사람은 아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기로 결심한다.</p>
<p>
   <br />
</p>
<p>차마 버리지 못했던 아들의 유품을 모아 휴머노이드 제작사에 보낸 두 사람은 마침내 아들 카케루와 다시 마주한다. 겉모습은 분명 자신들의 아이가 맞지만, 마음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좀처럼 잠재우기 어렵다.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이 간극을, 가족은 과연 어떻게 채워 나갈까.</p>
<p>&nbsp;</p>
<p>도서 &lt;상자 속의 양&gt;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시나리오북이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 전 배우들이 읽는 각본과 같은 형식의 책 은 처음 접했다. 보통 책은 세세한 묘사와 서술을 바탕으로 독자가 장면을 직접 상상하며 읽어 나간다. 그래서 대사 위주로 구성된 책만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지 걱정부터 들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간결한 배경 묘사와 대사만으로도 인물들이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그려졌다. 인물의 감정이 담긴 표정까지 완벽하게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p>
<p>
   <br />
</p>
<p>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제외하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감독 중 한 명이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적 언니를 따라 &lt;그렇게 아버지가 된다&gt;를 아무 생각 없이 본 적이 있다. 성인이 된 뒤 문득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한 번 더 감상했고, 그때부터 나 역시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분명 소재와 이야기만 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데도,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p>
<p>
   <br />
</p>
<p>가족애를 워낙 잘 다루는 감독이기에 이야기 자체에는 군말할 데가 없었다. 다만 소재가 다소 흔하게 느껴진 점은 아쉬웠다. 2006년에 이미 &lt;싸이보그지만 괜찮아&gt;란 영화가 역시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다룬 작품이니 말이다.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도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장면이 바뀐 뒤 카케루를 비롯한 여러 휴머노이드와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이에 대한 별도의 부연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책장을 넘겼을 수도 있다.</p>
<p>
   <br />
</p>
<p>책의 제목인 '상자 속의 양'은 생텍쥐페리의 &lt;어린 왕자&gt;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lt;어린 왕자&gt;에서 화자인 '나'는 어린 왕자의 부탁을 받고 양을 여러 번 그려주지만, 어린 왕자는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나'는 상자 하나만을 그려 준 뒤, 어린 왕자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오히려 이 그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 상자 안에 자신이 원하던 양이 '분명히' 들어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p>
<p>
   <br />
</p>
<p>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작품의 제목이 왜 &lt;상자 속의 양&gt;인지 계속 생각해 보았다. '나'가 그린 상자 안에 정말 양이 있는지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애초에 그림일 뿐이니, 현실적으로는 양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안에 자신이 원하는 양이 들어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림 속 상자는 직접 열어 볼 수도 없으니, 그 믿음이 깨질 일도 없을 것이다.</p>
<p>
   <br />
</p>
<p>주인공 부부가 다시 만난 아들은 어쩌면 <b>상자 밖으로 꺼내진 양</b>이 아니었을까. 휴머노이드로 되살리기 전까지 아들 카케루는 부부의 기억과 기대 속에 존재하는 '상자 속의 양'이었다. 그러나 상자 밖으로 나온 현실의 양은 그들이 상상하던 모습과 달랐다. 아들의 얼굴과 외형, 기억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죽기 전의 아들과 동일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부부도, 기계로 다시 태어난 아들 카케루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p>
<p>&nbsp;</p>
<p>결국 중요한 것은 상자 안에 실제로 양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에게 상자 속의 양이 분명히 존재했듯, 코모토 부부에게도 기억 속 카케루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들의 아들이었다. 상자 안에 있는 동안에는 보고 싶은 모습으로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고, 그 믿음이 현실과 부딪혀 깨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상자를 열어 양을 현실로 꺼내는 순간, 믿음만으로 완성되어 있던 존재는 구체적인 몸과 말, 행동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실의 카케루는 부부가 기억하던 아들과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다.</p>
<p>
   <br />
</p>
<p>&lt;상자 속의 양&gt;은 죽은 사람을 현대의 기술로 되살릴 수 있는지를 묻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던 사람을 현실로 다시 불러냈을 때, 그가 더 이상 우리의 기억과 같지 않더라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상자 속의 양은 상자 안에 있을 때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15607_ytqekexw.jpg" alt="대원-상자속의양-표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7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배지은]]></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8:00:3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1</guid>
<title><![CDATA[[Opinion] 사람과 영웅 사이: 스파이더맨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1</link>
<description><![CDATA[가깝고도 먼 당신의 친절한 이웃]]></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b><span style="font-size: 18px;">5년 만에 돌아온 스파이더맨</span></b>
</div>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div>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030852_wbuzgyyx.jpeg" alt="스파이더맨포스터.jpeg" style="width: 700px; height: 1039px;" />
   </p>
   </div>
<div>&nbsp;</div>
<div>&nbsp;</div>
<div>
   <span style="text-align: center;">만약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의 존재가 모두 지워진다면 어떤 느낌일까.&nbsp;</span>상상해 보면, 마치 영원히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는 기분일 것 같다. 문 뒤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가며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들은 나의 이름조차 모른다.
</div>
<div>
   <br />
</div>
<div>&lt;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gt;의 마지막에서, 피터 파커가 마주한 것이 바로 그런 세계였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웠고,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의 곁에서조차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5년 만에 돌아온 &lt;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gt;는 그 선택 이후의 시간을 비춘다.</div>
<div>
   <br />
</div>
<div>나는 방대한 마블 세계관을 꿰뚫고 있는 마니아는 아니지만, 스파이더맨 시리즈만큼은 꾸준히 챙겨볼 만큼, 애정한다. 역대 스파이더맨들마다 고유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div>
<div>&nbsp;</div>
<div>토비 맥과이어부터 앤드류 가필드, 그리고 톰 홀랜드까지, 같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면서도 세 사람이 보여준 피터 파커는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는 서툴지만 책임감 강한 청년의 모습을,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끝내 사람을 구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div>
<div>
   <br />
</div>
<div>이번 영화는 3대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가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성숙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던 멘토와 유일한 가족을 떠나보내고, 자신에 대한 기억마저 지운 채 온전한 홀로 <span style="font-size: 16px;">선 '어</span><span style="font-size: 16px;">른' 피터 파커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span></div>
<div>
   <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
</div>
<div>&nbsp;</div>
<div>&nbsp;</div>
<div>
   <b><span style="font-size: 18px;">자신과의 단절</span></b>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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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nbsp; &nbsp;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030945_birksine.jpeg" alt="common.jpe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피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을 지운 후, 4년간의 고독한 날들을 보냈다. 인스타그램 너머로 행복한 대학 생활을 보내는 네드와 MJ의 모습을 남몰래 지켜보기도 하고, 매번 꽃을 사 들고 큰엄마 메이의 묘지를 찾는다.</span>
</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MJ에게 상황을 전하려 편지도 써보았지만, 이미 연인 MJ와 가장 친한 친구 네드의 일상에 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피터는 타인과 단절된 동시에 자신의 과거와도 단절된다.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함께했던 추억 역시 혼자만의 기억이 된다. 피터 파커라는 사람을 증명해 줄 관계가 사라진 것이다.</span>
</p>
<div>
   <br />
</div>
<div>모든 유대감을 끊은 채 여전히 뉴욕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하며 묵묵히 지나는 일상 뒤로, 피터는 갑작스러운 거미 DNA의 증폭으로 인해 생체 거미줄을 분사하게 된다. 마치 정신적 고립이 육체로 발현된 듯 거미줄 고치에 둘러싸여 버둥거리다가 추락하는 그의 모습은 타인과의 표면적인 단절을 넘어 영웅 스파이더맨이 아닌, 인간 '피터 파커'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보여준다.</div>
<div>
   <br />
</div>
<div>하지만 영화의 클라이스인 데미지 컨트롤 본부 전투씬에서 진 그레이가 조종하는 닌자 부대와 겨루던 중, '스파이더맨인가, 피터 파커인가'라는 그녀의 물음에 피터는 마스크를 벗은 채 이렇게 대답한다. "둘 다 나야." 개인 고유의 정체성은 온전히 스스로 일궈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타인과의 유대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div>
<div>
   <br />
</div>
<div>
   <br />
</div>
<div>
   <br />
</div>
<div>
   <b><span style="font-size: 18px;">당신의 친절한 이웃</span></b><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
</div>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030752_xmapzfpn.jpg" alt="spider-man-brand-new-day-tom-holland.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nbsp;</p>
<p>&nbsp;</p>
<div>스파이더맨은 '친절한 이웃'이다. 악당과 싸우고 도시를 구하는 영웅치고는 소박한 별명 같아 보이지만, 어쩌면 이 이름이 스파이더맨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랜 시간 사랑을 받는 이유는, 가면과 수트 이면에 평범하고 어린 청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div>
<div>
   <br />
</div>
<div>큰 힘을 가졌음에도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은 지키지 못한다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영웅의 서사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b>"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b>라는 대사는 '얼마나 강한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힘을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div>
<div>
   <br />
</div>
<div>피터는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관계를 끊고 스파이더맨으로만 살아가는 길을 택했었다. 하지만 사람 잃는 것이 두려워 사람을 포기해 버린다면, 자신이 지키려 했던 스파이더맨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스파이더맨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피터 파커'이기 때문이다. 가면 아래에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div>
<div>
   <br />
</div>
<div>그래서 스파이더맨은 가깝고도 먼 영웅이다. 하늘을 날고 벽을 기어오르는 능력은 우리와 너무 멀리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우리와 닮아 있다.</div>
<div>&nbsp;</div>
<div>&nbsp;</div>
<div>&nbsp;</div>
<div>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030334_rxsdsabr.jpg" alt="윤경주_컬쳐리스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div>
<div>&nbsp;</div>
<div>&nbsp;</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윤경주]]></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01:41: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4</guid>
<title><![CDATA[[Review] 미래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나. -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4</link>
<description><![CDATA[미래의 주도권은 당신에게 있나요, 아니면 미래에게 있나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시간여행’ 소재는 시대를 막론하고 많이 쓰이며, 인기가 많았다. 아주 어렸을 때도, 20대 때도,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여행은 단골 소재다. 나를 포함하여 대중은 뻔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보게 되고, 빠져든다. 문득 이유가 궁금했다. 판타지, SF 장르 특성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사유한 결과, 다음과 같은 (나름의) 결론이 나왔다.</p>
<p><br /></p>
<p>5년 전, &lt;미드나잇 라이브러리&gt; 오디오북을 청취했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가 가득한 상태에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해도 고난과 역경은 여전히 있고, 무언가는 잃는다. 어떤 인생이 더 나을지는 당장보다는 오래 살아봐야 알 수 있다. 노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에 대한 후회는 그만두기로 했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고, 선택하지 않은 삶에 막연한 기대를 하는 건 인간의 심리다. 나처럼 어떤 계기로 인해 또는 자연스럽게 깨닫지 않는 이상, 지난날에 대해 이불킥을 하면서 산다.</p>
<p><br /></p>
<p>미래로 시간여행을 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건 비슷한 맥락에서, 고난과 역경을 미리 알고 잘 대처하여 좀 더 잘 살고 싶어서다.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아픔은 존재하지만, 미래는 좀 다르지 않은가. 미래를 미리 알면, 어쩔 수 없는 고난과 역경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고 덜 아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심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5년 전에 그 책을 읽고,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지만 그 일말의 희망 때문에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는 이야기에 솔깃하고 상상한다. 따라서 시간여행 소재의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다.</p>
<p><br /></p>
<p>이번에 관람한 영화의 소재도 시간여행이었다. 뻔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호기심과 흥미가 생겼다. 더구나 2분 후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이라니,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설정이었다. 스마트폰 하나로만 촬영하고 원샷과 원테이크 방식인 데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하니, 더 기대가 됐다.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야마구치 준타 감독과 우에다 마코토 각본가가 함께한 첫 장편영화다. 일본에서 2020년에 개봉하고 코미디 걸작, 기발한 시간여행 영화라는 호평과 함께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8월 19일 개봉하며, 나는 시사회로 관람하고 왔다. 아직 개봉 전이라 이 글에 영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지 못하지만, 내 느낌이나 생각을 상세히 적어보려 한다.</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10406_knuqqzex.jpg" alt="티저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p>
<p><br /></p>
<p>&nbsp;</p>
<p>카페 주인 카토는 어느때와 다름없이 카페에 출근해 알바생과 인사를 나누며 평범한 하루를 시작한다. 1층에는 카페, 2층에는 카토의 방이 있어서 무언가를 찾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방을 둘러보던 카토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카페를 모니터할 수 있는 TV에서 나는 소리였다. 화면 속에는 매장 안 모습 뒤로 카토와 똑같이 생긴 남성이 카토를 보고 있었다. 당황하는 카토에게 2분 후 미래의 자신이라고 말한다. 가게와 카토의 방 TV가 2분의 시차로 연결되어 있으며 카토의 방은 현재, 카페는 미래의 공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현재의 카토는 미래의 카토와 끝말잇기로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걸 확인하면서 의심을 거둔다. 그리고 미래의 카토가 하라는 대로 1층 가게 모니터를 향해 자신이 겪은 걸 말해준다. 알바생, 카토의 친구들까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더 먼 미래를 보기 위해 타임TV를 설계한다. 두 모니터를 마주 보게 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무한히 연결되며 이는 드로스테 효과와 같다고 결론짓는다. 두 모니터를 마주 보게 만들어서 2분 후가 아닌, 4분 후의 미래까지 미리 보고,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만,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p>
<p><br /></p>
<p>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카페와 카토의 방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른 영화에 비해 장소가 매우 제한적이지만,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에 1층과 2층을 오가는 동선을 원테이크로 담아내니 현실감이 느껴졌다.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까지 더해지니, 그저 배우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듯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겪은 시간여행이 실제로 나의 일상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원샷과 원테이크 연출을 해서 워킹이 매끄럽지 않고 산만해 보였지만, 이마저도 자연스러워 보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더 재밌게 관람하는 방법.</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 영화에는 MBTI가 있다. 2분 후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대부분 놀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카토와 알바생 그리고 친구들은 꽤 쉽게 받아들인다. 순수한 눈빛과 해맑은 얼굴로 그 상황에 빠르게 적응한다. 재밌는 건 상황을 받아들이기 전과 후의 반응이 캐릭터마다 달랐고, 그 반응은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에 좋은 장치였다.</p>
<p><br /></p>
<p>주인공 카토는 주변 분위기와 현재 상황에 끌려다니는 와중에도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이 캐릭터는 단단하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벌어진 상황을 직면하고, 수습하기 위해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 냈다. 중요한 순간에는 용기 있는 선택으로 드로스테 상황을 종료시켰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중심을 잡고 더는 주변 분위기에도, 미래에도 끌려다니지 않았다. 매력 있는 캐릭터였다.</p>
<p><br /></p>
<p>알바생은 해맑고 천진난만한 성격이지만, 겁이 많은 면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무서워하면서도, 미래의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까 봐 기꺼이 미래에 끌려다닌다. 심지어 인과율이 깨지지 않게 진실을 숨겼다. 알바생은 인간의 민낯을 비춘 캐릭터였다.</p>
<p><br /></p>
<p>오자와는 아이디어가 넘치고 순수한 면이 있는 캐릭터였다. 상황 파악을 잘 하고 머리가 좋아서 타임TV의 원리를 이해하고 새롭게 설계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며 나아가는 성향으로 보였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더 먼 미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빠르게 옮겨서 기어코 해내는 그의 추진력이 인상적이었다. 오자와의 그런 면은 내가 갖고 싶은 면이다.</p>
<p><br /></p>
<p>타나베는 가장 현실적이고 평범한 캐릭터였다. 인간의 가장 대중적인 유형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확인하고,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무언가를 타임TV를 통해 쟁취했다.</p>
<p><br /></p>
<p>카페 옆 이발소 딸 메구미는 후반부에 잠깐 나왔지만, 존재감이 컸다. 그만큼 카토보다 더 용기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앞뒤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데도 침착한 모습을 보였으며 상황 적응력과 판단력이 빨랐다. 안주하는 모습보다는 어떻게든 헤쳐나가려는 모습이 두드러졌는데, 마지막에 보여준 그녀의 대범한 모습과 선택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녀가 먼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카토도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여리여리한 외면에 진취적인 내면을 가진 메구미가 몹시나 매력적이었다.</p>
<p><br /></p>
<p>캐릭터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2분 후 미래 컨닝에 대한 반응을 유심히 보고, 나는 어떤 쪽일지 생각하며 관람한다면, 더욱 재밌고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을 테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패러독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10430_pqfnqxkr.jpg" alt="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nbsp;</p>
<p>&nbsp;</p>
<p>처음에는 2분 후라도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영화 캐릭터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갈수록 미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들을 보면서 부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미래는 정해졌기에 팁을 알려주었으니 그 팁을 참고삼아 행동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이게 정말 좋은 걸까? 미래의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물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되려 자신을 잃어가는 듯 보였다. 미래에 묶인 채로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서글펐던 건, 그 모습이 그저 허구의 인물들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는 거다. 쉬운 말로 남 일 같지 않았다.</p>
<p><br /></p>
<p>나는 작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하루를 버티고, 지난 추억을 원동력 삼아 산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현재를 온전히 즐기진 못한다. 너무 행복하면 대가를 치를만한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해하기도 한다. 지금은 안 그러려고 하지만, 한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미래만 보며 미래를 향해 쉼 없이 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기대에 부응하는 미래는 오지 않았다. 왔어도 그때뿐이었다. 오히려 잃어버린 것, 놓쳤던 것들이 내 손에 쥐어졌고 그 슬픔은 오래갔다. 결국 미래에 끌려다니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 거다. 결국 이 모든 건 패러독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p>
<p><br /></p>
<p>물론 미래를 완전히 배제하고 현재를 사는 것도 좋은 건 아니다. 미래는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 정도로 삼고,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적어도 미래에 끌려다니느라 내가 실재하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을 놓치지 말라는 거다. 일단 현재를 잘 살아야 좋은 미래도 따라온다. 그래야 닥쳐올 고난과 역경도 잘 대처할 수 있다.</p>
<p><br /></p>
<p>영화에서 카토는 자신의 경험담을 메구미에게 들려줬다.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미래를 믿어서 막살았는데, 멸망하지 않아서 그동안 막 산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카토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p>
<p><br /></p>
<p>미래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미래를 탄생시키는 거였다.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을 관람한 후, 일말의 희망은 사라졌으나 그보다 소중한 걸 얻었다.</p>
<p><br /></p>
<p>나는 미래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10555_uruceikk.jpg" alt="강득라 네임카드.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강득라]]></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11:02:4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0</guid>
<title><![CDATA[[Opinion] 이곳은 극장이 아니다 - 안티포나 포 터널링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0</link>
<description><![CDATA[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극장은 극장이 아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연극을 보기 위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공연이 끝난 뒤 낯선 동네에 툭 떨어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p>
<p>&nbsp;</p>
<p>며칠 전 나는 성북동의 한 (구)교회에서 나와 갑작스레 올해 여름의 끝자락을 맞이했다. 그날 점심까지만 해도 등을 땀으로 흠뻑 적시던 열기가 가시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나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천천히 성북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땅은 여전히 낮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고, 천 주위로 드문드문 늘어선 술집 속 사람들의 볼 위에 새로운 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p>
<p>&nbsp;</p>
<p>다른 세상이다, 라고 생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나는 (구)교회에서 천체과학자 소명과 그녀의 수많은 모습을 만났고, 우주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네 층의 계단을 내려와 길을 건너니 어느샌가 다시 성북이었다. 그 경계를 넘는 게 이리도 쉬운 것이 의심스러워, 성북을 조금 더 맴돌았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공간 뒤집기</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b><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b>
</p>
<p>연극은 ‘실재 안의 허상’이란 틀을 가지고 있는 매체다. 음. ‘실재 위의 허상’이란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연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고로 실재하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실재하는 공간은 나름의 축적된 시간 속에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공간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상이랄지, 기대를 하게 만든다.</p>
<p>&nbsp;</p>
<p>예를 들어, 내벽이 하얗고 알코올 소독제 냄새가 가득한 병원에 가면 나는 긴 대기, 주삿바늘, 의사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 같은 것들을 예상하게 된다. 또 내부가 그늘지고 향 냄새가 가득한, 나무의 서늘한 냉기가 남아 있는 절에 가면 무언가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바지런한 몸짓을, 바닥에 닿은 무릎과 중얼거리는 기도의 옅은 웅웅거림을 기대하게 된다.</p>
<p>
   <br />
</p>
<p>극장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연극은 그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공간의 역사성을 전복시킨다. 그 공간에 축적된 시간이 말해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병원이지만 병원이 아니고, 절이지만 절이 아니다. 흰 벽과 소독제 냄새, 나무 바닥과 향 냄새는 분명 이곳이 내가 알던 공간이 맞다고 얘기하고 있는데.</p>
<p>&nbsp;</p>
<p>TINC에 들어서면 보이는 높은 천장, 어둑한 실내, 줄지은 긴 나무 의자들과 저 멀리 한 지점으로 모아지는 시선. 어딜 봐도 이곳은 교회인데, 교회가 아니란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94157_sycielit.jpg" alt="tempImagejVb9RR.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TINC(This Is Not a Church)</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6의 자유 참가작 중 하나인 ⟪안티포나 포 터널링(Antiphona for Tunneling)⟫이 무대로 삼은 복합문화공간 TINC는 이름에서부터 그 전복을 드러낸다. ‘This Is Not a Church(이곳은 교회가 아니다)’의 약자인 TINC. ‘명성교회’라는 초록색 간판이 걸린 이곳은 구 예배당이자 현 다목적 공간으로, 전시, 공연, 촬영, 워크숍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94348_zophhigm.jpg" alt="tempImagembV0WE.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막이 오르면 예배당의 문을 박차고 한 여자가 들어온다. 예배당이라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엄숙함이 있는지, 여자가 내는 소리 하나하나에 움찔하게 된다. 거친 발소리와 숨소리는 벽에 한참을 튕기고 튕겨 울려 퍼진다. 마치 교회 전체가 여자와 함께 화를 내고 있는 듯이. 여자는 털썩,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원망 같은 기도, 아니 기도 같은 원망을 올린다. 객석은 교회의 강단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퍼져 있어, 여자는 객석 사이사이를 누빌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얼어 있는 내 주위로 여자가 올 때면, 설교를 듣는 중에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당신도 빨리 앉으라 하고 싶어진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94439_fgmohmpz.jpg" alt="tempImagewdvM44.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어느 순간 여자는 누군가와 함께 2층에 올라가 있다. 강단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서 여자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본다. 바로 옆의 에어컨이 가림막도 없이 노출되어 있지만, 여자의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이 인조적인 것이라 믿기가 어렵다. 여자가 있는 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p>
<p>&nbsp;</p>
<p>극이 진행되는 동안 교회는 꿈속이, 숲이, 바다가, 블랙홀이 된다. 시간 역시 고정돼 있지 않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서로 충돌하고 뒤섞여 성북구의 여름밤은 까맣게 잊힌 지 오래. 그 대혼란 속에서 갑자기, 배우가 강단 옆의 쪽문을 열어젖힌다. 문밖으로 보이는 건 성북구의 전경. 해가 진 어둑한 하늘 아래로 건물들의 지붕과 하얗게 빛나는 작은 창들이 보인다. 떠나온 줄 알았던 지금, 여기. 이내 문은 다시 닫히고, 성북은 사라진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터널링</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b><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b>
</p>
<p>극은 맨 처음 여자가 뛰어 들어온 예배당의 뒷문에서 막을 내린다. 정확히는 그 문의 밖에서. 하지만 이번에 문밖에는 또 다른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 불이 꺼진 복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보이고, 이내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 두 개가 하나로 포개진다.</p>
<p>&nbsp;</p>
<p>그날 밤 소명과 우리는 함께 수많은 공간들의 저편에 도달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교회에서 숲으로, 바다로, 우주로 건너가는 일. 이곳과 저곳 사이의 단단한 벽을 잠시 무용하게 만드는 일. 불가능할 것 같은 경계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어느새 다른 쪽에 서 있다.</p>
<p>&nbsp;</p>
<p>그러나 문밖에서 또 다른 자신과 하나로 포개지는 소명을 보고 있으면, 그 ‘다른 쪽’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렇게 분명히 나뉘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교회가 교회인 동시에 교회가 아닌 것처럼, 같은 쪽과 다른 쪽을 가르는 기준 역시 처음부터 그리 단단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험을 거친 우리가 다른 곳에 도달했다고 믿는 것은, 결국 변한 것이 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p>
<p>&nbsp;</p>
<p>교회이자 극장이었던 공간을 떠나 성북천을 걸었다. 새삼스럽게 낯선 동네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성북천을 가운데 두고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길이 양쪽에 나 있었다. 하늘이 가까웠다. 역에 가까워지자 공터가 하나 나왔다.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와 있었다. 벤치에서 할머니 한 분이 건너편의 친구에게 뭐라 말을 거셨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이 풍경이, 교회의 쪽문을 통해 엿보다 마침내 다다른 낯선 세상 같았다. 아마도 연극은 때로는 내 삶의 역사성을 전복시키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00158_lyoyvuwx.jpg" alt="유예현.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유예현]]></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20:02:0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9</guid>
<title><![CDATA[[Review] 안중근이 되기 전, 안응칠을 만나는 시간 - 자객열전Ⅱ, 안응칠 워크숍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9</link>
<description><![CDATA[두렵지 않아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의 삶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lt;자객열전Ⅱ-안응칠 워크숍&gt;은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무대로 가져오는 부담을 관객들에게 숨기지 않는 방식으로 공연을 시작한다. 관객들이 거의 들어왔을 무렵부터, 무대 위에는 연출과 조연출, 무대감독이 있고 안중근을 연기하는 배우와 두 인물을 오가는 배우가 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들은 이미 무대 위를 유유히 돌아다니고 누군가와 통화하며 공연을 준비한다.</p>
<p><br /></p>
<p>처음 음향 장비를 확인하고 소리를 체크하는 조연출을 보면서 그가 정말 공연 스태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 시작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이들의 행동은 어느 순간 연극 무대 안으로 스며든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인지, 이미 시작된 공연인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진다.</p>
<p><br /></p>
<p>사실 이건 이번 연극을 관통하고 있는 상황적 설정이다. ‘워크숍’이라는 제목처럼 연극을 만드는 연극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을 곧바로 재현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인물들과 함께 공연을 만드는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장면을 진행하다가 멈춰서 묻고 다시 시험해보고 연기하며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91806_bmmuevzd.jpg" alt="안응칠 워크숍 POSTER.jpg" style="width: 700px; height: 97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여기서 하나 더 신경 써야 하는 지점은 공연의 제목이 &lt;안중근 워크숍&gt;이 아니라 &lt;안응칠 워크숍&gt;이라는 점이다. 낯선 연극 제목을 보고 검색해보니, 안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이다. 제목에 그의 아명을 썼다는 것부터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하얼빈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안중근의 모습만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p>
<p><br /></p>
<p>어릴 때 쓰던 이름을 왜 연극의 제목으로 썼을지 싶었는데, 이 이름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자신의 삶을 기록하며 붙인 자서전의 제목 &lt;안응칠 역사&gt;에 쓰기도 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자서전은 연극의 많은 부분에 등장하는 중요한 참고 자료로 쓰였다.</p>
<p><br /></p>
<p>연극이 준비되는 장면들의 시간대는 감옥에 들어온 이후 안중근 전담 교도관으로 있었던 치바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친밀해지는 순행적 구성이 기본으로, 가끔 연극 속 인물이 궁금증을 던지며 다른 시간대로 뛰어넘을 때가 있다.</p>
<p><br /></p>
<p>극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감옥에서의 시간이지만, 과거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통해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극 중반에 안중근 역할을 맡은 배우가 대사 없이 마임만으로 그의 인생을 주마등처럼 표현한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의 안응칠부터 그가 어떤 사건과 실패를 겪으며 하얼빈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p>
<p><br /></p>
<p>안응칠이 안중근이 되게 한 과정 가운데 초반 사건은 열여섯 살의 안응칠이 아버지가 조직한 의려에 참여해 동학군과 싸운 것이다. 그는 이후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 되어 전의를 북돋우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승리한 전투에서 붙잡은 일본군 포로들과 대화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 이 장면이 내가 알고 있던 안중근의 이미지와 달라서 놀랐다.</p>
<p><br /></p>
<p>안중근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 자체를 증오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포로들을 죽이라는 동료들의 주장에 반대하고 그들을 살려서 풀어주는 위험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한다.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이 없다는 만국공법을 따른 것이다. 결국 그가 풀어준 일본군 포로들로 인해 의병의 위치가 노출되었고, 일본군의 반격으로 의병부대는 큰 피해를 보고 흩어진다. 스스로 옳다고 믿었던 선택 때문에 자신의 사람들이 희생된다.</p>
<p><br /></p>
<p>이런 실패를 겪고도 안중근은 한국과 일본, 중국이 함께 살아갈 동양의 평화를 생각했다. 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단순히 한국의 독립을 훼손한 일본 정치인이 아닌 개인의 행동으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책임자였다. 훗날 재판에서도 이토에게 총을 겨눈 이유로 그가 일본 천황의 뜻마저 속이고 한국을 침략했다고 주장한 것도 일관적이다.</p>
<p><br /></p>
<p>처음 총을 들었던 어린 안응칠이,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와 패배를 경험하고, 일본군 포로와 대화하고, 살려 보내고, 동료들과 손가락을 자르며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하기까지의 시간이 쌓여 우리가 아는 하얼빈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있다.</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82624_vpvhfrvu.jpg" alt="mariakray-vintage-gun-6756390_192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위인전에서 보던 '안중근'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안응칠'이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연을 보고 난 뒤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그가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작성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p>
<p><br /></p>
<p>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아는 독립운동가에게도 가족이 있고, 조국만큼 소중한 것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닌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아들의 죽음이다. 안중근의 어머니께서 그의 첫 재판에서 받은 사형 선고에 항소하지 말라고 보낸 편지가 읽히는 장면은 처음 알게 된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옳은 일을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단단한 슬픔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장면이었다.</p>
<p><br /></p>
<p>죽음을 앞둔 남편의 편지는 어떠했을지 들어보면 그 또한 슬픔의 감정이 배제되어 담담히 아내와 아이들의 미래를 응원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 간결한 문장들을 써내려가면서 그는 얼마나 많은 울음을 참았을지, 그럼에도 자신이 슬픔과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며 가족들이 덜 슬퍼하길 바라는 그 마음이 담겨있는 듯했다. 편지를 받아 보는 아내의 관점에서 남편이 이해가 되면서도 울분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p>
<p><br /></p>
<p>사랑한다는 말이라도, 돌아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보고 싶다는 말이라도 남기면 어땠을까. 공연의 작가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워크숍에서만큼은 그 편지에 살을 붙여 다시 작성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안중근을 연기하는 배우는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가족을 두고 먼저 떠나보내는 남편, 아버지의 마음을 담았지만 마지막 문장으로 여전히 안중근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말을 남겼다. “내가 열 번 태어나면 한 번은 당신을 위해 죽고, 남은 아홉 번은 조국을 위해 죽겠습니다.”</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82646_uekqaefa.jpg" alt="patrick489-window-1160494_192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5px;" /></p>
<p>&nbsp;</p>
<p>&nbsp;</p>
<p>안중근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행복보다 자신이 죽은 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 사람의 행복보다 동포를 생각하고, 한 민족의 독립을 넘어 동양 전체의 평화를 생각할 만큼 그의 시야는 넓었다. 그의 시선이 먼 곳까지 향해 있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머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p>
<p><br /></p>
<p>이 공연이 위인의 신화적 모습을 걷어내고 평범한 인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로 인해 그가 한 업적이 더 드러나 보인다. 목숨을 내놓고 전한 그의 한국 독립과 동양 평화에 대한 그의 신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간 안응칠에 대해 알고 나니 그에게만 특별히 더 다정했던 것도 아닌 조국을 위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p>
<p><br /></p>
<p>두렵지 않아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의 삶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과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삶보다 더 넓은 민족,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p>
<p><br /></p>
<p>어쩌면 &lt;안응칠 워크숍&gt;이 공연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런 후손의 시선이 아니었을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서영]]></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8:27:0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2</guid>
<title><![CDATA[[리뷰] 평생 조금의 간격을 둘 수 없는 자기 자신과의 악연, 플리백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2</link>
<description><![CDATA[나의 플리백은 판단을 후회하거나 순간의 선택을 자책한 적은 있어도, 그게 결국 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고 믿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의 별칭은 '대혐오의 시대'이다. 혐오는 상대를 나로부터 구분짓는 타자화를,&nbsp;상대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을 전제로 한다. 혐오는 거리로 헤아릴 수 있는 감정이다.</p>
<p>&nbsp;</p>
<p>자기혐오는 이 전제들을 배반한다. 타자화할 수 있는 대상의 부재, 평생 조금의 간격을 둘 수 없는 자기 자신과의 악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거니와 자기 혐오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p>
<p>&nbsp;</p>
<p>연극 &lt;플리백&gt;과 주인공 플리백은 생경한 대사와 소재로 풀리는 극이며,&nbsp;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은 아니지만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은 마냥 낯선 감정은 아니었다.</p>
<p>&nbsp;</p>
<p>성적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은 혐오로부터 도망치는 와중 극단으로 치달은 방식이었지만, 누군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바라는 심리는 정중앙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91055_coqhgtrr.jpg" alt="20260809161804_kzaahutb.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9px;" /></p>
<p>&nbsp;</p>
<p>&nbsp;</p>
<p>〈플리백〉은 피비 월러-브리지가 직접 쓰고 직접 무대에 선 1인극이다.</p>
<p>&nbsp;</p>
<p>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초연 당시 신작상과 1인 공연상을 받으며 곧장 화제작이 되었고, 이듬해 런던 소호 시어터 앙코르 공연으로 영국 비평가협회와 오프 웨스트엔드 어워드의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2019년에는 오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까지 올라가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일부 관객에게는 2016년 BBC 드라마판으로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를 여러 부문 가져간 그 시리즈의 원형이 바로 이 연극이다. 국내에서는 2024년 국립극장 상영으로 먼저 소개되었고, 이번이 세계 최초 공식 라이선스 초연이다.</p>
<p>&nbsp;</p>
<p>'플리백(Fleabag)'은 영어권에서 오래 쓰여온 말로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을 뜻한다. 제목이 곧 인물의 진단서인 셈이다. 런던 뒷골목에서 기니피그 카페를 간신히 굴리며 사는 플리백은 충동과 실수를 연달아 저지른다. 면접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상의를 벗어버리고, 성공한 언니와는 사사건건 부딪히고, 아버지는 새어머니의 눈치만 본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무심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친구의 죽음, 가족과의 단절, 관계 속의 공허가 쌓여 있다.</p>
<p>&nbsp;</p>
<p>성적 농담과 냉소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객석은 계속 웃는데, 극은 그 반대급부의 감정들이 한 사람의 자기 인식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p>
<p>&nbsp;</p>
<p>형식도 못지않게 발칙하다. 화려한 무대 장치도, 장면을 정리해주는 암전도 거의 없이,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극 중의 인물과 런던의 골목이 만들어진다. 텅 빈 무대에서 플리백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농담을 주고 받는 듯 하다 어느 순간 가장 깊은 고백으로 끌어들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91104_fgmsoahl.jpg" alt="20260809161740_mneyacia.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이번 초연에는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원작자가 직접 쓰고 연기한 작품인 만큼 캐릭터의 개성이 강한데, 이번 라이선스 초연은 그 점을 오히려 밀고 나가 배우의 해석에 따라 톤은 물론 연출까지 다르게 구성했다. 김히어라는 원작의 스탠딩 코미디 형식에 가까운 플리백을, 김주연은 다양한 소품을 활용해 드라마성을 강화한 플리백을, 김규남은 그 중간 지점의 플리백을 그린다.</p>
<p>&nbsp;</p>
<p>나의 플리백은 판단을 후회하거나 순간의 선택을 자책한 적은 있어도, 그게 결국 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거니와 '자기 혐오가 없는 사람' 일 수는 없었다. 특히 나는 차선으로 기우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만 치중해서 순간을 방치하고 몰입하지 못하는 내가 두고두고 싫다. 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이 연극의 방식은, 결국 관객 각자가 자기 안의 플리백을 자백하게 만드는 장치였던 것 같다.</p>
<p>&nbsp;</p>
<p>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규모 있는 홀이었다. 1인극은 결국 배우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는데, 웬만큼 가까운 자리가 아니라면 배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작품처럼 관객과 눈을 맞추고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구조에서는 치명적이다. 극의 막바지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비칠 때 몰입감이 확연히 달라졌던 것이, 조금 더 작은 공연장에서 조금 더 가까이 배우의 연기를 보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키운다.</p>
<p>&nbsp;</p>
<p>결국 혐오는 필연적이고 화살의 안팎을 결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화살을 안으로 돌리면 자기혐오가 되고, 밖으로 돌리면 자기연민이 된다. 밖으로 나간 화살은 애초에 타인 혐오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으며, 딱한 나를 위한 알량한 안식처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처럼 플리백의 고백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외로움과 결핍을 비춘다. 엉망인 삶 속에서도 사랑과 이해를 갈구하는 것이 인간됨인 것 같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91116_qiuauwrm.jpg" alt="20260809161701_pqnokdsm.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임지영]]></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5:10: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5</guid>
<title><![CDATA[[Review] 미래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아는 것일까? -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5</link>
<description><![CDATA[2분 후의 나에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가끔 꿈에서 봤던 장면을 현실에서 마주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팔 한쪽에 소름이 돋으며 “나 지금 이 순간을 꿈에서 봤어”라고 말할 때면 마치 미래를 보는 예언자가 된 듯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p>
<p>&nbsp;</p>
<p>누구든지 어디서나, 뭐든지 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 단 한 가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광활한 우주의 시간은 무한하고 그 속에 있는 작은 미물인 인간에게 시간은 언제나 유한하다.</p>
<p>
   <br />
</p>
<p>정해진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만약’을 꿈꾼다. 영화 &lt;시간을 달리는 소녀&gt;에서는 타임슬립을 통해 청춘의 성장을, &lt;어바웃 타임&gt;은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보여줬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갖게 된다면 어떨까?</p>
<p>&nbsp;</p>
<p>&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기발한 상상을 통해 일상 속에서 인간의 선택이 미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신선하게 접근하고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25422_zeyhcwyw.jpeg" alt="티저 포스터.jpe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
</p>
<p>&nbsp;</p>
<p>&nbsp;</p>
<p>영화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평범한 카페 사장이 자신의 집과 카페에 있는 모니터에 2분의 시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 모니터를 마주 보게 하여 2분 간격의 미래를 봄으로서 생겨나는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p>
<p>&nbsp;</p>
<p>‘드로 스테’란 이미지 속에 동일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드로 스테 효과’에서 가져온 것으로 마주 본 두 모니터 속에 생겨난 미래들을 의미하고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25445_mzaqdwbh.jpeg" alt="01.jpe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nbsp;</p>
<p>&nbsp;</p>
<p>우리는 종종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순간마다의 선택이 미래에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곤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카페 주인 '카토'와 2분 후의 미래를 보는 모니터를 발견한 모두가 그러했다.</p>
<p>
   <br />
</p>
<p>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알게 된 후 2분 뒤에는 자신들이 들었던 미래가 실현되기 위해 행동해야 했다. 자신이 보았던 미래의 자리로 가 과거의 자신에게 똑같은 말을 건넨다. 미래를 보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결정해버리는 셈이다.</p>
<p>&nbsp;</p>
<p>더 먼 미래를 보기 위해 화면을 연결할수록 인물들의 행동은 반복되고 현재와 미래는 서로의 원인이 되어 미래의 틀에 갇히게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25518_mgdegcby.jpeg" alt="06.jpe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nbsp;</p>
<p>&nbsp;</p>
<p>흥미로운 부분은 계속 반복되는 구조와는 반대로 끊지 않는 '원테이크 방식'으로 촬영했다는 것이다.</p>
<p>&nbsp;</p>
<p>대사와 행동이 생략 없이 반복되며 모니터 속 행동을 인물들이 실행하면 관객 또한 이미 보았던 장면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행동은 반복되고 있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방식으로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로 하여금 몸소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뒤이어 이어질 내용에 대한 궁금증과 긴장감을 더욱 증폭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p>
<p>
   <br />
</p>
<p>계속되는 핸드 헬드 촬영 기법 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같은 효과를 가져와 후반부로 갈수록 마치 등장인물들과 함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그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내리고, 미래의 장소로 가는 '과정'을 함께 하며 미래의 장면이 실현되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하는 과정 중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25538_vsdloyyr.jpeg" alt="05.jpe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nbsp;</p>
<p>&nbsp;</p>
<p>영화는 주인공인 카페 사장 '카토'의 고백을 통해 그 점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마치 오늘의 운세를 보듯 미래로 용기를 얻은 고백은 실패했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그 용기에 힘입어 먼저 본 미래와는 반대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p>
<p>&nbsp;</p>
<p>많은 이들이 두려워 한 미래가 변하는 선택은 카토에게 다시 평범한 일상과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작은 용기를 주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도 카토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뤄지는 과정 속에 놓일 수 있게 되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25559_ltxmpzwe.jpeg" alt="02.jpe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nbsp;</p>
<p>&nbsp;</p>
<p>미래를 본다는 것이 반드시 미래를 안다는 것과 같지 않다. 카페 사장의 고백의 결과를 속인 것도, 우연히 돈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대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 것도 그렇다.</p>
<p>&nbsp;</p>
<p>인물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가정 값이 입력된 미래의 한 장면일 뿐이다. 결과를 먼저 보았지만 그 결과의 맥락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는 미래를 알면 현재의 불확실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하지만, 오히려 알게 된 미래 이후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p>
<p>&nbsp;</p>
<p>어쩌면 미래를 본다는 것은 그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장면을 조금 먼저 마주하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25625_llyzssid.jpeg" alt="08.jpe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nbsp;</p>
<p>&nbsp;</p>
<p>로튼토마토 신선도 99%를 기록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아온 &lt;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gt;은 오는 8월 19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p>
<p>&nbsp;</p>
<p>2분 후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미래를 물어보고 싶나요?</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상아]]></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12:57:0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6</guid>
<title><![CDATA[[Review] 거리를 통째로 옮겨온 전시장 - 뱅크시: Still Here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6</link>
<description><![CDATA[거리의 벽에 남겨졌던 뱅크시의 작업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작품을 둘러싼 공간의 분위기부터 조명과 음악, 영상, 세트 연출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시장을 따라가며, 익숙했던 이미지들을 새롭게 만나는 즐거움을 담았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뱅크시는 원래 벽에 그림을 그리던 예술가였다. 런던의 뒷골목, 팔레스타인의 분리 장벽, 우크라이나의 폐건물. 그가 그림을 그린 자리는 늘 누군가의 삶이 지나가던 자리였고, 그 벽은 갤러리가 아니라 거리 그 자체였다.</p>
<p>&nbsp;</p>
<p>그런 그의 작품을 지금 여의도 더현대 서울 6층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시는 '보는 재미'에 관해서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졌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20308_tzauypdn.jpg" alt="IMG_2233.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전시는 익명이라는 가면에서 출발해 벽과 저항, 유머와 풍자, 미술시장의 아이콘이 된 뱅크시, 평화의 메시지를 거쳐 다시 가면으로 돌아오는 여섯 개의 공간으로 이어진다.</p>
<p>&nbsp;</p>
<p>이 순서는 단순한 설명의 나열이 아니다. 방이 바뀔 때마다 조명과 벽 색, 배치, 음악까지 통째로 달라지면서 관람객은 한 공간에서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p>
<p>&nbsp;</p>
<p>&nbsp;</p>
<p>&nbs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지루할 틈 없는 공간 연출</b></span>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br />
</p>
<p>이 전시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눈이 심심할 틈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리의 거친 벽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첫 섹션에서는 실제 골목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몰입감이 들었다. 뱅크시에게 벽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이 태어나는 장소였다는 걸 생각하면, 작품만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그의 작업 방식이 와닿았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20641_wteuyyys.jpg" alt="IMG_2246.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
</p>
<p>&nbsp;</p>
<p>&nbsp;</p>
<p>이어지는 공간으로 넘어가면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진다. 무거운 메시지를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 비틀어 보여주는 뱅크시 특유의 태도가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이다.</p>
<p>&nbsp;</p>
<p>그러다 다시 정돈되고 세련된 공간으로 들어서면, 소더비 경매장 파쇄 퍼포먼스나 디즈멀랜드 프로젝트 같은 사건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미술시장과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20659_mnqpcbpp.jpg" alt="IMG_2373.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이렇게 공간마다 톤이 확확 바뀌기 때문에, 100여 점에 가까운 작품을 보면서도 시각적으로 지치지 않고 끝까지 몰입해서 걸을 수 있었다. 벽화 작품들이 액자에 담긴 채 전시장 벽면에 프린팅과 함께 그대로 붙어 있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p>
<p>&nbsp;</p>
<p>'벽에서 시작된 예술'이라는 원래 맥락이 눈앞에서 그대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20812_bbbszvwb.jpg" alt="IMG_24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방마다 하나의 완결된 세트처럼 연출된 구간이 등장하는데,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다른 구역과 완전히 분리된 느낌을 준다.</p>
<p>&nbsp;</p>
<p>작품을 하나씩 감상하며 이동하는 전형적인 전시 동선이라기보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장면처럼 다가와서 전시를 '걷는다'기보다 여러 장면을 차례로 '경험한다'는 감각에 더 가까웠다. 영상이 나오는 구간에서는 조명을 낮추고 시선을 화면 쪽으로 자연스럽게 모아둔 동선도 눈에 띄었다.</p>
<p>&nbsp;</p>
<p>흘낏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고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유화가 아닌, 도장처럼 강렬한 이미지</b></span>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pan style="font-size: 18px;"><b>&nbsp;</b></span>
</p>
<p>작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붓의 흔적이 살아있는 유화가 아니라, 도장을 찍어낸 듯한 평면적인 질감. 뱅크시 특유의 스텐실 기법이 주는 인상이 가까이서 볼수록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찍어내고 반복할 수 있는 이미지라는 점은 거리에서 작업해야 했던 그의 방식과 잘 맞아떨어진다.</p>
<p>&nbsp;</p>
<p>그래서인지 '잘 그린 그림'이라는 감상보다는 '강하게 남는 이미지'라는 인상이 훨씬 오래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21323_mvnywxsy.jpg" alt="IMG_227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99px;" />
</p>
<p>&nbsp;</p>
<p>&nbsp;</p>
<p>멀리서는 단순해 보였던 형태가 가까이 갈수록 얼마나 명확한 실루엣과 대비를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있었다. 거리에서는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아야 했던 이미지를, 전시장에서는 눈앞에 서서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차이가 오히려 새로운 감상을 만들어냈다.</p>
<p>&nbsp;</p>
<p>&nbsp;</p>
<p>
   <br />
</p>
<b><span style="font-size: 18px;">전시를 나서며</span></b>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전시를 다 보고 나면, 여섯 개의 공간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게 느껴진다.</p>
<p>&nbsp;</p>
<p>뱅크시의 작품을 많이 몰라도 상관없다. 이름만 들어본 사람이라도 섹션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세계에 스며들게 되고, 이미 좋아하던 사람에게는 뉴스나 SNS로만 접했던 이미지를 실제로 마주하는 즐거움이 있다.</p>
<p>&nbsp;</p>
<p>사진을 찍고, 꾸며진 공간을 구경하고, 영상을 보고, 작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방식이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다. 그래서 진지하게 감상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가볍게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도 폭넓게 권할 만한 전시였다.</p>
<p>&nbsp;</p>
<p>거리에서 시작된 그림을 전시장 안에서 만난다는 게 처음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공간 연출과 큐레이션이 그 간극을 적극적으로 메워준다. 전시장을 나선 뒤에는, 화면 속에서 몇 초간 스쳐 지나갔던 그림들이 이제는 하나의 공간과 장면,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경험과 함께 기억에 남는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215947_dddmneqw.jpg" alt="김민주.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민주]]></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20:32:1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83</guid>
<title><![CDATA[[리뷰 URL 취합] 제29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SIDance2026]]></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83</link>
<description><![CDATA[국내 최대최고의 정격(正格) 무용축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div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20px;"><b>제29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SIDance2026</b></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댓글로</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고한 리뷰 링크를</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입해 주세요!</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자신의 글 외에도,</div>
<div align="center">다른 구성원분들이 쓴 글을</div>
<div align="center">이 공간에서</div>
<div align="center">스스럼없이 향유해 보셨으면 합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문화예술은</div>
<div align="center">서로 소통을 하고</div>
<div align="center">함께 향유했을 때에</div>
<div align="center">더욱 다채로워지고</div>
<div align="center">풍요로워집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이름 + URL 링크</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자신의 글을&nbsp;보실 분들께 하실 말씀!</span></div>
<div align="center">을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1110103_rnzavquf.jpg" alt="[SIDance2026] 포스터_A2_날짜티켓 수정.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Tue, 11 Aug 2026 11:01:2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8</guid>
<title><![CDATA[[Opinion] &#039;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39;를 본 에디터의 고민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8</link>
<description><![CDATA[영화를 보고 이런 긴 글을 쓰는 일에 가치가 있을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94309_qzqvutut.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4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nbsp;</p>
<p>&lt;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gt;가 20년 만에 돌아왔다. 언론지 기자 생활을 한 앤디가 패션 매거진 ‘런웨이’ 기획 에디터로 복귀한다니. 악마 같은 편집장 미란다는 돌아온 앤디를 얼마나 반겨줄지, 런웨이 식구들은 어떻게 변했을지 향수에 젖어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영화 속 런웨이가 겪는 어려움을 나 역시 겪고 있기 때문이다.</p>
<p>
   <br />
</p>
<p>20년 차 기자 앤디는 저널리즘 상을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 영광의 순간, 앤디를 포함한 탐사보도 전문지 기자들은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p>
<p>&nbsp;</p>
<p>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앤디에게 런웨이의 기획 에디터가 되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온다. 런웨이가 노동착취 브랜드를 검증하지 않고 홍보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자, 모기업 회장이 신뢰 회복을 위해 앤디를 구원투수로 고용한 것이다.</p>
<p>
   <br />
</p>
<p>독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앤디가 쓴 첫 번째 칼럼은 진정성이 느껴진다며 언론계의 반향을 얻지만, 독자의 관심을 얻지는 못한다. 이후 써내는 칼럼들도 조회수가 처참하다. 앤디의 글은 런웨이의 결에 맞지 않고, 의미는 있으나 흥미롭지는 않은 글이다.</p>
<p>&nbsp;</p>
<p>앤디는 좋은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잡지를 펴내기 위해서는 광고주가 있어야 하고, 광고주는 기사의 질보다 조회수와 좋아요를 바랄 뿐이다. 어떤 기사를 써야 저널리스트로서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p>
<p>
   <br />
</p>
<p>앤디는 IT 기업 회장과의 이혼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받으며 유명해진 ‘사샤’의 단독 인터뷰를 따내며 인정받는다. 하지만 런웨이의 모기업 회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그 아들이 그룹을 물려받으며 또 한 번 구조조정 위기에 놓인다.</p>
<p>
   <br />
</p>
<p>새로 취임한 회장은 런웨이가 지켜온 가치와 명성에 관심이 없다. 그의 눈에 런웨이는 매출 규모가 작은 골칫덩어리고, 팔아치워야 할 과거의 산물일 뿐이다.<br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82112_nussuhod.jpg" alt="악프다 스틸컷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9px;" />
</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젠 아무도 종이 잡지를 안 사.</p>
   <p style="text-align: justify;">디지털, 다운로드, 스트리밍 시대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패션 매거진을 마지막으로 샀던 게 언제였던가. 좋은 기사가 실리는 패션지를 다달이 사 모았고, 마음에 드는 부록이 나올 때는 몇 권 더 사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됐다. 지면 기사보다 유튜브 채널의 패션 영상을 더 자주 접하고 있다.</p>
<p>
   <br />
</p>
<p>문예지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1970년부터 발간된 월간지 ‘샘터’는 한국의 최장수 잡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2026년 1월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을 선언했다. ‘문학사상’도 2024년부터 휴간해, ‘이상문학상’의 운영권마저 매각하기도 했다.</p>
<p>
   <br />
</p>
<p>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한 번의 쓰나미를 겪은 우리는 AI라는 또 한 번의 쓰나미를 맞이했다. 이제 ‘지면’에 글을 쓰는 기자와 에디터들은 SNS 카드 뉴스와 유튜브 영상뿐 아니라 AI로 쓴 글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p>
<p>
   <br />
</p>
<p>런웨이를 인수하려는 IT 기업 회장을 찾아간 미란다는 패션에 대한 견해를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에는 어떠한 애정도 방향성도 없었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저 같은 사람도 따라가기 벅찬걸요. 전통은 뭐.. 아마도 빠른 시일 내에 모델도 현장 무대도 필요 없게 될 거예요. 모델도 디자이너도 다 AI로 하겠죠.”</p>
   <p>&nbsp;</p>
   <p>“그렇게 되더라도 어떤 건 남겠죠.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향한 헌신이라든가. 인간이 이뤄낸 위대한 성취라든가.”</p>
   <p>&nbsp;</p>
   <p>“미래는 우릴 향해 돌진하고 있어요. 폼페이를 향해 돌진한 용암처럼.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게 우리가 할 일이죠. 언젠가 인류가 집어삼켜지더라도요. 그게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르죠.”</p>
   <p>&nbsp;</p>
   </blockquote>
<p>&nbsp;</p>
<p>미란다는 그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다.</p>
<p>
   <br />
</p>
<p>런웨이는 그 가치를 알아주는 어느 돈 많은 독자(IT 기업 회장과 이혼한 샤샤)가 그룹을 인수하면서 구조조정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런웨이를 사서 읽지 않고, 인스타 피드에 뜬 사진과 칼럼을 휙휙 넘겨보기만 할 것이다.</p>
<p>
   <br />
</p>
<p>영화는 이 거대한 흐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미란다는 런웨이가 얻은 행운을 ‘가라앉는 타이타닉’ 옆에 하나 남은 판자에 매달린 것이라고 비유했다. 미란다와 앤디는 침몰해 가는 패션 매거진 업계에서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발버둥 칠 것이다. 지금의 일을 사랑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80812_mlectqnc.jpg" alt="악프다 스틸컷.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
   <b>영화를 보고 이런 긴 글을 쓰는 일에 가치가 있을까.</b>
</p>
<p>
   <br />
</p>
<p>나 역시도 영화가 재밌는지 감상이 궁금할 땐 영상부터 찾아본다. 단군, 진돌, 허간민(허키 간지 김민경) 같은 영화를 비평하는 게 업이 아닌 사람들의 반응이 공감 가고 더 재밌다. 영화의 작품성을 진지하게 평하고 오랜 세월 아카이빙한 정보를 쏟아내는 이동진 평론가의 비평도 글이 아닌 영상으로 접한다.</p>
<p>
   <br />
</p>
<p>지면은 예전의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긴 글을 읽기보다 사진과 영상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책을 사는 사람도 줄었고, 기사를 읽는 사람도 줄었다.</p>
<p>
   <br />
</p>
<p>그럼에도 여전히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이 2.4권이라고 하지만, 도서전의 입장권이 매진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도 긴 글을 읽고 있을까. 어떤 글이 독자에게 의미 있을까.</p>
<p>&nbsp;</p>
<p>긴 글을 쓰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 좋은 것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며 좋은 걸 좋다고 쓰고 싶다. 영화 속 런웨이를 지켜준 돈 많은 독자는 아니어도, 응원의 글을 쓰는 독자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p>
<p>&nbsp;</p>
<p>이 영화는 2006년의 추억을 잡지가 소멸하고 있는 2026년으로 불러와, 사라져 가는 것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했기에 좋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81017_zwbswwbp.jpg" alt="아트인사이트_에디터_윤선주.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윤선주]]></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8:12:2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6</guid>
<title><![CDATA[[Opinion] 적절한 온도로 살아가는 일 [사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6</link>
<description><![CDATA[한밤중에도 살고 싶다는 마음은 차오르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justify; ">에어컨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 한여름이 되기 몇 달 전부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처음에는 몇 방울이었다. 바닥에 수건을 깔아 두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러다 물이 제법 규칙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건은 금세 축축해졌고, 나는 그것을 빨아 다시 깔았다. 에어컨을 끄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바깥은 매년 갱신되는 폭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수리를 불러야 했다. 그런데 돈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 방에 누군가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바닥에는 물건이 널려 있었고 빨랫감이 쌓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그 광경을 본다고 생각하면 에어컨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보다 그쪽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얼마간 물이 떨어지고 먼지가 쌓인 에어컨과 함께 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이스팩을 목 뒤에 대도 금방 터지고, 나는 결국 며칠 밤을 지새운 뒤에야 에어컨 청소와 수리를 예약했다. 기사님이 오시기 전날 밤 나는 거의 울면서 방을 치웠다. 바닥에 널린 것을 주워 담고, 빨랫감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화장실까지 닦았다. 대체 에어컨 하나 고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일이 필요한가 생각하면서. 그리고 난 대체 그동안 뭐를 방치해 온 건가 자책하면서.</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다음 날, 에어컨은 생각보다 쉽게 고쳐졌다. 더 이상 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리모컨으로 온도를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에 맞췄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 이불을 걷어찼다가 다시 끌어당길 필요가 없는 온도.</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뒤척이지 않고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공기가 적당히 서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감각은 정말이지, 만족스러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살면서 자신만의 ‘적절함’을 알아내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적절한 에어컨 온도 하나를 찾는 데에도 몇 번씩 리모컨을 눌러야 한다. 사람 사이에서는 더 어렵다. 얼마나 말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지, 언제 웃고 언제 불편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가까워져도 되는지, 어느 순간 물러나야 하는지.</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나는 오랫동안 그 정도를 잘 몰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누군가를 사랑했던 나의 마음이 적절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두질당했다.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마음에 균열을 내고,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의 데이터가 쌓였다. 어떤 말을 참으면 오래 마음에 남는지. 누구에게 어디까지 마음을 내어주어야 내가 소진되지 않는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이고, 어디에서부터는 어렵다고 말해야 하는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회사에서도 비슷했다. 적절한 정도의 사회생활을 하고, 적절하게 일하고, 적절한 농담을 한다. 사람을 믿되 나 자신까지 내어주지는 않는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면서도 집에 돌아올 힘은 남겨 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걸 이제야 알게 된 내가 바보 같아서, 성장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끄럽다. 다만 이제는 나를 보존하면서도 성장할 수 있고, 오늘의 나뿐 아니라 내일의 나까지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을 사람에게 붙이는 것이 조금 우습지만, 요즘 나는 나 자신의 지속 가능성을 꽤 진지하게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물론 실패는 반복된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때로는 적절하지 못하게 술을 마시거나 잘못을 저지른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을, 그것도 회사에서 흘린다. 그러다가 다음 날에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전화를 받고, 적절하게 친절하고, 적절하게 타인에게 관심을 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렇게 다시 나에 대한 데이터를 하나 쌓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상하게도 요즘의 나는 예전만큼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가질 수 있을까 오래 고민했던 사랑에 대해서도 더는 꿈꾸지 않는다. 쓸데없이 무엇인가에 동하는 마음을 가지지도 않고, 그냥 할 일을 한다. 출근하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예의를 차린다. 때로는 바보같이 웃는다. 해야 할 말을 하고, 일을 끝낸 뒤에는 집으로 돌아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삶이 심심해진 것일까? 오히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동안 인생의 다채로움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것 아닌 농담에 한참 웃는 일, 누군가와 밥을 맛있게 먹는 일, 시원한 방에 누워 있는 일. 구겨진 빨랫감을 힘껏 털어 널었을 때 반듯하게 펴지는 수건을 바라보는 일.</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런 것들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얼음이 크리스털처럼 부딪히는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타 주던 당신이 더 이상 없는데도 그렇다. 그 옛날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했던 ‘번듯하게 잘 사는 삶’과도 여전히 거리가 멀다. 가끔은 엉망이고, 종종 불안하고, 내 주장을 하기 전에 몇 번이고 할 말을 정리하고, 여전히 청소를 미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어, 내가 지금 행복한가?’라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 모든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불행이 모두 사라져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행복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엉망인 부분을 그대로 가진 채로도 동시에 행복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래서 요즘 나는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 마음이 욕심처럼 은근하게 차오르는 순간이 있다. 한밤중 냉장고 앞에서, 찌그러진 생수통째로 물을 마시던 중에도.</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72702_suatgatt.jpg" alt="KakaoTalk_20260810_17221847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666666;">(꽃팔찌를 만들어 누군가의 손목에 채워주었던 날.)</span></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곽한별]]></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7:28:5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9</guid>
<title><![CDATA[[Opinion] 스토브처럼, 평범한 인생의 유일한 관객이 되어,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039;해변의 스토브&#039; [만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9</link>
<description><![CDATA[오시로 고가니의 단편집 를 읽고 어긋난 우리가 기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법을 찾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justify; ">이 만화책은 〈해변의 스토브〉라는 단편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스미오는 애인인 앳짱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일 년이 지난 앳짱의 생일에 두 사람을 헤어진다. 집에 돌아와 케이크를 보자마자 앳짱을 울면서 스미오가 말이 부족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고 스미오도 하나여서 두 사람을 합해 둘이나 그 이상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둘이 있으면 너는 제로라서 내가 점점 깎여 나가.’ 앳짱은 이별을 고하고 집을 나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렇게 평범한 연애 스토리를 전부 지켜보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스미오의 ‘스토브’다. 추위를 잘 타고 울보인 스미오가 자취 시절에 샀던 난로다. 움직이지 못하는 스토브는 줄곧 스미오의 곁에서 그를 지켜봤다. 앳짱과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자주 울던 스미오가 자주 웃는 모습도, 앳짱이 결국 돌아오지 않아서 식음을 전폐한 모습도. 걱정이 된 스토브는 결국 스미오에게 말을 건다. “바다에 가자.” 스미오는 스토브를 안고 바다로 간다. 앳짱에게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긴 채. 늘 바다에 가고 싶어했던 앳짱을 떠올리며 스미오는 바다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하고 자기를 자책한다. 그런 스미오를 보며 스토브는 이렇게 생각한다. 앳짱도 스미오를 좋아했던 순간이 반드시 있었다고. 스토브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몇 번이라도 떠올려줄게.’</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 만화책은 앞으로 나올 만화 속 이야기들을 스토브의 시선으로 살필 것이다. 인물들은 모두 평범한 일상에서 어떤 불일치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 기대, 반응과 어긋난다. 그런 자기가 그래도 괜찮은 걸까? 방황한다. 만화는 그들이 방황에서 마주하면서 기억을 꺼내게 한다.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분명히 안다고 생각하던 기억에서 새로운 마음을 발견한다. 그 순간이 기쁨일지, 슬픔일지는 몰라도, 그 순간은 인물들에게 ‘몇 번이라도 떠올릴’ 순간이 된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은 스토브가 될 것이다. 평범한 인물들의 인생에서 어떠한 순간을 볼 것이다. 기꺼이 그들의 관객이 되어보자.</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1. 미워하는 방법이 낯선 괴물 - 설녀의 여름</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눈을 다스리는 요괴인 설녀를 조심해라. 설녀가 당신을 얼려 죽일 수 있다. 그런데 트럭 운전사인 주인공의 앞에 설녀가 나타난다. 설녀는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다. (이건 나의 생각이다) 설녀는 대뜸 가족이 있느냐고 묻더니 트럭에 올라탄다. ‘유키코’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설녀는 오늘 이중에서 누군가를 골라 얼려 죽이려고 한다고 말한다. 왜 얼려 죽이냐는 질문에 유키코는 이렇게 대답한다. 설녀 종족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되었고 인간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면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내려와 잊을 수 없게 이렇게 죽인다고. 올해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러 온 유키코. 그러나 유키코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말한다. 나는 사실 죽이고 싶지 않다고. 인간이 싫지 않다고. 유키코의 고백을 들은 주인공은 유키코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컵라면을 차갑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영화도 함께 본다. 설녀 유키코는 이제 궁금해진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여름은 어떤 느낌일까. 설녀인 자기가 녹아서 아무 생각도 못 하는 계절이자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 주지 않아서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은 계절이 궁금하다. 주인공은 유키코에게 여름을 보여주기로 한다.</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32513_yldpsegc.png" alt="해변의스토브_5.png" style="width: 700px; height: 705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유키코는 설녀 종족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 규칙이란 유키코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잊히면 사라져버리는 존재이기에,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겁을 줘야 한다. 하지만 유키코는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름이란, 내가 살던 공간과 방식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무서운 존재로, 겁을 줘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했던 유키코의 마음의 저편에는 자기가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얼려 죽이는 종족이니 당연하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어쩌면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존재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유키코는 주인공을 따라서 한여름의 불꽃놀이 축제에 참여한다. 녹을 위기를 간신히 넘기면서 불꽃놀이 축제에 온 유키코. 기모노도 입고 사람들도 지켜보고 시원한 빙수도 먹는 그 순간, 유키코의 기쁨 때문에 한여름에 눈이 내린다. 유키코는 사람들이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눈을 보면서 즐겁게 웃는다. 그렇게 마주한 불꽃놀이. 유키코는 설녀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태어났을 때부터 무서운 존재로, 겁을 줘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했던 유키코의 마음 저편에는 자기가 평생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리라. 유키코가 처음에 가졌던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그들에게 겁을 주지 않고 싶다는 마음인 동시에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을 따라 나선 유키코에게 사람이 되거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유키코는 자기가 사랑받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어쩌면 미움받을 존재라는 생각이 본인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던 건 아닐까. 유키코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자기를 다시 바라보고 다시 정의내린다.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정의 말이다. 불꽃놀이가 터지는 그 순간, 유키코의 눈물을 본 우리도 주인공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 불꽃놀이를, 유키코의 여름을 잊지 못하겠다고.</p>
<p>&nbsp;</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left;"><b><span style="font-size: 18px;">2. 몸을 독점하고 싶은 임산부 : 눈을 껴안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임신을 한 와카바는 폭설로 인해서 모든 열차가 중단되었다. 남편은 ‘홀몸’이 아닌 만큼 조심하라고 한다. 와카바는 24시간 카페에서 빈방을 잡아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카페에는 남자만 있고 어쩐지 묘한 불안감이 들던 순간, 아주 멋진 ‘고코’라는 여자가 그 안으로 들어온다. 와카바의 옆자리에 여자가 앉자마자, 와카바는 자기도 모르게 멋지다고 말해버린다. 24시 카페는 청소로 인해서 임시 폐점을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게 된 와카바. 목욕탕의 위치를 묻는 고코에게 와카바는 함께 가도 되냐고 묻는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서 목욕탕으로 향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목욕탕에 간 와카바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속내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와카바는 임신이 달갑지 않다. 어쩐지 마음속의 눈덩이가 점점 커지는 기분이다. 임신 소식을 모르는 엄마는 철분을 챙겨 먹어야 임신이 잘 된다고 영양제를 보냈다. 임신 소식을 알게 된 남편은 고맙다면서 ‘어머니’를 상징하는 카네이션을 선물한다. 홀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걱정은 덤이다. 와카바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사람들이 당연한 얼굴로 내 몸에 간섭해왔고 이런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이게 너무 싫다고 말한다. 여자로서 ‘일반적’인 상황인 와카바는 자기가 일반적인 반응을 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분명 기뻐야 할 상황이고 모두가 기다리고 기대하던 상황인데도 자기는 기쁘지가 않다. 와카바는 정확히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center; "><i>나는 내 몸을 독점하고 싶어요. (…)</i></p>
<p style="text-align: center; "><i>아이를 낳으면 내 몸이 아이 것이 되어서 두 번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i></p>
<p><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런 와카바에게 고코는 자기의 기억을 들려준다. 자기가 치한에게 끊임없이 노출되어왔던 일을 말하면서 거리를 다닐 때면 미사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고코는 처음으로 목욕탕에 갔을 때 “간섭하지도, 간섭당하지도 않고 유유자적하고 있어서…” 이곳이 “해방구”라고 느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32552_uvrxmmlt.png" alt="해변의스토브_3.png" style="width: 700px; height: 592px;"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만화가 두 사람을 목욕탕에 데려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통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이든 가장 먼저 몸으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들어온 간섭들은 여러 가지다. 뚱뚱하다고, 날씬하다고, 건강하지 않아 보인다고, 건강해 보인다고 슬쩍슬쩍 건네오는 압력들은 우리의 일상이다. 몸은 늘 시선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목욕탕은 어떠한가. 내 몸을 구석구석 씻으러 왔을 뿐이다. 그곳에서 제일의 관심사는 내 몸이다. 그뿐일까, 그곳에서야말로 미디어에서 만들어진 대상화된 몸이 아닌, 진짜 몸을 알 수 있다. 몸을 드러내놓고 다니지만, 몸이 어떻든 상관없는 곳이다.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시선으로 온전히 몸을 볼 수 있는 곳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서로의 기억을 나눈 와카바와 고코는 목욕탕에서 나오고 설원을 달린다. 그리고 차가운 눈 위에 뛰어든다. 자기의 몸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을 꺼내놓은 와카바는 자기의 몸을 시리도록 차갑게 감각하면서 내 몸이 내 것이라고 확인한다. 이제 몸은 멀어지지 않는다. 몸은 계속 내 안에 있다. 이 순간을 기억하는 한.</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3. 투명인간이 된 남편이 조금 달가운 아내 :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한순간 사고로 인해서 자기의 남편이 투명인간이 되었다. 몇 주간 입원했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와 남편은 일상을 다시 살아간다. 여자 목욕탕에 가고 싶지 않으냐는 짓궂은 아내의 질문에 남들에게 상처 주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진지한 대답. 아내는 이런 면 때문에 남편을 좋아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아내는 남편이 일하며 집중하다가 자기의 말을 못 들었을 때, 남편의 표정을 떠올려보다가 도망치듯 친구를 만나러 간다.</p>
<p><br /></p>
<p>남편이 투명인간으로 변해서 걱정하는 친구에게 아내는 놀랄 만큼 예전과 똑같다고 말한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사실 오히려 좋은 부분도 있다고. 일이 바쁘면 미간을 찌푸리거나 일을 꽉 다문 채 밥을 먹을 때, 이런 표정이 싫다고 십 년 넘게 줄곧 생각해왔다고. 자기가 사랑하는 건 그 사람 자체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사랑하는 거였던 게 아니었을까.</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 "><i>그 사람 얼굴이 안 보여서 마음이 좀 편하기도 해.</i></p>
<p><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렇게 아내가 친구와 대화하는 사이, 남편은 눈이 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옷을 전부 벗는다. 그러고는 몰래 바깥으로 나간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남편을 찾는다. 남편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때 구석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로 겨우 찾은 남편의 몸. 아내는 남편의 몸이 차갑다는 걸 알고 어서 씻자고 한다. 남편은 울면서 말한다. 나를 발견해 주어 고맙다고 말이다. 목욕탕에 겨우 남편을 들여보내고 아내는 생각한다. 내가 없는 사이 남편이 잠들었거나 정신을 잃었더라면 발견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은 아내를 주저앉게 만든다. 그때 남편이 비누를 달라면서 목욕탕의 문이 열리고 샤워기의 물에 남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내는 그 실루엣에 과거의 기억을 꺼낸다. 자기가 남편의 몸을 예뻐했고 보고 싶어 했던 기억과 언짢은 표정을 지을 때 사랑했던 마음을 말이다. 그렇게 이 사람 자체를 사랑했다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남편의 몸이 투명해지면서 아내는 끊임없이 남편의 몸을 상상한다. 정확히는 과거의 기억에서 남편을 찾아 지금에 대입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남편에게 가졌던 여러 감정을 떠올린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와 그에게서 싫어했던 모습을 말이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린다. 자기가 싫어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생활 방식 같은 건 그대로이기 때문에 아내로서는 투명인간이 되어도 슬플 게 없다. 남편의 몸이 사라진 상황을 감히 상상해 볼 수 없지만, 어쩐지 안타깝고 슬픈 상황에서 아내는 남편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오히려 좋다고 말하는 부분은 분명 어긋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32614_mlcsufai.png" alt="해변의스토브_2.png" style="width: 700px; height: 577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하지만 남편의 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남편의 실루엣이 다시 드러났을 때, 아내는 과거의 기억에서 자기가 놓쳤던 마음을 다시 발견한다. 몸과 생활 방식을 분리해서 그를 사랑하고 아니고 따질 수 없었다는 걸. 그 자체로 존재하는 남편을 사랑한 기억과 마음을 말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가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편은 아무도 자기가 있는 걸 몰라서 신났지만, 맨발로 눈 위를 걷다 보니 감각이 사라져서 정말로 여기에 존재하는지 모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center;"><i>언젠가 너도 나도 내 몸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잊어버리고 내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느끼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될지 몰라.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자꾸 그런 생각만 들어.</i></p>
<p><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제 남편의 몸은 아내의 기억 속에만 있다. 아내는 손으로 남편의 몸을 그려본다. 잊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몸과 남편을 분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모든 사랑에 아내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은 서로 너무너무 큰 무서움을 느낀다. 아내는 남편이 싫은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자꾸만 남편을 기억할 것이다. 남편을 사랑할수록 더 큰 무서움을 느끼면서 자주 기억을 꺼낼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진영]]></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23:28:0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0</guid>
<title><![CDATA[[PRESS] 검정과 회색만 같은 사람, 기쁨보다 슬픔을 닮은 사람 –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 이승원 &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with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0</link>
<description><![CDATA[월요일 전날에는 쇼스타코비치가 필요하다 -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039;이승원 &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with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039; 프리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011613_vnxlizmc.jpg" alt="2026국제음악제_포스터_가로버전.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내게는 물론 기쁜 일이지만서도, 이런 의문을 피할 수 없었다. 왜 쇼스타코비치였을까? 그냥 대놓고 잘 보이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따뜻한 맛의 프로그램을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클로징 콘서트를 ‘All Shostakovich’로 채워두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당신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아시는가? 내 질문은 클래식에 ‘클’도 모르는 사람이나, 작곡가라고는 베토벤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향한다. 내가 당신에게 쇼스타코비치를 소개할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특이한 사람. 요상한 매력이 있는 사람. 일단 색채감은 저리 두고, 무성영화 화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사람. 검정과 회색만 같은 사람. 노래가 이상한 사람. 그런데 그 이상함에 자꾸 끌리게 만드는 사람. 기쁨보다는 슬픔을 잘 묘사하는 사람. 기우뚱! 좌충우돌. 요리조리. 빠르게, 그리고 외롭게. 자포자기한 ‘척’할 줄 아는 사람. 진실과 거짓이 한데 뒤엉켜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설명이 왜 그러냐고?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던가. 아니, 이 경우에는 한 번 들어보는 편이 빠르겠다. 그의 곡을 들어보면 내 말의 반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의 곡을 듣고 있으면 이 사람이 인생을 쉽게 살다 간 사람은 아니겠다는 직감이 든다. 기우뚱하고 불친절한 세계를 그려낸 음악 안에는 창작하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 없었을 것 같은 절박함도 남아 있다. 살아보려고 갖은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자신의 음악이 언제나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고, 시대와 정치가 삶과 창작을 뒤흔드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곡을 남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그때의 자신과 먼 미래의 우리를 만나게 해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그를 왜 우리는 계속해서 호명하는가? 그 이유는 일단 조금 미뤄두자.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의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놓일 두 곡 안으로 먼저 들어가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제1번 E♭장조 Op.107</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zwJWZEbSWM?si=veZ8p94jqJN4gH23"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1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누구 버전으로 들어야 가장 흥이 나게 들을 수 있을까? 이곳저곳을 누비다 첼리스트 장한나의 연주에 자리 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뭔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안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괴상하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음악에 반 이상은 미쳐 있어야 이런 시작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이 악장에는 심심치 않게 가득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특유의 ‘쪼’를 느껴보시라. 이 맛에 빠져들면 정형화된 곡 안에서 규칙적임을 고집하는 순간들에 도리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날 첼리스트에게서 어떤 캐릭터를 발견해낼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2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앞뒤를 다 잘라야 한다. 그러니까 앞선 악장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잠시 잘라내고, 공연이 끝난 뒤 다시 이어 생각해야 할 일들에도 쉼표를 주자. 그러고는 첼로가 무게감을 줄이고 목소리를 낮춘 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가만 듣다 보면 소리가 내 말꼬리를 붙잡을 것이다. 고집은 세 보이지 않는데 손을 놓지 않는 걸 보면 쉬이 떠날 수 없게 만들려나 보다. 사념이 자리할 시간. 염려가 몸집을 키우는 때. 울컥이는 마음이 조금은 진정된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 끊기지 못하는 꿈. 외로운 줄 모르는 학의 몽상.</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3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첼로에게 시간이 주어졌다. 검은 종이 위에 하얀 음표를 하나둘 채워 넣으며, 까맣기만 한 채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버려져 있던 곳을 채우기 시작한다. 어디서 시작할지, 무슨 그림을 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싸늘한 공기 속 먼지 한 톨조차 떠다니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와 함께 악장 끝까지 달려보면 알 수 있겠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4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오케스트라가 첼로의 곁을 치근덕거리고, 장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길을 이끄는 자인가. 사실은 도망치는 중인 걸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길을 헤매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굴다가도 결국 어딘가를 향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앞으로 가고 있는 건지, 어디선가 벗어나고 있는 건지 좀처럼 알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도대체 이게 이별을 위함인가? 그냥 한 번 몰아쳐보기 위해 모여든 것인가? 그들의 항해에 이유를 붙일지 말지, 이날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d단조 Op.47</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g0M4LzEITQ?si=9_Q7xky2pj9utnOC"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1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일단 밝은 분위기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축제의 마지막에 이래도 되나 싶겠지만, 쇼스타코비치 탄생 120주년도 기념하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들뜬 마음도 이쯤에서 한 번 가라앉혀보면 좋을 테니, 현악기가 비튼 마음을 노래하는 구간에 나름의 허밍을 곁들여보면 어떨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오묘하게 스산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수상한 기운이 가득하다. 다들 은근히 ‘경고’를 보내는 것만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하프가 함께할 때는 잠시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현과 활 사이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두세 겹의 시원한 실선 같은 소리도 지나간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려는 순간, 바순이 그 결심을 깨트리고 플루트가 가련한 위로를 더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웃는 얼굴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웃음이 따뜻한 분위기 안에서 건네지는 것은 아니다. 고요히 덜컹이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무언가를 계속 고조시키기보다 오히려 손 한 뼘 아래쯤 떨어뜨려 놓는다. 다가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런데 어느 순간 타악기들이 행진을 시작한다. 온갖 북이 앞으로 간다. 전진할 것이다. 이제 보니 사람의 말소리라기보다 신념이 보내는 모스부호를 닮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것이 합류의 신호인지, 멀리 떨어지라는 언질인지는 마지막 악장까지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2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도입부를 살펴보니 일단 격전지로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들어갈 땐 비장하더니 막상 문을 열고 그 안을 살펴보니 밝은 구석도, 씩씩한 면모도 가득하다. 위트와 우아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특히 바이올린과 하프가 먼저 노래하며 그 두 가지를 잊지 않았다고 콕! 짚어줄 것이다. 사교댄스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이 악장에서 약간 스텝을 밟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현악기군이 피치카토를 이어나갈 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나도 모르게 호두 안 까는 인형의 세계관을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여기서 그 딱딱한 호두 껍질을 까먹을 시간 여유는 없다. 일단 안개 속에서 지휘자가 말한 대로 가는 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3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까의 기운 좋음은 어디 가고, 조금 전의 첼로 협주곡 제1번 2악장과도 닮은 애잔함이 눈앞에 가득할 것이다. 클래식 안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새파란 기운은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어내는 자들의 손끝에는, 불어내는 자들의 입가에는 눈물이 흐른 기척이 남아 있는가? 그들은 왜 우리를 자꾸만 홀로 남겨두는가? 쇼스타코비치는 왜 이 흐름 속에 관악기와 고요한 첼로를 내려놓고, 우리까지 함께 가라앉히면서 그 먼 곳까지 동행하게 만드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지휘자의 손바닥 안에서 홀로 혹은 몇이서 노래하는 관악기를 주목하고, 한껏 웅크린 채 잔물결이 되어버린 현악기의 ‘긴 머뭇거림’을 연민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23일의 그들이 ‘풀이 죽어 있는 듯’한 이 악장의 기운을 얼마나 깊게 표현해내고, 기어코 고개를 들어버리는 순간의 ‘개운함’을 어떻게 묘사할지 기대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 악장까지 미리 지나온 지금, 나는 이날 마주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이 그야말로 ‘영화’만 같겠다고 예상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 잿더미에 빛이 박히는 소리가 나겠구나. 잃어버린 마음에 실빗금이 기다랗게 그어지겠구나. 아픈 사람이 많다. 고독한 박동에 눈물짓지도 못하고 사무친 채로 서 있는 사람이 거기 있구나.</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4악장</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이고, 야단났다. 앞뒤 안 가리고 쏟아붓는 때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경쾌한 리듬을 잊지 말라고, 뭐가 되었든 ‘속’의 이야기는 들키지 말라고, 애초에 그럴 틈을 주지 말라고 빠른 속도감으로 좌중의 정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생각이 좌로 가는지 우로 가는지도 모르게 만들 것이다. 지휘자가 바라보는 방향의 모든 악기에게 정열적인 ‘척’ 노래하라 할 것만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적어도 내게는 이곳에 온전한 진심을 담으면 안 되는 것처럼 들렸다. 진심이라는 이름은 달아두되, 본심은 꽁꽁 싸맨 채 공허한 마음을 밀어 올리는 것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있는 마음을 다하고 없는 힘까지 덧댄다고 해도 당분간 행복해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의미심장해 보이도록, 다정해 보이는 면모로 상대를 안심시키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러다 보면 어느 한 구석이라도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곳이 나타난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하프가 노래한 자리, 그다음부터는 어떡할까? 살짝이라도 사람 냄새 나게 해볼까 말까. 여기서 웃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새로운 바람을 데려올 이는 누구인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의 정체는 또 누구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끝까지 정답을 알려주는 이 하나 없이 현악의 짧은 소리들만이 귓가를 메울 것이다. 이게 무엇을 위함인지,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끝에 끝까지 열린 결말로 남겨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러고 보니 처음의 질문을 아직 남겨두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왜 계속해서 호명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연주가의 입장도 아니고, 작곡가의 열렬한 팬도 아닌 내가 그 이유를 굳이 찾아야 한다면 이렇다. 살다 보면, 그가 필요한 순간이 반드시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새카만 노래가 필요한 때가 있다. 삐쭉거리는 선을 오두방정 떨듯 그으며 이곳저곳을 헤집어놓는 사운드가 필요한 순간도 반드시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내가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으려 입을 동그랗게 모아놓고, 팔다리도 움직이지 않은 채 ‘화’와 비슷한 모든 감정을 사그라뜨려놓아야 할 때. 혹은 울분을 삭여야 할 때.&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혹은 그냥, 완전히 지쳐버린 순간에 나 대신 그 마음을 한바탕 풀어헤쳐줄 대리인이 필요할 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냥 내 세상보다 ‘복잡’한 저것이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기만 해도, 이상하게 명치에 뻐근하게 서려 있던 ‘응어리’가 조금 풀어진다. 그를 왜 축제의 가장 마지막에 데려다 놓았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탄생 120주년을 기념한다는 이유도 물론 좋다. 그런데 어쩌면 공연이 끝나고 월요일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해, 그가 한 번쯤 흔들려주는 것이 아닐까. (소근소근)</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011349_ypdhoowy.jpg" alt="2026 국제음악제_종합이미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35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는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IBK기업은행챔버홀, 리사이틀홀에서 열린다. ‘Pack Your Summer with Classics’를 슬로건으로 여섯 날 동안 국내외 연주자와 다양한 실내악 무대를 선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라벨의 음악으로 시작한 올해 음악제는 마지막 날 쇼스타코비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All Shostakovich’ 무대로 여정을 마무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8월 23일, 이승원 &amp;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with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011419_tfzkessm.jpg" alt="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클로징 콘서트.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8월 23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지휘자 이승원과 첼리스트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클로징 콘서트를 장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전반부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제1번 E♭장조 Op.107을, 후반부에는 교향곡 제5번 d단조 Op.47을 연주한다. 2021년 제1회 음악제를 이끌었던 이승원이 다시 지휘봉을 잡아, 쇼스타코비치의 두 작품으로 올해 국제음악제의 마지막을 함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프로그램]</b>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제1번 E♭장조 Op.107</p>
<p style="text-align: center;">D. Shostakovich, Cello Concerto No.1 in E♭ Major, Op.107</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Intermission</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d단조 Op.47</p>
<p style="text-align: center;">D. Shostakovich, Symphony No.5 in d minor, Op.47</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장유진]]></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01:10:5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4</guid>
<title><![CDATA[[Review] 벌레가 들끓는 가방을 들고 있다면, 연극 &#039;플리백&#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4</link>
<description><![CDATA[괴로운 믿음. 플리백의 가방 저 아래에, 벌레와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
   <b>*</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연극 &lt;플리백&gt;의</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nbsp;</b>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35916_inbuepec.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주연 (7).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0px;" />
</p>
<p>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연극 &lt;플리백(Fleabag)&gt;은 작가이자 배우인 피비 윌러 브리지(Phoebe Waller-Bridge)가 직접 쓰고 연기한 1인극이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하면서 단숨에 화제작이 되었고, 이후 런던 소호, 오프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등에서 공연되었다. 2016년에는 BBC의 시리즈물로 제작되었으며,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2024년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 상영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2026년 한국 프로덕션이 선보이는 라이선스 공연 &lt;플리백&gt;(연출 류주연)이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번 한국 프로덕션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 맞게 무대를 꾸렸다. &lt;플리백&gt;은 연강홀 무대의 가로 너비를 적극 활용하는데, 전체적으로는 플리백의 집과 기니피그 카페가 중첩되어 있다. 무대 상수에는 플리백의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부’를 추모하는 꽃과 카페 입간판, 카운터, 소파가 함께 놓여 있다. 하수에는 카페의 테이블과 의자, 화분, 변기와 휴지통이 위치한다.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에는 객석을 향해 있는 의자와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41155_engxlzgy.jpg" alt="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6).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연이 시작하면 조명은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를 중심으로 무대 중앙부를 플리백의 면접장으로 구획한다. 플리백은 회사 내 성희롱 사건으로 인해 여자 직원이 전무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간다. 면접 중에 덥다며 웃옷을 들추는 플리백을 보며 면접관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불쾌해하고, 관객 역시 갸웃하며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면접에서 플리백의 일상으로 흐름이 이동하면서, 면접장 양옆으로 플리백의 일상 공간이 펼쳐진다. 이러한 무대 구성은 &lt;플리백&gt;을 이해하는데 주요하다. 플리백의 독백으로만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플리백이 마주한 세계를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플리백’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을 의미한다. 벼룩(flea)이 잔뜩 들어간 가방(bag)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뜻처럼, 그의 인생은 실수의 연속이고 정처 없는 혼란이다.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해서, 이곳저곳으로 탈주하지만 끝내 상실과 죄책감만 안은 채로 원래의 집과 카페로 돌아온다.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는 자신의 대모와 재혼했고, 언니는 처형을 추행하는 형부와 살아간다. 남자 친구는 플리백의 곁을 떠났고, 함께 카페를 차린 동업자 친구는 연인의 배신에 생을 마감했다. 이제는 카페마저도 폐업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만, 끊임없이 남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려 하고, 신체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달라는 전 남자 친구의 제안을 수용한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41708_usrfeyxc.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0대 여성 플리백이 자신의 '매력적인 몸'에 집착하며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한다. 플리백은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타자화하는 인식을 내면화하여, 자신도 타인에게 욕망당하고 그로 인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서 기행을 벌인다. '젊은 여성'이라는 사회적 조건은 그의 자기혐오와 일탈적 행위를 설명할 때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플리백의 가방에 벌레가 들끓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플리백이 사회구조적 문제의 피해자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순간, 많은 것이 납작해진다. &lt;플리백&gt;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함과 개인의 불완전함이 팽팽한 긴장으로 부딪히는 작품이다. 플리백의 외로움과 상실감, 자기혐오는 그 자신에게서 비롯되기도 한다. 페미니즘 강연에서, "여러분은 완벽한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수명 5년을 내놓을 수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 다수의 여성과 달리, 플리백은 그렇다고 답한다. 또한, 친구 '부'와 햄스터 '힐러리'의 죽음에 플리백은 깊게 연관되어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43512_sefcxzbl.jpg" alt="image3.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48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긴장 관계를 표현함에 있어, NTlive로 상영된 2019년 런던 웨스트엔드의 &lt;플리백&gt;은 문제적 인물인 플리백의 이야기에 화각을 맞추었다. 정사각형 작은 무대 위에 의자 하나를 놓고, 배우 한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구성이다. 이야기꾼 한 사람에게만 집중된 무대에서는 그의 말에 따라 많은 것을 상상에 맡길 수 있다. 기니피그 카페, 페미니즘 강연장, 화장실, 집 등의 공간을 상상하고, 배우의 제한된 움직임을 따라간다. 초점은 플리백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에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이번 한국 프로덕션은 플리백의 배경으로 화각이 확장된다. 무대는 구체화되었고, 배우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무대 곳곳을 누빈다. 플리백을 둘러싼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무대는 기본적으로 플리백의 독백을 만드는 세계에 더 주목하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44535_wsylqmpe.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주연 (1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자가 세계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부족함을 안은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 놓인 부족한 한 인간을 조명하는 것에 가깝다. 전자에서는 플리백의 농담과 변명, 자기혐오와 욕망을 따라가며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간다. 반면 후자에서는 플리백의 말과 함께,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을 한눈에 알게 된다. 소품 하나 쓰지 않고 이야기꾼의 이야기로만 끌고 가는 전자에 비해, 후자는 소품들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며 텍스트를 뒷받침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면에서 한국 프로덕션의 선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이러한 선택은 일면 플리백이라는 이야기꾼의 힘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때때로 그의 말보다 무대에, 소품에 주목하게 될 때가 있다. 플리백은 우리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이야기를 수행하는 '무대 위의 인물'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내밀한 고백을 쏟아내는 &lt;플리백&gt;의 1인극 형식에는 다소 힘이 빠진 듯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동시대 한국에 맞게 &lt;플리백&gt;을 '번역'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피비 윌러 브리지의 어릴 적 별명이기도 한 '플리백'은 기본적으로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형식을 취했다면 다른 배우가 원작을 '연기'한다는 인상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성적인 농담이나 플리백의 기행을 바라보는 문화적인 시각 차이도 있기에, 더욱 연극적인 세팅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 프로덕션 공연에서는 '코미디'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은 대사들이 관객과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45410_grvledbm.jpg" alt="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1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변화 덕분에 플리백이 자기 몸과 어떻게 불화하는지, 플리백이라는 인물은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가 직관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너비가 긴 무대 위, 집과 카페, 강연장과 지하철을 활보하는 플리백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떠들지만, 그만큼 외로워 보인다. 타인의 욕망,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 성적인 목적으로만 긍정할 수 있는 신체. 사회구조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플리백 자신의 선택이기도 한 것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이 동선으로, 소품으로, 무대로, 연출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플리백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무대 위에 영상으로 송출하는 장면은 확장된 관객의 시야를 플리백의 내면으로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그 순간은 주변의 모든 세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플리백의 말과 감정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힐러리'가 죽는 연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무대 조명을 바꾸고 음악을 활용하여 플리백의 내면으로 줌 인(zoom in)한 것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작품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면접장 장면 역시, 다른 장면들과 확실히 구분되며 플리백의 변화를 더욱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50441_aiohvpvk.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주연 (8).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이 면접 다시 시작할까요?” 플리백의 이야기를 다 들은 면접관은 그에게 처음부터 면접을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면접관은 회사 내 성추행 사건을 덮어버린 뒤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았고, 플리백 역시 '부'와 '힐러리'의 죽음을 자신의 과오로 여기고 있다. 두 잘못의 무게도, 문제의 인과도 같지 않지만, 플리백이 말하듯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실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면접관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듯하던 플리백은 돌연 그에게 욕설을 날리고 암전. 작품은 거기서 마무리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작품은 주인공이 암전 후 어떤 삶을 살아갈 지 상상하기 어려운데, &lt;플리백&gt;도 그런 작품이다. 기니피그 카페는 문을 닫았고, 형부에게로 돌아간 언니와는 연이 끊겼고, 소중한 친구와 기니피그는 죽었고, 남자친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성추행 사실을 묻은 회사 간부는 버젓이 면접관으로 무게를 잡고 있고, 플리백을 함부로 다뤘던 남자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것이다. 플리백이 한순간에 변하지도 않을 것 같다. 외로움, 죄책감, 상실감, 자기혐오에 빠져 또 다시 기행을 저지르며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52841_zqvxklvb.jpg" alt="플리백_공연사진_김주연 (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만 면접관을 향해 시원하게 욕을 날리는 플리백을 보며 한 가지 이상한 믿음은 생긴다. 가방에 들끓는 벌레 때문에 괴로워할지언정, 그게 벌레가 아니라고 우기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다. 지우개로 지우다가 연필 자국이 남을지언정, 새 종이를 꺼내 와서 깨끗한 척하는 비겁한 삶은 살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내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지워지지 않는 실수를 안고 또다시 살아갈 것 같다는, 괴로운 믿음. 플리백의 가방 저 아래에, 벌레와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나윤]]></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6:39:0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5</guid>
<title><![CDATA[[Opinion] 이타카까지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5</link>
<description><![CDATA[수천 년 전의 신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인간이 여전히 같은 욕망을 품고, 같은 폭력을 반복하고, 같은 후회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999999; text-align: justify;">*</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999999; text-align: justify;">본 글은</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999999; text-align: justify;">영화 &lt;오디세이&gt;에 대한</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
   <span style="color: #999999; text-align: justify;">전반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길을 잃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만 있다면 처음 가는 도시에서도 가장 빠른 귀갓길을 찾을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몇 초 만에 확인할 수 있다. 인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p>
<p>
   <br />
</p>
<p>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거나, 떠날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을 때다. 그런 순간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집이 어디인가’가 아니다. 나는 아직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p>
<p>
   <br />
</p>
<p>약 2,700년 전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2026년에도 유효한 것은 어쩌면 이 질문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서양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귀향담 가운데 하나를 가져와 괴물과 신의 모험담이 아닌, 전쟁을 끝내고도 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바꾼다. 실제로 놀란은 원전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신화적 요소보다 전쟁과 죄책감, 기억과 트라우마를 전면에 내세웠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014007_qmzkdmeg.jpg" alt="common-2-2.jpg" style="width: 700px; height: 1109px;" />
</p>
<p>&nbsp;</p>
<p>
   <br />
</p>
<p>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에게 남은 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이타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그의 귀향에는 다시 10년이 걸린다. 키클롭스와 세이렌, 죽은 자들을 차례로 마주하는 동안 부하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 사이 이타카에서는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오디세우스를 대신해 왕좌와 페넬로페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이 궁전을 점령한다.</p>
<p>
   <br />
</p>
<p>이야기만 놓고 보면 영웅이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가족에게 돌아오는 전형적인 모험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관심은 오디세우스가 ‘어떻게 돌아오는가’보다 ‘왜 돌아오지 못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영화의 시작점인 트로이에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10년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던 도시를 무너뜨린 영웅이다. 그러나 그 유명한 지략을 승리의 상징이 아닌, 오디세우스가 평생 짊어져야 할 일종의 원죄로 뒤집는다.</p>
<p>
   <br />
</p>
<p>그 중심에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제우스의 법’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xenia)’, 즉 낯선 손님을 환대하고 손님 역시 주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이다.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도착하면 타인의 호의에 생존을 맡겨야 했던 시대에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었다. 영화는 이를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라’는 간명한 원칙으로 번역한다.</p>
<p>
   <br />
</p>
<p>그래서 트로이 목마는 단순한 군사 전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선물의 형태를 한 무기를 건네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도시를 파괴했다. 영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동시에 그의 가장 커다란 잘못이 된다.</p>
<p>
   <br />
</p>
<p>이는 놀란의 전작 &lt;오펜하이머&gt;를 떠올리게 한다. 오펜하이머 역시 자신의 지성을 이용해 불가능했던 무기를 만들어냈고, 자신이 만든 것이 세상에 어떤 가능성을 열어버렸는지를 뒤늦게 바라본다. 놀란 역시 두 인물의 연결을 의식했다고 밝혔다. “할 수 있다고 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질문이 &lt;오펜하이머&gt;에서 &lt;오디세이&gt;로 이어진 셈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펜하이머에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남았다면, 오디세우스에게는 아직 돌아가야 할 집이 남아 있다. 그래서 &lt;오디세이&gt;에서 바다는 오디세우스와 집 사이에 놓인 죄책감의 크기에 가깝다.</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이타카, 닿지 않는 고향</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nbsp;</p>
<p>그래서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욕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신들의 방해가 있었고,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그 역시 자꾸만 귀향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면서 호기심 때문에 위험에 빠지며,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희생한다.</p>
<p>
   <br />
</p>
<p>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7년 동안 기억을 잃고 머물렀던 곳에서다. 칼립소가 준 로터스 꽃은 가족을 잊고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만든다. 그곳에서 행복하다고 말한 그는 어쩌면 그때만큼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잃었던 동안 그는 트로이를 무너뜨린 영웅도, 수많은 죽음을 짊어진 사람도 아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014033_mgqkzail.jpg" alt="common-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8px;" />
</p>
<p>&nbsp;</p>
<p>
   <br />
</p>
<p>그가 정말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어쩌면 이타카가 아니라 ‘전쟁 이전의 이타카’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트로이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며, 어린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가 자신을 기다리던 시절의 집.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도 도착할 수 없는 곳이다. 아들은 이미 아버지 없이 성장했고, 아내에게도 오디세우스가 알지 못하는 20년이 생겼다. 무엇보다 오디세우스 자신이 더 이상 그 집을 떠났던 사람이 아니다.</p>
<p>
   <br />
</p>
<p>그런 의미에서 귀향은 오디세우스의 가장 간절한 욕망이면서 동시에 그 욕망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멀리 있는 동안에는 믿을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그러나 도착하는 순간에는 확인해야 한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내가 떠났던 자리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내가 다시 예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p>
<p>
   <br />
</p>
<p>결국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또다시 사람을 죽인다. 이 장면 때문에 긴 항해가 더욱 기묘하게 느껴졌다. 구혼자들의 죽음은 트로이의 죽음과 같은 죄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 오디세우스의 주변에서는 좀처럼 죽음이 끝나지 않는다. 귀향길에서 부하들이 죽었으며,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살육을 벌인다. 그렇게 오랫동안 트로이에서 멀어졌지만, 그가 도착한 곳에서는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비슷한 궤도를 걷는다.</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인간을 닮은 신, 신을 닮은 인간</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영화가 신들을 그리는 방법은 위와 같은 해석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영화는 신들의 모습 대신 자연을 통해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인간 앞에 나타나 논쟁하고 편을 들며 운명에 직접 개입하지만, 영화에서는 대부분 모습을 감춘다. 제우스는 천둥으로, 포세이돈은 거대한 파도와 바람으로 존재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현상 자체가 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출 방법이다.</p>
<p>
   <br />
</p>
<p>또한, 거대한 세계에서 가장 집요하게 반복되는 것이 결국 한 인간의 기억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호메로스의 원전처럼 현재에서 과거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기억은 곧 이미지가 되고, 이미 보았던 트로이의 장면들은 새로운 정보와 함께 반복된다. 이것은 &lt;메멘토&gt;에서 &lt;오펜하이머&gt;까지 놀란이 즐겨온 구조이면서 동시에, 『오디세이아』 자체가 가진 구조이기도 하다. 작품이 서양 문학의 가장 오래된 토대 가운데 하나이면서 이미 대담한 비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p>
<p>
   <br />
</p>
<p>이 반복에서 아테나의 정체 역시 다르게 보인다. 오디세우스 곁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아테나는 트로이가 함락되던 밤 죽임을 당한 신전의 여사제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말 신의 현현인지, 죄책감에 시달리는 오디세우스가 만들어낸 환영인지는 확정하지 않는다. 감독 역시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거부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진실이든 오디세우스가 그녀에게서 자신이 초래한 파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영화에서 신의 심판은 어쩌면 인간의 죄책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014058_qyzmsiwf.jpg" alt="common-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
   <br />
</p>
<p>이 지점에서 신이 실제로 인간을 벌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어도 타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규칙은 남는다. 신의 존재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신을 믿었던 인간들이 어떤 규칙을 통해 서로를 인간으로 대했는가이다.</p>
<p>
   <br />
</p>
<p>그렇게 생각하자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이상할 만큼 흐릿해진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보다 강하지만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질투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욕망하고, 편애하고 복수한다. 인간들은 그런 신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자연이 자신을 벌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신화 속 존재가 어찌도 인간을 닮았는지 반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질문의 방향이 반대인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닮은 신을 상상했을 가능성 말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직도 이해되는 것은 아닐까.</p>
<p>
   <br />
</p>
<p>인간은 수천 년 동안 많은 것을 바꾸었다. 배를 타고 몇 년씩 바다를 건너던 시대에서 비행기로 대륙을 오가는 시대가 되었고, 신의 분노라고 여겼던 천둥과 폭풍의 원리도 안다. 그러나 세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며, 인간은 욕망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뒤늦게 후회한다. 그럼에도 다시 욕망한다.</p>
<p>
   <br />
</p>
<p>심지어 한 사람 안에서도 같은 일은 반복된다. 돌아가고 싶으면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고, 가지고 싶으면서 가진 뒤를 걱정하고, 잊고 싶으면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오디세우스가 2천 년도 더 된 신화 속 영웅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낯설지 않은 이유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nbsp;</p>
<p>그래서 &lt;오디세이&gt;의 거대한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단순히 이타카까지 남은 거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공간처럼 보인다. 아무리 멀리 항해해도 끝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p>
<p>
   <br />
</p>
<p>영화의 마지막,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페넬로페에게 돌아오지만 왕좌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신 페넬로페와 다시 바다로 향하고, 텔레마코스에게 다음 시대를 맡긴다. 원전에는 없는 선택이다. 그는 이타카에는 돌아왔지만 자신이 떠났던 삶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과거를 복원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지른 것과 잃어버린 것을 기억한 채 다음으로 나아가는 일뿐이다.</p>
<p>
   <br />
</p>
<p>신화 속 인간 역시 그렇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은 여전히 욕망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다시 욕망한다. 거를 되돌릴 수도, 이미 내린 선택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한 채 다음으로 나아갈 뿐이다.</p>
<p>
   <br />
</p>
<p>어쩌면 그래서 2,700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낯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신화 속 존재가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이 자신을 닮은 신과 영웅을 만들어냈으므로.</p>
<p>
   <br />
</p>
<p>시대는 앞으로 나아가도, 그 안의 인간까지 언제나 멀리 가는 것은 아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031115_mvrpkcoq.jpg" alt="컬쳐리스트 오수민 .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오수민]]></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03:16:1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7</guid>
<title><![CDATA[[Review] 상자 속의 양 - 보이지 않으니까, 상상하는 만큼 존재하는 것.]]></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7</link>
<description><![CDATA[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을 각본집으로 만나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12849_ypertnnn.jpg" alt="상자2.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7px;"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지난 6월 10일 개봉한 영화 &lt;상자 속의 양&gt;이 각본집으로 출간되었다. 휴머노이드에 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의 철학적 고뇌가 담긴 작품으로, 컬러 화보와 콘티, 캐릭터 노트, 제작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은 큰 사건이나 서스펜스적인 요소 없이도,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거리감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휴머노이드와의 동거'라는 소재는 여타 SF 장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공상과학 장르로서의 상상력은 진부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부부의 애도에 중점을 둔다면 신선한 작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동화 &lt;어린 왕자&gt;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 &lt;상자 속의 양&gt;. 동화 속 어린 왕자는 파일럿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말한다. 파일럿이 어떤 양을 그려줘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자, 파일럿은 귀찮은 마음에 상자를 그려버린다. 그것은 단순한 상자가 아닌, 상자 속에 담긴 양의 그림이었다.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임을 일깨우는 장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오토네와 켄스케는 아들 '카케루'를 사고로 잃는다. 실의에 빠진 오토네는 남편 켄스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복제한 휴머노이드를 들여온다. 생김새와 말투가 죽은 아들과 똑같은 휴머노이드 카케루. 아직은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상이 아니기에, 주변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오토네는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케루를 살아있는 아이처럼 대한다. 그렇지만 카케루는 역시 로봇이었기에 사람과 다른 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대신에 상자에 들어가 충전한다. 파란색 불빛이 반짝인다. 그 모습이 마치 상자 속에 담긴 양 같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오토네:&nbsp; 상자보다는 차에 태워서 받는 게 낫겠지?</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br /></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켄스케:&nbsp; 응.... (아직 납득하고 있지는 않다.)</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안에서 카케루의 새 옷이 엄청나게 나온다. 그것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오토네. 아이가 죽은 뒤, 오토네가 혼자서 계속 사고 있었던 것 같 다. 그것을 늘어놓는 오토네. )</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br /></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오토네:&nbsp; 7세, 8세...9세용 옷은 좀 크겠지?</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켄스케는 아직 동영상을 보고 있다.)</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nbsp;</i></p>
<p style="text-align: justify;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맞이하기 전, 옷을 정리하는 오토네의 모습이다. 그녀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옷을 계속해서 사고 있었다.&nbsp;슬픔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일상 속 한 장면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인상적이었다. 오토네가 왜 아들을 복제할 수밖에 없었는지, 선택의 의도를 이해시키는 장면으로 다가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평화로운 어느 날, 오토네의 엄마 노부요와 여동생 아리스가 갑자기 찾아온다. 예고없는 방문에 떨떠름해하는 오토네를 두고, 노부요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를 뒤적이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카케루와 마주친다. 죽은 줄 알았던 손주가 버젓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곤 깜짝 놀라는 노부요. 이내 손주의 환생이 아닌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알고 오토네를 나무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i><b>노부요:&nbsp; 뭔 생각으로 저런 걸....</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nbsp;</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오토네:&nbsp; (평온한 척을 하며) 지금 전국에 3천 명이나 있대.</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br /></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노부요:&nbsp; 아직 젊은데 한 명 더 만들면 되지.</b></i></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노부요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데려오냐며 카케루를 물건 취급한다. 전국에 휴머노이드가 3천 명이 있든 말든, 자기 딸이 휴머노이드를 데리고 사는 모습이 마치 애물단지를 껴안은 것만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토네는 아직 젊으니, 아이를 또 낳으면 된다는 엄마의 말이 영 불편하기만 하다. 밖에서 아리스의 아이들과 물놀이하는 카케루. 오토네는 카케루에게 젖으면 안 된다고 얘기한다. 그 말이 마치 '고장 나면 안 된다'는 경고처럼 읽혔다. 불편한 기류가 이어진다. 오토네는 어릴 적엔 자신을 버려놓고 이제 와서 집을 찾아오는 노부요가 원망스럽고, 용서할 수 없다. 몸이 힘드니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말하는 노부요를 두고 오토네가 난감해하자, 카케루가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i><b>카케루:&nbsp; 엄마는 당신이 자고 가는 걸 원하지 않아요.</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b></i></p>
<p style="text-align: justify; "><i><b>노부요:&nbsp; 인간은 생각하는 걸 다 말하지 않아.</b></i></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카케루는 7살 아이라기엔 어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마치 아이의 외양을 가진 어른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차이점이 눈에 띈다. 오토네는 자신의 속내를 전부 들여다보는 듯한 카케루가 왜인지 찝찝하다. 한편, 켄스케는 카케루를 데리고 아들이 사라졌던 지하철역으로 간다. 그러곤 카케루에게 '범인이 누구였는지 잘 기억해 보라'고 말한다. 어쩌면 죽은 아들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니, 아들이 마지막에 보았던 장면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미약한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이는 모두 켄스케의 헛된 희망이자 욕심일 뿐이었다. 아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아들을 죽인 살인마가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오토네 또한 노부요를 탓하면서, 노부요가 자신의 시간을 뺏은 탓에 카케루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결국 두 사람 다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이용하고 있었다. 카케루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있어도, 카케루를 여전히 죽은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은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카케루는 불안한 두 사람 밑에서 점차 자신만의 자유를 찾고 싶어 한다. 동네의 휴머노이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몸속에 들어있는 GPS 추적기를 제거한다. 나아가 오토네와 켄스케의 품을 벗어나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GPS 추적기로부터 분류되고 자신과 똑같은 휴머노이드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서, 카케루는 신체를 되찾은 기분을 느낀다. 마치 진정한 인간이 된 것만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13205_nzkhfdwn.jpg" alt="책 구절.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4px;"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영혼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까? AI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체성'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AI 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모라벡의 역설'이 앞선 주장을 뒷받침한다. 사람한테는 쉬운 감각, 운동, 지각 능력이 기계가 수행하기엔 어려운 과제이고 추론, 계산은 기계에게는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 모라벡의 역설이다. 우리는 위험한 순간을 육감으로 알아차리기도 하고, 슬플 땐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해소한다. 신체는 살아남기 위한 판단의 과정을 매 순간 반복하고 있다. 음식을 먹지도,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데이터로만 움직이는 휴머노이드를, 과연 사람이라 칭할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카케루는 위치 추적기를 떼어내고, 새로운 가족을 찾아 떠난다.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짓는 건, 더 이상 죽은 아이의 환생이나 그늘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카케루는 자신의 신체적 자유라도 되찾아 자기만의 삶을 설계하고 싶어했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꾸기에 기술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부드럽고 온기가 느껴지는,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를 대체할 수 있는 건 휴머노이드가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12926_rhfaumgp.jpg" alt="상자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86px;" /></p>
<p style="text-align: justify; ">
   <b>&nbsp;</b>
</p>
<p style="text-align: justify; "><b>&nbsp;</b></p>
<p style="text-align: justify; "><b>상자 속에는 무엇이든 들어있다. 보이지 않으니까, 상상하는 만큼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오토네와 켄스케가 그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건 아들 카케루가 죽었다는 사실과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nbsp;</b><b>휴머노이드 카케루와의 만남과 작별은, 애써 눌러두었던 상자의 뚜껑을 여는 행위였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무한으로 재생되는 존재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카케루 또한 상자에서 벗어나면서, 더는 누군가를 위한 존재로 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이유를 상자 속에서만 쫓던 카케루가, 이젠 새로운 가족을 만나 현재를 살아갈 차례이다. 카케루, 자기 자신으로.</b></p>
<p style="text-align: justify; ">
   <b>&nbsp;</b>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13422_csetuuel.jpg" alt="화보.jpg" style="width: 700px; height: 893px;"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나는 &lt;상자 속의 양&gt; 영화를 감상하지 않고 각본집만 읽었다.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서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만 스토리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눈에 직관적으로 들어오는 영상도 좋지만, 나만의 속도로 사유하며 읽을 수 있는 활자가 더욱더 좋은 것 같다. 특히나 &lt;상자 속의 양&gt; 같이 인문학적인 고찰이 필요한 작품일수록 문장으로 만나 천천히 사유하는 매력이 크다. 더구나 외국 영화를 볼 땐 자막을 읽느라 장면의 이미지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조금이라도 철학적이거나 은유적인 작품은 한 번 봐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각본집을 읽는다는 건 장면을 직접 상상하면서 캐릭터를 더욱더 깊이 있게 파고드는 과정 같다. 본 리뷰에서 다루진 못했지만, 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둘러싼 좋은 대사가 많았다.<b> 캐릭터 설정, 작가 노트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바라는 이에게 쉽사리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잔잔한 가족 서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을 기대하는 이들에겐 필독을 권하고 싶다.</b></p>
<p style="text-align: justify; ">
   <b>&nbsp;</b>
</p>
<p style="text-align: justify; ">
   <b>&nbsp;</b>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전주현]]></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21:35:2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5</guid>
<title><![CDATA[[Review] 엉망인 삶을 웃으며 바라보는 법, 연극 &#039;플리백&#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5</link>
<description><![CDATA[좋은 예술은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한다. 이 보여주는 불편한 간극 역시 그런 지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보며 쉽게 웃고, 때로는 누군가의 서툰 모습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타인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 역시 실수하고, 때로는 엉망이 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70732_bvlaqacq.jpg" alt="1. 플리백Fleabag_통합.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9px;" />
</p>
<p>&nbsp;</p>
<p>&nbsp;</p>
<p>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연극 &lt;플리백(Fleabag)&gt;이 한국 무대에 올랐다. 세계 최초 공식 라이선스 공연으로 선보이는 이번 한국 초연은 오는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관객을 만난다.</p>
<p>
   <br />
</p>
<p>&lt;플리백&gt;은 현대인의 고독과 자기파괴적인 욕망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여성 1인극이다. 2013년 초연 당시 에든버러 프린지 신작상과 더 스테이지 베스트 1인 공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고, 이후 런던과 뉴욕 무대를 거쳐 세계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는 2024년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를 통해 소개되며 이미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p>
<p>
   <br />
</p>
<p>&lt;플리백&gt;엔 화려한 무대 장치도, 여러 명의 배우도 없다.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1인 독백극이라는 형식이지만,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그런 걱정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분명 무대 위에는 한 명뿐인데 이상하게도 무대가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감정으로 공간 전체가 가득 찼다.</p>
<p>
   <br />
</p>
<p>그 몰입을 완성하는 데엔 연기자의 힘이 결정적이다. 주연 배우 3인(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은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물과 상황을 오간다. 목소리와 표정, 몸짓의 작은 변화만으로 인물을 구분하고, 때로는 관객을 향해 직접 말을 걸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떤 순간은 19금 스탠드업 코미디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할 정도다. 필자의 관람 당일은 김규남 배우가 연기를 펼쳤다. 때로는 능청스럽고 때로는 뻔뻔하게, 또 어느 순간에는 예상하지 못한 깊이의 감정을 꺼내 보이며 관객을 주인공의 세계관으로 끌어들이는 차력쇼를 선보였는데 그 자체로도 몹시 인상적인 무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lt;플리백&gt;이 흥미로운 것은, 무거운 이야기를 결코 무겁게만 풀어내지 않는 이야기 전개에 있다.</p>
<p>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70749_zmaicgbt.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규남_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nbsp;</p>
<p>&nbsp;</p>
<p>주인공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실수와 충동적인 선택이 반복되고, 가족관계는 삐걱거리며, 마음 한편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공허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낸다. 성적인 농담과 냉소적인 말투,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 이어지면서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p>
<p>
   <br />
</p>
<p>&lt;플리백&gt;의 블랙코미디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웃음과 슬픔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있다. 웃긴 장면 안에 외로움이 있고, 우스꽝스러운 행동 뒤에는 상처가 있다. 관객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의 대상이 단순히 ‘엉망인 한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슬픔을 슬픔의 얼굴로만 보여주는 대신, 그 안에서 웃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웃게 만든 뒤, 그 웃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p>
<p>
   <br />
</p>
<p>우리는 흔히 웃음과 눈물을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우린 가장 힘든 순간에 농담을 하고, 너무 속상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순간도 있다.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조금 비틀어 바라볼 때 비로소 그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lt;플리백&gt;의 웃음은 현실을 가볍게 만드는 웃음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한 웃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 웃음이 오래 남는 이유는 결국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p>
<p>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70802_sfbtyatf.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규남_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nbsp;</p>
<p>&nbsp;</p>
<p>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때로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돌이키고 싶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일을 계속해서 되짚으며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nbsp;</p>
<p>
   <br />
</p>
<p>“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것이 바로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p>
<p>
   <br />
</p>
<p>작품을 보고 난 뒤 유독 오래 마음에 남은 대사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말은 때로 너무 쉽게 소비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매번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실수한 뒤의 죄책감과 그 실수로 인해 달라진 관계를 알고, 때로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알고 있다. 지나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지워진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lt;플리백&gt;이 관객에게 건네는 위로는 그 정도의 것이 아닐까 싶다.</p>
<p>
   <br />
</p>
<p>좋은 예술은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한다. &lt;플리백&gt;이 보여주는 불편한 간극 역시 그런 지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보며 쉽게 웃고, 때로는 누군가의 서툰 모습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타인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 역시 실수하고, 때로는 엉망이 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p>
<p>
   <br />
</p>
<p>꽤나 웃었는데 마음은 묵직했고, 누군가의 엉망인 삶을 들여다봤는데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조금 더 마주하게 됐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 발칙한 1인극을 무대에서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70829_npcusutt.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메인포스터.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70933_kupurwcy.jpg" alt="IMG_9695.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임지우]]></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7:14:4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3</guid>
<title><![CDATA[[Opinion] 약 3000년 전의 이야기는 왜 지금도 우리를 사로잡는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3</link>
<description><![CDATA[영화 가 보여준 전쟁과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 대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34056_vhdsabyl.jpg" alt="2.jpg" style="width: 700px; height: 1109px;" /></p>
<p>&nbsp;</p>
<p>&nbsp;</p>
<p>약 300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p>
<p><br /></p>
<p>어떤 작품이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각본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화려한 영상과 기술을 사용해도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다면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lt;오디세이&gt;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왜 지금까지 사람들의 공감과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p>
<p><br /></p>
<p>&lt;오디세이&gt;가 담고 있는 것은 신과 괴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사랑, 복수, 죄책감, 생존에 대한 본능이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인간이 가진 욕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서양의 오래된 이야기가 동양권에 사는 나에게도 낯설지 않았고, 결국 나 역시 그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영웅의 승리 뒤에는 무엇이 남았을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를 이끈 영웅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단순히 위대한 영웅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p>
<p><br /></p>
<p>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윤리를 짓밟기도 했다. 누구보다 제우스의 법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친절과 보살핌을 원했던 사람이 정작 전쟁에서는 그 법을 어겼다.</p>
<p><br /></p>
<p>특히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렇다. 자기 부하가 처참하게 잡아먹힌 것에 대한 복수였다. 당한 만큼 돌려준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신의 아들이었고, 오디세이의 복수는 포세이돈의 분노를 불러왔다. 그 결과 2년이면 돌아갈 수 있었던 거리를 20년이나 걸려 고향에 도착하게 된다.</p>
<p><br /></p>
<p>자신이 한 행동의 대가를 결국 자신이 치른 셈이다. 전쟁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공격하고 빼앗은 것은 언젠가 또 다른 공격과 복수로 돌아온다. 내가 저지른 일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p>
<p><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세운 성은 영원할 수 있을까</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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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전쟁은 흔히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지키며 승리를 쟁취하는 위대한 역사처럼 기록된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상대 진영에 쳐들어가 불을 지르고,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는 일은 인간의 역사에서 너무나 반복됐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었을까.</p>
<p><br /></p>
<p>전쟁을 결정한 것은 왕과 권력자였지만 그 대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치른다. 특히 여성은 전쟁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강간과 약탈, 살인이 일상화된 전쟁터에서 여성의 목숨은 너무나 쉽게 짓밟힌다. 무인도에서 사람들에게 마법이 걸린 음식을 먹이고 남성들을 짐승으로 변하게 만든 여성 키르케의 이야기도 다르게 보였다.</p>
<p><br /></p>
<p>그녀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p>
<p><br /></p>
<p>오히려 병사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강간당하고 죽임당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악역이나 괴물처럼 바라보는 인물에게도 그 나름의 생존 이유가 있었을 수 있다.</p>
<p><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20년 동안 왕국을 지킨 사람은 누구였을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34451_iwpghdcx.jpg" alt="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8px;" /></p>
<p>&nbsp;</p>
<p>&nbsp;</p>
<p>오디세이를 기다린 페넬로페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남편을 기다리는 왕비가 아니었다. 오디세이가 전쟁터로 떠난 뒤 20년 동안 이타카 왕국을 지켜야 했다.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토로하는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20년 동안 여왕으로 살아온 자신이 겪은 경험과 과정은 아직 어린 아들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험난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p>
<p><br /></p>
<p>왜 여성은 왕이 되면 안 되는가.</p>
<p><br /></p>
<p>오디세이가 없는 20년 동안 왕국을 지켜온 사람 역시 페넬로페였다. 그런데도 역사는 오디세이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페넬로페는 오디세이를 기다린 아내로 기억한다. 20년 동안 왕국을 지킨 그녀의 노고를 누가 제대로 헤아렸을까.</p>
<p><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저승에서 다시 만난 전사들</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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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34714_qepuygik.jpg" alt="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저승이었다.</p>
<p><br /></p>
<p>동물의 피를 제물로 바치자 오디세이와 함께 전쟁에 나섰다가 죽은 전사들의 망령이 나타난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사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고 오디세이를 향해 다가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엄청난 압박감과 죄책감, 책임감이 느껴졌다. 죽은 병사들이 오디세이에게 말을 걸고 무엇인가를 따지는 장면보다 그 수많은 망령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모습 자체가 강렬했다.</p>
<p><br /></p>
<p>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기록으로 남으면 하나의 숫자가 된다. 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 그 심리적인 무게를 영상 언어로 표현했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이야기는 약 3000년 전, 영화는 지금 만들어졌다</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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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34930_myhvxfdt.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8px;" /></p>
<p>&nbsp;</p>
<p>&nbsp;</p>
<p>오래된 이야기를 지금의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영화적 언어가 필요하다.</p>
<p><br /></p>
<p>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전체를 35mm 필름으로 촬영했고, CG에 의존하기보다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은 최대한 실사로 촬영하려 했다. 거대한 트로이 목마와 외눈박이의 모습,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장면까지 ‘이게 진짜라고?’ 싶었던 장면들이 실제 촬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p>
<p><br /></p>
<p>무겁고 시끄러운 카메라를 들고 바다와 전쟁터를 누비며 자신의 소신을 담아낸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관객은 극장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물을 일반 관객인 나는 즐겁게 감상했다.</p>
<p><br /></p>
<p>OST도 인상 깊었다. 특히 오디세이가 활을 ‘딩’ 하고 튕길 때 나는 소리가 이상하게 계속 귀에 남았다. 나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느껴졌다. 한 번 듣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다시 듣고 싶게 만드는 소리였다.</p>
<p><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결국 전쟁은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된다</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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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lt;오디세이&gt;를 보고 나서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p>
<p><br /></p>
<p>왜 전쟁해야 하는가.</p>
<p><br /></p>
<p>영토를 넓히기 위해서인가. 더 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인가. 왕국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서인가.</p>
<p>&nbsp;</p>
<p>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고, 누군가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는다.</p>
<p><br /></p>
<p>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세운 드높은 성은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을까.</p>
<p>&nbsp;</p>
<p>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p>
<p><br /></p>
<p>오디세이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2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인간이기도 하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가 말하는 가장 큰 교훈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가장 추악한 형태이고, 그 욕심의 대가는 누군가가 치르게 된다.</p>
<p><br /></p>
<p>약 300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화 속 인물의 이야기를 보고 있지만, 결국 그 안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p>
<p><br /></p>
<p>욕망하고, 사랑하고, 복수하고, 실수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인간.</p>
<p>&nbsp;</p>
<p>영화 &lt;오디세이&gt;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40229_mykclnmv.jpg" alt="강효정 에디터 태그 명함.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강효정]]></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3:39:0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5</guid>
<title><![CDATA[[PRESS] 캔버스 뒤 숨겨진 영혼의 자화상, 뮤지컬 ‘소년의 초상’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5</link>
<description><![CDATA[&#039;소년의 초상&#039;: 여러 겹의 자화상이 포개진 한 장의 그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color: #000000;">뮤지컬 &lt;소년의 초상&gt;은
귀족 가문의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공방을 배경으로, 그 그림을 실제로 그린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둘러싼
이야기를 펼친다. 이 극은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간 수많은 여성 화가들의 삶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듯했다. 질문에서 시작한 이 극에 대해, 나 역시 관람 후 이 극의 제목에 대해 역으로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span></p>
<p>&nbsp;</p>
<p><span style="color: #000000;">두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첫째, 왜 &lt;로지나&gt;가 아닌가? 이 뮤지컬이 시대적 편견과 곤궁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시선을 새긴
여성 화가에 대한 서사 구현을 주 목적으로 삼았다면, 그 여성 화가의 이름을 따 &lt;로지나&gt;로 뮤지컬의 제목을 붙였을 법하다. 하지만 이 극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둘째, 왜 &lt;소년의
초상화&gt;가 아니라 &lt;소년의 초상&gt;인가? 로지나는 귀족 가문의 소년에 대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마르첼로 공방으로부터 받고 나서 그 소년에 대한 초상화를 그렸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소년의 초상화’라는
제목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극은 굳이 '화'를 떼어낸 채 '소년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택했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21552_qiclkwbf.jpg" alt="MergedImages (5).jpg" style="width: 700px; height: 662px;" /></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해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먼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이 극은 그림들의 '진짜 화가가 누구인지'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관객은 극 초반부터 이미 로지나가 진짜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누구'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다. 다만
이 '어떻게'는 로지나가 살아가던 시대에서 완성되지는 않는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극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나란히 두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관객이
이미 예감한 진실, 즉 '명성을 얻은 그림의 진짜 화가는
로지나'라는 사실이 실제로 밝혀지는 것은 훗날 현대의 비올라가 그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극의 중점은 바로 이 시간을 건너뛴 발견의 과정, 다시 말해 당대에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밝힘이 어떻게 현재에 와서야 완성되는가에 있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이 지점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한다. 로지나가
그린 것은 분명 '초상화(Painting)'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캔버스와 피사체인 소년을 매개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본 시선과 가치관을 담아낸 '초상(Portrait)'이기도 하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그림은 정지된 한순간을 포착한 결과물이지만, 그 안에는 화가만의 고유하고도
연속적인 시선이 새겨져 있다. 로지나는 피사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인물이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음 짓는 순간을 캔버스에 그렸다. 그 그림 속엔 자신의 피사체가 가장 빛나는 찰나를 알아보는 로지나의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이 담겨있었다. </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21607_bbkydmct.jpg" alt="MergedImages (6).jpg" style="width: 700px; height: 662px;" /></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흥미로운 점은 두 번째 질문에서 얻은 답이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소년의 초상화' 속 피사체는
사실 귀족 가문의 소년이 아니었다. 진짜 피사체는 야코포라는 소년으로, 귀족 소년을 대신해 캔버스 앞에
선 '대역 소년'이었다. 로지나
역시 탁월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르첼로의 이름 뒤에 숨어야 했던 '대역 화가'였다. 그럼에도 로지나가 고단한 삶 속에서 자신의 시선과 온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친구 마르타 덕분이었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여기서 이 극의 결정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제목 속 '소년'은 캔버스 앞에 서 있던 피사체인 야코포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이 극에서 '소년'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다중적이었다. 즉, 진짜 자신을 숨긴 채 대역으로 서야 했던 야코포, 마르첼로의 그늘에
가려져 제 이름을 빼앗긴 채 붓을 잡아야 했던 로지나, 그리고 그 곤궁한 시절을 함께 견디며 살아낸
마르타까지, 이 인물들 각자는 저마다의 형태를 띤 '소년들'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그런 의미에서 이 극이 그려내는 것은 로지나 한 사람의 자화상이 아니다. 야코포가
대역으로 서야 했던 자리, 로지나가 스승의 이름 뒤에 감춰야 했던 붓끝, 마르타가 곁에서 지켜낸 시간, 그리고 훗날 비올라가 되짚어간 발자취까지, 저마다 자신을 숨긴 채 살아낸 이들의 얼굴이 결국 하나의 캔버스 위에 겹쳐진다. '소년의 초상'은 그래서 여러 겹의 자화상이 포개진 한 장의 그림에
가깝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이 단어의 다중성은 곧 극의 제목이 &lt;로지나&gt;가 될 수 없었던 진짜 이유와 맞닿는다. 이 작품은 한 천재
화가의 단독 서사가 아니라, 고단한 시대를 통과해 간 '소년들' 전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이 소년들의 고단했던 삶은 과거 속에서 스스로 구원받지는 못했다. 비극은
사라지지 않았고, 당대의 억압과 가난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마르타를 연기했던 배우가 현대의 비올라로 다시 등장하며 서사는 전환을 맞는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뛴
비올라의 추적은 마르첼로 뒤에 지워졌던 로지나의 존재를 밝혀내고, 마침내 그녀에게 그녀의 작품들을 되돌려줌으로써 말이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과거의 비극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의 비올라가 진짜
이름을 찾아내는 과정이 더해지면서, 이들의 고단했던 삶은 비로소 세상에 제 자리를 얻는다. 결국 캔버스 위에 남는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낸 '소년들'의 흔적,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야 지워진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그
과정 전체 그 두 가지다. 그리고 이것이 합쳐진 것이 바로 '소년(들)의 초상(Portrait)'이다.</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21655_tdwlfldv.jpg" alt="소년의초상_메인포스터(최종).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3px;" /></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21706_qvtxotou.jpg" alt="20260422170707_gmsreolz.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유빈]]></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7:33:2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74</guid>
<title><![CDATA[[Review] 익명의 가면 뒤 평화의 노래, 더현대 서울 ‘뱅크시 특별전’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74</link>
<description><![CDATA[&#039;그가 누구인가&#039;를 넘어 &#039;무엇을 전하려 했는가&#039;에 주목할 기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60218_dpdrhcxq.jpg" alt="IMG_9667-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nbsp;</p>
<p>&nbsp;</p>
<p>소더비 경매장에서 낙찰 직후 작품을 파쇄기로 갈아버리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주인공, 그리고 1990년대 영국 브리스틀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얼굴을 가린 채 벽화를 그리며 이름을 알린 '아트 테러리스트' 뱅크시(Banksy).</p>
<p>&nbsp;</p>
<p>세계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여전히 본명과 얼굴은 베일에 싸여 있는 이 익명 작가의 세계관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뱅크시 특별전: Still Here》가 여의도 더현대 서울 6층 ALT.1에서 열려 다녀와봤다. 이번 전시는 '그가 누구인가(Who)'라는 익명의 베일을 파헤치기보다, 마스크 뒤에서 그가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깊은 메시지와 세계관에 온전히 몰입해 볼 수 있었던 만큼 그 생생한 관람 후기를 담아본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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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거대한 무기가 된 '벽', 그 위에 그려진 '쥐'</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60851_sbunlohv.jpg" alt="IMG_9710.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3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전시의 시작(Intro)은 뱅크시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쥐(Rat)’ 캐릭터들과 함께한다. 특히 이곳은 실제 영국의 거리를 걷는 듯 거친 질감의 벽면 연출이 돋보였다. ‘벽은 아주 거대한 무기’라며 권력과 통제, 차별의 단면을 드러내는 도구로 벽을 활용해 온 뱅크시인 만큼, 실제 그가 작업을 펼치던 현장에 와있는 듯한 생생한 간접 체험을 제공한다.</p>
<p>&nbsp;</p>
<p>이러한 ‘Wall’ 섹션을 지나며 마주한 여러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은 &lt;러브 랫(Love Rat)&gt;이었다. 이 작품은 하트 모양의 붉은 물감을 벽에 칠하고 그 아래 붓을 든 쥐를 배치한 작품이다. 세간에서 칭송받는 존재인 ‘사랑’과 더럽고 천대받는 존재인 ‘쥐’라는 대립적인 요소의 결합을 통해, 낭만과 냉소, 희망과 상처가 공존하는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선을 예리하게 짚어낸다.</p>
<p>&nbsp;</p>
<p>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의 작업 영상 역시 인상 깊다.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 위에 그려진, 손에 풍선 더미를 쥐고 장벽 너머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은 분쟁의 비극과 대비되는 자유와 평화의 열망을 서정적이면서도 강력하게 전달하며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만든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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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세상을 비틀어버리는 '뱅크시'표 블랙코미디</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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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60335_sdrtnuuy.jpg" alt="IMG_9738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3px;" /></p>
<p>&nbsp;</p>
<p>&nbsp;</p>
<p>이어지는 ‘Laugh Now’ 섹션에서는 시대를 견디게 하는 뱅크시 특유의 날카로운 블랙코미디와 위트가 빛을 발한다. 뱅크시는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대중이 스스로 사회적 문제와 부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데, 관람 내내 픽 웃음이 터지면서도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된다.</p>
<p>&nbsp;</p>
<p>특히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맹점을 조롱한 &lt;쇼핑백을 든 그리스도&gt; 앞에서는 아마 모두가 뜨끔해질 듯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듯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구원과 숭고함의 상징이어야 할 성탄절마저 물질적 소비로 오염되어 버린 현대사회의 세속적 단면을 뼈아프게 꼬집는다.</p>
<p>&nbsp;</p>
<p>유쾌한 패러디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 &lt;펄프픽션&gt;의 명장면 속 배우들이 쥐고 있는 총을 뜬금없이 '바나나'로 바꿔 치기한 작품은, 매체 속 무분별한 폭력성을 순식간에 희화화하며 무력화시키는 뱅크시만의 천재적인 위트를 보여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뒤흔드는 그의 신선한 관점 앞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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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소더비 파쇄 사건부터 평화를 향한 메시지까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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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60905_bhpgksvc.jpg" alt="IMG_9803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736px;" /></p>
<p>&nbsp;</p>
<p>&nbsp;</p>
<p>‘Icon’ 섹션으로 들어서면 뱅크시를 전 세계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만든 명작들이 반겨준다. 2018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낙찰되는 순간 프레임 안의 파쇄기를 작동시켜 작품을 갈아버린 퍼포먼스로 유명한 &lt;풍선과 소녀&gt;. 그리고 2005년 대영박물관에 몰래 걸어두고 사흘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장난스런 &lt;페컴 록&gt;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과연 "무엇이 예술이고, 그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미술계의 권위를 비웃는 그의 배짱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p>
<p>&nbsp;</p>
<p>전시의 마지막 ‘Peace’ 섹션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코로나19 시국 속 진정한 영웅은 배트맨이 아니라 의료진임을 보여준 &lt;게임 체인저&gt;, 그리고 폭탄 대신 선물을 실어 나르는 헬리콥터와 푸틴을 제압하는 소년의 그림까지. 예술이 세상을 한 번에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폭력과 차별을 줄여갈 수 있다는 뱅크시의 희망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여전히 우리 곁에(Still Here), 뱅크시가 남긴 것</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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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60412_asqldlox.jpg" alt="IMG_9693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nbsp;</p>
<p>&nbsp;</p>
<p>가면 뒤로 자신을 완벽히 숨겼지만, 그가 세상에 던진 날카롭고 따뜻한 목소리만큼은 울림으로 남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뱅크시 특별전: Still Here》. 전시장 문을 나서는 순간, 늘 무심하게 지나치던 길거리의 흔한 벽조차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p>
<p>&nbsp;</p>
<p>팍팍한 일상 속에서 재치 있는 위트와 함께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느껴보고 싶다면 한 번쯤 방문해 보길 권한다. 이번 전시는 여의도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오는 2026년 11월 3일까지 이어지니, 계절이 바뀌기 전 뱅크시가 남긴 평화의 울림을 직접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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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10160435_oyiksqco.jpg" alt="최수경 에디터.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수경]]></dc:creator>
<pubDate>Mon, 10 Aug 2026 16:12: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8</guid>
<title><![CDATA[[PRESS] 저항하라, 끝내라, 연대하라 - 뮤지컬 &#039;비더슈탄트&#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8</link>
<description><![CDATA[올 뉴 프로덕션으로 3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독일어로 ‘저항’ 또는 ‘반항’을 뜻하는 단어 ‘비더슈탄트(Widerstand)’는 ‘~에 반대하여(wider-)’와 ‘서다(stehen)’라는 어원이 결합해 만들어진 말이다.&nbsp;이는 무엇에 대한 단순한 거부를 넘어, 거대한 폭력이나 부조리한 질서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곧게 바로 서는 주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p>
<p>&nbsp;</p>
<p>뮤지컬 &lt;비더슈탄트&gt;는 이 단어의 어원적 깊이만큼이나 묵직하고 뜨거운 서사로 관객의 마음을 두드려온 작품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225315_cnzftxyg.jpeg" alt="비더슈탄트_삼연포스터(공유용).jpeg" style="width: 700px; height: 1004px;" />
</p>
<p>&nbsp;</p>
<p>&nbsp;</p>
<p>작품의 배경은 1938년 나치 치하 독일의 엘리트 스포츠 학교다. 최고의 펜싱 선수가 되겠다는 순수한 꿈을 안고 입학한 17세 소년들이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포츠의 열정이 아닌 승리만을 강요하는 계급주의와 혹독한 군사 훈련, 그리고 엄격한 통제뿐이었다.</p>
<p>&nbsp;</p>
<p>소년들은 금지된 라디오와 비밀스러운 모스 부호 쪽지를 통해 자신들이 속한 학교의 실상이 히틀러의 사관학교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때&nbsp;뮤지컬 &lt;비더슈탄트&gt;는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던져진 청춘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연대하며 신념을 세워가는 치열한 성장의 과정을 한 편의 서사시처럼 그려낸다.</p>
<p>
   <br />
</p>
<p>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보기 드문 몰입감과 강렬한 에너지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뮤지컬 &lt;비더슈탄트&gt;가 삼연으로 돌아온 것은 재연 이후 3년 만이다. 2017년 '아르코-한예종 아카데미' 쇼케이스와 2018년 '공연예술창작산실'을 거쳐 2022년 초연된 이 작품은 전 회차 전석 매진, 관객 평점 9.7점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고, 초연 종료 5개월 만에 일본 도쿄 라이선스 수출이라는 쾌거까지 이뤄내며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해왔다.</p>
<p>
   <br />
</p>
<p>그러나 이번 재공연은 단순히 익숙한 무대를 답습하려 하지 않는다.&nbsp;제작진은 익숙한 성공 방식을 과감히 내려놓고, 음악 전체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올 뉴 프로덕션(All New Production)’을 감행한다. 이에,&nbsp;공동 주최·제작을 맡은 ㈜라이브러리컴퍼니와 ㈜미스틱컬처는 오는 2026년 7월 23일부터 10월 11일까지 서울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1관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무대로 관객을 맞이할 예정이다.</p>
<p>
   <br />
</p>
<p>이번 새 프로덕션의 핵심 변주는 단연 ‘음악’에 있다. 정은비 작가가 다듬어낸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대사와 묵직한 서사 구조는 유지하되, 그 위를 흐르는 음악적 언어를 전면 교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 뮤지컬 &lt;줄리 앤 폴&gt;, &lt;붉은 정원&gt;, &lt;뱀파이어 아더&gt; 등을 통해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을 증명해 온 김드리 작곡가가 새롭게 합류했다.</p>
<p>
   <br />
</p>
<p>김드리 작곡가는 작품의 모든 수록곡을 다시 쓰는 ‘All New Number’ 작업을 맡았다. 펜싱이라는 역동적인 액션 속에 가려져 있던 소년들의 아련한 정서와 감정의 결, 서정성을 한층 극대화할 예정이다. 이는 기존 관객에게는 익숙한 대사 속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적 파동과 새로운 소름을 선사하고, 처음 작품을 만나는 관객에게는 한 차원 높아진 완성도의 신작을 선보이겠다는 제작진의 강한 의지가 담긴 대목이다.</p>
<p>&nbsp;</p>
<p>여기에 김태형 연출, 조윤화 음악감독, 이현정 안무감독, 서정주 무술감독 등 탄탄한 베테랑 창작진이 가세해 무대의 밀도를 더욱 높인다.</p>
<p>
   <br />
</p>
<p>무대를 채울 배우진 역시 신구의 완벽한 조화를 자랑한다. 초연과 재연을 모두 거치며 작품의 뼈대를 단단히 구축해 온 최석진, 황순종, 이한솔, 김도현, 김방언, 김보현, 이형훈 등 7명의 기존 캐스트가 재합류하여 서사의 깊이와 연속성을 확고히 지킨다. 여기에 한상훈, 박정원, 강병훈, 김준식, 고철순, 조모세, 김지웅, 황건우, 김태환, 최기정, 김도민 등 탄탄한 연기력과 신선한 에너지를 갖춘 11명의 새로운 배우들이 대거 합류해 총 18인이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는 입체적인 앙상블을 완성할 전망이다.</p>
<p>
   <br />
</p>
<p>나치즘의 폭력 앞에서도 서툴지만 뜨겁게 손을 잡았던 소년들의 이야기이자 시대의 불의에 맞서 끝내 끝내 바로 서고자 했던 청춘들의 뜨거운 저항을 담은 뮤지컬 &lt;비더슈탄트&gt;는 과감한 음악적 변신과 단단해진 캐스팅으로 무장한 채, 시대를 가로질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한번 던질 깊은 울림을 준비하고 있다.</p>
<p>
   <br />
</p>
<p>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연대하고자 했던 청춘들의 뜨거운 저항을 담은 뮤지컬
&lt;비더슈탄트&gt;가 대학로 무대에 또 한 번 어떠한 울림을 전할지 기대를 모은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유빈]]></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22:31:2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3</guid>
<title><![CDATA[[Review] 비겁하면서 용감한 - 연극 &#039;플리백&#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3</link>
<description><![CDATA[사랑받지 못할 바에야 기꺼이 추락하는 마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당신은 플리백의 이야기가 낯선가?</p>
<p>&nbsp;</p>
<p>플리백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겹겹이 두른 포장지를 모두 뜯어보면, 정말 당신과 그렇게 다른가?</p>
<p>&nbsp;</p>
<p>플리백의 문제는 섹스를 너무 좋아한다는 데 있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는 오히려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플리백의 이야기—무용담처럼 펼쳐지는 애널 섹스, 섹스팅(sexting), 원나잇, 야외플 등등등—를 듣다 보면 그녀가 사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단 한 가지만 빼고. 외로움. 플리백은 엄청나게 외로워하고 있다. 매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절규하고 있고, 찢어지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싸운다.</p>
<p>&nbsp;</p>
<p>플리백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치열하게 싸운다. 쓰레기처럼 살며 남들이 자신을 미워해 주기를, 버려주기를, 함부로 대하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아주 비겁한 짓인 동시에 아주 용감한 짓이기도 하다. 비겁한 이유는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 탓에 정말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고, 용감한 이유는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이를 부정하겠지만.</p>
<p>&nbsp;</p>
<p>플리백은 수십 번, 수백 번 자신을 내던지고 또 내던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나가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예상 범위 안의 일인 것처럼. 자신이 연출한 스탠드업 코미디의 각본인 것처럼. 하지만 모순되게도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 자체에는 희망이 실려 있다. 떠나지 않을 누군가를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로는 ‘없을 거야’라고 하면서도 플리백은 영원히 누군가를 찾고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61150_tdyixymy.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주연 (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nbsp;</p>
<p>&nbsp;</p>
<p>나는 플리백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모순된 욕망이 낯설지 않다.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 믿으면서도 사랑받길 원하고, 한없이 가볍게 행동하면서도 누군가 그 이면을 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익숙한 욕망을 무대 위에서 지켜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플리백은 감추는 것에 서툴다. 교란이라도 시키려는 듯 무대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내뱉는 일관성 없는 이야기와 과감하고 산만한 행동은 오히려 그녀가 쓴 얇디얇은 가면의 존재를 부각시킬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각난 플리백의 일상 속에서도 그녀의 가면을 벗겨내고, 정신없이 흐르던 시간을 원래의 속도로 돌려놓는 사람이 있다.</p>
<p>&nbsp;</p>
<p>그는 카페의 단골손님 ‘조’다. 플리백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설 때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손님이다. 플리백은 매일 같은 시간 카페를 찾는 조의 요란한 등장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린다. 끊임없이 바뀌는 플리백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서 조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존재다. 무엇보다 플리백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섹스를 통해 그와의 관계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릴 수도 없다.</p>
<p>&nbsp;</p>
<p>조는 자그마한 우쿨렐레를 자주 들고 다닌다. 플리백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묻자, 조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우쿨렐레를 주곤 한다고 답한다. 어느 날 플리백은 거리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조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다. 플리백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색색의 조명이 조를 바라보는 플리백을 비추고, 객석에서 바라본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워 보인다.</p>
<p>&nbsp;</p>
<p>조를 바라보는 플리백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아마 질투였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플리백은 정작 그 증명에 가장 필요한 타인의 마음을 얻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외로운 사람이 그렇듯이. 그런 플리백에게 밤거리에서 마주한 조의 모습은 더없이 슬픈 장면이 아니었을까. 조용히 노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모으고, 그들 사이에서도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 플리백이 ‘unfuckable(섹스할 수 없는)’ 노인이라고 여겼던 조는 그렇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도 사랑받는다. 그렇다면 충분히 ‘fuckable(섹스할 수 있는)’한 자신은 왜 사랑받지 못하는가.</p>
<p>&nbsp;</p>
<p>이후 조 앞에서 상의를 벗고 자신과 섹스하자고 소리치는 플리백의 행동 역시 나는 그 질투의 연장선처럼 느꼈다.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조를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 당신도 나처럼 비참해졌으면 좋겠다는 못생긴 마음. 조 역시 자신과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자신만 홀로 실패한 사람은 아니게 될 테니까.</p>
<p>&nbsp;</p>
<p>플리백의 얼굴에는 습관처럼 조소가 떠올라 있지만, 그 순간 발가벗겨져 추락하는 것은 조가 아니라 플리백이다. 조는 플리백의 몸에서 얼굴을 돌리며 움츠러든다. 그러나 조의 거절은 단순한 거절인 동시에 관계의 지속을 뜻하기도 한다. 조는 플리백과 섹스하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익숙한 방식으로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을 거부한다. 플리백이 스스로를 내던졌는데도, 조는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플리백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은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p>
<p>&nbsp;</p>
<p>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반드시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 주는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그 사람이 자신을 미워해 달라고 애써 증명하는 것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동참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조는 플리백을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플리백이 자신을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p>
<p>&nbsp;</p>
<p>그러니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플리백의 이야기가 낯선가?</p>
<p>&nbsp;</p>
<p>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기다리고, 떠날 이유를 잔뜩 만들어놓고도 그 모든 이유를 무시하고 남아줄 사람을 기대하는 마음. 자신을 내던지면서도 누군가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겹겹이 두른 포장지를 모두 뜯어낸 뒤에도, 플리백은 정말 당신과 그렇게 다른가?</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61447_asnrifgf.jpg" alt="유예현.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유예현]]></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6:15:0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83</guid>
<title><![CDATA[[Review] 한 인간을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 자객열전Ⅱ, 안응칠 워크숍 [연극]]]></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83</link>
<description><![CDATA[한 명의 인간은 어떻게 위인이 되는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한 명의 인간은 어떻게 위인이 되는가?</p>
<p>&nbsp;</p>
<p>영웅의 일대기처럼, 위인은 처음부터 위인으로 고귀하게 태어나 시련을 겪고 귀환할 것 같지만, 당연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p>
<p><br /></p>
<p>작가 '박상현'의 &lt;자객열전 2 - 안응칠 워크숍&gt;은 1909년, 하얼빈 의거 이후 안중근이 수감된 뤼순 감옥과 연극 '안응칠 워크숍'의 연습이 한창인 21세기 연습실을 오가며 인간 '안응칠'에 대해 고찰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54645_qzaixzls.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9 오후 3.45.19.png" style="width: 700px; height: 528px;" /></p>
<p><br /></p>
<p>&nbsp;</p>
<p>소극장의 장점은 바로 무대와 좌석의 거리가 코앞까지 가깝다는 것에 있다. 마치 극 안에 나 자신이 참여한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배우들이 그 인물 자체로 생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p>
<p>&nbsp;</p>
<p>더욱이 이 '안응칠 워크숍'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은 21세기 서울의 어느 한 연극 연습실이다. 자연스럽게 이 연극을 올린 극단이 거쳤을 메타적인 층위가 한층 더해지게 된다.</p>
<p>공연이 시작하기 전 관객들이 입장하는 동안, 배우들은 마치 연습을 준비하는 한가로운 일상처럼 무대에 성큼성큼 나타나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미 연극은 시작된지 오래이다.</p>
<p><br /></p>
<p>비어있는 연습실은 배우와 연출, 조연출, 무대감독이 재구성해내는 인간 '안응칠'로 다시 채워진다.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당시 재판 기록을 교차하며 과연 안중근이 어떤 인물일지 고심해가는 과정. 그러나 그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다. 오히려 머릿속에 있던 위인 안중근을 다시 재배치하는 과정 속에서 모두가 혼란에 빠진다.</p>
<p><br /></p>
<p>안중근은 왜 그랬을까? 안중근은 정말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안중근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정말 그렇게 말했을까요?</p>
<p><br /></p>
<p>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나, 생동하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저술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순간은 늘 분명하나, 지나가면 완전함은 사라지고, 기록은 그것을 어설프게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p>
<p><br /></p>
<p>엄숙하게 안중근을 재현하다가도, 곧바로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가 느꼈을 ‘진짜’ 감정을 고심하게 한다. 그 공간이 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관객은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한 인물은 숱한 기록으로 재조립되고 정렬된 하나의 영웅상이지, 거기 안에서 진짜 인간은 보지 못했음을.</p>
<p><br /></p>
<p>배우들은 워크숍을 지속하며, 이 각본의 작가를 계속해 궁금해한다. 이 ‘안응칠 워크숍’을 써낸 작가인 만큼, 그가 ‘안응칠’에 대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p>
<p><br /></p>
<p>그 정체는 중반부터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워크숍을 지켜보던 연출은 돌연 연습실을 박차고 나간다. 연출이 나간 후 덩그러니 남은 연습실에서 이들은 일순 당황하나,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54657_mwuvyusp.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8-09 오후 3.45.29.png" style="width: 700px; height: 940px;" /></p>
<p><br /></p>
<p>&nbsp;</p>
<p>극 속에서 취조실의 탁자도, 전쟁이 벌어지는 험난한 참호도, 안중근의 처형대가 되기도 하였던 연습실의 널빤지 오브제를 아예 돌려버린 것이다.</p>
<p>&nbsp;</p>
<p>“늘 한 번쯤 돌려보고 싶었어”라는 신이 난 목소리, “그거, 가운데가 중심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무대감독.</p>
<p><br /></p>
<p>연극에서 오브제란 계속해 의미를 덧입는 것이다. 오브제는 배우들과 함께 연극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해석과 움직임이 더해지면 관객은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이 ‘안응칠 워크숍’은 그 자리에 계속 있던 오브제를 아예 ‘뒤집어보는’ 것에서 다시 시작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54713_uvgpxzas.jpg" alt="안응칠 워크숍 POSTER.jpg" style="width: 700px; height: 979px;" /></p>
<p><br /></p>
<p>&nbsp;</p>
<p>사마천의 《사기(史記)》 &lt;자객열전(刺客列傳)&gt;은 《사기》 130권 중 열전(列傳) 제26권(권86)에 해당하는 목편이다. 이 &lt;자객열전(刺客列傳)&gt;은 춘추전국시대에 자신의 신념이나 의리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인물 5명-조말, 전제, 예양, 섭정, 형가-의 삶과 거사를 다룬 유일무이한 역사 기록이다.</p>
<p><br /></p>
<p>비록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장렬히 사라졌거나 승자의 역사에서 '자객'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될 수 있었던 이들의 내면, 즉 그들이 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선택을 내렸는지에 대한 '처절한 동기와 신념'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성공한 역사에 묻힌 인물의 실존적 고뇌를 되살려낸 것이다.</p>
<p><br /></p>
<p>박상현의 &lt;자객열전&gt; 희곡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역사적 인물들을 극중극 구조로 다시 고찰하며, 그들의 신념을 다시 ‘인간’의 관점으로 복원해내는 시리즈이다.</p>
<p><br /></p>
<p>첫 &lt;자객열전&gt;에서 김구와 대비되는 두 젊은 투사 이봉창, 윤봉길을 등장시켜 거사를 앞둔 이들의 인간적인 두려움과 결단, 그리고 실패와 성공의 궤적 속에 숨겨진 실존적 고뇌를 포착해 냈다면, 이번 &lt;자객열전 2 - 안응칠 워크숍&gt;은 그 시선을 '안중근'이라는 거대한 영웅에게로 옮겨온다.</p>
<p><br /></p>
<p>여기서 안응칠은 독립에 모든 것을 던진 투사이기도, 죽음 앞에 공포를 느꼈던 한 인간이기도, 어머니에게서 용기를 얻는 아들이기도, 못난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감옥의 순사와 친구를 맺는 인물이기도 하다.</p>
<p><br /></p>
<p>앞으로 박상현이 또 어떤 ‘자객’을 인간으로 복원해낼 것인가, 그를 ‘인간’으로서 다시 우리 앞에 해체할 것인가 궁금해진다.</p>
<p>
   <br />
</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양예지]]></dc:creator>
<pubDate>Mon, 03 Aug 2026 17:25:5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4</guid>
<title><![CDATA[[Review]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 상자 속의 양 시나리오 북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4</link>
<description><![CDATA[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010748_pnssdctg.jpg" alt="대원-상자속의양-표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7px;" />
</p>
<p>&nbsp;</p>
<p>&nbsp;</p>
<p>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마저 잃어버리는 것일까.</p>
<p>&nbsp;</p>
<p>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어디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p>
<p>&nbsp; <br /><b>정말 사랑한다면 붙잡아야 할까, 놓아주어야 할까?</b></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b>&nbsp;<br />타쿠토</b>&nbsp; &nbsp; &nbsp; &nbsp;죽은 사람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요?<br />&nbsp;
</blockquote>
<p>&nbsp;</p>
<p>진짜 사랑은 상대를 편히 보내주는 것일까, 붙잡는 것일까. &lt;상자 속의 양&gt;을 보며 처음 든 생각이다.&nbsp;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오토네와 켄스케는 죽은 아들과 똑닮은 7살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입양하게 된다. 아들 '카케루'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카케루의 기억을 가지고, 똑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휴머노이드의 등장에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는 행복을 되찾는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nbsp; 카케루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이상 행동을 본 오토네와 켄스케는 점점 혼란에 빠져간다.</p>
<p>
   <br />
</p>
<p>사랑하는 누군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사랑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친구, 가족, 연인... 진심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아마 거절하지 못할 것 같다.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그 대상이라면 어떨까. 내가 켄스케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나를 잊지 못해 나와 똑같은 휴머노이드를 만들고, 그 존재를 계속해서 키운다면... 나는 조금 많이 슬플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만서도, 미안함과 질투심이 나를 갉아먹을 것 같다. 사랑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방식이 틀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진실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조금 이기적인 존재라, 내가 견디기 위해 상대를 붙잡을 수밖에 없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b>&nbsp;</b>
   </p>
   <p>
      <b>오토네</b>&nbsp; &nbsp; &nbsp; &nbsp;괴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나요?
   </p>
   <p>
      <b>오사나이</b>&nbsp; &nbsp; 마음이 없으니까요. <br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만약 그런식으로 보였다면 그건 당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p>
   <p>&nbsp;</p>
   </blockquote>
<p>&nbsp;</p>
<p>그렇다면 중요한 건 보내느냐, 붙잡느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b>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b>에 있다고 생각한다. &lt;어린 왕자&gt;에서 어린왕자는 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정성스럽게 그려진 양들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고, 어린왕자는 건네받은 상자에 자신이 원하는 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한다. 결국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오토네와 켄스케가 카케루의 선택과 혼란 역시 그런 것이다. 어린왕자에게 필요했던 건 잘 그려진 양이 아닌, 자신이 직접 상상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휴머노이드를 입양하고, '카케루'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를 죽은 카케루처럼 대하며 자신들의 상상을 대입한다.<br /></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b>&nbsp;<br />카케루</b>&nbsp; &nbsp; &nbsp; &nbsp;어쩌다가 늦었어?<br /><b>켄스케</b>&nbsp; &nbsp; &nbsp; &nbsp;파친코를 했는데 구슬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거든…. 미안하다, 잘못했어…. 미안해….<br /><b>카케루</b>&nbsp; &nbsp; &nbsp; &nbsp;괜찮아.<br />&nbsp;
</blockquote>
<p>&nbsp;</p>
<p>하지만 오토네와 켄스케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휴머노이드 카케루의 모습에 큰 혼란을 느낀다.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그저 카케루와 닮기만 한 로봇이 아닌 '<b>빈 공간</b>'이 아닐까. 그리운 아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받아들이지 못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빈 공간. 이야기는 휴머노이드인 카케루를 통해 상실을 맞이한 부부가 들고 있는 상자 속의 '양'을 변화시킨다. 이야기의 끝에서 오토네와 켄스케는 죄책감을 고백하고 또 다른 상상을 담은 상자를 닫는다. 껍데기를 붙잡는 것이 아닌 카케루를 진정으로 놓아주기를 선택한다.<br /><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b>&nbsp;</b>
   </p>
   <p>
      <b>카케루</b>&nbsp; &nbsp; &nbsp; &nbsp;걱정하지 마.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계약은 종료하는 거로 해요.&nbsp;
   </p>
   <p>
      <span style="font-size: 12px;">&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어둠에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오토네의 마음속에 상기되고, 카케루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인다.&nbsp;</span>
   </p>
   <p>
      <b>오토네</b>&nbsp; &nbsp; &nbsp; &nbsp;고마웠어. 이제는... 가도 돼.<br />
   </p>
   <p>&nbsp;</p>
   </blockquote>
<p>&nbsp;</p>
<p>휴머노이드 카케루의 겉모습은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존재가 오토네와 켄스케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는 결국 그들의 마음에 달려있다. 이는 동시에 카케루가 더이상 눈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까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눈앞에 존재하는 카케루의 분신이 있다고 해서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더라도, 마음으로 그 존재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b>양은 정해져있는 정답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는 해답이다.</b></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left;">동명의 영화 &lt;상자 속의 양&gt; 시나리오를 엮은 각본집에는 자칫 놓치기 쉬웠던 등장인물 설정은 물론 특별수록 코너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정해진 러닝타임에서 벗어나 대사 하나 하나를 곱씹는 과정에서 이 책이 영화 속의 '상자'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된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와 달리, 모든 것을 상상해야 하는 시나리오에 독자인 나만의 양을 끼워둔다. 틈틈이 빈 공간에 무엇을 넣을지는 내가 결정하게 된다. 이야기가 전하는 메세지처럼,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눈앞에 있지 않아도, 만질 수 없어도. <b>마음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믿게 된다.</b></p>
<br /><b>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b>
<p>
   <b>&nbsp;</b>
</p>
<p>
   <b>&nbsp;</b>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아란]]></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01:06:5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0</guid>
<title><![CDATA[[PRESS] 내게 복잡하게 이리 오는 게 아니라 –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 티모시 리다우트 & 프랑크 뒤프레 듀오 리사이틀 (8.18)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0</link>
<description><![CDATA[비올라는 한여름을 밤으로 데려간다지 -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039;티모시 리다우트 & 프랑크 뒤프레 듀오 리사이틀&#039; 프리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YrNYWOfKbI?si=FAxlE8OAyerE0W_A"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근래의 무더위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다홍이 되는데, 비올라가 군청을 노래하니 나는 까만 시원함을 느꼈다. 요즘은 오후 4시 무렵 퇴근해 건물 밖을 빠져나오는데, 그때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기다렸다는 듯 눈앞을 가득 채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출입문을 빠져나오기 전에는 무척 바쁘다. 문 밖에서 방패가 되어줄 양산을 꺼내야 하니, 이어폰을 미리 귀에 꽂아 놔야 하고, 가방 속 텀블러에 물이 있다면 입안에 얼음물 한입을 들여놓기도 해야 한다. 그런다고 열기가 내 사방을 에워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억' 하는 느낌이 덜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언제 이 더위가 가시게 될지 예상조차 쉽게 되지 않으니, 나는 18일의 일을 먼저 떠올려 보기로 했다. 18일에는 무엇을 하기로 했더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보기로 했다. 음악당에 가기로 했었지. 그래, 국제음악제 공연 중 하나인 비올라와 피아노의 듀오 리사이틀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어떤 레퍼토리더라. 노래를 먼저 들어볼까, 연주가에 대해 먼저 알아볼까. 잠시잠깐 고민하다 핸드폰 화면 위에 그날의 비올리스트인 '티모시 리다우트'라는 이름을 먼저 띄웠다. 그의 이름을 가장 높은 곳에 놓아두니 'Sunset'이라는 곡이 나타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18일의 레퍼토리는 아니었지만, 마침 그날의 피아니스트인 '프랑크 뒤프레'와 함께한 연주라 두 사람이 어떤 소리를 주고받는지 미리 들어보기에는 더없이 좋아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고, 시작부터 드리워진 비올라의 온화함에 그만 이 글의 첫 문장을 떠올리고 말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래, 새카맸다. 분명 아득한 열기둥 안에 있던 내 눈앞에 비올라의 첫 선으로 까만 밤이 들이닥쳤다. 한낮이 조금 지난 주홍빛에서 눈 깜짝하지도 못한 사이에 밤 11시의 세상이 내게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잔뜩 찌푸려진 미간 사이, 어떻게든 내가 만든 그늘 안에 숨어보려 웅크려져 있던 어깨 너머로, 높은 세상과 낮은 말에만 귀 기울여 보려던 내 세상 중간 사이로 못 보던 나무 한 그루가 건반과 함께 걸어오는 소리 하나 없이 다홍에서 군청 사이를 지나 나를 찾아내 인사를 건네더라.</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모르는 이가 분명한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익숙함에 시선을 내려 오른손끝을 바라봤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4B 연필의 까만 그림자가 내 검지 끝에 묻어 있더라.</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래, 내게는 여전한 나무이기도, 연필이기도 한 약 450년 된 비올라가 이렇게 왔다. 내게 복잡하게 이리 오는 게 아니라...</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날의 프로그램 가운데 나흐레 솔의 'Shadow Walkers'는 아직 들어볼 수 없으니, 이 곡은 18일의 무대 위 비올라와 피아노에게 맡겨둔 채 그들이 남겨놓을 세 갈래의 그림자 모양만 미리 상상해보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에네스쿠, 콘서트 피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b>
</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73Ol5Sa__ok?si=aic2KfGU0EYv5IZV"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 곡의 작곡 배경을 살펴보니 파리 음악원의 비올라 경연 대회를 위해 쓰였다고 한다. 어라라,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어깨 양쪽의 무게가 덜어졌다. 거창한 서사를 미리 짊어지고 들어야 하는 곡은 아니구나. 애초에 비올리스트의 기량을 펼쳐 보이기 위한 경연곡이 아니던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음악제 첫날, 이 리사이틀의 문을 여는 재미난 곡이겠구나! 그리 가볍게 들어볼 수 있다. 이참에 그가 현재 사용하는 악기가 약 45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잊어버리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쉽게 음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선율들이 가득할 것이다. 오늘의 연주가가 현 위로 어떤 음색을 태워 올릴까?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가 보자. 무엇을 들고 있었던가? 비올라였지? 비올라가 어떤 악기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도 좋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냥, 그들의 움직임과 노래를 한꺼번에 삼켜내보자! <i>왕!</i></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E♭ 장조 Op.120-2</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wgFgwPPc9-g?si=yK_6olxDZ8VcA0S3&amp;start=1958"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비올라의 첫 숨에 나도 모르게 클라리넷의 길을 떠올렸고, 그의 너그러움에 피아노는 싱그럽게 엮어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상으로 미리 만나는 그들은 비올라가 브람스를 만나니 대각선 방향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일러준다. 고개를 살짝 뒤로 또 옆편으로 뉘일 수 있는 바람이 찾아드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한참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진이 다 빠지는데, 어떤 색의 바람이 우리의 뒷목 근처에 불어올까. 1악장에 반복적으로 찾아드는 노래가 있을 텐데, 18일에 만나는 그의 손끝에선 그 길을 어떤 발걸음으로 걸을까. 편안히 기대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2악장의 서두를 듣자마자, 비올라 품에서도 역시 브람스는 브람스구나, 싶었다. 그냥, 뭔가 아래위로 크게 너풀거리는 게 딱 '브람스'만 같다. 작은 물건 하나를 가지고 길게 놀기보다, 애초에 눈 안에 담겨 있는 게 경계선 밖 영역까지 포함되어 있는 사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나는 이날 그들을 통해 비올라가 어디까지 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가까이에서 응시해보고 싶어졌다. 기업은행챔버홀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연주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녹화된 영상으로 미리 만난 리다우트의 소리도 멀리까지 뻗어 나왔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둥근 노란 조명 안에서 불리는 요하네스라면...</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찾아드는 3악장의 시작에 벌써 이 곡의 이별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쉽게, 가만히 자리에 앉아 내 귓가로 '드넓은 세상'을 들여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포근하고 행복하기만 한 이 청감을 지금 내 나이에 느끼기엔 지나치게 이르게 만난 사치스러운 감각이 아닐까 싶다가도 아, 맞다. 지금 나 놀러 왔지. 즐기는 게 맞는 일이구나. 가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갖가지 장면은 다 제쳐두고 저 소리 품에 가장 깊숙이 안겨들 수 있는 사람이 이날을 가장 길게 기억할 수 있는 '청중'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블로흐,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span></b>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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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b><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b>
</p>
<p style="text-align: center;">
   <b><span style="font-size: 18px;"><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SptzJKLnY1M?si=cVxqhxBPqWT0MEkC&amp;start=36"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span></b>
</p>
<p style="text-align: center;">
   <b><span style="font-size: 18px;">&nbsp;</span></b>
</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 곡의 작곡가 블로흐는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같은 지역을 향한 상상이 작품에 영감을 주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 그 장소들은 여행의 기억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바라본 풍경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블로흐는 네 개의 악장에 보다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도 생각했지만, 결국 듣는 이의 상상을 특정한 장면에 묶어두지 않기 위해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은 즉슨, 나는 작곡가의 머릿속에 담긴 상상적 풍경 위에 또 다른 영감을 덧붙이는 연주가를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정해진 바가 없다. 반드시 어떤 풍경을 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라볼 색과 떠올릴 공간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허공 안에 무엇이 놓이게 될까. 발 들여본 적 없는 섬. 신비로운 열대 정글. 군청색의 밤... 정말로 뭐든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미래의 나는 아마, '단어'를 떠올리기보다 비올리스트가 어떤 '자유' 안에서 어떤 '획'을 그어나갈지, 피아노가 무슨 '이정표'를 들고 있을지에 집중해보지 않을까 싶다. 그의 표정 변화나 피아노와 어느 순간에 눈 맞춤을 나누게 될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관객에게 주어진 자율도가 이만큼 높으니, 그려낼 수 있는 그림도 네 가지나 된다. 네 가지? 사실 이것 또한 정해져 있지 않다. 네 번의 기회 안에서 색이 입혀질 도화지의 여분도 얼마든지 남아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상상도 할 수 있겠다. 이 곡은 왜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을까. 비올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움을 이만한 백색의 자유도 안에서 보여주고 싶어서일까. 악장 사이를 미리 걸어보고 있는 지금, 사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모든 게 공상 안에 자라난 광경의 일이 아니던가. 미리 들어보지 못한, 그날 처음 인사하게 될 한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곡을 지나오니 어둑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아마 18일에도 그럴 것이다. 조금 더 검은색이기도 하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복잡함 하나 없이, 비올라가 노래하며 피아노와 함께 찬찬히 너와 내게 걸어올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nbsp;</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92446_dekggncq.jpg" alt="2026 국제음악제_종합이미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35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는 오는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6일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IBK기업은행챔버홀, 리사이틀홀에서 열린다. 2021년 ‘여름음악축제’로 출발한 이 음악제는 국내 음악가의 발굴과 국제 교류를 아우르는 여름 클래식 축제로 영역을 넓혀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올해는 ‘Pack Your Summer with Classics’를 슬로건으로 국내외 연주자와 실내악 단체들의 무대를 선보인다. 라벨의 작품으로 꾸려진 개막 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폐막 공연까지 여섯 날의 음악제가 이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8월 18일, 티모시 리다우트 &amp; 프랑크 뒤프레 듀오 리사이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215510_wgvggndy.jpg" alt="티모시 리다우트, 프랑크 뒤프레.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음악제 첫날인 8월 18일 오후 7시 30분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는 비올리스트 티모시 리다우트와 피아니스트 프랑크 뒤프레의 듀오 리사이틀이 열린다. 두 사람은 에네스쿠의 '콘서트 피스'를 시작으로 브람스의 '비올라 소나타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120 제2번', 나흐레 솔의 '쉐도우 워커스', 블로흐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을 차례로 연주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올여름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프로그램을 국내 관객들에게도 소개하는 무대로, 후기 낭만주의와 현대를 잇는 레퍼토리를 통해 비올라 특유의 깊고 풍부한 음색을 들려줄 예정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프로그램]</b>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에네스쿠, 콘서트 피스</p>
<p style="text-align: center;">Enescu, Concertstück</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120 제2번</p>
<p style="text-align: center;">Brahms, Viola Sonata in E-flat Major, Op. 120 No. 2</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ntermission</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나흐레 솔, 쉐도우 워커스</p>
<p style="text-align: center;">Nahre Sol, Shadow Walkers</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블로흐,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p>
<p style="text-align: center;">Bloch, Suite for Viola and Pian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장유진]]></dc:creator>
<pubDate>Sat, 08 Aug 2026 19:14:3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8</guid>
<title><![CDATA[[Opinion] 당신도 ‘모나리자’를 보러 오셨나요? [문화 전반]]]></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8</link>
<description><![CDATA[발터 벤야민의 &#039;아우라&#039;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b><span style="font-size: 18px;">당신도 ‘모나리자’를 보러 오셨나요?</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10200_zibueate.jpg" alt="KakaoTalk_20260727_005903245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모나리자’의 인상은 다소 기대와는 달랐다. ‘그림이 파묻혀 있다.’ 이것이 세계적 대명작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림 주변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정해진 높낮이 없이 솟아 있는 고개들 사이로 겨우 그림의 상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사이 빼곡히 공간을 채운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스마트폰을 자신의 정수리 위 높이로 들어올려 그림의 일부라도 찍으려 안간힘이었다. 나 또한 그 인파 사이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결국 작품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아닌, 더위가 슬긋 올라오던 초여름에 텁텁한 체취들을 맡으며 좁은 틈들을 기웃거리다 후퇴한 기억만이 남았다.</p>
<p><br /></p>
<p>분명 루브르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이외에도 수많은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다른 작품 앞에서도 위와 같은 ‘사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모나리자’와의 경험이 유독 기묘하게 남은 이유이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대형 박물관을 돌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하나의 그림을 위해 같은 포즈로 멈춰 있다가 틈을 파고드는 경험은 다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p>
<p><br /></p>
<p>‘모나리자의 매혹’, 그 원인을 찾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림 ‘모나리자’는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로 거대하지도 않았으며, 섬세한 묘사와 표현이 느껴졌지만 그만큼 특출난 묘사를 가진 작품들은 여타 다른 방에도 수없이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눈썹 없는 한 여자의 초상이 사람들을 세뇌라도 한다는 것인가. 사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무수히 재정의되기를 반복하며, 희대의 난제로 남아 있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벤야민의 아우라, 그리고 그 균열</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이 문제에 대한 개념적 바탕을 제시한 인물이 근대에 이미 존재하였다. 저명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아우라란 예술 작품의 ‘단 하나의 원본’이 지니는 현존감과 권위이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게 느껴지는 일회적 현상'이다. 즉 아우라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근원적인 거리감’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무리 모나리자 앞에 서 있어도 알 수 없는 황홀함과 신비로움을 느끼는 이유이다. 미디어에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나 대상을 두고 ‘아우라가 있다’고 칭하는 일상적 표현 역시, 이 개념이 통속화된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모나리자의 방에서 사람들이 그림을 향해 몸을 밀어붙이면서도 결국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만, 혹은 수많은 뒤통수 틈새로만 그림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역설적 장면은, 이 거리감으로서의 아우라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었다.</p>
<p><br /></p>
<p>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술적 복제 수단이 이 아우라를 쇠퇴시킨다고 분석했다. 예술 작품이 지닌 ‘지금-여기’라는 유일한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이 복제를 통해 대량 생산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원본이 지녔던 신성한 종교적·제의적 가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누구나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전시 가치가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p>
<p><br /></p>
<p>우리가 루브르의 아트숍에서 무수히 프린팅된 모나리자 굿즈를 손에 쥘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땀을 흘리며 모나리자의 방에서 한 장의 온전한 사진이라도 남기려 고군분투하는 이유도 바로 이 ‘아우라’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서사적 증거, 일종의 인증샷이 되어 그들을 아우라의 순간에 고정시킨다. 이것이 모나리자의 방에 스마트폰을 든 손들이 일제히 치켜 올라가 있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p>
<p>&nbsp;</p>
<p>&nbsp;</p>
<p><b><br /></b></p>
<p><b><span style="font-size: 18px;">백 년 뒤, 아우라는 어디로 향하는가</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초고는 1935년에 완성되었고, 이후 1936년 프랑스어판과 1939년 최종 개정판을 거치며 벤야민 스스로도 논의를 다듬어 나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20년대와는 근 백 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당시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감각과 지각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수 있다는 통찰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백 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는가.</p>
<p><br /></p>
<p>사실 현대의 예술 작용은 아직 ‘과도기의 과도기’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넓어졌고, 이를 생산·유통·소비하는 매체와 주체 역시 다양해지며 예술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여기에 더해 예술의 민주화로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의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로 인해 벤야민이 제시했던 아우라의 붕괴와 그 과도기적 과정은, 오늘날 디지털·AI 시대에 이르러 해소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차원의 모순과 한계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경고했던 위협들이 현대에 어떻게 재현되고 변형되었는지, 그 양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타난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아우라의 동시적 퇴화와 강화</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실제로 현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벤야민이 예견했던 일방향적 붕괴와는 달리 아우라는 퇴화한 동시에 강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고도화된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이 두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비문화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생산 과정이 과거보다 정교해짐에 따라 이른바 ‘짝퉁’을 만들어내는 기술 또한 만연해졌고, 대중의 일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이를 소비한다. SNS에서 레플리카 패션이나 인테리어가 떳떳하게 공유되고, 짝퉁인 줄 알면서도 구매하는 소비자층이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은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정교한 감별 기술로 짝퉁을 가려내려는 움직임과 ‘진품’을 찬양하는 세태가 공존한다.</p>
<p><br /></p>
<p> 소비문화에서 나타난 이 동시성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근대가 종교와 박물관 같은 공간을 중심으로 ‘제의적 공간’에서 ‘전시적 공간’으로 이동했다면, 현대는 그 전시적 공간을 넘어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근대에 만연했던 ‘레플리카’, 즉 복제품으로 인해 현대에는 원본과 사본을 가려내는 인증 기술이 제도적으로 발달했다. 미술품의 소유 이력을 추적하는 ‘프로버넌스 시스템’이나 ‘NFT·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진품 인증이 그 구체적 사례다. 이러한 신기술들이 감정가 역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였지만, 기존의 추적 과정을 보완하며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발달은 대중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쳐, 복제품에 대한 환멸과 멸시를 키우는 동시에 원본의 희소성에 대한 감각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p>
<p>&nbsp;</p>
<p>특히 AI 기술의 등장으로 시각적 형태나 현상만으로는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복제가 극단에 이르면 원본과 사본의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초과실재'의 상태가 도래한다고 보았는데, 오늘날의 상황은 이 초과실재적 조건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발 심리와 불쾌한 골짜기 효과 등으로 대중의 경계심은 오히려 극심해지게 된다. '레플리카', '기술복제', '투어리즘', '예술 민주화'라는 조건들이 뒤얽히며, 대중의 심리는 원본에 대한 아우라가 실질적으로 쇠퇴했음에도 오히려 그것을 향한 추구와 강박이 더욱 강해지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즉 아우라는 더 이상 존재 자체에서 자생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인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근대보다 한층 인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사물에서 관계와 서사로</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AI의 등장은 또 다른 변화를 낳았다. 그동안 소비자의 위치에 머물렀던 다수의 대중이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을 확보하게 되면서, 오히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와 같은 작품의 ‘뿌리’가 중요해진 것이다. 요컨대 근대의 아우라가 ‘사물’에서 시작되었다면, 현대의 아우라는 ‘관계’와 ‘서사’에 깃들어 있다.</p>
<p><br /></p>
<p>미술시장 안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뚜렷하다. 작가가 SNS나 브이로그를 통해 작업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 작품 가격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작품 자체보다 작가와의 만남이나 토크에 더 높은 프리미엄이 붙는 현상이 그 예다. 현대 미술이 개념미술에 가까워진 이유나 대중이 예술 앞에서 더 비판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러한 변화가 미술관과 박물관 같은 전시 기관들의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다.</p>
<p><br /></p>
<p>이는 비단 예술 작품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며, 현대의 총체적인 가치 평가 양상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과거 소비자는 제품의 스펙과 품질 __사물 그 자체__로 구매를 결정했다면, 현대 소비자는 브랜드의 창업 서사, 지속 가능성 스토리, 창립자 인터뷰 등 ‘이야기’를 함께 구매한다. 같은 품질의 제품이라도 브랜드 서사의 유무가 가격과 소비자 충성도를 좌우하는, '물건 자체'에서 '물건을 둘러싼 이야기'로의 이동이 발생하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예시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심미화된 정치, 그리고 그 이후</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결과적으로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지상주의에서, 대중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도록 이끄는 무기인 ‘정치적 변혁의 도구’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아우라가 급격히 붕괴하던 시기, 즉 벤야민 당대의 진단이었다.</p>
<p><br /></p>
<p>『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결론부에서 그는 파시즘이 대중의 감정을 동원하기 위해 정치를 ‘화려한 볼거리나 쇼’로 전환시킨다고 지적하며, 이를 ‘정치의 심미화’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파시즘이 예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세상을 바르게 깨닫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무기로 예술을 사용하는 ‘예술의 정치화’를 제시한 바 있다.</p>
<p><br /></p>
<p>파시즘은 표면적으로 종적을 감췄지만, 이 구도는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과거 파시즘이 선동을 위해 예술과 이미지를 동원했다면, 오늘날에는 정치 세력과 빅테크 기업 같은 거대 권력의 주체들이 ‘AI’와 정교한 ‘알고리즘’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실시간으로 조작하고 여론을 흔드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치의 심미화가 이제는 ‘정치의 알고리즘화’라는 더 은밀하고 정교한 형태로 옮겨간 셈이다. 이는 시각적 스펙터클의 남용이라는 점에서 예술적 측면과도 맞닿아 있다. 그들이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더 설득력 있다는 전략을 바탕으로, 대중들을 현혹하는 방법으로 감각적 이미지들을 도구로 삼는 ‘이미지 남용’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자사 제품의 실제 성능이나 가치를 피력하기보다, 인플루언서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이나 감각적이고 몽환적 이미지를 숏폼으로 대량 유포하여, 소비자의 이성적 소비를 마비시키고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들을 쉬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결국, 욕망의 문제일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다시 벤야민이 제시한 개념적 배경으로 돌아가 보자. 아우라의 붕괴는 개인이 사물을 ‘가까이로 끌어오려는 욕구’와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복제의 수용을 통해 극복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되며, 여기에 복제 기술의 발달이라는 조건이 결합되면서 원본이 지녔던 물리적 제약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은 결국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품어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해도 창작자이자 소비자로 기능하는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에 가깝다.</p>
<p><br /></p>
<p>이러한 인식 변화의 요인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얽혀 있어 모두 수합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제의 수단이 제재되지 않는 이상 아우라는 강화와 쇠퇴를 은밀하게 반복하리라는 점이며, 그 선택은 결국 우리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치 평가는 다수의 가치가 함께 움직여야 비로소 우리가 인식할 정도의 가치 형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에 비해 현대는 예술의 민주화로 인해 대중에게 훨씬 넓은 선택권이 보장되어 있다. 이제는 권위와 가치가 더욱 유연하고 유동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유동은 우리의 거대한 욕구를 통해 실현될 것이며, 앞으로 예술 작품의 가치 역시 ‘욕구-선택’의 굴레 안에서 다양한 양상을 번복하리라 예측해 본다.</p>
<p><br /></p>
<p>그리하여 모나리자의 방은 앞으로도 언제나 북적일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선택이 모나리자의 권위를 만들어냈듯, ‘만들어진 아우라’는 앞으로도 우리를 무수히 매혹할 것이다. 우리가 그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황홀경을 감각적으로 온전히 누릴 가치는 충분하지만, 이러한 권위의 기원을 꿰뚫어 보는 일은 우리를 또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예고하며 글을 마친다.</p>
<p>&nbsp;</p>
<p>&nbsp;</p>
<p><b>[참고문헌]</b></p>
<p>- 발터 벤야민. (2007).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길. (원저 1935년 출판)</p>
<p>- 장 보드리야르. (2001). 시뮬라시옹 (하태환, 역). 민음사. (원저 1981년 출판)</p>
<p>- 최성만. (2009). 기술과 예술의 열린 변증법 —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기. 뷔히너와 현대문학, 32, 183-204.</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문경란]]></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1:05:0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9</guid>
<title><![CDATA[[Opinion] 용은 왜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드라마]]]></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9</link>
<description><![CDATA[의 두 프리퀄, 과 를 비교하며 “압도적인 힘이 인간을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2346_sypqtpvg.jpg" alt="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nbsp;</p>
<p>타가리옌은 &lt;왕좌의 게임&gt; 세계관에서 용을 타고 웨스테로스를 정복해 오랜 세월 철왕좌를 지배했던 왕가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던 그 시절, '용의 어머니'로 큰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가 바로 대너리스 타가리옌이다.</p>
<p>
   <br />
</p>
<p>&lt;왕좌의 게임&gt;에서 처음 만난 타가리옌 가문은 이미 몰락한 왕조였다. 비세리스와 대너리스 남매는 한때 웨스테로스를 지배했던 가문의 마지막 후예처럼 등장했고, 과거 타가리옌이 얼마나 강대한 가문이었는지는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었다.</p>
<p>
   <br />
</p>
<p>그런데 그로부터 약 200년 전, 수많은 타가리옌이 살아 있었고 여러 용이 하늘을 날던 이 가문의 전성기를 다룬 작품이 있다.</p>
<p>
   <br />
</p>
<p>바로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힘이 가족을 파괴할 때,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2549_udahziuw.jpg" alt="2-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
</p>
<p>&nbsp;</p>
<p>&nbsp;</p>
<p>시리즈는 '후계자' 문제에서 시작된다. 남성 후계자가 없었던 비세리스 1세는 딸 라에니라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후 두 번째 아내 알리센트 하이타워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서 왕가에는 서서히 균열이 생긴다.</p>
<p>&nbsp;</p>
<p>라에니라를 지지하는 세력과 알리센트의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갈리고, 그들의 자식들까지 갈등에 휘말리면서 비세리스가 죽은 뒤 왕가는 결국 내전으로 치닫는다.</p>
<p>
   <br />
</p>
<p>&lt;왕좌의 게임&gt;에서는 '이 캐릭터가 마음에 드는데' 싶으면 그 인물이 죽을까 봐 걱정해야 했다면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에서는 애정을 갖고 마음 편히 응원할 만한 인물 자체가 드물다.</p>
<p>
   <br />
</p>
<p>라에니라, 알리센트, 다에몬, 아에곤 등 누구 하나 완전히 정의로운 인물로 남지 않고, 권력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 도덕성을 잃어간다.</p>
<p>
   <br />
</p>
<p>이는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특정 인물에게 서사가 집중되지 않아 이른바 '주인공 버프' 없이 여러 인물이 비교적 동등하게 그려진다는 점은 흥미롭다. 반면 뚜렷한 중심인물이 없는 만큼 각 인물의 심리가 더욱 세밀하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때로는 그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극적으로 흐르면서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 순간도 있다.</p>
<p>
   <br />
</p>
<p>그래서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은 '누가 왕좌에 앉아야 하는가'보다 '권력 앞에서 어떻게 한 가족이 서로를 파멸시키게 되었는가'를 지켜보게 만드는 작품에 가깝다.</p>
<p>
   <br />
</p>
<p>어쩌면 이 가문의 인물들은 모두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비상식적인 행동마저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p>
<p>
   <br />
</p>
<p>그 비극을 가장 거대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용들의 춤'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2811_yfriqdew.jpg" alt="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350px;" />
</p>
<p>&nbsp;</p>
<p>&nbsp;</p>
<p>당시 여러 타가리옌 왕족과 그 혈족들은 각자의 용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같은 가문의 사람들이 용을 타고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p>
<p>
   <br />
</p>
<p>타가리옌을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최강의 가문으로 만들어준 힘이, 역설적으로 서로를 가장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 힘이 된 셈이다.</p>
<p>
   <br />
</p>
<p>용과 내전, 왕가의 갈등으로 작품의 스케일은 거대하다. 하지만 끊임없는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오히려 웨스테로스라는 세계가 왕좌 주변에 한정되어 보이는 순간도 있다.</p>
<p>
   <br />
</p>
<p>그리고 '용들의 춤'에서 수많은 용이 죽고, 살아남은 용들마저 점차 자취를 감추면서 타가리옌의 시대 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간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용들의 춤 이후, &lt;세븐 킹덤의 기사&gt;</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2936_yfvixsdw.jpg" alt="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lt;세븐 킹덤의 기사&gt;는 '용들의 춤'이 끝나고 몇 세대가 지난 뒤 대너리스가 태어나기 한참 전을 배경으로 한다. 타가리옌 가문은 여전히 철왕좌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들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었던 용은 이미 사라진 시대다.</p>
<p>
   <br />
</p>
<p>이 시리즈는 파국과 비극이 끊이지 않았던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p>
<p>
   <br />
</p>
<p>무엇보다 시청자가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애정을 갖고 그들의 여정을 응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lt;왕좌의 게임&gt;에 더 가까운 인상을 준다.</p>
<p>
   <br />
</p>
<p>이야기의 중심에는 떠돌이 기사 던칸과 그의 종자 에그가 있다. 권력과 욕망에 잠식되어 가던 앞선 작품의 인물들과 달리, 두 사람은 자신만의 도덕성과 선의를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만큼 이야기를 따라가는 부담도 적고,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디로 향하게 될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p>
<p>
   <br />
</p>
<p>대신 작품의 규모는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에 비해 훨씬 작다.</p>
<p>
   <br />
</p>
<p>왕위를 둘러싼 대규모 전쟁이나 용들의 전투 대신 한 떠돌이 기사의 여정과 토너먼트,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p>
<p>
   <br />
</p>
<p>하지만 오히려 그 작은 규모 덕분에 이전 작품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웨스테로스의 모습이 드러난다.</p>
<p>
   <br />
</p>
<p>&lt;왕좌의 게임&gt;과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이 주로 왕족과 대귀족의 시선으로 웨스테로스를 바라봤다면, &lt;세븐 킹덤의 기사&gt;는 그보다 낮은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왕과 영주들이 만들어가는 거대한 역사보다, 그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기사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40938_wrztpgqb.png" alt="KakaoTalk_20260809_140836166.pn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그렇다고 타가리옌 가문의 폭력성과 광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에서는 왕족들의 갈등과 권력 다툼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었다면, &lt;세븐 킹덤의 기사&gt;에서는 그들의 횡포가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던칸과 에그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p>
<p>
   <br />
</p>
<p>'용들의 춤'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불과 10여 년 전 첫 블랙파이어 반란이라는 또 다른 내전이 있었다. 작품에서는 그 반란이 남긴 흔적과 함께 반복되는 왕가의 권력 다툼에 지친 평범한 사람들의 반감과 피로감도 엿볼 수 있다.</p>
<p>
   <br />
</p>
<p>왕족에게는 왕위와 혈통을 둘러싼 역사였겠지만,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뒤흔드는 큰 전쟁의 반복이었던 셈이다.</p>
<p>
   <br />
</p>
<p>두 주인공 역시 &lt;왕좌의 게임&gt;과 연결되어 있다. 던칸은 훗날 웨스테로스에 이름을 남기는 '키 큰 던칸 경'이며, 그의 종자 에그 역시 &lt;왕좌의 게임&gt;에서 마에스터 아에몬이 죽음을 앞두고 떠올렸던 인물이다.</p>
<p>
   <br />
</p>
<p>&lt;왕좌의 게임&gt;에서는 이미 전설과 기억 속 존재로만 언급되었던 두 사람을, &lt;세븐 킹덤의 기사&gt;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불러낸다. 특히 에그가 훗날 어떤 위치에 서게 되는지를 알고 이 이야기를 바라보면, 평범한 종자로 시작한 그의 여정이 지닌 의미도 더욱 크게 다가온다.</p>
<p>
   <br />
</p>
<p>물론 웨스테로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 만큼 &lt;세븐 킹덤의 기사&gt;에도 비극과 잔혹한 장면은 존재한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보다 훨씬 가볍고 부담도 적다.</p>
<p>&nbsp;</p>
<p>그런 점에서 스토리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노출·선정적 장면들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으로 남았다. 잔혹한 장면이 서사와 맞물려 있는 것과 달리, 이런 장면들은 작품이 가진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와 오히려 어긋나 보였다.</p>
<p>
   <br />
</p>
<p>그럼에도 &lt;세븐 킹덤의 기사&gt;는 탄탄한 이야기와 던칸, 에그라는 두 인물의 매력 덕분에 다음 여정을 계속 지켜보고 싶게 만드는 시리즈였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용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 것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3330_pswheyek.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nbsp;</p>
<p>&nbsp;</p>
<p>&lt;하우스 오브 드래곤&gt;이 한 가문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거대한 스케일로 보여준다면 &lt;세븐 킹덤의 기사&gt;는 그 거대한 역사 아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작은 인물들을 바라본다.</p>
<p>
   <br />
</p>
<p>아이러니하게도 용과 전쟁이 사라지고 이야기의 규모가 작아졌을 때, 웨스테로스라는 세계는 오히려 더 넓게 보이기 시작한다.</p>
<p>
   <br />
</p>
<p>'용'이라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타가리옌은 자신들의 욕망을 제어해야 할 이유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p>
<p>&nbsp;</p>
<p>이 세계에 필요했던 것은 더 거대한 전쟁이나 더 많은 용이 아니라, 왕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웨스테로스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p>
<p>&nbsp;</p>
<p>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비단 판타지 속 왕가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힘을 손에 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p>
<p>
   <br />
</p>
<p>그런 의미에서 타가리옌의 '용'은 단순한 판타지적 상징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큰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순간, 그 힘은 사람을 지켜주는 무기가 아니라 욕망을 키우고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p>
<p>&nbsp;</p>
<p>어쩌면 힘을 쥔 순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용'이 생겨나는 건 아닐까.</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33134_vbbklqoa.jpg" alt="아트인사이트 명함.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온유]]></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2:22:5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1</guid>
<title><![CDATA[[리뷰 URL 취합] 사진의 얼굴]]></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1</link>
<description><![CDATA[60년간 한국 현대사의 얼굴 기록한 일본 포토저널리즘의 거장 구와바라 시세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div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20px;"><b>사진의 얼굴</b></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댓글로</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고한 리뷰 링크를</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입해 주세요!</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자신의 글 외에도,</div>
<div align="center">다른 구성원분들이 쓴 글을</div>
<div align="center">이 공간에서</div>
<div align="center">스스럼없이 향유해 보셨으면 합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문화예술은</div>
<div align="center">서로 소통을 하고</div>
<div align="center">함께 향유했을 때에</div>
<div align="center">더욱 다채로워지고</div>
<div align="center">풍요로워집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이름 + URL 링크</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자신의 글을&nbsp;보실 분들께 하실 말씀!</span></div>
<div align="center">을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3557_pdlzyalz.jpg" alt="사진의얼굴_메인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2:36:0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60</guid>
<title><![CDATA[[리뷰 URL 취합] 광대 올림픽 : 희로애락]]></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60</link>
<description><![CDATA[단 하루, THE 광대와 신중년 광대,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하는 연희 올림픽]]></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div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20px;"><b>광대 올림픽 : 희로애락</b></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댓글로</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고한 리뷰 링크를</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입해 주세요!</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자신의 글 외에도,</div>
<div align="center">다른 구성원분들이 쓴 글을</div>
<div align="center">이 공간에서</div>
<div align="center">스스럼없이 향유해 보셨으면 합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문화예술은</div>
<div align="center">서로 소통을 하고</div>
<div align="center">함께 향유했을 때에</div>
<div align="center">더욱 다채로워지고</div>
<div align="center">풍요로워집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이름 + URL 링크</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자신의 글을&nbsp;보실 분들께 하실 말씀!</span></div>
<div align="center">을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23507_muqdrhdt.jpg" alt="[연희집단 The 광대] 광대 올림픽 희로애락 포스터 이미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2:35:1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6</guid>
<title><![CDATA[[작은 집] 꿈을 찾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6</link>
<description><![CDATA[꿈을 찾는 20대의 모습을 타이포그라피를 활용해 표현해 본 일러스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01558_tfdeixmu.jpg" alt="IMG_1259 copy.jpg" style="width: 600px; height: 600px;" /></p>
<p style="text-align: center;">[illust 한수빈]</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어디가 나의 길인지 알 수 없는 청춘의 한 가운데</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끊임없이 꿈을 찾아 이곳저곳을 탐험한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nbsp;방향을 잃어 당황할때도 있지만</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그 모든 순간이 빛나는 흔적이 되기를 바란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9101724_xewcurmv.jpg" alt="인사이트 에디터JPG.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한수빈]]></dc:creator>
<pubDate>Sun, 09 Aug 2026 10:18:4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1</guid>
<title><![CDATA[[리뷰] 자기혐오의 바다에서, 연극 &#039;플리백&#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1</link>
<description><![CDATA[당신의 상처가 나의 위로가 되는 이상한 이야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201731_fpwunbnb.jpg" alt="1. 플리백Fleabag_통합.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left;">내 인스타그램 릴스는 외국 콘텐츠가 많이 등장한다. 드라마 플리백의 유머 장면은 꽤 단골이다. 연필 머리가 된 언니를 프렌치 스타일이라며 어떻게든 북돋으려던 주인공, 페미니스트로 가득 찬 연설장에서 완벽한 몸매를 위해 목숨을 날릴 수 있다며 손을 들던 둘. 스토리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연극 플리백이 막연히 웃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맞았다. 한 30% 정도.</p>
<p><br /></p>
<p>외로움, 괴로움, 공허함, 분노, 처절함.</p>
<p><br /></p>
<p>성적인 것이든 자조적인 분노이든, 끊임없이 관객에게 농담을 던지는 주인공은 겉으로는 자유분방한 영혼이나 속이 곪다 못해 터져있다. 애인은 집안 가전을 다 들고 떠났고, 둘도 없는 단짝은 아예 세상을 떠난 데다, 부모와의 관계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위해 낯선 이와의 만남을 자처하고, 빈털터리의 동아줄 같은 면접은 거하게 말아먹는다. 이 모든 게 꼬인 이유는 분명하다. 분명하게 보인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무언가라서.</p>
<p><br /></p>
<p>플리백은 자학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나를 얼마나 미워할 수 있는지, 그 혐오가 나를 어떻게 망치고, 내가 어떤 괴물이 되어 주변 모든 것을 망치는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그런데도 얼마나 희극적인지. 불편하게 웃기고 파격적인 이야기에 담긴 고뇌는 남 일 같지 않다. 우리 모두 나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받아들이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p>
<p><br /></p>
<p>주인공이 잘 해보려고 애를 쓸 때마다, 그리고 자꾸만 그것을 꼬아버리는 선택을 할 때마다 나는 모순된 감정을 느낀다. 그녀의 선택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공감이 가는 거다. 노트에 필기하다가 화이트로 한 줄을 통으로 지워야 해 아예 페이지를 찢어버리는 일, 블록을 조립하다 부품이 하나 빠진 걸 알고 박살 내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는 행위. 인생은 연필로 쓰지 않으므로 꽁다리에 지우개가 없다. 이미 망친 상태에서 다른 걸 잘해보려고 애쓰느니 없던 것으로 만들겠다. 가질 수 없으니 부숴버리겠어.</p>
<p><br /></p>
<p>인간에게는 자기 파괴적 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겐 그 욕구가 아주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인생의 모든 면에서 일어난다. 우리 모두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플리백의 주인공처럼 행동해 봤다. 그러니 그녀의 "그냥 꺼져요!" 행위는 욕망의 대리 실현이자 그럴 수 있었던 가능성이다. 눈물 나는 당신의 상처가 나의 위로로 돌아온다. 나만 내가 싫은 게 아니라고, 나만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무대라는 권위의 상징이자 가상의 친구가 이야기하면, 우리의 실수와 그르침이 사면받는다.</p>
<p>&nbsp;</p>
<p>극소수지만 완벽한 사람들이 있다. 달리 말해 본다. 자기혐오와 파괴라는 감정에 심드렁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이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그저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로 생각할지, 아니면 초현실주의 미술을 볼 때처럼 아득하게 느낄 뿐일지. 조심스럽지만, 그들과 친구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든 밑바닥의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고군분투하는 이들이야말로 사람으로 느껴진다. '나와 같은' 사람 말이다.</p>
<p><br /></p>
<p>플리백은 라이센스화를 거쳤지만 한국 정서로 번안된 작품은 아니다. 그렇기에 서양 콘텐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권하고 싶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더 많을 것이다. 또 많은 1인극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김주연 배우의 무대를 감상했는데, 이 많은 대사와 휘몰아치는 감정을 어떻게 혼자서 외우고 보여줄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은 봐야 한다고 주장해 본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유다연]]></dc:creator>
<pubDate>Sat, 08 Aug 2026 20:17:5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52</guid>
<title><![CDATA[[Review] 저항이 담긴 예술이란 - 뱅크시 : Still Here]]></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52</link>
<description><![CDATA[ 리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223008_igmeyhsd.jpg" alt="뱅크시_Still Here_포스터_260619.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0px;" />
</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예술은 위로 받지 못한 자들을 위로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수십 년 동안 정체를 숨겨온 뱅크시. 그는 영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예술가이다.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벽’,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메시지 짙은 ‘그래피티’와 개성이 분명한 작품들일 것이다.</p>
<p>
   <br />
</p>
<p>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그가 전한 메시지는 언제나 큰 공감과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 칭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선다. 그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동시에 그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겨눈다.</p>
<p>
   <br />
</p>
<p>그런 그에게 있어 벽은 ‘거대한 무기’이자 그만의 ‘캔버스’다. &lt;뱅크시 특별전&gt;에서는 실제 벽을 마주할 순 없지만 사진과 모형을 통해 그 공간이 지녔던 분위기와 뱅크시가 그 벽에 담고자 했던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어 좋았다.&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223202_kohokmlx.jpg" alt="Flying Copper _Banksy.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4px;" />
</p>
<p>&nbsp;</p>
<p>&nbsp;</p>
<p>흔히 ‘벽’이라 하면 거리와 거리를 가로막는 장벽, 공간을 가로지르는 구조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 드러내는 건축물이 떠오른다. 하지만 동시에 벽은 불특정 다수가 돈을 내지 않고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그러니까 예술이 대가 없이 펼쳐지는 하나의 도화지이기도 하다.</p>
<p>
   <br />
</p>
<p>시간과 돈을 들여 전시를 보러 가지 않는 이상,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술’은 그저 사치의 영역일 뿐이다. 아무리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해도 애초에 그 앞에 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메시지는 닿을 곳을 잃는다.</p>
<p>
   <br />
</p>
<p>뱅크시는 벽이라는 매체를 택함으로써 이 구조를 뒤집는다. 불특정 다수를 한순간에 하나의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 공간은 누구나 흔히 오가는 영국의 길거리였고 그곳에서 그의 작업을 둘러싼 토론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p>
<p>
   <br />
</p>
<p>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평소 사회 문제에 무심했던 이들의 시선까지 붙잡아왔다.</p>
<p>
   <br />
</p>
<p>다만 그의 작업은 벽에 칠한 단순한 그래피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시의성이 짙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전 세계 특정 가능한 권력자들의 심기를 정확히 건드린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223055_rhduifan.jpg" alt="Bomb Love(Bomb Hugger)_Banksy.jpg" style="width: 700px; height: 976px;" />
</p>
<p>&nbsp;</p>
<p>&nbsp;</p>
<p>전시를 둘러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유머를 적극 활용해 시대에 저항하고 풍자하는 예술가이다.</p>
<p>&nbsp;</p>
<p>그는 미술시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겨냥하며 전쟁과 폭력, 권력과 감시에 맞선다. 전시에 소개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몰랐던 맥락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작가가 지향하는 작품 세계 전체를 조금 더 선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p>
<p>
   <br />
</p>
<p>‘예술은 위로 받지 못한 자들을 위로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의 작업은 유머러스한 표현 아래 언제나 묵직한 메시지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이 냉소가 아니라 ‘희망’을 향해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p>
<p>
   <br />
</p>
<p>전시 공간을 지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세상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어 인상 깊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전시였다.</p>
<p>&nbsp;</p>
<p>11월 3일까지 서울 더현대에서 열리기 때문에 시간이 된다면 한 번쯤 가보길 추천한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예은]]></dc:creator>
<pubDate>Sat, 08 Aug 2026 22:31:1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948</guid>
<title><![CDATA[[Review] 웃음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 뱅크시 특별전 &#039;BANKSY: Still Here&#039;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948</link>
<description><![CDATA[풍자와 유머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스트리트 아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3523_zazrarmn.jpg" alt="20260807_13483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16px;" /></p>
<p>&nbsp;</p>
<p>&nbsp;</p>
<p>뱅크시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풍자’와 ‘직시’다.</p>
<p><br /></p>
<p>그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작품 안으로 끌어온다. 전쟁과 빈곤, 난민, 자본주의와 소비사회, 권력과 차별처럼 쉽게 바라보기 어려운 문제를 특유의 유머와 간결한 이미지로 표현한다.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뱅크시는 자신의 얼굴 대신 작품으로 자신을 드러낸다.</p>
<p><br /></p>
<p>이번에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열린 뱅크시 특별전 <banksy: still="" here=""><banksy: still="" here=""><banksy: still="" here="">'BANKSY: Still Here'를 찾았다.</banksy:></banksy:></banksy:></p>
<p><br /></p>
<p>전시는 ‘Intro: Mask’를 시작으로 ‘Wall’, ‘Laugh Now’, ‘Icon’, ‘Peace’, ‘Outro: After the Mask’까지 이어졌다. 뱅크시의 정체를 쫓기보다 그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해 왔는지를 따라가는 구성이다.</p>
<p>&nbsp;</p>
<p>&nbsp;</p>
<p><br /></p>
<p><span style="font-size: 18px;"><b>웃게 만들고, 다시 현실을 보게 한다</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3831_xxusvklu.jpg" alt="20260807_135156.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5px;" /></p>
<p>&nbsp;</p>
<p>&nbsp;</p>
<p>뱅크시의 작품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표현 방식이었다.</p>
<p><br /></p>
<p>처음에는 피식 웃게 만든다. 단순하고 익살스러운 이미지에 시선이 머문다. 그런데 작품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웃음 뒤에 숨겨진 현실이 보인다. ‘하하’하고 웃었던 순간이 어느새 ‘헉’으로 바뀐다.</p>
<p><br /></p>
<p>뱅크시는 무겁고 심각한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머와 풍자를 이용해 관람객이 스스로 작품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순간 우리가 외면했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나는 이런 표현 방식에 매료됐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거리에 그려진 그림, 세상에 던지는 질문</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4137_frulsbxv.jpg" alt="20260807_130443.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2px;" /></p>
<p>&nbsp;</p>
<p>&nbsp;</p>
<p>뱅크시에게 벽은 단순한 캔버스가 아니다.</p>
<p><br /></p>
<p>영국의 거리부터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의 분쟁 현장까지, 그가 작품을 남긴 벽에는 권력과 통제, 차별과 전쟁이라는 현실이 담겨 있다. 전시장에서는 이러한 거리의 벽을 그대로 재현해 스트리트 아트가 가진 거친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고통받는 아이들, 난민의 모습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p>
<p><br /></p>
<p>그림은 말이 없지만 질문은 선명하다.</p>
<p><br /></p>
<p>왜 전쟁은 계속되는가.</p>
<p>&nbsp;</p>
<p>왜 누군가는 안전한 곳에서 살아가고 누군가는 자신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가.</p>
<p>&nbsp;</p>
<p>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을 쉽게 지나치는가.</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파쇄된 그림이 더 비싸진 이유</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4328_txabcfff.jpg" alt="20260807_132856.jpg" style="width: 700px; height: 1245px;" /></p>
<p>&nbsp;</p>
<p>&nbsp;</p>
<p>뱅크시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girl with="" balloon=""><girl with="" balloon=""><girl with="" balloon="">Girl with Balloon'이다.</girl></girl></girl></p>
<p><br /></p>
<p>빨간 풍선을 향해 손을 뻗는 소녀의 모습은 뱅크시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특히 이 작품이 유명해진 계기는 소더비 경매장에서 일어난 파쇄 퍼포먼스였다. 작품이 낙찰되는 순간 액자 안에 설치해 둔 파쇄 장치가 작동했고, 그림은 눈앞에서 잘려 내려갔다. 작품을 파괴하는 순간이 오히려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p>
<p>&nbsp;</p>
<p>뱅크시는 자본주의와 미술시장을 비판하면서도 그 시스템 자체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전시장에서는 이러한 뱅크시의 역설적인 태도를 여러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p>
<p>&nbsp;</p>
<p><br /></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미술관을 풍자하고, 디즈니랜드를 비틀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4929_diqepphz.jpg" alt="20260807_133509.jpg" style="width: 700px; height: 1245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5019_imdlvtmf.jpg" alt="20260807_13391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9px;" /></p>
<p>&nbsp;</p>
<p>&nbsp;</p>
<p>뱅크시의 풍자는 거리의 벽에만 머물지 않는다.</p>
<p><br /></p>
<p>유명 미술관의 전시품을 패러디하거나, 미술관이라는 권위 자체를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중에서도 ‘디즈멀랜드(Dismaland)’는 인상적인 사례다. 디즈니랜드의 환상적인 세계를 비틀어 만들어낸 공간에는 즐거움 대신 불편한 현실이 들어 있다. 놀이공원이라는 익숙한 형식을 이용해 자본주의와 소비사회, 사회적 문제를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p>
<p><br /></p>
<p>익숙한 것을 조금 비틀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질문이 생겼다.</p>
<p>&nbsp;</p>
<p>뱅크시의 작품이 가진 힘은 바로 이런 데 있다고 느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누가 예술을 결정하는가</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5136_sfeechth.jpg" alt="20260807_133835.jpg" style="width: 700px; height: 805px;"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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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전시를 보다가 ‘페컴 록(Peckham Rock)’ 이야기를 보았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뱅크시는 과거 영국박물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전시했다. 선사시대 유물처럼 보이는 작품을 전시관 안에 슬쩍 가져다 놓았고, 며칠 동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p>
<p><br /></p>
<p>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려면 보통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이 붙고, 전시를 위한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뱅크시는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그냥 작품을 가져다 놓았다. 더 웃긴 것은 그 작품이 선사시대 유물처럼 보였다는 점이다.</p>
<p><br /></p>
<p>미술관이 무엇을 ‘예술’이라고 인정하는지, 누가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지를 뱅크시는 아주 황당한 방식으로 묻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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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게 미술관 안에 있으니까 진짜 유물처럼 보이는 건가?’</p>
<p><br /></p>
<p>뱅크시의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심각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피식 웃게 만든다. 웃고 난 뒤에야 그 안에 담긴 풍자를 알아차리게 한다. 그는 예술의 규칙을 지키면서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예 규칙을 살짝 망가뜨리고 그 틈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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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span style="font-size: 18px;">예술은 편안한 사람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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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5343_gkblxemh.jpg" alt="20260807_14002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11px;"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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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전시를 보고 나니 뱅크시의 정체가 궁금하기보다 그의 작품이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이 궁금해졌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있지만, 작품 속 메시지는 숨기지 않는다.</p>
<p><br /></p>
<p>오히려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서 누구보다 솔직하게 현실을 바라본다. 전쟁과 빈곤, 자본주의와 소비, 권력과 차별. 우리가 익숙해져서 무심코 지나쳤던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p>
<p><br /></p>
<p>뱅크시 특별전은&nbsp;단순히 유명한 작품을 감상하는 전시가 아니었다. 작품을 보며 웃었다가, 그 웃음 뒤에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경험에 가까웠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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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뱅크시는 여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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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하지만 그의 그림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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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가 우리에게 던질 질문 역시 끝나지 않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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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8155550_vxvyilei.jpg" alt="강효정 에디터 태그 명함.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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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CDATA[강효정]]></dc:creator>
<pubDate>Sat, 08 Aug 2026 15:35: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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