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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트인사이트</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link>
<description>아트인사이트 – 문화예술은 &#039;소통&#039;입니다 - ART insight</description>
<lastBuildDate>Sun, 27 Sep 2026 09:15:51 +0900</lastBuild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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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 isPermaLink="false">82520</guid>
<title><![CDATA[[Review] 서로가 서로에게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20</link>
<description><![CDATA[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여름이 지나며 아직 기계는 눈치채지 못한 계절의 시차로 인해 지는 해로 밝은 하늘 아래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은 이른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한다. 일 년에 아주 짧게 존재하는 이 시기에는 만남이 더 애틋하고, 헤어짐이 아쉬운 마음이 가득 채워진다. 이맘때가 되면 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다. 1830년대 파리의 다락방에서 원고를 태워 난방하는 가난한 시인 로돌포의 이야기를 담은 &lt;라 보엠&gt;이다.</p>
<p>&nbsp;</p>
<p>가난한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로돌포는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돈이 없어 자신이 쓴 원고를 난로에 던져 넣으면서도 그는 시를 쓰고, 친구들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살아간다. 올해 9월, 로돌포를 떠올리던 계절을 살아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시인을 만났다. 뉴욕의 우체국에서 37년째 일하고 있는 에드 색스버거다.</p>
<p>&nbsp;</p>
<p>젊은 시절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은 뒤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은 에드는 로돌포와 달리 더 이상 자신을 시인이라 소개하지 않는다. 평소와 같이 우체국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에드 자신조차 오래전에 지나온 일로 여기고 있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찾아온다. 자신과 비슷한 모자를 쓴 젊은 남성은 낡은 시집 한 권을 들고 자신을 오래도록 기다려온 듯 서 있다. 그의 이름은 마이어스이다.</p>
<p>&nbsp;</p>
<p>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이야기 나누는 동료들의 모임에서 그의 시를 발견하고 자신처럼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며 모임에 초대하지만, 에드는 정중하게 감사함을 표현하되 선뜻 따라나서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드에게 시를 쓰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시간이었고, 지금의 그는 우체국 직원으로 더 이상 새로운 시를 쓰지는 않지만 여전히 글을 매일 읽으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제법 만족하고 있다.</p>
<p>&nbsp;</p>
<p>퇴근 후에는 오래된 펍에 들러 친구들과 당구를 치며 삶을 즐기고 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껏 잘 이어져 온 삶이다. 수십 년 전 붙여진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려놓은 뒤에도 그의 시간은 별 탈 없이 흐르고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7072410_iszdxltq.jpg" alt="메인 포스터.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p>
<p>&nbsp;</p>
<p>&nbsp;</p>
<p>그런 에드가 산책 중 우연히 마이어스를 다시 만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번에도 반갑게 에드를 맞이하는 청년은 그가 전에 소개한 젊은 예술가들의 모임, ‘열정 클럽’으로 그를 이끌고 간다. 그곳에는 시인과 극작가, 비평가, 배우를 비롯해 예술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p>
<p>&nbsp;</p>
<p>그들에게 에드는 그저 오래전에 시를 썼던 우체국 직원이 아니다. 세상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잊힌 시인이자, 자신들이 우연히 발견하며 흠모하게 된 숨겨진 대가다. 이들은 에드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어린 친구들의 열정을 조금 멀찍이서 바라보던 에드도 자신을 향한 존경과 환대를 조금씩 즐기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시간이 존재했음을 깨달으며 한동안 잠들어 있던 그의 예술가적 욕망도 함께 깨어난다.</p>
<p>&nbsp;</p>
<p>그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은 우아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아닌, 에드가 퇴근 후에 늘 찾던 낡은 펍에서였다. 오래도록 당구를 치며 어울려온 친구들에게 시인이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에드에게서 전과 다른 묘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얼마 전까지 그들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과 그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 예술가와 평범한 사람으로 구분한다.</p>
<p>&nbsp;</p>
<p>자신을 알아보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 뒤 에드는 오래도록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을 이전과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타인의 인정은 에드의 과거를 바꾸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집의 상황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현재의 에드가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인 상태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얻는 역할인지 생각하게 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7072513_wcfnorkx.jpg" alt="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2px;" /></p>
<p>&nbsp;</p>
<p>&nbsp;</p>
<p>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한 사람은 에드뿐만이 아니다. 열정 클럽의 젊은이들은 대중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을 경계하고 있다. 가난한 다락방에서도 시를 썼던 로돌포처럼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험난한 예술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길 원한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에는 묘하게 모순이 있다. 대중의 취향과 기존 예술계의 권위를 경계하면서도 누구보다 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p>
<p>&nbsp;</p>
<p>자신들의 작품이 주류 문단과 언론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세상이 자신들의 예술을 알아보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낡은 권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그 오래된 예술의 계보에 속해 있다고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에드는 절묘하다.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수십 년 동안 잊혀 있었던 시인이다. 에드가 특별한 예술가일수록 그를 발견한 자신들의 안목 역시 특별해지는 것 같다.</p>
<p>&nbsp;</p>
<p>모두가 갖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고르고, 남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알아보는 행위에는 취향을 넘어 한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우리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좋아했던 음악가와 아무도 모를 때 먼저 즐겨 읽었던 작가를 이야기할 때 은근한 자부심이 따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마이어스는 그의 말처럼 에드의 시를 정말 사랑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시인을 발견한 자신을 사랑했던 것일지 생각하게 된다.</p>
<p>&nbsp;</p>
<p>둘 중 하나만 진실일 필요는 없다. 마이어스는 정말 에드의 시를 좋아했을 것이다. 다만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알아보는 자신의 안목을 사랑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뒤섞인다. 열정 클럽에게 에드는 자신들이 믿는 예술을 증명해주는 대가가 되고, 반대로 그들의 열렬한 환대는 에드에게 자신이 여전히 시인일 수 있다는 확신을 건넨다.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은 진짜 예술가’라고 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관계가 된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7072528_qiamnusx.jpg" alt="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리뷰를 시작하며 떠올린 &lt;라 보엠&gt;을 다시 생각해본다. 푸치니가 그린 19세기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은 훗날 조너선 라슨의 &lt;렌트&gt;를 통해 20세기 뉴욕으로 옮겨왔다. 도시와 시대는 달라졌지만 가난과 불안정한 미래 속에서도 예술을 놓지 않는 보헤미안의 모습은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그리고 &lt;나의 사적인 예술가&gt;의 뉴욕에는 다시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있다.</p>
<p>&nbsp;</p>
<p>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보헤미안 예술가 로돌포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글로리아다. 열정 클럽의 다른 이들이 자신이 어떤 예술가인지 끊임없이 말하며 확인받고 싶어할 때, 배우로 살아가는 그녀의 무대 밖 삶은 화려하지 않다. 충분하지 않은 수입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화려한 무대에 올라간다. 예술가라는 이름을 설명하는 시간에 예술 행위를 실제 세상에 나아가는 사람이다.</p>
<p>&nbsp;</p>
<p>글로리아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녀가 예술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열정 클럽은 예술과 자본을 구분하려 하지만, 실제로 예술가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작품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선택되어 그 작품을 보여주며 받는 대가로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예술과 대중과 생계는 생각만큼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글로리아는 그 불편한 현실을 살아간다. 자신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무대에 오른다.</p>
<p>&nbsp;</p>
<p>처음에는 열정 클럽의 젊은이들에게서 &lt;라 보엠&gt;의 보헤미안을 떠올릴 줄 알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글로리아에게서 로돌포의 모습을 발견했다.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취하는 대신 오늘 해야 할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 가난과 생계를 낭만으로만 포장하지 않으면서 다음 작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을 보며 자연스레 응원하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 노래하고 연기했던 사람이 다음 발걸음을 옮길 기회를 얻었다는 소식이 더없이 기뻤다.</p>
<p>&nbsp;</p>
<p>열정 클럽을 가짜 예술가라 부르고 글로리아만을 진짜 예술가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게 쉽게 선을 긋는 순간 관객들 역시 영화 속 인물들처럼 누가 예술가이고 아닌지를 판정하려 들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영화의 주인공 에드를 설명할 수 없다. 에드는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시를 쓰지 않았다. 마이어스가 그를 발견한 순간 다시 시인이 되었고, 열정 클럽이 이후에는 다시 시인이 아닌 사람이 되는 걸까.</p>
<p>&nbsp;</p>
<p>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이어스가 에드를 재발견하면서 예술가로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다시 바라보게 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는 누군가에게 발견되기 전에도 시를 썼던 사람이고, 그 시간은 이후의 삶이 평범했을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7072605_mgmeuhht.jpg" alt="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영화를 보고 난 뒤에 원제인 ‘Late Fame’과 한국 제목인 ‘나의 사적인 예술가’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점이 흥미롭다. ‘늦게 찾아온 명성’이라는 원제가 에드에게 시선을 둔다면, ‘나의 사적인 예술가’라는 제목에서는 자연스럽게 마이어스가 떠오른다. 하나는 뒤늦게 ‘발견된’ 사람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발견한’ 사람의 시선으로 제목이 다르게 읽힌다. 관객들은 어떤 제목에 더 마음이 갈지 문득 궁금해진다.</p>
<p>&nbsp;</p>
<p>마이어스가 가진 에드를 향한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예술가를 발견했다는 기쁨,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가치를 알아봤다는 자신의 자부심이 담긴 ‘사적인 예술가’로 시작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에드는 마이어스가 재발견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그의 시 역시 누군가가 다시 펼쳐보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예술가이다.</p>
<p>&nbsp;</p>
<p>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짜 예술가인지를 가리기보다는, 왜 그 표현을 열정 클럽의 회원들은 그토록 필요로 하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예술가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아무도 모르는 예술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세상의 인정과 무관하게 예술하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지만 쉽게 떼어낼 수 없다.</p>
<p>&nbsp;</p>
<p>가난한 다락방에서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쓴 원고를 불태우면서도 로돌포는 시인이었고, 대중을 만날 더 큰 무대를 만나 도시를 떠나는 글로리아는 배우이며, 수십 년 동안 시를 쓰지 않은 에드에게도 시인이었던 시간이 남아 있다. 영화가 끝나고 에드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p>
<p>&nbsp;</p>
<p>우체국 직원 에드는 다시 평소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제 자신이 한때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조금 다르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발견된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다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으로 돌아온 에드는 영화의 처음과 같은 사람일 수 없다.</p>
<p>&nbsp;</p>
<p>에드와 열정 클럽의 만남은 한겨울밤의 꿈처럼 강렬했고 각자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나의 올해 여름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 일 년에 아주 짧게 머무르는 계절이 지나고 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서영]]></dc:creator>
<pubDate>Tue, 22 Sep 2026 10:25:1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7</guid>
<title><![CDATA[[Review] 두루두루 -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7</link>
<description><![CDATA[2026 서울 애니 인디 페스타 영화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은 올해로 22회를 맞은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제다.
<p>&nbsp; &nbsp; &nbsp;</p>
<p>9월 17일부터 22일까지 CGV연남에서 진행됐으며, 올해는 ‘두루두루(DURU-DURU)’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독립 애니메이션 작품을 선보였다. 총 8개 부문에서 116편의 작품이 상영될 정도로 규모도 꽤 큰 영화제였다.
   </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14625_tyewenkx.jpg" alt="KakaoTalk_20260926_114551670.jpg" style="width: 700px; height: 650px;" />
</p>
<p>&nbsp;</p>
<p>&nbsp;</p>
<p>짧게는 3분 남짓, 길게는 20분이 넘는 작품까지 러닝타임도 다양했고, 그림체와 제작 방식 역시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재미있게 본 작품은 정가희 감독의 &lt;데시메이트&gt;와 최진욱 감독의 &lt;빈캔&gt;이었다.</p>
<p>&nbsp;</p>
<p><br /></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겉으로 보면 닮은 구석은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두 작품은 겉으로 보면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p>
<p>&nbsp;</p>
<p>&lt;데시메이트&gt;는 의식을 업로드하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버추얼 아이돌이 존재하고, 현실과 디지털의 경계가 흐려진 세계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존재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의식을 업로드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실과 디지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p>
<p>&nbsp;</p>
<p>반면 &lt;빈캔&gt;은 훨씬 소박하다. 하늘에서 빈 캔 하나가 버스 안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별것 아닌 물건 하나를 두고 승객들 사이에 소란이 벌어지고, 오해와 욕심, 각자의 셈법이 얽히면서 상황은 점점 커진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lt;데시메이트&gt;</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14737_cxglnmlr.jpg" alt="01-4[19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09px;" />
</p>
<p>&nbsp;</p>
<p>&nbsp;</p>
<p>&lt;데시메이트&gt;의 세계에는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기술이 등장한다. 의식을 업로드하고 현실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려는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꽤 먼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감정은 낯설지 않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고, 내가 원하는 세계에 들어가고 싶고,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다른 곳에서 찾고 싶은 마음.</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lt;빈캔&gt;</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14843_khfayvca.jpg" alt="01[85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
   <br />
</p>
<p>&nbsp;</p>
<p>&lt;빈캔&gt;은 더 직접적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빈 캔 하나가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욕심을 내고, 누군가는 상황을 오해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셈법에 따라 행동한다. 그 빈 캔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만들어진다.</p>
<p>&nbsp;</p>
<p>하나의 공통점을 보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우리와도 비슷하다. 그래서 &lt;빈캔&gt;이 재미있었던 이유도 단순히 이야기가 유쾌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p>
<p>&nbsp;</p>
<p>그리고 &lt;데시메이트&gt;를 보면서는 반대로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됐다.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미래가 온다면 우리는 정말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까?</p>
<p>&nbsp;</p>
<p>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어딘가에 속하고 싶고, 외롭지 않고 싶은 마음까지 완전히 달라질까. 세상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환경으로 계속 바뀌겠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까진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깐 말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큰 변화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버스 안으로 굴러 들어온 &lt;빈캔&gt; 하나 같은 아주 작은 순간일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기술을 활용한 자연스러운 흔적</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번 영화제의 여러 작품에서 컴퓨터 그래픽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흔적을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려 움직이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이 창작 과정에 들어오면서 표현할 수 있는 세계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nbsp; 이번에 내가 관람한 독립보행3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과 이야기를 가진 여덟 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번 &lt;독립보행3&gt;에서 만난 작품들을 보면 같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표현 방식과 이야기가 모두 달랐다. 2025년에 완성된 &lt;빈캔&gt;부터 2026년에 제작된 &lt;데시메이트&gt;까지,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한 영화제 안에서 관객을 만났다. 누군가는 작품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것을 출품하고, 심사를 거쳐 상영작이 되고, 또 누군가는 영화관의 한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그 작품을 마주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화관에서 본 몇 편의 짧은 애니메이션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2025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2026년의 나에게 도착한 것</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누군가에게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를 작품을 나는 단 몇 분 동안 보고 지나쳤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도 누군가가 만들고 싶었던 세계가 담겨 있었다.</p>
<p>&nbsp;</p>
<p>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산업도 더욱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이미지나 상업적인 작품부터 떠올릴지도 모른다.</p>
<p>&nbsp;</p>
<p>하지만 이번 영화제에서 만난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작품도,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도,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낸 작품도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일 것이다.</p>
<p>&nbsp;</p>
<p>AI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이 애니메이션 제작의 문턱을 낮추고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면, 더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p>
<p>&nbsp;</p>
<p>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졌으면 한다.</p>
<p>&nbsp;</p>
<p>2025년에 만들어진 작품이 2026년에 관객을 만났듯이, 지금 누군가 만들고 있는 작품도 언젠가 또 다른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마음에 도착할 것이다.</p>
<p>
   <br />
</p>
<p>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더 많은 창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그 이야기를 기다리는 관객도 많아지기를 바란다.</p>
<p>&nbsp;</p>
<p>그리고 다음에 영화관에서 만날 또 다른 애니메이션이 어떤 모습일지 조금 기대해보고 싶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주하]]></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1:50: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92</guid>
<title><![CDATA[[Review] 순수하지 않아서 더 인간적인 것 -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92</link>
<description><![CDATA[순수한 미술은 없어도, 시대를 건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은 여전히 존재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미술관에 가면 작품 자체를 보려고 한다. 어떤 색을 사용했는지, 붓질은 어떤지, 무엇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 앞에 섰을 때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품 옆에 붙은 설명을 읽더라도 작가의 생애나 작품이 탄생한 배경 정도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누가 돈을 내고 그림을 주문했는지, 누가 작품을 사들였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미술관 벽에 걸리게 되었는지는 작품 바깥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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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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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55516_cfecvrig.jpg" alt="[세상에 순수한 미술은 없다] 표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를 읽고 나니 오히려 그 ‘바깥’이 작품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위대한 작품이라 부르는 것들도 처음부터 미술관에 걸리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필요로 만들어지고, 누군가에게 선택되고, 시장에서 가격을 얻고, 컬렉션에 들어가면서 작품은 계속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미술을 둘러싼 돈과 권력, 취향과 기술을 걷어내고 나면 비로소 순수한 예술이 남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얽혀 있는 상태 자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인지도 모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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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8px;"><b>신을 그리던 화가에서, 이름을 남기는 예술가로<br />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많은 미술관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비슷한 궁금증이 있었다. 왜 오래된 서양미술에는 유독 종교화가 많을까? 성모자와 예수, 성인과 성경 속 장면들은 다른 미술관에 가도 모두 반복해서 등장한다. 미술사의 흐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넘겼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익숙한 풍경을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게 됐다.</p>
<p>&nbsp;</p>
<p>중세의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만든 개인보다 신의 영광이었다. 그러다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작가의 이름이 하나의 가치가 되기 시작한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은 과정에는 뛰어난 재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부유한 가문과 권력자들은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예배당을 짓고 작품을 주문했고, 화가들은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작품을 제작했다. 지금의 언어로 바꾸면 일종의 ‘선주문 후제작’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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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55559_kaaxatsl.jpg" alt="종교화.jpg" style="width: 700px; height: 124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이 사실을 알고 나니 종교화가 가득한 미술관의 풍경도 달라 보인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를 자기 안의 무언가를 세상에 꺼내놓는 사람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화가는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작품의 크기와 소재, 등장인물과 설치될 공간까지 주문자의 요구와 무관하지 않았다.</p>
<p>&nbsp;</p>
<p>그렇다고 그런 작품을 덜 예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제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남을 만한 아름다움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후원자의 욕망과 화가의 재능, 시대의 종교와 정치가 한 화면 안에서 만났다. ‘순수한 창작’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최근의 관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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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nbsp;</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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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pan style="font-size: 18px;">알고 나서야 다시 보이는 그림</span></b>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책을 읽다가 유난히 반가운 대목을 만났다. 마네의 〈뱃놀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불과 며칠 전 전시장에서 모네의 동명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들어 사진까지 찍어두었던 그림과 구도가 상당히 비슷한 마네의 작품이 책에 등장했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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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55822_syhawley.jpg" alt="마네.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책에서는 마네와 모네가 물에 비친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네는 그림자 하나를 그릴 때도 자신의 견해를 넣어서 표현했죠. 그에 반해 모네가 그린 그림자는 햇살에 비친 물결을 순간적인 인상으로 옮긴 듯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right;">&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 77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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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름이 비슷해 종종 혼동되는 두 사람이지만 그림을 대하는 방식은 꽤 다르다. 마네는 물과 그림자를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견해와 계산을 화면에 분명하게 개입시키는 반면,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모네는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달라지는 물결과 반영의 인상을 붙잡으려 했다. 비슷한 대상을 보고도 한 사람은 형태를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다른 사람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순간을 붙잡는다.</p>
<p>&nbsp;</p>
<p>흥미로웠던 것은 이 설명을 읽고 나서 며칠 전 보았던 그림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재생됐다는 점이다. 전시장에서는 그저 ‘좋다’고 느꼈다. 물의 색과 배의 구도, 화면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아 사진을 찍었다. 당시에는 내가 왜 그 작품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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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55834_osnxoncq.jpg" alt="모네.jpg" style="width: 700px; height: 124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그런데 며칠 뒤 책에서 그 작품을 다시 만나자 막연했던 감상이 조금 구체적인 언어를 얻었다. 미술을 안다는 것은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이미 느꼈던 것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하나 더 얻는 일인지도 모른다. 감상은 지식 없이도 가능하지만, 어떤 지식은 지나간 감상을 다시 불러와 전혀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같은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오래된 말은, ‘많이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보다는 알게 될 때마다 다시 볼 수 있다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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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nbsp;</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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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pan style="font-size: 18px;">아름다운 것만 남기고 싶은 시대에, 시든 꽃을 그리는 이유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책의 표지를 장식한 라헬 라위스의 꽃 정물화도 처음에는 익숙하게 보였다. 여러 종류의 꽃이 풍성하게 꽂힌 꽃병은 서양미술에서 수도 없이 보아온 소재다. 작가의 아버지가 식물학자였던 만큼 꽃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자세히 보면 그 사이에 나비와 애벌레, 개미 같은 작은 생명들도 숨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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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55917_zqibrqpu.jpg" alt="표지.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모든 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 활짝 핀 꽃 옆에는 이미 시들기 시작한 꽃이 있고, 생기가 빠져가는 잎도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의외였다. 꽃을 그린다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순간을 남기고 싶지 않을까.</p>
<p>&nbsp;</p>
<p>어쩌면 그런 생각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너무 익숙한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사진을 찍을 때 예쁜 장면을 남기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공간에서는 보기 좋은 부분을 골라 프레임 안에 넣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잘라내기도 한다. 이제는 촬영 이후에 색과 밝기를 고치고, 원하지 않는 것까지 지울 수 있다. 기록은 있었던 모습을 그대로 남기는 일이라기보다, 남기고 싶은 모습만 골라 보존하는 일에 가까워졌다.</p>
<p>&nbsp;</p>
<p>그래서 시들어가는 꽃을 굳이 화면 안에 남겨둔 오래된 정물화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책은 그 안에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읽어낸다. 만개한 꽃은 아름답지만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같은 꽃병 안에 피어남과 시듦을 함께 두는 순간, 정물화는 아름다운 사물을 기록하는 그림에서 시간에 관한 그림이 된다.</p>
<p>&nbsp;</p>
<p>생각해보면 사진 역시 시간을 멈추려는 시도다. 가장 예쁜 순간을 골라 저장해두면 그 장면만큼은 계속 유지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래된 사진을 다시 볼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그때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시든 꽃을 그려 넣었던 화가와 가장 좋은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지금의 우리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둘 다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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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pan style="font-size: 18px;">작품의 가격과 마음의 가치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질까</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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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의 가치가 작가의 손을 떠난 뒤에도 계속 만들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은 스튜디오에서 완성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그것을 발견하는지, 어떤 컬렉터가 사들이는지, 어느 미술관에 들어가는지, 어떤 시장에서 거래되는지에 따라 작품의 위치는 달라진다.</p>
<p>&nbsp;</p>
<p>그렇게 생각하면 ‘그림값은 누가 정하는가’라는 질문에도 하나의 답만 있을 수 없다. 작가가 만들었으니 작가가 결정한다고 말하기에는 미술을 둘러싼 사람이 너무 많다. 컬렉터와 갤러리, 미술관과 경매회사, 비평가와 관객이 작품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거래하면서 가치가 쌓인다. 예술적 가치와 시장의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p>
<p>&nbsp;</p>
<p>처음에는 이런 이야기가 미술의 낭만을 조금 걷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을 좋아한다는 감정과 작품에 붙는 숫자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작품에 가격이 붙고 누군가의 컬렉션이 되고 미술관으로 옮겨지는 과정 역시 결국 사람들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무엇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시장은 미술의 전부가 아니지만 미술이 사회 안에서 살아온 흔적 중 하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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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60029_yvuicupn.jpg" alt="잭슨.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그렇다면 미술 작품은 한 사람의 천재성이 고립된 공간에서 만들어낸 결과라기보다 여러 사람의 욕망과 판단이 오랫동안 겹쳐진 결과에 가까워진다. 한 시대의 권력자가 무엇을 원했는지, 새로운 취향을 먼저 알아본 컬렉터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훗날의 관객이 무엇을 다시 발견했는지까지. 작품 한 점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선택이 들어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순수한 미술은 없어도,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은 있으니까</span></b>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에필로그에서 특히 오래 남은 문장이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꺼냈던 ‘미술 작품이 세 번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다시 가져오면서, 이제는 네 번째 탄생까지 이야기한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술 작품이 세 번 태어난다는 말로 이 책을 열었습니다.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시장에서 그리고 컬렉션이 된 자리에서 말이죠. 이제 거기에 네 번째 탄생을 더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right;">&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 에필로그</p>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blockquote>
<p>&nbsp;</p>
<p>그 네 번째 장소는 데이터셋과 알고리즘이다. 작품이 만들어지고 거래되고 수집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기술이 작품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그 가치까지 판단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p>
<p>&nbsp;</p>
<p>AI가 작품을 분석하고 가격을 예측하며 매수와 매도에 필요한 판단까지 도울 수 있는 시대다. 어쩌면 앞으로 작품의 시장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게 수치화될지도 모른다. 과거의 거래 기록과 작가의 경력, 전시 이력과 시장 흐름을 데이터로 계산한다면 인간의 직관보다 정확한 영역도 생길 것이다.</p>
<p>&nbsp;</p>
<p>그럼에도 저자는 결국 가치의 마지막 단계에 사람을 남겨둔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그 모든 것에 최종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가격에 합의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이 문장이 좋았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나누려는 이야기는 흔하다. 그런데 미술에서는 그 경계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작품을 분석하는 일과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애초에 같은 종류의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p>
<p>&nbsp;</p>
<p>전시장을 걷다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도 어느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일. 며칠 뒤 책을 읽다가 그 작품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일. 수백 년 전에 그려진 시든 꽃 한 송이를 보면서 내가 사진을 찍는 방식까지 떠올려보는 일이다. 작품의 가격을 계산하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이런 경험까지 대신 계산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책을 덮고 나니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문장이 남았다. 미술에는 언제나 돈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으며, 주문자의 요구와 컬렉터의 취향, 시장의 선택이 있었다. 그래서 순수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실이 미술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이해관계와 시대의 조건을 통과하고도 어떤 작품은 한참 뒤에 태어난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인다.</p>
<p>&nbsp;</p>
<p>어쩌면 내가 미술에서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이상한 지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주문으로 시작된 그림이 수백 년 뒤 전혀 다른 나라의 미술관 벽에 걸리고, 그 앞을 지나던 사람이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그 사람은 며칠 뒤 책 한 권에서 그 그림을 다시 만나 자신이 왜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는지를 생각한다. 작품의 가치를 만드는 사람은 작가 한 명이 아니었다. 작품을 주문한 사람도, 사들인 사람도, 보존한 사람도, 다시 바라보는 사람도 그 긴 과정의 일부였다.</p>
<p>&nbsp;</p>
<p>순수한 미술은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면 미술은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에 도착할 때마다, 아직도 새롭게 태어난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수진]]></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6:03:4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91</guid>
<title><![CDATA[[PRESS] 구원을 약속하는 절벽 앞에서 - 녹색 절벽의 신자들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91</link>
<description><![CDATA[다른 세계의 또 다른 내가, 아무런 슬픔도 절망도 경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은 당신에게 위로인가, 고통인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b>다른 세계의 또 다른 내가, 아무런 슬픔도 절망도 경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은 당신에게 위로인가, 고통인가.</b>
</p>
<p><br /></p>
<p>후회에는 늘 살아보지 못한 삶이 따라붙는다. 그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조금 더 일찍 손을 내밀었다면, 누군가를 붙잡았다면.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이미 지나간 순간의 결과를 바꾸어 본다. 물론 그 상상이 반드시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선택을 한 나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일까. 혹은 또 다른 불행을 지니고 있을까. 알 수 없기에, 상상 속의 삶은 얼마든지 구원의 모습이 될 수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90704_tbfeqgsw.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2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조예은의 장편소설 『녹색 절벽의 신자들』에는 그 구원을 약속하는 장소가 있다. 외계인의 도래와 세상의 멸망을 믿는 종교 공동체 ‘녹색 절벽’. 신자들은 멸망 후 절벽이 자신들을 세계의 가장 행복한 지점으로 보내줄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선택을 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 말이다. 삶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약속은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건너야 하는 곳이 절벽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그 너머에 정말 행복이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행복의 이름을 빌려 위험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지.</p>
<p><br /></p>
<p>오연은 교주 정환영에게 입양되어 녹색 절벽의 신자로 자랐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온 오연에게 환영의 말은 일상을 이루는 질서였다. 오연과 달리, 뒤늦게 그곳에 들어온 제언은 환영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른 것을 본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오연은 당연했던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제언에게는 믿고 싶은 이유가 생긴다.</p>
<p><br /></p>
<p>사이비를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 우리는 흔히 ‘어떻게 저런 말을 믿지?’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안도감이 숨어 있다. 그러나 삶이 무너졌을 때는 고통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그것을 의심해야 할 이유보다 먼저 마음에 닿을 수도 있다. 우연처럼 찾아온 비극에도 이유가 있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곳이 있으며, 지금의 시간이 끝내 보상받으리라는 말은 삶이 무너진 자리에 질서를 부여한다.</p>
<p><br /></p>
<p>그렇기에 신자들에게 믿음은 어떤 주장이 사실인지 가리는 일을 넘어, 무너진 삶을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가 된다. 이 소설은 누가 옳았는지 가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가 진실처럼 느껴지는 자리까지 독자를 데려간다.</p>
<p><br /></p>
<p>녹색 절벽이 약속하는 ‘가장 행복한 세계’는 제언에게 막연한 구원이 아니다. 제언은 행복한 세계의 자신을 상상한다.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은 채 살아온 또 다른 제언. 다른 사람의 행복은 남의 삶으로 남겨둘 수 있지만, ‘저 사람도 나일 수 있었다’는 생각은 지금까지의 시간을 다시 보게 한다. 좌절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 앞에서, 견뎌온 상처는 새삼 부당한 일이 된다. 왜 하필 이쪽의 내가 그 일을 겪어야 했을까. 행복한 다른 삶의 가능성은 위로가 되기보다, 지금의 나에게 잔인한 비교가 될 수 있다.</p>
<p><br /></p>
<p>나는 제언과 같은 답에 이르지 않았다. 슬픔을 겪지 않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 있다 해도, 그를 나라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그는 나를 닮았을지언정 내가 살아온 시간을 살지 않은 사람이다. 그의 존재는 내게 위로도 고통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제언의 마음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됐다. 나에게는 남의 삶처럼 보이는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을 다시 판단하게 할 만큼 절실할 수 있다는 것.</p>
<p><br /></p>
<p>『녹색 절벽의 신자들』은 진실을 알아가는 독자의 자리도 흔든다. 오연이 본 세계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건은 한 번에 포개지지 않는다. 보는 자리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오연의 그림처럼, 장면은 그대로인데 그 앞에 선 독자가 달라져 있다.</p>
<p><br /></p>
<p>그래서 이 책의 전개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사건의 결과를 미리 알면 각 장면을 정답과 단서로만 읽기 쉽다. 모른 채 읽을 때는 한 인물의 말을 믿었다가 의심하고, 이미 지나온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누군가에게는 다른 미래가 있기를 바라게 된다.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뿐 아니라 내가 어떤 진실을 바랐는지 발견하는 과정까지 이 소설의 일부다.</p>
<p><br /></p>
<p>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인물들의 믿음에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을 쉽게 탓하지 못했다. 미스터리의 답이 궁금해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의 말이 너무 늦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닿기를 바랐다.</p>
<p><br /></p>
<p>나는 아직도 녹색 절벽이 약속한 세계가 정말 있는지 묻고 싶다. 그보다 오래 남는 질문이 있다. 그들이 다른 세계의 행복을 기다리는 대신, 이 세계에서 조금 더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45315_uwguttek.jpg" alt="PRESS 오수민.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nbsp;</p>
<p><br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오수민]]></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4:54:0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4</guid>
<title><![CDATA[[Opinion]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4</link>
<description><![CDATA[선의에서 시작된 거짓말은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b>*</b>
</p>
<p style="text-align: center;">
   <b style="text-align: left;">이 글은</b>
</p>
<p style="text-align: center;">
   <b style="text-align: left;">뮤지컬 &lt;팬레터&gt;와 &lt;디어 에반 핸슨&gt;의</b>
</p>
<p style="text-align: center;">
   <b style="text-align: left;">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b>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꾸며 말하는 것을 뜻한다. 거짓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어야 하며, 상대방이 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즉,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거짓말인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있다.</p>
<p>  &nbsp;  </p>
<p>부모님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나쁜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거짓말은 보통 해서는 안되는 나쁜 행위로 여겨지지만, 이럴 때 항상 화두에 오르는 주제가 바로 착한 거짓말, 다르게 말해 ‘선의의 거짓말’이다. 남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는 거짓말은 과연 해도 되는 것일까. </p>
<p>
   <br />
</p>
<p>그 선의의 거짓말로 인한 결과가 아름다울 경우 더없는 감동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당신을 위해서 했다’는 거짓말이 사실은 상대방을 더 큰 절망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낳았을 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는 거짓말로 상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마음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용서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이전에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p>
<p>  &nbsp;  </p>
<p>&nbsp;</p>
<p>
   <br />
</p>
<p>
   <span style="font-size: 18px;"><b>1.</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거짓말’로 누군가를 구원하고자 했던 두 소년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아직은 미성숙한 두 소년의 거짓말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 오고, 결국 서로 다른 결말을 맞는다. 뮤지컬 &lt;팬레터&gt;의 세훈과 뮤지컬 &lt;디어 에반 핸슨&gt;의 에반 핸슨이 그 주인공이다.</p>
<p>  &nbsp;  </p>
<p>이 글에서 말하는 ‘구원’은 사실 다소 모호한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꾼다는 거창한 의미라기보다, 당장 살아갈 이유를 주거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가깝다.</p>
<p>&nbsp; &nbsp;</p>
<p>&nbsp;</p>
<p>  &nbsp;  </p>
<p>
   <span style="font-size: 18px;"><b>2.</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뮤지컬 &lt;팬레터&gt;의 ‘세훈’은 자신이 동경하는 작가 해진과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 히카루라는 가상의 인격체는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는 해진에게 금세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가 된다. 세훈은 해진을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행여 해진이 실망할까 자신이 히카루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결국 이름만 있고 실체는 알 수 없는 히카루와 함께 글을 쓰다 생을 마감하려는 극단적인 결심까지 하게 되고, 인물 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p>
<p>  &nbsp;  </p>
<p>사실 세훈의 이러한 행위는 거짓말과 침묵의 경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히카루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낸 것은 처음부터 해진을 속이려는 계획이 아니었다. 세훈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 해진이 히카루라는 인물로부터 얻고 있는 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거짓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을 단순히 거짓말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지점이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24040_ptygdevw.jpg" alt="KakaoTalk_20260926_122941293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3px;" />
</p>
<p>
   <br />
</p>
<p>  &nbsp;  </p>
<p>뮤지컬 &lt;디어 에반 핸슨&gt;의 ‘에반’의 경우, 좀 더 직접적으로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는 학교에서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던 중 동급생인 ‘코너’에게 편지를 빼앗기고, 후에 코너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코너의 부모님은 그 편지를 보고 에반이 코너와 가까운 친구라고 오해한다. 에반은 슬픔에 빠진 코너의 부모님에게 차마 자신은 코너와 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고,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결국 자신은 코너와 절친한 사이었다고 거짓말을 시작한다.</p>
<p>  &nbsp;  </p>
<p>그 거짓말로 인한 파장은 코너와의 가짜 기억을 만들어 전하고, 가짜 이메일을 부모님께 보여주는 등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에반의 경우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그 거짓에 자기 자신의 욕구가 뒤섞인다. 결국 거짓으로 인한 상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다.</p>
<p>  &nbsp;  </p>
<p>결국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두 인물 모두 극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해온 거짓을 직접 밝히며 상황이 종결된다.</p>
<p>  &nbsp;  </p>
<p>&nbsp;</p>
<p>&nbsp; &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3.</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렇듯 두 인물의 거짓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관객은 두 사람을 보며 진작 진실을 말했어야 한다며 분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거짓말이라는 행위는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 의도와 놓여있는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두 소년 모두 거짓말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는 과정이 극 중 고스란히 드러난다.</p>
<p>  &nbsp;  </p>
<p>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는 용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용서는 상대방의 영역이다. 상대방은 거짓말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상대를 용서하는 것과, 상대의 의도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p>
<p>  &nbsp;  </p>
<p>&lt;팬레터&gt;에서 세훈이 해진에게 자신이 히카루였음을 밝히자, 해진은 왜 진실을 밝힌 것이냐며 분노한다. 이처럼 선의의 거짓말에서는 거짓과 용서, 그리고 진실의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버린다. 단순히 남을 속이는 ‘나쁜’ 의도의 거짓말과 달리, 선의의 거짓말에는 상대를 위한 마음과 자신의 욕망, 그리고 진실을 감추려는 의도 등 여러 동기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거짓말이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용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순 있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과 그 결과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p>
<p>  &nbsp;  </p>
<p>&nbsp; &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4.</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24023_peillefw.jpg" alt="KakaoTalk_20260926_122941293.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nbsp;</p>
<p>&nbsp;</p>
<p>그렇다면 용서와 구원의 관계는 어떨까? 거짓말을 ‘당한’ 사람이 거짓말을 한 사람을 용서한다면 그것은 구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짓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행위 자체는,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미래에 개입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p>
<p>  &nbsp;  </p>
<p>에반의 거짓말로 슬픔에 빠졌던 코너의 가족은 에반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부터 위안을 얻고 활기를 되찾는다. 어쩌면 에반의 거짓말은 코너 가족을 잠시나마 구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순간의 위안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에반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위안의 의미까지 사라져 버린다고 하더라도? 결국 거짓말이 개입되는 순간 미래는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lt;팬레터&gt;에는 이 질문에 흥미로운 생각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p>
<p>  &nbsp;  </p>
<p>해진이 죽은 후, 해진의 친구 ‘이윤’은 자신을 찾아온 세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 때문에 내 친구는 며칠 더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혹은 네 덕에 며칠 더 산 것일지도 모르지.’ 이윤의 이 대사가 그 판단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p>
<p>  &nbsp;  </p>
<p>결국 결과만으로 누군가의 거짓말이 구원이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결과가 누군가에게 실제로 위안과 살아갈 이유를 주었다면, 그 시작점이 거짓말이었다는 이유로 그것까지 부정할 수 있을까.</p>
<p>  &nbsp;  </p>
<p>&nbsp;</p>
<p>  &nbsp;  </p>
<p>
   <span style="font-size: 18px;"><b>5.</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그렇다면 이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거짓은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뿐, 누군가의 삶에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다. 거짓말은 누군가에게 살아갈 이유를 줄 수도 있고,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구원이 비록 거짓 위에 세워져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위태롭다. </p>
<p>  &nbsp;  </p>
<p>구원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베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답은 결국 이윤의 말로 되돌아온다. 거짓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느낀 위안과 삶의 의미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훈의 행동은 해진에게 며칠의 삶을 더 가져다 주었을 수 있다. 에반의 거짓말 역시 코너 가족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과 결국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 어느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p>
<p>  &nbsp;  </p>
<p>그 거짓말이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결과가 구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거짓말이 무너졌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했던 위안까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p>
<p>&nbsp; &nbsp;</p>
<p>거짓말은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정말 구원이었는지는, 결국 그 거짓말을 살아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30817_nflsbxyu.jpg" alt="KakaoTalk_20260926_030744738.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선주]]></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03:00:0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9</guid>
<title><![CDATA[[Review] 숫자 너머의 미술 -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9</link>
<description><![CDATA[미술품에 붙은 가격은 작품 자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딜러와 컬렉터, 미술관과 경매회사 등 다양한 주체의 선택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를 통해 아트테크에서 마주하는 숫자 너머, 작품의 가치와 가격을 만들어온 과정을 살펴본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023910_xszonwxe.jpg" alt="[세상에 순수한 미술은 없다] 표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9px;" />
</p>
<p>&nbsp;</p>
<p>&nbsp;</p>
<p>2023년 12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2001)이 국내 첫 미술품 투자계약증권의 기초자산으로 청약 대상이 되었다. 열매컴퍼니는 작품을 1만 2,320주로 나누어 주당 10만 원에 모집했다. 모집금액은 12억 3,200만 원이었고, 최종 신청금액은 72억 980만 원으로 청약률은 650.23%를 기록했다.</p>
<p>&nbsp;</p>
<p>미술품을 직접 소유하지 않고도 작품에 투자할 수 있다는 조각투자가 주목받으면서 미술은 감상의 대상인 동시에 투자 대상으로도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아트테크는 미술품을 투자 대상으로 보고 가격 변동에 따른 수익을 기대하는 활동이다. 조각투자는 그중 하나로, 고가의 미술품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든 방식이다.</p>
<p>&nbsp;</p>
<p>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진다.</p>
<p>&nbsp;</p>
<p>
   수억 원짜리 작품을 여러 개의 지분으로 나눌 때, 그 가격은 무엇을 근거로 정해지는 것일까.
</p>
<p>
   &nbsp;
</p>
<p>이지윤의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투자 안내서는 아니다. 대신 미술의 가치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 저자는 작가와 작품만으로 미술을 설명하지 않는다. 작품을 주문하는 사람과 판매하는 딜러, 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 전시하고 연구하는 미술관, 경매회사와 비영리기관, 국가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와 제도를 함께 살펴본다.</p>
<p>&nbsp;</p>
<p>책의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작품이 지금과 같은 의미와 위치를 갖게 된 과정에는 작품 자체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선택과 관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의 가치는 하나의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와 거래, 수집과 연구 같은 활동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 그렇다면 작품 앞에서 마주하는 가격 역시 단순한 숫자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작품의 가격을 본다는 것</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p>
<p>&nbsp;</p>
<p>아트테크에서 투자자가 먼저 확인하는 것은 결국 가격이다. 공모가격이 얼마인지, 과거에는 얼마에 거래되었는지, 앞으로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가격만 보면 정작 그 숫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놓치기 쉽다.</p>
<p>&nbsp;</p>
<p>책의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와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이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p>
<p>&nbsp;</p>
<p>가격에는 여러 요소가 함께 작용한다. 작가가 어떤 전시를 했는지, 어느 갤러리에서 작품을 판매했는지, 미술관에 소장되었는지, 경매에서 어떤 가격에 거래되었는지 등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시장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15843_tkapezie.jpg" alt="pexels-bingqian-li-230971044-34748945.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이런 기록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시와 거래가 이어지고 비평과 연구가 축적되면서 작가와 작품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늘어난다. 어떤 작가는 오랜 시간 시장에서 거래되며 가격의 기준이 쌓이는 반면, 어떤 작가는 아직 충분한 거래와 평가의 기록이 축적되지 않았을 수 있다.</p>
<p>
   <br />
</p>
<p>따라서 미술품의 가격을 살펴볼 때는 작가가 유명한지만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유명세를 뒷받침하는 전시와 소장, 거래와 연구의 기록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조각투자의 가격은 어디에서 오는가</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p>
<p>&nbsp;</p>
<p>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각투자의 가격을 살펴보는 일도 조금 달라진다. 조각투자는 고가의 작품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든 방식이지만, 투자자가 작품을 직접 보관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아니다.</p>
<p>&nbsp;</p>
<p>금융위원회는 2022년 테사, 서울옥션블루, 투게더아트, 열매컴퍼니의 미술품 조각투자 상품에 대해 투자계약증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해당 상품들이 미술품의 공동소유권과 함께 작품의 보관·관리·매각·손익배분 등을 사업자가 수행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즉 투자자가 사는 것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을 둘러싼 운용 구조에 대한 지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격을 판단할 때 살펴야 할 대상도 작품 하나에서 그 구조 전체로 넓어질 수밖에 없다.</p>
<p>&nbsp;</p>
<p>조각투자 상품을 볼 때는 작가와 작품만 확인해서는 부족하다. 공모가격은 어떤 자료를 근거로 정해졌는지, 작품은 누가 보관하고 관리하는지, 매각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관련 비용은 무엇인지 등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작품의 가격뿐 아니라 그 가격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구조까지 살펴봐야 하는 셈이다.</p>
<p>&nbsp;</p>
<p>쿠사마 《호박》의 높은 청약률 역시 작품의 유명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국내 첫 미술품 투자계약증권이라는 점, 잘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기존의 전시와 거래 기록 등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청약률 자체가 향후 투자수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p>
<p>&nbsp;</p>
<p>결국 투자자가 확인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가'만이 아니라 '왜 이 작품이 이 가격으로 제시되었는가'에 가까울 수 있다.</p>
<p>&nbsp;</p>
<p>
   &nbsp;
</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한 작품의 가격은 달라질 수 있다</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p>
<p>&nbsp;</p>
<p>그렇다면 작품의 가격은 처음부터 정해진 기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일까.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를 읽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미술시장과 작품의 가격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주체가 개입하며 만들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미술품이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이후 딜러와 컬렉터, 경매회사와 미술관 등이 등장하면서 작품을 둘러싼 거래와 평가의 방식도 함께 변화해왔다.</p>
<p>&nbsp;</p>
<p>그 변화는 한 사람의 선택에서 시작해 점점 더 큰 단위로 옮겨가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앙브루아즈 볼라르다. 볼라르는 세잔의 작품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개인전을 열면서 당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세잔을 미술시장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한 명의 딜러가 작품을 선택하고 전시하며 판매하는 과정이 작가의 시장적 위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잔의 현재 평가를 볼라르 한 사람의 활동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작품을 발굴하고, 누구에게 보여주고, 어떤 방식으로 시장에 소개하는지가 작가에 대한 관심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보여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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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14900_gwoykcel.jpg" alt="Cezanne_Ambroise_Vollard.jpg" style="width: 700px; height: 863px;"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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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딜러의 선택이 시장에 작가를 소개하는 일이었다면, 컬렉터의 선택은 그 작품에 맥락과 의미를 더하는 일에 가까웠다. 새뮤얼 코톨드는 작품을 단순히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랜 시간 작품을 직접 살펴본 뒤 자신의 컬렉션을 구성했고,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살롱에 마티스와 세잔의 작품을 함께 걸어두며 당시의 예술가들과 작품이 교류하는 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컬렉터는 이미 형성된 시장에서 작품을 사는 사람인 동시에,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작품을 함께 보여줄 것인가를 통해 작품의 위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기도 했다.</p>
<p>&nbsp;</p>
<p>이렇게 개인 단위에서 시작된 선택은 구겐하임 가문의 사례에 이르러 개인의 취향을 넘어 미술관과 컬렉션이라는 제도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작품을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이를 하나의 컬렉션으로 구축하는 일은 특정 작가와 미술의 흐름을 사회에 소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이후 미술관과 같은 제도적 공간에서 작품이 전시되고 연구되면, 개인이 선택한 작품은 다시 공적인 감상의 대상이자 미술사의 기록으로 자리 잡는다. 결국 한 작품이 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작가의 작업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작품을 선택하고 수집했으며 어디에서 전시하고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했는지가 축적된 결과이기도 하다.</p>
<p>&nbsp;</p>
<p>이렇게 보면 미술시장은 작품이 완성된 뒤 그 가치를 평가하는 장소라기보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가깝다. 갤러리에서 작품이 판매되고, 컬렉터가 작품을 선택하고, 경매에서 거래 기록이 쌓이고,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고 연구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작가와 작품을 바라보는 기준이 형성된다. 책에서 말하는 '작품 밖의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선택과 관계이기 때문이다.</p>
<p>&nbsp;</p>
<p>따라서 오늘날의 미술품 가격을 과거의 거래가격이나 작가의 유명세 하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격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전시와 거래, 수집과 연구,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여러 사람과 기관의 판단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 아트테크에서 작품의 가격을 살펴볼 때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숫자가 얼마인지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숫자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시장과 관계, 기록이 축적되어 왔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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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font-size: 18px;"><b>다시, 책을 본다면</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p>
<p>&nbsp;</p>
<p>처음 쿠사마의 《호박》을 보며 궁금했던 것은 주당 10만 원이라는 숫자였다. 하지만 책을 통해 여러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질문은 조금 달라진다.</p>
<p>&nbsp;</p>
<p>
   왜 이 작품이 지금 이 가격으로 평가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가격을 만들어온 것은 무엇인가.
</p>
<p>&nbsp;</p>
<p>물론 이 글도, 그리고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도 주당 10만 원이라는 숫자가 정확히 어떤 감정평가와 근거로 산출되었는지까지 답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분명해지는 것은 있다. 그 숫자를 믿을지 말지를 판단하려면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그 기준만큼은 이제 알 수 있다는 점이다.</p>
<p>&nbsp;</p>
<p>작품을 둘러싼 작가와 갤러리, 컬렉터와 미술관, 경매와 전시 같은 여러 관계가 시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작품에 대한 평가와 가격이 형성된다. 결국 미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은 작품 자체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이 시장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p>
<p>&nbsp;</p>
<p>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를 읽은 뒤에는 아트테크를 단순히 미술품에 투자하는 문제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하나의 가격이 만들어지기까지 미술과 시장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작품 앞에서 마주하는 숫자 역시 미술계의 여러 관계와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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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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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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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023857_yhyqirci.jpg" alt="김민주.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민주]]></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02:40:5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0</guid>
<title><![CDATA[[오피니언] 같은 일제강점기, 전혀 다른 두 개의 기억 [도서/문학]]]></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0</link>
<description><![CDATA[같은 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쳤음에도 한국과 대만이 기억하는 당시는 매우 다르다. 소설 속 일본인 화자가 제국을 ‘본국’이라 칭하는 단어 하나에 한국 독자가 본능적인 거부감을 표하는 반면, 대만 독자는 제국주의자의 시선과 인물 내면의 모순을 담담하게 관조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배국의 신민과 피지배국의 주민은 과연 구조적 불평등을 넘어서 대등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p>
<p>&nbsp;</p>
<p>이러한 문제의식에 주목한 독서모임이 백운시장 동네책방 '생활용품'에서 진행되었다. 최근 부커상을 받아 주목받은 양솽쯔의 소설 『1938 타이완 여행기』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1938년 대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여성의 사적 여정은 단순한 감정적 교류를 넘어 양국 사회가 걸어온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p>
<p>&nbsp;</p>
<p>진행은 대만 공영방송 PTS 양첸하오 주한 특파원이 맡았다. 그는 2013년부터 서울에 거주하며 남북한과 관련된 다양한 뉴스를 취재하고 이를 중화권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영국방송 BBC 중국어판, 대만공영방송(PTS)의 한국 주재 객원기자로 활동해왔다. 또한 한국에서는 &lt;미디어오늘&gt;과 &lt;한겨레 21&gt;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이태원참사 당시에는 긴급리포트를 발행하여 2023년 아시아출판협회가 수여하는 '아시아우수보도상' 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는 백운시장 인근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뉴스 브랜드인 kornews를 운영하고 있다.</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5053_wmnqhafs.jpg" alt="BDH08602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일본인이 쓴 적 없는 일본인의 여행기</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1938 타이완 여행기』은 서사 구조부터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이 책은 일본인 작가 아오야마 치즈코가 1938년 대만을 여행하며 일본어로 남긴 기록을 훗날 한자로 번역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아오야마 치즈코라는 작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일본인이 작성한 일본어 원작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양상쯔가 처음부터 번역서의 형태를 빌려 창작해낸 허구의 소설이다.</p>
<p><br /></p>
<p>양 기자 역시 강연에서 이 설정을 가장 먼저 강조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이 책은 실제 번역소설이 아니에요. 번역소설처럼 만든 소설이에요. 아오야마라는 주인공도 실제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고요. 그런데 아오야마가 만나는 대만 친구는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했어요. 실제 인물은 양칭허라는 대만 최초의 여성 기자예요. 1936년, 1937년쯤 여성 기자가 거의 없었던 시절에 신문사에 들어가서 사장한테 ‘나는 남성들이랑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던 사람이에요.”<br />&nbsp;</blockquote>
<p><br /></p>
<p>가공의 일본인 여행자와 실존했던 대만 여성의 삶이 한 작품 안에서 마주친다. 소설 속 왕칭허는 아오야마를 안내하면서 대만의 음식과 문화, 주민들의 삶을 소개한다. 두 사람은 이동하는 지역마다 새로운 음식을 찾아 먹는다. 독서모임 참석자들 사이에서도 "음식 묘사가 반복된다"는 반응이 공통적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낯선 요리를 찾아보며 읽었지만 뒤로 갈수록 음식 설명 부분을 건너뛰었다는 소감도 이어졌다.</p>
<p><br /></p>
<p>하지만 이 반복적인 식사 장면은 미식 여행의 단순한 장식 수준을 넘어선다. 소설 속 음식에는 대만을 거쳐 간 여러 집단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복건성 출신 이주민과 하카인, 원주민, 일본인 등 서로 다른 집단이 오랜 세월 한 섬에 살아가면서 음식 문화 또한 단일한 계통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변했다.</p>
<p><br /></p>
<p>양 기자는 소설이 포착한 대만의 핵심적 특성을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이 책에 대만의 다양성이 많이 나와요. 민난 사람도 있고, 하카 사람도 있고, 원주민도 있고,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음식도 보여주죠. 많은 외국 사람은 대만이라고 하면 그냥 한족만 생각해요. 그런데 한족도 여러 가지이고 원주민도 있어요. 이 책을 통해서 대만의 다양성을 다시 알게 되는 거예요.”<br />&nbsp;</blockquote>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80957_gcovvprk.jpg" alt="BDH08603_brightened.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0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같은 식민지를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날 강연에서 가장 깊이 있는 토론이 이어진 대목은 한국과 대만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였다.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는 침략과 강제동원, 민족말살정책, 독립운동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인 화자가 식민지 대만을 거닐며 자신의 나라를 ‘본국’이라 부를 때 한국 독자가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p>
<p><br /></p>
<p>반면 양 기자가 설명한 대만의 역사적 기억은 훨씬 복잡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대만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일본 사람이 이렇게 봤구나’ 하고 읽어요.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일본 식민지를 직접 겪은 세대인데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본을 너무 좋아했어요. 일제시대가 제일 아름답고 제일 잘 발전됐다고 기억했어요. 왜냐하면 그 뒤로 이어진 역사가 훨씬 잔혹했거든요. 일본의 탄압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식민지니까 당연히 권력의 차이도 있고 탄압도 있었어요. 그런데 도로가 만들어지고 시스템이 생기고, 그다음에 국민당 시대까지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비교가 되는 거예요.”<br />&nbsp;</blockquote>
<p><br /></p>
<p>양 기자가 거듭 강조한 개념은 ‘비교’였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폭력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취지가 아니라, 청나라 말기와 일제 통치, 그리고 전후 국민당 통치라는 상이한 체제를 연이어 경험한 세대가 과거를 상대적 맥락에서 기억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p>
<p><br /></p>
<p>실제로 대만에서는 일본이 패전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가 들어섰으며, 뒤이어 국민당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장기간 정치적 탄압이 지속되었다.&nbsp;</p>
<p><br /></p>
<p>강연 중 한 참가자가 대만 노년층의 일본 관련 기억을 두고 “국민당 시기와 비교되기 때문이냐”고 묻자 양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비교가 돼요. 일제에 세뇌되어서가 아니라 그 이후 역사와 비교가 돼서 그래요. 국민당이 오기 전에는 중국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국민당이 와서 나쁜 일을 많이 했죠. 그래서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제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국민당이 온 뒤에는 이런 문제가 생겼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일제시대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식민지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에요.”<br />&nbsp;</blockquote>
<p><br /></p>
<p>이 때문에 ‘친일’이라는 단어가 한국과 대만 두 사회에서 지니는 정서적 무게감 역시 같지 않다고 양 기자는 덧붙였다.</p>
<p><br /></p>
<p>그는 한국 생활 도중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를 두고 한국인 친구들과 의견이 갈렸던 경험도 소개했다. 대만에서 어린 시절 이 작품을 보며 전쟁의 비극 속에서 죽어가는 남매의 모습을 보고 눈물 흘렸던 자신과 달리, 한국 지인들은 일본인을 피해자로만 다룬다는 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때 양 기자는 두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간극을 비로소 실감했다고 밝혔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한국 친구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우호적인 감정을 조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도 한국 사람들이 왜 일본을 싫어하는지 같이 이해해 줘야 해요. 일본이 대만과 한국을 대했던 방식도 달랐고, 각자 그 이후에 겪은 역사도 달랐으니까요.제가 한국에 와서 『반딧불이의 묘』 이야기를 했을 때도 ‘아, 시각 차이가 이렇게 크구나’라고 처음 깨달았어요.”<br />&nbsp;</blockquote>
<p><br /></p>
<p>동일한 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공통점만으로 두 사회의 역사적 기억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81018_hedhcvhr.jpg" alt="BDH08579_brightened.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내지인·본도인·완생, 한 공간 안의 서로 다른 위치</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러한 역사적 차이를 파악하고 나면 소설 속 아오야마라는 인물도 새로운 각도에서 보인다. 1938년 대만에는 동일한 공간에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신분적 지위를 지닌 이들이 공존했다. 양 기자는 소설 속 인물 구도를 설명하며 ‘내지인’, ‘본도인’, ‘완생’이라는 세 가지 지위를 제시했다.</p>
<p><br /></p>
<p>내지인은 일본 본토 출신의 일본인을 의미한다. 본도인은 식민지 대만에 살던 대만 주민을 가리키며, 완생은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을 뜻한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당시 대만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첫 번째는 내지인,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 사람이에요. 대만의 한족이나 원주민은 본도인이라고 하고요. 세 번째가 완생이에요.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 사람이죠. 1938년이면 이미 식민지가 된 지 40년이 넘었으니까 일본에서 온 관료나 기업인들이 대만에 정착해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일본 사람인데도 완생은 일본 본토에 가면 차별을 당하기도 했어요. ‘너는 일본어 억양이 왜 이상하냐, 우리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식이죠. 그래서 대만 사람이 겪는 차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어요.”<br />&nbsp;</blockquote>
<p><br /></p>
<p>주인공 아오야마는 이 가운데 내지인에 해당한다. 식민지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다. 그러나 작가 양솽쯔는 그를 일방적인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만의 음식과 주민들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보내며, 때로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p>
<p><br /></p>
<p>이 모호한 태도는 독서모임에서도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한국 독자들에게 아오야마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겼지만, 양 기자는 바로 그 점이 대만 독자에게는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아오야마는 내지인이죠. 제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좋은 내지인이에요. 그렇게 오만하지 않고, 대만에 와서 ‘이거 신기하다, 이 음식 먹어보고 싶다’고 호기심도 보여요. 일본이 하는 일에 반감을 보이는 부분도 있고요.</p>
   <p>&nbsp;</p>
   <p>그런데 또 일본 산하에서 만들어진 시설을 보고 감탄하기도 하잖아요.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는 ‘이 사람 정체성이 없다,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대만 사람의 시각에서는 오히려 ‘이 사람이 재미있네, 이쪽 생각도 있고 저쪽 생각도 있네’라고 볼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인물로 보는 거죠.”</p>
   <p>&nbsp;</p>
   </blockquote>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81032_dbotdnyq.jpg" alt="BDH08594_brightened.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는가</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결국 문제의 핵심은 아오야마 개인의 성품보다 그와 왕칭허 사이에 놓인 구조적 불평등에 있다.</p>
<p><br /></p>
<p>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고 같은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눈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점차 깊은 정서적 교류를 이어간다. 하지만 둘의 관계에서 일본인과 대만인이라는 신분적 지위는 사라지지 않는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왕칭허는 일본 교육도 받았고 일본 문화도 잘 이해하고, 도쿄에 가보고 싶다는 동경도 있어요. 그런데 점점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감도 보여주죠. 아오야마한테 마음을 직접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갑자기 표정이 바뀌거나 자리를 떠나기도 하고, 또 몇 시간 뒤에는 돌아와 같이 음식을 만들어요. 갈등하는 거예요. ‘나는 완전히 친구처럼 대하고 싶은데, 나는 지배당한 사람이고 너는 지배하는 사람이다.’ 그런 지위의 불평등이 있는 거죠.”<br />&nbsp;</blockquote>
<p><br /></p>
<p>친밀한 감정이 구조적인 권력관계까지 없애지는 못한다. 양 기자는 이 갈등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으로 확장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원주민의 시각으로 보면 먼저 들어온 한족도 식민지 사람으로 볼 수 있죠. 그런데 일본인이 들어온 뒤에는 한족도 다시 식민지배를 당하는 사람이 돼요. 이렇게 권력의 위치가 계속 바뀌어요. 그러면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만에 와서 본도인과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사랑이라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권력이 불평등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 계속 나오는 문제의식입니다.”<br />&nbsp;</blockquote>
<p><br /></p>
<p>『1938 타이완 여행기』에서 식민주의는 무력이나 군대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의 방식, 누군가를 설명하고 번역하는 주체, 여행의 주도권과 안내 역할 등 사적인 관계의 세부 요소마다 권력의 작용이 스며 있다.</p>
<p><br /></p>
<p>그러므로 아오야마와 왕칭허의 관계를 단순한 우정이나 연애로 규정하기 어렵다. 서로를 향한 호의가 진실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제국과 식민지라는 엄혹한 조건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p>
<p><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식민지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삶</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일본인과 대만인이라는 차이와 별개로 아오야마와 왕칭허에게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왕칭허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은 1930년대에 남성 기자와 동등한 처우를 요구했다. 오늘날 기준에서는 당연하게 보이지만, 당시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남성과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는 행위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p>
<p><br /></p>
<p>소설 속에서도 여성은 결혼 이후 가사와 출산,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존재로 끊임없이 규정된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왕칭허가 ‘나는 결혼한 뒤에는 집에서 부엌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가 하던 일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죠. 당시는 돈이 많은 집의 여성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웠어요. 아오야마도 대만에서 강연을 하는데 참석자가 거의 다 여성이고 여중, 여고예요. 유명한 작가인데도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잘날 수 있나, 여자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주류였던 시기예요.”<br />&nbsp;</blockquote>
<p><br /></p>
<p>아오야마 역시 주변으로부터 결혼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여성의 필연적인 미래로 순응하지 않는다. 왕칭허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상상해본다.</p>
<p><br /></p>
<p>양 기자는 이 시기를 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조금씩 변해가는 전환기로 설명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아오야마는 ‘나는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왕 씨와 친구든 애인이든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때 여성의 지위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제한은 여전히 많았어요. 새로운 여성주의 사상도 들어오던 시기였고요. 그래서 이 소설에는 식민지의 권력 문제뿐만 아니라 그 시대 여성이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같이 들어가 있어요.”<br />&nbsp;</blockquote>
<p><br /></p>
<p>결과적으로 두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는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본인과 대만인이라는 민족적 위치는 대립하지만, 동시에 둘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삶의 궤적을 벗어나려 노력한다. 서로 다른 권력관계가 한 사람의 삶 안에서 복합적으로 교차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81046_axgnrnfl.jpg" alt="BDH08580_brightened.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이름 붙일 수 없는 관계,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대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작품은 아오야마와 왕칭허 사이의 감정에 명확한 명칭을 붙이지 않는다. 우정으로 단정하기에는 깊고, 연애로 규정하면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남는다. 이러한 모호함은 후대의 인물들에게까지 이어진다.</p>
<p><br /></p>
<p>양 기자는 이 관계를 대만 사회의 퀴어 정체성과 연결하여 풀이했다.</p>
<p><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이 책에 계속 나타나는 부분이 여성 간의 사랑이에요. 여성 간의 우호관계뿐 아니라 사랑관계도 어느 정도 형성돼 있죠. 그런데 뒤에 후손들이 나왔을 때도 자기 어머니와 그분의 관계를 정의하고 싶어 하지 않아해요. 동성애는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금기였으니까요.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대만에는 다양한 존재가 있고 풍부한 퀴어 문화와 다양한 아이덴티티가 있다는 거예요. 나는 여자이지만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고, 어느 하나의 신분으로만 나를 규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br />&nbsp;</blockquote>
<p><br /></p>
<p>양솽쯔 작가 역시 공식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한국과 대만의 서로 다른 식민지 기억을 탐구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서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반면, 대만에서는 거부감과 향수가 복잡하게 공존한다고 짚었다.</p>
<p><br /></p>
<p>이처럼 소설이 단일한 이름으로 정리하지 않는 대상은 두 사람의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대만이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복건계 한족과 하카인, 수많은 원주민 집단이 터전을 잡았고 뒤이어 일본인이 들어왔다. 전후에는 다시 중국 각지에서 온 이들이 섬에 정착했다.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표준 중국어와 대만어, 하카어의 발음과 언어 체계가 확연히 다르다.</p>
<p><br /></p>
<p><br /></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 다른 기억을 이해하는 방법</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소설 『1938 타이완 여행기』은 올해 국제 부커상을 수상했으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대만이 어떠한 과거를 거쳐 지금의 정체성을 형성했는지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양솽쯔 작가는 2026년 국제 부커상 수상 연설에서 “문학은 자신이 자라난 토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취지의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p>
<p><br /></p>
<p>『1938 타이완 여행기』이 1938년을 배경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 속 대만은 이미 일본 제국의 질서 아래 놓여 있지만 일본 그 자체라고 볼 수 없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지만 중국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전부 설명되지도 않는다. 한족만의 섬도 아니며,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역사적 기억으로 통일된 사회도 아니다.</p>
<p><br /></p>
<p>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기억 또한 단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 한국 독자가 아오야마의 ‘본국’이라는 표현에서 식민지 권력의 불평등을 즉각 읽어내는 현상과, 대만 독자가 그의 모순된 태도에 흥미를 느끼는 반응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에서 출발한다.</p>
<p><br /></p>
<p>그 차이를 확인하는 목적은 어느 한쪽의 기억이 옳고 다른 쪽이 틀렸음을 가려내려는 데 있지 않다. 다른 사회의 역사적 기억을 자신의 경험에만 비추어 단정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p>
<p><br /></p>
<p>양 기자가 강연에서 한국과 대만이 서로를 향해 반복해서 당부한 핵심도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대만 사람이 일본에 대해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한국인이 성찰적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대만 사람 역시 한국인이 일본 식민지배를 다르게 기억하는 역사적 배경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p>
<p><br /></p>
<p>어쩌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여행은 아오야마가 대만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물리적 여정이 아닐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역사적 기억의 틀을 벗어나, 같은 과거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의 자리까지 가보는 노력에서 『1938 타이완 여행기』이 독자에게 제안하는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73800_rnvheawe.jpg" alt="KakaoTalk_20260925_173707240.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신동하]]></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6:58:3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8</guid>
<title><![CDATA[[Opinion] 무엇이 이 공연을 완성시켰을까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8</link>
<description><![CDATA[연극 와 뮤지컬 로 보는 조명의 다른 활용법, 그리고 공연의 핵심에 대한 고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공연은 수많은 요소의 집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lt;시학&gt;에서 연극의 6요소로 ‘플롯, 행동, 인물, 언어, 의미(주제), 음악, 시각적 요소(스펙터클)’를 설명했다. 공연은 하나의 요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연극의 6요소는 공연의 효과를 위해 서로 맞물리며 공연을 완성해 간다. 물론 요소들이 모두 공평하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특정 요소가 부각될 수도, 특정 요소가 희미해질 수도 있다.</p>
<p>
   <br />
</p>
<p>뮤지컬 &lt;난세&gt;와 연극 &lt;알테르 에고&gt;는 6요소 중 ‘스펙터클’이 강조된 작품들이다. 두 작품은 특히 시각적 요소 중에서도 ‘조명’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은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조명을 사용하는 색채와 정도, 의도에 따라 극의 분위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조명의 다채로움을 기준으로 최대인 것을 '맥시멀리즘'이라고 칭한다면, 반대로 그 정도가 최소인 것을 '미니멀리즘'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중요한 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에요 - 연극 &lt;알테르 에고&gt;</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0734_msqydxgy.jpg" alt="알테르에고 표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3px;" />
</p>
<p>&nbsp;</p>
<p>&nbsp;</p>
<p>공연이 시작되기 전, 긴 암전과 함께 불명확한 말소리들이 공간 안에서 휘몰아친다. 혼란스러운 소음을 뒤로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한 아이를 엄마가 다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의 기행을 그의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외치지만 거짓말 취급을 받는다. 이후 불이 켜지면 윌버 박사가 보이고, 한 남자가 수갑을 차고 텅 빈 공간에 앉아 있다. 추후 우리는 처음에 들었던 아이의 음성이 그 남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p>
<p>
   <br />
</p>
<p>남자는 본인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스탠리’로, 자신이 뛰어내려 자살하려다 이곳에 끌려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인지하고 있는 것과 현실은 다르다. 남자는 자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여성을 납치 및 강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스탠리의 말에 윌버 박사는 피해자들이 일제히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여준다.</p>
<p>
   <br />
</p>
<p>스탠리는 정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을 벌인 것인가. 윌버 박사는 믿기지 않는 그의 말들을 의심하며 정신감정을 시작한다. 극 초반부의 윌버는 그의 ‘인격들’의 존재가 혐의를 피하기 위한 ‘연기’라고 여겼다. 자신을 도와달라는 스탠리의 부탁에도 단호하게 정신감정만 할 것이라고 답하던 윌버 박사는, 극의 중반부부터 스탠리와 함께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휩쓸리고 주도하기를 반복한 끝에, 윌버는 스탠리 내면의 어린아이 ‘대니’를 만나 그의 고통의 근원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한다. 과거 창고에서 새아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그녀의 목표가 된다.</p>
<p>&nbsp;</p>
<p>윌버는 스탠리의 여러 인격과 마치 ‘심리 추리 게임’을 하는듯하다. 윌버가 탐정이고, 추적 대상인 스탠리를 심문해 진실을 끌어내야 하는 게임 말이다. 그녀는 각각의 인격을 알아내어 기록하고, 인격들의 ‘내부 규칙’을 파악하고, 대화를 통해 인격 너머의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공연은 주인공 스탠리가 ‘나’라는 존재를 알아냄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결말에 이르기는 하나, 극의 비중상 다중인격을 지닌 스탠리의 ‘치유’보단 ‘추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0937_tazgaktd.jpg" alt="알테르에고5.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nbsp;</p>
<p>&nbsp;</p>
<p>&lt;알테르 에고&gt;는 언제 다른 인격으로 전환될지 모르는 스탠리의 불안정성, 그리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어버리려는 스탠리와 알아내고자 하는 윌버 사이의 긴장감을 감각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조명’이 위태로운 감정과 상황을 시각화한다. 그전에 ‘무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알테르 에고&gt;의 무대는 새하얗다. 작은 의자, 테이블, 그리곤 순백의 공간이 전부다. 인물들도 단 두 명이므로 그 공간의 여백은 더 두드러진다. 순백의 무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벽면에는 칸들이 나누어져 있다. 흰 캔버스 같은 무대를 색채로 채우고 싶은 욕심이 과연 없었을까. 그러나 연출은 최소한의 배우와 최소한의 색감과 조명을 사용하는 것을 택했다.</p>
<p>
   <br />
</p>
<p>공연의 연출은 서사와 상당히 밀착해 있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다. 해리성 인격장애를 지닌 인물 스탠리는, ‘조명기의 주도권을 얻으면 해당 인격이 자리를 차지하고 나타난다.’라는 규칙을 설명한다. 이 규칙은 언어적으로, 시각적으로도 관객에게 학습된다. 조명기에 대해 설명할 때 동그란 조명은 객석 쪽을 비춘다. 그 순간 관객들은 방마다 숨겨져 있는 스탠리의 인격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연출은 인격이 바뀌기 전마다 벽의 칸들에 빛과 그림자가 스르르- 지나가는 전조 증상을 보여주며 조용히 예고하고 있다. 그 직관적이고도 분명한 연출 ‘패턴’이 반복될수록 관객은 몰입하게 되고, 스탠리의 다음 인격을 기다리며 윌버 박사처럼 긴장하게 된다.</p>
<p>
   <br />
</p>
<p>스탠리가 허상으로 본 불길을 표현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공연은 대부분 ‘흑과 백’만을 사용한다. 덜어낸 무대일수록 조명을 잘 입는다. 그 때문에 화려한 색의 조명들이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우나 &lt;알테르 에고&gt;는 과감히 욕심을 버렸다. 덕분에 그림자를 포함한 핵심 연출이 더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일관성과 미니멀리즘을 최적화시킴으로써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선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넘치지 않는 것’이 주는 긴장감, 그것이야말로 &lt;알테르 에고&gt;의 강점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1151_vpwwexbr.jpg" alt="알테르에고4.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한편, 이러한 미니멀리즘은 지나치게 매끄러워 미끄러질 우려가 크다. 이때 연출 이외의 포지션에서 ‘잡히는 것’이 있도록 물성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lt;알테르 에고&gt;는 배우들이 그 역할을 해낸다. 무대 자체가 비워질수록 공연을 주도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p>
<p>
   <br />
</p>
<p>스탠리 역의 정휘 배우는 공연의 핵심인 각 인격과 전환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도록 연기했다. 성인이 되어 관객이 기습당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뾰족하게 굴다가, 순진한 아이가 되어 고분고분한 말투를 쓰며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표정, 말투, 자세 등등의 유동적이면서도 분명한 변화는 ‘내 안의 너무 많은 나’의 존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윌버 역의 황은후 배우 역시 고고한 박사의 모습부터 자신의 속내를 들켜 기습당하는 순간 침착해지려 애쓰는 모습, 과거의 트라우마를 알아가며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연기로 구현하며 서사의 포인트들을 만들어준다.</p>
<p>
   <br />
</p>
<p>&lt;알테르 에고&gt;라는 이인극은 분명 완성도가 높다. 흥미로운 서사에 좋은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과 교본처럼 완벽한 조명 연출을 보고 싶다면, &lt;알테르 에고&gt;를 추천한다. 다만 구현되지 못하고 말로만 언급되고 넘어가는 인격들이 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배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본상 23명에 달하는 인격들 모두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다. 패턴화된 서사 대신 다른 문제의식과 색다른 결론을 내려주었다면 어땠을까. 흥미로운 소재를 두고도 작가가 만든 서사와 극이 주는 메시지가 다소 아쉽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span><span style="font-size: 18px;"><b>그대를 태우고 내가, 내가 왕이 되리니 - 뮤지컬 &lt;난세&gt;</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1237_fzzwvlch.jpg" alt="난세 표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0px;" />
</p>
<p>&nbsp;</p>
<p>&nbsp;</p>
<p>연극 &lt;알테르 에고&gt;가 덜어냄의 미학을 보여주었다면, 뮤지컬 &lt;난세&gt;는 그 반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lt;난세&gt;는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함께 새 나라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힘썼던 이방원과 정도전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합에 초점을 맞추어 다룬 뮤지컬이다. 두 사람은 역사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바가 분명하므로 캐릭터화하기도 쉽다. 현실과 이상, 무(武)와 문(文)의 대립과 조화는 한 번쯤은 생각해 보기 좋은 주제이므로 제작자로선 극을 올릴 명분도 있다.</p>
<p>
   <br />
</p>
<p>그런데 오히려 예전부터 너무 많이 두 사람의 이상관과 현실관에 대해 고민해 봐서 그런가, 플롯 자체가 익숙하다 못해 다소 진부한 것이 되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 누구나 아는 대사(하여가, 단심가 등), 누구나 아는 인물의 집합에는 새로운 것이 그다지 없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정도전이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실화, 역사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p>
<p>
   <br />
</p>
<p>뮤지컬 &lt;난세&gt;도 제작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역사를 다룬 극의 난관을, 공연은 지루하지 않은 ‘연출’과 관계의 ‘재조명’으로 타파하고자 했다. 대립하는 관계성을 시각적 재미를 통해 직관적으로 구현해 지루하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한듯하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1315_uzxzdvnc.jpg" alt="난세 무대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조명과 의상이 그 노력의 대표적인 부분이다. &lt;난세&gt;는 두 사람을 상징하는 색을 일대일로 부여하고 있다. 공연에서 적색(붉은 계열)은 이방원, 청색(푸른 계열)은 정도전을 비춘다. 의상 역시 대비의 궤를 같이한다. 색뿐만 아니라 옷의 안과 밖까지 다를 정도로 분명하게 ‘다름’을 표하고 있다. 정도전은 흰색 안에 푸른 옷을 받쳐입었고, 이방원은 붉은 옷 안에 검은 옷을 받쳐입었다. 왕이 쓰러진 날 밤 정도전을 죽이겠다는 작전을 펼칠 때만 검은 옷 안에 붉은 옷을 받쳐입는 것으로 바뀐다. 본심을 숨기고 작전을 수행하는 이방원의 심리를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p>
<p>
   <br />
</p>
<p>붉은색은 ‘힘의 색’이다. 시선을 사로잡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다. 주로 열정, 위험, 긴장감을 상징한다. 또한 진홍색은 서양 중세에서 오랫동안 위엄과 권력의 표상이었다. 이는 베네치아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총독이 진홍색 옷을 입고, 사슴뿔 모양의 진홍색 공식 총독 모자를 쓴 것에서 비롯되었다. 옷과 모자를 케르메스 일리키스를 말려 얻은, 고가의 붉은색 염료로 염색한 것이다. 따라서 빨강이야 말로 이방원의 권력욕과 끓어오르는 인정욕구, 열정 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색이다.</p>
<p>&nbsp;</p>
<p>푸른색은 ‘책임감’과 ‘신뢰감’을 나타내는 색이다. 주로 차분함과 믿음, 지성을 상징한다. 파란색은 평온함, 책임감과 연관되어 있어 신뢰와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기업 브랜딩에도 널리 사용된다. 이는 태조의 믿음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혼란스러운 난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이성적인 면과 맞닿아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1513_ikbmazxy.jpg" alt="난세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내내 두 가지의 색과 빛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상을 함께 그릴 때, ‘백색’의 밝고 따뜻한 조명이 공간 전체를 밝힌다. 첨예한 갈등이 지속되다가도 플래시백이 이루어지며 그들이 평화로웠던 과거가 꿈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두 사람이 난세에서 대립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되, 중간중간 두 사람의 과거 밝고 화기애애했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되는 구성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lt;난세&gt;는 그 플래시백을 통해 갈등 관계 속에 ‘동경’이란 키워드를 넣음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단순히 다투는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정도전은 어릴 적부터 동경하고 함께하고 싶어 했던 스승, 그러다가 그와 나란히 선 동료이자 동지였다. 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으나 실행하는 방식이 달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공연은 설명한다. 그 때문에 방원이 정안대군이던 시절에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눈빛을 볼 수 있다.</p>
<p>
   <br />
</p>
<p>지방의 장군으로 있던 이성계를 정도전이 찾아왔을 때, 그때 정도전의 겉옷은 순백이다. 그 어떤 것도 때 묻지 않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옷의 색으로부터 드러난다. 과거 방원은 정도전을 믿고 따랐고, 정도전 역시 그를 애정으로 가르쳐주었다. 평화로운 사제관계였던 추억을 회상할 때는 적색과 청색의 조명이 아닌 평온한 백색의 빛이 내리쬔다. 모든 갈등이 지워지고 평화로운 과거, 함께 이상을 그리던 순간에는 내내 보여주던 화려하게 대립하는 색들도 잦아들며 잊히는 듯하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1633_ghfaimhv.jpg" alt="난세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그 외에도 공연은 다양한 상징을 이용한다. 두 인물의 다툼과 계략을 장기판과 장기말로 표현하고, 장기말이 놓이는 순간마다 ‘조명’이 비추며 짜릿함을 낳는다. 사실 장기판을 바닥에 그려 ‘짜인 판’을 은유하는 것 자체가 새롭다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일관성 있게 바둑판과 장기말을 밀어붙이며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p>
<p>
   <br />
</p>
<p>정도전이 이방원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병을 해체시키고, 세자를 다른 이로 임명하는 등의 일을 하며 이방원을 옥죌 때, 바깥에 있던 의자들은 하나의 장기말이 되어 판 위로 놓이기 시작한다. 가운데에 놓인 탁자와 작은 장기판을 중심으로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의자들은, 상대가 받았을 압박감을 시각화한다. 놓일 때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빛을 받으며 강조된다. 방원이 정도전에게 역공을 가할 때도 마찬가지의 연출이 사용된다.</p>
<p>
   <br />
</p>
<p>시작부터 등장하는 두 인물의 칼춤 역시 관객의 시선을 휘어잡는 볼거리 중 하나다. 칼춤(혹은 대결)은 도입부와 후반부에 꽤 길게 등장한다. 이방원이 정도전과 대립해서 죽일 계획을 시작한 전과 후에 각자가 혼자 추는 칼춤도 있고, 둘이 대적하는 칼춤도 있다. 도입부에 시작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대사 하기도 전에 보여주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칼을 쓰는 모습은 아름답기는 하나 장황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넓은 무대를 두 사람이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비중이 너무나도 늘어난 탓이다.</p>
<p>
   <br />
</p>
<p>일련의 연출 덕분에 새롭게 찾아온 2026년도의 뮤지컬 &lt;난세&gt;는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들이 많았다. 정도전이 자신의 실수를 너무 ‘갑자기’ 깨닫고, 왜 이 시대를 ‘난세’라고 칭했는지조차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루할 틈 없는 시각적 자극과 관계성에 대한 해석은 흥미롭지만 다소 과하다. 맥시멀리즘에 서사적으로 유의미한 의도가 있고 타당한 지점이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결국 무대를 완성하는 것은 -</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특정 요소를 강조하거나 줄여서 공연의 포인트를 살리는 것은 좋은 연출법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만’ 살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공연의 6요소를 꼽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모든 요소가 기본은 충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p>
<p>&nbsp;</p>
<p>결국 중요한 것은 ‘특정 요소를 강조하거나 축소함으로써 연출가가 이루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으며, ‘공연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이다. 공연의 척추 역할을 하며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핵심은 바로 ‘내용’과 관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을 이끌어나갈 힘이 되어주는 플롯과 주제는 공연을 만들어가면서 가장 포기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사유는 극이 던지는 주제 의식에서 시작되며, 이는 작가가 만든 서사에서 나온다.</p>
<p>
   <br />
</p>
<p>오늘 살펴본 &lt;알테르 에고&gt;와 &lt;난세&gt; 역시 같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lt;알테르 에고&gt;는 ‘반전’이 있는 내용과 미니멀한 조명, &lt;난세&gt;는 두 사람의 관계성에 주목한 내용과 맥시멀한 조명을 통해 흥미를 유도하며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한편으론 주제 의식과 메시지에 부족한 점이 보여 아쉬움을 남겼지만 말이다. 두 공연이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한다면, 관객들에게 더 깊게 와닿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24054_clokrzlu.jpg" alt="권혜선.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권혜선]]></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22:34:5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4</guid>
<title><![CDATA[[Opinion] 할 말 있으면 랩으로 해 - 뮤지컬 &#039;소크라테스 패러독스&#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4</link>
<description><![CDATA[안다고 착각하기 쉬운 시대의 랩 뮤지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뮤지컬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가 지난 10일 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개막했다. HJ컬쳐의 극작품인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는 2022년 초연 당시 '랩 뮤지컬'이라는 형식, 그리고 래퍼들의 주연 캐스팅이라는 것을 한 차례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2026년 재연으로 돌아온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 대체 어떤 작품일까? 한마디로 랩으로 하는 재판이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기 전 벌어졌던 재판,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뮤지컬이 되어 21세기의 관객들을 찾아온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소크라테스다.'라는 신탁을 전해 듣게 되어,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여러 현자들을 찾아다녔지만, 지혜로운 자들을 결국 찾지 못하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자임'을 깨닫게 된다.</p>
   <p><br /></p>
   <p>그 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며, 오류와 모순을 지적하며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해주고, 또한 신의 소명에 따라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욕망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인간 양심의 등에'가 되어 아테네를 변화시키려고 한다.</p>
   <p><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러나 권력자들은 청년 시인 멜레토스를 전면에 내세워서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고발하게 된다. 아테네 법정에서 나온 소크라테스는 전부터 자신을 고발했던 사람들과 현재 고발한 멜레토스를 향해서 스스로 변론을 하게 된다. 그는 500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고발내용의 진위를 가리며, 멜레토스와 열띤 심리를 벌이면서 유리한 변론을 하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게 되고, 더구나 사형당할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p>
   <p><br /></p>
   <p style="text-align: right; ">- 뮤지컬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 시놉시스</p>
   <p>&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20611_koumtrhb.png" alt="소크패러 타이틀.png" style="width: 700px; height: 972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과거의 이야기나 담론을 21세기라는 현대의 무대로 가져올 때, 우리는 언제나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수천 년 전 아테네의 광장을 거닐던 소크라테스의 음성에 우리가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 질문 안에 존재한다.</p>
<p><br /></p>
<p>신전의 신탁과 작중의 평가, 그리고 역사적 평가에 이르기까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칭송받은 이유는 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을 많이 축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지혜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안다’는 깨달음, 즉 ‘무지의 지(知)’에서 출발한다. 그는 어설픈 지식과 통념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방 스스로가 자신의 무지를 직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p>
<p><br /></p>
<p>그러나 자신과 타인의 무지를 파헤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모두가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내로라하는 정치인, 당대의 지식인, 저명한 가르침을 주며 명성을 누리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가진 통념의 허구성을 밝혀냈다. 본래 자신의 무지를 마주하는 과정은 심리적 저항과 수치심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사회의 기득권과 대중은 그를 향해 깊은 분노를 태웠다.</p>
<p>&nbsp;</p>
<p>이러한 소크라테스적 방식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간파했던 인물이 바로 고발자 멜레토스다. 작중 청년 시인이자 매우 보수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청년들을 자극하여 기존의 질서와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타락시킨다고 비판한다. 기존의 체제와 안락함에 안주하려는 사회적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사유를 촉구하는 질문이야말로 공동체의 안정성을 흔드는 가장 위험한 요소였던 것이다.</p>
<p><br /></p>
<p>이러한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에 붙어 있는 등에’로 비유한다. 둔해진 말을 계속해서 찌르고 자극하여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존재,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정체성이었다. 그의 질문은 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귀찮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잠’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사유하기를 멈춘 채 사회가 주입한 관습과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하며, 이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삶과 대척점에 서 있는 상태다.</p>
<p><br /></p>
<p>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완성된 지식이나 정답을 교조적으로 주입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의문점(질문)을 품고, 거듭 생각하며, 마침내 무지의 깨달음을 통해 지혜로워지는 그 ‘과정’ 자체를 이끌어냈다. 그에게 있어 인간다움과 철학의 본질은 완성된 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하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척하지 마, 다 뽀록날 거야</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아는 척’하기 쉬운 시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가장 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p>
<p><br /></p>
<p>매일같이 거대한 정보의 폭포수가 쏟아진다. 하지만 그 무수한 정보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진정 유용한지 가려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대상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내면화하는 ‘공부’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정보 중 ‘무엇을 안다고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곤 한다. 여기에 AI라는 첨단 도구가 등장하여 우리를 대신해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정제해 준다. 우리는 그것을 몇 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마치 해당 지식을 완벽히 습득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AI라는 도구가 어떤 매커니즘과 편향을 거쳐 그 정보를 선별했는지 알지 못한다. 거대 언어 모델과 알고리즘이 가진 이른바 블랙박스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베일에 싸여 있다. 내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체 불명의 시스템이 골라준 파편을 눈으로 훑었을 뿐이다.</p>
<p><br /></p>
<p>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정말 이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겨를도 없을뿐더러, 솔직히 말해 지금 사회에서 그런 물음은 돈도 되지 않고 당장의 효율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내가 이렇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방에 널리 퍼뜨리는 행위다. 안다고 주장하는 겉치레와 스펙터클은 곧 자본이 되고 명예가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p>
<p><br /></p>
<p>바로 이러한 시점에 2000년의 시공간을 넘어 날아온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르는 서늘하고 확실한 경종이 된다. 신나게 랩을 주고받으며 무대의 열기를 즐기던 관객들은,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크라테스의 라임과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그 힙합의 비트 끝에서 뜻밖의 묵직한 물음표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있나?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가? 안다는 건 뭐지? 또 착각한다는 건 뭐지?&nbsp;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p>
<p><br /></p>
<p>21세기라는 이 화려하고 스피디한 시대에 우리가 굳이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의 음성을 무대 위로 불러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리즘과 포장된 지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무지(無知)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임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척하고 포장해 봐야 언젠가는 다 드러나고 말 테니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승주]]></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19:56:1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8</guid>
<title><![CDATA[[에세이] 좋아하는 일을 꼭 잘해야 하나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8</link>
<description><![CDATA[나중에 내가 어떤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면 좋겠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34854_wffbohei.jpg" alt="[포맷변환][크기변환]IMG_037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얼마 전 엄마와 나이가 들수록 좋아하는 것이 줄어드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때는 좋아하는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예전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일단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것을 알아갈 시간도 있어야 하며,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을 쏟아야 한다. 꽤나 수고로운 과정이기에 좋아하는 일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p>
<p>
   <br />
</p>
<p>그래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과정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한다'라는 것 자체가 이유가 되었던 순간들은 사라지고, 점차 조건을 따지게 된다.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얼마나 가치 있는 시간인지. 취미를 이야기할 때조차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취향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고민한다. 결국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했던 일에 이유와 설명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p>
<p>
   <br />
</p>
<p>물론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에서까지 언제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p>
<p>
   <br />
</p>
<p>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예뻐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했던 순간을 잃지 않고, 그 마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좋아하는 일에도 쓸모와 가치를 따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좋아하는 일은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야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일까.</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우리가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무엇을 하든 그 시간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가 중요해진 사회에서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않는 시간은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쉬는 시간마저 재충전을 위한 시간으로, 취미마저 새로운 능력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p>
<p>
   <br />
</p>
<p>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소비를 통해 신념을 표현하는 미닝아웃처럼, 무엇을 좋아하고 소비하는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론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마저 자신을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했던 일에도 또 다른 이유를 찾게 된다.</p>
<p>
   <br />
</p>
<p>그런 점에서 최근 몇 달간 유행했던 말랑이가 문득 떠오른다. 손으로 주무르고 만지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얻는 말랑이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성과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말랑이가 어른들 사이에서 유행한 이유를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일상에서 별다른 목적 없이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좋아하는 일을 잃어버리는 순간</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35013_nvutaydh.jpg" alt="[포맷변환][크기변환]IMG_1324.jpg" style="width: 700px; height: 232px;" />
</p>
<p>&nbsp;</p>
<p>&nbsp;</p>
<p>언제부터 좋아하는 일에 쓸모와 가치를 따지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과목을 배웠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역사를 배울수록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는 게 재미있어 세계사를 선택했다. 학기 초만 해도 수업을 듣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방대한 역사를 외워야 하는 암기과목이었던 만큼 성적에 대한 부담이 커졌고, 학기 말에는 가장 힘들고 짜증 나는 과목이 되었다.</p>
<p>
   <br />
</p>
<p>세계사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용도, 가르치는 선생님도 똑같았지만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즐거웠던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좋아하는 일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성취하는 것은 즐거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보다 얼마나 잘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가 중요해지면 좋아하는 마음은 뒷전으로 밀려난다.</p>
<p>
   <br />
</p>
<p>나의 취미는 춤이다. 춤을 추는 순간에는 온전히 그 순간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춤추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춤출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고, 결국 취미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돌이켜보면 좋아하는 일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는 건 그만큼 일상이 버거웠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제나 재미있게 느껴지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니까.</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좋아하는 마음에는 자격이 필요한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 좋아하는 작가가 몇 명쯤은 있어야 할 것 같고, 영화가 좋다고 하면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나 고전 영화 몇 편쯤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좋아하는 분야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은 즐겁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만큼의 지식과 경험을 갖춰야 취향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어느새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바뀌는 것이다.</p>
<p>
   <br />
</p>
<p>그런 점에서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에서 혜진이 한 말이 떠오른다. 혜진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는 하리의 모습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예뻐 보이고 싶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p>
<p>
   <br />
</p>
<p>이 장면이 인상 깊었던 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잘해내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나 자신이 좋기 때문에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통해 얻는 결과보다 그 일을 선택하고 즐기는 자신의 모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p>
<p>
   <br />
</p>
<p>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을 온전히 누리는 일은 다르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즐거움을 더해줄 수도 있지만,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정작 좋아하는 마음을 놓치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에 반드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도,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그 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바나나우유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35044_gpshgysv.jpg" alt="[포맷변환][크기변환]IMG_152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얼마 전 사촌과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촌은 빙그레 바나나우유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었지만, 생각할수록 좋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니.</p>
<p>
   <br />
</p>
<p>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확인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을 해내고,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때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야 한다. 그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모든 시간과 활동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다 보면 좋아하는 일마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p>
<p>
   <br />
</p>
<p>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일을 잘하지 못해도,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해도,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어갈 수 있는 취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어떤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춤이든, 책이든,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임채희]]></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3:51:0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93</guid>
<title><![CDATA[[Review] 삶의 주홍글씨 - 알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93</link>
<description><![CDATA[마지막 알파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이 질문에 답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중에는 알파의 표정을 다르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83341_fntapelh.jpg" alt="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br /></p>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nbsp;</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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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center; ">영화 알파를 보고 난 뒤</p>
               <p style="text-align: center; ">개인적인 후기와 스포가 등장합니다.</p>
               <p>&nbsp;</p>
               <p>&nbsp;</p>
               <p>나는 코로나 세대에 속한다. 코로나 시대에 취업했고 당시 다니던 회사의 첫 공식 코로나 확진자였다. 전날 나와 밥을 먹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그때 처음으로 내 자신이 바이러스가 되는 듯한 경험을 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죄책감과 두려움. 지금이야 코로나를 독감과 비슷한 호흡기 감염병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감염 자체만큼이나 '감염자'라는 낙인이 무서웠다.</p>
               <p>&nbsp;</p>
               <p>그런 측면에서 알파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정체 모를 타투 'A'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태도는 인상적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내 기억에도 없는 투박한 글자가 새겨졌는데도 알파는 무심하다.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은 상처가 아플 때뿐이다. </p>
               <p>&nbsp;</p>
               <p>알파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주변의 시선이 공격으로 변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카메라 역시 알파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저 덧난 상처가 간지러워 긁었을 뿐인데 피가 줄줄 흐르고 병에 걸렸다며 시작된 괴롭힘을 피해 도망치다 찢어진 머리에서 나온 피는 마치 상어에게 물린 것처럼 알파를 둘러싼다.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83406_mypolibw.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p>
               <p>&nbsp;</p>
               <p>&nbsp;</p>
               <p>나를 제외한 모두가 수영장에서 빠져나와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는 순간. 그 시선만으로도 알파가 자신의 '비정상'을 인식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냥 상처일 뿐이라고. 난 아무것도 '확진'받지 않았어. </p>
               <p>&nbsp;</p>
               <p>영화에는 수많은 a가 등장한다. 알파, 아드리앙, 아민.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주홍글씨를 떠올리게 하는 알파의 몸에 새겨진 a, 퍼진 바이러스의 특징과 에이즈와의 공통점까지.</p>
               <p>&nbsp;</p>
               <p>알파는 그리스 문자의 첫 번째 글자다. 그리고 알파는 학교에서 가장 먼저 ‘병에 걸린 사람’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알파가 실제로 감염됐는지는 결국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병보다 먼저 퍼지는 것은 공포이고, 공포는 한 사람의 몸에 낙인을 찍는다. 감염 여부가 확인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알파를 감염자로 만들어버린다. 삶의 주홍글씨란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다. 영화는 여성 화자인 알파, 그리고 퀴어로 추정되는 선생님을 각각 다른 낙인의 피해자로 조명한다. 그 둘은 별도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아도 서로를 위해 연대하는 눈빛을 보내고 비난하는 주체에서 빠져 있다. 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진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이 부분 정도가 아쉬웠다. </p>
               <p>&nbsp;</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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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p>그리고 알파의 주홍글씨가 시작되는 순간 아민이 나타난다. 엄마가 목격한 최초의 희생자. 엄마의 또다른 알파(처음).</p>
               <p>&nbsp;</p>
               <p>아민은 알파의 삼촌이자 약물중독자다. 어느 순간 알파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두 개의 시간으로 갈라진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는 의도적으로 뭉그러져 있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는 엄마의 머리 모양이다. 현재의 엄마는 생머리이고, 과거의 엄마는 꼬불꼬불한 머리를 하고 있다. 한 시간 속 아민은 약물중독자로, 또 다른 시간 속 아민은 전염병에 걸려 서서히 석고화되는 사람으로 존재한다.</p>
               <p>&nbsp;</p>
               <p>영화의 끄트머리에 도착하면 어쩌면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알파의 시점도, 아민의 시점도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알파의 엄마이자 아민의 누나다. 영화에서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이 모든 역사와 기억의 관찰자. 사랑으로 모든 것을 구하려고 했던 가장 안타까운 생존자. </p>
               <p>&nbsp;</p>
               <p>그렇게 생각하면 알파의 낙인이 시작되는 순간 나타난 아민 역시 다르게 보인다. 아민은 이미 알파가 어렸을 때 죽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알파에게 벌어진 일이 오래전 죽어버린 아민을 다시 불러낸 것은 아닐까. 딸의 몸에 찍힌 낙인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자신이 끝내 구하지 못했던 동생의 몸을 다시 떠올린다.</p>
               <p>&nbsp;</p>
               <p>혹은 그것이 엄마 한 사람만의 기억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어린 알파 역시 삼촌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했다. 삼촌의 죽음을 도울 수밖에 없었던 어린 알파의 기억 속에 남은 죄책감과 두려움이 아민을 다시 이 붉은 바람의 세계로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뒤섞듯 아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역시 서로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인다.</p>
               <p>&nbsp;</p>
               <p>끝난 줄 알았던 기억은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시작되고, 과거의 공포와 낙인은 형태만 바꾼 채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대주제가 사랑인 것은 그렇게 길게 설명이 필요한 일이 아닐 것이라 확신한다. </p>
               <p>&nbsp;</p>
               <p>사랑은 가끔 이기적으로 군다. 나는 나를 위해 너를 살렸고 나는 나와 너를 위해 죽고자 하는데 누가 맞다고 할 것인지. 마지막 알파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이 질문에 답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중에는 알파의 표정을 다르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83419_ndsvulfl.jpg" alt="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p>
               </div>
            </div>
         </div>
      </div>
   </div>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조수빈]]></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8:35:3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7</guid>
<title><![CDATA[[Review] 손길이 담긴 애니메이션의 가치 –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7</link>
<description><![CDATA[일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감독 토모키 미사토가 들려준 작품과 애니메이션의 세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nbsp;9월&nbsp;17일부터&nbsp;9월&nbsp;22일까지&nbsp;‘두루두루’라는&nbsp;슬로건과&nbsp;함께&nbsp;서울인디애니페스트&nbsp;2026이&nbsp;열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35444_bdixhmox.jpg" alt="서울인디애니페스트2026 트레일러 스틸컷.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nbsp;</p>
<p>&nbsp;</p>
<p>사실&nbsp;다른&nbsp;예술에&nbsp;비해&nbsp;애니메이션에&nbsp;대해&nbsp;잘&nbsp;알지&nbsp;못했고,&nbsp;상업&nbsp;애니메이션이&nbsp;아닌&nbsp;독립&nbsp;애니메이션&nbsp;분야는&nbsp;개인적으로&nbsp;다소&nbsp;낯설었다.&nbsp;하지만&nbsp;몇&nbsp;년&nbsp;전 종이&nbsp;인형을&nbsp;활용해&nbsp;만든&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nbsp;영상을&nbsp;유튜브에서&nbsp;즐겨&nbsp;보았고, &lt;윌레스와&nbsp;그로밋&gt;과&nbsp;같은&nbsp;상업&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에도&nbsp;관심이&nbsp;있었던터라&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을&nbsp;제작하는&nbsp;감독의&nbsp;작품을&nbsp;직접&nbsp;보고&nbsp;싶었다.&nbsp;그러던&nbsp;중&nbsp;일본의&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nbsp;감독&nbsp;토모키&nbsp;미사토의&nbsp;작품을&nbsp;이번&nbsp;서울인디애니페스터2026에서&nbsp;볼&nbsp;수&nbsp;있게&nbsp;되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35504_rmgrizzx.jpg" alt="20260920_140326(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감독&nbsp;토모키&nbsp;미사토의&nbsp;작품과&nbsp;그&nbsp;속에&nbsp;담긴&nbsp;작업과정</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이번&nbsp;상영에서는&nbsp;감독의&nbsp;학부&nbsp;졸업&nbsp;작품인&nbsp;&lt;나만&nbsp;봐&gt;,&nbsp;대학원&nbsp;과제&nbsp;작품인&nbsp;<candy.zip>,&nbsp;대학원&nbsp;졸업&nbsp;작품인&nbsp;<my little="" goat="">,&nbsp;그리고&nbsp;졸업&nbsp;후&nbsp;제작한&nbsp;&lt;뿌이&nbsp;뿌이&nbsp;모루카&gt;와&nbsp;같은&nbsp;상업&nbsp;애니메이션&nbsp;작품들이&nbsp;차례로&nbsp;상영되었다.</my></candy.zip></p>
<p>
   <candy.zip><my little="" goat="">&nbsp;</my></candy.zip>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35600_ynbybxhs.jpg" alt="20260920_164932(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이후&nbsp;진행된&nbsp;GV에서는&nbsp;감독이&nbsp;그동안&nbsp;각각의&nbsp;애니메이션을&nbsp;어떻게&nbsp;제작해&nbsp;왔는지,&nbsp;어떤&nbsp;어려움을&nbsp;경험했는지,&nbsp;어떤&nbsp;촬영&nbsp;방식을&nbsp;사용했는지 등 작품의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nbsp;들려주었다.&nbsp;또한&nbsp;스토리의&nbsp;중요성,&nbsp;영화제&nbsp;출품의&nbsp;중요성,&nbsp;장면에서의&nbsp;반전과&nbsp;전환의&nbsp;중요성, AI&nbsp;시대에&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이&nbsp;가지는&nbsp;특수성&nbsp;등에&nbsp;대해서도&nbsp;구체적으로&nbsp;설명해주었다.&nbsp;이러한&nbsp;이야기는&nbsp;앞으로&nbsp;애니메이션&nbsp;감독을&nbsp;꿈꾸는&nbsp;사람들에게&nbsp;도움이&nbsp;될&nbsp;만한&nbsp;내용이라는&nbsp;생각이&nbsp;들었다.</p>
<p>&nbsp;</p>
<p>실제로&nbsp;감독은&nbsp;100장이&nbsp;넘는&nbsp;슬라이드를&nbsp;준비해&nbsp;자신의&nbsp;작품과&nbsp;제작&nbsp;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를 통해 미사토 감독이 애니메이션을&nbsp;진심으로&nbsp;좋아하며, 애니메이션 관련&nbsp;분야에서&nbsp;활동하는&nbsp;사람들과&nbsp;학생들에게&nbsp;자신의&nbsp;경험을&nbsp;나누고 도움을&nbsp;주고자 한다는 것을 느낄&nbsp;수&nbsp;있었다.</p>
<p>&nbsp;</p>
<p>먼저 &lt;나만&nbsp;봐&gt;라는&nbsp;작품은&nbsp;집착이&nbsp;있는&nbsp;것처럼&nbsp;보이는&nbsp;여자친구와&nbsp;여자친구보다&nbsp;다른&nbsp;것에&nbsp;쉽게&nbsp;한눈을&nbsp;파는&nbsp;남자친구가&nbsp;등장하는&nbsp;작품이었다.&nbsp;작품&nbsp;초반에는&nbsp;집착하는&nbsp;여자친구의&nbsp;모습이&nbsp;두드러지지만,&nbsp;결국&nbsp;남자친구&nbsp;역시&nbsp;자신이&nbsp;여자친구에게&nbsp;많이&nbsp;소홀했다는&nbsp;사실을&nbsp;깨닫는&nbsp;장면이 인상&nbsp;깊었다.&nbsp;이&nbsp;모습을&nbsp;보면서&nbsp;개인적으로&nbsp;현대&nbsp;사회에서&nbsp;숏츠나&nbsp;스마트폰&nbsp;등의&nbsp;영향으로&nbsp;집중력이&nbsp;저하되고,&nbsp;가까운&nbsp;사이에&nbsp;있는&nbsp;사람에게조차&nbsp;무관심해지는&nbsp;일부&nbsp;현대인들의&nbsp;모습을&nbsp;떠올리게&nbsp;되었다.</p>
<p>&nbsp;</p>
<p>미사토&nbsp;감독은&nbsp;처음에는&nbsp;&lt;나만&nbsp;봐&gt;를&nbsp;일반적인&nbsp;2D&nbsp;애니메이션으로&nbsp;제작하려&nbsp;했지만,&nbsp;제작비&nbsp;등&nbsp;여러&nbsp;현실적인&nbsp;문제로&nbsp;인해&nbsp;펠트&nbsp;인형을&nbsp;활용한&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으로&nbsp;제작하게&nbsp;되었다고&nbsp;설명했다.</p>
<p>&nbsp;</p>
<p>두&nbsp;번째로&nbsp;상영된&nbsp;<candy.zip>은&nbsp;‘달면&nbsp;삼키고&nbsp;쓰면&nbsp;뱉는다’라는&nbsp;한국&nbsp;속담이&nbsp;떠오르는&nbsp;애니메이션이었다.&nbsp;직장에서&nbsp;문서를&nbsp;저장하고&nbsp;압축한&nbsp;후&nbsp;상사에게&nbsp;결재를&nbsp;받는&nbsp;과정을&nbsp;‘사탕’이라는&nbsp;소재와&nbsp;연결해,&nbsp;상사의&nbsp;입맛에&nbsp;맞는&nbsp;사탕을&nbsp;만들어&nbsp;주는&nbsp;이야기로&nbsp;표현한&nbsp;아이디어가&nbsp;매우&nbsp;신선하게&nbsp;느껴졌다.&nbsp;또한 소재로&nbsp;사용한&nbsp;아크릴이&nbsp;사탕의&nbsp;단단하고&nbsp;투명한&nbsp;느낌을&nbsp;잘&nbsp;표현해&nbsp;주어&nbsp;애니메이션에&nbsp;대한&nbsp;몰입감을&nbsp;높여&nbsp;주었다.</candy.zip></p>
<p>&nbsp;</p>
<p>그러나&nbsp;GV에서&nbsp;감독이&nbsp;스토리&nbsp;구성에&nbsp;대해&nbsp;아쉬움이&nbsp;있었다고&nbsp;이야기했는데, 필자 역시&nbsp;작품을&nbsp;보면서&nbsp;이해하기&nbsp;어려운&nbsp;부분이&nbsp;있었다.&nbsp;작품을&nbsp;통해&nbsp;어떤 핵심&nbsp;메시지를&nbsp;전달하고자&nbsp;했는지에&nbsp;대해서는&nbsp;영화를&nbsp;본&nbsp;후에도&nbsp;여러&nbsp;번&nbsp;생각해&nbsp;볼&nbsp;필요가&nbsp;있었으며,&nbsp;각&nbsp;장면에서&nbsp;무엇을&nbsp;말하고자&nbsp;하는지&nbsp;명확하게&nbsp;이해하기&nbsp;어려운&nbsp;부분도&nbsp;있었다.</p>
<p>&nbsp;</p>
<p>마지막으로&nbsp;감독의&nbsp;작품&nbsp;중&nbsp;가장&nbsp;인상&nbsp;깊었던&nbsp;작품은&nbsp;<my little="" goat="">였다.&nbsp;이&nbsp;작품은&nbsp;어린&nbsp;시절&nbsp;흔히&nbsp;접했던&nbsp;동화&nbsp;&lt;늑대와&nbsp;일곱&nbsp;마리&nbsp;아기&nbsp;염소&gt;를&nbsp;새롭게&nbsp;재해석한&nbsp;단편&nbsp;애니메이션이었다.&nbsp;이&nbsp;작품을&nbsp;보고&nbsp;느낀&nbsp;점을&nbsp;한마디로&nbsp;표현하자면, ‘반전의&nbsp;반전의&nbsp;반전이&nbsp;있는&nbsp;작품’이라는&nbsp;생각이&nbsp;들었다.</my></p>
<p>&nbsp;</p>
<p>감독은&nbsp;‘만약&nbsp;늑대가&nbsp;어린&nbsp;염소를&nbsp;잡아먹고&nbsp;소화했다면&nbsp;어떻게&nbsp;되었을까?’라는&nbsp;가정에서&nbsp;작품을&nbsp;시작했다고&nbsp;설명했다.&nbsp;이러한&nbsp;설정을&nbsp;바탕으로&nbsp;어미&nbsp;염소가&nbsp;장남&nbsp;토루쿠를&nbsp;늑대에게서&nbsp;발견하지&nbsp;못한&nbsp;채,&nbsp;우연히&nbsp;털옷을&nbsp;입은&nbsp;소년&nbsp;나츠키를&nbsp;보고&nbsp;자신의&nbsp;장남&nbsp;토루쿠라고&nbsp;착각해&nbsp;데려오게&nbsp;되면서&nbsp;이야기가&nbsp;시작된다.</p>
<p>&nbsp;</p>
<p>나츠키는&nbsp;흉터를&nbsp;가진&nbsp;아기&nbsp;염소들의&nbsp;모습을&nbsp;처음에는&nbsp;무서워하지만,&nbsp;점차&nbsp;자신의&nbsp;상처와&nbsp;닮은&nbsp;그들의&nbsp;모습을&nbsp;이해하게&nbsp;된다.&nbsp;또한&nbsp;아기&nbsp;염소들&nbsp;역시&nbsp;자신을&nbsp;‘나츠키의&nbsp;아빠’라고&nbsp;칭하는&nbsp;늑대와&nbsp;같은&nbsp;존재로부터&nbsp;위기에&nbsp;처한&nbsp;나츠키를&nbsp;도와준다.&nbsp;이후&nbsp;어미&nbsp;염소가&nbsp;늑대(남성)를&nbsp;제압하면서&nbsp;이야기는&nbsp;마무리된다.</p>
<p>&nbsp;</p>
<p>이&nbsp;작품은&nbsp;염소와&nbsp;인간이라는&nbsp;서로&nbsp;다른&nbsp;종족이라는&nbsp;이유나&nbsp;겉으로&nbsp;보이는&nbsp;충격적인&nbsp;외적&nbsp;모습만으로&nbsp;상대를&nbsp;판단하기보다,&nbsp;서로의&nbsp;상처를&nbsp;이해하고&nbsp;보듬어&nbsp;줄&nbsp;수&nbsp;있는&nbsp;내면이&nbsp;더&nbsp;중요하다는&nbsp;점을&nbsp;보여주는&nbsp;것&nbsp;같았다.&nbsp;특히&nbsp;익숙한&nbsp;동화를&nbsp;전혀&nbsp;다른&nbsp;관점과&nbsp;배경에서&nbsp;공포라는&nbsp;소재를&nbsp;활용해&nbsp;재구성했다는&nbsp;점이&nbsp;인상&nbsp;깊었다.</p>
<p>&nbsp;</p>
<p>이번&nbsp;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는&nbsp;아쉽게도&nbsp;다른&nbsp;한국&nbsp;작품들은&nbsp;많이&nbsp;보지&nbsp;못했지만&nbsp;이번&nbsp;영화제를&nbsp;통해&nbsp;독립&nbsp;애니메이션과&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에&nbsp;대해 조금&nbsp;더&nbsp;관심을&nbsp;가지게&nbsp;되었다.</p>
<p>&nbsp;</p>
<p>GV&nbsp;마지막에&nbsp;미사토&nbsp;감독이&nbsp;AI&nbsp;시대에도&nbsp;스톱모션&nbsp;애니메이션처럼&nbsp;완벽하지는&nbsp;않지만&nbsp;손때가&nbsp;묻어&nbsp;있고,&nbsp;애착이&nbsp;담긴&nbsp;캐릭터와&nbsp;관객에게&nbsp;감동과&nbsp;영향을 줄&nbsp;있는&nbsp;이야기는&nbsp;깊은&nbsp;인상을&nbsp;남기며&nbsp;오랫동안&nbsp;존재할&nbsp;것이라고&nbsp;이야기했다.&nbsp;이&nbsp;말을&nbsp;들으며&nbsp;AI의&nbsp;발전으로&nbsp;영상과&nbsp;애니메이션&nbsp;시장이&nbsp;축소될&nbsp;것이라는우려와는&nbsp;반대로,&nbsp;오히려&nbsp;AI로는&nbsp;쉽게&nbsp;표현하기&nbsp;어려운&nbsp;아날로그적인&nbsp;표현과&nbsp;독창적이고&nbsp;깊이&nbsp;있는&nbsp;스토리가&nbsp;애니메이션의&nbsp;가치를&nbsp;높이고&nbsp;애니메이션&nbsp;산업을&nbsp;지속시키는&nbsp;힘이&nbsp;될&nbsp;수&nbsp;있겠다는&nbsp;생각이&nbsp;들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윤재현]]></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22:11:1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3</guid>
<title><![CDATA[[Review] 하룻밤만에 사라진 조각상이 있다고? – 도둑맞은 미술관]]></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3</link>
<description><![CDATA[추리와 미술사의 짜릿한 만남]]></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left; ">미술이 재미있는 이유는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시작된다. 국가별 대표 작품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미술의 역사라든지, 한 작가의 회심작을 따라가며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문가의 큐레이션을 따라가며 몰랐던 작품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또한 미술을 감상하는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이처럼 같은 미술 작품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와 흐름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방향성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해답은 마로 미술과 미스터리의 만남이다. 작품에 얽힌 사건과 비밀, 도난과 사건이 가득한 미술사 속에서 작품이 사라진 과정과 그 배경에 숨겨진 이야기라니, 정말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는 보증 수표같은 플롯이다.</p>
<br /><br />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10650_vtcthrxo.jpg" alt="도둑맞은 미술관_표1(띠지O).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36px;" />
</p>
<p>
   <br />
</p>
<p>
   <br />
</p>
그래서 스릴러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책 &lt;도둑맞은 미술관&gt;의 만남은 아주 환상적이다.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고, 겉으로 드러난 결과뿐만 아니라 그 뒷배경을 알아가는 것이다. 길고 지루한 설명이 아닌 단편적인 핵심 정보만을 이야기하는 점에서 책은 일종의 도파민을 제공해준다. ‘미술’이라는 키워드와 떼놓을 수 없는 &lt;모나리자&gt;부터 &lt;절규&gt;까지, 도난당한 걸작 50점에 얽힌 사건을 하나의 케이스 파일처럼 풀어주기 때문이다.<br /><br />책은 작품을 단순히 ‘도난당한 미술품’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작품마다 케이스 넘버를 부여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사라졌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작품이 이후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등 순차적으로 사건을 따라간다. 독자는 미술관에서의 작품 감상이 아닌 하나의 사건 현장을 조사하는 탐정이 된다.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2톤의 거대 조각상부터, 사람들이 생활하는 거실에 태연히 침입해 미술품을 훔쳐가는 사건까지, 다양한 이유와 방식을 기반으로 미술 작품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미술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작품 도난을 같은 사건 안에서도 여러 스토리로 풀어낸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p>&nbsp;</p>
<p>또 다른 재미는 이미 그 결과와 현황을 알고 있는 유명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스터리에서는 범인이 누구인지, 혹은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lt;도둑맞은 미술관&gt;에서는 그 과정이 미술작품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마약 거래 자금을 목적으로 도난과 경매를 겪은 후 작품의 행방이라든가, 고철로 취급받아 가치만큼의 돈을 받지 못한 작품 등,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품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까지 함께 파악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도난 사건이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되는 셈이다.</p>
<p>&nbsp;</p>
<p>앞서 이야기했듯, 가장 흥미로운 점은 도난당한 미술품의 행방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품은 일반적인 물건과 다르게 훔친 뒤 처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특성이 있다. 아무리 가치있는 작품이라도 도난품을 공개 경매로 판매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작품을 단순히 숨겨두는 것은 도난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미술품의 도난은 단순히 비싼 물건 하나를 가져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된다. 작품을 소유하는 순간 그 존재를 숨겨야 하고,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 자신의 치부까지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책이 다루고 있는 ‘도둑맞은 미술품’이라는 소재의 장점은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있는 물건이지만, 그 가치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감춰야한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결국 미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보고 나누는 생각과 그 작품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11159_fqcasmgh.jpeg" alt="Van_Gogh_-_Vase_mit_Pechnelken.jpeg" style="width: 700px; height: 833px;" />
</p>
<p>&nbsp;</p>
<p>&nbsp;</p>
<p>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 누군가는 작품의 색과 구도를 보고, 누군가는 그림을 통해 작가의 삶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 작품에 얽힌 사건을 따라간다. 미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해나가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떤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에 따라 시각과 관점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lt;도둑맞은 미술관&gt;은 아주 재밌고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책이다.<br /><br />&nbsp;&lt;도둑맞은 미술관&gt;의 가장 큰 매력은 미술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닌,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데 있다., 작품을 둘러싼 사건을 파헤치다 보면, 왜? 라는 질문이 마구 솟아난다. 그 ‘왜?’에 대한 답변은 책 속에 빼곡히 적혀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글을 따라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은 단순히 책에만 머물지 않는다. 앞으로의 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그림을 보고 지나치기보다는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와 배경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br /><br />&nbsp;책의 마지막에는 &lt;50가지 주요 미회수 작품 리스트&gt;가 있다. 도둑맞은 미술관의 이야기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기며, 진실이 밝혀지고 또 다시 시작될 다음 케이스를 기다리게 만든다. 누군가의 집 지하실에, 오래된 창고에, 혹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공간에 그 작품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미스터리는 끝나지 않았다. 과연 우리에게 다가올 다음 케이스는 무엇일까?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아란]]></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01:10:1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1</guid>
<title><![CDATA[[Opinion] 행동과 일상 그리고 책임 [도서/문학]]]></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1</link>
<description><![CDATA[김세희 소설가의 「가만한 나날」 감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소한 일이 생각지도 못한 파장을 몰고 올 때가 있다. 눈앞의 일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에 몰두해 진정한 본질은 잃어버린 채 말이다. 그 순간은 우리 모두의 처음에 있다. 김세희 소설가의 「가만한 나날」은 주인공 경진이 광고대행사의 첫 출근을 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블로그 후기 마케팅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회사에서 후기 전용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면서 경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p>
<p>&nbsp;</p>
<p>초반부에 등장하는 재화 언니가 경진에게 해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진은 회사 첫 출근 전날에 우연히 회사원인 재화 언니를 만나고 조언을 듣는다. “너 자신을 프로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난 도움이 됐거든. 신입이어도 난 아무것도 몰라, 난 초짜야,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프로야, 나는 프로페셔널해 마음가짐을 그렇게 갖는 거지. 난 이 일을 프로답게 해낸다, 그런 자세로다가.” 그리고 경진은 실행했다. 일하는 동안 프로의 자세를 유지했다. 의욕적이고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어째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문제는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20406_lnuswrso.jpg" alt="IMG_0174.JPG" style="width: 700px; height: 875px;" /></p>
<p>&nbsp;</p>
<p>&nbsp;</p>
<p>경진은 리뷰 광고를 올리기 위한 블로그 주인을 설정해야 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실재하는 인물인 것으로 설정해 다양한 상품과 공간에 대한 후기를 올리고 업체로부터 수익을 얻는 구조로 일을 굴러간다. 경진은 그 인물을 ‘채털리 부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채털리 부인은 D.H.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부인의 연인」 속 주인공이다. 사냥터지기와 불륜을 나누는 내용을 통해 단순히 잘못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선택을 통해 구성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경진은 자신이 만든 인물(채털리 부인)로서 블로그에 후기를 작성하며 활동의 힘과 폭을 넓혔다. (채털리 부인의 상징성을 대입시켜보자면 여기까지는 경진이 선택을 시작하기 위한 시야의 성장이 이뤄지기 전이라고 볼 수 있다.)</p>
<p>&nbsp;</p>
<p>경진은 입사 동기 두 명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 그 중 한 명은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경진만은 상사에게 ‘경진을 보고 배우라’는 칭찬을 들을만큼 일에 있어 뛰어난 결과물을 낸다. 재화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어느새 경진은 프로의 단계에 도달해 최선을 다해 임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문제의 베일은 벗겨진다. 채털리 부인, 즉 경진이 몇 년 전 올렸던 광고 게시물 속 뿌리는 살균제에 심각한 피해자들이 속출한 것이었다. 채털리 부인에게 메일을 보내온 인물은 살균제 속에 포함된 독성 물질로 인해 갓난 아기를 잃었고 다섯 살 아이는 평생 산소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하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경진은 자신이 그 물건을 광고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남긴 후기를 가장한 광고 문구 ‘아기 있는 집이라면 무조건 추천이에요.’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p>
<p>&nbsp;</p>
<p>경진은 일 처리능력이 좋았고 회사내에서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일을 잘 끝마친다는 것, 그 단순하고 명료한 일이 진실을 위배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일을 수행하는 성취감에 취해 그 일이 추후에 요구할 책임감에 대해서는 헤아려보지 못한 것이다.</p>
<p>&nbsp;</p>
<p>심지어 메일을 보낸 이는 경진을 질책하기 위해서 연락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채털리 부인을 완전한 실존 인물로 믿었고, 따라서 질책의 의도가 아닌 같은 피해자로서 진실을 알고 있는지 물어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경진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가져야 했던 책임감과 더불어 죄책감까지 배로 가해졌을 것이다.</p>
<p>&nbsp;</p>
<p>일을 겪고 난 경진의 세상은 이제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을까. 나중에 우연히 일을 그만두었던 입사동기를 만나게 된 경진은 그에게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했던 과거의 말을 정정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인다. 생각없이 저지른 행동에 따른 책임감을 깨닫게 된 경진의 세계는 변화했다. 이제 그는 과거 자신이 회사에서 했던 업무를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경진은 후회하고 있다.</p>
<p>&nbsp;</p>
<p>결국 이 사건은 경진이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에 초점을 맞췄던 과거에서, 자신의 행동에 큰 책임과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계기가 된다. 나무를 보던 시야에서 숲을 보는 시야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을 지나는 우리의 모습과 닿아있다. 미숙한 내가 당장 눈 앞의 일을 잘 해내는 것에 우선하다가 본질을 잃게 되는 것, 그리고 나의 부족했던 생각 탓에 일어난 문제들을 바라보며 책임과 본질을 깨닫는 것. 이 과정이 모두의 초년생 모습 안에 존재한다.</p>
<p>&nbsp;</p>
<p>이 소설은 우리의 처음, 그리고 책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책임은 생각지도 못한, 지나치게 사소하고 별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에서 불씨가 옮겨붙을 수 있다. 제목에서 ‘가만하다’는 뜻을 헤아려본다.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 손을 쓰지 않는 상태다. 가만하지만 가만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오면서부터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행동과 일상과 책임에 대해서.</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승윤]]></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12:02:4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90</guid>
<title><![CDATA[[리뷰] 그때 사라진 미술품들은 돌아왔을까? - 도둑맞은 미술관]]></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90</link>
<description><![CDATA[책 속 미술품들이 언젠간 꼭 돌아오길 바란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미술품 절도는 전 세계에서 마약 밀매, 자금 세탁, 무기 암거래에 이어 네 번째로 규모가 큰 범죄 유형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국제경찰 조직 인터폴은 도난당해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미술품 2만 5,000점의 목록을 보유하고 있다.</p>
<p>&nbsp;</p>
<p>인터폴을 비롯하여 FBI 미술품 범죄 전담팀 등 여러 기구에서 도난 미술품을 계속 조사하고 있지만,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미술품 절도가 발생하면, 실질적으로 시장에서의 거래는 불가능에 가깝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흔적이 있어야, 추적이 가능한데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사라진 미술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건의 이야기뿐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44139_brkfqezo.jpg" alt="도둑맞은 미술관_표1(띠지O).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36px;" />
</p>
<p>&nbsp;</p>
<p>&nbsp;</p>
<p>책 &lt;도둑맞은 미술관&gt;은 절도로 인해 분실된 미술품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유명한 나치 정권의 약탈부터 크고 작은 미술관 및 박물관에서 발생한 도난 현장을 마치 사진으로 순간 포착한 것처럼 생생하게 기록하였다.</p>
<p>&nbsp;</p>
<p>책을 통해 어마어마한 규모와 가치의 미술품들이 아직도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중 대다수는 심지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미술품 도난의 건수가 이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p>
<p>&nbsp;</p>
<p>책 &lt;도둑맞은 미술관&gt; 중 인상 깊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먼저 미국 보스턴,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서 발생한 도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절도범들은 경찰로 위장을 하고 미술관에 침입했다. 미술관을 지키던 경비원들은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덕에 범인들은 너무도 쉽게 안으로 진입해 미술품들을 훔칠 수 있었다. 한두 번 해본 절도가 아닌 듯, 자신들이 담긴 CCTV 영상까지 모조리 삭제한 뒤 달아났다고 한다.</p>
<p>&nbsp;</p>
<p>경찰들은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쫓았지만, 그들이 숨을 거둔 후에야 신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사라진 그림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p>
<p>&nbsp;</p>
<p>도난당하는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다. 조각물 또한 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3.3 x 2.4미터 크기에 2톤 무게를 지닌 대형 조각상. 헨리 무어 재단 소유 조각 공원에 전시되어 있던 헨리 무어의 작품 &lt;누워 있는 인물&gt;이 3명의 남성 손에 도둑맞는 일도 있었다. 런던 경찰청은 범인들이 작품을 조각으로 잘라 녹인 후 고철로 만들어 판매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작품은 돌아오지 못했고, 그 이후 보안 조치가 대폭 강화되었다고 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44154_gpuheeok.jpg" alt="zalfa-imani-1xp5VxvyKL0-unsplash.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
   <br />
</p>
<p>책을 읽으며 공통적으로 느낀 부분은 도난 이후에 보안 체계가 강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이다.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미술관 또는 박물관의 보안이 무척 허술한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지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도둑질이 얼마나 쉬웠는지 자랑하는 범인도 있었다고 한다.</p>
<p>&nbsp;</p>
<p>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수습은 너무 늦은 조치라는 것을 그들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당시 그들은 안일했고, 그런 그들의 태도가 자아낸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도난 대상이 되는 미술관 중 개인의 기증을 통해 조성된 미술관들이 많았는데, 대의를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허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p>
<p>&nbsp;</p>
<p>책 &lt;도둑맞은 미술관&gt; 속에는 사라진 미술품의 이미지와 함께 실제 당시 수사 현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그 덕분에 사건의 심각함을 더욱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2010년 대에 발생한 사건도 있었는데,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로 느껴졌다.</p>
<p>&nbsp;</p>
<p>최근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며, 다양한 전시회들이 개최되고 있다. 해외 교류전도 많아지고 있는 시기이기에 미술품 절도에 대한 경각심 또한 함께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우리가 더 많이, 더 자주 좋은 작품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 &lt;도둑맞은 미술관&gt; 속 미술품들이 언젠간 꼭 돌아오길 바란다. 더불어 더 이상의 미술품 소실은 없기를 소망한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규리]]></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4:42:0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3</guid>
<title><![CDATA[[Opinion]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3</link>
<description><![CDATA[설명할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justify;">숨이 막힐 정도로 노력을 기울여도 때로는 마음의 보상을 받지 못할 때, 그리고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없을 때 모든 걸 내려놓기 마련이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허우적대며, 방대한 지식만을 수용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나. 결국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휩쓸려, 그 이면에 자리한 중요한 무언가를 영영 놓쳐버리고 만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과학의 힘이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어느샌가 사람의 능력치를 보완하고, 임계점까지 끌어올려 인간사를 더욱 효율적이게 만들고 있다. 편리함부터 극강의 세밀한 감정선까지, 사람이 어떠한 것을 애정으로 느끼고 혐오하는지 그 모든 부문을 아우르며 성장하는 것 같다. 과학과 함께 인간은 무궁한 발전을 이루며, 세상을 더욱 이롭게 만든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 ">
      <b><i>&nbsp;</i></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i>만일 정신적인 어떤 것이,</i></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i>당신의 과학적 믿음이 틀렸음을 입증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i></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i>&nbsp;</i></b>
   </p>
   </blockquote>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184115_bfnpygpd.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
</p>
<p>&nbsp;</p>
<p>&nbsp;</p>
<p>이름 석 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이루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 애틋한 감정만이 가득 차오르는 사람이 있는가?</p>
<p>
   <br />
</p>
<p>생물학자 ‘이안 그레이’, 그는 ‘소피’와 만나게 되어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게 된다. 철저하게 증명된 데이터만을 신뢰하고 살아온 그가, 운명과 영혼이라는 칠흑같이 방대한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특히나 이안은 소피의 특유함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눈’에 강렬하게 이끌리게 된다.</p>
<p>
   <br />
</p>
<p>하지만 갑작스러운 엘리베이터 사고로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안은 절망에 빠진다. 수년 후, 이안은 자신을 도와주던 연구실 파트너 캐런과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러나 놀랍도록 황당한 일이 발생한다. 사망했던 전 연인, 소피의 홍채와 똑같은 홍채를 지닌 어린 소녀가 인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p>
<p>
   <br />
</p>
<p>어린 소녀의 이름은 ‘살로미나‘, 과학적 데이터로는 불가설의 경지로 이안은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이 소녀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른 순간 그녀는 탑승을 거부하며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다. 이안은 그 찰나의 시간 속 소녀의 얼굴에서, 사랑했던 소피를 떠올린다.</p>
<p>
   <br />
</p>
<p>그렇다면 정말 ‘살로미나’가 ‘소피’의 환생일까? 영화는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평생을 과학에만 쏟아붓고 정량적인 결과만을 집착하여, 영혼을 믿기 거부했던 이안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소피와의 연결고리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또 다른 삶을 영위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의 찬란함을 새로이 머금을 수 있는 일이다.</p>
<p>
   <br />
</p>
<p>이안이 무수히 증명하고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 근간을 이루는 토대 ‘과학’. 이제 과학은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기도 하며 그 막강한 영향력의 씨앗을 세상사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허나 과학이 해내지 못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그 무언가는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든 혹은 세상 어떤 것이 되든 다채롭게 휘몰아치는 바로 우리의 진심일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신의 영역에 비견되는 과학의 단점이 된다.</p>
<p>
   <br />
</p>
<p>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사람의 감정도, 그들이 담고 있는 영혼도, 단 한 가지의 단어와 간편한 실체로만 녹여낼 수는 없으며, 결코 과학은 사람 마음속 켜켜이 자리 잡은 ‘무언가’를 대체할 수 없다.</p>
<p>
   <br />
</p>
<p>이안은 그토록 경계하던 영혼의 세계에 발돋움하게 된다. 과학과 영혼 그 어딘가의 경계에서, 소피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뒤엉킨 모든 감각을 가슴 깊이 묻고 지금의 순간을 한 걸음 나아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영혼이라는 비실체적 존재가 이안의 굳게 닫힌 마음을 잔물결처럼 일렁이게 했다.</p>
<p>
   <br />
</p>
<p>사랑이라는 것은 실타래처럼 복잡하여 과학으로 풀어갈 수는 없는 것 같다. 비과학과 과학 그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끔찍할 정도로 복잡하여 한 사람을 무너지게 만들고, 또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사랑’. 아이 오리진스는 사랑을 향한 위안과 동시에 지금 이 찰나, 무수하게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 관객의 기억을 수십 번 환기한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다시 만날 수 없어도, 다시 한번 사랑할 수 없어도 누군가를 향한 숱한 추억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부신 감정은 나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또 아로새겨진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181535_vedtaulx.jpg" alt="KakaoTalk_20260725_131411650.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예진]]></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18:09:5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2</guid>
<title><![CDATA[[那의여백] 색즉시공 공즉시색]]></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2</link>
<description><![CDATA[고정되지 않은 나에 대하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05151_deluxyrm.jpg" alt="색즉시공공즉시색.jpg" style="width: 700px; height: 87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내가 가진 기억과 관계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나면 나는 결국 무엇이 될까.</p>
<p>
   <br />
</p>
<p>불교는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의 나 역시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지나온 시간들, 수없이 변해온 마음과 몸이 잠시 머물러가며 지금의 내가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애써 붙잡고 있는 ‘나’라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p>
<p>
   <br />
</p>
<p>우리는 툭하면 경계를 긋고는 한다. 나와 타인을 나누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얻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나눈다. 그렇게 나눈 것들 중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붙잡으며 살아간다.</p>
<p>
   <br />
</p>
<p>하지만 세상에 정말 그렇게 분명한 경계가 있을까.</p>
<p>
   <br />
</p>
<p>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p>
<p>
   <br />
</p>
<p>형태를 가진 모든 것은 비어 있고, 비어 있음은 다시 모든 형태로 나타난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며, 무엇 하나 인과 연이 없다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에 가깝다.</p>
<p>
   <br />
</p>
<p>나 역시 그렇다. 나는 나 혼자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인연과 시간 속에서 잠시 모습을 얻은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반드시 지켜내야 할 하나의 고정된 모습으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p>
<p>
   <br />
</p>
<p>&nbsp;</p>
<p>붙잡고 고집하던 나를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인연과 이어질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05155_qidbtyii.jpg" alt="노유나_작가.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노유나]]></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00:55:3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6</guid>
<title><![CDATA[[Opinion] 표면을 더듬는 시선 [미술/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6</link>
<description><![CDATA[수없이 반복된 행위는 캔버스 위에 균열과 흔적을 남긴다. 정상화의 화면은 눈으로 바라보는 평면에 머물지 않고, 흙과 안료의 질감, 작가의 몸짓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하나의 표면이 된다. 이 글에서는 알로이스 리글의 ‘촉각적 시각성’을 따라가며, 우리가 정상화의 단색화를 바라볼 때 어떻게 보이는 것을 넘어 만지는 듯한 감각에 이르게 되는지를 살펴본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이래 첫 상설전인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는 1960년대에서 2010년대에 이르는 대표작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다층적인 흐름을 조망한다. 본 전시는 추상미술에서부터 실험미술, 형상미술, 민중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매체의 변화, 그리고 당대 국제 미술계와의 역학 관계 속에서 우리 미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 전개를 장을 마련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4621_iwaxdkdp.jpg" alt="국현미.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2px;" /></p>
<p>&nbsp;</p>
<p>&nbsp;</p>
<p>1950년대 말 새로운 전위의 미술로 등장한 추상미술은 전후의 불안과 급격한 도시화라는 사회 현실과 맞물려 발전을 거듭해왔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친 앵포르멜 회화와 이후 기하 추상을 거쳐, 1970-8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적 정신성의 발현을 모색한 단색화로 전개되어 나갔다.</p>
<p>&nbsp;</p>
<p>이처럼 추상미술이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 1960-70년대에는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 속에서 발흥한 청년 문화, 그리고 정치적 억압에 맞선 자유를 향한 열망이 교차하며 기성 예술의 문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채로운 실험미술의 장이 펼쳐지기도 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14701_evhdytva.jpg" alt="정상화 4.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0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본 글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속에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의 ‘촉각적 시각’ 개념을 중심으로 1970년대 주요 추상미술 사조인 단색화를 정상화의 &lt;무제 74-F6-B&gt;을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p>
<p>&nbsp;</p>
<p>단색화는 캔버스의 평면성을 지향하면서도, 그 표면 위의 재료의 촉각적 물질성과 작가의 반복적인 신체 수행을 담아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기는 ‘무위자연’ 및 ‘물아일체’라는 동아시아 전통 자연관과 연결되며 한국 고유의 독자적 조형 세계로 구축되었다. 평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붓과 안료의 흔적, 손끝의 느낌이 남아있는 단색화의 매체적 특성은 리글의 촉각적 시각성 개념과 맞닿는 지점이 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5105_atesrgtl.png" alt="Bildschirmfoto 2026-09-25 um 8.45.45 PM.png" style="width: 700px; height: 875px;" /></p>
<p>&nbsp;</p>
<p>&nbsp;</p>
<p>단색화는 1970년대 초반 &lt;앙데팡당&gt;을 비롯해 &lt;서울현대미술제&gt;와 &lt;에꼴 드 서울&gt;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이후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과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lt;한국의 단색화&gt;전을 거치며 그 명칭이 공식화되었고 하나의 독자적인 미술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p>
<p>&nbsp;</p>
<p>한국적인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 속에서 싹튼 단색화는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모노크롬 회화의 형식을 참조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을 싹틔운 사조이다. 특히 순수한 시각적 평면성을 지향했던 서구의 추상미술과 달리, 단색화는 매체 고유의 촉각적 물질성을 극대화하고 그 위에 작가의 반복적인 신체 수행을 결합하여 한국 고유의 정신성을 발현해 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14606_esrdatih.jpg" alt="정상화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0px;" /></p>
<p>&nbsp;</p>
<p>&nbsp;</p>
<p>이러한 단색화의 촉각적 시각성과 수행적 태도가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전에 전시된 정상화의 &lt;무제 74-F6-B&gt;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캔버스의 표면은 물리적 행위가 축적된 시간의 지층에 가깝다.</p>
<p>&nbsp;</p>
<p>그는 캔버스 위에 고령토를 3~5mm의 두께로 두껍게 발라 굳히며 화폭 자체를 하나의 촉감적인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고령토가 마르면 작가는 화폭을 가로세로로 꺾어 무수한 균열을 내고, 그 갈라진 틈 사이의 흙을 뜯어낸 뒤 그 빈자리를 아크릴 안료로 다시 메우는 행위를 수개월에 걸쳐 무한히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물리적 노동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물질성을 촉각적으로 구현하며,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물아일체’적 사유를 실천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4945_whufkxfb.jpg" alt="정상화.jpg" style="width: 700px; height: 875px;" /></p>
<p>&nbsp;</p>
<p>&nbsp;&nbsp;</p>
<p>정상화의 반복적 수행으로 쌓아나간 이 감각적 표면은 리글이 제시한 ‘촉각적 시각성’의 구현을 보여준다. 우선 리글은 양식 발전의 원동력을 고유한 내적 창작 충동인 ‘예술의지(Kunstwollen)’라 규정했다. 이는 객관적 세계를 예술을 통해 정리하여 세계와의 만족스러운 관계 형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지각 방식에 따라 ‘시각적’ 방향과 ‘촉각적’ 방향으로 나뉜다. 대상을 주변 환경과 결합하여 전체적인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이 눈의 시각적 기능이라면, 대상을 고립된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은 촉각적 기능이다.</p>
<p>&nbsp;</p>
<p>리글은 이러한 예술의지의 방향을 통해 고대 이집트 미술과 후기 로마 시대의 공예를 분석하고 이집트 부조를 예로 들면서, 대상을 촉감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서 바라보는 근접시적 거리에서 사물의 고립화를 강조하는 평면적 표현 방식이 관람자의 촉각적 감각을 유발한다고 보았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5131_wissdntz.jpg" alt="리글.jpg" style="width: 700px; height: 929px;" /></p>
<p>&nbsp;</p>
<p>&nbsp;</p>
<p>이러한 점에서 &lt;무제 74-F6-B&gt;는 캔버스 안에 3차원의 깊이를 지닌 환영적 공간을 구축하는 대신, 화폭에 밀착하여 고령토를 바르고, 떼어내고, 메우는 근접시적인 창작 방식을 취했다. 리글에 따르면 이러한 근접시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주변 공간과 분리하여 뚜렷한 형태를 지닌 독립적 실체로 파악하는 사물의 고립화를 동반한다.</p>
<p><br /></p>
<p>그는 화폭 위에 무수한 격자의 균열을 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안료와 흙이라는 물질 자체를 주변의 가상 공간 및 시각적인 환영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물성 그 자체로 고립시킨다. 이로써 이 작품 앞에서 관람자의 눈은 화면의 깊은 곳으로 유영하지 못하고 캔버스 표면 상의 물리적인 요철에 머물게 된다. 시각적 정보를 수용하고 있음에도, 마치 손끝의 감각을 동원하여 물감의 두께와 그 틈새를 더듬으며 그 촉감을 지각하는 듯한 감각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5244_xvsaanas.jpg" alt="정상화 1.jpg" style="width: 630px; height: 840px;" /></p>
<p>&nbsp;</p>
<p><br /></p>
<p>결과적으로 정상화의 &lt;무제 74-F6-B&gt;에서 나타난 무수한 사각의 균열 표면은 단색화의 반복적 수행성과 촉각적 물질성이 교차하는 능동적인 장이 된다. ‘비움’과 ‘무위’로 나아가는 신체의 반복적인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안료와 고령토의 물성은 리글이 주창한 촉각적 시각성을 유발한다.</p>
<p>&nbsp;</p>
<p>국립현대미술관의 &lt;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gt; 전시에서 이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객은 단순히 캔버스를 시각적으로 관조하는 것을 넘어, 물질과의 근접시적 거리에서 작가의 신체 행위의 흔적과 묵직한 촉각성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는 단색화가 서구 미술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 수행과 물질의 결합을 통해 신체와 물질,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에 다다르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 미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해냈다고 할 수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참고문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국립현대미술관(2025),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p>
<p>권영진(2014), 「1970년대 한국 단색조 회화 : 무한 반복적 신체 행위의 회화 방법론」, 『현대미술사연구』 36집</p>
<p>김영나(2020),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미진사</p>
<p>손예인(2025), 「단색화의 피부적(skin–like) 표면에 대한 미학적 탐구 -수행성과 촉각적 시각성의 경계를 넘어-」, 『기초조형학연구』 26권 2호</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5849_fzzvpclh.jpg" alt="아트인사이트 에디터 명함.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서연화]]></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20:58:2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1</guid>
<title><![CDATA[[Review] 우리가 모르던 애니의 세계 -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1</link>
<description><![CDATA[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  관람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어린이를 위한 콘텐츠이거나, 혹은 소위 ‘오타쿠 문화’와 관련된 장르라는 인식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이미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 바로 독립 애니메이션이다.</p>
<p>
   <br />
</p>
<p>올해 22회를 맞은 서울인디애니페스트는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함께 국내에서 손꼽히는 애니메이션 영화제고, 특히 독립 애니메이션을 적극 지원한다. 다른 독립영화제에서도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섹션으로 소개하는 경우는 많지만, 애니메이션만을 선보이는 영화제라는 점이 특별하다.</p>
<p>
   <br />
</p>
<p>영화제는 연남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스탬프투어, ‘인디애니의 밤’ 등등 다양한 부대행사도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영화를 관람한 뒤 관객들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상영관 옆쪽에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한 구역도 기억에 남는다.</p>
<p>&nbsp;</p>
<p>서울인디애니페스트만의 성격이 영화제 구석구석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01958_ekessolg.jpg" alt="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0px;" />
</p>
<p>&nbsp;</p>
<p>&nbsp;</p>
<p>그중에서도 이번에 관람한 작품은 &lt;새벽비행2&gt;로, 단편 애니메이션 8편 모음이었다. &lt;베지터블&gt;, &lt;핑거뱅&gt;, &lt;실로&gt;, &lt;닭 잡는 날&gt;, &lt;솜니움&gt;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였다.</p>
<p>
   <br />
</p>
<p>우선 &lt;베지터블&gt;은 피가 낭자한 주방을 훑는 장면에 이어 돼지의 모습을 한 인물을 비추는 오프닝이 강렬했다. 차분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기괴한 작품 전체적인 톤이 인상적이었다. 또, &lt;핑거뱅&gt;은 움직이는 손가락 하나라는 기묘하고 독특한 소재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에 점점 빠져드는 여자의 감정을 같이 따라가며 휘말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p>
<p>
   <br />
</p>
<p>&lt;실로&gt;와 &lt;솜니움&gt;에서는 호러의 분위기가 가장 잘 살아있었으며, 이야기뿐 아니라 표현 기법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두 작품은 일반적인 2D 컴퓨터 애니메이션 외에 드로잉, 3D 컴퓨터 등 다른 방식을 활용했다는 차별점이 있었다. 실사영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같은 장르 안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p>
<p>
   <br />
</p>
<p>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작품은 &lt;닭 잡는 날&gt;이었다. 무당인 어머니를 둔 여학생의 하루를 그린 작품인데, 평범한 일상에 서서히 무서운 분위기가 스며들다 폭발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림만으로도 훌륭한 공포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02038_qsanszhx.jpg" alt="[크기변환]KakaoTalk_20260926_001245775.jpg" style="width: 700px; height: 531px;" />
</p>
<p>&nbsp;</p>
<p>&nbsp;</p>
<p>이와 더불어 &lt;코뿔소 이슈&gt;, &lt;그래서 나는 언제 연애해?&gt;, &lt;눈이 내리는 소리&gt;에서는 앞선 작품들과 달리 보다 아기자기하고 일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p>
<p>
   <br />
</p>
<p>&lt;코뿔소 이슈&gt;는 한 소년의 일상에 코뿔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독특한 설정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감각적인 작화 역시 보기 즐거웠고, 이번 영화제에서 국내 경쟁 대상인 ‘인디의 별’을 수상하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lt;그래서 나는 언제 연애해?&gt;는 남녀의 술자리 대화를 풋풋한 감성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소박하고 사실적인 고민이 보는 이에게도 자연스럽게 와닿았다. 끝으로 &lt;눈이 내리는 소리&gt;는 두 여학생의 우정과 관계의 틀어짐을 잔잔하게 다룬 작품이다. 눈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미묘한 감정들이 오가는 모습에서 많은 여운이 남았다.</p>
<p>
   <br />
</p>
<p>지난해 &lt;케이팝 데몬 헌터스&gt;의 흥행이 있기도 했고, 최근에는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나 드라마 오프닝 등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장편 애니메이션이 많이 제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 국내외 젊은 창작자들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발굴해 소개하는 서울인디애니페스트의 역할도 그런 흐름 속에서 더욱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p>
<p>&nbsp;</p>
<p>매년 9월 연남을 찾아, 독립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느껴보면 어떨까?</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6002109_eihrnlqi.jpg" alt="컬쳐리스트 태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현진]]></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00:21:5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86</guid>
<title><![CDATA[[리뷰 URL 취합]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86</link>
<description><![CDATA[한바탕 웃고 울다 마주하는 가족의 진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div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20px;"><b>이상한 나라의 춘자씨</b></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댓글로</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고한 리뷰 링크를</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입해 주세요!</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자신의 글 외에도,</div>
<div align="center">다른 구성원분들이 쓴 글을</div>
<div align="center">이 공간에서</div>
<div align="center">스스럼없이 향유해 보셨으면 합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문화예술은</div>
<div align="center">서로 소통을 하고</div>
<div align="center">함께 향유했을 때에</div>
<div align="center">더욱 다채로워지고</div>
<div align="center">풍요로워집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이름 + URL 링크</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자신의 글을&nbsp;보실 분들께 하실 말씀!</span></div>
<div align="center">을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02609/review_auto_82536_20260926100121_b78915e6ba.jpg" style="max-width:100%;" />
</div>
<div align="center">
   <br />
</div>
<div align="center">
   <br />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Sat, 26 Sep 2026 10:01:2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5</guid>
<title><![CDATA[[Opinion] 자유언론은 오직 진실만을 위해 싸운다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5</link>
<description><![CDATA[영화 《암살자들》 - 물려받은 펜은 진실을 기록하고있는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1139_ahwilaaf.jpg" alt="KakaoTalk_20260925_194917928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8px;"><b>총성과 탄환,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들</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영화 《암살자들》이 대한민국의 대명절, 추석이 시작됨과 동시에 극장 스크린에 올랐다. 대한민국 현대사 중 가히 화제의 중심이 되는 사건인 ‘육영수 여사 암살 사건’에 대한 의혹과 미스터리를 기발한 상상력과 시대적 상황에 비롯한 추론으로 채워 완성도 있는 영화로 제작했다. 암살당한 영부인과 사라진 탄환, 풀리지 않고 침묵에 묻혀버린 진실을 담은 이 흥미로운 영화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군부독재 시절 압도적 권력을 행사하던 중정(중앙정보부)과 영원한 왕정을 꿈꾸던 대통령의 산하에 운영되던 국가의 참혹한 사건 현장 한가운데,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뜨거운 열망을 반백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다시 조명하고 있다.</p>
<p>&nbsp;</p>
<p>영화가 그려내는 당시의 언론은 사건의 진실을 전달하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가장 먼저 통제되는 곳이었다. 유신 정권기 정부의 언론 보도 통제에 저항하는 ‘동아일보’의 취재 열망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국민에게 ‘진실’을 전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사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자유 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 이들은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기관원의 출입과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하겠다고 결의했다. 영화 속에서 기자들이 이 선언문을 읽어 내려가는 장면은 단순히 과거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그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야 했는지, 그리고 그 문장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p>
<p><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1220_xknryiie.jpg" alt="KakaoTalk_20260925_194917928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누구나 쓸 수 있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책임지는가.</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펜을 드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과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든 글을 써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책임 없이 방생되는 글들은 내부를 분열하고 사람을 그 어떤 흉기보다도 날카롭게 찌른다. 우리는 통제로부터 빼앗은 자유를 책임을 다해 휘두르고 있는가?</p>
<p><br /></p>
<p>12.3 계엄 이후 대학가에선 수많은 대자보가 학교와 SNS에 부착되었다. 교내 허가를 받고 검수를 받지 않은 글은 게시판에 부착할 수 없다는 학내 권고문엔 ‘정치적 의견 표명에 검수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반발의 글들이 다수 부착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말하고 있던 자유가 과거의 언론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고,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자신이 믿는 것을 글로 남기는 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문과 방송이라는 매체가 SNS와 대자보, 개인의 계정과 각자의 글로 확장되었을 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p>
<p><br /></p>
<p>영화 속 이들도 같은 고뇌를 한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언론이 다할 수 있는 책임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시해야 할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 속 사람들이 어떤 시대를 지나게 될지 이미 알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읽으며 뜨거워지는 기자들의 마음 뒤에 어떤 현실이 이어졌는지도 알고 있다.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 지옥 같은 내일이 이어졌다. 자유 언론 실천운동 역시 결국 기자들의 해고와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고대하던 유신정권이 무너졌음에도 펜은 총과 칼 앞에 속절없이 움츠러들었다. <i>그럼에도 영화 속 이들은 선언을 멈추지 않는다. <u>어떠한 탄압이 이어져도 멈추지 않고 선언문을 끝까지 읽어 내려간다.</u></i></p>
<p><br /></p>
<p>당장에 바뀌지 않았지만, 어쩌면 더 지옥 같은 내일이 이어졌지만 서울의 봄은 언론과 국민들의 연대로 끝끝내 쟁취하였다고 스크린을 뚫고가 이들에게 알려주고만 싶은 마음이 들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01246_desokarm.jpg" alt="KakaoTalk_20260925_194917928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 style="">극장에 불이 켜지고 역사는 현재를 비춘다</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자유라는 것은 한 번 쟁취했다고 해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권리이고 이 권리를 책임감 있게 행사하지 않는 순간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극장에선 과거 쟁취하기 위해 싸워온 이들을 조명한다.</p>
<p>&nbsp;</p>
<p>그렇다면 극장에 불이 켜지고 이제&nbsp; 그 자유를 사용하는 현재를 역사는 조명한다. 자유롭게 쓰되 함부로 쓰지 않는 것. 목소리를 전달하되 그 목소리를 왜곡하지 않는 것. 영화를 보며 내가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결국 이 단순한 책임이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문아휘]]></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20:16:0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9</guid>
<title><![CDATA[[Opinion] 음악 권태기에 찾아온 클래식 - Berceuse [음악]]]></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9</link>
<description><![CDATA[Gabriel Fauré - Dolly Suite, Op. 56]]></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요즘은 음악을 고르는 일이 조금 어렵다.</p>
<p>&nbsp;</p>
<p>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바깥 소리는 차단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래나 틀어놓고 그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다. 평소에는 아주 시끄러운 곡만 아니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인데, 지금의 기분에 꼭 맞는 노래를 찾지 못하는 시기가 종종 찾아온다.</p>
<p>&nbsp;</p>
<p>새로운 음악을 탐색하고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하는 일도 예전처럼 즐겁지 않다. 음악이 싫어진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들어도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이다. 어쩌면 요즘의 나는 음악과 잠시 권태기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p>
<p><br /></p>
<p>그래서 요즘은 클래식을 자주 듣는다. 클래식 역시 음악이니 완전히 다른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사가 없어서인지 내 감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는 점이 좋다. 바깥의 소음을 덮어주면서도 마음을 지나치게 흔들지 않고, 지금의 기분 곁에 조용히 머물러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Dolly Suite, Op. 56</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 style="text-align: left; ">최근에는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Dolly Suite, Op. 56》를 듣고 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1893년부터 1896년 사이에 작곡된 여섯 곡의 모음곡으로, 한 대의 피아노를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네 손 피아노곡이다. 포레와 가까웠던 엘리 바르다크의 딸 엘렌을 위해 쓰였으며, 모음곡의 제목에 쓰인 ‘돌리’는 엘렌의 애칭이었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1J8Gpx-r0Y?si=ZMTcnwdBrVplDEPS"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p>
<p><br /></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그중에서도 첫 번째 곡인 〈Berceuse〉를 가장 좋아한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제목 그대로 자장가인 이 곡은 단순한 선율과 따뜻한 화음이 반복되며, 6/8박자의 리듬이 부드럽게 흐른다. 자장가라고 해서 마냥 차분하거나 어둡지만은 않다. 밝고 포근한 분위기 안에 서정적인 색채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지나치게 들뜨지도, 무겁게 가라앉지도 않는 선율이 지금의 내 마음과 잘 맞는다.</p>
<p><br /></p>
<p>K-POP 이외의 노래는 듣지 않던 어린 시절, 엄마께서 드라이브할 때 클래식을 틀어주시면 지루해하곤 했다. 그런데 음악 권태기를 겪으며 평소에 듣지 않던 클래식을 듣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음악 권태기 덕분에 새로운 음악 취향을 발견한 것이다.</p>
<p>&nbsp;</p>
<p>이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 권태기를 극복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음악은 굳이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음악 취향을 탐색하라고 재촉하지 않아서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231558_aacovzab.jpg" alt="방지수.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방지수]]></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23:09:3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6</guid>
<title><![CDATA[[PRESS] 수십 개로 쪼개진 인격, 괴물이라 불리던 남자 - 연극 &#039;알테르 에고&#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6</link>
<description><![CDATA[스탠리의 조각난 인격을 통해 &#039;나는 누구인가&#039;를 묻는 연극 , 11월 22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누군가는 뾰족한 것에 찔린 후로 샤프처럼 날카로운 물건을 보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는 한 음식을 먹고 크게 체한 뒤로는 그 음식을 먹지 않게 되었으며, 또 어떤 꼬마는 그림을 그릴 때면 바다만 그린다고 말한다. 그에게 땅은 아주 끔찍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커다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간절히 벗어나고자 한다. 때로 인간의 정신은 견디기 힘든 압도적인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격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반응하기도 한다.</p>
<p>&nbsp;</p>
<p>설명할 수 없는 기억의 공백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스탠리'는 어느 날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다. 두 손에는 차가운 수갑을 찬 채로. 이제 스탠리는 분명 자신이 저질렀으나,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05427_bulnncay.jpg" alt="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12px;" />
</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빌리 밀리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 &lt;알테르 에고&gt;가 지난 9월 6일 한국 초연의 막을 올렸다. 작품은 1977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캠퍼스 일대에서 학생 3명을 대상으로 한 납치, 강도,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이 이후 정신감정을 통해 해리성 정체감 장애 진단을 받은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다.</p>
<p>&nbsp;</p>
<p>제목인 &lt;알테르 에고(Alter Ego)&gt;는 '또 다른 자아'를 뜻하는 라틴어로, 연극은 서로 다른 연령과 성별, 출신, 생각과 재능을 지닌 여러 인격과 함께 살아가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당사자 '스탠리'의 이야기를 그린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엉망이 된 스탠리의 머릿속을 구현한 무대의 미학</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통제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인공 스탠리의 인격은 수십 개의 조각으로 쪼개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격이 뒤바뀌는 그는 분명 방금 전까지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지만, 눈을 뜨면 엄마에게 혼이 나고 있기도 했다. 쪼개진 조각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너무 괴롭다던 스탠리는 의자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nbsp;</p>
<p>&nbsp;</p>
<p>그를 향해 쏟아지는 노란 조명은 네모낳게 조각나 커다란 창문을 연상시키고, 그 앞에 선 스탠리는 멍하니 밖을 쳐다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극장 곳곳의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지며 그를 힐난하고 윽박지르는 순간, 금세 깨닫게 된다. 이곳, 극장 안은 스탠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05556_wivgtkxx.jpg" alt="무대.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무대는 어느 하나의 장소를 지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무대는 어떤 '장소'보다 하나의 '상태'를 구현하는 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극 &lt;알테르 에고&gt;는 복잡하게 얽힌 스탠리의 머릿속 상태를 무대 위에 구현한다.</p>
<p>&nbsp;</p>
<p>무대에는 사각의 오브제, 즉 또 하나의 무대가 얹혀 있고, 양옆에는 암흑 속으로 이어지는 듯한 검은 벽체가 세워져 있다. 이는 까만 의식 속으로 침잠하는 인격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업스테이지에는 스무여 개의 흰색 오브제가 반복적으로 배열된 격자형 벽이 있는데, 이건 마치 스탠리 내면에 살아 있는 여러 인격을 형상화한 듯하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조명기' 역할을 수행한다.</p>
<p>&nbsp;</p>
<p>전체적으로 스탠리의 머릿속을 보여주는 듯한 무대 위로는 흰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존재는 스탠리의 내면을 끊임없이 부유하고 헤매는 또 다른 인격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렇게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겹쳐지는 가운데, 결국 스탠리가 의자에서 뛰어내리려는 장면으로 연극은 강렬한 막을 올린다.</p>
<p>&nbsp;</p>
<p>
   <br />
</p>
<p>&nbsp;</p>
<p>&nbsp;<span style="font-size: 18px;"><b>범죄자이자 피해자인 스탠리의 모순</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암흑 속에서 눈을 뜬 스탠리는 낯선 공간에서 수갑을 차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을 느낀다. 그 뒤로 '윌버' 박사가 그의 정신감정을 위해 등장한다. 스탠리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다 눈을 뜨니 25년이 흘러 있었고, 심지어 자신이 세 명의 대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갇혀 있다는 사실까지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증거는 그를 가리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스탠리는 '나는 미친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때부터 그는 관객에게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자리한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05607_fbzlmxzz.jpg" alt="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nbsp;</p>
<p>
   <br />
</p>
<p>일반적으로 관객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이해한다. 그러나 그 인물 자체를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혼란을 겪게 된다. 스탠리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관객은 그의 말에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그 의심에 방점을 찍는 장면은 발을 헛디뎌 넘어진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시작된다. 방금 전까지 '스탠리'였던 그는 어느새 전혀 다른 인격인 '앨런'이 되어 있다.</p>
<p>
   <br />
</p>
<p>앨런은 자신이 마흔 살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며, 담배를 피운다. 무엇보다 그는 스탠리와 달리 자신의 내면에 수많은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앨런의 등장과 함께 스탠리의 증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자 윌버는 스탠리의 공간, 즉 무대 위에 놓인 또 하나의 무대 안으로 몸을 들인다. 그때부터 스탠리와 윌버 사이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가 시작된다.</p>
<p>&nbsp;</p>
<p>연극 &lt;알테르 에고&gt;의 작가 세드릭 샤퓌와 마고 무트는 범죄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주인공의 이중적인 지위가 관객에게 끊임없이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했다고 밝힌다. 이때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스탠리의 말과 행동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고 절규하는 스탠리의 모습에 관객은 쉽사리 이입할 수 없다. 그는 정말 괴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저지른 범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관객은 그의 말을 의심하는 동시에, 범죄자이자 피해자인 그가 놓인 모순적인 위치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된다.&nbsp;</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조명기 위의 일곱 가지 인격, 객석으로 넘어가는 빛</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앨런 뒤로 등장하는 세 번째 인격, '레이건'은 유려한 말솜씨를 지닌 앨런과 달리 고요하고 정적인 인물이다. 특유의 말투를 구사하는 레이건은 스탠리의 머릿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조명기'에 대한 단서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수십 개의 조각으로 쪼개진 스탠리의 인격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와 생각을 지닌 하나의 사람이며, 그들이 모여 사는 머릿속에는 하나의 조명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 조명 아래에 서는 순간, 그 인격이 의식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nbsp;</p>
<p>&nbsp;</p>
<p>그리고 누가 의식을 차지했는지는 배우의 연기와 조명, 음악이 맞물리면서 드러난다. 연극 &lt;알테르 에고&gt;에서 스탠리 역의 배우는 일곱 개의 인격을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연기해야 한다. 그는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줘야 하며, 인격이 전환되는 과정에서도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 스탠리를 연기하는 배우는 각 인격마다 다른 몸짓과 말투를 구사하며 그 간극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에 조명과 음악의 타이밍까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05621_wnxcwsvh.jpg" alt="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nbsp;</p>
<p>인격이 바뀔 때는 조명이 전환되며 마치 장면의 컷을 바꾸듯 새로운 인격의 등장을 알린다. 그보다 더욱 명확한 단서는 전환마다 짧게 흐르는 음악이다. 각 인격의 특성에 맞춰 배치된 음악은 다른 인격의 등장을 예고하고, 관객이 변화를 인지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조명과 음악, 배우의 연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한 배우의 몸을 통해 등장하고 사라지는 일곱 인격을 선명하게 구현한다.</p>
<p>
   <br />
</p>
<p>특히 음향의 활용은 오프닝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음향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인격의 전환을 알리거나 감정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스탠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극장 안에서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05633_bmsfytxd.jpg" alt="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nbsp;</p>
<p>&nbsp;</p>
<p>조명은 무대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애초에 무대 자체가 하나의 '조명기' 역할을 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얀 무대 구조물 위에 선 스탠리는 그 조명기 위에서 일곱 개의 인격을 꺼내 보인다. 주로 차가운 백색광이 사용되며, 업스테이지의 격자형 벽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무대 너머에 존재하는 스탠리의 내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조명기는 스탠리의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대 위에 선 레이건이 인격을 전환시키는 조명기에 대해 언급할 때, 무대를 비추던 하얀 빛은 서서히 관객석으로 이동한다.&nbsp;</p>
<p>&nbsp;</p>
<p>그리고 스탠리 안의 인격들을 비추던 빛이 객석을 향하는 순간, 관객은 자신 역시 여러 얼굴을 지닌 존재임을 자각한다. 우리는 관계와 집단에 따라 행동과 말투, 때로는 성격의 일부까지 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스탠리가 겪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겠지만, &lt;알테르 에고&gt;는 그의 분열된 자아에서 출발한 질문을 관객의 삶으로 확장하며 묻는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진 나의 어떤 모습을 진짜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nbsp;</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스탠리를 스탠리에게 돌려주는 일</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그렇게 스탠리의 다양한 인격을 만난 윌버 박사는 그의 인격이 쪼개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에 다가간다. 윌버는 '스탠리를 스탠리에게 돌려'주고자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그에게 가장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준 공간을 떠올리게 해야 한다. 연극이 지나온 모든 순간은 바로 그 공간에 닿기 위한 여정이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05646_tsvkzxtp.jpg" alt="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560px;" />
</p>
<p>&nbsp;</p>
<p>&nbsp;</p>
<p>그리고 이 연극은 그 여정 속에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 소리치는 스탠리의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탐구한다. 그 질문을 좇는 동안 작품은 관객에게 어딘가 불편한 감각을 남긴다. 범죄자이자 피해자인 주인공의 모순적인 지위와 그가 겪은 고통스러운 과거 때문이다. &lt;알테르 에고&gt;는 불편함을 무대 위에 펼쳐 놓고,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 묻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창작진은 그 인물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이다. 관객들은 그 관점에 동의하기도, 반박하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때 극장은 하나의 공론장이 되고, 무대 위에서 시작된 질문은 극장을 나선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p>
<p>&nbsp;</p>
<p> &lt;알테르 에고&gt;의 주제는 스탠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창살 안에 갇힌 어린 새와 다름 없는 스탠리처럼,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창살 안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창살 안에 갇혀 있으며, 수많은 '나' 가운데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nbsp;</p>
<p>
   <br />
</p>
<p>산산이 조각난 한 인간의 내면을 따라가며 타인을 판단하는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게 하고, 그 끝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남기는 연극 &lt;알테르 에고&gt;는 오는 11월 22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공연된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 ">
      <b></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nbsp;</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Your head will collapse</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But there's nothing in it</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And you'll ask yourself</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nbsp;</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Where is my mind?</b>
   </p>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span style="color: #000000;">Pixies - Where Is My Mind</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span style="color: #000000;">&nbsp;</span>
   </p>
   </blockquote>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00707_ytigresk.jpg" alt="손현진.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손현진]]></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23:53:1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2</guid>
<title><![CDATA[[Review] A, 두 존재가 서로 머리를 맞대면 - 알파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2</link>
<description><![CDATA[낙인은 몸에 새겨지고, 사랑은 영혼에 새겨진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2530_lehblhhy.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티저 포스터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p>
<p>
   <br />
</p>
<p>  &nbsp;  </p>
<p>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신작 영화 &lt;알파&gt;가 오는 9월 30일에 국내 개봉한다. 2011년 단편 &lt;주니어&gt;로 데뷔를 마친 그녀에게 이번 작품은 &lt;로우&gt;와 &lt;티탄&gt;의 뒤를 잇는 세 번째 장편이다.</p>
<p>  &nbsp;  </p>
<p>감독의 전작인 &lt;티탄&gt;이 제74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로 &lt;알파&gt; 역시 해외에서는 작년인 제78회 칸 영화제에서 이미 공개되었던 바 있다. 당시 초연을 봤던 평단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갈려 화제가 됐었는데, 실제로 평론가들의 리뷰를 수집해 보여주는 메타크리틱 점수를 보면 최고점 100점, 최저점 20점의 큰 격차를 기록 중이다.</p>
<p>  &nbsp;  </p>
<p>한 작품 내에서 관객의 호불호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는 스토리, 연출, 색감 등 다양하겠으나 줄리아 감독의 경우에는 그녀가 주로 다루곤 하는 ‘바디 호러’라는 장르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리라. 신체의 그로테스크함을 이용해 보는 사람에게 시각적 불편감을 유발하고, 그를 통해 오히려 더 강렬한 흡인력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출법.</p>
<p>  &nbsp;  </p>
<p>이번 &lt;알파&gt; 역시도 사람의 신체와 그 위에 새겨지는 낙인을 주된 소재로 삼는다.</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2554_gfvxseit.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4.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p>
<p>  &nbsp;  </p>
<p>&nbsp;</p>
<p>&lt;알파&gt;의 배경은 다소 디스토피아적이다. 미국의 어느 교외 도시, 그곳에는 혈액을 매개로 감염자들의 몸을 석고처럼 굳게 만드는 바이러스가 유행병처럼 돌고 있다. 그리고 13살 소녀 ‘알파’는 친구들과 함께 참석한 한 파티에서 자신도 모르는 새 팔에 알파(A) 모양의 문신이 새겨진 채 집으로 돌아온다.</p>
<p>  &nbsp;  </p>
<p>어린 알파는 자신의 문신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지만, 의사인 엄마는 혹여나 알파가 오염된 바늘로 문신 시술을 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엄마의 닦달로 감염 여부 검사를 한 알파. 그러나 그녀의 세상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2주 사이에 완전히 뒤바뀌고 만다.</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2620_arxlrxls.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5.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  &nbsp;  </p>
<p>&nbsp;</p>
<p>작품 내에서는 다소 판타지적인 가상의 바이러스로 등장하지만, 줄리아 감독이 이에 대한 영감을 얻은 것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실제로 사회를 위협했던 에이즈 위기 사건이다.</p>
<p>  &nbsp;  </p>
<p>“당시 타인에 대한 모든 종류의 두려움이 질병처럼 퍼졌다. (…) 질병 자체가 아닌, 공포 자체에 의한 오염. 바로 그것이 내가 &lt;알파&gt;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힌 감독의 말처럼, 영화 내에서 알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병 그 자체가 아니라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한순간에 뒤바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소문들이었다.</p>
<p>  &nbsp;  </p>
<p>처음 팔에 알파(A) 문양의 문신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을 때 알파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문신은 육체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었고, 그것이 그녀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불안과 학교 친구들의 경멸을 거듭 마주하며, 그리고 그 감정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알파에게 옮겨와 그녀를 좀먹으며 알파의 행동은 정말로 감염자처럼 변해간다. A자 문신은 그녀의 팔 한쪽에만 새겨졌지만, 사회가 찍은 낙인은 그녀의 영혼에 새겨진 것이다.</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2649_iwbhkchr.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2705_qtmweufr.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2.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  &nbsp;  </p>
<p>&nbsp;</p>
<p>후반부로 갈수록 도시의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늘어나고, 알파와 가족들의 정신 역시 점점 끝으로 내몰리며 영화의 분위기는 다소 암울해진다. 그러나 &lt;알파&gt;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다. ‘사랑’.</p>
<p>  &nbsp;  </p>
<p>알파의 엄마에게는 반드시 지켜내야 할 사랑하는 존재가 둘 있다. 그녀의 딸 알파와 그녀의 남동생 아민.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순탄치 못하다. 오래전 바이러스에 걸린 이후로 심각한 약물 중독에 빠져 계속 죽음을 갈구하는 아민도 버거운 와중 알파마저 파티에서 낯선 문신과 감염 가능성을 얻어온 탓이다.</p>
<p>  &nbsp;  </p>
<p>낮에는 근무하는 병원에서 반쯤 석고가 된 바이러스 환자들을, 밤에는 집에서 한 방에 격리해둔 아민과 알파를 돌보는 수호자. 엄마의 처절한 사랑은 작품 중 한 장면에서 아름다운 은유로 드러난다. 알파의 감염 검사 결과지를 본 후 어두워진 낯으로 알파의 방을 찾은 엄마. 그녀는 자고 있던 알파의 검지 손가락을 따고 자신의 검지도 딴 후 피가 맺힌 두 손가락을 서로 맞댄다. 혈액을 매개로 옮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그렇게 가만히 머리를 맞댄 엄마와 알파의 손가락은 그 순간 완벽한 A(알파) 모양을 그려 보인다.</p>
<p>  &nbsp;  </p>
<p>게다가 알파에게는 자신을 심리적으로 지탱해주는 존재가 엄마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 바로 엄마의 남동생이자 그녀에겐 삼촌이 되는 아민. 같은 감염자, 엄마에 의해 같은 방에 같이 감금된 자, 같은 외로움을 공유하는 자.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이고 가끔은 괴팍하게 굴기도 하는 삼촌을 초반의 알파는 상당히 경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을 열며 받아들인다.</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2726_hllozxei.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  &nbsp;  </p>
<p>&nbsp;</p>
<p>알파의 바이러스 감염 여부가 작품 속에서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황상으로는 감염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알파의 모습에는 감염자 특유의 피부가 하얘지거나 딱딱해지는, 석고로 변해가는 듯한 모습은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p>
<p>  &nbsp;  </p>
<p>그러나 영화의 결말, 삼촌 아민이 끝내 죽음으로 안식을 찾고 그런 그를 껴안은 엄마가 울부짖으며 무너지는 순간, 일그러진 알파의 얼굴은 처음으로 새하얀 가루로 뒤덮인다. 알파(A)를 포옹해주며 양옆에서 지탱하던 두 기둥, 알파를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던 사랑하는 두 존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p>
<p>&nbsp; &nbsp;</p>
<p>사람의 신체가 주 소재가 되는 ‘바디 무비’를 전문으로 다루는 줄리아 감독의 &lt;알파&gt;. 초반 알파의 몸을 뒤덮은 것은 문신과 낙인이었지만, 사람의 몸에 새겨질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뿐만은 아니다. 딱딱한 석고처럼 굳은 육체마저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사랑, 언제나 그것이 가장 깊숙이 박힌다.</p>
<p>
   <br />
</p>
<p>
   <br />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혜원]]></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16:28:5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3</guid>
<title><![CDATA[[Review] 우리는 &#039;질병&#039;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 알파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3</link>
<description><![CDATA[&#039;줄리아 뒤쿠르노&#039;의 영화 에 대한 개인적 단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
   <b>※</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이 글에는</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내용이</b>
</p>
<p style="text-align: center; ">
   <b>담겨 있습니다.</b>
</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203_wpukcxcw.jpg" alt="티저 포스터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
</p>
<p>
   <b>&nbsp;</b>
</p>
<p>
   <b>&nbsp;</b>
</p>
<p>
   <b>&nbsp;</b>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심연의 공포, 낙인, 혐오를 마주하는 바디 호러</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영화 〈알파〉는 〈티탄〉을 만든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바디 호러 신작이다. 영화는 신체에 그로테스크한 변형과 파괴를 가하는 특유의 질감 표현과 파괴적 묘사로 인간 심연의 공포와 마주한다. 이 문법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체가 돌처럼 굳어 가고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단지 감염성 질병의 여파로만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몸이라는, 인간 실존에 가장 가까운 매체를 가감 없이 파괴하고 뒤틀어 이질감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방관해 온 깊은 곳의 낙인과 혐오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장치로 느껴졌다. 이는 전작 〈티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가장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온 몸이 변형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 〈티탄〉의 날선 금속의 서늘함은 〈알파〉에 이르러 텁텁한 붉은 모래의 버석함으로 옮겨 와 바디 호러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티탄〉이 변형된 몸 그 자체의 공포에 머물렀다면, 〈알파〉는 그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으로까지 공포의 범위를 넓히는 듯하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217_kyioutbh.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34px;" />
</p>
<p>&nbsp;</p>
<p>&nbsp;</p>
<p>영화는 오프닝부터 '몸', 특히 피부 위의 흔적에 집중한다. 팔 위의 흉터 자국과 그 흉터를 마커로 잇는 소녀의 손길에서, 우리는 신체 표피의 질감 그 자체에 모든 호흡을 집중하게 된다. 더없이 두렵고 괴로운 것은 소녀의 팔에 새겨진 A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그녀의 '몸' 위에 남았다는 사실이다. 바늘로 피부를 뚫고 스며든 안료가 만들어낸 일상의 전복은, 그녀가 몸을 쓰며 살아가는 내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은연중에 알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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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우리는 '질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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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left;">영화에서 질병은 단순히 의학적, 병리적 현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사회는 환자를 신체적으로 '아픈' 사람이 아니라 '위험 요소'로 인식한다. 아직 질병에 노출되지 않은 이들에게 감염자는 위협일 수밖에 없고, 이는 특정 대상을 향한 공포와 혐오의 근원이 되어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그렇게 나타나는 기형적인 사회 현상이 바로, 감염 여부에 대한 추측을 기준으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타자화일 것이다. 내집단과 외집단이 나뉘는 순간, 질병에 노출된 이는 다수가 정상성의 범주로 정의한 사회로부터 언제든 버림받는다. 사회라는 어머니에게서 내쳐진 'motherless'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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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346_xmcrnibi.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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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민 같은 인물은 사회가 규정한 질병의 이데올로기 안에 속박된다. 이는 영화의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붉음'이라는 색채는 영상 안에서 위험 요소로 간주되며, 사회적 낙인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등장한다. 모든 것이 '붉은 바람' 탓이라며 아민의 몸에 물을 붓는 그의 어머니(알파의 할머니), 알파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든 수영장에서 황급히 뛰쳐나가는 군중이 그러하다. 이 장면들은 질병에 대한 사회의 뿌리 깊은 오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병을 규명하는 방식이 더 이상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물을 붓는' 행위는 종교적 관점에서 '성수를 뿌리는', 관념적으로 성스럽게 여겨지는 행위와 닮아 있다. 결국 우리는 사실보다 미신에 가까운 오류가 터무니없는 주술적 행위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 오인은 바로잡히지 못한 채 개인의 미신을 넘어 사회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굳어 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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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디 호러의 측면에서 보면 환자들의 몸이 지닌 질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생명의 상징이 물이라면, 버석하고 수분감 없어 보이는 몸들은 곧 생명을 잃을 듯 위태롭다. 아민의 무너져 내리는 등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적토는 지층이 붕괴하는 듯한 재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리석처럼 굳어 가는 몸은 미술관에 놓인 조각상을 닮았다. 쉽게 움직일 수 없고 신체적 자율성마저 잃은 채 병상에 누운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사회 안에서 주체성을 잃고 구경거리가 된 '타자', 오직 '보이는' 것으로 재단되는 존재를 떠올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흥미롭게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대리석을 택한 이유를, 사회에서 천대받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성스럽게 기리는 영원한 기념비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 속 사회는 이 몸들을 기리기는커녕 하나의 전시물처럼 바라볼 뿐이다. 감독이 부여한 성스러움과 사회가 가하는 대상화 사이의 간극이 이들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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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Alpha, 그리고 Amin</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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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알파는 13세 소녀로, 어느 날 팔에 커다란 A 문신을 새기게 되는 인물이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떠안게 된 A라는 글자는 그녀의 일상을 온통 헤집어 놓으며 변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민은 알파의 외삼촌으로, 어딘가 아픈지 손을 잔뜩 떨고 팔에는 주삿자국 같은 흉터가 가득하다. 두 사람이 상징하는 바는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두 인물 모두 도시에 창궐한 감염성 질병과 깊이 얽혀 있으나, 알파는 감염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을, 아민은 이미 오랜 기간 병과 싸워 왔다는 점에서 '확실성'을 지닌 환자다. 나는 이 대비가,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실제 감염 여부를 근거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읽었다. 사회가 대상을 색출하고 선별하는 기준은 다수의 대중이 '질병이라 간주하기로 한 조건'이며, 그 조건에 일정 부분 들어맞기만 하면 누구든 그 범위 안으로 끌려 들어오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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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또한 알파는 13세의 어린 소녀로, 아직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인물이다. '알파'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시작'을 뜻하며, 혐오의 시대 속 상처를 대물림받는 새로운 세대이자 질병이 낳은 서사의 모든 파장이 퍼져 나가는 시발점이다. 그녀는 무지 속에서 사회적 낙인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무책임한 멸시를 드러내는 타인들과 잘못된 통념에 맞서는 존재다. 한편 아민은 알파가 겪어 온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존재로, 오랜 배제와 차별의 전사(前史) 속에서 이미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며 '질병과 중독'이라는 비극적 굴레에 묶여 있다. 알파와 아민은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유사한 사회적 시선과 인식의 먹잇감이 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가 남긴 피해를 증언하는 이들의 '과거–현재'를 대변하는 것 같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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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440_nvptdshd.jpg" alt="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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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아민과 알파가 한 방에 머물며 같은 자세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그리고 괴로워하는 아민을 알파가 진정시키다 두 사람이 서로 얽혀 안고 절규하듯 우는 장면은, 두 인물이 공유하는 내재된 고통과 억압된 아픔이 터져 나오는 순간으로 비친다. 카메라는 감정에 과하게 개입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그 절제가 오히려 고통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고 느꼈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져, 말로 다 하지 못한 아픔이 몸짓과 표정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몸이라는 육체적 매개를 통해, 낙인 또한 몸에서 몸으로 이어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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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주홍글씨 'A'</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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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렇다면 영화 내내 알파를 괴롭힌 'A'라는 낙인에 대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서사 내에서 질병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세 사람, ‘알파’와 ‘아드리앵’, ‘아민’의 이름의 첫 글자이기도 한 A는 이들의 병리적, 사회적 연관성을 드러낸다. 질병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될 수밖에 없던 존재들이, 서로를 '같은 처지'로서만 느낄 수 있는 연대감과 안정감을 영화는 이름의 첫 글자로 엮어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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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또한 A는 시각적으로 낙인이 명백히 드러나는 상징적 요소다. 알파의 피부 깊숙이 새겨진 A는 파격적인 사건이 전개되는 원인이 된다. 이 새겨진 A를 보며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를 떠올렸다.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간통(adultery)을 저지른 죄로 평생 가슴에 '간통한 여자'를 뜻하는 'Adulteress'의 머리글자 A를 달고 살아가야 했고, 그 낙인은 딸 펄에게까지 드리워져 또 다른 비극의 전조가 된다. 두 사람에게 새겨진 낙인과 그들이 견뎌 온 시선의 무게, 그리고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그대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민과 알파의 관계와 닮아 있다. 다만 낙인이 무엇에서 비롯되는가에는 차이가 있다. 헤스터의 A가 '간통'이라는 도덕적 죄에서 비롯되었다면, 알파의 A는 '에이즈(AIDS)'라는 질병을 강하게 환기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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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502_syrdimvt.jpg" alt="6.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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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영화가 시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이 배경에서 1990년대의 '에이즈 위기'를 떠올렸다. 치료법 없는 낯선 질병이 낳은 공포는 그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고, 당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이었다. 실제로 에이즈는 1982년 지금의 이름이 붙기 전까지 '동성애자 관련 면역결핍(GRID, Gay-Related Immune Deficiency)'으로 불렸다. 영화 안에서도 성소수자에게 유독 배타적인 상황이 여러 차례 그려진다. 학생들이 수업 도중 담임 선생님 앞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특정 대상을 겨냥한 혐오가 질병이라는 요인으로 얼마나 극심해졌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공포의 문화는 곧 '언제든 사회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되어 모두에게 되돌아온다.</p>
<p>&nbsp;</p>
<p>또한 알파벳 A의 형상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소 주관적인 연상이지만, 에펠탑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적 랜드마크임을 감안하면 이 A는 프랑스라는 국가가 공유하는 정체성과 자부심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알파의 경우 북아프리카계로 읽히는 이민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단서가 곳곳에서 보이며, 이러한 민족적 특징과 차이가 이민 사회 안에서 또 다른 낙인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문화에 적응하기 싫어?", "노력이라도 하든가."라는 남성의 인종차별적 농담이 유독 뼈아프게 들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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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질병은 어떻게 죄악이 되는가</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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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알파〉가 포착하는 현상은 사회적 낙인과 이데올로기의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낙인은 혐오를 낳고, 혐오는 다시 낙인을 낳으며 끝없는 굴레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낙인은 '죄악'처럼 여겨지고, 사회는 그 죄에 은밀한 벌을 가한다. 죄에는 자연스레 벌이 따른다는 듯 차별과 배제를 당연하고 합리적인 처우로 받아들이며 집단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낙인과 오해가 사회와 제도 속에서 어떻게 굴러가며 사람을 또 한 번 아프게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p>
<p>&nbsp;</p>
<p>그 뿌리에는 대중의 무지, 그리고 정확한 정보와 교육을 회피하는 사회의 방임이 있다. 질병의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알파처럼 의심스러운 대상을 지목해 마녀사냥을 벌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이 오류는 사회 전체로 쉽게 번져 거대 기관과 제도 전반에 무책임함과 부조리를 퍼뜨린다. 모두 병원을 떠나 버린 의료진, 병원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소리치는 환자와 가족들, 학부모들의 원성 속에 학교로부터 압박받는 알파. "알려 줄, 교육할 생각은 없는 건가요?"라는 알파 엄마의 물음에 교장은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환자와 약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제도적 기반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진정한 비극이 도래한 것이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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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525_cddgqfrx.jpg" alt="7.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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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로 인한 낙인 대상의 심리적 압박은 상징물을 파괴하고 소실시키는 문법으로 극적으로 표현된다. 안전하다고 느꼈던 집이 흔들리고, 높이 있던 천장이 몸을 짓누를 기세로 코앞까지 내려앉는 연출은, '아프다'는 것이 곧 '나쁘다'는 것이 되어 그들을 사회적으로 압박하는 과정을 시청각적 충격으로 은유하는 듯하다. 여기서 오는 압박감과 상실감은 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대변하기도 한다. 희망과 쾌유를 상징하는 무당벌레 포스터는 내려앉는 천장과 함께 망가진다. 무당벌레는 흔히 행운의 상징으로, 심리적 관점에서 더 많은 행복과 사랑을 바란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민이 어린 알파에게 '뭔가를 잡았다'며 보여 주던 것이기도 한데, 이 대사는 무언가를 '잡는'(catch) 일과 병에 '걸리는' 일을 겹쳐 놓는다. 그런 무당벌레가 아민의 손아귀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장면은 으스러진 희망처럼 다가왔다. 결국 희망마저 빼앗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소원하는 것뿐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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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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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놓아야 하지만, 놓을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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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생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아민과, 그를 살려 내려는 그의 누나이자 알파의 엄마. 두 사람의 심리적 대조는 서사 내내 이어진다. 영화 후반부, 아민은 알파에게 '깨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두 사람이 함께 올라탄 버스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으로,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닮아 가면서 동시에 엇갈리는 지점을 보여 주며 현재의 사건과 대응되는 가족의 전사를 드러낸다. 과거의 알파는 쓰러진 아민을 보고 우는 데 그쳤지만, 현재의 알파는 엄마에게 아민을 제발 깨우지 말라고 연신 울부짖는다. 이 연출은 더 이상 질병의 방관자가 아니라 그 당사자가 된 알파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린다. 사회의 낙인은 아민에게서 알파로 이어졌고, 그 고통을 일상 속에서 몸소 체현한 알파는 아민의 고통을 끝내 매듭짓지 못한 것에 '미안해'라는 말을 내뱉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606_spdppnun.jpg" alt="4.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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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기서 의뭉스러운 점이 하나 떠오른다. 그간 알파 곁에 있던 아민은 실존하는 인물인가, 그저 허상일 뿐인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그 '아민'이 그의 누나이자 알파의 엄마로서 가족을 병과 사회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집념이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고 본다. 아민이 알파의 가족과 함께 살기를 스스로 원했을 때, 알파의 엄마는 이를 한 차례 거절했다. 아민에 대한 낙인이 알파의 평범한 일상을 해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알파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는 서사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고, 실제로도 꿈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8년 간격의 두 시간대가 서로 어긋나고 겹쳐지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영화의 구조도 이 해석에 힘을 실어 주는 듯하다. 알파와 함께 축구장을 뛰노는 아민과, 병상 위에서 붕대를 감은 채 죽어 가는 아민 중 실존하는, 혹은 실존했던 현실의 '아민'을 가려낸다면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p>
<p>&nbsp;</p>
<p>알파의 엄마는 아민을 마음속 깊이 품고 살아가며, 그의 모습을 딸 알파에게도 겹쳐 본다. 그녀가 알파를 놓지 못하는 마음은 과거 아민을 놓지 못했던 마음과 같다. 결국 알파와 엄마, 그리고 아민은 함께 차를 타고 붉은 모래바람을 헤치며 어디론가 향한다. 이때 알파가 엄마에게 건네는 대사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엄마, 계속 같이 있을 순 없어.", "이제 끝났어. 다 지난 일이야. 엄마는 할 만큼 했어."</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64540_ngzsychb.jpg" alt="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nbsp;</p>
<p>&nbsp;</p>
<p>모래바람을 뚫고 어딘가에 다다른 그들은 차에서 내린다. 붉은 모래바람 사이로 걸음을 내딛는 아민과 엄마,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알파. 아민을 진정으로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일 것이다. 아민은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리고, 거센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진다. 화면은 알 수 없는 표정의 알파의 얼굴로 서서히 페이드인하며 막을 내린다.&nbsp;</p>
<p>&nbsp;</p>
<p>우리는 과연 알파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을까. 혹은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문경란]]></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16:34:39 +0900</pubDate>
</item>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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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Review] 짧은 탄성처럼 만난 엇나감의 순간 - 수림뉴웨이브 2026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4</link>
<description><![CDATA[엇? 엇!]]></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75929_wauwdrgm.jpg" alt="NW26)_01 포스터(메인)_A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9px;" />
</p>
<p>&nbsp;</p>
<p>&nbsp;</p>
<p>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수림뉴웨이브는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전통음악가를 조명하는 공연제로, 매년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동시대 우리음악의 흐름을 탐색해 왔다. 올해의 주제어 '엇'은 전통음악에서 엇박과 엇모리처럼 익숙한 흐름을 비껴가며 새로운 긴장과 활력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의미한다. 어긋남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은 우리음악의 창조적 에너지이자 음악적 유희의 방식이다. 올해는 이러한 주제를 통해 기존의 기량 위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을 시도하는 순간에 주목한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80452_hzrtgigi.jpg" alt="3) 수림뉴웨이브 엇_츌연 정보_ⓒDAVIN, 수림문화재단.jpg" style="width: 700px; height: 373px;" />
</p>
<p>&nbsp;</p>
<p>&nbsp;</p>
<p>수림뉴웨이브 2026의 공연은 판소리, 가야금, 서도소리, 해금, 거문고, 타악, 생황, 피리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그중 정은혜 소리꾼의 판소리 공연을 보게 되었다.</p>
<p>
   <br />
</p>
<p>정은혜는 제32회 임방울국악제 대통령상과 2025 KBS 국악대상 대상을 석권하며 판소리의 동시대성을 몸소 증명하는 소리꾼이다. 창극·연극·뮤지컬을 넘나드는 배우이자 과감한 창작으로 소리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전통 판소리의 ‘엇부침’을 동시대적 음악 언어와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며, 인간 내면의 어긋난 마음과 비극적 정서를 독창적인 작법으로 녹여낸다.</p>
<p>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182332_xgizzrbt.jpg" alt="KakaoTalk_20260924_18230795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81px;" />
</p>
<p>&nbsp;</p>
<p>&nbsp;</p>
<p>사실 판소리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전통음악이 메인이 된 공연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티비에서, 예능에서, 혹은 어떤 곡에서 요소요소로써 사용된 정도로만 접해본 것이 다였다. 그렇기에 설레는 마음 반, 왜인지 긴장되는 마음 반을 안고 공연장에 들어갔다.</p>
<p>
   <br />
</p>
<p>평소 자주 듣던 음악들과 비교하자면 판소리에는 많은 악기가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한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무대를 이끌어 가야 한다. 그래서 첫 곡인 &lt;정정렬제 춘향가&gt;가 시작하자마자 느꼈던 강렬함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상대적으로 빈 공간이 느껴질 거란 생각과 달리 무대는 훨씬 역동적이고, 꽉 차 있었다. 소리꾼의 목소리, 고수의 북소리와 추임새 하나만으로 이야기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p>
<p>&nbsp;</p>
<p>&lt;정정렬제 춘향가&gt;가 전통 판소리였다면, 이후의 음악들은 수림뉴웨이브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들이었다. &lt;그 물에서&gt;는 '심청가'를 모티브로, &lt;불허&gt;는 '적벽가'를 새롭게 해석하여 만들었다. &lt;무무: 무언가&gt;는 투르게네프의 소설 &lt;무무&gt;를 판소리로 새롭게 풀어낸 작품이다.</p>
<p>
   <br />
</p>
<p>사실 판소리, 하면 전통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판소리만의 특징이 명확해서 다른 무언가와 융화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예상과 달리 다양한 악기와 실험적인 음악이 섞이고 어울리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자연스럽고 또 멋스러워서 넋 놓고 무대를 감상하게 되었다.</p>
<p>&nbsp;</p>
<p>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lt;무무: 무언가&gt;였다. 소리꾼이 적극적으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호응을 유도하던 모습, 그리고 관객들이 그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며 왜 판소리에서 청중이 중요한 요소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 저잣거리에서 소리꾼의 이야기를 듣던 모습이 바로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p>
<p>
   <br />
</p>
<p>이야기가 주가 되면서도 악기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소리꾼이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것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소환하는 음악의 힘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도 판소리로 리메이크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br />
   </p>
   <p>‘엇’은 어긋나고 엇갈린다는 의미의 접두사입니다. 음악에서는 정해진 박을 비껴가는 ‘엇박자’, 2박과 3박이 뒤섞여 절룩대는 느낌의 ‘엇모리장단’ 같은 곳에서 쓰죠.</p>
   <p>&nbsp;</p>
   <p>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난 순간 우리는 짧은 탄성처럼 ‘엇’을 내뱉기도 합니다.</p>
   <p>&nbsp;</p>
   <p>우리음악은 직선의 정확함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흔들리고 꺾이는 음, 밀고 당기며 만들어내는 박, 그 어긋남은 우리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정해진 질서를 깊이 감각하는 사람만이 어긋나는 순간에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p>
   <p>&nbsp;</p>
   <p>&lt;수림뉴웨이브 2026&gt;은 단순히 익숙함을 벗어나는 파격이 아니라 오랜 시간 다듬어진 노련함이 만들어내는 우리음악이 가진 유희의 순간에 주목합니다.</p>
   <p>&nbsp;</p>
   <p>10명의 예술가가 들려주는 서로 다른 음악 세계에서 즐거운 ‘엇!’을 발견하길 바랍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수림뉴웨이브 2026' 기획의 시선 中</p>
   <p style="text-align: right; ">&nbsp;</p>
   </blockquote>
<p>
   <br />
</p>
<p>이번 공연이 더욱 기억에 남는 건 멋진 무대와 더불어, 정성스러운 소개와 '수림뉴웨이브'를 이어가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믿음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p>
<p>&nbsp;</p>
<p>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현대에서 이런 뛰어난 연주자들과 공연을 만나볼 수 있었단 것 또한 왜인지 어떤 흐름을 거스르고 어긋내어 만난 귀중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nbsp;</p>
<p>
   <br />
</p>
<p>처음으로 판소리 공연을 보며 예상치 못한 즐거움으로 ‘엇!’하고 탄성을 질렀던 순간. 앞으로도 이런 무대들이 사람들에게 가닿아 짧고 익숙한 탄성을 뱉어볼 수 있길 바란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조현정]]></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18:38:2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8</guid>
<title><![CDATA[[Opinion] 어떤 계절은 음악을 통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음악]]]></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8</link>
<description><![CDATA[쓸쓸함과 해방감 사이, 가을을 닮은 노래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추석 명절을 맞아 본가에 들렀다.&nbsp;밤이 깊어갈 무렵, 아버지와 함께 드라이브를 나섰다. 평소 즐겨 듣는 KBS Classic FM의 &lt;세상의 모든 음악&gt;을 틀어놓고, 익숙한 목소리와 음악 사이로 조용히 도로를 달렸다.</p>
<p>&nbsp;</p>
<p>이날은 추석 특집 방송으로 배우 박지환이 게스트로 출연하는 날이었다. 박지환이 고른 플레이리스트가 한 곡씩 흘러나왔다. 그중 Glen Weston이 부른 'What Is a Youth' (From Romeo &amp; Juliet)<what is="" a="" youth="">와 Frank Sinatra가 부른 'That's Life'<that's life="">가 있었다.&nbsp;아버지와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어두운 풍경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지금의 계절과 참 잘 어울리는 노래들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that's></what></p>
<p>
   <what is="" a="" youth=""><that's life="">&nbsp;</that's></what>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mAQQ4kba0OE?si=w3i9Tr87k0jpExmv&amp;start=134"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br />
</p>
<p>&nbsp;</p>
<p>&nbsp;</p>
<p>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nbsp;다른 사람들은 이맘때 어떤 노래를 들을까.&nbsp;그리고 우리가 어떤 노래를 두고 ‘가을에 어울린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nbsp;쓸쓸한 멜로디 때문일까, 가사 때문일까.</p>
<p>&nbsp;</p>
<p>나 자신을 비롯해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가을이 오면 찾아 듣는 노래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노래를 다른 계절이 아닌 가을에 듣게 되는지.</p>
<p>&nbsp;</p>
<p>각자가 고른 노래를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우리가 계절을 감각하는 방식과 저마다의 기억까지 함께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글에서는 그렇게 모인 몇 곡의 노래를 소개해보려 한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닮은 노래들, 그리고 각자의 가을에만 유난히 잘 어울리는 노래들.</p>
<p>
   <br />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Carla Bruni - Little French Song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m9nRxk8Wi9E?si=Zi05Uvem65Ex3jS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여름이 지나고 맞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은 어떠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푸른 잎의 색이 바래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은 쓸쓸한 마음을 갖게도 한다. 가을은 쌉싸름하고 달콤한 다크 초콜릿 같다. 허스키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를라 브루니의 목소리, 시크하면서도 둥근 프랑스어의 발음은 이런 가을과 잘 어우러진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French songs will take you to Paris, to Pigalle ou L'Île Saint-Louis</p>
   <p style="text-align: left;">(프랑스 노래는 당신은 파리로 데려가요 피갈로에서 생루이 섬까지)</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French songs are dancing sous la pluie, de Bastille aux Tuileries</p>
   <p style="text-align: left;">(프랑스 노래는 빗속에서 춤을 춰요 바스티유에서 튈르리 정원에서까지)</p>
   <p style="text-align: left;">&nbsp;</p>
   </blockquote>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Joji – Hotel California</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uFaShu5UZcs?si=j5I3FjEaHTC1SCF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조지의 노래 중 'Slow Dancing In The Dark'<slow dancing="" in="" the="" dark="">는 여름에, 'Hotel California'<hotel california="">는 가을에 듣게 된다. 여름에는 사운드가 튀는 노래, 가을에는 여백이 많은 노래를 듣는 것 같다."</hotel></slow></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She said, “Nice to meet ya, nice to know ya”</p>
   <p>(그녀는 “만나서 반가웠고, 널 알게 돼서 좋았어”라고 말했고)</p>
   <p>And left me at the Hotel California</p>
   <p>(나를 호텔 캘리포니아에 남겨두고 떠났어)</p>
   <p>Don’t know what it means, guess I’m a goner</p>
   <p>(무슨 뜻인진 잘 모르겠지만, 난 이미 끝났나봐)</p>
   <p>Lost you in the waves, I’m underwater</p>
   <p>(파도 속에서 널 잃었고, 난 수면 아래 잠겼어)</p>
   <p>&nbsp;</p>
   </blockquote>
<p>&nbsp;</p>
<p>
   <b>&nbsp;</b>
</p>
<p>
   <span style="font-size: 18px;"><b>BIBI – 책방오빠 문학소녀&nbsp;(Scott and Zelda)</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UPQGInrhT7g?si=rOrpiNtCz-F8uvBC"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책이라는 소재는 독서의 계절인 가을을 떠오르게 만든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난 네 종이, 넌 내 연필</p>
   <p>나를 한번 펼쳐봐 줄래?</p>
   <p>&nbsp;</p>
   <p>날 넘겨줄래, 읽어봐 줄래, 갈피를 꽂아줄래?</p>
   <p>반납했다 영영 놓치지 말고, 날 데려가 줄래?</p>
   <p>&nbsp;</p>
   </blockquote>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김광석 –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b></span>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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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yjmFZ8YSOdA?si=S7iy4il9SK4KYlFW"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곡명 자체가 강한 계절감을 드러낸다. 또한 가을은 내게 어디로 떠나가고 싶게끔 하는데 이 노래의 가사도 그러하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난 책을 접어 놓으며 창문을 열어</p>
   <p>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p>
   <p>&nbsp;</p>
   <p>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p>
   <p>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p>
   <p>&nbsp;</p>
   </blockquote>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Shigeru Umebayashi - Yumeji’s theme (From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span></b>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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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UssJ1oi4cA?si=QK1IppzI0bmU7lj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피부를 감싸던 무더운 기운이 걷혔다. 새벽에 한기를 느껴 일어날 때 가을 공기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이 노래가 주는 불안정한 느낌과 같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Kelly Clarkson – Wrapped in Red</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7IFfZRVRbqM?si=QcnvgDNvEo0UZ4aZ"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나는 지금부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중이다. Kelly Clarkson의 'Wrapped in Red'<wrapped in="" red="">, 태티서의 'Dear Santa'<dear santa="">, Sia의 'Everyday Is Christmas'&nbsp;<last christmas="">등의 캐럴을 듣고 있다."</last></dear></wrapped></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But this Christmas I’m gonna risk it all</p>
   <p>(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걸 걸어볼 거야)</p>
   <p>This Christmas I’m not afraid to fall</p>
   <p>(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넘어지는 것도 두렵지 않아)</p>
   <p>&nbsp;</p>
   <p>So magical and nothing more than words I never said</p>
   <p>(너무나 마법 같아, 그리고 내가 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보다 더 많은 것)</p>
   <p>You know it’s love</p>
   <p>(넌 이게 사랑이라는 걸 알잖아)</p>
   <p>&nbsp;</p>
   </blockquote>
<p>&nbsp;</p>
<p>막상 사람들에게 가을에 듣는 노래를 물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노래들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샹송을, 누군가는 영화의 삽입곡을, 또 누군가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가을의 음악으로 꼽았다. 같은 계절을 지나고 있음에도 각자가 듣고 있는 노래는 전혀 달랐다.</p>
<p>&nbsp;</p>
<p>가을을 바라보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가을은 낙엽을 떠올리는 계절인 동시에 책을 읽는 계절이기도 했고, 질서가 뒤바뀌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계절이기도 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을 기다리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p>
<p>&nbsp;</p>
<p>우리가 가을에 듣는 노래는 단순히 가을의 계절감을 담고 있기보다, 각자가 가을을 바라보고 느끼는 방식이 담기는 것이다.</p>
<p>&nbsp;</p>
<p>같은 가을 아래에서 우리는 이렇게나 서로 다른 노래를 듣고 있고, 서로 다른 감정과 기억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가을, 당신의 마음에 머물고 있는 노래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 노래를 통해 어떤 가을의 모습을 보고 있는가?</p>
<p>&nbsp;</p>
<p>
   <br />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한비]]></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01:24:0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1</guid>
<title><![CDATA[[Review]  예술이라는, 환각의 코마 상태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1</link>
<description><![CDATA[켄트 존스, (2025)]]></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시인에 대해 떠올려보라. 그의 외양을 자세히 상상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아마 그는 꽤나 낡아 보이는 더플백을 매고, 보풀이 잔뜩 인 비니를 썼을 것이다. 궁핍한 행색으로 글감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도시를 돌아다닐 것이다. 좀 없어 보여도 괜찮다. 영혼을 담은 그의 두 눈은 아주 생생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아마 그의 집은 한 평 남짓의 남루한 공간일 것이다. 넓고 사치스러운 공간은 아니겠지. 시인에겐 사치란 죄악이니까. 특히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가 외투 주머니를 뒤진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꺼내 든 건 휴대폰이 아닌 낡은 손목시계다. 예술가라면 응당 아날로그의 미덕을 알고 있어야만 하고, 디지털과 첨단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경계해야 하니까.</p>
<p>  &nbsp;  </p>
<p>이 묘사가 조금은 과장되게 느껴질지라도, 당신이 시인, 내지는 예술가를 생각했을 때 떠올랐을 순간적인 이미지들은 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 심오하고 예민하며 낭만적인 느낌. 일반의 사람들은 쉽게 휘둘리고 마는 어떤 것들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일반의 사람들은 포착하지 못하는 부분을 아주 예리한 감각으로 발견해 내는 사람들. 그들은 주류가 추구하고 욕망하는 어떤 것들과는 멀어져 있어야 하고, 일반이 기피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어떤 것들과는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예술가가 아닌 누군가들은 그렇게 쉽게 그들을 대상화해 버리곤 한다. 켄트 존스 감독의 &lt;나의 사적인 예술가&gt;는 이러한 클리셰, 특히 예술가와 관련한 어떤 허황된 이미지들의 반대편에서 서서,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예술가가 마주하게 되는 실제의 삶과 결국 깨어지고 마는 허상을 그려낸다. </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93005_illzlixg.jpg" alt="[크기변환]movie_image.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3px;" />
</p>
<p>  &nbsp;  </p>
<p>&nbsp;</p>
<p>&lt;나의 사적인 예술가&gt;가 가진 특이한 지점은, 이러한 예술가의 실제 삶과 허상의 괴리를 포착하기 위해 영화가 선택하는 시점이 예술가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예술가에게 주어지고 마는 외부의 클리셰들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클리셰를 내면화해 버린 당사자를 등장시켜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가지는지를 그저 포착한다.</p>
<p>  &nbsp;  </p>
<p>영화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그다지 숭고하지 않다.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디지털과 첨단을 지양하자며, 예술의 본질은 그곳에 있는 것이라며 인플루언서들을 비웃는 젊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발표하곤 자신들에게 내려질 평가를 확인하기 위해 불안한 듯 웹페이지를 무한 새로고침 하고, 믿을만한 동료 예술가가 칭찬했다는 이유 하나로 읽어본 적도 없는 작품을 추앙한다. 그들은 예술가 자신이면서도 자신들에게 부여되는 클리셰에 대항하기는커녕 몸소 내면화하고 실천하며, 심지어는 이를 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둔한 영혼들이다. 예술에 대해서 누구보다 쉽게 떠들지만 결코 그 본질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예술이 수반하고야 마는 어떤 것들에 매혹되어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단지 나르시스트들 뿐이다. </p>
<p>  &nbsp;  </p>
<p>여기서 느껴지는 이 낯부끄러울 정도로 익숙한 기시감이란. 예술을 한다는 사명감 혹은 자의식에 취해 본질에는 결코 가닿지 못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안타까울 정도로 현실과 유리된 허상에 도취된,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있다. 언젠간 그 환각의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면 마주하게 될 현실의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93019_vpwmrfvu.jpg" alt="[크기변환]common (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nbsp;  </p>
<p>&nbsp;</p>
<p>영원할 것 같은 이 ‘예술병’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유일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우리의 늙은 예술가인 에드 색스버거다. 투박한 외투를 걸치곤 어딘가 심오한 표정을 한, 젊을 적 시집 한 편을 내곤 30여 년간 우체국에서 일해온, 어쩐지 첫 단락의 과한 묘사와 딱 들어맞는 예술가의 기운을 가진 그는 젊은 예술가 집단에 의해 ‘재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과거에 ‘시인’으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코마 상태에 다시금 빠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마음속 한쪽에 접어두었던 명성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며, ‘유능한 예술가’라는 자기 인식을 재정립하게 된다. 예술과는 관련 없는 기존 그룹과의 불화와, 예술을 제외하곤 전혀 연관이 없는 새로운 그룹과의 연결은 뒤늦은 명성이 가져다준 뒤늦은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p>
<p>  &nbsp;  </p>
<p>그야말로 Late Fame, 젊고 어린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뒤늦은 명성을 경험하던 그는 결국 점점 그들과 자신의 차이에 대해 깨닫게 되고, 그들이 자신에게 내보였던 추앙과도 같은 존경이 사실은 허상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뒤 그가 향한 곳은 결국 일상의 공간이다. 자신이 원하던 것은 예술이라는 본질에 다시금 흠뻑 젖어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수반하는 인정과 명성이었다는 것을, 그는 시인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깨달음, 매료되었던 것은 예술이라는 본질이 아닌 명성이라는 허상이었다는 것, 결국 향해야 할 곳은 무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이라는 사실. </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93035_ximsyqey.jpg" alt="[크기변환]common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3px;" />
</p>
<p>  &nbsp;  </p>
<p>&nbsp;</p>
<p>비주류와 주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일반의 누군가가 비주류에 속해있다면 그는 아마 주류에 속하기 위해 몹시 애를 쓸 테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로 칭하거나 혹은 예술가로 평가받는 누군가라면 자신이 비주류에 속해있는 것이 짐짓 뿌듯할 것이다. 예술이든 뭐든, 일단 그게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불러올 환각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좋은지, 아니면 그것이 불러온 어떤 것들이 좋은 것인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가 수반하는 매혹적인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쩐지 그들을 향한 조롱 같지만 단순히 조롱뿐만은 아닌 것 같은, 삶의 복잡함과 허상에 혼란해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연민을 담은 응원 같은 영화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차수민]]></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09:32:5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6</guid>
<title><![CDATA[[Review] &#039;순수한 미술은 없다&#039;는 말 다음에 - 도서 &#039;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6</link>
<description><![CDATA[작품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책은 후원자와 컬렉터, 박물관과 경매의 사례로 답을 찾아가지만, 독자가 더 알고 싶어지는 순간마다 이야기는 다음 사례로 향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제목과 저자의 이력을 보고 미술을 둘러싼 돈과 권력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p>
<p>&nbsp;</p>
<p>미술이 시장과 후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낯설지 않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누가 제작비를 대고 작품을 소유하며 그 가격을 높이는지 궁금했다. 오랫동안 미술 현장에서 일해 온 저자라면 이런 과정의 복잡함을 논증하고 명확한 의견을 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p>
<p>&nbsp;</p>
<p>책을 덮은 뒤에는 내용보다 읽는 속도가 기억에 남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해 조금 더 따라가려 할 때마다 다음 사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p>
<p><br /></p>
<p>책의 첫 부분은 미술 생태계 전체를 조망한다. 리처드 윌슨의 작품과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를 거쳐, 감상의 대상이던 미술이 공간을 차지하고 관람객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옮겨 간다. 국가와 기업, 기술과 시장이 작품의 가치에 관여한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저자는 이 현상을 한쪽으로 몰아 평가하기보다 여러 사례로 쪼개서 짧게 소개한다. 덕분에 미술의 가치가 작품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은 전달된다. </p>
<p><br /></p>
<p>그러나 각각의 조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에서 발생하고 효력을 발휘하고 어떻게 사그라든지 알고 싶어질 무렵 이야기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p>
<p>&nbsp;</p>
<p>르네상스 미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이 남았다. 조토, 우첼로, 얀 반 에이크, 보티첼리 등의 작품에 관한 양식과 도상 설명은 익숙한 미술사 교양서의 흐름을 따른다. 이 파트의 중심 내용은 미술과 권력이고, 작품의 제작을 권력자와 신흥 상인 계급의 주문에서 떼어 볼 수 없다는 관점은 흥미롭다. </p>
<p>&nbsp;</p>
<p>하지만 그 관점을 살리려면 주문자가 무엇을 요구했는지, 화가가 그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바꾸었는지, 그 관계가 작품의 형태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좀 더 오래 서술해야한다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작품 설명이 이어진 뒤 후원 관계가 덧붙는 구성에서는 미술의 제작 조건을 새로 이해했다는 느낌이 적었다.</p>
<p>&nbsp;</p>
<p>개인적으로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역시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이었다. 흑사병 시기의 그림 거래를 코로나 시기의 미술시장과 함께 살펴보는 대목은 흥미롭다. 오일머니의 유입과 작품 가격의 변화, 중국 컬렉터의 등장과 중국 작가들의 부상은 내가 처음 책을 들어 기대한 내용이었고, 저자도 깔끔하게 설명한다. </p>
<p>&nbsp;</p>
<p>그런데 이런 사례를 짧게 소개한 뒤 정물화의 의미나 다른 작가의 작업으로 화제가 옮겨 간다. 파트의 제목은 ‘예술적 가치와 시장의 가치는 일치하지 않는다’인데, 독자가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주로 작품의 평가와 가격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 변화가 두 가치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펴볼 여유는 많지 않다. 한 사례만 붙들어도 충분히 한 편의 글이 될 텐데, 책은 계속 새로운 사례를 보여 주는 쪽을 택한다.</p>
<p>&nbsp;</p>
<p>이후 박물관을 다루는 파트에서, 영국박물관과 테이트 갤러리, 영국 현대미술의 부상을 다루는 부분도 그렇다. 박물관이 국가의 전략이 된다는 제목 아래 여러 사건과 공간이 등장하지만, 그 사이의 관계는 독자가 메워야 할 때가 많다. 이어지는 경매사의 업무와 온라인 경매, 소더비의 유명한 경매, 이름난 딜러와 컬렉터들의 이야기에서는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작품의 값과 명성을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하는지 파고들기 전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한 파트 안의 짧은 소제목들이 관심을 여러 번 환기하지만, 그만큼 생각이 한곳에 머물 시간은 줄어든다.</p>
<p>&nbsp;</p>
<p>마지막 부분은 미술이 자산이 되는 방식으로 시선을 돌린다. 소셜미디어에서 취향을 드러내는 젊은 세대, 아트 마케팅과 협업, 사업가로서의 데이미언 허스트가 차례로 나온다. </p>
<p>&nbsp;</p>
<p>책은 끝에서 순수한 미술은 없으며, 우리는 시대마다 아름다움과 가치에 새롭게 합의해 왔다고 말한다. 그 말에 이르기까지 내가 더 알고 싶었던 것은 그 합의의 구체적인 과정이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값을 매기는 사람, 구매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은 각각 어떤 힘을 가졌을까.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전망 역시 이런 차이를 살핀 뒤에야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p>
<p>&nbsp;</p>
<p>물론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거나 새롭게 연결해 본 사례도 있었다. 미술사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짧은 글들을 따라가며 작품 밖의 세계에 관심을 넓힐 수도 있겠다. 나 역시 흑사병기의 거래나 새로운 컬렉터의 유입을 읽을 때는 페이지를 멈추고 싶었다. 바로 그래서 독자로서 아쉽다. 짧은 사례 중심의 구성은 입문 독자에게 접근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순수한 미술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에 비해서 주장을 쌓아가는 말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p>
<p>&nbsp;</p>
<p>이미 아는 작품 설명은 빠르게 지나갔고, 처음 만난 이야기조차 깊어지기 전에 끝났다. 책을 덮고 나니 여러 편의 짧은 영상을 연달아 본 듯하다. 소재는 많이 보았는데, 하나를 오래 들여다본 감각은 남지 않는다. 제목이 던진 질문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마다 책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223357_stbsztwk.png" alt="20260921204315_iiekuwzw.png" style="width: 700px; height: 999px;" /></p>
<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승주]]></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22:34:3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5</guid>
<title><![CDATA[[오피니언] 나만의 규칙 만들기 [사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5</link>
<description><![CDATA[규칙 혹은 고집]]></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215024_lypdahpl.jpg" alt="mrjayw-street-331778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살아가다 보면 자기만의 고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오늘의 운세에 쓰인 행운의 아이템을 챙기는 것처럼 소소한 것일 수도 있고, 인생의 철학이 담긴 무거운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소하고 또 나름대로 거창한 몇 가지 고집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1. 글을 쓸 때 AI는 사용하지 말 것</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AI에 거부감을 가진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AI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인정하면서도, 야기되는 많은 문제들 때문에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미 AI는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고 AI를 잘 사용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는 걸 보면 이렇게 뒤처지는구나, 하고 자조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p>
<p>&nbsp;</p>
<p>그렇다고 내가 AI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단 건 아니다. 문자 메세지, 메일, 영어 공부 등등 사실 따지고 보면 많은 곳에서 활용하고 있다. 다만, 글을 쓸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고집을 꼭 지키고자 노력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이란 순수하게 내 감상을 적어내리는 순간을 의미한다. 지금 쓰고 있는 오피니언, 미디어 컨텐츠를 보고 나서 남기는 후기들, 센치해질 때 적어내리는 일기까지. 글을 쓰다가 말이 정돈되지 않을 때, 마무리가 애매할 때 GPT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그럴 때마다 되뇌어본다. 이것만은 온전히 내 힘으로 써야지.</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2. 같은 시간이라면 버스 보다는 지하철로</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버스가 좋아, 지하철이 좋아?</p>
<p>&nbsp;</p>
<p>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물어보던 질문이다. 물론, 내가 버스파인지 지하철파인지는 이미 예상했으리라 생각한다.</p>
<p>
   <br />
</p>
<p>지하철을 선택한 데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성향에 불안과 일종의 망신살이 가득하다 해두겠다. 버스라는 공간 자체가 좁기 때문일까. 물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 걸리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가득 찬 상태에서 정류장이 가까워지면 별별 생각이 들고 무사히 내리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 목적지의 두세 정거장 전부터 내릴 걱정을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버스를 타야 할 일이 있으면 걱정부터 생기니 자연스레 지하철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교통상황에 따라 예상시간이 달라지곤 하는 버스와 달리 지하철은 웬만하면 일정한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지하철파가 될 수밖에.</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3. 좋아하는 앨범은 CD로 사기</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CD를 처음 사본 건 아마도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전까지 좋아하던 가수들은 CD가 없거나 CD를 살 만큼 좋아하진 않았었기에 어쩌면 남들보다 늦은 시작이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CD를 보며 기뻐하고, 사진을 찍고, 서랍에 넣어두고, 끝. 이후로 산 모든 CD도 같은 수순을 밟았으니 내 방에 있던 CD들은 제대로 사용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p>
<p>&nbsp;</p>
<p>그러다 얼마 전 처음으로 CD 플레이어를 사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플레이해 본 CD는 신기함으로 가득했다. 물론 매일같이 듣던 노래이고 음질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CD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왠지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p>
<p>&nbsp;</p>
<p>그리고선 생각했다.</p>
<p>&nbsp;</p>
<p>CD를 듣는 건, 생각보다 불편하구나.</p>
<p>
   <br />
</p>
<p>아무리 좋아하는 음반이라도 한두 개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가 있기 마련. 나의 짧은 인내심은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한 앨범을 듣다가 다른 음악을 듣고 싶어지면? 당연하게도 다른 CD로 바꾸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터치 한 번에 쑥쑥 다른 곡으로 넘어가던 스마트폰과는 정반대다. 그러다 보니 첫 CD 플레이어에 감격하다가도 불쑥 불편하다는 감정이 들고 만 것이다.</p>
<p>&nbsp;</p>
<p>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드는 앨범을 보면 우선 장바구니에 담아놓는 건 역시나 물성이 주는 기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감각. 디지털로 된 무언가를 '나의 것'으로 감각하기는 쉽지 않은데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것이 있으면 좀 더 쉽게 '나의 것'으로 인식된달까.</p>
<p>&nbsp;</p>
<p>그러니 앞으로도 좋아하는 앨범이 생기면 사고 말 것이고, 안타깝지만 CD 플레이어는 많이 사용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CD를 더 자주 틀어 버릇 하다 보면 익숙해질까? 어쩌면 언젠가 마음을 바꿔 모든 이들에게 CD 플레이어를 전도하게 될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조현정]]></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21:52:3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70</guid>
<title><![CDATA[[Opinion] 음악의 효능,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다 [음악]]]></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70</link>
<description><![CDATA[연간 차트 1위곡을 통해 그 시절 소환하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left; ">달칵. 우연히 재생된 플레이리스트에서 나오는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한참 추억 속에 묻어두었다가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듣는 먼지 쌓인 음악. 반가운 멜로디 위로 겹쳐지는 그때 그 시절의 나. 사람들은 종종 플레이리스트나 유튜브 음원 댓글로 각자가 가진 오래된 추억을 꺼내놓는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음악에는 향수가 깃든다. 특정 시기에 많이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그때 내가 자주 걷던 거리,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람, 당시 나를 지배하던 감정이나 기분이 떠오른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실제로 음악이 개인적인 기억을 끌어내는 데 강력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정 음악을 듣는 순간 음악에 저장되어 있던 특정 시기와 장소, 사람, 감정에 대한 기억이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 특히 청소년기에서 초기 성인기에는 중요한 사건과 성장 과정을 겪으면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그 시절 함께 듣고 자라온 음악은 마치 기억을 저장해놓은 메모리칩과도 같다. 메모리칩을 뇌에 연결하면 한동안 잊고 있던 당시의 기억이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그렇다면 한 해의 차트를 휩쓴 인기곡은 어떨까. 찾아 듣지 않아도 거리와 가게, TV와 인터넷 어디에서나 흘러나오던 메가 히트곡은 우리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올까.</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우리 모두는 같은 노래를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들었다. 각 음악에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간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과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자전적인 기억이 혼합되어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2010년부터 2025년까지 5년 간격으로 연간차트 1위곡을 다시 들으며, 그 시대에 대한 회상에 잠겨보고자 한다. (차트 순위는 월간 사용자 수가 많고, 연간 차트를 제공하는 플랫폼인 멜론을 참고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
   <b><span style="font-size: 18px;">2010년 1위곡: Bad Girl Good Girl – Miss A</span></b>
</p>
<hr style="text-align: left; 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8TeeJvcBdLA?si=PaEhvr-fIbgmCP-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2010년은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해였다. 갤럭시 S가 출시됐고, 같은 해 등장한 카카오톡은 문자메시지를 대신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가요계에서는 2세대 아이돌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티아라, 2NE1을 비롯한 걸그룹들이 앞다투어 히트곡을 내놓았고, 그해 데뷔한 미스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은 연간차트 1위에 올랐다. 이 시기의 아이돌 음악에는 누구나 기억하고 따라 할 수 있는 포인트 안무가 빠지지 않았다. 〈Bad Girl Good Girl〉 역시 바닥에 다리를 흔들던 안무가 먼저 떠오른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
   <b><span style="font-size: 18px;">2015년 1위곡: Bang Bang Bang – BIGBANG</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2ips2mM7Zqw?si=63TQxQi8-mk53iD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2015년 가요계에서는 빅뱅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빅뱅은 ‘MADE’ 프로젝트를 통해 몇 달에 걸쳐 두 곡씩 신곡을 공개했고, 발표할 때마다 음원차트 상위권을 점령했다. 그 가운데 ‘뱅뱅뱅’이 멜론 연간차트 1위를 기록했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당시 6월 1일에는 빅뱅의 '뱅뱅뱅'이 공개됐고, 이틀 뒤인 6월 3일 엑소의 'LOVE ME RIGHT'이 발매됐다. 두 팀의 신곡이 몇 달간 엎치락뒤치락하던 음원 차트가 기억에 남는다. 스마트폰과 SNS가 일상화되고, 음원 플랫폼을 통해 스트리밍 형식으로 음악을 즐기게 되면서 음원 차트 순위가 매우 중요한 지표로 여겨졌던 시기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
   <b><span style="font-size: 18px;">2020년 1위곡: 아무노래 – ZICO</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UuV2BmJ1p_I?si=_ZXTwMYaI03Hifq0"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2020년은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이다. 팬데믹 시대가 문을 열면서 급격한 디지털화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지코의 ‘아무노래’는 코로나19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전인 1월 13일 발매됐다. 발매 직전 공개된 ‘아무노래 챌린지’는 짧고 기억하기 쉬운 안무를 중심으로 SNS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후 케이팝 산업에서 오프라인 활동이 크게 제한되면서 SNS를 통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챌린지는 필수적인 음악 홍보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지코는 자신이 이정도의 파장을 일으킬 것을 예상했을까? 당시 코로나19가 이 정도로 확산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아마 지코도 챌린지를 만들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을 거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
   <b><span style="font-size: 18px;">2025년 1위곡: Drowning – WOODZ</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iKFuzpX-NA?si=SleXg5rImeWB4qwe"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콘텐츠 과잉 시대에 개인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숏폼과 릴스처럼 짧고 확산력이 강한 콘텐츠를 통해 신곡뿐 아니라 몇 년 전 발표된 음악도 알고리즘을 타면서 역주행 아티스트들이 다수 생겨났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2025년 그 주인공은 우즈의 'Drowning'이었다. 2023년에 발표된 곡이지만 2024년 10월 &lt;불후의 명곡&gt; 국군의 날 특집 무대가 화제가 되면서 밴드 세션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클립 또한 알고리즘을 탔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나만 알던 가수가 언제부터 이런 대형 가수가 되어버린 건지. ‘Drownig’이 차트 상위권을 차지한 것을 처음 봤을 때는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세상의 흐름은 너무 빠르고,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음악은 하나의 청각적 자극에 불과하지만, 장소와 사람, 계절과 감정,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까지 여러 감각이 뒤섞인 복합적인 기억으로 변환된다. 한 곡의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은 어쩌면 그 노래와 함께 지나온 한 시절을 다시 재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left; ">
   <br />
</p>
<p style="text-align: left; ">당신은 어떤가. 이 음악들을 다시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5035032_khrmsxaf.jpg" alt="이하영 (1).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하영]]></dc:creator>
<pubDate>Fri, 25 Sep 2026 03:51:1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7</guid>
<title><![CDATA[[리뷰] 그림이 작품이 되는 기준 -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7</link>
<description><![CDATA[미술이 작품이 된다는 말은 어쩌면, 돈이 된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을 수도 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div>
      <p>
            세상에 그림은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그림들이 다 작품은 아니다. 보기에 그리기 쉬워 보여서 이게 왜 작품이냐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고,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p>
      <p>
            &nbsp;
         </p>
      <p>
             '왜 어떤 그림은 작품이 되고 또 다른 그림은 작품이 되지 못하는 걸까?' 미술관이나 전시회장을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궁금했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p>
      <p>&nbsp;</p>
      <p>
            책 &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는 미술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시장의 원리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많은 미술사 책에서 시대별로 주요한 의의를 가지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반면, 이 책은 그 작품이 왜 작품이 되었는가에 더 관심을 가진다.
         </p>
      <p>&nbsp;</p>
      <p>
            &nbs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232541_amxqcrnt.jpg" a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표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9px;" /></p>
      <p>
            &nbsp;
         </p>
      <p><br /></p>
      <p>
            저자는 미술 작품이 3번 태어난다고 말한다.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시장에서 두 번째, 그리고 컬렉션이 된 자리에서 세 번째. 이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미술도 경제의 한 부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p>
      <p>&nbsp;</p>
      <p>멀리서 보면 고고하고 우아하기만 한 미술이라는 단어와 경제라는 단어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이 꽃 피기 시작한 르네상스, 다양한 화풍이 탄생한 과거 서양 사회에서 탄생한 수많은 작품의 시작에도 누군가의 의뢰가 있었다는 사실.</p>
      <p>&nbsp;</p>
      <p>
            따라서 책 &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 속에는 실제 미술 시장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현재 미술 시장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등장한 용어들인데, 교양 차원에서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용어들이기도 하다. 다양한 예시와 함께 제시되니 쉽게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미술 생태계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p>
      <p>&nbsp;</p>
      <p>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서울이 국제 미술계에서 뜨거운 시장이라는 것이다. 팬데믹을 거치며, 젊은 컬렉터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열기가 아직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 현장이 궁금해져서, 조금 더 서울 중심으로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삼청동을 마지막으로 간 것이 언제였더라? 공백이 생긴 시간만큼, 동네의 분위기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p>
      <p>&nbsp;</p>
      <p>
            미술이 작품이 된다는 말은 어쩌면, 돈이 된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을 수도 있다. 돈이 된다고 전부 미술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돈이 되면서도 미술사적 가치를 가진 작품이 있다면 대중의 시선은 그 방향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경제적 관점을 너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거래의 규모가 커지면 덩달아 시장도 커지고, 시장이 커지면 미술계에도 훈훈한 바람이 불게 될 테니까.
         </p>
      <p>
            &nbsp;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232606_ttdhtvzc.jpg" alt="anita-jankovic-cP0mQMhdlOE-unsplash.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nbsp;
         </p>
      <p><br /></p>
      <p>
            심지어 컬렉터가 작품의 가치를 더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실제 경매 시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 소유자가 누구냐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컬렉터 본인의 안목이 감춰 있었던 작품의 가치를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하게 되는 스타 작가들도 있다고 하니, 컬렉팅의 영역 또한 분명 미술계에서 중요한 존재이다.</p>
      <p>&nbsp;</p>
      <p>
            여태까지는 단순히 감상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었다면, 좀 더 넓고 큰 시각으로 작품을 발굴하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시장이 선호하는 그림은 무엇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미술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바라보며 그 흐름이 실제 개최되는 전시와는 또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p>
      <p>&nbsp;</p>
      <p>
            그 연습이 밑거름이 된다면, 나도 작품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컬렉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p>
      <p>&nbsp;</p>
      <p>진짜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그보다 멋진 소비는 없겠지.
         </p>
      <p>&nbsp;</p>
      <p>&nbsp;</p>
      </div>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규리]]></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23:26:2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40</guid>
<title><![CDATA[[Opinion] 담백하게, 이모저모 뜯어보기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40</link>
<description><![CDATA[미술사적 의미나 기존의 해석을 따라 작품을 규정하기보다, 눈앞의 색과 붓질, 재료의 흔적을 직접 살펴보며 윤형근의 화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고 다시 물러나는 과정을 통해, 추상회화를 이해하는 일은 정해진 답을 찾는 것보다 작품을 오래 바라보는 경험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5602_tsusbdsy.jpg" alt="IMG_3623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nbsp;</p>
<p>&nbsp;</p>
<p>한국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가 PKM갤러리에서 열린다. 작가가 실제로 살고 작업했던 서교동 자택 ‘윤형근의 집’이 2026년 9월 처음 대중에 공개된 것을 기념해 마련된 전시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주요 회화와 한지 작업 등 30여 점을 통해 윤형근의 화면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처음 마주쳤을 때</b></span>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전시장에 들어서면 화면 전체를 가르는 색면이 가장 먼저 시야를 채운다. 밝은 색과 짙은 색이 나뉘고, 그 사이의 여백이 화면의 분위기를 잡는다. 처음에는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뿐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엄버가 가장 눈에 띄고, 울트라마린이 쓰인 작품도 군데군데 보인다. 두 색이 겹친 자리에서는 먹빛이 돈다. 윤형근은 울트라마린을 하늘에, 엄버를 땅에 대응시켜 '천지문(天地門)'이라 불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0710_fwkyeteq.jpg" alt="IMG_36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86px;" />
</p>
<p>&nbsp;</p>
<p>&nbsp;</p>
<p>들어선 전시장은 편안한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낡은 지도와 색이 바랜 책 표지의 빛깔과 닮은 색이었다. 밀색과 엄버 계열은 평소에도 눈이 가는 색이지만, 이 작품들의 색에는 그와 별개로 오래된 것에서 연상되는 안정감이 배어 있었다. 거친 천의 질감까지 더해져, 오래된 문서의 글자를 크게 확대해 걸어 둔 것처럼 보였다.</p>
<p>&nbsp;</p>
<p>어쩌면 그 색감은 물감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화면에 사용된 천의 질감과 색, 물성이 재료와 함께 어우러져 보인다. 어쩌면 화면의 색은 조색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탕에서부터 올라온 색에 가까웠다.</p>
<p>&nbsp;</p>
<p>이 첫인상을 '좋다'는 말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준을 하나 정했다. 의미를 미리 붙이지 않고, 작품에서 확인되는 것만 본다. 담백하게 보기로 했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가까이에서</b></span>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몇 걸음 다가서자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났다. 시원하게 뻗은 붓질 사이에 작고 검은 물방울 같은 점이 튀어 있었다. 캔버스 앞면에서 옆면으로 발길을 돌리니 물감이 번져 스며든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5713_klreykts.jpg" alt="IMG_362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몇 걸음 다가서 보니 화면은 단순한 하나의 색면이 아니었다. 짙은 색면 사이에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번짐이 있었고, 수직으로 뻗은 선 사이로는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간 자국이 보였다. 이 자국들은 색면과 따로 놓여 화면의 규칙을 살짝 비껴나 있었다.</p>
<p>&nbsp;</p>
<p>번짐의 정도와 방향은 작품마다 달랐다. 특히 짙은 엄버와 밀색 사이의 미세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색면이지만 그래픽처럼 딱 떨어지지 않았고, 색의 농도와 번짐의 차이만으로 화면 안에 볼거리가 여러 겹 생겨 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5729_gupmawpz.jpg" alt="IMG_3617.JPG" style="width: 700px; height: 541px;" />
</p>
<p>&nbsp;</p>
<p>&nbsp;</p>
<p>짙은 색의 수직 면은 절벽과 겹쳐 보인다. 검은 면 넷이 화면 아래에서 솟아 좌우로 두 면씩 짝을 이루고, 바깥쪽 면은 캔버스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있다. 왼쪽 두 면은 오른쪽보다 한 단 높은 자리에서 끝났고, 그 사이로 밀색 바탕이 넓게 비어 있다. 높이가 다른 두 벼랑이 골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모양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5812_hivtqcpa.jpg" alt="IMG_36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10px;" />
</p>
<p>&nbsp;</p>
<p>&nbsp;</p>
<p>다른 작품에는 울트라마린과 엄버, 밀색빛의 배경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화면 앞에서는 파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모래 위를 덮으며 들이치는 파도처럼 여러 색이 포개진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파랑이 어디서 끝나고 엄버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선으로 짚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p>
<p>&nbsp;</p>
<p>파도에는 짙은 파랑과 옅은 파랑, 거품이 섞인 색, 모래와 만나 초록빛을 띠는 색이 함께 있다. 파도가 한 번 지나간 모래에는 젖은 자국이 남는다. 이 작품의 색도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스며들고 겹치며 하나의 장면을 이루었다. 파랑 위로 엄버가 비치는 자리에서는 색이 한 톤 가라앉았고, 밀색과 맞닿는 자리에서는 파랑이 옅게 풀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5822_wgxvaxaa.jpg" alt="IMG_36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이 획과 번짐은 윤형근이 물감을 묽게 희석해 여러 겹 덧칠하는 방식과 이어진다. 묽은 물감은 천의 섬유 속으로 스며들고, 색과 색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캔버스 옆면까지 남은 자국, 방향이 제각각인 번짐, 같은 엄버 안의 농담 차이도 모두 이 과정에서 나온 결과다. 물감이 묽을수록 천은 더 깊이 머금고, 덧칠이 쌓일수록 색은 층을 이룬다. 작가가 정하는 것은 물감의 농도와 덧칠의 횟수이고, 물감이 천의 결을 따라 어디까지 퍼질지는 천이 정한다. 화면에 남은 흔적이 완전한 통제의 결과도, 단순한 우연도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5906_dbkbzpsl.jpg" alt="IMG_3624.JPG" style="width: 700px; height: 772px;" />
</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다시 멀어졌을 때</b></span>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그렇게 한참 가까이에서 살펴본 뒤 다시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에서는 선과 점, 붓질과 번짐으로 나뉘어 보였던 것들이 다시 하나의 색면으로 돌아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0121_plbkmzlq.jpg" alt="IMG_36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43px;" />
</p>
<p>&nbsp;</p>
<p>&nbsp;</p>
<p>처음에는 단순한 색면이던 화면이 가까이서는 수많은 흔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대로, 점과 번짐, 붓질 사이의 결은 멀리서 색면의 농담으로 읽혔다. 가까이서는 낱낱이 흩어져 보이던 것이 물러서면 한데 모였고, 다시 다가서면 낱낱으로 풀어졌다.</p>
<p>&nbsp;</p>
<p>절벽을 보던 눈이 파도로 옮겨 갔고, 오래된 문서를 보던 눈은 다시 색과 재료의 관계로 돌아왔다. 절벽이라 하기에는 가장자리가 번져 있었고, 파도라 하기에는 면이 곧게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화면이 다 설명되지 않아, 무엇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화면 앞을 오가며 계속 살폈다. 한 걸음 다가서면 붓질의 결이 보였고, 한 걸음 물러서면 색면의 무게가 돌아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0108_oqwmmqqv.jpg" alt="IMG_3636.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나가며</b></span>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그동안 추상회화와 단색화 앞에서는 작품의 의미와 미술사적 맥락부터 확인했다. 이미 정리된 설명을 따라가며 작품을 이해하려 했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뒤로 미뤄두었다. 이번에는 규칙을 세웠다. 먼저 색면을 보고, 가까이서 붓질과 번짐을 따라가고, 다시 물러나 작품 전체를 살폈다. 그러자 단순해 보였던 화면에서 물감의 농도와 튄 점, 천에 스며든 자국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p>
<p>&nbsp;</p>
<p>절벽도 파도도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내가 붙여본 이름이었다. 가까이에서는 붓질과 번짐이, 멀리에서는 색면의 무게와 재료의 관계가 드러났다. 하나의 해석으로 화면을 규정하기보다 거리를 바꾸어가며 다시 바라보자,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p>
<p>&nbsp;</p>
<p>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확인하는 일만큼, 눈앞의 것을 직접 살펴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누군가의 해석을 따라 작품을 규정하기 전에 색과 붓질, 재료의 흔적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 그렇게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작품은 설명으로만 알던 대상에서 직접 마주한 대상으로 바뀐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24555_epohiart.jpg" alt="김민주.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민주]]></dc:creator>
<pubDate>Tue, 22 Sep 2026 23:00:2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8</guid>
<title><![CDATA[[Opinion] 형태가 없다는 것은 시작과 끝도 모른다는 것 - 김화진, 사랑의 신 [도서/문학]]]></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8</link>
<description><![CDATA[슬픔 곁에는 왜 항상 사랑이 맴돌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44435_xpizqmex.jpg" alt="20260923235901_b619844a9499.jpg" style="width: 700px; height: 695px;" />
</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의 시간은 대부분 사랑을 하는 데 쓰인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래왔다. 나에게 사랑은 태도이자 습관, 규칙이자 성격, 원칙이자 자랑, 그리고 내 몸집만한, 내 영혼의 크기만한 콤플렉스다. 내 이름은 주희, 신주희이고 별명은 사랑의 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김화진 작가의 &lt;사랑의 신&gt;이라는 단편 소설 속 가장 눈이 갔던 문장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사랑이 콤플렉스라니. 나는 사랑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처음 봤다. 그리고 공감했다. 나에게도 사랑은 콤플렉스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한 번 빠지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물론 이 소설 속 화자는 나처럼 사랑에 목매달며 힘들어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천천히 읽다 보면 왜인지 주희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세계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순간이 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지원과 현우, 솔아 그리고 주희. 무엇이든 해 보기 위해 만난 네 사람은 사실 각각 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사랑.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식 자체 또한 사랑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에.</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사실 사랑은 재능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고, 달리기를 하기 위해 출발선 앞에 선 채로 땅! 소리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시작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선의 초점이 처음에는 사랑에 머물렀다. 끊임없이 주희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솔이와 지원은 묘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주희와 현우 또한 사랑의 경계를 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사랑 뒤에는 슬픔이 있고, 사랑이라는 이유로 넘을 수밖에 없는 마음 같은 것들이 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사랑이라고 표현되기에는 어두운 쓰임 같은 것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걔한테 그런 이유로 죽느니 가족하고 멀어지라고 했어. 나쁜 영향을 받을 바에는 헤어지라고 내가 부추겼거든.</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사랑과 슬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꽤나 묶여있다는 것과 자꾸만 상대에게 개입하게 된다는 것.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슬퍼하기 때문에 막고 싶은 것도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내가 너를 아끼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다 못해 슬퍼하기 때문에 "죽지 마"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듯하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그렇다고 해서 이기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말과 행동들에는 어쨌거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상대방 또한 그 마음에 대해서 모르지 않을 것이니까. 이 이야기들은 주절주절 내가 사랑과 슬픔에 대해 생각하며 내뱉게 된 말들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그럼 요점으로 돌아가서, "슬픔 곁에는 왜 항상 사랑이 맴돌까." 이 질문에 대해서 수없이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무나 사랑할 수 없다. 스스로 가정한 사랑의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아무리 사랑에 쉽게 빠지는 나라고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누구나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 수많은 경계를 뚫고 들어와 나의 사랑을 차지하게 된 사람에게 부가적인 감정-다르게 말하면 슬픔-이 따라 붙지 않을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나는 드라마 내에서도 무조건 사랑만 하는 러브라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은 슬픔과 미움과 후회 같은 부가적인 감정이 더해져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되는 법이니까. 그 세계에서 나 혹은 상대방이 다치더라도, 그렇게 무너져 있는 우리를 사랑이 형태를 바꿔가며 덮칠 것이니까.</p>
<div>&nbsp;</div>
<div>&nbsp;</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수민]]></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23:59:0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60</guid>
<title><![CDATA[[Review] 예술가는 어디에 있을까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60</link>
<description><![CDATA[예술을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center;">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15029_vlihlclw.jpg" alt="메인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젊은 시절 시집 한 권을 낸 뒤 오랫동안 뉴욕의 우체국 직원으로 살아온 에드. 어느 날 그의 앞에 젊은 시인 마이어스가 나타난다. 우연히 에드의 오래된 시집을 발견했다는 그는 에드를 ‘잊혀진 천재 시인’처럼 칭송하며 자신이 속한 예술가 모임으로 초대한다. 그렇게 과거 시인 시절의 자신을 거의 잊고 살아가던 에드는 뒤늦게 찾아온 찬사 속에서 다시 한번 ‘시인 에드’가 된다.</p>
<p>&nbsp;</p>
<p>에드를 환영하는 예술가 집단, '열정의 사회'는 극작가, 시인, 배우, 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예술가 집단이다. 현대 대중문화를 비판하며 고전 예술 작품들을 찬양하는 이들의 모습은 얼핏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모임 같기도 하다. 대부분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먹고사는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들은 세속적인 삶을 못마땅해하고, 숏폼과 소셜미디어에 빠진 세상을 비판하며 자신들은 그와 다른 예술을 추구한다고 말한다.</p>
<p>&nbsp;</p>
<p>그런데 보다 보면 그 모습이 묘하게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적인 걱정에서는 한발 떨어져 있으면서 세속적인 삶을 쉽게 비판하고, 정작 자신들 역시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평판 하나에 들뜨거나 예민해진다.&nbsp;세상과 거리를 두고 예술만을 좇는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자신들이 비판하는 세상 안에서 인정받고 세속적인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20533_eedkrqbs.jpg" alt="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2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모임이 자신을 대단한 시인이라 추켜세우니 에드 역시 조금씩 들뜨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자신의 시를 알아봐 주고,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삶은 꽤나 즐거웠다.</p>
<p>&nbsp;</p>
<p>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에드도 점점 그 찬사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오랫동안 곁에서 일상을 함께해온 친구들을 이전과 다르게 대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때 시인이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시를 쓰는 일보다 누군가에게 ‘예술가’로 인정받는 일에 더 마음이 들뜬 것처럼 느껴졌다.</p>
<p>&nbsp;</p>
<p>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 오히려 이 모임에서 가장 예술가처럼 느껴졌던 사람은 유일한 여성 멤버이자 배우인 글로리아였다. 모임의 구성원들은 영화 내내 글로리아를 은근히 무시하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예술을 직접 보여주는 사람은 글로리아였다. 작은 바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마지막 발표회에서 긴 독백을 이어갈 때도 글로리아는 자신의 무대에 사람들이 몰입하게 만든다.</p>
<p>&nbsp;</p>
<p>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무엇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가볍게 바라보던 글로리아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21533_yeiihtqr.jpg" alt="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영화 후반부, 에드에게 향했던 찬사의 실체가 드러난다. 마이어스가 대단한 시인이라고 하니 함께 에드를 칭송했지만, 정작 그의 시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없었다. 온갖 고전 시인들과 에드를 견주며 쏟아냈던 찬사들. 영화 초반 그렇게나 대단하게 들렸던 말들이 한순간에 공허해지는 순간이었다.</p>
<p>&nbsp;</p>
<p>그 사실을 알게 된 에드는 잠시 들떴던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시끌벅적한 젊은이들과의 모임을 뒤로하고 고요한 우체국으로. 그리고 발표회에서 자신을 예술가로 치켜세워주던 화환을 친구에게 씌워주며 시를 읊는다. 오히려 친구와 장난을 치듯 시를 읊는 짧은 이 순간이, 앞서 예술가 모임에서 보았던 어떤 작품보다도 더 예술적으로 느껴졌다.</p>
<p>&nbsp;</p>
<p>어쩌면 그동안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느라, 정작 평범한 일상 속의 예술적인 순간들을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23853_oensuidx.jpg" alt="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4px;" />
</p>
<p>&nbsp;</p>
<p>&nbsp;</p>
<p>&lt;나의 사적인 예술가&gt;를 보고 나니 결국 ‘예술가란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예술을 말하는 사람과 실제로 예술을 하는 사람,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그저 좋아서 무언가를 하는 마음. 그 사이를 오가는 인물들을 영화는 때론 유쾌하게, 때론 씁쓸하게 담았다.</p>
<p>
   <br />
</p>
<p>윌렘 대포와 그레타 리의 연기는 물론이고, 영화가 담아낸 오래된 가게와 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뉴욕의 풍경들도 인상적이다. 화려한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던 영화.</p>
<p>&nbsp;</p>
<p>예술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고 싶다면 &lt;나의 사적인 예술가&gt;를 추천하고 싶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선민]]></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02:45:4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9</guid>
<title><![CDATA[[Review] 회피했던 과거를 추모하며 - 영화 &#039;알파&#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9</link>
<description><![CDATA[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에이즈 파동]]></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05158_ilfittlb.jpg" alt="티저 포스터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p>
<p>&nbsp;</p>
<p>&nbsp;</p>
<p>&lt;알파&gt;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평가가 나뉘었던 영화이다. 이는 단순히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기괴함과 시각적 충격 때문은 아니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이 나타내려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느낀 결과이다.</p>
<p>&nbsp;</p>
<p>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충격은 두 겹으로 쌓여 있다. 첫 번째 충격은 시각적 충격이다. 영화를 처음 보면 바로 보이는 것들이다. 대리석으로 변하는 질병, 붉은 모래로 표현되는 병자들의 피와 병에 걸린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흐르는 피, 불결한 피의 찐득한 심상.</p>
<p>&nbsp;</p>
<p>하지만, 이 영화는 줄리아 뒤쿠르노의 영화다. 그는 첫 장편 데뷔작인 &lt;로우&gt;부터 카니발리즘을 다루며 페미니즘과 바디 호러를 결합한 스타일로 주목받았고, 다시 &lt;티탄&gt;을 통해 바디 호러의 신예로 떠올랐다. 두 번의 작품만으로 이런 주목을 받은 스타성으로, 사람들은 당연히 시각적 충격을 예상했을 것이다.</p>
<p>&nbsp;</p>
<p>두 번째 충격은 바로 영화가 예상만큼 기괴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독의 전작들을 비교하였을 때 '소프트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영화에서 주사 바늘이 살에 들어가는 장면 등 바디 호러를 일으킬 만한 장면을 일부러 강조하지 않고 최대한 간접적으로 보이려 노력했다고 했다. 바로 여기서 &lt;알파&gt;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p>
<p>&nbsp;</p>
<p>이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감상하였을 때 더욱 매력적인 영화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05240_sutfmurl.jpg" alt="4.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p>
<p>&nbsp;</p>
<p>&nbsp;</p>
<p>&lt;알파&gt;는 어렵고 모호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단순한 영화다.</p>
<p>&nbsp;</p>
<p>알파는 13세 소녀로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의도치 않게 비위생적인 바늘로' 타투를 받게 된다. 문제는 알파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시기이고, 알파가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수 있다는 오해에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이 시작된다.</p>
<p>&nbsp;</p>
<p>한편, 의사인 엄마와 함께 사는 알파는 갑자기 나타난 - 사실은 어렸을 때 보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 삼촌 아민의 존재에 낯설어한다. 아민은 약물 중독자로, 알파와 같이 비위생적인 바늘을 사용해 병에 걸리게 되었다. 엄마는 알파 역시 감염되었을까 전전긍긍하지만, 알파는 삼촌과 엄마의 관계를 지켜보며 가족의 혼란을 조용히 함께한다.</p>
<p>&nbsp;</p>
<p>너무나도 노골적으로 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의 에이즈 파동을 은유하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감염병, 주사 또는 성적 접촉으로 인한 감염, 전염 공포, 여기에 더해 'A'를 새기는 문신까지 더하면 질병과 낙인으로 얼룩진 지난 에이즈 시기를 떠올릴 수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4005306_kkoygnax.jpg" alt="7.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p>
<p>&nbsp;</p>
<p>&nbsp;</p>
<p>실제로 감독은 청소년기에 에이즈 파동을 지켜보며 자란 세대이다. 따라서 &lt;알파&gt;에서 알파가 겪는 혼란은 감독이 겪었을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p>
<p>&nbsp;</p>
<p>그래서 이 영화는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퀀스가 다루는 시점도 다르고, 정확한 병의 원인이랄지, 스토리를 명확히 진전시킬 만한 단서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혼란을 느꼈던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비슷하다.</p>
<p>&nbsp;</p>
<p>영화는  명확하게 질병에 감염된 사람들에 대한 차별에 징벌을 주거나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보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을, 소녀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잊힌 혼란(에이즈)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p>
<p>&nbsp;</p>
<p>알파의 시선으로 엄마가 느끼는 두려움과 가족애를 바라본다면, 영화는 조금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류나윤]]></dc:creator>
<pubDate>Thu, 24 Sep 2026 00:53:4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7</guid>
<title><![CDATA[[Opinion] 애신, 그리고 양화 -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예능]]]></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7</link>
<description><![CDATA[애신을 사랑한 동매, 히나와는 어떤 마음이었는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235551_ralmrlfe.png" alt="바닷가.png" style="width: 700px; height: 398px;" />
</p>
<p>&nbsp;</p>
<p>&nbsp;</p>
<p>폭탄이 터진 호텔에서 빠져나온 쿠도 히나를 구동매가 업고 걷는다.</p>
<p>&nbsp;</p>
<p>히나는 동매가 고애신을 사랑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동매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고 말한다. 얼마 뒤 히나가 숨을 거두자 동매는 그를 ‘양화야’라고 부른다. 애신을 사랑한 동매가 히나의 마지막을 지키는 이 장면을 보고 나면, 두 사람의 관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려워진다.</p>
<p>&nbsp;</p>
<p>작중 동매가 애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그 마음을 어릴적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 대한 동경으로만 본다면, 동매가 애신에게 건넨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이라는 말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p>
<p>&nbsp;</p>
<p>애신은 쫓기던 동매를 가마에 태워 살려주었지만, 동매는 여전히 백정의 아들이고, 애신은 양반집 여식이었다. 동매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애신에게 느낀 고마움과 더불어 멸시받는 본인의 처지에 대한 분노가 함께 묻어 있는 것이다. 애신은 그에게 은인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p>
<p>&nbsp;</p>
<p>마지막으로 만난 애신은 어린 동매가 내뱉은 말이 자신을 오래 괴롭혔다고 고백한다. 동매는 애신이 그 말을 아주 잊었기를 바라면서도 그토록 아팠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게라도 자신이 애신의 삶에 한순간이라도 가졌다면 만족한다는 듯한 마음을 보인다. 애신이 괴롭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했다는 사실에는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p>
<p>&nbsp;</p>
<p>동매가 스스로를 ‘안 될 놈’이라 부르는 건 그 위안이 애신의 아픔에서 왔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235534_gksdwcxq.png" alt="대표이미지.pn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히나와 동매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p>
<p>&nbsp;</p>
<p>히나는 동매에게 아버지에게 뺏긴 자신의 본명이 ‘이양화’라고 알려준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동매 앞에서 무너져 울었을 때, 동매는 마음을 다해 히나를 위로한다. 히나에게 동매는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슬픔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p>
<p>&nbsp;</p>
<p>그러나 둘 사이의 그 가까움이 동매의 연정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p>
<p>&nbsp;</p>
<p>히나의 마음은 동매를 오랜 시간 기다려왔다는 마지막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동매의 마음 또한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은 작중에 등장하지 않는다. 둘을 서로 사랑한 연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단순한 우정이라고 말하기에도 이들 관계의 농도는 너무나 짙었다.</p>
<p>&nbsp;</p>
<p>동매가 누구에게 연정을 품었는가를 묻는다면 답은 애신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히나는 동매를 마음을 다해 아꼈고, 동매 역시 히나를 진심으로 위했다.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주고받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p>
<p>&nbsp;</p>
<p>그러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없더라도,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던 그 관계에는 분명히 사랑이 존재했을 것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오가영]]></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23:58:5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5</guid>
<title><![CDATA[생명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2.php?no=82555</link>
<description><![CDATA[
   생명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


   2026년, 다시 보는 〈염쟁이 유씨〉


   

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의 손이 해야 할 일이 남는다.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마지막 모습을 정돈한 뒤 관에 모신다. 염은 죽은 사람을 보내는 절차이지만, 그 일을 하는 쪽은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이다. 〈염쟁이 유씨〉는 평생 그 일을 해온 사람을 무대 한가운데 세운다.

   

유씨는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죽음에 관한 말을 늘어놓기에 이보다 적당한 인물도 없을 듯하지만, 정작 그가 오래 이야기하는 것은 산 사람들이다. 염을 하며 만난 이들과 죽음 앞에서 드러난 욕심과 후회, 떠난 사람을 대하는 남은 사람들의 태도가 그의 입을 통해 하나씩 무대로 돌아온다.

   

배우는 한 명이다. 그렇다고 무대까지 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유씨를 취재하는 기자가 나타나고 선친과 아들 상식, 조폭과 장사치가 한 배우의 몸을 빌려 차례로 등장한다. 별도의 배우가 들어오고 나가는 대신 한 사람 안에서 인물이 바뀌면서 장면도 함께 전환된다. 모노드라마에서 배우의 몸은 한 인물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여러 인물이 드나드는 무대가 된다.

   

배우 유순웅이 혼자 여러 인물을 맡는다는 사실만으로 이 공연의 특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염쟁이 유씨〉는 1인극이면서 마당극의 성격을 품고 있다. 배우가 무대 안에서 혼자 완결된 세계를 만드는 대신 객석에 말을 건네고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어느 순간 관객은 망자의 자식이 되고 장례에 모인 사람이 된다. 조금 전까지 남의 죽음을 바라보던 사람이 그 죽음 안에 자리를 하나 얻는다.

   

죽음을 다루는 무대라고 해서 웃음이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욕심은 우스꽝스럽게 드러나고 유씨의 입담 사이로 해학이 스민다. 웃다가 죽음을 만나고, 죽음을 들여다보다 다시 웃는다. 장례의 엄숙함과 사람 사는 소란이 같은 무대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공연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오래 남는 것은 죽음에 관한 말만이 아니다. 유씨가 평생 해온 일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염은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산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한다. 몸을 씻고 수의를 입혀 관에 모시는 데는 정해진 순서와 시간이 필요하다. 배우가 그 행위를 무대에 가져오면서 죽음은 관념에서 빠져나와 사람이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
그 일을 해온 사람이 아들에게 말한다.

   


   “상식아, 죽는다는 건 말이다. 생명이 끝나는 거지.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거든.”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는 할 일이 남는다. 그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함께 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하지 못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린다. 염이 한 사람의 몸을 정돈하는 시간이라면 그 곁에 선 사람에게는 쉽게 정돈되지 않는 시간이 시작된다.

   

〈염쟁이 유씨〉가 처음 무대에 오른 뒤 20년이 넘었다. 그사이 죽음을 둘러싼 풍경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멀어지는 방식도 달라졌다.

   

휴대전화에는 오래 연락하지 않은 사람의 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만나지 않고도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고, 몇 년째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의 오늘을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진과 영상, 주고받은 문장과 계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이 많아진 시대다. 기록이 오래 남는 것과 관계가 오래 남는 것은 같은 일일까.

   

〈염쟁이 유씨〉의 염은 이 질문과 묘하게 마주 선다. 디지털 공간에는 한 사람의 흔적을 저장할 수 있지만 염을 하려면 한 사람의 몸 앞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그 곁에 머물러 자신의 시간을 써야 한다. 몸과 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돌봄에는 저장하거나 복제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사회적 고립과 홀로 맞는 죽음이 개인만의 문제로 남지 않게 된 지금, 이 오래된 염쟁이의 노동도 달리 보인다.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 누구와 연결되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닿는다. 20여 년 전의 작품이 오늘의 현실을 예견해서가 아니다. 현실이 달라지면서 같은 무대에서 이전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유씨는 죽음 앞에 선 산 사람을 유심히 본다.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거여. 가슴속에 안아 담느냐, 그냥 구경거리로 삼느냐.”


   

우리는 이제 하루에도 여러 사람의 죽음을 화면으로 만난다. 사고와 재난, 전쟁과 범죄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읽고 영상을 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한 번 움직여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모든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며 살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타인의 죽음을 보는 일과 그 죽음 곁에 있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는 남는다.
〈염쟁이 유씨〉는 그 차이를 객석에서 직접 건드린다. 관객을 극 안으로 불러 망자의 가족 자리에 세우면 구경하던 사람에게 역할 하나가 생긴다. 화면은 닫을 수 있고 페이지는 넘길 수 있지만,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배우와 마주한 관객은 잠시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오래된 마당극의 관객 참여가 여기서는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를 바꾸는 장치가 된다.

   

염이라는 노동도 지금 다시 눈에 들어온다. 속도와 효율을 생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시대에도 돌봄에는 쉽게 줄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의 마지막 몸을 정돈하는 일 역시 얼마나 빨리 끝냈느냐만으로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떠난 사람에게 일정한 시간과 절차를 내어주는 것, 유씨가 평생 반복해온 노동에는 그런 시간이 들어 있다.

   

죽음은 아직 자신의 일과 멀다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은 훨씬 일찍 찾아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옮기고 살던 곳을 떠나는 사이, 매일 만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생활에서 보이지 않는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짧은 통화 한 번으로 부모의 시간을 짐작하는 날도 생긴다.
연락처에는 남아 있는데 생활에서는 사라진 사람들.
유씨가 말하는 ‘관계’는 그런 이름들까지 돌아보게 한다.

   


   “죽는 거 무서워하들 마시게. 잘 사는 게 더 힘들구 더 어려운 법이여.”


   

잘 사는 법이 무엇인지 유씨가 목록을 만들어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곁에서 산 사람들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 이 말을 남길 뿐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에도 대사는 무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관객은 객석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간다. 극장 밖에서 휴대전화를 켜면 밀린 메시지가 떠 있을 것이다. 들어오기 전과 같은 화면이고 같은 연락처다.
그중에는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사람의 이름도 있을 것이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b>생명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b>
</p>
<p>
   <b>2026년, 다시 보는 〈염쟁이 유씨〉</b>
</p>
<p>
   <b><br /></b>
</p>
<p>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의 손이 해야 할 일이 남는다.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마지막 모습을 정돈한 뒤 관에 모신다. 염은 죽은 사람을 보내는 절차이지만, 그 일을 하는 쪽은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이다. 〈염쟁이 유씨〉는 평생 그 일을 해온 사람을 무대 한가운데 세운다.</p>
<p>
   <br />
</p>
<p>유씨는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죽음에 관한 말을 늘어놓기에 이보다 적당한 인물도 없을 듯하지만, 정작 그가 오래 이야기하는 것은 산 사람들이다. 염을 하며 만난 이들과 죽음 앞에서 드러난 욕심과 후회, 떠난 사람을 대하는 남은 사람들의 태도가 그의 입을 통해 하나씩 무대로 돌아온다.</p>
<p>
   <br />
</p>
<p>배우는 한 명이다. 그렇다고 무대까지 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유씨를 취재하는 기자가 나타나고 선친과 아들 상식, 조폭과 장사치가 한 배우의 몸을 빌려 차례로 등장한다. 별도의 배우가 들어오고 나가는 대신 한 사람 안에서 인물이 바뀌면서 장면도 함께 전환된다. 모노드라마에서 배우의 몸은 한 인물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여러 인물이 드나드는 무대가 된다.</p>
<p>
   <br />
</p>
<p>배우 유순웅이 혼자 여러 인물을 맡는다는 사실만으로 이 공연의 특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염쟁이 유씨〉는 1인극이면서 마당극의 성격을 품고 있다. 배우가 무대 안에서 혼자 완결된 세계를 만드는 대신 객석에 말을 건네고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어느 순간 관객은 망자의 자식이 되고 장례에 모인 사람이 된다. 조금 전까지 남의 죽음을 바라보던 사람이 그 죽음 안에 자리를 하나 얻는다.</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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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죽음을 다루는 무대라고 해서 웃음이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욕심은 우스꽝스럽게 드러나고 유씨의 입담 사이로 해학이 스민다. 웃다가 죽음을 만나고, 죽음을 들여다보다 다시 웃는다. 장례의 엄숙함과 사람 사는 소란이 같은 무대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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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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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공연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오래 남는 것은 죽음에 관한 말만이 아니다. 유씨가 평생 해온 일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염은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산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한다. 몸을 씻고 수의를 입혀 관에 모시는 데는 정해진 순서와 시간이 필요하다. 배우가 그 행위를 무대에 가져오면서 죽음은 관념에서 빠져나와 사람이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p>
<p>그 일을 해온 사람이 아들에게 말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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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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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상식아, 죽는다는 건 말이다. 생명이 끝나는 거지.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거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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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는 할 일이 남는다. 그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함께 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하지 못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린다. 염이 한 사람의 몸을 정돈하는 시간이라면 그 곁에 선 사람에게는 쉽게 정돈되지 않는 시간이 시작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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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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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염쟁이 유씨〉가 처음 무대에 오른 뒤 20년이 넘었다. 그사이 죽음을 둘러싼 풍경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멀어지는 방식도 달라졌다.</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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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휴대전화에는 오래 연락하지 않은 사람의 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만나지 않고도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고, 몇 년째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의 오늘을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진과 영상, 주고받은 문장과 계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이 많아진 시대다. 기록이 오래 남는 것과 관계가 오래 남는 것은 같은 일일까.</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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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염쟁이 유씨〉의 염은 이 질문과 묘하게 마주 선다. 디지털 공간에는 한 사람의 흔적을 저장할 수 있지만 염을 하려면 한 사람의 몸 앞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그 곁에 머물러 자신의 시간을 써야 한다. 몸과 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돌봄에는 저장하거나 복제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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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회적 고립과 홀로 맞는 죽음이 개인만의 문제로 남지 않게 된 지금, 이 오래된 염쟁이의 노동도 달리 보인다.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 누구와 연결되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닿는다. 20여 년 전의 작품이 오늘의 현실을 예견해서가 아니다. 현실이 달라지면서 같은 무대에서 이전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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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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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유씨는 죽음 앞에 선 산 사람을 유심히 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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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거여. 가슴속에 안아 담느냐, 그냥 구경거리로 삼느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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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p>
<p>우리는 이제 하루에도 여러 사람의 죽음을 화면으로 만난다. 사고와 재난, 전쟁과 범죄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읽고 영상을 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한 번 움직여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모든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며 살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타인의 죽음을 보는 일과 그 죽음 곁에 있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는 남는다.</p>
<p>〈염쟁이 유씨〉는 그 차이를 객석에서 직접 건드린다. 관객을 극 안으로 불러 망자의 가족 자리에 세우면 구경하던 사람에게 역할 하나가 생긴다. 화면은 닫을 수 있고 페이지는 넘길 수 있지만,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배우와 마주한 관객은 잠시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오래된 마당극의 관객 참여가 여기서는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를 바꾸는 장치가 된다.</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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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염이라는 노동도 지금 다시 눈에 들어온다. 속도와 효율을 생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시대에도 돌봄에는 쉽게 줄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의 마지막 몸을 정돈하는 일 역시 얼마나 빨리 끝냈느냐만으로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떠난 사람에게 일정한 시간과 절차를 내어주는 것, 유씨가 평생 반복해온 노동에는 그런 시간이 들어 있다.</p>
<p>
   <br />
</p>
<p>죽음은 아직 자신의 일과 멀다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은 훨씬 일찍 찾아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옮기고 살던 곳을 떠나는 사이, 매일 만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생활에서 보이지 않는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짧은 통화 한 번으로 부모의 시간을 짐작하는 날도 생긴다.</p>
<p>연락처에는 남아 있는데 생활에서는 사라진 사람들.</p>
<p>유씨가 말하는 ‘관계’는 그런 이름들까지 돌아보게 한다.</p>
<p>
   <br />
</p>
<p>
   <b>“죽는 거 무서워하들 마시게. 잘 사는 게 더 힘들구 더 어려운 법이여.”</b>
</p>
<p>
   <br />
</p>
<p>잘 사는 법이 무엇인지 유씨가 목록을 만들어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곁에서 산 사람들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 이 말을 남길 뿐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에도 대사는 무대에만 머물지 않는다.</p>
<p>
   <br />
</p>
<p>관객은 객석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간다. 극장 밖에서 휴대전화를 켜면 밀린 메시지가 떠 있을 것이다. 들어오기 전과 같은 화면이고 같은 연락처다.</p>
<p>그중에는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사람의 이름도 있을 것이다.</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직접 등록 - 박명관]]></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23:43:5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44</guid>
<title><![CDATA[[Opinion] 목적없는 하루를 살아보기가 목표 [문화 전반]]]></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44</link>
<description><![CDATA[오히려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이 다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요즘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자꾸 이유를 붙이고 계획을 하게 된다.</p>
<p>&nbsp;</p>
<p>사실 계획하는 걸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야 할 일들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취업을 준비해야 하고, 복학도 했고, 자취도 시작했다. 평일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다음 주에 먹을 도시락을 만들어둔다. 그 사이에 자소서도 쓰고 자격증도 준비해야 한다. 원래부터 이런 삶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해내며 지내고 있다. 운동을 하면 건강을 위한 휴식이고, 책을 읽으면 마음을 채우는 시간이며, 여행을 다녀오면 새로운 경험을 쌓는 시간이 된다.</p>
<p>&nbsp;</p>
<p>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고 하면 왠지 시간을 낭비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뭐 했어?’라는 질문에 특별히 대답할 것이 없으면 괜히 하루를 잘 보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모든 시간에는 무언가를 해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할까. 나도 한동안은 쉬는 날에도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지금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처리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취업 준비를 위해 자소서를 쓰고 자격증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고, 평일에 출근하고 나면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이나 다음 주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할 일을 하나씩 해내다 보면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생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211204_pabsntbd.jpg" alt="KakaoTalk_20260923_211057656.jpg" style="width: 700px; height: 685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예전에는 그런 날이면 자연을 보며 산책을 하거나 아침 9시에 자유수영을 갔다. 한 시간 동안 물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운동을 끝내고 씻고 나오면 몸도 개운하고 붓기도 빠져 있었고, 그제야 오늘 점심은 뭘 먹을지 고민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한 시간이 나에게는 꽤 괜찮은 휴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싶은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진다.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생각나고, 괜히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지 고민하게 된다. 결국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쉬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몇 시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오늘은 그냥 유튜브나 봐야지,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목적 없는 하루를 보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쉬는 것인데, 그 쉬는 방법마저 내가 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니.</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205841_ccxsvzvq.jpg" alt="KakaoTalk_20260923_205711334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6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a0a0a0; text-align: left;">귀여운 나의 반려 도마뱀 오곡이</span></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반려 도마뱀 오곡이에게 밥을 주고 한참 구경하기도 한다. 예전처럼 일부러 카페를 찾아가거나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만큼 가만히 있어본다. 나는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쉬는 것까지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p>
<p>&nbsp;</p>
<p>우리는 무언가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이 배우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쉬는 날에도 괜히 생산적인 일을 찾고, 여행을 가도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고 하고, 침대에 누워 있어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라는 생각을 한다.</p>
<p>&nbsp;</p>
<p>생각해보면 쉬는 데도 꼭 정답이 있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나에게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도마뱀을 구경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예전처럼 아침에 수영을 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에 실패해도 괜찮은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니까. 물론 취업을 위해 자소서를 쓰고 자격증을 준비하는 삶도 필요하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은 계속 생길 것이고, 나는 아마 또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해낼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도 필요한 과정이니까.</p>
<p>&nbsp;</p>
<p>다만 그 사이에 꼭 쓸모 있는 시간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p>
<p>&nbsp;</p>
<p>푸름 가득한 호수공원에 누워 한량생활을 보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내가, 처음에는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210603_gbgapooa.jpg" alt="KakaoTalk_20260923_21050368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89px;" /></p>
<p>&nbsp;</p>
<p>&nbsp;</p>
<p>하지만 하루 정도 푹 쉰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소서를 하루 덜 쓴다고 갑자기 취업이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공부를 쉬었다고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하루가 당장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하루 덕분에 다음 날 다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까. 오히려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이 다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211900_whbpiksf.jpg" alt="KakaoTalk_20260923_211558764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a0a0a0;">계획 없이 만난 친구가 준 피자설기</span></p>
<p><span style="color: #a0a0a0;">&nbsp;</span></p>
<p><span style="color: #a0a0a0;">&nbsp;</span></p>
<p>그래서 이제는 꼭 완벽하게 쉬려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이 많아도 괜찮고, 쉬는 방법을 고민해도 괜찮고, 결국 쉬는 것마저 계획하게 되더라도 괜찮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완벽한 휴식이 아니라 생각이 많은 나를 잠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내는 방법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는 시간. 아직은 그런 하루가 조금 어렵다.</p>
<p><br /></p>
<p>그래도 적어도 쉬는 것까지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조금 벗어나보고 싶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도 우리에겐 그 자체로 충분히 필요한 시간이니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주하]]></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09:29:4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3</guid>
<title><![CDATA[[PRESS] 이번 법정은 힙합으로 진행됩니다, 뮤지컬 &#039;소크라테스 패러독스&#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3</link>
<description><![CDATA[철학자 &#039;소크라테스&#039;와 고발자 &#039;멜레토스&#039;의 치열한 법정 논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5524_lcpaaheb.gif" alt="26010086_p.gif"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p>
<p><b>&nbsp;</b></p>
<p><b>&nbsp;</b></p>
<p><b>&nbsp;</b></p>
<p><b><span style="font-size: 18px;">힙합으로 재탄생한 고대 법정</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2022년 초연 당시 정형화된 뮤지컬의 틀을 깨고 랩과 힙합 등 다채로운 블랙뮤직 음악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웠던 뮤지컬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는 청년을 선동하고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고발자 '멜레토스'의 치열한 법정 논쟁을 다룬다.</p>
<p><br /></p>
<p>공연은 고대 아테네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현대적인 힙합을 입혀 고전이 지닌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했다. 특히 이번 무대는 단순히 신나는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넘어, 서로 다른 가치관과 신념을 가진 두 인물이 펼치는 긴장감 넘치는 대립 구도를 강렬하게 그려낸다.</p>
<p><br /></p>
<p>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수호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촘촘하고 날카로운 변론과, 공동체의 질서와 대중의 명분을 내세워 압박하는 멜레토스의 도발적인 공격이 무대 위에서 강렬한 비트와 만나며 관객들에게 색다른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각자의 영역에서 완벽한 논리로 부딪히는 두 인물의 팽팽한 디스전은 80분의 인터미션 없는 러닝타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펼쳐지며 무대의 몰입감을 극대화한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작품은 일방적인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무대 위 열기를 객석으로 확장해 관객 스스로가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개인이 추구하는 이상과 공동체가 요구하는 현실적 질서 사이에서 두 인물이 주고받는 불꽃 튀는 랩 배틀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편만 쉽게 들어줄 수 없는 흥미로운 사유의 길로 안내한다.</p>
<p><br /></p>
<p>이처럼 서로 완전히 다른 규칙과 목적을 가진 두 세계관이 무대 위에서 강렬한 비트와 만나며, 관객들은 80분의 인터미션 없는 러닝타임 동안 숨 막히는 긴장감과 장르적 쾌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p>
<p><br /></p>
<p>첫 공연을 찾은 관객들 역시 "배우들과 다 같이 노는 듯한 콘서트장 분위기 속에서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 "치열한 랩 배틀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내가 법정 배심원이 된 듯 몰입해 집중하게 됐다", "고전 철학과 힙합이라는 파격적인 만남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엄청났다" 등 뜨거운 호평을 남겼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5926_igthiqug.jpg" alt="46358_52908_535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손쉬운 이분법을 뒤흔드는 질문</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작품은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가'라는 손쉬운 정답을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 오랜 시간 역사 속에서 정설처럼 여겨졌던 고전의 전제를 뒤흔들며, 관객 스스로가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이 되어 두 인물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도록 유도한다.</p>
<p><br /></p>
<p>영혼의 덕을 강조하는 이상적인 목소리와 공동체의 안정을 주장하는 현실적인 목소리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 관객은 어느 한쪽의 편만 쉽게 들어줄 수 없는 입체적인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무대 위 치열한 랩 배틀을 따라가다 보면 선과 악이라는 미숙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두 가치가 만드는 긴장감을 직면하는 깊이 있는 사유의 유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4년 만에 돌아온 캐스트</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4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번 2026년 시즌은 한층 더 깊어진 캐스팅 라인업으로 개막 전부터 수많은 뮤지컬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에는 배우 정민, 김도빈, 조풍래, 문경초가 무대에 올라 깊이 있는 사유의 무게와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p>
<p>&nbsp;</p>
<p>이에 맞서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고발자 '멜레토스' 역에는 최호승, 황민수, 이종석, 이준우가 출연해 서늘한 카리스마와 폭발적인 랩 스킬로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p>
<p><br /></p>
<p>여기에 김기영, 권오득, 박희태, 배혜진, 이여진, 김예나 등 코러스 배우들의 소울풀한 가창과 에너지 넘치는 안무가 더해져 80분의 무대를 빈틈없이 채운다. 본 공연 기간에는 관객들을 위한 다채로운 현장 이벤트도 마련된다. 배우들의 친필 메시지가 담긴 엽서 증정 이벤트를 비롯해 공연의 여운을 이어갈 수 있는 스페셜 커튼콜 등이 진행되어 관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할 예정이다.</p>
<p><br /></p>
<p>뮤지컬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는 오는 11월 29일(일)까지 NOL 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공연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1610_qnenybpp.jpg" alt="20260422170707_gmsreolz.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유빈]]></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9:16:4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4</guid>
<title><![CDATA[[PRESS] &#034;누가 죄인인가?&#034;, 뮤지컬 &#039;소크라테스 패러독스&#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4</link>
<description><![CDATA[아포리아: 두 인물의 디스전이 향하는 곳]]></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5503_ceioatfn.gif" alt="26010086_p.gif"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
</p>
<p>&nbsp;</p>
<p>&nbsp;</p>
<p>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이 글에 대한 제목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깊이 고민하다가 한국 창작 뮤지컬 &lt;영웅&gt;의 시그니처 가사 "누가 죄인인가"를 가져와 붙여보았다. 이 단 한 문장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뮤지컬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를 관람하는 동안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생각의 과정과, 극이 끝난 후 다다른 최종적인 결론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해 주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p>
<p>
   <br />
</p>
<p>특히 2,500년 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법정을 현대의 가장 치열한 언어 예술인 '힙합'으로 재해석한 이 무대는, 가사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랩 라임과 비트로 맞부딪히며 관객을 자연스럽게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석으로 끌어들인다. 고전 철학의 고리타분한 변론 대신 무대를 가득 채우는 힙합의 파격적인 에너지 속에서, 나는 비로소 "과연 누가 죄인인가"라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되었다.</p>
<p>
   <br />
</p>
<p>쉽게 생각하면 &lt;소크라테스의 변명&gt;이라는 책이 이미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쓰였고, 이 책은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기에, 흔히 우리는 이미 소크라테스 쪽의 변론이 타당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 법정을 바라보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왜냐? 소크라테스는 이미 기나긴 역사의 시간을 거쳐 지성인으로 인정받아 왔으니까. 역사 속에서 다수가 인정한 거면 나도 그 인정의 무리에 편승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더란다.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소크라테스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공인되어 온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실이다.</p>
<p>&nbsp;</p>
<p>엇, 그런데 막상 공연을 보고 나니 이전까지 소크라테스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뒤흔들렸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수호한 선인, 그리고 그를 고발한 멜레토스는 희대의 악인'이라는 이 분명한 편가르기와 이분법이 과연 온당한 평가인가? 그런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현명한 다른 관객 분들도 계셨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를 까내리는 랩 배틀을 잠자코 듣다보면 어느 한편에 표를 행사함으로서 의견을 분명하게 표명하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p>
<p>
   <br />
</p>
<p>그들의 디스전을 듣다보니 드는 생각은 멜레토스는 확실히 현실적이며, 그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상대적으로 이상적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30인의 과두정을 겪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분열되었던 이 국가를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로 조직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것이 부당한 생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p>
<p>&nbsp;</p>
<p>그러나 시장에 들려오는, 더군다나 옳다고 인정되어 온 내용을 사실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검토해 보는 것, 그리고 그 끝에 도출되는 '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자각에서부터 다시 깨달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지난한 과정을 인생의 과제로 삼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든다.</p>
<p>&nbsp;</p>
<p>이렇듯 어느새 내가 배심원이 되기라도 한 것 마냥 그 두 사람의 주장과 근거를 들어보며, 나는 나름 한 단어와 하나의 문장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한 단어는 '아포리아(aporia)'고, 한 문장은 '모든 진리는 부분적이다'는 것이었다. 아포리아란, '무엇이 없다'라는 뜻의 a와 '길/통로'라는 뜻의 poros의 합성어다. 직접적인 의미로는 길이 없기에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이고, 철학사의 맥락에서 이 용어는 두 개의 대립하는 주장이 각각 타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한 쪽의 편조차 들어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4059_vbslqaat.jpeg" alt="550103_582584_3537.jpe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사실 뮤지컬 &lt;소크라테스 패러독스&gt;도, 그리고 이 뮤지컬이 다루고 있는 책 &lt;소크라테스의 변명&gt;에서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바로 '아포리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의 2가지 이유에 근거하는데, 이는 우연히도 내가 이 뮤지컬의 제목을 보다가 든 궁금함에서 기인한다.</p>
<p>
   <br />
</p>
<p>여기서 패러독스라는 말과 아포리아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수 있는데,&nbsp; 둘은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강조점이 다르다. 패러독스는 '엉켜 있는 상황/논리 자체'인 것과 달리, 아포리아는 '그 상황/논리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가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p>
<p>
   <br />
</p>
<p>첫째,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는 소크라테스'의' 패러독스(Socratic Paradox)를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소위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제시하던 내용과 방식이 바로 '역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이유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결론은 그러한 역설의 극치를 보여준다.</p>
<p>
   <br />
</p>
<p>둘째,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패러독스(Paradox about Socrates)를 의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철학적 무기로 인해 (더 정확히는 소크라테스를 헛된 궤변을 가르치며 비싼 돈을 받는 소피스트라고 풍자하는 당대의 희극 &lt;구름&gt;이 그가 고발당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기에)&nbsp; 아테네인들의 반발과 불만을 사게 되어 사형까지 이르게 된다. 가장 지혜롭다고 판명된 자가, 가장 문명화되고 자유롭다고 자부하던 아테네 민주주의 법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모순이 발생된 것이다.</p>
<p>
   <br />
</p>
<p>배심원석에 앉아 그들이 도달한 아포리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대 위에서는 각자의 완벽한 논리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의 고발장에 적힌 논리적 모순을 정밀하게 파헤치며 반박하고, 멜레토스 역시 공동체의 생존과 법 질서라는 정당한 명분을 들어 소크라테스의 반박에 맞반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는 각자의 영역에서 타당한 근거를 대며 논쟁하고 있지만, 사실 두 논리가 지향하는 목적지가 완전히 다르기에 대화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엇갈린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4127_petzdhce.jpeg" alt="550103_582588_375.jpe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두 인물의 디스전은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진 완전히 다른 게임의 충돌이다. 소크라테스는 '체스'를 두는 방식으로 변론한다. 체스는 '킹'을 죽이면 끝이 나는 게임이다. 그렇기에 그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판 위에 놓인 각각의 말은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한 역할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소크라테스는 체스판 위에서 상대 변론의 논리적 모순을 하나씩 파헤쳐 체크메이트로 몰아넣는다. 이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심원 수백 명의 표수나 대중의 평판은 무의미하다. 그가 말한 영혼의 덕은 숫자나 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
<p>&nbsp;</p>
<p>반면 멜레토스는 마치 '바둑'을 두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를 향한 자신의 고발이 타당했음을 주장한다. 바둑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돌들이 뭉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판 전체의 영토를 정복하면 이기는 게임이다. 개별 돌의 독자성보다 '대중의 표결과 집단적 세력'과 같은 수의 힘을 우선시하는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라는 개인의 논리가 맞는지 점검하기 보다 '아테네라는 판 전체의 질서와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멜레토스의 바둑판 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정밀한 반박은 그 판을 흔드는 한가하지만 위험한 소음이다.</p>
<p>
   <br />
</p>
<p>체스 기사와 바둑 기사가 한 무대 위에 서서 각자의 룰을 주장할 때, 애초에 정상적인 게임이나 대립은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사용하려는 룰 자체가 다르기에, 이 논쟁은 치열한 토론이 아니라 각자의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상대 변론의 모순을 파헤치며 체스판의 룰로 압박하려 들면, 멜레토스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체제의 위협이라는 바둑판의 룰로 눌러버린다. 성립될 수 없는 판 위에서 체스판에 바둑돌을 쏟아붓고 있었으니, 합의나 설득이 아닌 사형 선고라는 파국이 도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5632_gpondbwf.jpg" alt="46358_52908_535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이 대립은 무대 위 두 사람이 쏟아내는 랩의 리듬과 분위기를 통해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소크라테스가 정해진 박자를 쪼개가며 긴 논리를 조목조목 따지는 날카롭고 빡빡한 랩을 구사한다면, 멜레토스는 듣기 쉬운 리듬에 선동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반복하고 앙상블의 호응까지 더해진 웅장하고 굵직한 랩으로 맞선다. 치열하게 서로를 반박함에도 서로의 논리적 판을 인정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이 음악적 엇갈림은, 인간이 지닌 가치의 한계를 보여준다. 각자의 판 안에서는 완벽한 진리일지 몰라도, 상대의 세계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치열한 랩 배틀에서 증명된 것이다.</p>
<p>
   <br />
</p>
<p>이 대목에서 떠오른 문장이 바로 "모든 진리는 부분적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진리를 어느 하나로 완결해 버리는 순간 그에 대치되는 다른 내용은 배제되기 쉽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영혼의 덕도, 멜레토스가 말한 공동체의 질서도 모두 논리적으로 봤을 때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국가 질서의 안정과 덕 있는 개인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둘은 동시에 실현될 수 없으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배제되기가 쉽다.</p>
<p>
   <br />
</p>
<p>그렇다면 서로의 룰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한 쪽의 사형 선고로 끝나버린 이 아포리아는, 그저 비극적인 대화의 처참한 실패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을 깨우기 위해 신이 보낸 '등에'라고 말했다. 편안함에 취해 나태함에 빠진 말을 등에가 끊임없이 쏘아대며 깨우듯, 이 비극적 충돌은 관객인 우리에게 손쉬운 정답 대신 불편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분법적인 우리의 사유 방식을 흔들어 놓는다.</p>
<p>
   <br />
</p>
<p>이 극은 '누가 죄인인가?'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쥐여주지 않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아포리아의 과정을 통과한 뒤 맞이하는 결론은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쪽의 말에 솔깃해 다른 쪽 상대를 손쉽게 악으로 몰아세우던 미숙한 이분법을 뒤로하고, 두 가치가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으로부터 '균형 잡힌 지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4323_myhqcfbz.jpg" alt="20260422170707_gmsreolz.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유빈]]></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9:29:3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2</guid>
<title><![CDATA[[Review] 두루두루 -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2</link>
<description><![CDATA[서로 다른 세계와 표현이 &#039;두루두루&#039; 모인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 독립 애니메이션만의 자유로운 표현 가능성을 발견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0249_dmhpmfor.jpg" alt="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9월 18일 금요일,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 &lt;두루두루&gt;를 관람했다.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여러 흥행작을 접해왔지만, 국내에서 열리는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익숙하게 접해온 상업 애니메이션과는 또 어떤 다른 세계를 보여줄지 기대를 품고 영화관을 찾았다.</p>
<p><br /></p>
<p>올해 22회를 맞은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6은 '여기저기 빠짐없이, 골고루'라는 의미와 함께 각자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축제를 표현한 '두루두루'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p>
<p><br /></p>
<p>그렇게 '두루두루' 모인 작품들 가운데, 이날 선택한 프로그램은 &lt;아시아로3&gt;과 &lt;새벽비행2&gt;였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국경을 넘어 만나는 이야기, &lt;아시아로3&gt;</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lt;아시아로&gt;는 한국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아시아 지역의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나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만큼, 각 지역의 문화와 창작자들의 다채로운 표현 방식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p>
<p><br /></p>
<p>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중 하나는 중국 시펑 감독의 &lt;눈알&gt;이었다. 눈알 모양의 폐공장 안에서 두 마리의 비둘기가 사랑과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이야기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0439_vprablts.jpg" alt="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br /></p>
<p>&nbsp;</p>
<p>무엇보다 무채색으로 표현된 버려진 공장과 그 안을 살아가는 두 비둘기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음악 역시 인상적이었다.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하는 두 존재의 모습과 어우러지며 깊은 감정을 끌어냈다.</p>
<p><br /></p>
<p>두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여러 상황을 겪는 과정에서는 얼핏 거칠게 그려진 듯한 장면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마저 상황과 맞물리면서 의도된 연출처럼 느껴졌다. 장면 하나하나가 음악과 긴밀하게 맞물렸고, 거친 표현까지 작품의 분위기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높은 완성도를 느낄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팸플릿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대했던 대만 작가 라이토 로우의 &lt;속세 너머&gt;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0515_gwedpfoh.jpg" alt="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br /></p>
<p>&nbsp;</p>
<p>대만에서 직접 수집한 꽃과 풀, 씨앗, 흙, 모래, 조개껍질 등을 활용해 대만의 산과 바다를 표현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를 사용한 만큼 화면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p>
<p><br /></p>
<p>작품은 짧고 간결하지만 청량한 자연의 소리와 도시의 소음이 어우러지며 시각을 넘어선 풍성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꽃과 풀, 흙과 조개껍질이 움직이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하나의 작은 축제를 바라보는 듯하다. 특히 만물이 다시 깨어나는 듯한 생동감이 인상적이었다. 서로 무관해 보였던 작은 존재들이 움직임을 통해 이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저마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p>
<p><br /></p>
<p>&lt;아시아로3&gt;에서 만난 작품들은 문화적 배경과 표현 방식이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이미지와 움직임,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에는 국경을 넘어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에서 출발했음에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움직이는 이미지 안에서 감정은 하나의 공통된 언어가 될 수 있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이제 막 날아오르는 이야기, &lt;새벽비행2&gt;</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lt;새벽비행&gt;은 아시아 여러 지역의 작품을 만나는 &lt;아시아로&gt;와 달리 국내 신진 작가들의 첫걸음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인 연출과 낯선 소재가 눈에 띄었다. 한편으로는 자막의 싱크가 맞지 않는 등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도 있었다.</p>
<p><br /></p>
<p>현대적인 소재와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들도 많았다. 때로는 상징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만큼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문제의식 역시 선명했다.</p>
<p><br /></p>
<p>특히 김연우의 &lt;핑거뱅&gt;은 비뚤어진 사랑이 남기는 결핍과 비참함을 감각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0639_dudphdxb.jpg" alt="4.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nbsp;</p>
<p>&nbsp;</p>
<p>상영 내내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연출의 흡인력이 강했다.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상징과 장면 곳곳에서 드러나는 결핍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상영이 끝난 뒤에도 작품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이유다.</p>
<p><br /></p>
<p>김솔비의 &lt;베지터블&gt;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의 내용을 이해할수록 불편한 감정이 밀려온다. 시각적으로는 1960년대 코믹스를 연상시키는 볼드한 명암과 색채가 돋보이며, 디자인적인 완성도 역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화려하고 경쾌한 이미지 안에 담긴 이야기는 비극적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0716_sdnardhw.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br /></p>
<p>&nbsp;</p>
<p>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병원비를 감당하던 아버지마저 결국 식물인간이 되고, 아이가 홀로 남겨진다.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특유의 그림체 때문에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밝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비극적인 이야기 사이의 괴리는 오히려 불편함을 더욱 크게 만든다. 어쩌면 그 불편함 자체가 작품이 의도한 감각이 아니었을까.</p>
<p><br /></p>
<p>&lt;아시아로&gt;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출발한 작품들의 문화와 표현을 만나는 시간이었다면, &lt;새벽비행&gt;에서는 신진 창작자들의 독특한 작화와 과감한 시도를 엿볼 수 있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왜 독립 '애니메이션'이어야 했을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필자는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지만, 지금까지 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흥행작을 중심으로 작품을 접해왔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제에서 만난 독립 애니메이션의 모습은 더욱 낯설고 흥미롭게 다가왔다.</p>
<p><br /></p>
<p>대중적인 작품에서도 익숙한 이야기의 구조, 이른바 '마스터 플롯'을 변주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번에 만난 독립 애니메이션에서도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었다.</p>
<p><br /></p>
<p>익숙한 소재를 낯선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로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거나, 한국 사회 특유의 정서와 동시대의 문제를 한 작품 안에 담아내기도 했다. 때로는 거칠고 불편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상업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독립 애니메이션만의 표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p>
<p><br /></p>
<p>특히 인물의 결핍이나 불안처럼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과감한 이미지와 움직임으로 형상화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독립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를 생각하게 됐다. 정해진 형식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와 이미지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두루두루' 모였기에 보이는 것</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서울인디애니페스트는 독립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형식 안에 가두기보다 독립보행·새벽비행·랜선비행·아시아로·미리내로 등 여러 경쟁 부문으로 나누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 올해 개막작 역시 광고, 게임 IP, AI,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들로 구성되며 애니메이션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0949_aqiqbmhk.jpg" alt="마지막.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nbsp;</p>
<p>&nbsp;</p>
<p>출발한 나라도, 창작자의 경력도, 그림체도 달랐다. 몇 분 만에 끝나는 작품도 있었지만 어떤 장면은 극장을 나온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p>
<p><br /></p>
<p>어쩌면 '두루두루' 모인다는 것은 서로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한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91906_pfrggpfr.jpg" alt="아트인사이트 명함.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온유]]></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8:57:2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51</guid>
<title><![CDATA[[Review] 굳어가는 몸보다 사랑이 더 단단하다 - 알파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51</link>
<description><![CDATA[줄리아 뒤쿠르노의 시선으로 포착한 가장 단단한 사랑의 형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로우〉에서는 육식에 눈을 뜬 채식주의자라는 소재를 피와 고어가 난무하는 화면으로 강렬하게 풀어냈고, 〈티탄〉에서는 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게 된 여성이 자동차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p>
<p>&nbsp;</p>
<p>두 작품으로 특유의 질감과 개성을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영화감독 줄리아 뒤쿠르노가, 세 번째 장편 영화 〈알파〉로 돌아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2835_qzmetykf.jpg" alt="티저 포스터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
</p>
<p>&nbsp; &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몸을 석고처럼 굳게 만드는 혈액 매개 바이러스가 퍼지는 도시. 13세 소녀 알파는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의문의 'A'자 문신을 새긴 채 집으로 돌아오고, 의사인 엄마는 알파가 바이러스에 감염됐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p>
   <p>  &nbsp;  </p>
   <p style="text-align: justify; ">감염 여부 결과를 기다리는 2주 사이, 학교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소문은 곧 낙인이 되어 알파를 옭아맨다. 그리고 삼촌의 등장은 알파와 엄마의 불안을 증폭시키는데…</p>
   <p>  &nbsp;  </p>
   <p style="text-align: right; ">〈알파〉 시놉시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영화의 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진 13살 소녀 ‘알파’는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취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팔뚝에 문신을 새기게 된다. 그녀가 집에 돌아온 후, 의사인 그녀의 엄마는 알파의 팔에 새겨진 대문자 ‘A’를 보고 기겁한다. 인간의 신체를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게 만들며 혈액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p>
<p>&nbsp;</p>
<p>문신을 받던 당시 취해 있던 알파는 바늘의 청결 상태가 어땠는지, 재활용된 바늘은 아닌지 기억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엄마는 딸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p>
<p>&nbsp;</p>
<p>  &nbsp;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2859_ntrodqdq.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nbsp;  </p>
<p>한편 알파는, 타투의 상처가 계속 낫지 않아 수시 피가 흘러내린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바이러스 감염자라는 소문에 휩싸이게 되고, 친구들은 알파와 같은 수영장에 들어가는 것도 피한다. 알파는 전염병 감염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스스로가 정말 감염된 것인지 아닌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p>
<p>  &nbsp;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2912_qcbfdavi.jpg" alt="3.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p>
<p>&nbsp;</p>
<p>  &nbsp;  </p>
<p>그러던 때, 엄마의 남동생이자 알파의 삼촌 ‘아민’이 갑작스레 집을 찾아와 함께 살게 된다.</p>
<p>&nbsp;</p>
<p>마약중독자인 아민은 청결하지 않은 주사기로 약을 주입했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아민과 알파는 한 방에서 지내게 되는데, 알파는 처음엔 기억도 나지 않는 낯선 삼촌에게 적대적이었으나 점차 그와 가까워지게 된다.</p>
<p>  &nbsp;  </p>
<p>  &nbsp;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3046_eigewhhf.jpg" alt="6.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이 영화의 구심점이 되는 바이러스는 몹시 독특하다.</p>
<p>&nbsp;</p>
<p>피부의 일부가 석고처럼 하얗게 변하며 앙상하게 마른체액이 가루처럼 분쇄되어 배출되다가, 이윽고 몸 전체가 대리석, 혹은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게 되며 표면은 매끈해진다. 곰팡이가 핀 것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안개같은 가루를 토해내는 환자들,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이 매끈한 몸, 심지어 바위가 부서지듯 조각나며 무너지는 신체까지. 〈로우〉와 〈티탄〉에서 보여주었던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만의 독특한 바디 호러적 요소가 〈알파〉에도 나타나 있다. </p>
<p>  &nbsp;  </p>
<p>〈알파〉의 구조는 선형적이지 않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렬되어 있지 않으며, 현실과 환상이 어지러이 섞여 있다. 관객을 헷갈리게 만드는 구조와 바이러스의 독특한 미학이 결합되어 관객에게 판타지 설화를 보는 듯 묘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2932_rpkkaxzy.jpg" alt="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1px;" />
</p>
<p>&nbsp;</p>
<p>  &nbsp;  </p>
<p>그런가 하면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과는 다르게 혼이 쏙 빠질 정도로 강렬하지도, 관객이 눈을 가리게 만들 만큼 잔인하지도 않다. 오히려 매우 따뜻하고 멜로적인 휴먼드라마의 장르를 띄고 있다.</p>
<p>&nbsp;</p>
<p>줄리아 뒤쿠르노는 〈알파〉에서 바이러스를 소재로 가족간의 애정에 집중했다. 좋은 의사이자 좋은 엄마인 동시에 좋은 누나로서의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는 엄마와, 아직 어리지만 가족을 아끼고 지지하는 알파, 병과 중독에 의해 쇠약하지만 누나와 조카를 사랑하는 아민까지.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관객은 점차 이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게 된다.</p>
<p>&nbsp;</p>
<p>모든 일을 겪고 도달한 영화의 엔딩은 가슴 저미면서도 뭉클하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2947_ztsrnvvc.jpg" alt="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3px;" />
</p>
<p>  &nbsp;  </p>
<p>  &nbsp;  </p>
<p>주연배우 세 명은 기묘한 세계관을 훌륭하게 설득시키며 극을 끌고 간다. 알파 역의 멜리사 보로스와 엄마 역의 골쉬프테 파라하니의 연기도 발군이지만 관객의 인상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지는 인물은 역시 삼촌 아민 역의 타하르 라힘이다.</p>
<p>&nbsp;</p>
<p>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마약중독자 배역을 위해 체중을 혹독하게 감량하고 연기에 임했다. 섬뜩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그의 외형은 13살 소녀 알파와 관객을 동시에 긴장시키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짓궂지만 다정한 삼촌에 대한 애정이 마음에 피어나게 만든다.</p>
<p>&nbsp; &nbsp;</p>
<p>영화에는 바이러스가 에이즈의 은유임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배치되어 있다. 감독은 80년대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와 에이즈 환자에게 가해지던 낙인과 편견에서 출발해 〈알파〉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알파〉는 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질병으로 인한 상실과 트라우마의 극복, 그리고 가족애를 투박하지만 촘촘한 손길로 쌓아 올린 결실이다.</p>
<p>&nbsp; &nbsp;</p>
<p>평단의 혹평과 호평을 한몸에 받은 ‘올해 가장 분열적인 영화’, 〈알파〉는 9월 30일 정식 개봉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73002_itphyedb.jpg" alt="양혜정컬쳐리스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양혜정]]></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7:34:4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49</guid>
<title><![CDATA[[Opinion] 신화 속 세 여신을 통해 현대를 말하는 무대,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49</link>
<description><![CDATA[그리스 로마 신화 속 세 여신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연극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1354_rpchsaun.jpeg" alt="poster.jpe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극단 산울림과 창작집단 LAS가 공동 제작을 맡은 창작
연극 &lt;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gt;가 2026년 9월 16일부터 10월 4일까지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본 공연에 배우로 참여하기도 하는 한송희와 이기쁨이 연출과 기획을
맡은 &lt;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gt; 리부트는 2016년 고전 재해석 프로젝트 중 하나인 ‘산울림 고전극장 시리즈’의 일환으로 초연되었고, 2017년과 2020년의 공연을 거쳐 ‘리부트’라는
이름을 덧붙여 6년만에 4연으로 돌아왔다. 이 연극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여성 신들(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이들의 각기 다른 입장과 위치성의 차이를 반영하는 대사를 통해 권력과 사랑, 자유라는
주제를 탐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의
한 축인 헤라(Hera)는 크로노스와 가이아의 딸이면서 제우스의 누나이자 아내로, 제우스에게 결혼과 함께 최고 여신으로서의 자리를 보장받고 올림포스의 12신
중 최고 신인 제우스의 옆에서 군림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결혼과 가정을 상징하며, 제우스의 바람기로 인한 질투와 분노의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아프로디테(Aphrodite)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랐을 때 그것이 바다에 떨어져서 거품을 일으켜
태어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헤라의 아들이기도 한) 헤파이스토스의
아내이지만 아레스와의 불륜 관계로 유명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주로 인간과 신 모두에게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의 상징이자 아름다움과 빈번한 육체적 관계를 통해 재현된다. 마지막 인물인 아르테미스(Artemis)는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양의 신’인 아폴론의 쌍둥이 누나로, ‘달의 여신’이자 순결을 지키겠다고 서약한 ‘처녀신’으로서 사냥과 궁술도 관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는 독립적이고
복수심이 강한 성격으로, 자신과 신성을 모욕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단하는 면모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1417_rnviiqxy.jpg" alt="818062294_18486094609111365_5109692042643574986_n.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연극은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탄생과 결혼 설화를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하고 있고, 아프로디테의 결혼과 불륜, 헤라가
이오와 레토 등 제우스의 바람 상대였던 여인 혹은 여신을 괴롭힌 이야기, 아르테미스의 독신주의 같은
유명한 에피소드가 무대 위에서 새롭게 펼쳐진다. 이러한 구성 위에 상대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덜
알려진 이야기인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도니스와 아르테미스의 연인 오리온의 죽음, 님프 아레투사와 알페이오스의
에피소드가 더해진다. 특히 이번 시즌에서는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동굴에 들어왔다가 숫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의
에피소드가 삭제되고 님프 아레투사와 알페이오스의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기존 사료와 충돌이 적고 정합성은
높아진 구성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처음 창작된 이 작품은
기존 신화의 서사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덧입혀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기존의 고전 속
전형적이며 ‘상징적’인 여신들의 형상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다. 이 연극은 제우스의 ‘바람’으로
명명되었지만 대부분이 성폭력이었다는 사실, 아프로디테의 새 연인 아도니스를 죽이고 아프로디테에게 폭언을
하는 아레스의 모습 등 신화 속 남신들과 신과 인간이라는 비대칭한 위계 속에서 발생했던 남근적(phallus) 폭력의
역사를 여신들의 목소리로 다시 진술하며, 그 폭력 위에 세워진 신들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는 곧 신화라는 이름의 신들의 역사가 표상했던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신화를 통해 정당화되었던 가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연극 &lt;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gt;가 흥미로운 지점은, 신화 속 폭력과 위계로 만들어진 신들의
세계를 딛고 세 여신이 서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신들의 역사와 구조 위에서 여성 신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동시에 모순을 경험한다. 아르테미스는 남신들의 성적 폭력과 위계를 혐오하고 경멸하지만, 자신 역시 그러한 폭력의 산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이를 통해 신으로서의 역능성을 얻었다는 점에 모순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 여신들의 모습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권력과 폭력의 구조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의 복잡성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1429_idhhkdvf.jpg" alt="817719246_18486094543111365_6324231264664803654_n.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신화적
권력의 구조 위에 서 있는 여신들의 모습은 지금 현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유비되고, 이
작품이 신화라는 이름의 고전을 소환해 현재의 우리 앞에 펼쳐 놓는 이유는 현대를 말하기 위해서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사건들은 현실 사회 속 여성혐오 범죄나 구조적 젠더 불평등에서 파생된 여러 담론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며, 신화 속 여신들의 이야기는 고대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인간(여성)의 보편적 원형(archetype)이라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비대칭한 사회 구조와 다양한 권력 관계를 비추는 매개체에 가깝다. 헤라의 권력과 신의(fidelity)에 대한 믿음, 아프로디테의 성적 자유와 아름다움, 아르테미스의 독립심과 신념은 사랑과 아름다움, 권력, 주체성 같은 이 작품에 내재된 주제이자 현재 페미니즘이 마주하는 담론적 임계를 탐구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이전 시즌에 페미니즘 입문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헤라는
가부장제가 내포하는 가족 규범과 제도를 통해서 권력을 얻었고, 이러한 제도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는 여신이다. (아르테미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제우스의
바람은 사실 겁탈이었던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헤라는 제우스의 불륜 상대인 여자들을 괴롭히면서 자신의 감정적 분열을 해소한다. 헤라가 ‘약속’과 ‘신의’를 중시하는 이유는 단순히 낭만적 사랑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으며, 제도와 권력의 구조 속에서 이해관계를 계산하며 자신의 위치와 자아를 지키려는 전략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존재로서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탐닉한다. 과거
연인이었던 아레스가 새로운 연인이었던 인간 아도니스를 참살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아레스에게 비난과 위협을 받은 그는 이러한 관계가 폭력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관계에 해방감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성적 이중규범이 작동하는 상황에서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대상화 사이의 긴장, 그리고 성적 개방성과 ‘리스크’ 사이의 긴장 관계라는 주제를 환기시키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르테미스는 독신 선언을 한 신화의 설정을 반영하듯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닌 캐릭터로,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때로는 부정의에 징벌을 가하거나 님프 아레투사의 사례처럼 성적 위협에 처한 다른 여성들을
돕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와 쌍둥이 동생 아폴론 같은 ‘친족’을 제외하면 다른 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거나 활발하게 교류하지 않고, 다른
신들이 다 같이 모이는 만남을 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자신의 잠재적 피해
가능성과 잠재적 가해성을 모두 제거하려는 태도, 즉 ‘무해한
존재’로 남기 위해 독립성을 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1442_sccbstso.jpg" alt="817455790_18486094765111365_2173508122202385757_n.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
속에서 재현되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각기 다른 유형의 여성상을 연상시킨다. (이는 일종의 ‘이념형’이라는 개념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가치관도, 위치도 다른 세 여신의 토론이 이어지고, 끝없는 확장과 수렴의 기나긴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경합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세 여신들의 선택과 가치관에 내재된 제한적인 조건 속 삶의 맥락이 드러나며, 이들의 행위자성이 발휘되는 조건인 각기 다른 층위들이 전면화된다는 점이다. 복잡한
위치성과 이로 인한 ‘입장’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구조’역시 인식할 수 없다는 점, 페미니즘이
위치성과 관점의 학문인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연극에
대한 공통적인 감상평으로 많이 언급되는 것은 세 여신들의 말에는 ‘차이’가 있을 뿐, ‘틀린’ 말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규범과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무결한 존재, 즉
‘결함’이 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아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괴롭히기를 택한 헤라, 그리고 자신의 탓으로 인해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님을 알지만 스스로를 ‘의심’하는 아프로디테, 그리고 오리온과 사랑에 빠졌다가 아폴론의 계략에
넘어가 연인을 곰으로 착각하고 화살을 쏴 죽게 만든 아르테미스가 ‘혼란’을 겪는 것처럼, 신념이 자신의 존재와 모순될 수 있다는 점, 믿음이 배반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존재에 내재된 근본적인 취약성에서 기인한다. 타자와 구분되어 존재하는 독립적인 주체성에 대한 믿음 역시 서구 근대의 ‘남성적’ 시각의 일환이며, 의존과 자립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는 유효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조건으로서 상호 의존성이 출현한다는 것이 작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현재 페미니즘의 담론적/실천적 전제이며, 장애학과
퀴어 이론 및 다양한 관점을 흡수하고 더욱 풍부해진 페미니즘이 마주하고 천착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이 한국 사회에 발생하던 시기에 처음 창작된
이 작품은 ‘리부트’라는 부제가 새로 붙으며 지난 10년간 누적된 담론과 실천적 변화를 반영하며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1821_ybakflms.jpg" alt="818062300_18486094735111365_8657839027869413309_n.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올림포스 신전을 바탕으로 우연한 세 여신들의 마주침과 이로 인한 대화 속에서 세 여신들이 자신의 내면과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고(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이며), 이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 충돌하고 경합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재미있는 점은 (종종 쉽게 ‘임파워링’과 ‘주체화’라는 전개로 이어지는) ‘상호 이해’와
‘연대’로 표상되는 규범적인 클리셰 직전에서 머뭇거리는 결말이다. 헤라는 헤르메스에게 제우스의 바람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고, 아르테미스는 공연 초반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다른 신들이 오기 전에 이 곳을 떠난다. 홀로 남은 아르테미스는 헤르메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헤라와
아르테미스가 퇴장한 자리에서 헤르메스와 시간을 보내는 아프로디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이 작품의 첫 시작 장면인 세 여신들이 등장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규범적인’ 결말로 귀결되기 직전,
의도적으로 멈춘 상태로 모든 것을 유예한 이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라진다. 첫 장면과 비교했을 때 세 여신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61755_lcyvsbmf.jpg" alt="이다연 (1).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다연]]></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6:18:4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48</guid>
<title><![CDATA[[Opinion] 집은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 서도호 개인전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48</link>
<description><![CDATA[우리가 거쳐온 모든 공간과 그곳에 깃든 시간, 기억은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삶의 터전을 옮긴다.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떠나고, 익숙했던 동네를 벗어나고, 때로는 도시와 나라를 건너 새로운 일상을 꾸린다. 그렇게 거처가 바뀔 때마다 이전의 집은 조금씩 멀어진다. 그러나 몸은 떠날 수 있어도 기억까지 완전히 이사하기란 쉽지 않다.</p>
<p>&nbsp;</p>
<p>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서도호》 전시는 바로 그 ‘떠나온 집’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울에서 성장한 뒤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을 오가며 살아온 서도호에게 집은 소유물이나 재산의 개념이 아니다. 한 사람이 머물렀던 시간과 그곳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손끝에 남은 감각과 기억까지 품고 있는 공간이다.</p>
<p>&nbsp;</p>
<p>그렇다면 수많은 집을 지나온 우리에게 진짜 '나의 집'은 어디일까. 서도호의 작품은 말한다. 우리가 떠나온 모든 집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고.</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떠나왔지만, 떠나오지 못한 집</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20129_olcysibf.jpg" alt="tempImageyA421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93px;" /></p>
<p>&nbsp;</p>
<p>&nbsp;</p>
<p>전시의 초입, 벽을 가득 채운 200여 점의 액자 속에서 집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머릿속이 온통 집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부터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부리나케 오르는 사람까지.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한옥이 한 사람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연작이다. 집을 피해 달아나던 인물은 마침내 도망치기를 멈추고, 거대한 한옥 아래 우뚝 선다. 마치 SF 영화에서 인간이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는 장면처럼 보이는 동시에, 오랫동안 외면해 온 자신의 과거와 마침내 마주 선 사람의 모습처럼 느껴졌다.</p>
<p>&nbsp;</p>
<p>서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 성북동의 한옥이었다. 이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어린 시절의 집은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옥을 떠나 낯선 문화권의 아파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집은 어쩌면 떨쳐내고 싶은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야 했을 테니 말이다.</p>
<p>&nbsp;</p>
<p>그러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듯, 한때 나를 품었던 공간 역시 나의 일부로 남는다. 한옥을 피해 달아나던 인물이 마침내 그 아래 초연히 서 있는 작품은, 떠나온 과거를 더 이상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처럼 다가온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사랑하기에, 오래도록 문지르는 일</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20212_uugzlcwm.jpg" alt="tempImageDIlvIt.jpg" style="width: 700px; height: 610px;" /></p>
<p>&nbsp;</p>
<p>&nbsp;</p>
<p>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집은 전시의 중반에 이르러 실제 공간의 형태를 얻는다. 〈러빙/러빙: 서울 집〉은 서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성북동 한옥을 한지로 감싼 뒤, 그 표면을 흑연과 색연필로 문질러 본뜬 작품이다.</p>
<p>&nbsp;</p>
<p>작품의 제목인 ‘러빙/러빙’은 흥미롭다. 문지른다는 뜻의 ‘Rubbing’과 사랑한다는 뜻의 ‘Loving’. 집을 기억하는 방식이 하필 ‘문지르는 행위’라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벽과 문, 창문과 작은 모서리까지 손으로 짚어가며 그 표면을 떠내는 일. 떠나왔기에 그리웠고,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대상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오래 바라보고, 만지고, 되짚는 행위처럼 느껴진다.</p>
<p>&nbsp;</p>
<p>우리가 어떤 공간을 사랑하는 방식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래 살았던 집을 떠난 뒤에도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현관문을 열 때의 감촉, 늘 앉던 자리에서 바라본 창문의 방향, 어느 시간대에 거실로 들어오던 햇빛처럼 너무 사소해서 그곳을 떠나기 전에는 특별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서도호의 작업은 그런 사소한 흔적들을 집요하게 되살린다. 그에게 집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곳에 남겨진 사랑의 흔적을 오래도록 어루만지는 일인 듯하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모든 기억이 모인 ‘완벽한 집’</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20245_vnezceao.jpg" alt="tempImageD77Knt.jpg" style="width: 700px; height: 592px;" /></p>
<p>&nbsp;</p>
<p>&nbsp;</p>
<p>다음으로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에 들어서면 그가 거쳐온 여러 도시의 집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겹쳐진다. 투명한 천으로 재현된 집 안에는 천장의 조명부터 현관의 문고리, 스위치와 콘센트, 욕실 수전까지 각기 다른 집의 흔적이 중첩되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 한곳에서 포개지며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을 완성한다.</p>
<p>&nbsp;</p>
<p>그런데 이&nbsp;작품의 이름은 뜻밖에도 ‘완벽한 집’이다. 완벽한 집이라고 하면 흔히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잘 갖춰진 이상적인 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서도호의 완벽한 집은 정반대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구조가 한데 얽혀 있어 실제로 생활하기에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p>
<p>&nbsp;</p>
<p>그럼에도 이 집이 '완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나온 모든 시절의 내가 하나도 지워지지 않은 채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는 데 있다. 어린 시절의 나도,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나도,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나도 어느 하나 지워지지 않은 채 공존하는 공간. 서도호의 ‘완벽한 집’은 그렇게 하나의 주소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품어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집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다시 가족에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20326_qiypsgto.jpg" alt="tempImageEUu4VN.jpg" style="width: 700px; height: 751px;" /></p>
<p>&nbsp;</p>
<p>&nbsp;</p>
<p>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확장되었던 전시는 흥미롭게도 마지막에 이르러 가장 작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바로 가족이다. MMCA 스튜디오에는 서도호의 두 딸과 가족에 관한 작업들이 자리한다. 딸이 성장하며 입었던 옷이 겹겹이 포개지고, 작가와 딸이 서로를 그린 그림과 자라면서 신었던 신발의 발자국이 작품으로 남는다. 일상 속에서는 무심히 지나쳤을 성장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따스한 시선으로 기록되어 있다.</p>
<p>&nbsp;</p>
<p>특히 〈사랑의 기억〉 작품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집’이라는 질문을 한곳에 모아놓은 듯하다. 서도호의 코트 안쪽에 가족의 옷에서 떼어낸 주머니들을 달고, 그 안에 함께한 시간을 품은 사물들을 넣었다. 물감이 잔뜩 묻은 붓, 목재 장난감, 낙서가 적힌 노트까지. 타인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물건일지 몰라도, 가족에게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이 된다.</p>
<p>&nbsp;</p>
<p>떠나온 집에서 시작했던 이야기가 한 사람의 몸에 걸치는 작은 옷으로 돌아오는 흐름. 이는 집을 이루는 것은 벽과 지붕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쌓아 올린 시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집은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관계와 기억의 형태로 우리 안에 자리 잡는 것. 서도호는 전시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p>
<p><br /></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우리는 모두 집을 입고 살아간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20359_ahszeaix.jpg" alt="tempImaged4SFtF.jpg" style="width: 700px; height: 692px;" /></p>
<p>&nbsp;</p>
<p>&nbsp;</p>
<p>집은 떠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만졌던 문손잡이의 감촉, 가족을 부르던 목소리,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 그곳에서 울고 웃었던 시간은 보이지 않는 층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일지라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만큼은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이다.</p>
<p><br /></p>
<p>그렇게 수많은 집을 지나온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집이 있다. 어느 하나의 주소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빠짐없이 머무는 곳.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다. 서도호의 집들이 투명한 천 너머로 서로의 모습을 비추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듯, 우리의 삶 역시 지나온 모든 시절이 겹쳐져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p>
<p>&nbsp;</p>
<p>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벗어던지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모든 시절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만큼 내 안의 집을 넓혀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입은 채 조금씩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모든 여정에서 저마다의 '완벽한 집'을 만들어가며.</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4819_tezmkilw.jpg" alt="최수경 에디터.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수경]]></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2:05:1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39</guid>
<title><![CDATA[[Review] 이름의 소유권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39</link>
<description><![CDATA[그는 이제 시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의 귓가에는 항상 펜이 꽂혀있고, 독자와 관객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 그렇게 그는 온전한 ‘에드 색스버거’로의 삶을 살아간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05916_oymcknit.jpg" alt="메인 포스터.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
</p>
<p>&nbsp;</p>
<p>&nbsp;</p>
<p>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Late Fame)』는 한때 짧은 각광을 받고 잊혀진 시인이자, 수십 년간 우체국 직원으로 평범하게 살아온 에드가 한 청년 예술가에 의해 뒤늦게 '재발견'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p>
<p>&nbsp;</p>
<p>이 작품은 영화평론가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히치콕 트뤼포』와 극영화 데뷔작 『다이앤』을 통해 연출 역량을 입증한 켄트 존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다. 『메이 디셈버』의 새미 버치가 각본을 쓰고, 킬러 필름스 제작 및 마틴 스콜세지 총괄 프로듀싱을 맡았다. 또한 뉴욕 실험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윌렘 대포가 주인공 에드를 연기하고, 그레타 리는 글로리아 역을 맡아 연기력과 가창력을 동시에 선보인다. 일찍이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과 뉴욕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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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영화 같은 일상</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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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젊은 시절 시집 한 권을 남긴 에드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우체국 창구에서 보내왔다. 그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안온하다. 누군가는 이를 단조롭다고 할지 모르지만, 삶에 충실한 한 인간임과 동시에 누구도 모르는 청년의 때를 간직한 그의 평화로운 하루는 그 자체로 영화의 아름다운 첫 장을 장식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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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10052_nwwdqqim.jpg" alt="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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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나 이 고요한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인다. 청년 예술가 마이어스가 에드의 집을 찾아와 이제는 잊혀진 그의 시집 『너무 지난 길(Way Past Go)』을 예찬하며, 자신이 그의 열렬한 팬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를 자신이 속한 젊은 예술가 모임으로 초대한다. 세월의 뒤편으로 밀려났던 시인의 자아가 다시 호명되는 일은 꽤 달콤했지만, 노년의 에드가 소화하기엔 지나치게 달았다. 자기 책의 제목처럼 이미 '너무 지나버린' 과거에 묘한 거리감과 부담을 느끼며 에드는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이후 길에서 마이어스와 재회하며, 그의 청춘다운 열정과 젊은 날의 향수에 이끌려 그들의 모임에 발을 들이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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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에드'와 '색스버거'</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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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영화는 에드가 발 딛는 두 세계를 '호칭'을 통해 구분한다. 에드가 수십 년간 드나들던 술집의 오랜 친구들은 그를 언제나 '에드(First Name)'라 부른다. 그들은 에드가 과거에 시를 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만, 함께 포켓볼을 치며 고단하고 무료한 일상을 함께 견뎌온 진짜 삶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에드가 오랜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낭독회 소식을 전하며 자신의 책을 선물했을 때, 친구들은 짐짓 당황스러워하며 짓궂은 농담을 던진다. 긴 시간 함께했음에도 그들은 시인으로서의 에드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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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10124_qersdbyi.jpg" alt="07.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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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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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반면, 청년 예술가 모임의 수장 마이어스는 자신들의 모임에서는 이름이 아닌 반드시 사회적 지위와 가문을 상징하는 '성(Last Name)'을 사용한다고 강조하며, 에드를 매번 구태여 '색스버거'라 칭한다. 예술가 모임의 다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대의 배경, 집안을 상징하는 '성'을 먼저 바라보는 것은 비단 이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역시 현실에서 타인을 관찰할 때 마주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타성적인 시선이다. 그러므로 모임의 청년들에게 필요했던 것 역시 노년의 깊은 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예술적 커뮤니티를 빛내줄 '그럴듯한 배경을 가진 시인 색스버거'라는 존재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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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편, 낭독회를 준비하는 에드가 난항에 부딪힌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새로운 시를 써보려 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쩌면 친구들조차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에드 안에서 시인이라는 자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거나, 반짝 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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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10149_erhadsoo.jpg" alt="06.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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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낭독회 전날 에드가 솔직하게 "시를 쓰지 못했다"고 고백하자,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예술로 치환해주던 청년들의 태도가 냉담해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마이어스가 그를 ‘에드’라고 부르는 순간 이 관계의 기만성이 드러난다. 에드는 낭독회에서 새로운 시를 발표하는 대신 이전에 썼던 시를 읊는다. 관객들은 환호로 무사히 낭독회를 마치고 기념의 월계관을 쓰지만, 알 수 없는 허탈감 속에 미련 없이 그것을 이웃에게 넘겨버린다.</p>
<p>&nbsp;</p>
<p>후일에 윈이 자신을 포함한 모임의 구성원 모두가 에드의 시집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시인 색스버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색스버거’란 그저 잠시 젊은 날의 꿈에 취했던 에드와 그의 시 한 구절 읽지 않은 청년들의 허상일 뿐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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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영화 같지 않은 이야기</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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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영화 같았던 첫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만, 에드의 이야기를 따라 다시 마주한 평온한 일상은 '영화같지 않게' 사실적이며, 현실적이다. 영화는 대담한 반전 대신 지극히 솔직한 인간의 속내를 그려낸다. 마치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에서 관객은 폭소하면서도 한편으로 영화 속 인물들에게 이입하게 된다.</p>
<p>&nbsp;</p>
<p>낭독회에 대한 냉소적인 평을 쓴 사람이 마이어스임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취와 명예를 위해 쉽게 타인을 도구화해 버리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마주하게 된다. 함께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너무도 쉽게 와해되는 집단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마이어스와 같은 면모가 꿈틀거리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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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10213_vzoncnhw.jpg" alt="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특히 이 유복한 청년들의 놀이터에서 유일하게 정착할 곳이 없는 글로리아의 존재가 눈에 밟힌다. 타인의 집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그녀에게 '연기'는 무대 위를 점령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이 모든 소동이 끝난 뒤 에드조차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돌아가지만, 글로리아는 여전히 돌아갈 집 혹은 무대를 찾아 헤맬 지도 모른다. 인정의 다른 말은 확실한 내 자리다. 끊임없이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불안은 글로리아를 통해 투영된다.</p>
<p>&nbsp;</p>
<p>영화의 원제 ‘Late Fame’이 『나의 사적인 예술가』로 번역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짐작건대 이는 마이어스의 시점을 빌린 표현일 것이다. '나의 사적(Private)인'이란 말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현재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한 때는 시인이었던 색스버거’의 이름을 소유하고 싶었던 마이어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닐지 추측해본다.</p>
<p>&nbsp;</p>
<p>신기루 같았던 예술가로서의 삶을 청산한 에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는 이제 시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의 귓가에는 항상 펜이 꽂혀있고, 독자와 관객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 그렇게 그는 온전한 ‘에드 색스버거’로의 삶을 살아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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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10424_epvoraxm.jpg" alt="컬쳐리스트_백승원.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백승원]]></dc:creator>
<pubDate>Tue, 22 Sep 2026 21:04:3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37</guid>
<title><![CDATA[[Review] 미술관 벽에 걸리기까지, 작품이 지나온 길 -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37</link>
<description><![CDATA[도서 &#039;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039;에 대한 단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194242_xgreflze.jpg" a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표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left;">미술관과 갤러리에 전시를 보러 가면 간혹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작품은 어쩌다 여기, 이 벽에 걸리게 됐을까. 돌이켜보면 작가가 붓을 내려놓은 순간과 그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이 지금 우리 눈앞에 걸려 있는 순간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그 과정을 생략하고 완성된 결과물을 음미하는 것에 익숙하다. 물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그것을 가장 미적이고 감각적인 층위에서 탐닉하는 것도 결코 틀린 길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번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한 비밀스런 속사정을 각각의 작품이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비밀을 알아가는 것 또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일 것이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바로 그 비밀스러운 부분들을 다시 채워 넣는 책이다.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작품이 벽에 걸리기까지의 여정과 전시장을 벗어난 뒤의 방황을 현직 전문가의 시점에서 솔깃하게 풀어낸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순수한 미술이 없다는 말은 꽤나 파격적으로 들린다. 우리는 흔히 예술을 인간의 가장 순수한 표현 방식 중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순수예술' fine arts라는 용어가 버젓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와 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수하다'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의미에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나 나름대로는 이 표현이 가장 '개인적이고' '오롯이' 존재하는 것들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넌 참 순수해'라고 말할 때, 그 대상은 대부분 외부적인 요소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섞이지 않은, 가장 깨끗한 내면의 소유자이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정의해 온 순수함은 그 태초의 본질이 퇴색되지 않고 가장 온전히 이상적으로 보이는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국 '순수한 미술이 없다'는 말은 홀로 오롯이 외딴 섬에 서 있는 작품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보고 이야기하고 지나치는 작품들은 모두 제도 안에 진입한 인간의 산물이다. 울타리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법과 체제, 사회문화,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대중적 인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책은 작품 하나가 세상에 나올 때 세 번의 탄생을 거친다고 말한다. 아이디어가 작품이라는 결과물로 처음 형태를 갖췄을 때, 그것이 시장에서 가치와 경쟁력을 평가받으며 상품으로 거래될 때, 그리고 어느 미술관이나 컬렉터의 소장품이 되어 새로운 운명을 부여받을 때다. 이렇게 세 번 태어나며, 어쩌면 더 복잡하고 빈번한 격변을 겪은 작품들도 다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의 대략적인 시간적 위치를 추정해 보면, 이미 이 일련의 흐름을 거치고 어딘가에 소장되어 대중의 시선에 오르내리는 시점일 것이다. 그러니 작품의 길고 긴 생에 비하면, 우리가 그들과 마주치는 순간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짧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시 후에도 수차례 경매와 기관 이전을 거치는 경우가 수없이 존재하니, 우리의 눈을 스쳐 간 작품들은 소실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영겁의 여정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낼 것이다. 작품에도 인간의 생과 같이 일대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 안부를 묻고 싶은 궁금증도 생긴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흥미로운 지점은 미술시장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운영되고, 이 모든 활동의 경제적 여파가 다른 부문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은밀한 상호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시장'이라 하면 가장 세속적이고 치열한 삶과 돈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이라 여겨지기 마련인데, 흔히 예술과 돈을 같이 말하면 뭔가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은가.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예술은 금기시되어야 하는 것일까, 돈 얘기를 하는 순간 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은근한 편견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으레 감탄하며 보는 작품들에도 모두 '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가격이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치밀하게 형성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보기 좋고 많은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작품일수록 값이 오르고, 대중의 취향과 거리가 먼 작품은 상대적으로 조용히 묻힌다는 서술은 냉정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작품이 하나의 표현의 장으로 기능함과 동시에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을 옮기는 상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절대 흘려들을 말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찬양하는 작품의 권위도 제도 속에서 산정된 경제·사회·문화적 가치에 의해 형성되었기에, 우리는 눈앞의 작품이 남긴 현상만으로 그 작품을 다 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 또한 일종의 '소비'라는 경제적 패턴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관람자'이자 '소비자'로서 일상적으로 수많은 작품을 후원하는 동시에 그것을 등지는 선택적 행동을 통해 예술 자본시장에 작은 한 획을 긋는 셈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주말마다 보는 미술관의 작품들도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꽤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다.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 서양 르네상스 이후 미술이 '브랜딩'되고 아티스트의 '명성'이 생겨나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사례들이 존재해 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술 시장의 번영과 예술 자본화가 그저 산업화와 현대화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오래전의 미술품과 유물이 기관과 컬렉터에 의해 보존되고 소장되어 현재까지 그 권위를 굳건히 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의 가치를 형성해왔을 뿐만 아니라, 예술품을 경제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게 했던 배경을 대물림해왔다. 이 세대가 누리는 예술에 대한 환희와 즐거움 또한, 선조들이 이를 유통하고 홍보한 영민한 방식을 후대가 계승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이 책이 다루는 이야기는 미술이 개인의 재능에서 시작해 국가 단위의 산업으로 확장되는 과정, 그리고 서울이 홍콩과 함께 아시아 미술 허브로 떠오르는 현재까지 시대적 범위를 넓혀간다.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더 이상 미술은 한 국가만의 전유물이나 국보처럼 취급되지 않는다. 수많은 컬렉션과 전시 프로젝트가 대양을 건너고 대륙을 넘나든다. 이러한 시류를 어떠한 시선과 태도로 받아들이고 적절히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한국에서도 수없이 이뤄져 왔고, 앞으로도 쉴 틈 없이 이어질 것이다. 예술을 통해 국가 간의 경계를 허물고 시공간을 넘어 소통하는 것은 단지 이상적인 교류의 형태로 보일 뿐만 아니라, 국가 산업의 측면에서 굉장한 수출 시장이 생기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서술했듯 미술이 꽤 오래전부터 자본과 얽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 국가의 작가와 작품이 어떠한 범국가적 이윤을 창출하고 마케팅과 홍보 효과에 기여하는지는 이제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또한 AI와 알고리즘의 시대에 예술은 많은 변화의 풍파를 맞았다.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손이 아닌 데이터가 되고, 인간이 아닌 작가가 탄생해 그 저작권을 논하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기술 혁신과 함께 미술 또한 그 궤적을 같이 해왔다. 급진적인 성장 가도 속에서 향후 전망에 대한 두려움과 씁쓸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책에 서술되어 있듯,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아직 가장 강력한 '합의의 몫'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도구가 무엇으로 변모하든, 탄생한 예술적 산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대해 합의하고 논의하는 일만큼은 결국 우리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 감각을 서로 이야기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 손에 있다는 뜻이다. 이 사실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동시에, 인간에게 맡겨진 과업에 은연중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은 이 책이 알려주고자 한 바람직한 사유의 미래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결국 순수한 미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 대신 그 자리에는 매 시대마다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온 여러 합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더 넓은 문으로 그 합의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을 거라는 것. 이 책을 덮은 우리가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이야기해 볼 수 있는 '합의의 몫'은 여전히 남아 우리를 설레게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문경란]]></dc:creator>
<pubDate>Tue, 22 Sep 2026 19:43:5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41</guid>
<title><![CDATA[[Review] 네게로 가 꽃이 되는 것 - 나의 사적인 예술가 LATE FAME]]></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41</link>
<description><![CDATA[화려히 흩날리는 벚꽃보다, 오래지는 수국이 나는 좋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1718_lkgluhoq.jpg" alt="메인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2px;" />
</p>
<p>&nbsp;</p>
<p>&nbsp;</p>
<p>오늘의 리뷰,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이다. 그러나 나는 원제인 ‘LATE FAME’ 쪽에 마음이 더 끌린다. 시사회는 월요일 저녁 19시 반,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진행됐다. 회사와 가까운 곳이라 부러 느긋한 걸음으로, 덕수궁으로부터 광화문 일대를 서성거렸다. ‘씨네큐브’는 영화 애호가들을 통해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막상 온 것은 처음이었다. 번듯한 고층 오피스 건물의 지하에 있는 영화관, 에스컬레이터를 내리자마자 다른 상가동과 구분되지 않은 공간의 한쪽으로는 책상이 자리해 있었다. 박스 오피스가 따로 없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 줄을 서서 미리 예매한 티켓을 교부받는다. 어딘가 투박한 구성이 썩 마음에 들었다.</p>
<p><br /></p>
<p>동행을 기다리며 다른 영화 팸플릿을 뒤지어도 보았다. 9월 마지막 날에 영화 이방인을 상영한다는데, 보고 싶다는 생각의 한편으로 주인공 뫼르소 연기를 살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동행이 조금 늦었다. 첫 10분은 광고 상영이라 생각해 여유로웠지만, 광고 없이 정각에 상영하니 곧잘 입장하라는 직원의 외침에 갑자기 다급해졌다. 동행은 정확히 정각에 도착해, 헐떡이는 손길로 수정과를 건네주었다. 살얼음 때문에 차가운 결로가 맺혀있었다. 멀리서 수정과를 사 오느라 늦을 뻔했구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는 내내 팝콘 튀기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1733_khrbdpnc.jpg" alt="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영화는 별다른 광고도, 시작을 알리는 표지도 없이 스리슬쩍 시작했다. 그저 어제와 오늘, 똑같은 일상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치 않듯이. 막이 열리자마자 주인공 에드 색스버거는 우편물들을 분류하고 있고, 그 눈빛은 담담하다. 아무런 꿈의 흔적도 읽을 수 없는 눈빛의 맑음, 그는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고, 몇 가지 시집도 출판했다지만 그런 것들도 워낙 오래돼 딱히 기억하지 않는 눈치. 비관이나 염세는커녕 지루함조차 없는 말간 눈빛은, 워낙 오래돼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된 일상을 바라보고 있었다.</p>
<p><br /></p>
<p>아무 생각 없이 우편물을 정리하고, 퇴근하면 동네의 단골 바에 들러 친구들과 싱거운 농담깨나 주고받는 삶. 같이 늙어가는 처지끼리 서로 적당한 대화를 나누는 풍경은 호젓하다. 싱거운 농담과 약간은 익살스러운 장난도, 그것을 익숙하다는 듯이 유연하게 되받아치는 말들도, 모두 잘 짜인 양식같이 매끄러운 뉘앙스를 풍긴다. 마치 ‘그건 5년 전에 한 번 했던 농담이었지 아마, 그때 내가 이렇게 답했었던가’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그들의 대화는 매끄럽고 젠틀하며, 반복적이다. 그리고 익숙함과 반복이야말로 일상의 대표적인 속성 아니겠는가.</p>
<p><br /></p>
<p>귀가한 집은 어두웠다. 아내와 자식은 없는 듯하다. 머리맡의 조명을 끄면, 다시 우체국에서 시작되는 다음 장면, 그리고 퇴근, 단골 바의 시퀀스가 몇 차례 반복되려다가는,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서사는 전개부를 알린다. 말쑥한 차림새의 한 젊은이가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에드의 시집을 읽고선 그를 만나고 싶어 어렵사리 찾았다고 말한다.</p>
<p>&nbsp;</p>
<p>에드는 불신의 기색을 표한다. 자신조차 밀어낸 꿈이 상기되는 순간은 상실의 두려움부터 일으키기에, 실은 그 두려움이 곧 꿈을 밀어낸 원인이요 깊이 잠든 꿈 위에 덮인 먹빛 천과 같아, 잊힌 꿈을 부르는 것은 그 위에 두터이 덮인 두려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의 경계와 마다함에도 불구, 청년의 상기된 볼과 멋대로 배배 꼬이는 다리는 그가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의 말이 진심임을 가리킨다.</p>
<p><br /></p>
<p>청년은 에드의 시집 ‘WAY PAST GO’에 관해 열정적으로 평하고, 자신들의 모임에서도 이 시집을 모두 읽곤 매료되었노라 말한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이 작품은 천재적이라고 수도 없이 말한다, 열렬한 고백처럼. 이 앞에 누가 있어 기쁘지, 아니 한 순간 체면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한껏 들뜨지 않을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귀하고, 나아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알아주는 것”은 고귀하기까지 하다. 누구나 자신이 알리어지고 발견되기를 소망하나, 보통은 그보다 체념이 더 가까이에 있지 않던지.</p>
<p><br /></p>
<p>우편 분류원인 내가 아닌 어엿한 시인으로서의 나를 알아본다는 것. 표면상 해석되는 나의 피상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나의 자아를 발견해 준다는 것은 분명 황홀한 일. 나아가 자신조차 잊고 흩고 오래도록 풍화시킨 영광의 자아가 그것이었으니, 청년이 자기도 모르게 내민 ‘부름’은 금빛 월계관 같았다. 그래서 참 고약하고, 뉘 말마따나 얄궂다고 생각했다. 우린 왕관의 금빛에 홀려 그것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왕관의 가치는 금칠 된 외양이 아닌 만든 이의 자격으로부터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1757_qbapvaqe.jpg" alt="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2px;" /></p>
<p>&nbsp;</p>
<p><br /></p>
<p>청년의 거듭된 구애로 에드는 마침내 그들의 모임, ‘Enthusiasm Society (이하, 열정의 사회)’에 발을 들인다. ‘열정의 사회’는 극작가, 시인 지망생, 배우와 에세이스트 등의 예술가 모임으로 그들은 진짜 예술, 정확히는 대중 매체의 곤궁함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며 그 심오함에 대해 토론하려는 듯하나, 실상 현학적 애송이들의 모임이었다. 부르주아 자제들의 취미 생활 같달까. 실체와 근거 없는 부정, 비판의 탈을 쓴 비난을 일삼는 그들은 변변한 창작물 하나 없이 대중 매체를 폄하하며, 실상 자신의 현학적 허영만을 충족하려는 듯하다. 그들 사이에 소속감보다는 늘상 위화감이 감돌곤 했지만, “에드”로서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그곳은 자신을 “알아보고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조차 잊어버린 자신의 영광을 소환하며, “LATE FAME”의 달콤한 가능성을 상기시키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p>
<p><br /></p>
<p>그는 이 ‘열정적인’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자아와 소속감을 누리곤 행복해했지만, 그 결과 자신의 일상과 작별하게 된다. 자기가 구축한 ‘일상’은 자신의 진짜 자아를 포기한 대가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왜 아니랴,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만큼 화합은 먼 것이 되고, 반대로 화합을 위해 우리는 자신만의 특별함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는가, 다름 아닌 외로움의 부름으로, 자기 두 손으로 밀어내지 않나. 누구나 마음 한쪽에 그런 비밀, 자신만의 특별함과 고귀함 하나쯤은 간직하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뒤늦게 찾은 영광’이 이러한 자아의 부활, 내지는 변신을 불러오는 딴에는 가혹한 선택을 수반하는 듯하다. 일상과 이상 사이, 친숙한 일상과 눈부신 자아실현 사이에 놓인 티켓은 하나이고, 대가는 포기이다.</p>
<p><br /></p>
<p>친구들이 자신의 시집을 발견하곤 멋대로 낭독하려 들 때 그는 대단히 분노하며, 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 의해 욕보이는 것을 지레 두려워한 바람에 모진 말을 쏘아댔다. “너희는 나를 몰라, 너희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싼 그런 사람이 아니야.” 자신의 특별함과 다름을 드러내며 ‘어제’의 우리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긋는 에드로부터 친구들은 일종의 모욕감을 느끼게 되고, 에드는 그 길로 단골 술집에의 발길을 끊었다. 자신에겐 새로운 소속, 진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커뮤니티, 즉 대안이 생긴 덕분이겠다.</p>
<p><br /></p>
<p>한편 그의 새로운 소속, ‘열정의 사회’는 그가 오래 머무를만한 곳이었을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낭독회를 기획하고, 에드에게 새 시를 써서 무대 위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오래도록 절필한 에드로서는 자신이 없지만, 자신을 알아봐 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픈 마음을 이기지 못해 승낙하고야 만다. 시상만이 오래도록 입가를 맴돌았지만 당연히 시는 나오지 않고, 좌중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1813_ashxxqnu.jpg" alt="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4px;" /></p>
<p><br /></p>
<p><br /></p>
<p>기한을 정해놓고 시를 쓰라 청하는 것은 그들 ‘열정의 사회’가 정작 시라는 예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시 장르와 에드의 시집을 칭송해 왔지만, 정작 ‘시’가 무엇이고, 어떻게 영글어 탄생하는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의 태도는 마치 “예전에 이런 좋은 시를 썼으니, 새 시를 쓰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겠지요? 당신은 천재잖아요”라고 말해오는 듯하다. 시작 詩作의 과정과 원리를 모르기에, 서글프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존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p>
<p><br /></p>
<p>낭독회를 기점으로 모임은 와해되고 만다. 사실 애초부터 품고 있던 균열이 결국 드러나게 된 것에 지나지 않다. 즉 이미 불완전한 모임, 에드의 입장에서 논하자면 오래 머무를 만한 곳이 못 되었다는 뜻. 기획자부터 개개 낭독자까지, 자신을 드러내 알리려는 치기 어린 열정에 급급하였고 프로다운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머리만 굵은 오합지졸끼리 서로를 힐난하며 자멸하는 양상을 보인다. 희구하는 명성에 비하자면 한참 준비되지 않은 애송이들은 졸전을 펼친 뒤 불평불만으로 자신의 모자람과 수치를 덮는 데 급급하던 찰나, 한껏 뒤숭숭해진 백스테이지를 뒤로 한 채 에드가 무대에 오른다.</p>
<p><br /></p>
<p>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혼란 가운데에 떡하니, 그리고 버젓이 놓여 있다. 빛나는 조명이나 무대효과 없이, 시에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한 누군가의 지인들이 자아내는 어수선한 웅성거림 가운데로 툭하니 던져졌다. 여느 지인 하나 초대하지 못한 에드, 주목 없이 무대 위에 자리한 이 노인은 무대 구석에 자리한 소품이나 감자 자루 같았다. 그리곤 무심한 좌중을 향해 오래 묵힌 자신의 시를 담담히 낭독하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던 관객들의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시는 이 영화의 서사 전개를 위해, 적당히 대충 “좋은 시였다고 치자”라는 감독의 우격다짐식 통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들처럼 깊은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깊은 밤처럼 까만 무대 장막 앞에 놓임으로써, 더욱 도드라지는 홍옥처럼 붉었다.</p>
<p><br /></p>
<p>영화 ‘피아니스트’가 마지막에 연주될 쇼팽 발라드 한 곡을 위해 그 바깥의 모든 장면 장면을 적막으로 가득 채워두었듯, 이 영화의 절정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기나긴 러닝 타임 전체를 바침으로써, 미학적 반전과 카타르시스를 도모한 듯한 감상. 적당한 일상 밑에 자아를 감춘 사내, 고독한 노인의 일상과 시끌벅적한 부르주아 애송이들, 그들에게 위안을 받지만 그들 사이로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는 환경적 차이 및 이질감, 그리고 영화 내내 배경에 자리했던 적요함마저 지나쳐온 다음 무대 위로 시가 퍼졌고, 그건 아름다웠다. 이 시를 듣기 위해 나는 오늘 여기 있구나, 생각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2231824_rtezdiau.jpg" alt="0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br /></p>
<p><br /></p>
<p>그리곤 안녕, 정해진 결말이 우리를 기다렸다. ‘열정의 사회’는 와해된다. 에드의 낭독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단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LATE FAME’의 신기루는 슬며시 사라진다. 늦은 영광이었지만, 또한 찰나의 영광이었다. 영광이란 그런 것일까. 영예를 알지 못한 자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다시 오래된 선술집 문을 열며,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친구들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일절 묻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랜만이네”하고 화답한다. 그렇게 그는 반복적이고, 익숙하고, 정다운 일상으로 회귀한다.</p>
<p><br /></p>
<p>리뷰를 마무리하며, 문득 유명한 시구 하나가 떠올랐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네게로 가 꽃이 되었다’라. 에드에게 청년의 부름이 딱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는 것은 무척이나 귀해서, 오죽하면 우린 그 우연에 전생의 인연까지 끌어다 붙이지 않는지. 마주 본 두 사람 사이에 말로써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것은 적고, 그래서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나 싶다. 이렇듯 아무리 설명해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한편, 충분히 표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듯이, 알아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분모를 직감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을, ‘그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의 파편을 발견하는 일’이라고도 표현했던 것이리라.</p>
<p><br /></p>
<p>그러나 정녕 부름, 그것만으로 온전해지는 것일까. 거듭 생각해 보아도 아닐 듯싶다. 그의 곁에 가 온전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도 아름다울 일이지만, 꽃의 의의는 피어나는 것보다 유지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화려히 흩날리는 벚꽃보다, 오래지는 수국이 나는 좋다. 그가 상류 인텔리들로부터 익숙한 노동자들 곁으로, 화려한 사교계로부터 하강해 다시 낡은 선술집을 들어서는 마지막 뒷모습에서, 측은함보다 웃음이 먼저 스며나는 이유였을 것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서상덕]]></dc:creator>
<pubDate>Tue, 22 Sep 2026 23:25:4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47</guid>
<title><![CDATA[[Review] 예술은 진공 상태가 아닌 얽히고설킨 세계 속에 존재하니까 –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47</link>
<description><![CDATA[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미술을 전공하며 서울에 산 지 어느덧 3년차. 누군가 내게 일 년 중 가장 설레고 즐거운 때가 언제인가 묻는다면, 1등은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며, 2등으로 9월 첫째 주 서울 아트 위크의 ‘Kiaf &amp; Frieze Seoul (이하 키아프리즈)’이라고 답할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535_esrheapm.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0.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3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kiaf &="" frieze="" seoul="" 2026="" (coex)=""></kiaf></span><span style="font-family: " 맑은="" 고딕",="" sans-serif;="" font-size:="" 10pt;"="">&lt; Kiaf &amp; Frieze Seoul 2026 (COEX) &gt;&nbsp;</span><span style="text-align: start;"><kiaf &="" frieze="" seoul="" 2026="" (coex)="">전시 전경.</kiaf></span></p>
<p>&nbsp;</p>
<p>&nbsp;</p>
<p>세계 2대 아트 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가 2022년 서울에 진출하여,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아트 페어, 키아프 서울(2002~)과 함께 열린 지 올해로 5주년을 맞았다. 나 역시 2024년부터 매년 키아프리즈를 방문한지 어느덧 3년의 시간이 쌓였다. 언제나 아트 위크 기간은 내게 미술에 대한 무수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를 직접 와닿게 하고 시장의 동향을 어깨너머로 눈대중할 수 있는, 동시대 미술 산업의 살아 숨쉬는 현장 그 자체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554_dgeizobu.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2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lt;서도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gt; 전시 전경.</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키아프리즈 뿐인가. 이와 같은 대규모 아트 페어는 물론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을 필두로 하는 동시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들만 방문해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해가 갈수록 그 열기가 더해지는 것을 몸소 체감하게 된다. 다만 각종 전시를 보고 있자면 동시에 이러한 의문들도 함께 피어난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트 페어를 찾을까? 왜 다들 이 작가를 좋아할까? 이 작품은 왜 팔렸으며, 왜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을까?</p>
<p>&nbsp;</p>
<p>여기 그 질문들에 아주 포괄적으로, 솔직하고 알기 쉽게 풀어낸 책이 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initial;"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609_hywnwxpf.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8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이지윤 지음)</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lt;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gt;(쌤앤파커스)는 영국박물관 한국관 설립 업무를 맡았던 저명한 큐레이터이자 글로벌 아트 디렉터인 저자 이지윤이 전 세계 유수의 전시와 프로젝트 등을 이끌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써 내려간 ‘미술 생태계 Art Ecology’ 이야기이다.</p>
<p>&nbsp;</p>
<p>책은 제목부터 미술에 대한 강렬한 명제를 던지며 시작한다. 읽기 전 막연히 생각했다. 저자가 정의하는 순수성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소위 미술의 순수함이라는 것을 믿어보고 싶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술술 넘어가던 책장을 덮은 뒤 깨닫게 되었다. 저자가 제시한 명제에 담긴 내밀한 진심은 미술 작품과 작가에 대한 염세적 시선이 아닌, 외려 보여지는 수치와 숫자 너머 저자가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체득했던 예술을 둘러싼 모든 ‘불순한’ 것들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고찰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p>
<p>&nbsp;</p>
<p>마치 잘 짜여진 강의처럼 책은 6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미술사 속에서 미술 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해왔는지, 오늘날 동시대 미술계는 어떻게 바뀌고 있으며 어떤 논의점들이 있는지 다양한 층위에서 분석하고 소개한다. 동시대와 호흡하는 미술사 연구자, 학예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이자 미술의 열렬한 애호가로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특별하게 다가왔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서양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미술 생태계를 들여다보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initial;" />
<p><b>&nbsp;</b></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634_gogtogpq.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a href="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829" target="_blank">[Opinion] 둥글고 단단한 품 속에 존재하는 유연함을 찾아서 [문화 전반]</a></p>
   <p>&nbsp;</p>
   </blockquote>
<p>&nbsp;</p>
<p>지난 해, 영국 박물관의 한국관에 방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백자 대호, 즉 달 항아리에 대한 오피니언을 작성한 바 있다. 저자가 그 한국관의 설립 업무를 맡았던 큐레이터 였다는 뜻깊은 우연에, 나는 한 층 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영국 런던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던 이지윤 큐레이터는 주로 영국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사례로 가져와서 어떻게 미술이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가치를 드러내 왔는지 설명했는데, 실제로 해당 그림들을 본 입장에서 책의 내용들이 더욱 와닿기도 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645_yekmbcsn.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4.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2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lt;비, 증기,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gt;(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내셔널 갤러리)</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lt;비, 증기,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gt; 그림은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 자연과 인간의 경외로운 순간을 담아낸 풍경화의 정수이다. 제목처럼 비와 증기, 속도가 공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터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고 추상적인 붓질로서 포착해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뛰어난 현대미술가에게 수여되는 영국의 ‘터너상’이 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이다.</p>
<p>&nbsp;</p>
<p>터너와 산업혁명처럼, 책의 흐름에 따라 르네상스 시기의 조토에서부터 영국 창조산업이 장악했던 현대 미술계까지 예술가의 위대한 미술과 그 모든 과정에 영향을 주었던 사회적 상황, 시대 정신, 권력, 정치, 돈의 배경을 짚어가다 보니, ‘예술가는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익숙한 격언이 떠올랐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708_fbexctck.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2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lt;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gt;(얀 반 에이크, 내셔널 갤러리&gt;</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그러니까 이 말은 필연적으로 예술이 사회, 즉 무균실과 같은 아틀리에 너머의 맥락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영국에서도 활발히 논의되었던 신미술사학과 궤를 함께 하는 동시에, 시대적 예술은 문화 정책, 미술 시장, 컬렉터 등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진다는 명료한 통찰을 아우른다.</p>
<p>&nbsp;</p>
<p>미술은 진공 상태 속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분석 대상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담론이 어지러이 섞인 세계와 영향력을 주고받는 일종의 ‘생태계’ 속에 존재한다. ‘순수함’이라는 가치 마저도 만들어낼 수 있는 고도화된 산업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미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해당 도서는 이러한 생태계 속 시장 경제 구조에도 주목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영국의 창조산업, 그리고 K-미술 시장을 말하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initial;"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727_xyysgorp.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6.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2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lt;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국립현대미술관 서울&gt; 전시 전경.</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최근 전공 수업을 통해 ‘문화예술 산업’의 개념을 공부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영국이 ‘창조 산업 Creative Industry’이라는 효시적 명칭 아래 문화 정책을 추진해 당시 국가 경제의 10%에 달하는 효과를 보았던 사실이었다. 이 책에서도 역시 세계 최초의 국립 공공 박물관 설립, YBA 등의 순수미술 Fine Art 작가들의 발굴과 육성, 오늘날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가 된 정부의 예술 지원 방침인 ‘팔길이 원칙’ 등을 말하며 영국의 창조 산업과 그 국제화를 이야기한다. 하물며 세계 미술품 경매 시장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소더비 Sotheby’s와 크리스티 Christie’s가 탄생한 곳 역시 영국이니 말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744_cdmmawwe.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7.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2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 전경.</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특히 미술에 대해 그럭저럭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후반부의 미술 시장, 미술품 경매, 그리고 미술의 자산화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미술 생태계를 움직이는 컬렉터들은 어떤 사람일까? 아트 마케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미술 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며 자산이 되는가. 저자는 이처럼 궁금했던 지점들을 실제 동시대 미술사 속 주요 사례들을 바탕으로 명쾌히 논한다. 미술 작품을 시장 논리에서 벗어난 오직 미학적인 대상, 혹은 투자의 수단이란 평면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 속 주목할 만한 ‘가치’ 자본으로 치환해 바라보는 지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803_wtxmream.jpg" alt="043_사진자료_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lt;서도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gt; 전시 전경.</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start;">&nbsp;</span></p>
<p>책의 말미는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의제, ‘한국 미술’로 귀결된다. 앞 전 언급했던 키아프리즈를 비롯해 COVID-19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는 아시아 미술 시장의 움직임은 물론, 우리 미술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유례 없이 우리 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반짝 유행이 아닌, 미술사의 새로운 페이지로 쓰일 한국 미술로 거듭나려면 우리는 우리 미술에서 어떤 가치와 방향성을 읽어내야 할까.</p>
<p>&nbsp;</p>
<p>저자는 표면적인 질문 던지기로 끝나지 않고 한번 더 강조한다. 실제 우리 미술 산업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있고, 어떤 미술이 주목 받는지 등 동시대의 빠르게 쌓여가는 통계와 경험에 기반한 맥락, 즉 ‘미술 생태계의 흐름’ 속을 들여다보자고 말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미술을 애호하는 이들에게 교양서로도, 미술계 진로를 꿈꾸는 모든 미술학도들에게도 현재의 지평을 파악하기 위한 준비서로도 추천하고 싶은 시의적절한 책이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명쾌한 선언 아래, 그동안 알지 못했던 미술의 진짜 생태계를 보게 하는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i>*모든 사진 자료는 에디터가 직접 촬영하였습니다.</i></p>
<p><i>&nbsp;</i></p>
<p><i>&nbsp;</i></p>
<p><i>&nbsp;</i></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10854_zlouencu.jpeg" alt="컬쳐리스트 태그.jpe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신지원]]></dc:creator>
<pubDate>Wed, 23 Sep 2026 11:09:5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2518</guid>
<title><![CDATA[[Review] 예술은 얼마짜리인가 -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2518</link>
<description><![CDATA[비싼 그림과 위대한 그림은 다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프리즈 서울과 키아프가 매해 가을 서울을 뒤덮는 지금, 작품 아래엔 어김없이 가격표가 붙고 구매자는 작가의 학력과 전시 이력부터 묻는다.</p>
<br />
<p>한 점의 그림이 팔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은 질문 하나를 지나친다.</p>
<p>&nbsp;</p>
<p>"이 가격은 대체 어떻게 정해진 걸까."</p>
<p>&nbsp;</p>
<p>미술은 더 이상 순수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이지윤의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미술은 애초에 순수했던 적이 없었다고.</p>
<p>&nbsp;</p>
<p>영국박물관 한국관 설립 실무로 경력을 시작해 20년 넘게 유럽과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어온 글로벌 아트 디렉터 이지윤의 첫 책이다. 저자는 미술을 상품이자, 한 시대의 철학·사상·경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역사적 산물로 규정하며 책을 연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여는 한 문장이 있다. 미술 작품은 세 번 태어난다. 맨 처음엔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두 번째는 미술시장에서, 세 번째는 미술관이나 컬렉터의 손에서. 이렇게 컬렉션이 된 작품은 그 영향력에 따라 저마다 다른 운명을 겪는다. 이 세 단계의 삶을 각각 들여다보면, 미술관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그림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르네상스 공방의 주문서부터 오늘날 AI가 매긴 경매가까지, 이 책이 700년에 걸쳐 따라가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의 탄생이다.</p>
<p><br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시장 가치와 미술사적 가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시리즈처럼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일지라도, 대중의 기호가 빗겨가면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게 매겨진다. 미술시장에는 논리도, 정답도 없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34251_vcffquum.jpg" alt="main_exb_img341.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p>
<p>&nbsp;</p>
<p>&nbsp;</p>
<p>거리 예술가 카우스는 버스 정류장 광고물에 자신의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눈에 X자를 새겨 넣어 광고 내용을 변형하는 게릴라 아트였다.</p>
<p>&nbsp;</p>
<p>이 작업이 유명 브랜드들의 눈에 들며 그는 스타 작가로 부상했고, 이후 그의 작품은 경매에서 1,478만 달러에 낙찰됐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전시 이력이 이 가격에 힘을 실었을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32450_pqdwmnnd.jpg" alt="image_5681310791510800594160.jpg" style="width: 700px; height: 925px;" /></p>
<p>&nbsp;</p>
<p>&nbsp;</p>
<p>현대미술만이 아니다. 고전미술도 역시 상업적이었다.</p>
<p>&nbsp;</p>
<p>레오나르도 다빈치의 &lt;살바토르 문디&gt;는 2023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품이다. 4억 5,000만 달러에 낙찰돼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업성을 띤 작품도 사회적·경제적 맥락과 얽혀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생태계는 14세기, 미술시장이 처음 형성된 르네상스 초기에 시작돼 600~700년간 서구 사회에서 공고해졌다. 그러니 순수한 미술은 애초부터 없었다. 고전미술도, 현대미술도 처음부터 상업적이었다.</p>
<p>&nbsp;</p>
<p>이러한 관점을 가지면 작품을 미술사학자 마이클 백샌달이 말한 '시대의 눈period eye'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문화·교육·종교·경제·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미술 생태계 안에서 작가와 작품의 위상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술의 외부라고 여겨졌던 것들 속에서 오히려 미술 그 자체를 더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첫 장부터 던지는 질문이다.</p>
<p><br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르네상스, 작가의 브랜드가 생긴 시기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르네상스는 화가의 이름이 비로소 역사에 남기 시작한 시대다. 그 이전 중세에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그림의 목적이었기에, 아무리 잘 그려도 화가는 무명으로 남았다.</p>
<p>&nbsp;</p>
<p>반면 르네상스 초기부터는 작가만의 스타일이 생기고 '작가'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기 시작한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르네상스 3인방'이 바로 그 전환점의 얼굴들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9/20260923132632_ydxtluak.jpg" alt="Last_Judgement_(Michelangelo).jpg" style="width: 700px; height: 771px;" /></p>
<p>&nbsp;</p>
<p>&nbsp;</p>
<p>다만 이 시대의 부호와 귀족들이 그림을 주문하면, 미술가는 주문받은 작품을 '생산'하는 것에 가까웠다. 미켈란젤로는 30대에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했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lt;최후의 심판&gt;을 그렸다. 프레스코화 역시 자유로운 창작이 아니라 철저한 주문제작이었다. 후원자의 의뢰에 따라 사양이 먼저 정해지고 그에 맞춰 제작되는 '선주문 후제작' 방식이었던 것이다. 바티칸의 중요한 작품들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같은 화가들에게 맡겨진 것도, 글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p>
<p>&nbsp;</p>
<p>저자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미술은 왕과 귀족, 사제 같은 권력자와 신흥 상인계급의 주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하다. 돈은 작품을 만들고, 작품은 돈을 만든다."</p>
<p><br /></p>
<p>또한 17세기 중반, 영국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그랜드 투어'가 성행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지와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돌며 외국어와 국제 감각, 예법을 익히는 필수 코스였다. 오늘날 여행지에서 기념품이나 사진을 남기듯, 이들은 여행길에 그림을 사 모았다.</p>
<p><br /></p>
<p>카날레토는 사진 한 장에 담을 수 없던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화폭에 남겼고, 이 그림들은 오늘날의 엽서 같은 역할을 했다. 카날레토가 '포스트카드 화가'로 불리는 이유다. 수요층의 필요를 정확히 채워준 그림 덕분에 그는 당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순수한 미술은 애초에 없었다</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예술은 늘 시대와 함께 움직인다. 그리고 시장의 흐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이 책을 두고 "작품만 보이던 사람은 시장을, 시장만 보이던 사람은 비로소 예술을 보게 될 것"이라 평했다. 정확한 표현이다. 예술만 바라보던 시선에는 시대와 시장이라는 새로운 창이 열리고, 시장만 좇던 시선에는 비로소 예술이라는 창이 열린다.</p>
<p><br /></p>
<p>이 책을 읽고 나면 미술관에서 그림 앞에 서는 태도 자체가 달라진다. 작품의 형식과 아름다움만 보던 눈에, "이건 누가, 왜,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게 했을까"라는 질문 하나가 새로 생긴다. 특히 흑사병 시기의 그림값 폭등이나 그랜드 투어 시대의 '포스트카드 화가' 이야기처럼, 시대의 위기와 욕망이 고스란히 그림값으로 환산되는 대목들은 지금의 미술시장을 이해하는 데도 유효한 참고가 된다. 미술을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만 여겨온 독자라면 이 책이 다소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냉정함이야말로 미술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앞에서 한 번쯤 "이 가격은 대체 어떻게 정해진 걸까" 궁금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술관도 아트페어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소희]]></dc:creator>
<pubDate>Tue, 22 Sep 2026 00:34: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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