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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트인사이트</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link>
<description>아트인사이트 – 문화예술은 &#039;소통&#039;입니다 - ART insight</description>
<lastBuildDate>Sat, 01 Aug 2026 19:50:26 +0900</lastBuild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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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 isPermaLink="false">81861</guid>
<title><![CDATA[[Opinion]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61</link>
<description><![CDATA[영화 애 대한 단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b><span style="font-size: 18px;">1. 왜 하필 호포항인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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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1629_dezoohwx.jpg" alt="0793806d-7b58-4fbc-9179-b47547e536ba.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8px;" /></p>
<p>&nbsp;</p>
<p>&nbsp;</p>
<p>외계 생명체의 등장이라는, 어쩌면 인류사를 뒤흔들 만한 대사건의 무대로 나홍진 감독은 '호포항'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선택하였다. 비무장지대 인근의 늙고, 낙후된, 세상의 관심에서 완전히 비껴 있는 어촌 마을, 그곳은 최전선이면서도 가장 방치된 곳이었다. '인류'라는 거대한 개념 아래, 실상 얼마나 불균등하고 무심한 분배로 생명을 영위해나가기에 급급한지, 결국 그 비극과 위기들을 온몸으로 관통하는 존재들은 언제나 중심보다는 주변부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의뭉스러운 공간적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었던 메시지는 영화의 주제를 예고하고 있었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2. 마을에서: '무지함'은 무고한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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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1648_knhogshh.jpg" alt="5f4f08d7-847e-4130-a558-47547a8f399a.jpg" style="width: 700px; height: 323px;" /></p>
<p>&nbsp;</p>
<p>&nbsp;</p>
<p>지리적 배제는 곧 인식론적 부재로 이어진다. 영화 초반부의 화면들과 서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한 지점은 우리가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범석에 의해 목격되는 극 초반의 서사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완연히 조립되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크리처의 존재와 위력이 예고되는 방식에 그치기 때문이다. 범석은 늘 한 발 늦게 도착해 크리처의 현상을 두 눈에 담을 기회를 놓치고, 주변 인물들에 의해 구전되는 불완전한 묘사들만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결국 관객들은 '가장 잘 알지 못하는 자'의 '무지'의 눈으로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이 점이 극중 긴장을 해체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지'와 '미지'라는 인식의 결핍 속에서 비롯되는 위압감은, 공포 그 너머의 경외의 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결국 가장 무력해지는 것, 무서운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p>
<p><br /></p>
<p>극 전반부의 무대는 과거 삶의 본거지였던 마을에서 시작한다. 이 파트의 클라이맥스에 거의 도달하는 지점에서 범석과 낙연 듀오가 과실로 정육점 사장 경석을 살해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본래 인간이 동물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를 도살하던 공간이 인간이 동일 인간을 살해한 공간으로 변질된다는 설정은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남긴다. 이 장면은 차후 언급할 포스트인류중심주의적 관점에서도 강력한 근거로 작용한다. 동시에 인간의 '무지함'과 '무모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다. 당연스레 SF 영화에서 연상되는 '크리처를 죽이는 인간', '인간을 학살하는 크리처'의 모습과 다르게, 스스로의 공포에 압도된 인간들이 같은 인간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장면은 해학적으로 연출되었지만, 더 이상 무고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증폭시킨다.</p>
<p>&nbsp;</p>
<p>&nbsp;</p>
<p><br /></p>
<p><b><span style="font-size: 18px;">3. 산으로: 피식자로 전복되는 순간</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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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인간의 질서와 법, 도덕이 __형식적으로나마__ 작동하는 마을과 다르게, 후반부의 '산'은 그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는 공간이다. 인외의 공간으로의 이동에서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서 목숨을 갈구하는 피식자로 전복된다. 산 나뭇가지에 널려있는 사냥과 박피의 흔적들은 사건 이전 포식자로 군림하였던 인간의 역사를 비추는데, 이에 무색하게 크리처들의 반격에 무참히 학살되는 인간들을 보며 우리는 초조함을 느낀다.</p>
<p><br /></p>
<p>동시에 크리처들의 디자인은 공간의 변화와 어느 정도 조응한다. 마을을 헤집어 놓은 '바미기르'는 비교적 거인의 형상에 가까워 보였지만, 산에서 등장하는 크리처들은 나뭇가지와 나무껍질 같은 자연물을 연상시키는 텍스처로 보였다. 또한 연속적으로 앞에 보이는 물체들을 집어던지며 공격하는 경향을 보인 '바미기르'보다, 산에서의 격투를 보인 '마베이요'의 일격은 이성을 잃고 돌격하는 짐승같은 전력으로 인물들을 압도했는데, 이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닌 하나의 태도를 표명하는 것과 같이 느꼈다. 이러한 연출은 분개하는 자연 아래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허무한 존재인지에 대한 경외감을 가중시킨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4. 톱질과 총질: '진짜' 크리처는 누구인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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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장면은 범석이 괴물의 해부를 요청한 박사가 죽은 크리처를 해부하는 부분이었다. "사람 손과 같은 형태네요.", "우리랑 똑같네.", "걔 아까 우는 것 같던데"와 같은 인간과의 동질감을 표방하는 대사들을 뱉으면서도, 그녀의 손에 들려진 톱은 멈추지 않는다. 광폭한 톱질이 질긴 외피를 가르고 결국 내장을 드러내는 순간에, 고조되는 듯한 불안한 배음이 깔리며 마치 슬래셔 무비를 관람하는 것 같은 꺼림직함이 동반된다. 그리고 그 광적인 행위의 끝에 얻어낸 결론은 고작 "이건 우리가 아는 쪽이 아닙니다."라는 무지의 재확인뿐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살육'을 실행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은, 영화가 말하는 '진짜 괴물'의 실체가 외계 생명체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p>
<p><br /></p>
<p>한편, 이 모든 비극의 서막에는 목수 양배가 있다. 숲에서 아기 외계 생명체를 총으로 사냥해 집으로 데려온 그의 행동에서부터 재앙은 본격화된다. 이 지점에서 숲과 마을이 교차편집되며 양배의 집을 비추는데, 그의 집에 전시된 파손된 마네킹과 즐비한 박제동물 등의 가학적이고 불길한 오브제들이, 마치 호러무비 속 살인마의 집에 입장하는 것만 같은 긴장감을 조성한다. 크리처의 존재보다 더 공포스럽게 조성된 양배의 공간은, 인간의 내밀한 잔혹성이 외부 미지의 존재보다 더 근원적 공포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5.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인류중심주의의 시각에서</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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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 /></p>
<p>우리를 극 속으로 인도하는 주인공 범석은 단지 무지하지만은 않다. 무지함과 동시에 겁도 많고, 무능한 자의 전형이다. 바로 뒤에 괴물이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경찰임에도 노쇠한 마을 주민들만큼도 총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극을 이끄는 범석의 캐릭터성이 인류 전반의 경향들과 공명하며, 그간 인간들이 오인해 온 지점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그동안 스스로를 고결하고 인도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우월감으로 자신을 고취해 온 인간들이 보이는 무지하고 무모한 행태들은 적나라한 만큼 인정하기 쉽지 않다. 해부학 박사의 손에 들린 톱, 정육점에서의 총질, 양배의 집에 전시된 물건들__ 이 모든 화면들이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해온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는 이미지를 정면으로 부정한다.</p>
<p><br /></p>
<p>포스트인류중심주의의 관점에서는 초점이 조금 다른 지점을 향한다.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를 얼마나 가학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해 왔는지를, 이 영화는 집요하게 따라가며 포착한다. 양배의 소행을 인지한 후에야 '괴물'에서 '외계인'으로 전환되는 호칭, 신체를 해체해버리는 해부를 통해 대상을 규명하려는 잔혹성, 눈물을 보고서야 비로소 감정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뒤늦은 연민__ 이 모든 순간들이 인류의 기준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타자를 재단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투영한다.</p>
<p>&nbsp;</p>
<p><br /></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6. 희망은 어디까지 뻗어나가는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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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 /></p>
<p>제목을 장식한 'HOPE(희망)'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 결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대사와 "운명을 바꿔라"라는 명령은, 우리가 이 디스토피아적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서로를 믿고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와 노력뿐이지 않을까 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서로'의 범주는 인간, 그 너머까지를 포용한다.</p>
<p><br /></p>
<p>이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__ 희망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뻗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인류인가, 국가인가, 세계인가, 아니면 우주 전체인가. 죽은 줄 알았던 성기가 살아있고, 아기 외계인 칼리를 되살릴 수 있다는 암시로 영화가 끝맺는 방식은, 이 희망이 결코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7. 마무리하며: 누가 진짜 괴물인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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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1746_qabmmklf.jpg" alt="60aaa812-f685-46a7-b4ff-1726b78cf37e.jpg" style="width: 700px; height: 323px;" /></p>
<p>&nbsp;</p>
<p>&nbsp;</p>
<p>이러한 정서는 인간 중심적 휴머니즘의 비극을 코스믹 호러와 크리처물의 문법으로 풀어내는 영화의 계보 안에 자연스럽게 위치한다. 멀리는 메리 셸리의 &lt;프랑켄슈타인&gt;에서부터, 가까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lt;셰이프 오브 워터&gt;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들어내거나 마주한 비인간 범주 속에 위치한 '타자'들이, 실은 인간보다 더 순수하거나 더 상처받기 쉬운 존재였다는 인식은 반복되어 온 서사적 전통과 유사하다. &lt;호프&gt;가 풍기는 분위기는 이들과 사뭇 다르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질문 __누가 진짜 괴물인가__ 은 상당히 유사한 계보 위에 놓여 있다고 느꼈다.</p>
<p><br /></p>
<p>&lt;호프&gt;는 결국 웅장한 스펙터클과 크리처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지극히 오래되고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만났을 때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 무지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한 후에야 비로소 '이해'라는 이름의 뒤늦은 연민에 도달하는가. 그 일상적 오류들이 전우주적으로 확장된 순간에 희망을 부르짖는 영화의 공상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p>
<p>&nbsp;</p>
<p><br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문경란]]></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10:11:3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4</guid>
<title><![CDATA[[Opinion] 야망은 언제 비호감이 되는가 - 마티 슈프림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4</link>
<description><![CDATA[아이러니하게도, &#039;탁구&#039;가 아니라 &#039;타인&#039;이 수단이 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1537_eoovysll.jpg" alt="포스터 3.jpg" style="width: 700px; height: 1167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center;">본 오피니언은</p>
<p style="text-align: center;">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span style="font-size: 18px;">마티 슈프림</span></b></p>
<p style="text-align: center;">Marty Supreme</p>
<p style="text-align: center;">2026. 07. 01.</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티모시가 탁구치는 영화. 재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딱 그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씨네Q를 찾았다. 모범생이 핑퐁하는 영화가 어떻게 재밌다는 건지 궁금했다. 최근 들어 영화의 예고편을 확인하지 않는 고집이 생겼고,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은 줄거리와 포스터 정도였다. 그렇게 한강을 지나며 아무도 시키지 않은 혼자만의 추리극이 시작됐다. 포스터의 캐릭터가 너무나도 오묘했기 때문이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런닝을 입고 콧수염을 달았으면서 눈에는 샌님 안경을 얹었다. 그 와중에 주종목은 탁구란다. 의문은 커져만 갔다. 탁구치는 프레디 캐릭터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가장 높은 곳으로!"</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탁구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마티 마우저는 굴욕적인 패배 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공을 손에 넣기로 결심한다. 최고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지옥까지 질주하는 마티 마우저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줄거리까지 보고 나서야 대충 감이 잡혔다. 그래, 이건 체육인 버전의 「위플래쉬(2014)」구나. 앤드류가 드럼채를 들고 자신의 영혼을 부수었듯이 마티는 탁구채를 들고 광기 어린 야망을 보여주겠구나. 그렇다면 재밌다는 후기도 이해가 간다고 생각하며 영화관에 도착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상영이 시작됐고 10분 만에 눈썹 앞머리가 모였다.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가 싶어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오프닝에 정자가 나온다. 어떠한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성교육 시간에나 보던 교육 영상 비슷한 게 나온다. 마티는 자신이 일하는 신발가게에서 애인과 몰래 섹스를 하고, 그의 정자가 난자로 향한다. 카메라가 점점 줌아웃 되면서 구형의 난자는 탁구공으로 바뀐다. 그리고 테이블에 튕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부터 체감할 수 있었다. 이건 미친 영화다. 그것도 '신선하게' 미친 영화.</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span style="font-size: 18px;">야망은 항상 허락되는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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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크게 두 가지의 경우에 야망이 비판받는다고 생각한다. 첫째, <u>그것이 부정한 경우</u>다. 히틀러는 누구보다 커다란 야망을 가졌다. 하지만 비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거센 비난을 받는다. 둘째, <u>야망은 크지만 나태한 경우</u>다. 성공하겠다고 떠들면서 놀고먹기만 하면 '한심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진정성이 의심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위의 내용과 정확히 반대로만 하면 응원을 받는다. 목표가 건강하고 진취적이며,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최소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진 않는 것이다. 많은 소년물과 스포츠물의 주인공들도 이러한 문법을 따르며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슬램덩크의 강백호, 원피스의 루피, 국내 영화인 국가대표의 스키점프팀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마티 마우저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10159_lpsmmpkt.jpg" alt="common (15).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4px;"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탁구로 최고가 되겠다.' 너무나도 건전한 목표다.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없애겠다는 타노스에 비하면 이 얼마나 바람직한 꿈인가? 게다가 마티는 탁구에 진심이다. 물론 탁구 연습을 하는 장면은 딱히 없지만, 다른 방면에서 최선을 다한다. 대회를 앞두고 수감되지 않기 위해서 음식물 쓰레기 더미에 뛰어든다. 탁구 대회에 어떻게든 참가하기 위해서 탁구채로 엉덩이를 맞는 수모를 견딘다. 탁구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만 봤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경기에서 이기면 너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거야.</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밀턴'은 마티가 경기에서 이기면 곤란해지는 인물이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이 튀는 마티를 통제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남자의 협박에도 가소롭다는 듯 비웃고 다시 탁구공을 쥔다. 연고 하나 없는 일본에서, 돌아갈 비행기 값도 없으면서.</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치의 양보도 없던 승부가 겨우 끝났을 때 티모시 샬라메가 지었던 찰나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환희와 안도, 그리고 상실이 한데 뒤섞인 얼굴이었다. 러닝타임 내내 인물의 목표가 부와 명예인 것처럼 보여졌지만, 그 너머에 가장 지키고 싶었던 '정체성'이 있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영화적 감동과는 별개로 인물 자체는 여전히 비호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span style="font-size: 18px;">주인공이 이 정도로 비호감이어도 되나요?</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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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마티는 타인의 감정이나 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탁구'가 아니라 '타인'이 그의 수단이 된다. 탁구는 아무런 위로도 보험도 줄 수 없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게 취급하고, 정작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구처럼 쓰다가 버린다. 영화에서는 대표적으로 두 여자가 나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15254_dxvesitk.jpg" alt="common (1).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4px;"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케이 스톤</b>은 한때 유명했으나 지금은 한물 가버린 배우다. 가득 찬 내면의 공허 속에서 작게 일렁이는 것은 연기에 대한 작은 불씨뿐이다. 본인조차도 거기에 남아 있는지 몰랐을 사소한 불씨.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마티 마우저의 등장으로 인해 불씨에 은근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마티는 그녀가 잃어버린 열정과 재능에 대한 확신,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책 없는 모습을 바보 같다고 여기면서도 비싼 보석 목걸이를 선물한다. 탁구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종의 이유로 마티가 목걸이를 잃고 나서 하나만 더 달라고 조를 때에도 한숨 끝에 자택으로 돌아간다. 위험부담이 따르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마티는 진작에 그녀의 목걸이를 훔쳤다가 레플리카인 것을 알고 허망해했었다. 심지어 그걸 들고 다시 찾아가서 로맨틱한 연기까지 했다. '그냥 팔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당신에게 소중한 거니까... 가지고 돌아왔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보다, 무너진 그녀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는 점에서 성향이 드러난다. 목걸이를 찾으러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엉엉 울고 있는 케이의 모습을 목격한 마티는 지체없이 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그녀의 부자 남편을 찾는다. 자신을 경기장으로 보내줄 두 번째 루트를.</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뜻했던 응원이나 그간 나눴던 정을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동요할 법한데, 그저 목걸이 배달부에게 변수가 생겨서 일이 꼬였다는 듯한 태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22219_vigmfpqh.jpg" alt="common (2).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4px;"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레이첼 미즐러</b>는 마티의 소꿉친구다. 어릴 때부터 마티를 짝사랑해 왔으며, 결혼 후에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서 불륜을 저지르는 캐릭터다.&nbsp;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의 사랑은 불건강한 집착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도 마티를 망치려 든 적은 없다. 원망하면서 화를 내면서도 막상 경찰이 오면 탈출구를 알려준다. 관심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기행각에 가담하기도 한다. 임산부라는 자신의 상황을 이용해 가면서.</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마티는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나는 질외사정을 한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서 불같이 화를 낸다. 오프닝에서 정자가 난자로 헤엄치는 것을 관객들이 다 함께 목도했는데도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마티가 정말 믿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걸까. 이어지는 러닝타임 동안 계속 궁금했다. 그리고 결말까지 보고 나온 지금은 확신한다. 마티는 진작부터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하다. 간절히 바랐던 과업이 끝나자마자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레이첼이 출산한 병원이었다. 그는 갓 태어난 아이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span style="font-size: 18px;">왜 탁구여야 했을까?</span></b></p>
<hr style="text-align: justify; 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left;">영화는 탁구 자체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다. 탁구의 유래나 규칙, 스포츠 정신의 아름다움</span>···.<span style="text-align: left;">&nbsp;이러한 것들은 모두 논외로 다뤄진다. 심지어 라이벌조차도 '강력한 적수' 보다는 '전쟁으로 인해 청력이 손실된 일본의 국민 영웅'이라는 캐릭터로 강조된다.&nbsp;</span><span style="text-align: left;">스포츠 자체보다는&nbsp;</span><span style="text-align: left;">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소재들을 놔두고 핑퐁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곱씹어볼수록 이 영화는 '탁구'라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쉴 틈을 주지 않는 자극적인 전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인공의 성향, 통통 튀는 개성 있는 연출. 이 모든 것이 리드미컬한 스포츠인 탁구와 완벽하게 어우러져서 시너지를 냈다. 무엇보다 영화의 오프닝과 결말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흰 공으로 매치 컷 되었던 자궁에서 주홍빛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탁구 경기에서 최종 우승한 뒤 오렌지색 공을 대중화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마티 마우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마도 다시는 경기장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질 삶이 무조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간절히 원했던 우승 트로피는 놓쳤으나, 동그랗고 주홍빛인 '마티 주니어'가 그에게 안겨졌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영화는 끝에서 마티에게 선택권을 남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기적인 주인공에게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생명의 탄생을 통해 철이 들기를 바라본다. 비호감의 이유는 처음부터 야망의 유무가 아닌 책임감의 부재에 있었으므로.</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32048_zkghbbst.jpg" alt="컬쳐리스트 이지연.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지연]]></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3:15:4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2</guid>
<title><![CDATA[[Opinion] 도살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2</link>
<description><![CDATA[So it goes(뭐 그런 거지), 그 말이 감당하지 못한 것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90942_cgcyaizy.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49px;" />
</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보니것은 이 소설의 서두에서 이미 자신의 실패를 고백한다. 전쟁이 끝나고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드레스덴에 관한 책은 "말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14~15)고 적는다. 그날을 함께 겪은 전우 오헤어를 찾아가지만 "우리는 마치 전쟁 이야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처럼 이따금 낄낄대고 싱글거렸지만, 둘 다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28). 이 서문이 소설 전체의 방법을 예고한다. 《제5도살장》은 재현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재현을 포기한다. 대신 실패 자체를 형식으로 삼는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왜 하필 SF였는가: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자화상</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1945년 드레스덴 폭격은 히로시마보다 사망자가 많았는데도 오랫동안 미국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23). 보니것은 이 학살을 정면으로 쓰는 대신 시간여행과 외계 행성 트랄파마도어를 경유한다. 도피로 오해받기 쉬운 선택이지만, 소설 안에서는 필연으로 그려진다. 병상에서 빌리 옆에 눕는 전직 대위 로즈워터가 이유를 말한다. <i>"그들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과 우주를 다시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과학소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131</i>). 사실주의가 감당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SF가 시작된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이 문장이 가리키는 인물이 킬고어 트라우트다. 무명의 SF 작가다. <i>"소설을 몇 권이나 썼는지는 본인도 모른다—그런 물건을 아마 일흔다섯 개는 만들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돈이 되지 않았다"(206~207)</i>. 보니것 자신을 자조적으로 옮겨놓은 자화상에 가깝다. 로즈워터는 "킬고어 트라우트가 글을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142)이라고 외친다. 이 외침에는 형식의 초라함과, 그 형식이 아니고서는 닿을 수 없는 진실 사이의 간극이 함께 담긴다. 트라우트의 문장은 형편없지만 아이디어는 전쟁을 겪은 자의 자리에서 나온다. 그러니 자전적 이야기를 SF로 썼다는 것은 형식 실험이 아니다. 사실주의로 감당이 안 되는 학살 앞에서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서사가 무너지는 방식: "So it goes"와 시간여행</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서사 능력의 붕괴는 두 장치로 나타난다. <b>하나는 "So it goes"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예고 없이 일어나는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이다.</b> 표면적으로 둘은 정반대다. "So it goes"가 사건을 압축하고 멈춰 세운다면, 시간여행은 사건을 끝없이 재배치하고 흩어놓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같다. 트랄파마도어인의 시간관에 죽음은 없다. <i>"지구인을 연구하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면, '자유의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전혀 몰랐을 겁니다. (…) 그런데 오직 지구에서만 자유의지 이야기를 합니다"(113)</i>. 이 철학을 받아들이면 사건에 인과를 부여하고 원인을 추궁하는 서사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5819_nlakohet.jpg" alt="제5도살장 자유의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2px;" />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붕괴는 인물 설계에서도 이어진다. 전통적인 전쟁서사라면 클라이맥스가 되었을 장면, 가장 도덕적인 인물 에드거 더비가 폐허에서 찻주전자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대목은 감정의 고조 없이 지나간다(264~265). 반대로 가장 무력한 반영웅 빌리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뒤바뀐 배치는 우연이 아니라 핵심 주장이다. 전쟁은 도덕적 응분을 따르지 않는다. 생존은 자격이 아니라 우연의 문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위안인가 면죄부인가: 트랄파마도어 철학의 양면</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left;">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span><b style="text-align: left;">소설이 트랄파마도어의 운명론을 곧이곧대로 지지하는가다.</b><span style="text-align: left;"> 답은 두 방향으로 갈리고, 둘 다 소설 안에 근거가 있다.</span>
</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먼저 옹호할 수 있는 쪽. 트랄파마도어의 철학은 빌리에게도 독자에게도 실제로 위안이 된다. 죽음이 한 순간의 나쁜 상태일 뿐이고 다른 모든 순간에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생각은, 상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발판이다. "여기서 행복한가요?"라는 물음에 빌리가 <i>"지구에 있을 때와 비슷하게 행복합니다"(146)</i>라고 담담히 답하는 것도 이 철학 덕분이다. 슬퍼할 기력조차 없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려고 두는 최소한의 거리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그러나 화자는 말미에서 이 철학에 완전히 승복하지 않는다. <i>"빌리 필그림이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이 사실이라 해도, 즉 우리가 가끔 죽은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영원히 사는 것이라 해도, 나는 그리 기쁘지 않다"(260)</i>. 이 한 문장이 앞선 위안의 논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위안이 되는 것과 진실인 것은 다르고, 진실인 것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도 다르다. 모든 순간이 이미 정해져 있고 자유의지가 착각이라면, 드레스덴 폭격을 결정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훗날 럼포드가 빌리에게 <i>"그럴 수밖에 없었소"(246)</i>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논리가 가해자 쪽으로 넘어갈 때 어떤 말이 되는지 보여준다. 트라우마를 견디는 개인의 언어로는 정직하고 필요한 것이, 책임을 묻는 정치적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가해와 방조를 흐리는 면죄부가 된다. 결국 소설이 하는 일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능성을 나란히 열어둔 채 봉합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연줄 없는 자들의 신: 예수를 다시 쓰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left;">이 이중성이 가장 선명한 곳이 예수를 다루는 대목이다. 로즈워터가 낭독하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소설 《우주에서 온 복음》에서, 우주의 방문객은 기독교인이 그토록 쉽게 잔인해지는 이유를 연구하다가 결론에 이른다.</span>
</p>
<p>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5628_mnxublwk.jpg" alt="제5도살장 예수.jpg" style="width: 700px; height: 778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left;">"<i>그러나 복음서들은 실제로는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을 죽이기 전에 반드시 그가 연줄이 시원찮은지 확인해라. 뭐 그런 거지."(140)</i></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이어 그리스도의 신성이 오히려 독자를 안심시킨다는 점을 짚는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
   <i>"그리스도 이야기의 약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가 사실은 우주 최강의 존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방문객은 그렇게 말했다. 독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어서, 십자가 처형 대목에 이르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오, 이런—이 사람들은 린치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게 틀림없어! 이 생각에는 형제가 있었다. '린치하기에 적당한 사람들이 있다.' 누굴까? 좋은 연줄이 없는 사람들이지. 뭐 그런 거지."(140~141)</i>
</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우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트는 새로운 복음으로 구도를 뒤집는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
   <i>"우주의 방문객은 지구에 새로운 복음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이 복음에는 예수는 실제로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는데, (…) 그러다가 이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죽기 직전, 하늘이 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아래로 울려퍼졌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이 부랑자를 아들로 입양하겠으며, (…) 이 순간부터 아무런 연줄 없는 부랑자를 괴롭히는 자는 누구든 무시무시한 벌을 받을 것이다!"(141)</i>
</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세 단계를 나란히 놓아본다. <b>자비를 가장한 선별의 폭로, 독자의 안도감에 대한 조롱, 연줄 없는 자를 뒤늦게 입양하는 신. 이 우화는 신약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비라는 이름의 제도가 실제로는 연줄 있는 자를 먼저 보호한다는 사실, 전쟁이 되풀이해 증명해온 사실을 드러낸다.</b> 새로운 복음이 신을 부정하지 않고 뒤늦게 개입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의는 사후에야, 그것도 천둥과 함께 요란하게 도착한다. 이미 죽은 자에게는 소용이 없는 방식으로.</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빌리가 진료실에 걸어두는 평온의 기도문도 같은 곳을 향한다. <i>"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82)</i>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기도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i>"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82)</i>. 노력과 수용 사이의 균형을 청하던 기도가, 빌리에게 와서는 미래조차 정해져 있다는 선언과 함께 체념의 다른 이름이 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무대 밖의 여자들: 발렌시아와 몬태나 와일드핵</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left;">반영웅적 태도, 위안과 책임 사이의 어긋남은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발렌시아는 처음부터 신체로 환원된다. </span><i style="text-align: left;">"발렌시아는 일리엄 검안학교 소유주의 딸이었다. 부자였다. 먹는 것을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몸도 집만큼 컸다. 지금도 먹고 있었다."(138)</i><span style="text-align: left;"> 빌리는 청혼하며 "미치는 줄 알았다"(139)고 고백하는데, 이 결혼은 애정이 아니라 정신적 파탄의 증상으로 서술된다. 발렌시아가 "당신을 위해서 살을 뺄 거야"(154)라고 하면 빌리는 "나는 그냥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라고 답한다. 그러나 곧 화자는 그가 </span><i style="text-align: left;">"시간 여행 덕분에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미 여러 번 보았고, 내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54)</i><span style="text-align: left;">고 덧붙인다. 다정해 보이는 대사가 실은 무관심이라는 것이 이 문장으로 드러난다.</span>
</p>
<p>
   <span style="text-align: left;">&nbsp;</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5900_znxvemzh.jpg" alt="제5도살장 뭐 그런거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586px;" />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발렌시아의 죽음이 그 무관심의 정점이다. 비행기 사고로 의식을 잃은 남편을 보러 가다가, 배기 장치가 떨어진 차를 몰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된다. <i>"한 시간 뒤 그녀는 죽었다. 뭐 그런 거지"(228)</i>. 장면 직전 화자는 <i>"다행, 또 다행이었다"(228)</i>라며 사고를 거의 희극으로 처리한다. 이 냉담한 톤은 "So it goes"의 정직함과 같은 계열이면서도 결이 다르다. 남성 인물의 죽음이 전쟁이라는 구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쪽으로 쓰이는 데 비해, 발렌시아의 죽음은 서사적 존재 이유였던 '빌리를 향한 헌신'이 소진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b>그녀에게는 트랄파마도어적 초연함도, 화자의 애도도 주어지지 않는다.</b></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몬태나 와일드핵은 더 노골적이다.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에 "빌리의 짝"으로 끌려와 알몸으로 전시된다. <i>"동물원의 관객 동원 기록이 깨졌다. 이 행성의 모두가 지구인이 짝짓기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167~168) </i>그녀가 빌리를 신뢰하고 스스로 관계를 원하게 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 다정하게 그려지지만, 관계가 성립하는 조건 자체가—번식을 위한 전시—동의를 형식으로 만든다. 목에 건 로켓 안에 "알코올 중독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넣고 다니고, 겉면에 평온의 기도문을 새겨두었다는 설정(257~258)은 그녀에게도 고유한 상처의 서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상처는 빌리의 회복을 완성하는 배경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전쟁이 남성 개인에게 가한 폭력에는 집요하게 형식을 부여하면서 여성에게는 신체와 헌신, 혹은 신체와 전시 두 역할만 허락한다. 이 작품의 반전(反戰)이 누구의 고통을 중심에 두는지 묻게 되는 지점이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결말, 그리고 남는 것</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5930_sbasrzys.jpg" alt="제5도살장 마지막 페이지.jpg" style="text-align: left; width: 700px; height: 934px;" />
</p>
<p style="text-align: left;">
   <b>&nbsp;</b>
</p>
<p style="text-align: left;">
   <b>&nbsp;</b>
</p>
<p style="text-align: left;">
   <b>소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새 울음소리 하나로 끝난다.</b>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다음날, 빌리와 나머지 사람들은 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걸어 나온다. <i>"새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말했다. '지지배배뱃?'"(265)</i> 학살을 다 지나온 자리에 남는 것은 설명도 애도도 아닌, 뜻을 알 수 없는 그 소리뿐이다. <b>"So it goes"가 죽음마다 따라붙던 체념의 언어였다면, 마지막 새소리는 그 체념조차 더는 붙일 말이 없어진 자리의 침묵이다.</b>
</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그런 점에서 《제5도살장》을 전쟁을 이야기하는 데 실패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이 이야기를 어떻게 실패하게 만드는지 정확히 보여준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그 성공은 완전하지 않다. 소설이 봉합하지 않고 열어둔 것이 트랄파마도어 철학의 양면성이라면, 열어두지 못한 채 닫아버린 것은 발렌시아와 몬태나의 자리다. 도살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는 시간 속에 흩어지는 일이었고, 누구에게는 애초에 서사의 주어가 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 사실까지 함께 읽어야 이 소설을 온전히 읽은 것이 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은파]]></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1:59:5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3</guid>
<title><![CDATA[[Opinion] 나만의 피아노, 나만의 음악을 찾아서 - 뮤지컬 &#039;피아노의 숲&#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3</link>
<description><![CDATA[뮤지컬 &#039;피아노의 숲&#039;이 선사한 원작의 감동, 그리고 아직 남은 과제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당신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가장 편안한 공간은 어디인가? 한 소년은 숲을 떠올렸다.</p>
<p>&nbsp;</p>
<p>눈을 감고 녹음이 우거진 숲의 가장자리, 그곳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로 아름다운 연주를 한다고 상상해보라.</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72657_plgdhzto.jpg" alt="피아노의 숲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1px;" />
</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 color: #00994c;">Ⅰ. 숲의 피아노, ‘나만의 피아노’</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lt;피아노의 숲&gt;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코 ‘숲속의 피아노’다. 포스터에도 그려져 있는 그 피아노는, 전학생 슈헤이가 아무리 건반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다가 카이의 손길에만 청명한 음을 들려준다. 카이는 이 피아노가 자신의 피아노라고 말한다. 밤에 한줄기의 달빛을 받으며 숲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카이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푸른 조명과 피아노를 덩굴로 감싼 소품 디자인, 우거진 나무들을 보여주는 스크린을 통해 2D에서 3D로 실사화하여 원작 팬에게도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p>
<p>
   <br />
</p>
<p>그 달빛은 뒤에서도 다시 한번 보인다. 연습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고 “달빛은 어디에나 있잖아.”라고 깨닫는 순간, 스크린 속 숲 이미지는 원형을 그리며 점차 커져간다. ‘피아노의 숲’이 카이의 내면 공간으로 들어와 온전히 확립되었음을 감각적으로 은유한 뛰어난 연출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 color: #00994c;"><b>Ⅱ. 슈헤이의 시선으로 다시 쓴 우정과 성장 이야기</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72254_catfctvt.jpg" alt="피아노의숲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74px;" />
</p>
<p>&nbsp;</p>
<p>&nbsp;</p>
<p>원작이 지역 콩쿠르부터 쇼팽 콩쿠르까지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삶을 조명한 종합 서사였다면, 뮤지컬은 이를 ‘아마미야 슈헤이’와 그가 경쟁자로 여긴 ‘이치노세 카이’의 성장을 더 중심에 둔 이야기로 해석했다. 슈헤이가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잊을 수 없는 카이의 음악을 회상하는 프롤로그와, 그가 음악 교사가 되어 자신에게 ‘음악의 신’인 카이와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에필로그 구조가 이를 뒷받침한다.</p>
<p>
   <br />
</p>
<p>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성을 풀어내려는 무대 매커니즘 역시 명확하다. 카이가 콩쿠르에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쇼팽을 치기 위해 레슨을 시작하면서 슈헤이와의 경쟁이 본격화된다. 쇼팽을 치기 위한 레슨 장면에서 연출은 두 대의 피아노를 마주 보게 배치한다. 스승 소스케와 제자 카이가 차근차근 연습하는 모습이 한쪽을 채우면, 반대편 피아노에는 슈헤이가 앉아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가르침을 받는 모습이 대비되는 구도를 형성한다. 순수하게 피아노를 즐겨온 제자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이끌어주는 스승과 그를 견제하고 완벽한 피아노를 위해 노력해온 피아니스트 집안의 차이를 단 두 대의 피아노 배치만으로 시각화한 것이다.</p>
<p>
   <br />
</p>
<p>사실 경쟁자의 존재를 건강하게 다룰 수 있다면 그만한 좋은 자극제도 없다. 슈헤이는 카이를 영원한 숙적으로 삼아 ‘자신만의’ 완벽한 피아노를 찾기 위해 피아노를 계속해서 연주할 수 있었고, 카이는 “최선을 다해 연습하지 않으면 너를 보지 않겠다”라는 슈헤이와의 약속을 계기로 힘든 상황에서도 그만두지 않고 ‘노력하는’ 천재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자이자 서로의 피아노를 지속하게 만든 단단한 원동력이 된 두 소년의 서사를 공연 역시 정교하게 그리려고 노력했다.</p>
<p>
   <br />
</p>
<p>&nbsp;</p>
<p>&nbsp;</p>
<p>
   <span style="color: #00994c; font-size: 18px;"><b>Ⅲ. 용두사미의 아쉬움</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긴 서사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작품 자체 개연성의 균열은 피하지 못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극의 메인 플롯은 지역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로 나뉘는데, 슈헤이 할머니와의 대화나 타카코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단독 넘버 등 서브플롯과 디테일에 과도하게 시간이 할애되어 있어 정작 쇼팽 콩쿠르의 서사는 ‘5년 후 바르샤바’라는 자막으로 대폭 생략된다.</p>
<p>
   <br />
</p>
<p>그렇다 보니 쇼팽 추모제에서 슈헤이의 아버지가 ”피아노를 정복하는 법만 알려주고 즐기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라며 사과하는 대목은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쇼팽 콩쿠르 기간 동안 슈헤이가 승리와 완벽주의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연주 도중 ‘나만의 연주’를 깨우치는 과정, 그리고 과거 아지노 소스케와의 관계 때문에 아들의 피아노를 경쟁의 관점으로 바라보던 요이치로가 아들의 좌절을 보고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닫는 각성이 공연에선 다루어지지 않아 감정선의 설득력이 약화된 것이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72442_gbdcpcel.jpg" alt="피아노의숲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74px;" />
</p>
<p>&nbsp;</p>
<p>&nbsp;</p>
<p>원작의 장면들을 관련된 것끼리 덧붙여 보여주는 과정에서 톤앤매너가 어색해지는 문제도 발생했다. 아지노 선생이 편안한 공간의 예시로 ‘바다’를 언급하는 대사는 원작 속 그의 재활 서사와 바다가 보이던 곳에서 어머니께 피아노를 들려주던 과거라는 맥락이 삭제되어 뜬금없이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카이의 중요한 각성 계기 중 하나인 ‘음악의 신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을 다루는 방식도 모호하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곡을 듣고 따라 할 수 있었던 그에게 모차르트와 쇼팽은 처음으로 좌절감을 안겨주는 존재다. ‘나만의 음악’를 연주하기 전까지 눈 앞을 아른거리던 모차르트와 처음으로 연주할 수 없는 곡이 있다는 당혹스러움을 선사한 쇼팽은 카이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중요한 각성제인 것이다. 물론 이 지점을 무겁게만 다룰 필요는 없지만, ‘음악의 신’들이 연주할 때 눈앞에 등장해 도발하던 상황을 관객들에게도 좀 더 명확히 인지시키거나, 절망을 극복하려는 슈헤이의 고민이 밝고 중독적인 멜로디 아래 묻혀버리지 않게 잘 조절했다면 어땠을까. 뮤지컬의 넘버들 자체가 듣기 좋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아쉬움이 남는듯하다.</p>
<p>
   <br />
</p>
<p>마지막으로 메인 플롯과 서브플롯을 담당하는 인물들의 가지치기가 필요해 보인다. 타카코는 카이와의 대화 이후 완벽하게 보여야만 한다는 억압의 상징이던 바짝 묶은 머리를 풀고 더 이상 긴장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슈헤이의 서술과 함께 아름답게 연출되는 그녀의 이야기도 감동적이긴 하다. 만약 뮤지컬이 ‘자신만의 피아노를 찾아가는 이들의 여정’을 주제로 각색할 것이었다면, 타카코의 단독 넘버로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피아노를 잘 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과거를 노래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쇼팽 콩쿠르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조차 하지 않으며 두 번째 핵심 플롯이 대부분 빠진 상황에서 해당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슈헤이와 카이의 경쟁과 성장을 키워드로 잡으려고 한 듯한 이 공연의 경우 슈헤이와 카이의 성장에 더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인다.</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color: #00994c; font-size: 18px;">Ⅳ. 텍스트의 반복과 극장의 한계</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카이가 태어나 엄마와 함께 살아온 장소인 ‘숲의 가장자리’는 공연에서 ‘끝동네’라는 명칭으로 언급된다. ‘숲의 가장자리’는 복잡미묘한 곳으로, 신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카이를 성장시키면서도 한계 속에 가두는 이중성을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은 ‘숲의 가장자리’를 ‘끝동네’라 명명하고, 반복적으로 레이코가 술집 여자라고 모자가 무시당하는 모습을 강조하며 자극적으로 프레임화한다. “이 동네를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라는 대사는 자칫 피아노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신분 상승이나 탈출의 수단’으로 왜곡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p>
<p>
   <br />
</p>
<p>공연은 한정된 공연 시간을 투자해 계속해서 대사의 발화와 무대 전환으로 ‘사창가, 환락가, 끝동네’의 부정적인 면모 자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카이가 출신지의 한계를 벗어나는지를 더 조명해야 했다. 카이가 선생과 어머니의 격려로 중학교에 가고, 쇼팽 콩쿠르에 진출해 세계에 자신을 알리고, 숲의 가장자리에 고이지 않고 세계 무대를 누비게 되기까지 견딘 그 노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고 좋지 못한 곳이라고 해도 결국 ‘숲’은 카이를 키운 공간이다. 카이의 연습이 난항을 겪을 때 이를 뚫어준 것도 결국 ‘숲의 가장자리’에 있던 피아노였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73230_wlawiori.jpg" alt="피아노의숲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74px;" />
</p>
<p>&nbsp;</p>
<p>&nbsp;</p>
<p>기술적·공간적 한계도 드러난다. 카이가 슈헤이의 집에서 좋은 피아노를 만나 마구 칠 때 발생한 소음을 건너편 방에서 듣는 소음의 연출은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극과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소음처럼 귀에 거슬리게 전달되었다. 아지노가 사고로 연인과 피아노를 삶에서 잃어버린 전사 역시 설명이 모호해 원작을 모르는 관객의 경우 직관적인 인지가 어려웠을 것이다.</p>
<p>
   <br />
</p>
<p>공연을 관람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구조적 특성 역시 이번엔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아시아문화전당은 분명 좋은 극장이다. 하지만 &lt;피아노의 숲&gt;은 무대를 꽤 깊게 쓴다. 앞에 악보대들과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리프팅 무대가 있고, 뒤에 원형으로 된 주무대가 있는 구성으로, 리프팅 무대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활용하지 않는 장면에선 무대 앞까지 나올 수가 없다. 그로 인해 1열에 앉아도 오페라글래스가 없으면 디테일한 표정을 보는 것을 기대하기는 좀 어렵다. 이휘종 배우가 DIMF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좋은 캐스팅을 두고도 그 섬세한 배우들의 연기가 온전히 닿지 못하는 한계는 조금은 아쉽게 다가온다.</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color: #00994c; font-size: 18px;">V. 그럼에도 ‘피아노’는 계속된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72354_bzycagpq.jpg" alt="피아노의숲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74px;" />
</p>
<p>&nbsp;</p>
<p>&nbsp;</p>
<p>각색과 연출의 완성도에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원작부터 &lt;피아노의 숲&gt;을 사랑했던 필자는 이 뮤지컬이 좋다. 무대 위에 놓인 한대의 그랜드 피아노와 여섯 대의 업라이트 피아노,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선율은 관객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사실 ‘숲의 피아노’를 실제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연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고요하게 반짝거리는 숲을 노래하며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앙상블도 아름답다.</p>
<p>
   <br />
</p>
<p>앞서 말한 것처럼 뮤지컬 &lt;피아노의 숲&gt;은 어쩌면 아마미야 슈헤이가 열고 닫는 구조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슈헤이에게 '음악의 신'은 싫든 좋든 언제나 카이였다. 결말에 이르러 슈헤이는 열등감을 넘어 자기 내면에 자리한 이상향과도 같은 카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로소 '나만의 음악'을 찾는다. 자기 부정보다 긍정이, 그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자기 인정’이라고 한다면, 슈헤이의 변화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p>
<p>
   <br />
</p>
<p>슈헤이는 음악 교사가 되었는지 어린 학생들에게 과거를 이야기하다가 “이제 악보를 펴세요.”라고 말한다. 반구형으로 배치된 피아노 앞에 앉은 아이들의 모습은,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는 숲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카이처럼 그가 드디어 자신만의 ‘피아노의 숲’을 완성했음을 아름답게 은유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color: #00994c; font-size: 18px;"><b>Fin. '당신의 피아노'를 찾아서</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74422_dwtiekkf.jpg" alt="피아노의숲7.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nbsp;</p>
<p>&nbsp;</p>
<p>누군가 피아노가 좋은 이유를 묻는다면, 필자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피아노는 인생과도 같아서,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이 있고, 마음이 있다. 정말로 그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대변한다. 그래서 아마미야 슈헤이, 이치노세 카이, 아지노 소스케, 아마미야 요이치로, 마루야마 타카코의 피아노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특별하고 아름답다. “너만의 피아노를 연주해”는 소스케가 카이에게 건넨 조언이지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p>
<p>
   <br />
</p>
<p>당신은 지금, '나만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뮤지컬 &lt;피아노의 숲&gt;은 ‘나만의 음악’를 찾고 있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있다.</p>
<p>&nbsp;</p>
<p>그 다정한 마음이 이 공연이 여전히 좋은 이유고, 무대에서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권혜선]]></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7:40:3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7</guid>
<title><![CDATA[[에세이] 쪽지 러브레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7</link>
<description><![CDATA[네게 바라는 점은 나와의 만남으로 인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오래도록 노력해야겠다. 한없이 표현하고, 원 없이 다정하고 어떤 모습이든 기어이 사랑하겠다. 너의 맑음과 나의 밝음이 만나, 앞으로도 우리의 모든 날이 따뜻하고 맑고 환하게 이어졌으면 좋겠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친구와 사랑 이야기를 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p>&nbsp; &nbsp;</p>
<p>"좋아하는 감정은 참 수줍고 예쁜 것 같아. 난 아직 누군가를 먼저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만약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호기심</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늘 궁금했다. 내가 먼저 좋아해서 시작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지.</p>
<p>&nbsp;</p>
<p>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마음을 표현해 주고, 그 사람에게 스며들어 연애를 시작한 적은 있었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마음이 커졌던 사랑이었다. 게다가 모두 학생 때의 연애였기에, 성인이 된 지금의 사랑과는 분명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성인이 되어 시작하는 연애만큼은 신중하고 싶었다. 지난 사랑에도 좋은 기억은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리 건강한 관계는 아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p>
<p>&nbsp;</p>
<p>나는 사람을 만날 때 나만의 분명한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이 맞아야 오래도록 안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쉽게 시작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친구와 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늘 하던 말을 또 했다.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거래."서로를 다독이듯 웃으며 끝낸 대화였는데, 정말 그 말처럼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사람이 나타났다.</p>
<p>&nbsp;</p>
<p>연 하늘 같은 사람이었다. 강아지 같은 눈과 기분 좋은 눈웃음, 다정한 말투를 가진 사람. 그것이 너의 첫인상이었다. 웃기게도 처음 본 순간부터 자꾸 시선이 갔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너를 알아갈수록 그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호감으로 변해 갔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호감</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혼자만의 테두리 안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내 일상도 어느새 너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너 앞에서 더 이상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제야 인정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좋아하고 있구나.'</p>
<p>&nbsp;</p>
<p>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표현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다. 표정은 숨기지 못했고, 계속 웃고 있었고, 이유 없이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자꾸 주변을 맴돌았고, 작은 연결고리 하나라도 만들고 싶었다. 연결될 이유가 없다면 스스로 이유를 만들려고 했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자꾸 너에게로 가며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는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꽤 많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너는 이미 내게 행운이 되었고, 특별한 감정을 선물해 준 사람이 되었다. 너를 더 알아갈수록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 오래 알아가 보고 싶어졌다.</p>
<p>&nbsp;</p>
<p>그리고 용기를 내어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네가 놀라지 않게 아주 조심해서 하지만 진심만큼은 전해질 수 있도록. 혼자 수없이 문장을 고치고 되뇌다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언젠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수동의 노을이 지는 구름다리에서 그 말을 전하려고 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5838_hhslooun.jpg" alt="ninikvaratskhelia-flowers-7937665-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고백</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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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하지만 그날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내가 준비했던 고백보다 먼저, 너의 진심을 듣게 되었다. 같은 마음이었다는 이야기. 나를 생각하며 했던 행동들. 수없이 고민하다 겨우 꺼낸 것 같은 조심스러운 말들. 수줍지만 진심이 가득한 너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그날, 세상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연 하늘 색으로 물들었다. 이후의 시간은 꿈같았다.</p>
<p>&nbsp;</p>
<p>온 신경이 네게 향하니 다른 것들은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배고픔도 피곤함도 잊을 만큼 행복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시간 속에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 같았다. 우리는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같은 책방을 좋아했고, 조용한 공간을 좋아했다. 숲과 잔디, 푸른 풍경을 좋아하고, 자주 읽는 소설의 작가도 비슷했다. 좋아하는 색도 같았고, 다수보다는 소수를, 술보단 산책을 더 좋아했다. 서로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좋아했고, 바르고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는 점도 닮아 있었다.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꿈꾸는 가치관도 닮아 있었다. 서로에게 원동력이 되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p>
<p>&nbsp;</p>
<p>너는 늘 말 한마디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가벼운 말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고, 언제나 상대를 생각한 뒤 말을 건넸다. 그 다정함과 섬세함이 참 좋았다. 햇빛이 강했던 어느 날, 내가 눈부실까 봐 두 손으로 햇빛을 가려주던 너의 모습.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너라는 사랑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차분하게 해결하는 모습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단단한 성향도, 모두 고마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 너였다. 나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은 쉽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게를 알고 있었으니까.</p>
<p>&nbsp;</p>
<p>우리는 '사랑해'라는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했다. 그래서 언젠가 그 말이 처음 입 밖으로 나오는 날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것만 같았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오래도록</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너의 맑음은, 지나가던 나의 여름 아래 숨어 있던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기분이다. 오래 이 마음을 코팅해서 보관하고 싶다. &nbsp;너에게는 언제나 진심이 담긴 말만 해 주고 싶고, 어떤 일이 있어도 너에게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나 너의 편이 되어 주고 싶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너의 좋은 영향이 조금씩 나에게도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이다.</p>
<p>&nbsp;</p>
<p>네게 바라는 점은 나와의 만남으로 인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오래도록 노력해야겠다. 한없이 표현하고, 원 없이 다정하고 어떤 모습이든 기어이 사랑하겠다. 너의 맑음과 나의 밝음이 만나, 앞으로도 우리의 모든 날이 따뜻하고 맑고 환하게 이어졌으면 좋겠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5901_yappyhmc.jpg" alt="cdd20-fantasy-4065900.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p>
<p>&nbsp;</p>
<p>&nbsp;</p>
<p>나는 오래도록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황수빈]]></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3:59:0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64</guid>
<title><![CDATA[[리뷰 URL 취합] 파라노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64</link>
<description><![CDATA[스톱 모션의 명가, 라이카 스튜디오의 대표작]]></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div align="center">
   <span style="font-size: 20px;"><b>파라노만</b></span>
</div>
<div align="center">
   <br />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
   <span style="color: #ff0000;">댓글로</span>
</div>
<div align="center">
   <span style="color: #ff0000;">기고한 리뷰 링크를</span>
</div>
<div align="center">
   <span style="color: #ff0000;">기입해 주세요!</span>
</div>
<div align="center">
   <br />
</div>
<div align="center">자신의 글 외에도,</div>
<div align="center">다른 구성원분들이 쓴 글을</div>
<div align="center">이 공간에서</div>
<div align="center">스스럼없이 향유해 보셨으면 합니다.</div>
<div align="center">
   <br />
</div>
<div align="center">문화예술은</div>
<div align="center">서로 소통을 하고</div>
<div align="center">함께 향유했을 때에</div>
<div align="center">더욱 다채로워지고</div>
<div align="center">풍요로워집니다.</div>
<div align="center">
   <br />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
   <span style="color: #ff0000;">이름 + URL 링크</span>
</div>
<div align="center">
   <span style="color: #ff0000;">자신의 글을&nbsp;보실 분들께 하실 말씀!</span>
</div>
<div align="center">을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33604_tkmbleyo.jpg" alt="티저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
   </p>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nbsp;</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13:36:1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1</guid>
<title><![CDATA[[오피니언] 인문학의 쓸모와 멋진 신세계2 [사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1</link>
<description><![CDATA[자유의 무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blockquote style="border: 1px inset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그리고, 그리고 바로 여기에다가 비트겐슈타인 인용을 미리 붙여두고 싶습니다. ‘세계의 한계는 주체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세계란 곧 나의 세계이다.’ 내게 세계란 스스로 이해하는 만큼의 양감으로써 다가와 뚜렷하게 감각되고, 선명하게 인지되며, 그만큼 분명하게 구획되는 것. 그 너비와 깊이가 곧 내 세계의 크기이며, 나의 그것은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공간적으로 감각됩니다. 이렇듯, 개인의 내면에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는 말을 나는 공감각적으로 느끼어 동의합니다. 그 닫힌 세계엔 각자가 수집한 경험과 기억의 표상들로 채워져 있고, 그 세계의 너비와 높이가 곧 인식의 크기일 텝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상한 것들이 허다할진대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잘 정리되어 있었겠습니까, 결단코 아니일 테고, 나는 나의 표상들을 가지런히 정리합니다. 진실로 이 글 또한 내 인식의 정리 작업이 되었습니다. 백지 위에 모두 쏟고, 모순되는 것은 지우고 합당한 것에는 순서를 부여한 뒤 연결하는 작업. 곧바로 접 붙지 아니하려는 것들에는 손수 논리의 얼개를 짜, 그 사이에 끼우겠습니다.<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right;">
      <a href="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715" target="_blank">- 인문학의 쓸모와 멋진 신세계 1편</a>
   </p>
   <p>&nbsp;</p>
   </blockquote>
<p>&nbsp; &nbsp; &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III.</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빌립니다.&nbsp;“세계는 나의 표상이다.”&nbsp;그러나 이 두 명제가 등장한 배경인 문제의식을 짚어야 이 명제의 필요와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계를 하나의 사실로써 간주하고, 실상 서로 다른 표상으로 가리키고 있음에 따라 끝없이 오해가 반복되고 있다’라는 이해가 저기 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명제의 최종선언인 “세계란 곧 나의 세계이다”에서 세계라는 것은 물리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네 세계니 네 멋대로 살아도 된다’라는 식의 어리석음을 한 톨만큼도 보증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미 제멋대로 살아오고 있었다’라고 바꾸어 해학적으로 표하겠습니다. 여기에 ‘언어란 개인의 주관적 기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문제의식은 동행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설명은, 지난 자유 독서 모임 때 우리의 ‘젊은 요조’가 말한 ‘장님 코끼리 만지기’ 문제와 데리다의 ‘차연’ 개념으로 보충하고 대충 넘어가십시다.</p>
<p>
   <br />
</p>
<p>세계가 사람에 저마다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 즉 표상에 대해 내가 미리 공감하고 있던 까닭은 그것이 뿌리내린바 문제의식인 몰이해에 있습니다. ‘왜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어 경험하면서 가리키는 바가 각 다른가. 또한 왜 내가 느끼는 이것, 내 심상 속에 뚜렷한 이미지로 빛나는 이것을 전달할 수 없었던가’ 하는 기막힌 단절의 경험, 그 타는 목마름으로부터 표상의 개념에 이를 기나긴 사유는 자라납니다. 그리고 이제 표상의 개념에 도달하였으니, 비로소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언어란 참으로 피로한 도구입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90527_mxfybmmy.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24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몰이해의 본질이 하나의 공유된 세계가 저마다 다르게 표상되는 데에 있다면, 그 인과에 대해 자문해 왔습니다. 이 의문을 세계가 표상되는 과정에 관한 질문이라 합시다. 언급했듯 세계는 개별자에게 경험되고, 이해되고, 해석됨으로써 하나의 인식이 된다고 나는 봅니다. 나아가 하나의 인식이 뒤이을 표상 과정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한편 인식이란 개별적이므로 상호 모순적인 인식이 동시에 그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 사이에 상대성이랄 게 있어 어떤 인식이 다른 인식에 비해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소위 ‘믿음’이라 부르는 것은 ‘어떠한 주제에 있어 가장 우월한 인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도전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는 가장 우월한 지위에서 뭍 인식 가운데에 왕처럼 군림하게 됩니다만, 애석하게도 도전자를 반기는 왕이 없고, 스스로 관을 내려놓는 겸허한 왕이 없으므로 믿음은 권위주의처럼 오래지는 것이라고 나 여깁니다. 믿음이 곧 경험과 이해와 해석 모든 부문에서 자신의 대적자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니까요. 그 자체로 문제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사정이 이럴진대 믿음과 실재가 반목하는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것이 실질적인 질문 되시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믿음은 표상의 제일 과정, 즉 경험에 영향을 끼치며 그 자신에 대립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왜곡합니다. 심지어 그 경험이 나 자신의 소망에 걸맞은 것, 변화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일지라도요! 세상에나, 짜증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 믿음의 역설이라.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p>
<p>
   <br />
</p>
<p>이제 인식 일반의 행태를 묘사하며 그것과 나 사이의 변증을 전개한다면 이 논의는 좀 더 적확해지며 약간의 깊이와 정당성을 획득할 듯도 싶습니다만, 슬슬 피로합니다. 그러니 납작하게나마 내 것만 논하겠습니다. 내 사유가 인식의 세계를 열렬히 누비매 그 안의 뭍 요소를 가능한 한 많이 밝혀두었더라면, 또한 어떠한 필요가 임해 사유가 스스로 공고한 것을 해부하는 데 신실하였더라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인식의 세계 속에 모순을 이루는 것은 가능한 한 해부되었으며, 여전히 거기 남은 것이 있더라면 무지의 경계 바깥의 것입니다. 작금 하나의 무지가 새로운 영감의 별빛으로 화하여 속삭이기 시작하였음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인식의 경계로 제단을 쌓아 올리는 것이 피로해 잠깐 쉬고 있습니다. 만약 거기 신이 있어, 그 신이 내 무지를 향해 재촉하는 벼락을 떨구지 않는다면 한동안은 파업할 듯싶습니다. (호메로스 - 일리아스, 단순 차용)</p>
<p>
   <br />
</p>
<p>인식 속의 모순을 가능한 한 모조리 탐색해 해부했고, 그 과정에서 더욱 자명한 것과 덜 자명한 것의 위계를 나누고, 가능한 한 나름의 체계와 정식을 갖춰왔습니다만 그 결과로써 나의 세계가 이런 모습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결과 나는 믿음이 공고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어찌 표해야 좀 더 자명하게 전할까요. 그릇된 인식과 믿음을 깨부수고 위계를 부여하자 단 하나의 우월한 것이 남고 다시금, 아니 전보다 더 강렬한 믿음이 되었다고 하면 이해하려나요. 사람 사이의 믿음에도 상대성이 있다면, 내 그것은 공고하기 견줄 데가 없고 그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외로움 때문. 내 나름으로는&nbsp;“<b>인식적 지도 그리기</b>”를 마친 것 같은데, 어느새 주변엔 ‘반-믿음’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해오는 듯한, 그런. 그 원인에의 추정은 함께 읽고 토론했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논의로 대체하고 넘어가십시다. 프레드릭 식으로 말하자면&nbsp;“<b>방향 감각의 상실</b>”이고,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nbsp;“노예 도덕”&nbsp;같은 이것. 내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변을 둘러보면 모호함 또 모호함 뿐이라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인식 상 남아 있는 모호함이 없는 한, 그런 식의 교착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다만 대화를 위해 그리 애써볼 뿐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 -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p>
<p>
   <br />
</p>
<p>물론 여전히 내 인식의 세계 속 모든 주제에 있어 믿음이 강고하진 않습니다. 믿음이 싹트기엔 허약한 주제라거나 반대되는 믿음, 즉 강한 불신의 영역도 내 안에 넘치도록 발견됩니다만, 어쩜 내 사유가 정면으로 겨눈 채 벼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려. 어쩌다 보니 인식론을 두고 외로움의 두 가지 가능성을 도출했군요. 그대에의 편지를 빙자해 내 인식의 지도에 더 큰 진전이 생겨 기쁩니다. 이를 각각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라고 요약하자면, 뭐, 여러모로 두루두루 외롭습니다만 그렇다고 내 살아온 방식을 그칠 것 같지도 않습니다. 통용되는 것을 경험하고, 공감될 수 있게 해석하고, 이해되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 즉 ‘유행’에의 합류가 외로움이라는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건대, 내가 그럴 작자가 못 되리라 여기니까요.</p>
<p>
   <br />
</p>
<p>말했듯 나는 인식의 저편을 꿈꿉니다. 그리고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어느 임계점을 넘어, 이해받고 환대받는 자가 되기를, 그 전에 모든 것을 이해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해 개척한 것을 뒤엎고, 나아온 길을 되짚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건 애초 되지 않도록 정해진 일이니까요. ‘안락한 과거와 이별함으로써, 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 오래 참고 견디며, 내가 진정 바라는 나로서 온전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10년을 방황하였고, 남은 10년을 더 헤맬 것 같습니다. (호메로스 - 오뒷세이아)</p>
<p>&nbsp;</p>
<p>&nbsp;</p>
<p>
   <br />
</p>
<p>
   <span style="font-size: 18px;"><b>IV.</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인간을 바라보는 나의 뭇 해석관 중 하나는 메커니즘, 즉 기계 장치로써의 비유적 관점을 따릅니다. 이때 그 비유의 원형 이미지는 아-까 언급했던 사유의 윤전기처럼 구시대적이면서도 정교한 기계 장치이자, 무수한 톱니바퀴. 그 성분이 철이 아닌 뼈와 살점으로 되어있을 뿐인 정교한 아날로그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생각해 왔습니다. 한편 이 설명을 그대의 가슴으로서는 즉각 환대하지 못할 것임을 헤아리나, 왜냐하면 그대는 인본주의자니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출발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p>
<p>
   <br />
</p>
<p>피스톤이 움직이며 무수한 톱니바퀴의 연쇄를 낳고 그것의 주동력이 시스템 전체를 순환하는 듯이, 하나의 결과적 사유나 행동은 기폭제가 되는 원인과 내재한 무수한 구성 인과의 결과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한 인간을 그가 내포하는 세계의 인과율로써 바라보고, 그러므로 어떤 결과인 행위를 바꾸어내거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목적물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을 원인과 인과에 달려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p>
<p>
   <br />
</p>
<p>그런 관점에서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 속에 있을 인과의 톱니바퀴를 관찰합니다. 어떤 톱니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알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한편 앞서부터의 이러한 표현들은 잘 공감되지 않는 것으로써 자칫 우스운 것이 되어있으리란 염려는 늘상 내 측두 안에 매달려있고, 그러나 그게 내가 그대를 좋아하고 또 친밀히 여기는 까닭이며, 그 원리요, 나아가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하나의 인과인즉 결정된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대를 알지 못했다면 몰라, 알게 된 이상 이렇듯 친밀해지는 것도, 나아가 생일을 빌어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하는 것까지도 미리 다 정해진 바입니다. 이것을 단호히 선언할 수 있을 만큼은 나 자신을 굳게 이해합니다.</p>
<p>
   <br />
</p>
<p>앞서 외로움을 짙게 언급했습니다만, 그 고독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기 때문.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뿐이었겠습니다만, 이제의 나는 기쁩니다. 그것을 불가피함으로부터 필요로, 즉 하나의 쓸모로 역전시켰으니까요. 그게 자기기만이라도 좋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이리도 무겁고 육중한 글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음이 자명합니다. 본디 약속이 많고 삶이 신명으로 가득 차면, 이런 글은 좀체 안 나오는 법입니다. 나로선 ’때려죽여도 안 나온다’ 하겠습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삶이 온통 평안하였더라면 사람이 자기 안의 그 무엇을 빌어 사유하겠습니까. 이 귀치도 않은 사유와 늦은 밤 꼬박 새워 글 쓰게 하는 마음이란, 그것의 까다로움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먼저 필요로 합니다.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사유, 말하자면 몰이해와 외로움의 사유란 것은 내 안으로부터 저절로 시작돼 바깥으로 뻗어 나간 것이 아니라, 달리 말해 내 이지적 열망이 스스로 피어난 것이라기보단 일단 바깥에서 일어나 강철의 비처럼 내게로 쏘아져 내리는 사건들을 내 안에서 간추려 해석한바, 그것들이 모여 이룬 결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이 또한 인과. 그 원인의 자리에 놓인 불편과 불안과 불행을 곧 한 마디 고뇌라고 해두자면, 고뇌가 먼저 있고 나서야 대안은 언제나 뒤늦게 서는 것. 사유란 이 뭇 대안 중 한 가지 얼굴에 불과합니다. 그대는 능히 자기 삶을 통해 공감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p>
<p>
   <br />
</p>
<p>명랑함이라면 살면서 딱히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젊은 날의 몰이해는 오직 지혜의 문제려나 했으나, 생각은 행동을 죽이고, 사유할수록 내 존재는 가벼움이 아닌 무거움이 되어갑니다. 어쩌면 한 인간이 품은 활자만큼 그 영혼의 무게는 산술적으로 비례해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사유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비우고 버리기를 애쓸 바엔, 극한을 생각합니다. 지금의 내 세계가 꾀할 수 있는 것은 내 지혜의 한계라면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경지, 인식의 저편을 향해서 화려하게 투신할 텝니다. 기다리는 미래가 몰락이라면 그것까지를 나는 긍정합니다. 그것까지가 이 점프대의 입장권이니까요. 인과의 흐름 위에 그저 몸을 맡길 뿐입니다.</p>
<p>
   <br />
</p>
<p>내 과거의 경험이 사유하는 나를 낳았고, 내가 사유하는 인간으로 거듭나 그에 걸맞은 또 다른 인과적 미래로 나아가는 것까지를 나 헤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참존가의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테마까지 곁들였다간, 또 다른 가지로 글이 터무니없이 무거워질 것 같으니 그쪽 편 가지는 별도로 써둔 연작 오피니언으로 대체합니다. 이쯤 소주제를 한 번 정리해 갈음하자면, 삶의 행로인즉 운명은 그저 인과의 나무이고 나는 무수히 뻗은 가지의 하나요, 내 사유와 행위는 어떠한 결과물로서 그 가지 끝에 맺힌 열매에 불과합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사유하고 인식하는 자가 돼 있었고, 하나의 결과는 다시 그 다음 결과의 원인의 자리에 놓여, 열매가 떨어진 자리 위로 우듬지 싹이 피어나 가지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생장하는 것 같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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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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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인문학의 쓸모’라, 나는 인식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으로부터 느껴지는 놀라운 확장감과 고양감이라는 열매에 더불어, 열매 떨어진 자리로부터 끝없이 새로 나는 생장의 기쁨을 논하겠습니다. 나는 멈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과거는 아득히 멀어져 있습니다.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나아가 독서라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을 때, ‘아직도 자신의 이해와 인식 너머에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자’들은 모두 개별자로서, 외따로이 떨어진 길로부터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몰이해와 외로움은 이 여정으로의 최초의 입장권이자, 그 여정을 유지하는 조건이며, 앞선 인식론에 따르면 이 여정이 수반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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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5216_nvzmtiip.jpg" alt="[크기변환]ishan-seefromthesky-4f-OwNOt5T4-unsplash.jpg" style="width: 700px; height: 875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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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므로 그대가 말했듯, ‘마치 스토너에서 매스터스가 대학을 두고 말한 것처럼, 우리 독서 모임은 "현실 세계에서 성공할 수 없는 불구자들과 부적응자들을 위한 안식처”’라는 자조적 우스개는 그대와 나를 필두로 한 소위 “책친놈” 몇 명을 위와 같은 의미로써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식적 개별자들. 나아가 거기 변죽을 맞추어 내가 뱉은 말도 매한가지, ‘정상적인 모임원들로부터 우리 같은 책친놈들을 스스로 격리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도 실상 같은 것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조금은 덜 외롭게 가십시다들. (존 윌리엄스 - 스토너)</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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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font-size: 18px;"><b>V.</b></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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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허허, 벌써 묵직한 글이 돼버렸군요. 아직 토요일 하루의 일상 소묘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만, 이거 참 난감합니다. 꼬박 이틀에 걸친 사유. 걸으며 생각한 것들로 틀을 잡고, 그 틀 위에 사유는 제 멋대로 뻗어나 기어이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글은 뻗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스스로 그칠 자리를 마련하는 딴은, 이게 순전 내 의지는 다 아닐 겁니다. 서론 단 2문단을 써두는 것이 마치 대지에 모종을 심는 것과 같아, 그 후로부터는 언제나 글이 저 알아서 증식하곤 합니다. 나는 글과 사유 사이의 매개이자 펜을 쥔 손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그 순간 내게 이 의지에 봉사할 만큼의 열정과 끈기가 존재하느냐만이 글이 끝맺을지 여부를 가릅더이다. 이번 것엔 꽤 신실한 것 같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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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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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제 슬슬 사변은 쳐내고 본론으로 넘어가십시다. 대충 이런 늘 같은 사유 속에 잠긴 채 나는 안암으로 갔습니다. 머리를 하고, 점저를 먹고, 햇살이 눈 부신 참살이길 한 복판에 서서 잠시 고민합니다.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가야 할 곳이 분명치 않을 때 나는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담배를 피며 나는 고민하다간, 느닷없이 광화문에 가기로 합니다. 그대에게 책 선물을 할 심산이었습니다.</p>
<p>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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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지하철이 훨씬 빠르다지만, 버스를 선호합니다. 정해진 약속이 없어 시간이 넉넉하다면 이건 누려볼 사치라 봅니다. 더구나 바깥이 훤하다고 말했잖습니까. 정말이지 눈이 부신 오후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온통 건물의 유리창 하며 도로의 차창에 직사광선이 번쩍번쩍했습니다. 버스를 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세상이 훤했고, 마치 분칠한 얼굴에 조명마저 덧대본 양 그 모습이 새삼스러워 보면서도 더 보고 싶은 오후입니다. 101번 노선은 안암오거리를 지나 곧 신설동 오거리를 끼고 꺾으면, 종로 일대를 시원하게 관통합니다. 동묘를 지날 즈음부터 그리운 거리 위에, 익숙한 밤 풍경 대신 낯선 대낮의 정경이 보이는 게 좋습니다. 종로5가를 지나고, 광장시장을 지납니다. 다만 오늘은 종로 어딘가에 대규모 시위집회가 있대서 버스 기사는 종로4가에서 그만 내리라고 합디다.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느닷없이 시작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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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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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종로4가 버스 정류장은 세운상가와 종묘 가운데 뻘쭘하니 서 있는데, 그 형국이 기묘한 것이 마치 조선 것과 미제 것의 기싸움 같은 느낌이랄까요. 다만 그 미제 것도 이미 닳을 대로 닳은 퇴물이라 묘하게 밸런스가 맞습니다. 아니 왜, 신-구의 대립에서 보통 옛것이 새것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밸런스가 새삼스럽거니와 편하게 다가오는 것도 얼추 설명될 텝니다. 거기서부터 걷기로 했습니다. 시간은 3시, 태양은 절정, 거리는 샛노란 빛에서 약간 주홍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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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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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전히 나는 일전의 상념 속에서 걷습니다. 다만 종로 거리마다 내 옛 모습과 옛 생각이 배 있어, 나는 내 과거와 함께 걸었습니다. 오묘한 기분, 말하자면 약간의 고뇌와 약간의 기쁨이 적절히 버무려진 기분으로 종로3가를 지나고, 해커스 어학원을 지나고, 탑골공원을 지나며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종각에 들어서 지난 독서 모임을 기억하고, 보신각 앞을 건너자마자 있는 영풍문고에서 아마 그대도 기억할 여느 일화를 떠올리며 계속해서 걷습니다. 이렇게 오래 걸은 게 얼마 만인가 생각합니다. 근래 사유가 멎었더랬는데, 그건 내 사유가 퇴화한 것이 아니라 내 걸음이 부족했던 것임을 깊고 올올이 체험합니다. 그러니 오늘 글의 분량은, 내가 걸은 길이만큼 깁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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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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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광화문 교보문고에 도착합니다. 사람이 참 많습디다. 도서 검색 컴퓨터를 오래 차지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것저것 책 위치를 인쇄했더니 영수증 길이가 발끝에 미칩디다. 그 자리를 찾아가다 보면, 중간중간 화려하게 치장해 둔 베스트셀러 내지는 마케팅 도서들의 매대 매대마다 발걸음이 걸립니다. 베스트셀러가 이리도 낯선 것을 보면 서점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책을 펼쳐 대강 훑습니다. 추천사는 건너뛰고, 목차와 작가 서론, 그리고 결론 및 해설을 읽고 덮기를 반복했습니다. 내가 찾는 주제가 어렵기도 참 어렵습니다만, 그게 그리 쉬이 찾아내질 리 만무할뿐더러, 베스트셀러는 책의 구성과 깊이가 너무 정갈해 읽을 맛이 잘 나지 않습디다. 그때 내가 찾고 있는 것이 곧 ‘인문학의 쓸모’였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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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5237_sclcifhh.jpg" alt="[크기변환]jakub-tomasik-tEB1UhjWeEk-unsplash.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50px;"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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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달 말, 우리 독서 모임에선 ‘멋진 신세계’를 공통 도서로 선정했습니다. 그건 그대의 추천 책이었고,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우리 둘은 그 주제에 관해 토의했습니다. 그대의 논지는 대강, ‘저 멋진 신세계에서 인문학은 조금도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저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가? 쾌락 제일주의의 멋진 신세계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쾌락 우선주의라는 아찔한 나선 위,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인문학은 무슨 쓸모로 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필요를 증명하고, 거듭 좁혀지기를 반복하나마 최후의 자리를 지켜낼 것인가.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인문학은, 인문학의 필수 불가결인 쓸모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그 이야기를 하는 그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게 어두웠습니다.</p>
<p>
   <br />
</p>
<p>교보문고를 3시간 동안 서성였습니다. 인문학 파트의 베스트셀러는 전부 다 훑은 것 같습니다만, 어째 시원치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답이 있었더라면 이미 밝혀졌을 것이고, 거기 정녕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있었더라면 인간이 이토록 천방지축으로 자유롭고 개별적이지는 않았을 터. 반면 인간의 문제에 정녕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기 위해선 하나의 인과가 선제 되어야 하고, 하나의 인과를 지닌 인간 사이에 개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몰개성의 세계가 이달 말에 우리가 논할, ‘멋진 신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 참 군침 도는 것이 기대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p>
<p>
   <br />
</p>
<p>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책 제목이 역설로써 가리키려는 바, 지금 이 세계가 바로 그 멋진 신세계라 생각합니다. 그대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지, 아직 그대를 망설이게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 채로 그리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불평등, 착취, 빈곤, 악의 존재를 외면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으니까요. 다만 무엇이 옳은가가 아닌, 무엇이 지금 힘을 지닌 채 세상에 그 결과를 기계적으로 떨치고 있는가, 즉 세계의 올바름이 아닌 세계의 인과가 곧 나의 관심사.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건 힘에의 예찬이 아니며, 그 찬가에 쓰일 마중물도 주춧돌도 아니니까요. 한 번 일어난 것은 언제금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나는 그 안에 놓인 인과를 해석하려 할 따름. 그러므로 세계를 역학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어느 한 가지가 힘을 가지면, 그 대립물로부터는 반동적 힘이 축적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호작용하며 알 수 없는 방향성을 자아내, 미래는 그를 향해 어지러이 나아갑니다. 아직 언어로 다 정립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한 희미한 조감도는 대략 변증법 구도 위에 자리한 삼체적 카오스를 그립니다. 즉, 3+@의 주체들이 삼체의 궤도를 이룬 채 휘청이며 나아가고 있을 미래는, 다 지나고 바라보았을 제 끝없는 정반합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으리라 추찰합니다.</p>
<p>
   <br />
</p>
<p>나는 이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선함을 긍정하지도, 온통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시도가 범하게 될 실수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의 숨은 주제가 바로 ‘구원의 역설’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을 불행하게 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아버린 역설. 개별 주체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게 곧 온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역설. 불행을 박탈 당하자 행복을 도모할 능력도 함께 사라져 버려 소마라는 마약에 의존해야 하는 인간의, 아- 진짜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오르는 이 역설.</p>
<p>
   <br />
</p>
<p>인간은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불행을 통해 행복하는 법을 스스로 단조해야 하며, 이 맥락 하에서 자유가 형벌이란 말은 조금 더 깊이 와닿습니다. 제한 없는 자유란 버거움이라지만, 우리 존재의 설계 자체가 그것과 떼어질 수 없게 되어 있음을 가리키니까요. 우리 뼈 깊숙이 흐르는 척수 속에 자유에 대한 갈망, 더 정확히는 ‘내 스스로 이루어 그것에 만족하리라는 어떤 야망’ 같은 것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강아지처럼 행복을 배급하고 생활의 불편 일체를 치워버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그러므로 우린 참으로 탐험하는 존재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거닐며 지도를 밝히고, 조막만 한 것인들 스스로 창조한 것으로부터 온전한 기쁨을 누리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되바라보면, 근래 자주 들리어 오는 피로와 우울이 달리 보입니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들이 밝혀져 더 이상 모험할 게 남아 있지 않은 우리들의 슬픔이려나. 이 구절에서 느닷없이 어릴 적 논두렁을 자전거로 달리던 기억은 떠오르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바둑판처럼 끝없는 격자로 구획된 논두렁 길을 모조리 내달리게 하던 것은 바로 자유와 모험하는 본능이 아니었을까. 난 아직도 그때 그 길을 눈감으면 얼른 그려낼 수 있습니다. 또, 집 바로 뒤편에 자리한 숲속의 길들도요. 숲 한가운데로 난 희미한 길들은 앞서 지나간 사람의 발길에 풀이 누운 자리, 희미하게 남았다가 곧 풀이 다시 자라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는 것. 그것들마저 내 안에 잘 표상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내 세계 속에 들어서 오래도록 자리하는 이미지들.</p>
<p>
   <br />
</p>
<p>그러므로 자유가 형벌이란 말에 내가 깊이 공감하면서도, 최후에 거절하는 까닭은 이상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설계도면 상 그것이 필수적이라는 취지. 물론 끝나지 않는 레이스라는 건 생각만 해도 퍽 지치는 일입니다만, 지치고 피로한 것도 긴 시계열로 놓고 보았을 때 잠깐의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요. 우리를 영장이자 지배종으로 만든 유일한 힘이 정말이지 오직 적응에 있다면, 우리의 적응이 지금 어느 시점에 와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작금 고등 교육자가 먼 과거 대학교수보다 많은 것을 알고 보고 느끼는 시대입니다. 유튜브엔 온갖 자극적인 영상이 판치지만, 한편으론 시사·인문학·과학 교양 등의 콘텐츠도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형태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밥 먹고 출퇴근하는 시간 동안, 우리가 내키기만 한다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이것들, 그것의 선택마저 자유입니다. 심지어 AI를 활용하며 지적 고도화의 싸이클은 더욱 가속되고 그 과정에서 사유의 외주화라든지, 생각하는 능력의 퇴화라든지 하는 자극적인 화두가 대두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그건 분명 필요한 경고성 자각입니다만, 하나의 사태에 비관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닐 텝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 문제로 환원될 이러한 사회현상들의 가치평가는 실상 양 극단을 모두 고려하였을 때, 오로지 좋음도 오로지 나쁨도 아닌 그 가운데 애매하게 놓여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것을, 그 반대에서도 마찬가지 것을 꾀합니다.</p>
<p>
   <br />
</p>
<p>한편 사람의 이성은 생각보다도 더 뼛속까지 이분법적이라, 하나의 좋음이 다른 하나의 나쁨에 결부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만, 나는 이쪽도 저쪽도 극단적인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이지 않다 여기는 까닭입니다. 사회현상을 선도 악도 아닌 의지로, 오직 의지의 현상과 적응의 산물로 나는 간주합니다. 선악은 그 안에 동시에 잠들어 있고, 어느 하나가 조망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나 여깁니다. 명백한 악행 말고 “사회현상”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만, 그럼에도 여기 제기될 그 흔한 반례를 헤아리면서도 아직은 그렇게 나 말하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선의 의지도, 악의 의지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하기에 전적으로 긍정할 수 없고, 그러므로 무엇이 옳은가가 아닌,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합니다. 내가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사람의 어떤 의지가 그 자신을 벗어나 외적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 드는 것뿐. 그것이 ‘선의 의지’일지라도, 그것이 ‘멋진 신세계’가 암시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아니었습니까. 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고통을 빼앗는 것은, 선의가 행할 수 있는 최대의 경악입니다. 그렇다 하여 그 반대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참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테요, 나도 아직 찾고 있수다. 다다를 수 없음을 알기에, 역설적으로 탐구가 멈추어서 안 된다는 것만을 이해합니다. 변증적 소실점처럼 끝없이 다가갈 뿐입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right; ">계속</p>
<p>
   <br />
</p>
<p>
   <br />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서상덕]]></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1:54:5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2</guid>
<title><![CDATA[[Opinion] 근디 혼혈도 무당 할 수 있나? - 월남보살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2</link>
<description><![CDATA[참외건 망고건 둘 다 노랗고 동그란 거 아니겠습니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다른 국적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혼혈 2세대가 신내림을 받게 된다면, 어느 국적의 신을 받아야 할까? <br /><br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임에도 듣자마자 '그러게? 정말 어느 쪽의 신을 받아야 하지?'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는 영화, 월남보살은 내림굿을 받는 주인공 수연의 장면으로 시작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3718_dwpmyksz.jpg" alt="[크기변환]다운로eee드.jpg" style="width: 700px; height: 290px;" /></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들어서며</b></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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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2026년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제22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품행제로’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월남보살은 김근호 감독이 만든 24분짜리 단편 영화이다.</p>
<p>&nbsp;</p>
<p>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지방 소도시에 살고있는 한국-베트남 혼혈아인 수연은 신병을 앓게 되고, 해결 방안으로 내림굿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굿판 도중 수연에게 베트남의 신이 강신하게 되고, 수연은 그 일을 계기로 혼란을 겪게 된다. 한국에 사는 한-베 혼혈아가 내림굿을 받을 수 있는가부터 한국에서 베트남 신을 모셔도 되는지를 두고 공판이 벌어지게 되고. 수연은 친구들과 함께 한국 국적의 신을 직접 불러들이는 ‘셀프 내림굿’을 치르기로 결심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디아스포라란</span></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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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월남보살은 드라마, 오컬트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야기를 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때 디아스포라란 무엇일까. 디아스포라(Diaspora)는 ‘씨앗을 뿌리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민족이나 집단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흩어져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본래 디아스포라는 바빌론 유수와 로마 제국의 탄압으로 인해 고향 팔레스타인을 떠나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타지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와 문화적인 정체성을 간직했던 것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시초가 되었다.</p>
<p>&nbsp;</p>
<p>그러나 태어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했던 과거의 씨족 사회와 달리, 오늘날 교통과 언어는 발달하고 발전하여 이젠 우리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렵지 않게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집을 찾아 머나먼 곳으로, 심지어는 다른 나라로 떠나기가 한결 쉬워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대의 디아스포라는 확장되고 변화하여 다양한 이유로 고향을 떠나게 되는 민족과 집단을 의미하게 되었다.</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13745_vdgumupp.jpg" alt="[크기변환]common.jpg" style="width: 700px; height: 313px;" /></p>
<p>&nbsp;</p>
<p>&nbsp;</p>
<p>월남보살 속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수연도 이러한 디아스포라 적인 삶을 살게 된다. 신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는 무당의 말에 내림굿을 받게 되지만, 막상 수연의 몸에 내려앉은 것은 “Xin chào (신짜오)”라고 인사를 건네는 베트남 신이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내림굿을 하던 무당 또한 혀를 끌끌 차며 “딱한 것, 네가 가지고 태어난 네 피를 탓해.”라는 욕설을 내뱉는다.</p>
<p>&nbsp;</p>
<p>그런 딸의 모습을 마주한 부모님은 결국 수연을 위해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신병으로 인해 생이별을 마주한 부모님을 보며 수연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계속 살아도 될지, 언어도 통하지 않지만, 어머니가 나고 자라온 베트남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지,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은 과연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단순하게 국적으로 이름 지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탐구하고 고민하는 동안 수연은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정의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내면 속의 태풍을 받아들이는 통쾌한 방법</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여기서 영화는 수연이 가지는 혼돈에 대해 유쾌하게 묘사한다. 수연의 국적이 어떻든 간에, 어디서 자랐고, 모국어가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고등학생이다. 낙엽이 굴러가기만 해도 깔깔댄다는 청소년 말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며 어른과 아이의 중간에 위치하는 청소년은 전 세계의 지구인들이 모두 겪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 청소년의 눈앞에 다가오는 현실에 대하여 영화는 무겁고 외롭다기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대처한다.&nbsp;</p>
<p><br /></p>
<p>내림굿을 받는 과정에서 수연은 망고와 참외를 동시에 든다. 노란색이고 타원형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두 과일은 한국과 베트남을 상징하는 토속적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라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으며 부정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수연의 운명에 대해 작품은 두 가지 과일로 재치 있게 은유한다.&nbsp;</p>
<p><br /></p>
<p>덧붙여 주목해 볼 점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해석이다. 신병을 고치려면 베트남 신 대신 한국 신을 받아들이는 내림굿이 필요하지만, 이를 맡아줄 무당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nbsp;</p>
<p>&nbsp;</p>
<p>이때 수연과 친구들이 자문을 요청하는 곳은 다름 아닌 Chat GPT이다. 내림굿을 행하는 장소는 한적한 독서실로, 모셔 올 신들의 모습은 모두 아이패드에 띄워진다. 상에 올려놓는 제물은 아이들이 용돈을 살 수 있을 만한 간식들이며 굿판의 흥을 돋우는 악기 소리는 핸드폰 영상 재생음으로 대체된다. 마지막으로 신을 받아들였음을 증명하는 ‘부채 찾기’ 과정에서는 부채 대신 손 선풍기를 활용한다. 내림굿의 고전적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10대답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발칙한 굿판은 끝내 수연의 바람을 이루어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0135_lrflkolk.jpg" alt="[크기변환]다운로드 (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09px;" /></p>
<p>&nbsp;</p>
<p>&nbsp;&nbsp;</p>
<p>극 중에서 수연은 결국 베트남 신과 한국 신을 모두 불러오게 된다. 두 신 모두 자신을 택하라며 수연을 부추기고,그 사이에서 이토록 고민해 왔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p>
<p>&nbsp;</p>
<p>국적이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나고 자란 수연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결말을 내릴까? 남이 무엇이라 떠들든 간에,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니 말이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 존재인지에 관한 생각의 마침표를 결정지은 수연의 판단은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기를 바란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0205_rxfmqniw.jpg" alt="컬쳐리스트 조유진.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조유진]]></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21:02: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6</guid>
<title><![CDATA[[에세이] 콘텐츠가 없는 사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6</link>
<description><![CDATA[게으르게, 관성적으로, 몹쓸 습관과 함께 공허를 만들고 있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4524_wosqnrba.jpg" alt="22732.jpg" style="width: 700px; height: auto; display: block; max-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p>
<p>&nbsp;</p>
<p>&nbsp;</p>
<p>콘텐츠가 없는 사람.</p>
<p><br />어떤 사람은 자기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어디선가 이야기가 되는 것. 쉽게 따라 할 수도 없고 따라 한다고 될 것도 아니다. 나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고 해도 모두가 믿을 수 있을 정도이다.
</p>
<p><br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아무래도 경험과 체험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콘텐츠가 따르는 것 같다. 본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콘텐츠가 생성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당사자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경우가 있으니 흥미본위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p>
<p>&nbsp; <br />생전 생각해 본 적 없는 개인의 콘텐츠를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되는 건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라고 생각한다. 요즘 입시는 알지 못하니 취업으로 두자면 콘텐츠가 곧 '쓸만한 거리'가 된다. 남들과 차별화되는 나만의 것으로 경쟁력을 만들 수 있다. 나의 경우 콘텐츠 결여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재취직 당시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취미이자 대외 활동이자 꾸준함의 사례로 녹여내었고 면접에서 이야깃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p>
<p>&nbsp; <br />그렇지만 취준생 당시에는 콘텐츠 부족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넘치는 게 취준생이고 모범 사례로 꼽혀 많은 이의 참고 자료가 되는 우수 자소서는 쉽게 따라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아무것도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나만의 이야기가 없다. 누군가 흥미를 느낄 소재가 없다. 듣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현대 사회인의 삶 이렇게 재미없어도 괜찮을까. <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내가 재미없는 사람인 건 괜찮다. 이건 타고난 성향이니까 그럴 수 있고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콘텐츠가 없다는 건 어떤 면에서 인생이 지나치게 단조로운 것 같아 위기감이 느껴진다. 일상에 별문제 없다. 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 상태 나쁘지 않고 평범한 직장인 그 자체의 별일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거기서 문제 의식을 느낀다. 흘러가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복에 겨운 상황이지만, 삶이란 건 원래 좀 더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p>
<p><br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업무적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이나 포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추구하지 않더라도 삶에서 보람과 성취가 결여되었을 지도 모른다. 도파민은 다양하게 충족하고 있으니 그런 쪽으로 결핍되지 않았을 테고, 루틴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은 시간이 많은 것 같다. 이 상태를 뒤집듯 바꾸려는 건 아니지만 변화를 주어야 삶이 윤택해질 것 같다.
</p>
<p>&nbsp; <br />그러니까, 자기만의 고유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체적인 삶을 사는데 나 같은 사람은 관성적으로 살아간다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나는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디폴트 값이다. 친구들이 나를 침대에서 꺼내서 밖으로 부르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주말에 일정을 잡지 않는다. 주중에 힘들었으니 주말을 쉬어가는게 아니라 별 생각도 계획도 의욕도 없어서 주말이 텅 비어버리는 것이다. 게으름이나 체력 부족과는 조금 결이 다른, 몹쓸 관성과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일상이지만 나는 쇼츠와 릴스를 보며 단순한 도파민을 추구하는 삶을 목표로 한 적이 없다.</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문제의식과 위기감을 느낀다고 해도 내가 콘텐츠를 만들고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걸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런 콘텐츠가 없는데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양하려는 것이다.
</p>
<p>&nbsp; <br />앞으로도 나에게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될 만한 콘텐츠는 아마 나오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면 재미있겠지만 애초에 야망이 없는 삶이라 반짝이는 무언가를 생산해 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다만, 아무것도 없으면 안된다. 적당히 게으르게 보통의 관성을 가지고 티끌 모으듯 나를 채워 나가면 공허를 마주하고 곤란한 순간은 모면할 수 있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고, 혼자 삽질할 시간이 줄어들 거라 본다.</p>
<p>&nbsp; <br />우선은 다 똑같이 텅 비어 있는 주말에 약간의 뉘앙스를 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내년 이맘때쯤, 여전히 콘텐츠가 없더라도 조금은 달라져서 글을 쓰고 있길 바란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장미]]></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3:47:4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63</guid>
<title><![CDATA[[Opinion] 취약성은 힘을 만든다 - 더 모닝 쇼 [드라마]]]></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63</link>
<description><![CDATA[취약함은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연대가 될 수 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누군가 나의 가장 깊은 약점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둘 중 하나다. 나를 가장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 혹은 누구보다 든든한 편이다. 화려한 아침 뉴스 프로그램의 이면을 다루는 드라마 &lt;더 모닝 쇼&gt;는 권력의 시작점을 인간의 취약성에서 찾아낸다.</p>
<p><br /></p>
<p>주인공 알렉스(제니퍼 애니스톤 분)는 약 20년간 방송국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온 베테랑 아나운서다. 그녀는 공동 진행자 미치 케슬러(스티브 카렐 분)와 함께 '더 모닝 쇼'로 미국 사람들의 아침을 연다. 모두가 그들의 자연스러운 케미스트리를 사랑했으며 시청률 또한 이를 증명했다.</p>
<p>&nbsp;</p>
<p>그런데 그녀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미치가 내부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고발로 인해 쇼에서 강제 하차하게 된 것이다. 알렉스는 한밤중에 미치를 직접 만나 울부짖으며 배신감을 호소하나, 결국 실추된 이미지를 수습하는 건 그녀의 몫이 되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94301_qyqdhxme.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이 무렵 보도기자 브래들리(리즈 위더스푼 분)의 거침없는 발언이 담긴 유튜브 영상이 바이럴 된다. 방송국이 브래들리를 눈여겨본다는 걸 알게 된 알렉스는 브래들리가 자신의 새로운 공동 진행자라고 공식 석상에서 먼저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얼떨결에 둘은 새로운 '더 모닝 쇼'를 꾸려 간다.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서 울고 웃고 싶어 하는지 영민하게 파악하고 있는 알렉스와, 보지 못하는 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브래들리는 계속해서 부딪힌다. 이때 미치의 성추문 사건은 계속해서 파장을 낳고, 알렉스와 브래들리는 가장 중요한 뉴스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다다른다.</p>
<p><br /></p>
<p>&lt;더 모닝 쇼&gt;는 미투 운동을 다룬 작품이다. 간혹 미투 운동을 성별 간 갈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은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에 대한 운동이다. 미치가 여직원들에게 했던 말들과 드라마 초반, 알렉스가 브래들리에게 하는 말들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내가 당신을 데려왔고, 나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것이다'는 심리적 압박의 모습이 계속 겹쳐 보인다.</p>
<p><br /></p>
<p>그럼에도 미치와 알렉스가 지나가듯이 던지는 위로와 작은 칭찬에 후배들은 울고 웃는다. 또한 동료들과의 술 한 잔으로 의지가 생기고 새로운 기회 또한 열린다. 결국 권력 구조는 취약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나의 취약성을 알게 된 사람은 둘 중 하나가 된다. 가장 위험한 적 혹은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 어떤 의미에서든 힘은 취약성에서 생겨난다. 누군가의 취약성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취약성을 서로 공유하며 생긴 연대는 권력 구조를 오히려 타파하기도 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33231_evkysykg.jpg" alt="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br /></p>
<p>&nbsp;</p>
<p>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리즈 위더스푼이 연기하는 브래들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발목을 유일하게 움켜잡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무너져 있던 가족이다. 취약함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p>
<p><br /></p>
<p>그러면 그 취약성은 왜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모이고 분위기가 형성되는 자리에서는 '평판'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p>
<p><br /></p>
<p>&lt;더 모닝 쇼&gt;는 허구이지만 더없이 현실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2017년 폭로된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은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다. 수십 년 동안 업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와인스타인은 배우들의 커리어를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 권력으로 수많은 성폭력을 저질러왔다. 사람들이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를 둘러싼 침묵의 기간이었다. 소문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사람들은 관계와 평판, 생존을 이유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p>
<p>&nbsp;</p>
<p>&lt;더 모닝 쇼&gt;는 회색 지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고, 권력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과 공모로 강화되는지 보여준다. 악은 가해자 한 명이 아닌, 하나의 시스템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33245_xfgvuyhp.jpg" alt="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68px;" /></p>
<p><br /></p>
<p>&nbsp;</p>
<p>&lt;더 모닝 쇼&gt;는 애플TV+의 개국공신이라 불리는 드라마다. 2020년 첫 방영된 시즌 1은 그중 최고라 꼽힌다. 촘촘히 짜인 10개의 에피소드는 매회 명장면을 낳았다. 주연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는 오히려 &lt;더 모닝 쇼&gt;를 강렬하게 비춰주었다. '아메리칸 스윗하트' 이미지로 유명한 두 배우들, &lt;프렌즈&gt;의 제니퍼 애니스톤, &lt;금발이 너무해&gt;의 리즈 위더스푼은 발랄한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배우들이다. 브래들리를 연기한 리즈 위더스푼은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고 말한 바 있으며, &lt;더 모닝 쇼&gt;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제니퍼 애니스톤 역시 기존의 사랑스럽고 친근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성공과 평판을 지키기 위해 위태로이 흔들리는 알렉스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리고 코미디와 정극 연기 둘 다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스티브 카렐이 성추문으로 추락한 미치 케슬러를 맡아 드라마에 끊임없이 긴장감을 부여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33345_mydggkkd.jpg" alt="3 (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br /></p>
<p>&nbsp;</p>
<p>처음 드라마를 봤을 때는 왜 이 작품이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들에 피로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lt;더 모닝 쇼&gt;는 정의를 가리기 이전,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인물들에 대한 공감을 앞세운다. 자명한 진실이 있다면 누구나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취약성을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일 것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채수빈]]></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13:35:0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8</guid>
<title><![CDATA[[Review] &#039;봄&#039;이 올 수 있을까 - 연극 &#039;짬뽕&#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8</link>
<description><![CDATA[짬뽕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04956_wcmztygh.jpg" alt="[극단 산] 2026 짬뽕 포스터(0615 최종).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7px;" />
</p>
<p>&nbsp;</p>
<p>&nbsp;</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2004년부터 이어져 올해로 22주년을 맞은 연극 &lt;짬뽕&gt;을 감상했다.</span>
</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극은 1980년대 5월,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중국집 춘래원의 사장 신작로와 여동생 신지나, 배달원 백만식, 그리고 신작로의 연인 오미란 등 가족 같은 네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span>
</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
</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작품은 </span><b style="text-align: justify;">'광주의 민주화 운동이 짬뽕 한 그릇 때문에 시작됐다면?'</b><span style="text-align: justify;">이라는 기발한 상상에서 출발하지만, 그 유쾌한 설정은 곧 시대의 비극과 맞닿는다.</span>
</p>
<p>
   <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05031_lvulnehe.jpg" alt="짬뽕_장면 촬영_사진 장태준 (23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07px;" />
</p>
<p>&nbsp;</p>
<p>&nbsp;</p>
<p>이 작품은 민주화 운동을 주요 소재로 담고 있지만, 참혹한 현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p>
<p>&nbsp;</p>
<p>대신 가게 문을 열면 밀려드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와 총성, 그리고 긴박한 상황을 담은 뉴스 속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날의 현장을 연상시킨다. 무대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와 분위기만으로도 관람객들은 당시의 공포와 혼란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러한 비극적인 시대상 속에서, 주인공 신작로가 차린 중국집의 이름은 '춘래원', 말 그대로 '봄이 오는 곳'이다. 1980년이라는 다소 의미 있는 배경 속에서 이 '봄'은 단순히 따뜻한 계절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기나긴 독재의 겨울을 지나 시민들이 염원해 온 민주화의 희망을 품은 간절한 '봄'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05034_zioviwyl.jpg" alt="짬뽕_장면 촬영_사진 장태준 (31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29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작품은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을 활용해 군부 독재의 야만성과 억압적인 시대상을 날카롭게 풍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중국집 간판이 빨간색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만으로 간첩이라 몰아세우고,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계엄군의 모습은, 작로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던 일이지만, 당시의 비이성적인 정치 현상을 꼬집는다. 대사는 우스꽝스럽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와 현실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극의 절정 단계에 이르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트리거는 계엄군의 총탄으로 인한 미란의 사망이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만식은 작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지나는 그런 만식을 뒤따르지만,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춘래원으로 돌아오지 못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 신작로 역할을 맡은 최재섭 배우의 연기였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분명 거리가 있었지만, 그 경계 너머로 전달되는 연기는 실존하는 인물의 삶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은 채 홀로 남아 읊조리던 독백 연기는 더욱 쓸쓸하고 슬프게 느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나는 5.18 운동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였기에 그 아픔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거나 관련된 영화를 봐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깊이를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연극 &lt;짬뽕&gt;을 통해 평범했던 이들의 일상이 흔들리는 모습을 마주하며,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이 민주주의가 그리 오래전의 이야기가 아님을 비로소 실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렇게 얻어낸 봄을 지켜내기 위해, 계속 떠올려야만 한다. 피로 쓰인 민주주의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005056_zstyciee.jpg" alt="윤경주_컬쳐리스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br />
</p>
<p>
   <br />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윤경주]]></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00:00:1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62</guid>
<title><![CDATA[[Review] 파격적인 언행과 쉴 새 없이 터지는 냉소, 연극 &#039;플리백&#039;]]></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62</link>
<description><![CDATA[연극 &#039;플리백&#039;에 대한 후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4540_tliazinb.jpg" alt="IMG_6274.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0px;" /></p>
<p>&nbsp;</p>
<p>&nbsp;</p>
<p>어두운 극장 안, 일렁이는 연기와 함께 등장하는 한 여자가 있다.</p>
<p>&nbsp;</p>
<p>그 여자는 앞으로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홀로 채워나갈 것이다.</p>
<p>&nbsp;</p>
<p>어떤 이야기를 보여줄까?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몇 번이나 깜짝 놀랐는지 모르겠다. 휘몰아치던 시간들이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졌을 때,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5053_pgbffoos.jpg" alt="IMG_627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연극 〈플리백〉은 성적 농담과 냉소, 파격적인 유머로 가득한 블랙코미디다.</p>
<p>&nbsp;</p>
<p>런던의 한 골목에서 기니피그 카페를 간신히 운영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플리백’은 충동과 실수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문제투성이’라는 뜻의 ‘플리백’. 그녀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다.</p>
<p>&nbsp;</p>
<p>그녀는 면접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상의를 벗어버리고, 성공한 언니와는 사사건건 부딪히며, 아무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녀의 모습은 자유롭고 재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친구의 죽음, 가족과의 단절, 관계 속의 공허함이 켜켜이 쌓여 있다.</p>
<p><br /></p>
<p>연극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1인극의 형식이라는 점이었다.</p>
<p>&nbsp;</p>
<p>처음에는 한 명만 등장하면 지루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배우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배우의 능숙하고 몰입감 있는 연기는 ‘플리백’이라는 인물을 온전히 드러내었다. 오히려 인물의 내면을 끌어내는 데 유리했다.</p>
<p><br /></p>
<p>위에서 언급했듯 주인공인 ‘플리백’은 문제투성이다. 그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연극이 끝날 때까지 쉴 새 없이 던지는 성적 농담과 자유로운 행동들에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온갖 부적절한 행동을 저지르며 웃음으로 불편한 상황을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연극 중 관객에게 불쑥 내미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p>
<p>&nbsp;</p>
<p>분명 엉망진창처럼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매력적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 그녀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4810_ptyitzot.jpg" alt="IMG_626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무대 위에 놓인 여러 개의 의자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p>
<p>&nbsp;</p>
<p>바닥에 발이 닿을 정도로 낮은 의자, 크고 넓직한 의자, 딱 붙어 있는 두 개의 의자 등. 그 의자들은 그녀의 집이자 직장, 또는 술을 진탕 마실 수 있는 바를 연상시키는 효과적인 소품들이다.</p>
<p>&nbsp;</p>
<p>그녀는 그 의자 위에 털썩 앉거나 기대며 자신의 실수와 충동이 섞인 생활을 여과 없이 토해낸다. 처음에는 단지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소품을 최소화한 건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며 의자들이 단순히 공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장인물을 투영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p>
<p><br /></p>
<p>극의 후반부에 그녀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 ‘부’의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과, 상처를 입은 ‘부’가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녀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이 폭발하며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을 언급하고 의자를 쓰러뜨린다. 엉망이 된 의자들 가운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웃음을 찾아볼 수 없다.</p>
<p>&nbsp;</p>
<p>그 순간 나는 그녀의 자기혐오와 죄책감, 외로움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5013_yovmyfdu.jpg" alt="IMG_627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46px;" /></p>
<p>&nbsp;</p>
<p>&nbsp;</p>
<p>그녀는 깊은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성적인 행위와 냉소를 멈출 수 없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구다. 그녀는 성적 행위를 하는 그 순간만이 세상이 자신을 꽉 껴안아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p>
<p>&nbsp;</p>
<p>그녀의 이야기만 듣게 된다면 분명 동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 또한 그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들의 아픔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p>
<p><br /></p>
<p>나는 ‘플리백’의 감정과 속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 깊게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가 자신의 엉망인 삶을 관객에게 모두 고백했을 때, 조금이나마 부적절한 방법이 아닌 온전한 방법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웠다고 느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05610_pookwwqw.jpg" alt="인사이트 에디터JPG.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한수빈]]></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10:53:5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3</guid>
<title><![CDATA[[Opinion] 우리는 언제부터 영화를 설명받기 시작했을까: HOPE 호프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3</link>
<description><![CDATA[《호프》를 보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관객들의 반응이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left;">
   <b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8px;">우리는 언제부터 영화를 설명받기 시작했을까: HOPE 호프</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0919_seabffmw.jpg" alt="style_68c8eecd6fe7c.jpg" style="width: 700px; height: 482px;" />
</p>
<p>&nbsp;</p>
<p>&nbsp;</p>
<p>오랜만에 감독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를 봤다. 영화관을 나설 때의 감정은 의외였다. 작품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작품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에 대한 실망이었다.</p>
<p>
   <br />
</p>
<p>상영 직후 SNS와 커뮤니티에는 비슷한 반응이 쏟아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감독이 해명해야 하는 거 아니냐." "시간만 버렸다." 물론 모든 영화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처럼 느껴졌다.</p>
<p>
   <br />
</p>
<p>나홍진의 《호프》는 결코 불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던지는 상징과 메시지는 예상보다 직접적이다. 감독은 수많은 장면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 우리가 외면해 온 사회의 얼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럼에도 많은 관객은 영화를 이해하기보다 설명을 요구했다.</p>
<p>
   <br />
</p>
우리는 언제부터 영화를 해설 영상과 함께 소비하기 시작했을까.
<p>
   <br />
</p>
<p>요즘 영화를 둘러싼 콘텐츠를 보면 작품을 감상하는 일보다 '결말 해석', '10분 요약', '복선 총정리'가 먼저 소비된다. 영화를 본 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조합하기보다, 정답을 찾아 확인하는 일이 감상의 마지막 단계가 되었다.</p>
<p>&nbsp;</p>
<p>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빈칸을 남기는 영화는 곧바로 '난해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하지만 영화는 문제집이 아니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0202_qbyyrmcs.jpg" alt="9aae6b0c-d6c8-4fa8-800e-413dea5178a9.jpg" style="width: 700px; height: 323px;" />
</p>
<p>&nbsp;</p>
<p>&nbsp;</p>
<p>감독은 정답을 맞히라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관객이 그 질문 앞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때로는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가는 경험 역시 감상의 일부다. 모든 장면을 대사로 설명하고, 모든 상징을 친절하게 번역해 주는 순간 영화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 설명서가 된다.</p>
<p>&nbsp;</p>
<p>물론 《호프》가 완벽한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몇몇 CG는 화면에서 이질적으로 튀었고, 그것이 의도된 연출인지조차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만약 의도였다면, 나에게는 충분히 설득되지 못했다.</p>
<p>&nbsp;</p>
<p>정호연의 연기 역시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후 전개에서 캐릭터의 정체가 드러나면 재평가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적어도 1부에서의 연기는 연기와 부자연스러움의 경계가 모호했다. 후속편을 전제로 한 설계라면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p>
<p>
   <br />
</p>
<p>그럼에도 이 영화를 향한 가장 많은 비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였다는 사실은 의아했다. 정말 영화가 난해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영화를 읽는 감각을 조금씩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모든 영화가 친절할 필요는 없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30654_uaqftfpq.jpg" alt="133940872.1.jpg" style="width: 700px; height: 1556px;" />
</p>
<p>&nbsp;</p>
<p>&nbsp;</p>
<p>오히려 어떤 영화는 관객에게 약간의 불편함과 혼란을 남겨야 한다. 그 빈틈을 메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감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p>
<p>&nbsp;</p>
<p>하지만 우리는 점점 영화를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으로 대한다. 이해되지 않으면 영화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곱씹기보다 해설을 찾는다. 그렇게 감상은 점점 짧아지고, 질문은 사라진다.</p>
<p>
   <br />
</p>
<p>실험적인 영화가 언제나 좋은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가장 먼저 "이해 안 된다"는 이유로 밀어내는 문화는 결국 새로운 영화를 만들 토양까지 좁게 만든다. 익숙한 서사와 익숙한 연출만 살아남는 환경에서 영화는 발전하기 어렵다.</p>
<p>
   <br />
</p>
<p>《호프》를 보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우리는 정말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p>
<p>&nbsp;</p>
<p>어쩌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과정을 점점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신수빈]]></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3:14:1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4</guid>
<title><![CDATA[[가위바위보, 하나 빼기]  당신은 비술은 무엇입니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4</link>
<description><![CDATA[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은 가까이 놓인 것들을 나의 피부처럼 느끼는 집중이 필요한 때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85720_rgueokkw.jpg" alt="20260729170356_ec0dad8d220a.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nbsp;</p>
<p>문득 그럴 때가 있다. 별생각 없이 발 딛고 있던 세계를 정통으로 맞아버려 낯설고 아득해지는 때가. 대형마트 한복판에서 고개를 들었다가 끝없이 진열된 상품들에 압도됐던 날이 그랬다. 이런 마트가 지역에 몇 개나 있으려나. 서울에는? 한국에는? 옆 나라에는? 지구 반대편에는? 이 모든 상품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거지. 그날은 모든 게 새삼스러웠다. 거리에 빼곡히 늘어선 상가, 내리고 내려도 끝나지 않는 알고리즘의 바다. 이 뒤엔 얼마나 거대한 세상이 있는 거지.</p>
<p>
   <br />
</p>
<p>내가 쌀 한 톨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이 작은 나는 어디까지 연결될 수 있을까. 얼마큼의 연결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고 자란 시골을 떠나 서울에 8년간 몸을 담고 있다. 그동안 내가 느낀 서울은 한 마디로 유사 연결의 공간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진 않으나 언제든 연결가능한 대상이 즐비한 곳. 사람, 공간, 관념, 감각 어떤 것이든.</p>
<p>
   <br />
</p>
<p>그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과 ‘연결될 수 있음’의 차이를 자주 헷갈린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게 없어도 전부 가진 것 같고, 전부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당장 손에 잡히는 게 있어도 가진 것 같지 않다. 신체와 정신의 만성적인 인지 부조화 상태. 사실 현실과 상상이 흐릿한 경계로 이어진다는 감각, 착각할 수 있다는 면죄부는 달콤하다. 지금의 내가 아닌 가능성이 필요한 이들에게 대도시의 혼란은 안락함을 주기 마련이다.</p>
<p>
   <br />
</p>
<p>동시에 그 막연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인 만족은 현재 쥘 수 있는 것으로부터 채워지니까. 밥을 먹을 수 있고 간식을 먹고 책과 만화와 영화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여유 시간, 서로를 세심히 관찰하고 해석하는 친구들, 애증의 가족 같은 것에서. 허상과는 헷갈려서는 안 되는 나의 확실한 부분들에서. 그것들을 선명히 기억할 때 막연한 가능성은 말 그대로 막연한 정도만 있어도 괜찮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은 가까이 놓인 것들을 나의 피부처럼 느끼는 집중이 필요한 때이다.</p>
<p>
   <br />
</p>
<p>가위바위보를 변형한 게임으로 ‘하나 빼기’가 있다. 양손으로 가위, 바위, 보 중 두 가지를 만든 다음,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한 손을 내밀어 승부를 내는 규칙이다. 이기기 위해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 필승의 비술을 연마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져 버리는 무인의 모습 같다. 어쩌면 삶과의 전투에서 자주 승리하기 위해선 비움을 단련해야 할지 모른다. 절벽 끝에 내몰린 상태에서도 확실하게 내리꽂을 수&nbsp; 있는 기술은 꼭 필요하니까.</p>
<p>
   <br />
</p>
<p>하나씩 빼려고 해본다. 결국 내가 갖지 못할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으려고 해본다. 결국 내가 되지 못할 것들을. 왜인지 그 빈자리가 공허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가 쟁취하지 못한 것을 거머쥔 누군가를 모실 수 있는 자리가 되니까. 손을 맞잡으면 그가 가진 내공이 티끌이라도 흘러 들어올 거란 믿음과 시샘과 존경으로 그들 옆에 서고 싶다.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교환하기를, 홀로는 채우지 못하는 퍼즐판을 완성할 수 있기를 꿈꾸며.</p>
<p>&nbsp;</p>
<p>그러므로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비술을 갖고 있는지. 한 수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지.</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65838_nmxoyhbu.jpg" alt="컬쳐리스트 태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해영]]></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17:03:5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60</guid>
<title><![CDATA[[Opinion] 촉감이 하나의 소비 트렌드가 되다 [문화 전반]]]></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60</link>
<description><![CDATA[말랑이부터 왁뿌볼, 키캡까지, 손끝에서 시작되는 소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반짝 유행이 아니었다</span></b>
</p>
<hr style="text-align: justify; 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여전히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말랑이, 왁뿌볼, 키캡 등의 아이템. 처음에는 반짝 인기를 얻다가 사라지는 트렌드일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오히려 수제 말랑이, 얼린 슬랑이처럼 새로운 형태로 점점 진화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사람들은 제품 자체보다 ‘만지는 재미’와 ‘촉감’을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자꾸 손이 가는 이유</b></span>
</p>
<hr style="text-align: justify; 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즘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보고, 끝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다. 강한 자극이 끊이지 않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힐링할 수 있는 순간을 찾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말랑이를 만지고 눌러보는 행동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다. 그저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잠시 머리를 비우고,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파민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단순한 감각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말랑이도 어느새 하나의 필수템이 되어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에 어린 시절의 기억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촉감 놀이를 즐겼던 경험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지금의 말랑이와 왁뿌볼이 사랑받는 이유도, 어릴 적 아무 걱정 없이 놀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익숙함이 사람들의 손을 계속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83314_evgllkre.jpg" alt="가나디.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span style="font-size: 14px;">▲ 가나디 스트레스볼 인형</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촉감도 취향이 된 시대</b></span>
</p>
<hr style="text-align: justify; 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흥미로운 점은 촉감 아이템의 종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슬라임에서 시작해 말랑이, 스퀴시, 왁뿌볼 등 종류와 형태는 다양해졌다. 이는 특정 제품이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촉감을 즐기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과도 가깝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이 원하는 촉감도 점점 세분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촉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단단한 촉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따라 같은 말랑이라도 소프트 타입과 하드 타입으로 나뉘고, 원하는 촉감에 맞춰 커스텀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점점 취향과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촉감’. 앞으로는 어떤 촉감을 원하는지, 어떤 질감이 나에게 맞는지가 새로운 선택 기준이 될 것이다. 음료 취향이나 향수 취향을 고르듯, 촉감 역시 각자의 취향에 맞춰 즐기는 새로운 소비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83510_qxuadvqq.jpg" alt="IMG_45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87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span style="font-size: 14px;">▲ 품절 대란이 있었던 무한상사X맘스터치 굿즈 (스퀴즈볼)</span>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손끝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소비</b></span>
</p>
<hr style="text-align: justify; 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유행은 금방 바뀌지만 사람들의 습관은 오래 남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말랑이, 키캡 등의 아이템 역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물건이 되고 있다. 손이 심심할 때 무심코 말랑이를 만지고,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키캡을 습관처럼 두드리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제품이 새롭게 등장하느냐보다, 사람들이 계속 손이 가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의 문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으로도 손끝에서 작은 즐거움과 편안함을 찾는 소비는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며 하나의 메가 트렌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84049_icfdxmem.jpg" alt="정민경.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민경]]></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02:09:3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50</guid>
<title><![CDATA[[Opinion] 비이성적 증권가의 이야기 - 네이버 웹툰 &#039;샤MONEY즘&#039; [만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50</link>
<description><![CDATA[증권, 그리고 샤머니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b><span style="font-size: 18px;">여의도 마천루 아래의 기원, 우리는 왜 샤머니즘에 끌리는가</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SK하이닉스를 비롯한 주요 반도체 종목들의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다가 이내 커다란 낙폭을 그리며 하락했다. 환호가 지나간 자리에는 이내 깊은 탄식과 허탈감이 남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주식이나 가상자산 같은 투자 수단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월급만 모아서는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하나의 상식처럼 자리 잡으면서, 재테크는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다.</p>
<p><br /></p>
<p>시장을 견인하던 종목들의 폭발적인 상승세는 수많은 대중을 투자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급락은 수많은 이들이 품었던 경제적 자유의 희망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변화가 관찰된다. 본래 주식 투자란 기업의 내재 가치를 분석하고, 산업의 흐름을 읽으며, 거시경제의 변수를 고려해 위험을 관리하는 이성적인 행위다.</p>
<p>&nbsp;</p>
<p>그러나 시장의 변동성이 극에 달하자 투자의 본질은 가려지고, 그 자리에 요행을 바라는 원초적인 심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장이 열리기 전 주식 앱을 열어보며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실 매주 로또를 사며 신의 은총을 기대하는 구복(求福)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5851_luxbvpee.jpg" alt="샤머니즘_포스터.jpg" style="width: 690px; height: 1000px;" /></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여의도 한복판의 굿판</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네이버 웹툰 &lt;샤money즘&gt;은 바로 이 지점을 정밀하게 포착해 낸다. 가장 차갑고 이성적인 논리로 작동할 것 같은 여의도 금융가 한복판에 '무당'이라는 비이성적 존재를 배치한다.</p>
<p>&nbsp;</p>
<p>작품 속 여의도 무당들은 살굿을 통해 특정 기업의 주가를 의도적으로 폭락시키고, 축원굿을 통해 종목을 폭등시키며 거대의 증권사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받는다. 지극히 주술적인 행위가 현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로 작동하는 셈이다.</p>
<p><br /></p>
<p>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단순히 설정이 기발해서가 아니다. 자유시장경제가 표방하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시장'이라는 명제가 지닌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p>
<p>&nbsp;</p>
<p>우리는 시장이 수급과 정보에 의해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실제 시장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는 인간의 과도한 탐욕과 공포라는 비이성적 감정이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인간의 심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첨단 금융 시스템 역시 언제든 주술적 기복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작품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주술적 소망과 노동의 가치</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합리적인 분석보다는 단 한 번의 대박이라는 행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샤머니즘의 탈을 썼지만, 그 속에는 일확천금이라는 기적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삶의 궤도를 바꾸기 힘들다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씁쓸한 초상이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p>
<p><br /></p>
<p>웹툰 속 여의도 굿판은 매력적인 허구일 뿐이다. 현실의 주식 시장에는 내 자산을 자동으로 늘려줄 신도, 주가를 부양해 줄 굿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의 과열과 불안에 휩쓸려 신적인 존재에게 기도하듯 투자를 이어가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건네야 할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자경단은 결국 단순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p>
<p><br /></p>
<p>시장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어선은 언제나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자산을 운용하는 평정심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승주]]></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0:59:1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65</guid>
<title><![CDATA[[Review] 잘 끓인 짬뽕은 식지 않는다 - 연극 &#039;짬뽕&#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65</link>
<description><![CDATA[잘하는 법을 너무 잘 아는 연극]]></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53904_lnngapqg.jpg" alt="[극단 산] 2026 짬뽕 포스터(0615 최종).jpg" style="width: 700px; height: 987px;" />
</p>
<p>&nbsp;</p>
<p>&nbsp;</p>
<p>“나는 만 가지 발차기를 한 번씩 연습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하는 사람이 두렵다.” 무술가이자 액션 배우 이소룡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다.</p>
<p>&nbsp;</p>
<p>이는 문화예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극적 요소와 다양한 변형이 넘쳐나는 요즘, 한 작품을 수만 번 다듬어 만들어진 무대는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준다.</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2004년 초연 이후 꾸준히 재공연된 연극 &lt;짬뽕&gt;이 그 주인공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잘하는 법을 너무 잘 아는 연극</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53812_vpeefohv.jpg" alt="짬뽕_장면 촬영_사진 장태준 (26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14px;" />
</p>
<p>&nbsp;</p>
<p>&nbsp;</p>
<p>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개의 속도감이었다.</p>
<p>&nbsp;</p>
<p>수많은 재공연을 거친 작품답게 장면에서 장면으로 넘어가는 타이밍에 군더더기가 없다.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은 과감히 생략하고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힘을 준다. 이 호쾌한 전개는 높은 몰입감으로 이어진다.</p>
<p>
   <br />
</p>
<p>노련함은 극 내용에만 있지 않다. 공연 시작 전, 작중 인물이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들여 짜장면과 짬뽕을 함께 먹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 짧은 순간이 공연 전체 공기를 바꿔놓았음을 느꼈다.</p>
<p>&nbsp;</p>
<p>관객과 배우, 관객과 관객 사이에 유대감이 쌓이고 객석 분위기가 풀어진 채로 극이 시작된다. 개그 신이 많은 작품인 만큼 이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작품만큼이나 극장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경험 자체가 소중하게 다가왔다.</p>
<p>
   <br />
</p>
<p>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lt;짬뽕&gt;의 코미디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배우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톤과 액션으로 ‘여기 웃긴 장면입니다’라고 관객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p>
<p>&nbsp;</p>
<p>사실 이런 전통적 개그 방식은 자칫 촌스럽게 느껴지지 쉽다. 하지만 &lt;짬뽕&gt;의 개그는 관객과 소통하는 법의 아는 개그였다. 웃겨야 할 순간을 정확히 알고 그 순간을 정직하게 밀어붙이는 것.</p>
<p>&nbsp;</p>
<p>웃기지 않은 장면에서 웃음을 강요당하는 듯한 순간을 자주 겪어온 터라, &lt;짬뽕&gt;이 보여준 정직함은 관객에 대한 배려처럼 느껴졌다.</p>
<p>
   <br />
</p>
<p>
   <br />
</p>
<p>
   <br />
</p>
<p>
   <span style="font-size: 18px;"><b>소시민의 삶으로 돌아본 5월</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lt;짬뽕&gt;은 한 중국집 배달원 개인이 겪는 사건에서 출발해, 1980년 5월 광주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서서히 확장되어 간다.</p>
<p>&nbsp;</p>
<p>극 중 인물들은 눈앞의 사건에 조금씩 다른 입장을 가진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애써 외면한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입장들이 모두 이해가 된다.</p>
<p>
   <br />
</p>
<p>이런 입체적이고 다양한 캐릭터 설정은 개연성을 낳고, 이는 몰입으로 이어진다. 소시민들의 서사로 5.18을 되짚는 만큼 관객들이 인물들에게 애정을 갖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lt;짬뽕&gt;은 이 과제를 정확히 해낸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53746_slhcwqvx.jpg" alt="짬뽕_장면 촬영2_사진 장태준 (26).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0px;" />
</p>
<p>&nbsp;</p>
<p>&nbsp;</p>
<p>&lt;짬뽕&gt;은 형식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연극이다. 차돌 짬뽕도, 마라 짬뽕도 아닌, 그냥 짬뽕. 그런데 그 평범한 한 그릇을 이렇게까지 맛있게, 이렇게까지 재밌게 뽑아내면 관객은 별수 없이 좋아하게 된다.</p>
<p>
   <br />
</p>
<p>&lt;짬뽕&gt;은 러닝타임 내내 독특한 재료 없이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p>
<p>&nbsp;</p>
<p>정통의 힘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8/20260801153533_cyywdgzd.jpg" alt="김수민.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수민]]></dc:creator>
<pubDate>Sat, 01 Aug 2026 15:39:5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9</guid>
<title><![CDATA[[공연] 인간동물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9</link>
<description><![CDATA[지금 세대의 &#039;카릴 처칠&#039;이라는 평가를 받는 스코틀랜드의 희곡 작가 &#039;스테프 스미스&#039;의 화제작 초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3903_ryeaxsen.jpg" alt="포스터_인간동물들.jpg" style="width: 700px; height: 97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지금 세대의 '카릴 처칠'이라는 평가를 받는</b>
</p>
<p style="text-align: center;">
   <b>스코틀랜드의 희곡 작가</b>
</p>
<p style="text-align: center;">
   <b>'스테프 스미스'의 화제작 초연</b>
</p>
<p style="text-align: center;">
   <b><br /></b>
</p>
<p style="text-align: center;">
   <b>"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데는</b>
</p>
<p style="text-align: center;">
   <b>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b>
</p>
<p>&nbsp;</p>
<p>&nbsp;</p>
<p>과밀한 도시에서 자연은 점점 통제 불가능해지고 있다. 쥐들은 벽 틈 사이를 긁어대고, 비둘기들은 질병에 감염되었으며, 여우들은 서서히 거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점점 커지고 있다. 전염되고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막아야 한다. ...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인간의 입장일 뿐, 동물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되돌아오는 건지도 모른다.</p>
<p>&nbsp;</p>
<p>극단 적은 서울문화재단의 창작지원금으로 제작된 [인간동물들](스테프 스미스 작, 마정화 번역, 이곤 연출)을 8월 21일(금)부터 30일(일)까지 여행자극장에서 공연한다. 스코틀랜드의 희곡작가 스테프 스미스(Stef Smith)의 [인간동물들]은 동물들이 범람하게 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드라마이다. 이 작품은 2016년 5월 18일 영국 런던의 로열 코트 극장 제루드 시어터 업스테어스(Royal Court Jerwood Theatre Upstairs)에서 초연되었다. 팬데믹 이전에 이미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일그러진 자연이 인간세계에 어떤 경종을 울리게 되는지 예견한 [인간동물들]은 지금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공연되고 있다.</p>
<p>&nbsp;</p>
<p>전통적으로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희곡이나 연극은 동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즉 인간의 관점에 주목해 왔다. 하지만 작가 스테프 스미스는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차별적 대우, 즉 종차별에 초점을 맞추어 동물들이 단순히 인간의 상징적 대체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과 동물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며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시도한다.</p>
<p>&nbsp;</p>
<p>작품은 대부분 두 인물 간의 대화로 이루어진 짧은 장면들을 통해 전개된다. 스미스는 이러한 파편적인 장면들을 쌓아 올리며, 여우와 쥐, 비둘기 떼로 인해 도로가 폐쇄되고 공원이 불태워지며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진 런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작품의 진정한 관심은 동물들의 범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다.</p>
<p>&nbsp;</p>
<p>격리되어 끝나가는 세상과 아직 오지 않은 세상 사이에 갇힌 다양한 인간군상. 작가는 우리도 결국 멸종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종이며, 세상의 시간은 우리 없이도 흐를 거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의 멸종이 자연의 진행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서늘한 인식 아래 인간들이 어떻게 자연을 망치고 결국 스스로를 멸종시키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끝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바로 그 끝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인간의 힘을 강조한다.</p>
<p>&nbsp;</p>
<p>인간중심적 관점을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블링크(blink)라는, 시적 언어로 이루어진 장면을 극의 중간중간에 삽입했다. 블링크는 익숙한 대화로 이루어진 전통적 장면 사이에 끼어들어 코러스적인 기법과 음악적 효과를 불러오며, 이는 환경 위기가 빚어내는 등장인물의 혼란과 고립, 단절을 반영한다. 감각적 이미지로 가득한 시적 언어 속에 내재한 생생한 이미지는 배우의 언어와 움직임, 사운드와 음악, 조명으로 구현된다. 관객은 단지 작가의 텍스트가 아닌 언어 속의 이미지 감각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영화 [서울의 봄]에서 수경사 야포단장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송영근과 [몰타의 유대인]으로 "202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 수상에 빛나는 곽지숙이 열연한다. 또 국립극단 [태풍]을 비롯 [갈라진 마음들] [붉은 웃음] 등 일인극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윤성원, 국립극단 [태풍]과 [만선]에 출연해 주목받은 성근창이 함께 한다. [몰타의 유대인] [밤의 사막 너머]의 임윤진, [산재일기]와 [하우스 소나타]의 정혜지 등 대학로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들이 호흡을 맞춘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b>시놉시스 -&nbsp;</b>이름 없는 어느 도시.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 함께 살고 있는 연인 제이미와 리사는 동물들 사이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관계와 가치관을 시험받게 된다. 동물들은 이유 없이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집단 폐사하고, 상황은 점점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사회 시스템은 무너져 내리고, 인물들은 전례 없는 재난 앞에서 자신이 믿어온 신념과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p>
<p>&nbsp;</p>
<p><b>작가 스테프 스미스 Stef Smith -&nbsp;</b>지금 세대의 카릴 처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희곡 작가이다. 2012년 [로드킬]로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22년에는 텔레비전 시리즈 [플로트]로 로열 텔레비전 소사이어티 상을 수상함으로써 매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해 그 이야기의 정치성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또한 글쓰기를 "삶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본질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대표작으로는 [제비] [로드킬] [인간동물들] [이너프] [리모트] 등이 있다.
</p>
<p><br /></p>
<p><b>연출 이 곤 (극단 적 상임연출, 경기대학교 연기학과교수) -&nbsp;</b>[내가 살던 그 집엔] [침상 위에서] [스켈레톤 크루] [4분 12초] [햄릿의 비극] [복수자의 비극] [말피] [네더] [벽-이방인 이피게니에] [단편소설집] [벚꽃동산] [해주미용실] [퍼디미어스] [바카이] [마리아와 함께 아아아아아] 외
</p>
<p><br /></p>
<p><b>번역/드라마터그 마정화 (극단 적 대표) -&nbsp;</b>작 [내가 살던 그 집엔] / 번역/드라마터그 [스켈레톤 크루] [4분12초] [햄릿의 비극] [작가] [복수자의 비극] [말피] [X] [네더] [랭귀지 아카이브] [보이 겟츠 걸] [단편소설집] [상처투성이 운동장] [러브] 외
</p>
<p><br /></p>
<p><b>단체소개 극단 적 -&nbsp;</b>2003년 새로운 형식의 공연탐구, 창작극의 개발을 목적으로 창단했다. 달란 토마스의 [밀크우드]를 각색 창단 공연했고, 기리쉬 카나드, 토마스 만, 최창렬 작가의 작품을 무대화했다. 2011년 재결성된 극단 적은 [말피] [복수자의 비극] [햄릿의 비극] [몰타의 유대인] 등 연극사적으로 중요한 르네상스시대 고전작품을 재해석, 현대화하여 무대에 올리면서 동시에[단편소설집] [네더] [4분 12초] [스켈레톤 크루] 등 현재적 이슈를 지닌 동시대 해외 화제작을 꾸준히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p>
<p>&nbsp;</p>
<p>수상</p>
<p>202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 연기상 수상 (곽지숙, 몰타의 유대인)</p>
<p>202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작품상 노미네이트 (몰타의 유대인)</p>
<p>2024년 서울예술상 연극부문 최우수상 및 대상 수상 (몰타의 유대인)</p>
<p>2023년 서울연극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무대미술상, 관객리뷰단상 (4분 12초)</p>
<p>2023년 한국연극지 선정 [올해의 공연 베스트 7] 수상 (4분 12초)</p>
<p>2019년 서울연극제 연기상 수상 (전국향, 단편소설집)</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0:39:3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7</guid>
<title><![CDATA[[Review] 인간 안중근을 기록하는 방식: 자객열전2 - 안응칠 워크숍 [공연/연극]]]></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7</link>
<description><![CDATA[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인간 안응칠을 파헤치는 연극.]]></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94130_fsgqtost.jpg" alt="3472599562227996236.jpg" style="width: 700px; height: 97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연극 &lt;자객열전 2 - 안응칠 워크숍&gt;은 죽음을 앞둔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다룬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나는 지금껏 안중근 의사를 흑백 사진에 담긴 인물로만 기억해 왔다. 약지 끝을 자르고,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독립운동가, 그것이 내가 아는 안중근 의사의 전부였다. 작품은 안중근 의사를 하나의 사건으로만 전달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꼈을 심정을 파헤치며, 인간 안중근을 조명한다.</p>
<p>
   <br />
</p>
<p>이야기는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된다. 감독과 배우, 조연출이 안중근 의사를 다룬 작품을 준비한다는 독특한 설정. <b>연극 배우가,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를 연기한다는 설정이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오는 재미가 쏠쏠하다.</b></p>
<p>
   <br />
</p>
<p>연습실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던 배우. 그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감독을 향해 묻는다.</p>
<p>
   <br />
</p>
<p>
   <i>"정말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까요?"</i>
</p>
<p>
   <i><br /></i>
</p>
<p>
   <i>"정말 그가 이런 심정이었을까요?"</i>
</p>
<p>
   <br />
</p>
<p>배우는 대사를 형식적으로 암기하려 들지 않았고, 캐릭터 그 자체를 이해하고 싶어했다. <b>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현실에 존재했던 역사적 위인이자 독립운동가 배역을 맡는다는 건 다소 어려운 일일 것이다. 위인이 처한 시대상을 꿰고 있어야 하며,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b></p>
<p>
   <br />
</p>
<p>
   <b>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각각이었기에, 안중근 의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할 것인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b>연출이자 작가, 감독과 배우들의 설전이 오가는 걸 보면서, 연극배우들의 실제 리허설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명이 켜지면 역사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간수 치바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시, 조명이 꺼지면 안중근 의사의 생을 연기하는 배우와 무대를 준비하는 연출, 감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b> 메인 플롯과 서브플롯을 오가는 듯한 액자식 구성이, 안중근 의사를 역사적 위인을 넘어 한 개인으로 바라보게 만든다.</b>
</p>
<p>
   <br />
</p>
<p>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안중근 의사의 본명은 '안응칠'이다. 우리가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해 오던 그의 또 다른 이면 '안응칠.' 극은 사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과 동양 평화론, 편지를 쓰는 안응칠의 모습을 비춘다. <b>약지를 자르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운동가의 면모보다, 조국의 자유를 빼앗긴 한 개인의 고뇌를 낱낱이 해부하려는 시도이다.</b></p>
<p>
   <br />
</p>
<p>뤼순 감옥의 일본인 순사 치바는 안중근 의사를 사람으로서 존경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원장도 '동양 평화론을 완성 짓기 위해 사형을 한 달만 늦춰달라'는 안중근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다. 비록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안중근 개인의 혜안과 인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했다.</p>
<p>
   <br />
</p>
<p>인간 안응칠이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특히 아내에게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적는 장면에서 감독과 조연출, 배우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아내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p>
<p>
   <br />
</p>
<p>
   <i>"(...)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때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효도를 다하며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에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i>
</p>
<p>
   <br />
</p>
<p>감독은 이를 두고 아내 입장에서는 가혹한 편지라고 이야기한다. 독립운동하다가 감옥에 간 남편이 사형 선고를 받고, 자식을 홀로 키우게 된 여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앞날이 캄캄하고 참혹했을 수도, 의외로 덤덤했을지도 모른다. 여인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순 없는 판국이라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앞둔 남자가 부인에게 바치는 편지라고 하기엔 다소 차갑게 읽혔을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도, 남겨두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효와 가정의 화목함, 아들의 장래를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p>
<p>
   <br />
</p>
<p>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에, 안중근 역을 맡은 배우가 '나라면 어떤 편지를 남겼을까?' 가정하며, 대사를 뱉는다. 아내를 먼저 두고 가서 미안하다는 배우의 말에는 사랑과 따뜻함, 여린 마음이 묻어나 있다. 그런데, 배우는 편지 말미에 '10번 태어나서 1번은 아내를 위해 죽고 9번은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배우가 안응칠의 삶에 있어서, '동양 평화를 위한 마음'이 가장 중요했으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p>
<p>
   <br />
</p>
<p>안중근 의사의 사형은 예정대로 3월 26일에 집행된다. 그의 죽음에 씁쓸해하는 치바를 뒤로 한 채, 극 속의 극이 끝난다. 연출이자 작가는 인간 안응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이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lt;자객열전 2 - 안응칠 워크숍&gt;의 막이 내려간다.</p>
<p>
   <br />
</p>
<p>사람을 죽였다는 점에서, 그저 '자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안중근. 하지만 그는 동양 평화를 위한 출발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기에, 자신은 자객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를 독립운동가, 위인으로 기록한다. <b>연극의 제목에는 왜 '자객 열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역사적 사건을 단일하게 다루지 않고, 여러 가지 관점이 충돌하며 각양각색의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b></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br />
   </p>
   <p>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그저 현상으로만 기록하지 않고 다양한 이면을 낱낱이 탐구하는 방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한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처한 상황에 감정을 이입해 보고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집필, 연출해 온 작가 '박상현'의 &lt;자객열전 2 - 안응칠 워크숍&gt;은 오는 8월 2일까지, 연우소극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전주현]]></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9:48:1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6</guid>
<title><![CDATA[[Opinion] 그들이 가상 세계를 탈출할 때, 우리는 현실을 탈출한다 - 대탈출 [드라마/예능]]]></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6</link>
<description><![CDATA[이번 휴가엔 타임머신 타고 시간여행 어때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p>
<p><br /></p>
<p>10살의 나는 &lt;런닝맨&gt;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lt;런닝맨&gt;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요일 저녁 6시에 시작해서 1시간 30분가량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나는 런닝맨 레이스의 클라이맥스 직전인 6시 50분까지만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7시 저녁 예배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재방송을 보면 되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도 런닝맨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교회 가는 길에 눈물을 훔치던 기억들이 선명하다.</p>
<p><br /></p>
<p>나의 최애 에피소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다. 바로 초능력자 특집, 환생 특집, 감옥 특집이다. 왜 이 특집들을 다른 회차들보다 좋아했을까? 생각해 보니 세 특집들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에피소드 별로 특정한 '세계관'이 존재하고, 멤버들은 그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는 설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능력자 특집은 그 시절 런닝맨의 단골 소재였던 '이름표 떼기'에 '초능력 컨셉'이 더해진 회차로, 각자만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 서로를 아웃시켜 최후의 생존자의 자리를 쟁취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분신술을 하는 등의 능력이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한 멤버가 결정적인 타이밍에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회차였다. 그렇게 프로그램에 가미되는 다양한 컨셉과 스토리텔링이 비슷한 포맷 속에서도 다음 회차를 기대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였다.</p>
<p><br /></p>
<p>그렇다면 어른이 된 현재의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러한 '스토리텔링'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예능, &lt;대탈출&gt;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제 '본방사수'를 못해도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예능 취향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다.</p>
<p><br /></p>
<p>나는 다른 추리 예능도 좋아한다. 출연진들이 범죄 사건의 용의자들이 되어 각자의 공간을 파헤치며 서사를 파악하고 진범을 찾아내는 &lt;크라임씬&gt;도 좋다. 그리고 여고 안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추리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해결해 나가는 &lt;여고추리반&gt;도 정말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번 글에서는 &lt;대탈출&gt;에 대해 다뤄보겠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center;">이 글은 &lt;대탈출&gt;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p>
<p>&nbsp;</p>
<p>&nbsp;</p>
<p>대탈출이 다른 추리 예능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매 회차마다 달라지는 대규모 탈출 환경과 그곳에 얽힌 서사이다. 이때 각 회차에서 나오는 스토리들은 별개가 아니라, 다음 회차와 시즌이 거듭될수록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서로 연결되며 새 에피소드의 시작점 혹은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p>
<p>대탈출의 세계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바로 좀비, 악령, 타임머신이다. 그중에서도 타임머신은 가장 최근에 공개된 시즌인 &lt;대탈출 : 더 스토리&gt;까지도 이어지는 유일한 세계관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타임머신 세계관</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ivdfhrLgccM?si=SXDuiDsIp8HDaqGP"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br /></p>
<p>&nbsp;</p>
<p>&nbsp;</p>
<p>이 세계관의 첫 에피소드인 "타임머신 연구실"에서는 멤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그것의 개발자인 김태임 박사의 연구실을 다양한 시간대로 방문하면서, 타임머신을 탐내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박사를 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회차의 세트 연출은 다른 예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밀한 디테일을 자랑하는데, 같은 장소를 시간대별로 다르게 세팅해서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멤버들이 과거 시점에 연구소에 몰래 숨겨둔 단서가 미래에도 똑같이 남아있는 등, 갑작스러운 변수까지 즉각적이고 치밀하게 하나의 세계관으로 구현해 낸다. 또한 후반부에 멤버들이 자신들과 다른 시간대에 있는 김태임 박사와 소통하기 위해 택하는 창의적인 방법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p>
<p><br /></p>
<p>이후 멤버들은 타임머신을 통해 더욱 다양한 시대와 장소로 여행하게 된다. 특히 &lt;대탈출 : 더 스토리&gt;에서는 타임머신이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며, 여러 개로 쪼개져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로 흩어진 '금척'을 찾아 하나로 완성해야 한다는 메인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5358_kalrnkmv.png" alt="김태임박사.png" style="width: 700px; height: 391px;" /></p>
<p>&nbsp;</p>
<p>&nbsp;</p>
<p>이 프로그램이 특히 재미있는 이유는 NPC를 센스 있게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태임 박사는 "타임머신 연구소" 외에도 타임머신 세계관과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에서 재등장하고, 다시 한번 멤버들이 구해야 할 존재가 된다. 이때 다양한 시대에서 멤버들과 만나기 때문에 에피소드별로 다른 나이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조력자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빌런들과 대립하고 그들로 인해 야기된 위험을 되돌려 놓는 '선한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하며 세계관의 완성도를 높인다.</p>
<p>&nbsp;</p>
<p>대탈출의 탈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는 '머리를 쓰느냐'와 '몸을 쓰느냐'의 차이다. 즉 열쇠나 비밀번호를 찾아 다음 스테이지로 향하는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 있고, 플레이어로서 스토리에 직접 관여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다. 전자를 더 재밌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역시 후자에 더 끌린다. 대본도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온몸으로 맞닥뜨린 낯선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고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멤버들의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이 특히나 강했던 레전드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보겠다.</p>
<p>&nbs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태양여고 (시즌 1 11-12회)</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OIEbVpPFzRA?si=De4NIQwlsTOn6jz2"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안대를 풀었더니 멤버들이 도착해 있는 곳은 한 여자고등학교였다. 다짜고짜 수행평가를 풀던 중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보내는 쪽지를 전달하며 두 학생이 실종된 친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p>
<p><br /></p>
<p>이후 그들의 아지트를 찾은 멤버들은 학교 선생님들이 사실 사이비 종교의 제사장과 사제들이고, 학생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아까 쪽지를 주고받던 학생들마저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 그래서 멤버들은 사제들로 잠입해 제사 의식을 중단할 작전을 세운다.</p>
<p><br /></p>
<p>사제로 변장하기 위해 다른 신도들에게 들킬 뻔한 위험이 여러 번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 순간들이 시청자들에게 가장 큰 쫄깃함과 짜릿함을 선사한다. 결국 멤버들은 제사 진행을 방해하고 성수에 몰래 수면제를 타 제사장과 사제들을 잠재워 학생들을 구출한다. 이때 그들의 영리한 전략과 협동이 매우 인상적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희망연구소 (시즌 2 7-8회)</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YMPtWzUOVGI?si=QpifD_NlknuONfIF"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br /></p>
<p>&nbsp;</p>
<p>&nbsp;</p>
<p>대탈출 좀비 세계관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폐쇄 군사시설에 세워진 좀비 바이러스 임시 연구소를 배경으로 한다. 멤버들의 최종 미션은 연구소 어딘가에 있는 좀비 바이러스 면역자 '희망이'를 찾아 좀비들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는 것이다.</p>
<p><br /></p>
<p>그래서 그들은 3팀으로 나뉘는데, 통제실 팀이 불꽃을 터뜨려 소리로 좀비들을 유인하면 '희망이 찾기 팀'과 '열쇠 팀'은 안전한 동선을 확보해 미션을 수행한다. 그러나 작전 중 결국 멤버 중 한 명이 좀비들에게 잡히게 되고, 다 같이 탈출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이 장면은 프로그램의 극한의 리얼함을 보여주며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뽑힌다.</p>
<p><br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span style="font-size: 18px;"><b>빵공장 (시즌 3 9-10회)</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myGdeiLgYVU?si=2Q56ztX_YF8WiYdv"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p>
<p>&nbsp;</p>
<p>&nbsp;</p>
<p>배경은 빵 속에 생화학무기를 넣어 빼돌리고, 불법 카지노에서 판을 조작해 사람들을 빚지게 해서 노동자로 부리는 공장. 생화학무기 유출을 막기 위해 비밀 보안 단체 'SSA'는 요원 두 명을 투입했으나, 모두 위기에 빠진 상황이다. 멤버들은 요원 중 한 명을 만나 노동자 숙소에 숨겨진 서류 가방을 열고, SSA의 작전을 직접 수행하게 된다. 그 작전은 바로 CCTV룸을 장악해 게임 승률을 조작하고 비밀 게임장의 카드 게임에서 우승하는 것. 그리고 VIP 대기실에 입성해 그곳과 연결되는 서버실을 해킹하고 유출된 모든 정보를 되찾는 것이다.</p>
<p><br /></p>
<p>이를 위해 멤버들은 수면제로 조직원들을 재우고, CCTV룸에 진입해 카드 게임 현장을 살펴보며 조작 패턴을 파악한다. 그리고 카드 게임에 투입된 나머지 멤버들에게 지령을 내려 게임을 승리로 이끈다. 시청자들은 두 공간에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게임과 그 속의 똑똑한 팀워크를 관전하며 멤버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nbsp;</p>
<p>누구나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일상을 탈출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평소 같은 공간들을 오가고, 항상 열고 닫는 문의 비밀번호야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p>
<p><br /></p>
<p>그래서 나는 대탈출 멤버들이 가상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문제를 풀고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대리 만족을 느낀다. 나 또한 멤버들과 또 다른 세계를 모험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은 비단 멤버들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가상 세계를 탈출할 때, 우리들은 현실을 탈출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90843_ecxywecz.jpg" alt="컬처리스트 명함 임솔지.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임솔지]]></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9:03:0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5</guid>
<title><![CDATA[[Opinion] 사라진 공동체와 시대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 - 뮤지컬 &#039;빌리 엘리어트&#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5</link>
<description><![CDATA[뮤지컬  속 애도, 계급/젠더, 가르침/배움, 미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0229_zgnnsmst.jpg" alt="20260502015557_pmpzehle.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4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2026년 4월 12일부터 7월 26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gt; 라이선스 4연이 공연되었다. 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는 1980년대 대처 정부의 탄광 민영화 정책으로 인해 파업에 돌입한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를 통해 꿈을 찾아가는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2000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200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되었다. 원작 영화의 감독이었던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와 각본가 리 홀(Lee
Hall)이 연출가와 대본으로 참여했으며, 엘튼 존(Elton
John)이 음악을 맡아 창작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 10개 부문을 휩쓸었고, 웨스트엔드 올리비에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는 신시 컴퍼니에 의해
수입되어 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는 2010년 아시아 최초로 라이선스 초연을 올렸고, 2017년 재연과 2021년 3연을 거쳐 이번에 4번째
시즌을 맞이한다. 빌리 역을 맡은 (아역) 배우는 ‘빌리 스쿨’을
통해 발레, 탭댄스, 아크로바틱, 연기 등 장기간 훈련을 받고 공연에 서며, 작품 속 춤과 노래, 서사는 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를 이끌어 가는 핵심 축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애도</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0240_yseiwyyt.jpg" alt="20250514135827_tzgkmrkr.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의 시작은 스몰 보이(Small Boy) 역할을 맡은 어린 소년의 등장과 함께 무대 위 스크린에 전후 영국 탄광 산업의 국유화부터
대처 정부의 국영 탄광 폐쇄 정책까지 거대한 역사가 흐르는 장면이다. 이어 무대 공간은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영국 북부 탄광촌 더럼 마을로 전환되며 파업의 시작을 알리는 와중, 이 작품의 주인공 빌리와 파업을
알리는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파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아버지 재키는 빌리에게 복싱을 가르치기 위해
50펜스의 수업료를 주고, 복싱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빌리는 이를 복싱 수업이 아니라 같은 마을 센터에서 하는 발레 수업 수강에 사용한다. 발레에 흥미를
느낀 빌리는 가족들의 반대와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지만, 발레에 깊이 빠져들며 발레를
하겠다는 꿈을 품게 된다. 빌리의 춤에 대한 열정은 주변을 감화시키고,
아버지는 빌리의 꿈을 지지하게 되며 빌리의 오디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파업 중 홀로 직장에 복귀한다. 발레에 대한 꿈을 가진 빌리를 향해 마을 사람들이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돈을 모아주며, 빌리는 왕립 발레 학교 오디션에 합격하여 홀로 마을을 떠나게 된다. &lt;빌리
엘리어트&gt;는 발레를 진로로 선택하기에는 경제적 문제가 발목을 잡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점, 아버지의 반대와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편견을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하는 뛰어난 개인의 이야기(영웅 혹은 위인 서사)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으며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역사적 상황이 담긴 텍스트로 확장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의 시작은 파업의 시작이며, 끝은 로열 발레 스쿨(왕립 발레 학교)에 합격해 런던으로 향하며 마을을 떠나는 빌리와 파업이 끝나고 다시 탄광으로 복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당시 영국 보수당의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실업률과 물가가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공공 복지를 줄이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고, 국유화된 탄광 산업이 비효율적이라는 계산 하에 일부 탄광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반대하는 노조를 강경
진압하고 일자리를 감축하는 등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오며 탄광 민영화라는 대처의 정책이 표상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레짐)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던 시점에서, &lt;빌리 엘리어트&gt;는 한 시대와 공동체의 끝을 다루는 역사적
표상이다. 탄광(촌)의
몰락이라는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함의하는 것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알리는 역사적 분기점이자, 전투적 노동 운동에 투신해 경찰들과 무력 투쟁을 벌이기도 했던 빌리의 형 토니가 주로 입고 있는 ‘체 게바라 티셔츠’가 함의하는 것처럼 대안적 세계를 꿈꾸었던 투쟁(혁명)의 종말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기에
빌리의 로열 발레 학교 합격 편지를 통해 모든 가족이 기뻐하는 와중 토니와 재키에게 들려오는 파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은 단순한 극적 우연이
아니라 기묘하게 인과적인 장면이다. 빌리라는 소년의 비상은 결국 탄광 공동체의 희생을 조건 혹은 담보로
가능했고, 그렇기 때문에 파업에 실패하고 다시 어두운 탄광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노동자들의 뒷모습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런던으로 떠나는 빌리의 움직임이 겹쳐지는 엔딩은 이러한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극의
핵심을 관통하는 ‘킬링 넘버’는 미세스 윌킨슨의 지도에 맞추어
발레걸들이 동작을 익히고 대열을 맞추는 일상의 공간 위로 탄광 노동자들과 경찰들의 격렬한 대립이 교차하는 'Solidarity'로서,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몇 달 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표현하는 독특한 연출은 원작 영화의 장면을 무대의
문법에 맞게 변화시키며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넘버의 이름인 ‘Solidarity’(한국어
가사의 경우 ‘모두 다 같이’)는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단단함(고체성)'과 '연대’라는 뜻을 가지며, ‘연대’의 힘과 위력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공동체(성)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이 작품 내에서 산재되어 나타난다. 파업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위치해 있지만 빌리의 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이에 ‘배신자’로 취급받는 탄광에 복귀한 이들 역시 동참하는 장면, 오디션 현장의
심사위원들이 재키에게 파업의 성공을 비는 대사처럼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와 예술가 간의 사회적 연대 등 빌리가 자신을 꿈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개인들이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지속해서 환기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동시에 이는 시대적 변화의 전조에 대한 일종의 ‘징후’로서
‘연대’의 (불)가능성 또한 암시하는데, 고체(성)의 이미지는 곧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에 반하는 흐름 모두) 초기 근대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는 계급(노동자와 경찰)과 젠더(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완고한 경계들이 대면의 과정을 거치며 섞이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모두의 몸이 규율에 의해 배치/배열되지만 두 공간의 병치로 인해 엉키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안전모와
경찰의 모자가 발레걸즈의 움직임으로 인해 서로 교체된다는 점이다. 단단하게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근대적
규범과 질서는 이러한 대면적인 ‘마주침’ 속에서 점차 용해되고
희석되며, 이는 발레를 배우며 미숙했던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빌리의 성장 과정과 병치된다. 하지만 이러한 혼종성을 통한 ‘섞임’은 동시에 '운동' 자체의
동력 또한 침식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액체성’을 근대 초기와는 구분되는 후기 근대의 성격으로 규정하며 논했던 양면성처럼, 이는
과거의 결집과 집단적 의식화를 통해 작동했던 전통적인 좌파의 투쟁 방식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후기
근대로의 이동'을 함축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이미 지나간 시대와 사라진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향수를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좌파 멜랑콜리’로 명명된 정동 구조에 대한 논의와 맞닿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이미
상실된 대상을 보내주지 못하는 애도의 실패로 인한 멜랑콜리(우울증)는
대상과 내면적으로 합치된 병리적 상태를 의미하며, 이를 정치적인 의미로 확장한 것은 혁명의 가능성이나
사회적 이상이 상실된 후 변혁적 힘에 대한 냉소 혹은 무력감 같은 정동으로 나타나는 좌파 멜랑콜리(Left-Wing
Melancholy)라는 개념이다. 20세기 학자 발터 벤야민에 의해 비판적으로 다루어진
이 개념은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겪으며 다양한 논의를
촉발했고, ‘좌파 멜랑콜리’가 함의하는 다양한 병리적 정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전유하거나 새롭게 독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를
염두에 두고 &lt;빌리 엘리어트&gt;를 본다면, 서사의 전반을 지배하는 상실과 죽음의 코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된 주제인 한 시대와 공동체, 변혁의 상상력의 종말을 비롯해,
이미 죽었지만 빌리에게 남긴 편지 속에서 환영으로 나타나는 ‘데드 맘(dead mom)’이라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또 다른 요소다. 빌리는
자신이 발레하는 것에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응수하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마을 센터에서 빌리의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가 좋아했던 음악인 ‘Deep into the ground’를 부르기도 한다. 죽음과 상실의
분위기가 빌리의 가정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치매에 걸린 빌리의 할머니는 빌리의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망각하고 빌리에게 그들이 어디 갔냐고 물으며 상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상실이
인지되지 않기에 애도가 불가능한 할머니가 이미 죽은 할아버지를 회고하며 부르는 ‘Grandma’s Song’은
빌리에게 춤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lt;빌리 엘리어트&gt;에서 나타나는 시대의 재현은 소비 자본주의
내에서 단순히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상품으로 전락하거나 섣부른 ‘종언’이 선언됨으로써 지금까지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과거’의 가치, 즉 공동체와 시대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으로서의 ‘멜랑콜리’의 정동 구조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지나간 것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동시에, ‘애도’가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경계
긋기로만 남지 않고 그 정신을 연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후속 작업이 동반되어야 하는가? 빌리가
떠나기 전 죽은 엄마와 마이클, 그리고 더럼에게 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는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고향
공동체와 그 시대를 애도하는 것이다. 시대가 끝났다는 감각 속에서 희생과 실패의 기록에 다시금 접속하면서, 이러한 ‘우울’의 정동은
어떻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파업이 끝난 뒤 모든 사람이 무용수가 될 수 없다는
토니의 씁쓸한 말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 대안적인 가능성을 예술이라는 미학의 영역에서 온전히 찾을 수
있을까? ‘연대’의 동력이 과거와 같지 않은 상황에서의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같은 시대를 다루며 탄광 노동자의 투쟁과 성소수자 민권 운동의 연결을 다룬 영화 &lt;런던 프라이드&gt; 같은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재현되는 ‘예술’을 낭만화하지 않고, 과거에 대한 피상적 향수를 넘어 이를 어떻게
창조적인 동력으로 쓸 수 있을까? 미학과 정치는 어느 지점에서 접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코드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답해져야 할 질문이 무수히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계급과 젠더라는 이중구조</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0256_uqlpewrt.jpg" alt="20250514135927_yqqrvmmn.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lt;빌리 엘리어트&gt;의 핵심적인 소재인 ‘발레’는
젠더화되고 동시에 계급화된 예술이다. 이 작품 내부에서 계급과 젠더 간 경계와 분할의 대표적인 요소는
‘복싱’과 ‘발레’의 차이로서, 생존과 투쟁, 그리고
강하고 거친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한 노동계급 남성성을 상징하는 ‘복싱’과
상류층의 교양이자 우아한 신체적 정제성을 요구하는 ‘발레’는
대립적으로 재현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장(field) 내부에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체화되어 신체적 습속, 취향, 행동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아비투스(Habitus)’라 칭했다. 자신의 사회자본과 경제자본에 의해 영향을 받은 ‘취향’에 대한 부르디외의 논의는 20세기 프랑스 사회에 대한 경험 연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맥락과 완벽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유럽 사회를 기준으로 상당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lt;빌리
엘리어트&gt;에서 빌리가 처한 환경은 이러한 구조가 계급과 젠더의 분할을 통해 어떻게 신체를 규정하는지, 그리고 빌리가 이러한 이중구조를 초월하려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발레라는
장(field) 내부에서 계급적 타자인 빌리는 발레에 점차 빠져들면서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
노동 계급 출신 소년이 발레를 한다는 것의 여러 장벽을 인지하기 시작한 빌리에게 다가온 것은 그의 친구 마이클이다. 게이라고 직접적으로 명시되는 마이클은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남성성/여성성에
‘균열’을 내는 존재로서,
빌리가 발레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나의 옷을
입고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이클은 빌리에게 ‘개성’과
‘자유’의 감각을 알려주며(‘expressing
yourself’), 마이클의 ‘퀴어한’ 성향을
눈치챈 빌리는 클래식 튀튀를 주는 등 그를 존중하며 우정을 나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 역시 빌리가
마이클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으로, 원작 영화에서는 성장한 뒤 드랙퀸이 된 마이클의 모습이 등장하며
빌리의 형과 아버지가 마이클을 알아보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에서
빌리의 아버지 재키는 노동계급 남성성 특유의 자부심이 강하고 가부장적으로 아들 빌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묘사되지만, 그는 빌리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자존심’을 내려놓게 된다. 첫 번째 오디션 기회를 날려버린 뒤 빌리의 재능을
발견한 재키는 뒤늦게 윌킨슨 선생님을 찾아 도움을 청하고, 윌킨슨은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는 재키에게 조언을 건넨다. 오디션 비용을 위해 파업을 포기한 재키의 도움 속에서
빌리가 런던 왕립 발레 학교 오디션에 가서 겪는 일들은 오디션에 응시한 다른 전공생들과는 차별화되는 계급적 배경으로 인한 충돌과 긴장의 연속이다.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며 공손해진 재키와 달리 빌리는 예민해진 상태에서 이번에 떨어져도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나이브’한 위로를 던지는 중산층 출신 남자 아이(‘톨 보이’ 역 아역이 담당)에게
‘주먹을 날리고’,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인해 주의를 받기도
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
아이들의 오디션을 위해 따라온 중산층 출신 어머니들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존재하던 재키는 담배를 피우던 토트넘 출신 발레리노를 본다. 프로 발레리노로 자랐음에도 여전히 거친 말투를 구사하는 그는 재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말을 건네고, (탄광 마을 더럼처럼 주로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토트넘에서 자란) 그가
빌리와 유사한 성장 배경에서 자랐음이 암시된다. 일종의 ‘선례’로서 발레의 계급적 장벽을 극복한 이가 있다는 점, 그리고 단순히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자 자신의 삶의 한 요소였던 계급적 유산을 잃고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유지한 채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계급을
횡단함에 있어서 수반되는 혼종적인 면모를 함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작
영화는 어른이 된 빌리가 <a href="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6244" target="_blank">매튜 본(Matthew Bourne) 안무의 &lt;백조의 호수&gt;</a>에서 강인한 이미지의 남성 백조를 맡아 공연을 시작하며 도약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버전과 달리 남성 무용수에게 ‘백조’(그리고 ’낯선 남자’)를
맡기고 백조를 일종의 ‘군집’으로 묘사하며 재해석을 시도한
작품이다. 당시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안무감독을 역임한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매튜 본이 재해석한 &lt;백조의 호수&gt; 안무를 ‘발레가
아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클래식함을 중시하는 일부 발레계 인사 사이에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매튜 본은 기존의 발레사에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코드를 해체함으로써 &lt;백조의
호수&gt;라는 대표적인 클래식 레퍼토리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의 장을 열며 현대 발레의 흐름에 한 획을
남겼다. 이때, 매튜 본이 재해석한 남성 백조의 위협적이고
강한 이미지는 노동자 계급 출신인 빌리에게 체화된 ‘노동계급 남성성’,
즉 거친 몸짓과 태도, 투박함, 강인함과 호응하는
속성이다. 귀족과 왕실의 문화에서 기인한 초기 발레의 역사와 중산층 이상이 주로 택할 수 있는 장르였던
발레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술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질적인 것’의 유입임을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이 작품은 (영국 내) 퀴어 민권 정치를 향한 연대감, 혹은 초기 고전 발레사(史) 내부에서
‘퀴어한 것’을 발굴하려는 시도와 친연성이 있다.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lt;백조의 호수&gt;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중반에 언급되는 러시아 출신
무용수이자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 그리고 누나의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는
빌리의 친구 마이클로 이어지는 흐름과 그들의 게이 정체성이다. (원작 영화를 포함한다면, 매튜 본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보편화된 안무인 프티파와 이바노프 버전을 기반으로 수많은 재안무와 재해석의 역사를 이어 온 발레 &lt;백조의
호수&gt;라는 작품은 클래식 발레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서,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의 예술 세계에서 그의 소수자성이 차지하는 역할은 음악사적 맥락에서 분석 대상이 되어 왔다. 또한
윌킨슨의 호명, 경찰의 웃음, 그리고 빌리와 아버지의 대화
등 이 작품에서 누레예프는 ‘무용수’로서 언급되지만, &lt;백조의 호수&gt;와 ‘안무가’ 누레예프 간의 관계는 더욱 흥미롭다. 현재 파리 오페라 발레단(POB)이 채택하고 있는 누레예프 안무의 &lt;백조의 호수&gt;는 서사의 흐름과 안무 구성의 차원에서 주로 클래식한 버전을 따르지만, 러시아에서
주로 공연되는 버전과 달리 ‘광대’ 역할이 부재하고 미성숙한
왕자의 내면을 전면에 부각함으로써 그 이후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매튜 본의 안무처럼) &lt;백조의 호수&gt;에 대한 퀴어한 독해(queer reading)를 수행한 다양한 현대 발레 작품들이 나오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는 탄광 산업의 흥망성쇠라는 배경을 통한
영국의 역사와 발레사 내부에서 소수자의 (숨겨진) 역사가
내재되어 있는 텍스트다. 그렇다면 뮤지컬의 막이 내린 뒤 더럼에 남은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빌리가 마을을 떠나고 그곳에 홀로 남은 게이 소년 마이클은 어떻게 살았을까?
민영화된 산업으로 인한 실업을 공공 부조 없이 개인이 온전히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 사실상 예정된 상황에서 탄광에 복귀한 노동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감당해야 했을까? ‘미래가 없는’ 고향을
떠나는 빌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단절하게 될까? 원작 영화를 참고한다면,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런던으로 떠나는 빌리가 더럼 마을에
‘두고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빌리에게 체화된 다양한 역사의 유산 속에서 빌리가 날아오를 수 있었다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b><span style="font-size: 18px;">가르침과 배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0305_hpiegxwe.jpg" alt="20260502015733_ktvoxgvd.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는 ‘춤’이라는 주제를 활용해 가르침과 배움의 복잡하고 상호적인 과정이 나타나는 작품으로서,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쳐 준 ‘미세스 윌킨슨’과 그를 통해 춤을 배우고 성장하는 빌리의 모습은 스승과 제자라는 (인격적) 관계와 그 사이의 역동적 과정을 상기시킨다. 빌리와 윌킨슨의 교류는
‘춤’이라는 조건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며, 이 텍스트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자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춤’에 대한 본질을 잘 보여주는
넘버는 윌킨슨과 빌리,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 브레이스 웨이트가 구성하는 ‘Born to boogie’다. 외부적인 힘(규율)을 자신의 신체에 체화시키고 내 몸을 통제하는 '테크닉'적인 측면, 그리고
본능, 감정, 무의식의 에너지를 자신의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
외재화하는 창조적인 능력을 동시에 함양해야 ‘춤’은 완전해질
수 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자가
감각을 스스로 통제하는 이성의 측면이라면 후자는 본능과 창조의 에너지로서, 춤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면서도 동시에 파괴하고 폭발하게 만드는 변이의 영역이다. 파업 투쟁 당시 토니가 다치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윌킨슨과 함께 몰래 가려던 로열 발레 스쿨의 오디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빌리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인 ‘Angry dance’에서는 후자, 즉
춤의 본능적이고 창조적이면서도 스스로의 자아를 파괴함으로써 발전하는 특성이 분노한 빌리의 춤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이는 런던에서의 오디션에서 빌리를 향한 마지막 질문, 즉 춤을 출 때 어떤 감정이냐고 묻는 심사위원에게
‘감전’이라는 단어를 활용해 답하고 언어 대신 춤(몸짓)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빌리의 말과 연속된다(‘electricity’). 빌리가 이야기하는 나(자아)를 잃어버리는 ‘매몰’의
감각은 역설적으로 자기충족적이고 일체가 되는 감각과 연속되고, 이는 자신의 이성에 의해 예술적 감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염/오염되듯 발레라는 새로운 세계가 몸으로 침투(침입)함으로써 가능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빌리가
춤을 출 때 느끼는 감정을 전기가 흐르는 감각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오염, 침입, 침투, 전염, 그리고 고통의 모티프는 (춤과 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더욱 극화되어
표현되긴 하지만) ‘배움’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속성이기도
하다. 배움은 단순히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파괴함으로써 다른 세계와 맞닿고 이를 통해 나의 세계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훈련을 통해 이러한 인지적 과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빌리가 윌킨슨의 발레 수업 속에서 얻은 것은 춤을 출 때의 열정적인 감각에 대한 인지와 이를
창조적인 힘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딸 데비와
불륜으로 해고당한 알코올중독자 남편을 두고 발레 수업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암시되는 윌킨슨은 첫 등장부터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빌리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그를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스승이다. 런던에 가야 하는
빌리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윌킨슨은 크게 기뻐하거나 놀라는 모습 없이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시니컬한 모습으로 자신이 가르쳐준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며, 런던의 발레 학교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첨언과 함께. 윌킨슨의 이러한 태도는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작별이 예정된 제자가 떠날
수 있도록 벅찬 감정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겸손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윌킨슨의 대사를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성이라는 틀을 통해서 본다면, 배움과 앎의 과정이 기존의 지식 체계를
부정하면서 갱신된다는 것, 그렇기에 스승인 자신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윌킨슨의 이러한 교육 태도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 간 위계를 기반으로 한 지식의 주입이 아닌
배우는 이의 의지를 일깨움으로써 해방적 주체로 기르는 것을 강조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생각나게
한다. 윌킨슨이 떠나는 빌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행운을
빈다’는 대사는 뛰어난 제자에 대한 애착과 스승의 자질에 대한 그의 태도를 함축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size: 18px;"><b>미래</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0316_qrceibtz.jpg" alt="20260502021020_teodokkd.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48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뮤지컬 &lt;빌리 엘리어트&gt;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중 공연예술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극대화된 ‘드림 발레(Dream Ballet)’ 장면은 2막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가족에게 발레를 한다는 것을
들킨 1막의 마지막 장면 이후, 시간이 흐르고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된 상황에서 빌리는 모두가 떠나고 남은 빈 마을 센터에서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면서 ‘성인 빌리’와 함께 춤을 춘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발레 &lt;백조의 호수&gt;에서 성에서 빠져나온 왕자 지그프리트가 향하는
호숫가 장면과 마지막 결말이 합친 음악을 사용하는 드림발레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환상이자 ‘그림자’다. 어른이 된 빌리의 환상은 현재 빌리를 지탱하고, 마치 클래식 발레에서 발레리노가 발레리나를 ‘리프트’하듯 빌리가 하늘에 닿도록 들어 올리고, 최종적으로 빌리를 날아오를
수 있게 한다. ‘꿈’을 꾸는 현재의 빌리와 윌킨슨에게 배웠던
것처럼 의자를 돌리면서 균형을 잡고 등장하는 미래의 빌리는 서로를 지탱하고 의존하는 역-관계이면서, ‘현실’와 ‘환상’을 구별할 수 없는 공간적 만남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드림 발레’ 장면의 마지막이 인상적인 이유는 연출상 아버지 재키가 빌리와 대각선에 서 있는 그림자이자 환영인 성인 빌리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는 점이다. 재키는 빌리의 춤 실력, 열정, 재능을 통해 미래의 빌리의 모습이자 환상이면서 희망을 본다. 그
이후 빌리가 발레를 하는 것을 반대하던 재키는 윌킨슨에게 찾아가서 발레 오디션에 대한 정보를 묻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파업 대열에서 이탈하여 탄광에 다시 나가기를 선택한다.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미래에
대한 환상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며 현재의 시간에 개입한다. 프로 발레리노가 된 빌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원작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빌리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탄광에 복귀하는 노동자들을 뒤로
하고 죽은 엄마(‘데드 맘’)의 환영에 작별을 고한 뒤 마이클을
남겨 두고 떠나는 빌리의 미래로 막을 내린다. 다만 ‘드림
발레’ 장면에서 꿈이자 환상으로서 등장하는 ‘성인 빌리’의 존재가 마치 예언적 실체로서 빌리의 미래를 증명하며, 이때 현재와
미래의 공존은 비동시적인 것을 병치하는 무대 연출의 특수한 문법을 반영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보았던 회차는 &lt;빌리 엘리어트&gt; 초연에서 ‘빌리’ 역으로
참여했던 ‘1대 빌리’ 출신이자, 올해 유니버설발레단(UBC)에서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임선우 발레리노가
‘성인 빌리’를 맡았다. 임선우
발레리노가 맡은 ‘성인 빌리’의 특징은 자신의 과거이기도
했던 빌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준다는 점이다. 어린 빌리와 교감하며 환상의 ‘비현실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구현된,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것 같은 웃음을 짓는 성인 빌리의 모습을 통해서 앞으로의 어린 빌리가 살아갈 삶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첫 넘버인 ‘The stars look
down’에서 빌리가 부르는 가사처럼, 어둠을 지나 날아오를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
</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80213_awdplsms.jpg" alt="이다연 (1).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다연]]></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8:03:2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4</guid>
<title><![CDATA[[Opinion] 우연히 발견한 유아 도서로부터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4</link>
<description><![CDATA[우연히 발견한 그림책 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justify;">어떠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시간이 지나고 ‘과거’가 되어서야 알 수 있다. 현재와 미래의 본인은 가늠할 수 있을 뿐 체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현 사회에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조가 있다. 그것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유·아동 시기에는 학교나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사촌의 책을 물려받아서 동화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나 안데르센의 작품과 같이 매우 유명한 경우라면 그것을 접할 확률은 더욱 높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lt;인어공주&gt;를 좋아한 기억이 있다. 그 이유까지 상세히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lt;인어공주&gt;가 담고 있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소재가 굉장히 낭만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워 가며 어른이 된 지금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세상이 어떤지 체감하며 나름의 신념이 생긴 지금에서는 인어공주의 선택을 마냥 낭만적이라고 감동할 수 없다. 희생을 논리적으로 짚어 보게 되고 그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 따져 보게 된다. 타산적인 태도를 쉽게 버릴 수 없다. 순수했을 시절의 생각을 온전히 되풀이할 수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성인이 된 후에 &lt;인어공주&gt;를 처음 읽게 된다면 어떨까?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랑과 희생이 부재한 감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희생적인 사랑에 대해 곱씹으며 그 순수한 감정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린 시절 그 연령대에 맞는 도서를 읽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릴 때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감하지만, &lt;인어공주&gt;를 크고 나서 읽어도 괜찮은 것처럼 ‘때가 늦은 경험’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 요즘, 다시금 동화를 읽고 싶었고 그러다 우연히 어느 그림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시립 도서관에서는 아동도 아닌 유아 도서로 분류해 놓은 책이었다. 권정민 작가의 &lt;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gt;, 이걸 읽은 유아들의 생각, 혹은 다른 성인들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내용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0606_tsuydzcs.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권정민 작가의 &lt;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gt;는 사계절출판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협업으로 출간하는 논픽션 그림책 시리즈인 ‘민주인권그림책’ 중 하나다. 이는 차별과 불평등, 이주노동, 성역할, 폭력의 감수성 등 민주주의와 인권의 의미를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일상 속에서 공감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책에 담아냈다고 한다. 책에서 측정의 주인공은 ‘고양이’다. 기초, 심화, 종합 단계에 맞춰 측정을 수행하는 삶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생물학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기초 측정이 진행된다. 마치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받던 신체검사처럼 키와 몸무게, 허리둘레를 잰다. 하지만 코의 길이와 너비로 성격 유형, 어쩌면 운명까지도 구분하고, 꼬리 길이로 균형 감각과 의사소통 능력을 측정한다. 어떤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조사해 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피도 뽑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언뜻 보기엔 간단한 신체검사처럼 보이는 과정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었다. 코의 크기나 모양으로 성격, 운명을 구분 지을 수 없고, 어떤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아는 것을 ‘쓸모’라고 칭할 수 없다. ‘나’는 ‘나’일 뿐인데 남에 의해 성격이 재단되고 조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기초 측정의 마지막은 ‘색깔’이었다. 고양이의 털 색깔, 인간으로 따진다면 피부색에 해당하는 요소에 대해서 ‘앞으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다. 사람을 피부색으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현 사회의 양상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소 불편함을 느낀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심화 측정 단계에서는 체력, 순발력, 지구력 등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능력을 측정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오래달리기, 윗몸일으키기로 지구력이나 근력, 체력을 측정했던 때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정해진 시간 안에 정답을 고르는 능력을 측정합니다. 이 능력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죠.”</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과열된 입시 경쟁, 행복은 성적순이 된 세상이 떠오른다. 같은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녹슨 사다리를 오르고, 누군가는 다른 이를 밟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부터 오를 필요도 없이 높은 곳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익빈 부익부, 부의 양극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측정에 능숙해진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측정하기에 이른다. 종합 측정 단계다. 근무 시간, 식사 시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흘린 땀의 양, 품위 유지 비용, 타인의 관심 등을 측정한다. 이 밖에도 자리에 누워 여러 요소를 측정하면서 잠 못 드는 시간을 가늠한다. 종합 측정의 마지막은 ‘자신에 대한 만족도 측정’이 장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흔히 ‘갓생’이라 칭하며 시간을 쪼개어 부지런히 사는 삶을 동경한다. 그것은 강박과 부담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미 형성된 기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SNS에 담아내는 것은 기록과 공유보다는 과시에 가까워졌고, 타인과의 비교에 깊이 고민하게 되는 밤이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잠 못 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질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가는 현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난히 불편했던 측정들을 되돌아보면 지금껏 살아오는 과정에서 압박이나 결핍이 존재했거나 원치 않은 감정을 느꼈던 부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측정한 수치보다는 성취감이나 기쁨 등 뒤따라오는 감정이 중요했고, 사회가 원하는 속도에 맞추기보다는 제 속도를 찾아 지키는 것을 원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장을 넘길수록 마냥 귀엽게만 보이던 여러 고양이에 점차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고 그들의 표정에 따라 점점 미소를 지워가게 된다. 지나친 측정은 때로는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던 말처럼 그것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다. 삶은 유한하나 본인의 것이기에 타인과 비교하거나 빠른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의 차별, 불평등의 문제를 이 얇은 그림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유아 도서로 분류되어 있지만, 어쩌면 성인들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되찾는 것은 어떨까?</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서현]]></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7:54:3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2</guid>
<title><![CDATA[[Opinion] 여름을 닮은 앨범, LOVE AND FALL [음악]]]></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2</link>
<description><![CDATA[계절은 매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그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는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같은 앨범도 해마다 다르게 들린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0322_lkfyueto.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nbsp;</p>
<p>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앨범이 있다. 앨범 전체가 마음에 드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이 앨범은 수록된 10곡 모두 좋아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다시 찾게 된다. 시원한 사운드 덕분에 더운 날씨에도 부담 없이 듣기 좋은 바비의 첫 솔로 앨범 [LOVE AND FALL]이다.</p>
<p>
   <br />
</p>
<p>앨범 표지부터 시원한 파란색으로 여름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수록곡 대부분이 이지 리스닝 계열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어 더위에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지는 요즘 가볍게 듣기 좋은 앨범이다.</p>
<p>
   <br />
</p>
<p>바비를 떠올리면 여전히 쇼미더머니 시즌 3 우승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강렬한 힙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LOVE AND FALL]은 바비의 첫 솔로 앨범으로 기존에 알려진 바비의 이미지와는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p>
<p>
   <br />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
   <b><span style="font-size: 18px;">사랑해&nbsp;</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Bk0-QDjWfA?si=JzbY0pXHxzSlrhzv"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앨범의 더블 타이틀곡 중 하나인 [사랑해]는 제목만 보면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랜 연인과의 이별을 담아낸 곡이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진 연인의 권태와 끝을 그려내며 제목과는 다른 방향으로 곡이 전개된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사랑을 노력한다는 건 이미 사랑이 아닌 걸</p>
   <p style="text-align: center;">설렘이 빠진 사랑에게 남는 건 결국 정뿐인 걸</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blockquote>
<p>&nbsp;</p>
<p>보통의 이별 노래는 상대를 붙잡고 싶어 하거나 헤어진 것을 후회하는 마음을 담아내지만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음에도 설렘은 사라지고 오랜 시간 함께하며 쌓인 정이 더 큰 게 남은 관계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후렴구에서 반복되는 ‘사랑해’라는 가사는 다시 돌아와 달라는 외침이 아니라 서로를 미워하기 전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지막 인사처럼 들린다.</p>
<p>
   <br />
</p>
<p>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가사와 멜로디의 대비다. 오랜 연인과의 권태와 이별을 이야기하지만 곡은 여름을 연상시키는 청량하고 경쾌한 사운드로 전개된다. 이는 서로를 원망하며 끝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채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며 관계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곡 전반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다.</p>
<p>&nbsp;</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
   <b><span style="font-size: 18px;">RUNAWAY</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_MKJY4vAc5o?si=kvJb0OeP8Ic_2R6M"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사랑해와 함께 또 다른 더블 타이틀곡인 [RUNAWAY]는 청춘이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일탈'을 노래한다. 하지만 이 곡이 말하는 일탈은 단순히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 아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며 움츠러든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청춘의 불안과 현실을 담아냈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실수를 실패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서</p>
   <p style="text-align: center;">실패를 하기 싫어 자꾸만 시도를 그르쳐&nbsp;</p>
   <p style="text-align: center;">다치기 싫어서 새로운 만남을 기피해</p>
   <p style="text-align: center;">혼자 우는 쪽이 편해 눈치 볼 필요 없어서</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blockquote>
<p>&nbsp;</p>
<p>‘실수를 실패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서’라는 가사는 단순히 실패가 두렵다는 고백이 아니다. 실수와 실패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끊임없이 결과를 평가받는 데 익숙해진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p>
<p>
   <br />
</p>
<p>청춘을 다룬 많은 노래가 결국 희망으로 귀결되는 것과 달리 [RUNAWAY]는 희망을 말하기 전에 먼저 왜 우리가 힘든지에 대해 다룬다. 그렇게 현실 앞에서 작아진 자신,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p>
<p>
   <br />
</p>
<p>이처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은 올해 발표된 AKMU의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과도 닮아 있다. 이 노래가 슬픔 또한 마음의 일부이니 애써 밀어내지 말자고 이야기한다면, [RUNAWAY] 역시 무작정 '힘내'라고 다독이기보다 '그럴 수도 있다'며 지친 마음을 먼저 이해해 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
   <b><br /></b>
</p>
<p style="text-align: justify; ">
   <b><span style="font-size: 18px;">LOVE AND FALL</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괜찮아질 거야 멀리</p>
   <p style="text-align: center;">이 긴 방황의 저 끝에</p>
   <p style="text-align: center;">내가 찾는 내 모습이</p>
   <p style="text-align: center;">날 기다리고 있길</p>
   <p style="text-align: center;">
      <runaway><br /></runaway>
   </p>
   <p style="text-align: center;">
      <runaway>[RUNAWAY] 가사</runaway>
   </p>
   <p style="text-align: center;">
      <runaway>&nbsp;</runaway>
   </p>
   </blockquote>
<p>&nbsp;</p>
<p>여름은 양면적인 계절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 누군가는 열정에 박차를 가하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한 해의 절반을 지나며 소진된 마음으로 계절을 보낸다. 같은 여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설렘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방황으로 기억된다.</p>
<p>
   <br />
</p>
<p>어쩌면 LOVE AND FALL이라는 앨범명도 그런 여름을 닮아 있는지 모른다. FALL은 계절인 가을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빠지고 흔들리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도, 청춘도 하나의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앨범이 담아낸 다양한 감정과도 맞닿아 있다.</p>
<p>
   <br />
</p>
<p>계절은 매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그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는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같은 앨범도 해마다 다르게 들린다. 올해의 여름에는 [RUNAWAY]의 가사가 오래 남았고, 내년 여름에는 또 다른 곡이 마음을 두드릴지도 모른다.</p>
<p>&nbsp;</p>
<p>분명한 건 [LOVE AND FALL]은 그 변화하는 계절과 마음을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앨범이라는 점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임채희]]></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6:45:5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4</guid>
<title><![CDATA[[Opinion] 몸의 흔적, 관계를 잇다 [미술/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4</link>
<description><![CDATA[미술은 몸의 흔적을 매개로 타인의 존재를 감각하게 하고,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도모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b style="font-size: 18px;">사물에 남는 몸의 자취</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인간은 죽지만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다.</p>
<p>&nbsp;</p>
<p>예를 들어,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그들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동상과 초상화, 기록과 이야기들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기억한다.</p>
<p>&nbsp;</p>
<p>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한때 존재했던 몸의 흔적이라는 점이다. 몸은 사라지지만, 몸이 남긴 자취는 다양한 형태로 남아 시간을 건너 전달된다. 누군가의 얼굴을 본뜬 조각상, 손으로 쓴 기록, 오랫동안 사용한 물건에는 그 사람의 삶과 육체의 흔적이 스며 있다.</p>
<p>&nbsp;</p>
<p>우리는 이러한 흔적을 통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몸을 상상할 수 있고, 시공간을 넘어 소통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몸의 흔적을 통해 계속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크리스티앙 볼탕스키와 주인 잃은 옷</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2022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회고전에서 처음 마주했던 &lt;저장소: 카나다&gt;가 떠오른다.</p>
<p>&nbsp;</p>
<p>전시장 벽면에는 수많은 중고 의류가 걸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오래된 천 냄새가 났고, 옷마다 다른 색과 무늬, 마모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옷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주인들의 나이와 취향, 삶의 모습을 상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p>
<p>
   <br />
</p>
<p>볼탕스키는 홀로코스트와 죽음, 기억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려 했다. 작품 제목인 ‘카나다(Kanada)’는 유대인의 개인 소지품을 모아둔 창고에 나치가 붙인 이름이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20402_xxrkmquy.jpg" alt="1988-reserve-canada-1500x1163.jpg" style="width: 700px; height: 543px;" />
</p>
<p>
   <br />
</p>
<p>&nbsp;</p>
<p>한편, 부산 전시에 사용된 옷들은 실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유품이 아니라 한국에서 수집된 중고 의류였다. 그러나 작품이 전달하는 감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그 옷들을 통해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떠올리고, 언젠가 사라질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p>
<p>
   <br />
</p>
<p>옷은 몸과 가장 가까운 사물이다. 오랜 시간 입은 옷은 체형에 따라 변형되고, 체취가 스며들며, 일상의 습관에 의해 닳거나 찢어진다. 옷에는 그 사람의 시간이 켜켜이 축적된다. 옷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몸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p>
<p>&nbsp;</p>
<p>볼탕스키는 이러한 흔적을 통해 부재한 사람들을 현재로 불러온다. 전시장에 걸린 옷들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관객은 옷을 바라보고, 냄새를 맡고, 그 존재를 상상하면서 보이지 않는 타인과 만나게 된다.</p>
<p>&nbsp;</p>
<p>결국 볼탕스키의 작업은 몸이 사라진 이후에도 흔적은 남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이강승과 게발선인장 '하비'</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몸의 흔적은 때로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통해 이어지기도 한다. 2026년 6월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되었던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났다. 바로 선인장 ‘하비’였다.</p>
<p>&nbsp;</p>
<p>‘하비’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된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정치인 하비 밀크(1930~1978)가 생전에 키우던 식물의 일부다. 1978년 그가 암살된 후, 그의 전 애인이자 룸메이트였던 스콧 스미스는 선인장의 줄기를 잘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단순한 식물 번식이 아니라 하비 밀크의 기억과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21232_tbfswsrh.jpeg" alt="IMG_7032 2.jpeg" style="width: 700px; height: 866px;" />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작가 이강승은 2019년 이 선인장의 일부를 건네받아 다시 키우기 시작했고, 이를 퀴어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나누었다. 전시에서는 실제 선인장과 관련 드로잉을 함께 선보이며 기억이 전승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볼탕스키의 옷이 부재한 몸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하비는 지금도 살아서 자라고 있는 흔적이다. 식물은 하비 밀크의 신체 일부는 아니지만, 그가 오랜 시간 돌보고 함께했던 존재로서 그의 삶을 현재까지 이어준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전시장에서 선인장을 바라보며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하비 밀크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흔적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공동체를 형성한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볼탕스키는 남겨진 옷을 통해 부재한 타인을 현재로 불러오고, 이강승은 선인장을 몸으로 삼아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기억과 연대를 보여준다. 타인의 몸을 느끼고, 타인의 흔적을 마주하며, 그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나는 이것이 미술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깊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한비]]></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22:12:4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5</guid>
<title><![CDATA[[Review] 기록과 기억 사이의, 연극 &#039;자객열전 Ⅱ - 안응칠 워크숍&#039;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5</link>
<description><![CDATA[안중근이라는 이름 속 안응칠에 가닿는 연습]]></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관객석에 앉아 이미 준비된 무대를 보는 일은 곧 완결된 세계를 목격하는 것과 같다. 무대 위의 세계는 이미 너무나 매끄럽고 완전하다. 하지만 무대 이면에는 그 세계가 빚어지기까지 반복된 수많은 의심이 존재한다. 공연에 있어 필연적인 '연습실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대사와 동선을 갈무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한 인간의 삶을 무대 위로 소환해 내는 작품에서 연습이란, 어떤 기억을 취하고 어떤 기록을 의심할 것인지 끊임없이 판단하고 가려내는 치열한 과정을 포함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82942_yiaspwfo.jpg" alt="안응칠 워크숍 POSTER.jpg" style="width: 700px; height: 979px;" /></p>
<p>&nbsp;</p>
<p>&nbsp;</p>
<p>여기, 완성된 영웅의 신화 대신 그 탐구 과정 자체를 관객 앞에 꺼내놓은 연극이 있다. &lt;자객열전&nbsp;Ⅱ - 안응칠 워크숍&gt;(박상현 작/연출, 연우소극장, 2026.7.23.~8.2.)은 1909년 하얼빈 의거 이후 안중근이 수감되었던 뤼순 감옥과 그를 연기하려는 오늘날의 연습실을 쉴 새 없이 오간다. 연습실에 모인 연출과 배우, 조연출, 그리고 무대감독은 안중근의 자서전인&nbsp;「안응칠 역사」와 당시 재판 기록을 대본 삼아 워크숍을 진행하며 인물을 구축해 나간다.</p>
<p>&nbsp;</p>
<p>하지만 토론이 거듭될수록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의 해석은 서로 충돌하고 흔들린다. 남겨진 기록들의 진실조차 불투명해지는 상황 속에서, 모두가 알고 있다 믿었던 영웅 안중근의 견고한 이미지는 점차 흐려진다.</p>
<p>&nbsp;</p>
<p>그리고 그 흐려진 이미지의 틈새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안응칠'이다. 이 공연은 안중근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현하는 일반적인 역사극의 문법을 탈피한다. 대신, 인물의 신념과 두려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끝내 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음을 깨달아가는 창작진의 치열한 탐구 과정 자체를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의도된 불협화음, 메타연극으로 던지는 질문</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initial;" />
<p>&nbsp;</p>
<p>무대 위로 소환된 연습실이라는 공간은 대본을 해석하고 발화하는 인물들의 팽팽한 충돌로 채워진다. 극 중 워크숍을 이끄는 연출은 확고한 중심을 잡으려 하지만, 조연출은 그 해석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 사이에서 안중근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는 엇갈리는 기록과 해석의 간극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고 방황한다. 이들의 갈등은 단순한 연극 연습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재단하는지 보여준다.</p>
<p>&nbsp;</p>
<p>이러한 인물들의 충돌과 시공간의 교차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무대 중앙에 놓인 커다란 '나무판' 형태의 오브제다. 이 장치는 극의 흐름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모한다. 때로는 연습실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었다가, 때로는 안응칠이 선 차가운 재판장으로, 혹은 그가 넘나들던 험준한 산세로 순식간에 탈바꿈한다. 배우의 움직임과 호흡에 맞춰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이 장치는 과거와 현재, 환상과 실재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연출적 요소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93356_lyxzshat.jpg" alt="KakaoTalk_20260731_08461272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95px;" /></p>
<p>&nbsp;</p>
<p>&nbsp;</p>
<p>안중근의 뤼순 감옥 시절을 재현하는 '안응칠 워크숍'이라는 극중극 구조를 끌어온 이유는 명확하다. 관객이 1909년 과거의 서사로 몰입하려는 찰나, 눈앞에서 거대한 오브제가 움직이거나 창작진의 토론이 끼어들며 무대는 다시 현재의 연습실로 돌아온다. 이러한 메타적 장치들은 관객이 영웅의 서사에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일을 차단한다. 극은 의도적으로 몰입을 깨뜨리며 약소국의 폭력이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하는지, 남겨진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p>
<p>&nbsp;</p>
<p>주목할 점은 이들의 재현이 무조건 진지하거나 비장한 방식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연습실에 모인 연출과 배우, 무대감독은 안응칠의 기억을 하나의 연극적 놀이처럼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거창한 무대 장치 없이 단출한 연습실을 횡단하는 배우들은 단순한 소품을 활용하거나 오직 신체와 몸짓만으로 안응칠의 과거, 그리고 그의 기억 속 신부님과 어머니의 회상 장면을 그려내며 극의 스타일을 구축한다.</p>
<p>&nbsp;</p>
<p>이때 배우들은 단순히 대본을 발화하는 것을 넘어 극을 적극적으로 유희한다. 무대감독과 연출로 분한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직접 조명의 큐나 조도를 조절하고, 타이밍에 맞추어 음향을 넣는 등 회상 장면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통상적으로 무대 뒤에 감춰져 있으리라 생각하는 기기의 조작 영역까지 극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형을 앞둔 뤼순 감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무거운 압박감을 단숨에 환기한다.</p>
<p>&nbsp;</p>
<p class="0">&nbsp;</p>
<p class="0">&nbsp;</p>
<p class="0"><span style="font-size: 18px;"><b>기꺼이 반복하는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initial;" />
<p>&nbsp;</p>
<p>결국 이 연극은 안응칠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하나의 워크숍이다. 메타연극적인 형식을 차용하여 관객이 감정적 동화에서 빠져나와, 무대 위에 등장한 '창작진'들과 함께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p>
<p>&nbsp;</p>
<p>기록과 기억만으로 한 사람의 실재에 온전히 가닿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타인의 삶을 무대 위에서 완벽히 재현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품고 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데, 타인을 재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닿을 수 없는 목표일지 모른다.</p>
<p>&nbsp;</p>
<p>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건네고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진해서 연습실로 들어간다. 이들은 파편화된 기록과 엇갈리는 기억 사이에서 '진짜'를 길어 내기 위해 기꺼이 그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p>
<p>&nbsp;</p>
<p>연극 &lt;자객열전 Ⅱ - 안응칠 워크숍&gt;이 무대 위로 끌어올린 그 치열한 실패와 탐구의 과정은, 역사가 단지 굳어진 하나의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사유되어야 할 현재진행형의 질문임을 증명한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손현진]]></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23:21:0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0</guid>
<title><![CDATA[[에세이] 나는 동두천에 산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0</link>
<description><![CDATA[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나는 동두천에 산다. 태어난 건 대전, 두 살까지는 서울에 살았다고 하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난다.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동두천에서 나왔으니 나는 빼도박도 못하는 동두천 사람이다. 지금도 어릴 적 엄마 손 잡고 오던 동두천 꿈나무 정보 도서관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nbsp;</p>
<p>&nbsp;</p>
<p>대학교 신입생 때 가장 많이 듣는 "너는 본가가 어디야?" 라는 질문에 서울,부산,대구,청주,인천...... 다양한 답변들이 있지만 동두천은 흔치 않다. 흔치 않은 대답에는 추가 질문이 따르기 마련이고,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동두천을 다양한 형태로 답하곤 했다. 경기북부야, 의정부 위야, 원래 양주였어, 북한 바로 아래야, 구석기 알지? 연천 쪽이야. 가끔 군대를 다녀오거나, 1호선을 자주 타는 친구들이 동두천을 알고 있는 정도이다.</p>
<p>&nbsp;</p>
<p>이쯤 말했으면 눈치 챘을 것 같은데, 사실 나는 동두천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데에는 응당 이유가 붙어야겠지만 잘 모르겠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냥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동두천엔 영화관 없지? 트랙터 타고 등교하지? 라는 농담들에 조금은 긁혔던 것도 같다. 어쩌면 여전히 조금은 남아있는 홍등가의 흔적들이 부끄러웠을 수도 있다. 하나 하나 동두천이 싫은 이유를 적립하면서 살진 않았다. 그렇게 싫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도 않았다. 몇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좁은 촌동네. 아 지긋지긋한 이 바닥- 뭐 이 정도로 생각했다.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런 노부부의 애정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아주 어릴적부터 어른이 된 나를 떠올릴 때, 그 상상 속의 내가 동두천에 살고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p>
<p>
   <br />
</p>
<p>이제 나도 스물 네살이다. 어릴 적 내가 상상하던 어른의 나이는 몇살이었을까. 엄마 아빠는 열아홉에 서로를 아셨고. 스물 여덟살에 언니를 낳았다. 스물 여섯살인 우리 언니도 내년에 결혼을 한단다. 나는 2주 전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끝냈다. 어영부영 계절학기의 힘을 빌려서 8개의 학기 내에 졸업 학점을 채울 수 있었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수업이 없다는 사실이 생경하다. 졸업을 한건 아니다. 학사학위취득유예라는 아주 좋은 제도가 있다. 그러니 나는 지금 학교라는 울타리 끄트머리에 간신히 붙어있는 셈이다.&nbsp;</p>
<p>
   <br />
</p>
<p>동두천에서 대학교까지 2년 반 동안 통학했다. 도어 투 도어 1시간 반이 좀 넘는 거리였다. 말이 1시간 반이지, 동두천행 소요산행 연천행은 한 시간에 2개 뿐이다. 통학했던 2년을 되돌아보면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듯 느껴진다. 서울에서는 막차 끊기기 전에 집에 가야했고, 동두천에서는 서울로 학교를 다녔어야 했다.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감각은 나에게 많은 피로를 주었고 2년 반 동안 졸음과 사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
<p>&nbsp;</p>
<p>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온 3학년 2학기부터 첫 자취 생활이 시작됐다. 1년간은 언니와 원룸에서, 지난 반 년간은 언니 동생과 투룸에서 지냈다. 서울 집 값은 참 비싸다. 비싸다 비싸다 하지만 이 정도로 비쌀 줄이야. 이것 저것 포기하고 얻어낸 방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서울에서 잘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짜릿했다. 그 좁은 원룸에 두 명이 살 때에도, 우리는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그래도 통학하는 것보다는 나아- 라고 입을 모으곤 했다. 저번에는 처음으로 청약을 넣어봤다. 될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또 산다고 생각하자고 하면서도 우리 세자매의 손가락과 입은 바쁘게 움직였다. 어딜 넣어야 조금이라도 확률이 올라갈지, 제미나이에게 물어보고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결과는 세명 모두 떨어졌다. 놀랍지 않은 결과다.</p>
<p>
   <br />
</p>
<p>다음 집은 어떻게 해야할까? 결혼자금을 모아야하는 언니는 동두천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렇게 되면 새벽 4시에 일어나 첫 차를 타고 출근해야한다. 미친 짓 아닐까? 또 생각해보면 아빠는 26년간 동두천에서 여의도로 출근하고 계신다. 미친 짓이긴 하다. 노량진에서 동두천까지 1호선을 타고 올때면, 과거로 오는 타임머신을 타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엄마 아빠가 처음 동두천에 왔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시골이었을테니 그럴만 하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아파트 한 동 자체에 우리집 뿐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것도 무서워 딸 셋을 다 데리고 나가곤 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충청도 사람이고, 대전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어쩌다 동두천까지 오게 되었을까. 결정을 했을 때는 기껏해봤자 나보다 다여섯살 많을 때 였을텐데, 연고지가 아예 없는 곳으로 가는 결정을 어떤 마음으로 하셨을까.</p>
<p>
   <br />
</p>
<p>요새 그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이유는 내 최근 검색어를 보면 알 수 있다. 순환 없는 공기업 리스트. 아예 연고지가 없는 새로운 곳에서 정착해 새 삶을 살고 싶기도 하고. 익숙한 서울이나 경기도 근처에서 사는게 편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결정은 어떻게 하는거지? 뭘 보고 하는거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들 하는 선택들을 앞두고 내가 느낀 좌절감은 사실 그냥 아침 메뉴 고르는 선택과 비슷한 정도의 사전 정보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신중이지 사실은 알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잘 생각해라 잘 봐라 하는데 다 엉터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확실한건 요즘 취업이 어렵댄다. 2009년 금융위기 이후로 최고라나. 확실하지 않다 사실. 그래도 남들 다 취업 턱턱하는데 나만 안 되는 것보다는 다 같이 어려운게 나을지도. 요새 취업 시장이 안 좋으니까 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사기업 서류 몇개 넣어봤다. 아 10개도 안 넣어보긴 했는데, 벌써 힘들다. 남들은 100개씩 넣더라. 대단하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뭘 해먹고 살아야할지. 어디 살고 싶은지. 뭘 중요시 하는지. 졸업하고나서도 공기업? 사기업? 이러고 있으니 사실 말 다 했다. 그렇다고 게으르게 산 건 아닌데,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든다. 희망 직무와 산업이 명확했던 언니에게 비결을 물었던 적이 있다. 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정답이 뭔지 모르겠는데 5분 남았대서 아무거나 써서 내는거야.</p>
<p>
   <br />
</p>
<p>아침에 눈을 뜨면 노트북을 키고 조급하게 무언가를 한다. 다들 어떤 한 우물을 정하고 막 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여길 조금 파봤다가 아니다 싶으면 저길 파보고 하는 것 같다.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도, 채용 공고에 마음이 급해지다가도, 그냥 워홀을 가버릴까, 카페 알바를 해보고 싶은데, 유튜브를 시작해볼까. 자려고 누워봐도 선풍기처럼 돌아가는 머릿속이 시끄럽다. 스물 네살이면 엄청 어리지, 그래도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지, 2학년 때 좀 자격증 따둘걸, 그 공고 그냥 넣어볼까, 시간 낭비겠지.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어서 공기업 들어가는거 아니었나? 왜 다들 순환을 시키는거야. 쩝 그래야 수지타산이 맞긴 하지? 안 그러면 다 공기업 가려나.</p>
<p>
   <br />
</p>
<p>미야자키 하야오의 &lt;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gt;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이지 난? 사실 그 질문은 아주 중요하지만 또 아주 쓸모 없는게 그렇게 정해봤자 그렇게 살아지는게 아니다. 이렇게 살고 싶다하더라도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누군가는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바꿀 수 없는 것들 사이에 가뭄에 콩 나듯 존재하는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p>
<p>
   <br />
</p>
<p>자유란 필연성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얽매이지 않고 철새처럼 살아가는 삶이라기보단,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더 공감된다. 머리가 자라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어차피 대머리로 평생 살아야하지만. 대머리로 평생을 살아온 것과, 대머리로 평생을 살기로 한 것은 다르다. 선택지가 없는데 선택한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지가 하나여도 선택지는 있다. 선택할지 선택하지 않을지. 바꿀 수 없는 것들 중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들. 성별이든, 출신이든, 부모든, 성격이든, 외모든. 그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나와 죽을때까지 함께 살아야하니까. 괴로움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으니까.</p>
<p>
   <br />
</p>
<p>어쨌든 나는 동두천에 살고있다. 장마가 끝났을 때즈음 부터 일주일 째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도 않는 나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집 밖에 있을 명분이 없다. 자취방에서 학교 도서관까지 걸어가면 편도 30분이 걸려서. 노트북을 들고 걸어가는게 무겁고 힘들어서. 도서관 에어컨이 너무 빵빵해서 경량패딩을 입어도 추워서. 동두천에 돌아올 핑계는 많다. 내가 서울에 살아도, 여수에 살아도, 독일에 살아도 어쨌든 난 동두천 사람이니까.</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한정아]]></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17:48:2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9</guid>
<title><![CDATA[[Opinion] 그냥 맛있는 나고야 여행 [여행]]]></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9</link>
<description><![CDATA[일본 나고야 3박 4일 여행에서 얻은 것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일본 나고야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그동안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 보는 과정을 거쳤기에 이 글을 쓴다.</p>
<p>&nbsp;</p>
<p>나는 현재 휴학을 신청해 1년의 기간을 앞두고 있다. 휴학 기간 중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일지 고심했고, 그중 하나를 여행으로 설정했기에 이번 나고야 여행에 거는 기대가 컸다.</p>
<p>  &nbsp;  </p>
<p>여행조차 명확한 목적이 없다면 마음이 불편한 나란 인간은, 이번 나고야 여행에서 ‘디저트’에 집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평소 간식보단 밥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커피를 자주 마시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던 디저트들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p>
<p>  &nbsp;  </p>
<p>식당 이름은 적지 않았다. 그저 기억 속에 깃든 디저트의 맛만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사실 원래 목적은 커피였다</b></span>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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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5845_mhvdwrcc.jpg" alt="KakaoTalk_20260730_224909980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636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nbsp;  </p>
<p>동생과 함께 지친 상태로 나고야에 도착했다. 여행의 첫 끼니로 선택한 것은 파르페였다. 디저트라기보다 식사에 가까웠지만, 내가 주문한 복숭아 파르페의 맛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p>
<p>  &nbsp;  </p>
<p>복숭아를 통째로 올려주는 파르페는 가격이 꽤 사악했지만, 아낌없이 들어간 재료 덕분에 풍미가 무척 진했다. 복숭아 한 조각 한 조각이 적당히 부드럽고 달콤했다. 파르페와 대화에 집중하다 문득 카페 내부를 둘러보니,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마음이 따뜻해졌다.</p>
<p>&nbsp;</p>
<p>소품 하나하나에 깃든 정성을 마주하니, 오래도록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p>
<p>  &nbsp;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5858_ikmqlgpe.jpg" alt="KakaoTalk_20260730_224909980.jpg" style="width: 700px; height: 516px;" />
</p>
<p>  &nbsp;  </p>
<p>&nbsp;</p>
<p>아침 식사를 위해 나고야의 명물이라는 오구라 토스트를 맛보러 갔다. 팥과 콩가루 덩어리로 추정되는 잼을 얹은 토스트는 맛이 묵직했다. 토스트만 계속 먹다 보니 조금 물리는 듯했는데, 그 느끼함을 잡아준 것은 바로 ‘커피’였다. 이번 여행에서 새로운 커피를 마셔보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아이스 커피에 우유를 추가해 주문했다.</p>
<p>  &nbsp;  </p>
<p>예상대로 쓴맛이 강했지만, 텁텁한 토스트와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었다. 손님이 많아 다소 좁은 자리를 배정받았지만, 친절한 직원들과 복작거리는 가게 분위기, 그리고 정겨운 인테리어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p>
<p>  &nbsp;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5911_ovrqnmkc.jpg" alt="KakaoTalk_20260730_224909980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639px;" />
</p>
<p>  &nbsp;  </p>
<p>&nbsp;</p>
<p>드라마 &lt;고독한 미식가&gt; 속 고로 상이 맛있게 먹는 영상을 보고 언젠가 꼭 시도해 보고 싶었던 디저트, ‘안미츠’. 맛은 예상했던 그대로였지만, 우뭇가사리의 식감이 훌륭해 만족스러웠다. 동생이 주문한 와라비 모찌가 더 취향에 맞았기에 안미츠의 존재감은 금세 희미해졌지만, 팥과 과일, 그리고 떡이 이루는 조화가 상당히 좋았다.</p>
<p>  &nbsp;  </p>
<p>함께 나온 녹차는 자칫 너무 달게 느껴질 수 있는 디저트의 맛을 정갈하게 중화해 주었다. 녹차를 좋아하는 터라, 차만 마셔도 혹은 안미츠와 곁들여도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p>
<p>  &nbsp;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5925_mamghpwb.jpg" alt="KakaoTalk_20260730_224909980_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661px;" />
</p>
<p>  &nbsp;  </p>
<p>&nbsp;</p>
<p>정말 어렵게 찾아낸 멜론 파르페. 현금 결제만 가능한 곳이라 근처 편의점까지 다녀와야 했지만, 그 수고조차 잊게 만드는 맛이었다.</p>
<p>  &nbsp;  </p>
<p>멜론은 냉동이 아닌 생과일을 사용하여 적당한 달콤함과 향으로 파르페의 시작을 열었다. 아래에 깔린 멜론 아이스크림과 각종 재료가 입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나고야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고가였지만, 골목 속에 숨어있는 보석 같은 곳을 마주한 느낌이었다.</p>
<p>&nbsp;</p>
<p>현지인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곳으로 보였지만, 환전을 위해 멀리까지 다녀온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처럼 느껴졌다.</p>
<p>  &nbsp;  </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여행'에 대한 나의 고찰</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여행이란 힐링만을 목적으로 해야 마음이 편하지만, 나는 도통 그러한 인간이 되질 못 한다. 그래서 ‘음식’만을 위해 떠나는 여행을 추진했는데, 돌아보니 음식은 물론 그곳의 분위기까지 깊이 새기고 돌아왔음을 깨닫는다.</p>
<p>  &nbsp;  </p>
<p>디저트를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는 과정, 그 속에서 나는 여행에 대한 나만의 관점을 얻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힐링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사실을 말이다.</p>
<p>  &nbsp;  </p>
<p>삶을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던 내게, 지금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무엇이든 계획대로 될 수는 없으며, 휴식을 위해 떠나는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체감 중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소중한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p>
<p>&nbsp;</p>
<p>삶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보다, 돌이켜보니 내 안에 무언가가 차곡차곡 축적되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40002_sxssmhmt.jpg" alt="김지연.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지연]]></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3:56: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48</guid>
<title><![CDATA[[Essay] 흘러간 시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48</link>
<description><![CDATA[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시간에도 경험은 나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2026년 상반기를 보내고 하반기의 시작인 7월도 어느덧 마지막 날이다. 언제나 느끼지만 이번에도 역시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하며 뒤를 돌아보게 된다.</p>
<p>
   <br />
</p>
<p>올해 초에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크게 정리해 두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얼렁뚱땅 지나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상반기에는 바라던 일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도 있었지만 해야 했던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다.</p>
<p>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0014_iewkmtvr.jpg" alt="KakaoTalk_20260731_193653400_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3px;" />
</p>
<p>&nbsp;</p>
<p>&nbsp;</p>
<p>좋은 기회가 무엇이냐면 3월부터 6월까지 문화예술 관련 행정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 일이었다. 이때의 면접이 기억에 남는데 면접 당시 그동안 해왔던 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면접관께서 "열심히 살았네"라고 말해주셨다. 늘 이력서를 쓰거나 면접을 볼 때마다 내가 해온 일들이 부족하고 작게만 느껴졌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합격이라는 결과까지 얻을 수 있어 더욱 기뻤다.</p>
<p>
   <br />
</p>
<p>약 4개월 동안 익숙한 업무도 해보고 처음 접하는 일도 경험했다. 때로는 힘들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방향을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또한 이 경험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인턴 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곳에 이력서를 넣으면서 원래라면 서류 접수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 이번 경험을 적은 덕분에 다음 단계까지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p>
<p>&nbsp;</p>
<p>비록 최종 합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분명 의미 있는 변화였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0157_uiholrli.jpg" alt="KakaoTalk_20260731_193653400.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nbsp;</p>
<p>
   <br />
</p>
<p>상반기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을 다니고 있다는 핑계로 신경 쓰지 못 한 일이 많다는 점이다. 가장 아쉬운 일은 꼭 취득하고 싶었던 자격증 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고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작년에는 원서 접수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올해는 시험장에 가서 끝까지 응시했다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꾸준히 준비하고 싶다.</p>
<p>
   <br />
</p>
<p>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아트인사이트 활동에 대해서다. 글을 쓰고 기록하는 습관을 만들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미완성인 글들만 쌓여갔다. 글을 쓰는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화예술을 즐기고 그것을 기록하는 즐거움이 처음의 목적 대신 어느 순간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이 더 커졌던 것 같다. 잃어버린 초심을 다시 떠올려 보고 싶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0220_anzivuxn.jpg" alt="KakaoTalk_20260731_193653400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760px;" />
</p>
<p>&nbsp;</p>
<p>&nbsp;</p>
<p>흘러가는 시간을 기억하고 남기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지만 정작 상반기에 경험한 많은 일들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그래도 되돌아보니 남겨진 경험은 분명히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니 그동안의 경험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p>
<p>
   <br />
</p>
<p>7월이 되면서 꾸준히 다니다가 올해 잠시 쉬었던 수영도 다시 시작했다. 몸은 수영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 보자'라는 마음을 먹으니 조금씩 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글쓰기 역시 비슷한 것 같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조차 어려웠지만 그냥 뭔가 남기자라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하니 오히려 훨씬 편안하게 문장이 이어졌다.</p>
<p>
   <br />
</p>
<p>남은 하반기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고 싶다. 너무 초조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싶다. 기다리던 여행도 앞두고 있고 좋아하는 뮤지컬도 다시 돌아온다. 즐거운 일이 벌써 가득하다. 상반기에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에도 계속 도전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부담 없이 글도 꾸준히 써보고 싶다.</p>
<p>
   <br />
</p>
<p>완벽한 상반기는 아니었지만 분명 한 걸음은 앞으로 나아간 시간이었다. 남은 2026년이 또 어떤 경험들로 채워질지 기대하며 조금은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p>
<p>&nbsp;</p>
<p>
   <br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201204_kpzkycyd.jpg" alt="임혜인_컬쳐리스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
   <br />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임혜인]]></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20:13:0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3</guid>
<title><![CDATA[[가위바위보, 하나 빼기] 세상에게 이르는 문]]></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3</link>
<description><![CDATA[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정확한 미래를 볼 수 있지만 누구도 그 예언을 믿지 않는 저주. 비운의 카산드라를 부쩍 자주 떠올린다. 내가 명확히 인식하는 세계를 누군가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낙차를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외계인을 만난 것과 다름없는 당혹감을 느낄 때마다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진짜라고 믿을 수 있는지. 어떻게 당신 말을 무시하는 바보들과 함께 살아가는지.</p>
<p>&nbsp;</p>
<p>언젠가 &lt;디바마을 퀸가비&gt; 속 익살스러운 장면을 따라 했는데, 채널의 존재조차 몰랐던 상대의 당황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속으로 말했다. 이 재밌는 걸 안 보고 뭐 하고 살았지. 이게 안 재밌으면 대체 어떤 유머에 웃는다는 거지. 아마 상대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이 재미없는 걸 보고 사는 건가. 이게 재밌으면 대체 어떤 유머에 웃는다는 거지.</p>
<p>&nbsp;</p>
<p>끝없이 생각을 펼치면 나와 저이가 사용하는 언어 체계까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까 정말 다른 생물인 것처럼, 기초적인 질서조차 다르게 짜인 느낌. 그런 너를 만나면 자연스레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이 든다. 한 뼘이라도 더 넓은 지평을 차지하기 위한 땅따먹기를 하게 된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더 옳고 중요하게 느껴지니까. 나의 세계와 당신의 세계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p>
<p>&nbsp;</p>
<p>우리 사이엔 쌓여간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함이.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믿기 힘든 답답함이. 그런 너와 내가 같은 곳에서 같은 숨을 쉰다는 갑갑함이. 그럼에도 모두의 삶은 진짜라는 기이함이.</p>
<p>&nbsp;</p>
<p>그 속에서 갈피를 잃는다. 나의 세계란 것이 정말 존재하는 건가. 진짜 세계의 모양은 무엇인가. 그들이 다른 형태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속에서 외로운 카산드라가 된다.</p>
<p>&nbs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53151_tqtsrnie.jpg" alt="ㅋ.jpg" style="width: 700px; height: 591px;" />
</p>
<p>&nbsp;</p>
<p>&nbsp;</p>
<p>추상적인 관점이 아닌, 물리적인 시야로 인식한 세계에 대해선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lt;나츠메 우인장&gt;의 ‘나츠메 타카시’는 요괴를 볼 수 있는 소년이다. 집, 길, 학교, 일상의 모든 곳에서 사람과 요괴가 함께 살고 있다. 문제는 그의 눈 안에서만 펼쳐지는 세상이라는 거다. 어릴적부터 요괴들의 장난에 시달려 도움을 구하지만 누구도 나츠메를 믿지 않았다. 믿지 못했다. 허공을 보며 소리 지르는 무서운 아이. 거짓말쟁이. 여러 꼬리표가 달린 나츠메는 일찍이 깨닫는다. 자신이 본다는 사실보다 타인의 인정이 앞선다는 것을.</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그래서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난데모나이(아무 것도 아니예요)’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내가 보고 느낀 것도. 그로 인해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기쁜 것도, 행복한 것도, 모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모든 게 내가 이상해서 그런 거라고. 자기가 보는 세상을 믿을수록 타자와 함께하는 세상에서 멀어지는 나츠메는 요괴는 없는 거라고 치부하려 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53626_sbplfwfm.jpg" alt="다운로드.jpg" style="width: 700px; height: 410px;" />
</p>
<p>
   <br />
</p>
<p>&nbsp;</p>
<p>그런&nbsp;나츠메 내면의 장벽은 두텁다. 누구에게도 주변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움과 멸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쌓은 벽은 애정과 존중도 가닿지 못하게 했다. 그 속도 모르고 접근하는 요괴들과 뒤엉키고 소통하면서 나츠메는 이들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외면하고 싶어도, 증명할 수 없어도 자기 눈 속의 명확한 세계를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p>
<p>&nbsp;</p>
<p>그가 다양한 요괴를 직시하면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더 있다. 자신처럼 요괴를 볼 수 있는 동료들, 요괴를 볼 순 없어도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이들이다. 나츠메가 어떤 세상을 바라보는지 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 속에 나츠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귀히 여기는 사람들.</p>
<p>&nbsp;</p>
<p>타자의 애정을 통해 나츠메는 자기 세계를 밀착하게 보고 느낀다. 세상을 딛는 감각이 단단해지자 내면의 벽은 부드러워지는 듯 보였다. 나츠메는 조심스럽고 느리게 곁을 내어주어 간다. 본인의 시야가 명확할 때 타인의 세계에도 깊이 접속하게 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이해됐다. 돌아올 수 있는 단단한 나의 땅이 있을 때 비로소 다른 땅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세계는 너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근거인 거다. 어떤 논리보다 강한 근거는 삶 자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53713_tmsnipxs.jpg" alt="z.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nbsp;</p>
<p>&nbsp;</p>
<p>카산드라와 달리 나츠메에겐 그를 귀히 여기려는 존재들이 있다. 두 운명의 결과를 바꾼 명백한 차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완벽한 눈이라는 신의 축복도, 모두에게 신뢰 받지 못하는 저주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함께하는 동료를 기어코 만날 수 있을 거다. 볼 수 있을 거다. 단순한 믿음만이 필요할지 모른다.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나를 아끼는 누군가를 만나리란 믿음. 나의 눈은 너에게로 이르는 문이라는 믿음.</p>
<p>&nbsp;</p>
<p>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53727_pcatsyrv.jpg" alt="컬쳐리스트 태그.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해영]]></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15:38:4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8</guid>
<title><![CDATA[[Review] 고백이 책임을 대신할 수 있을까 - 연극 플리백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8</link>
<description><![CDATA[이해와 면죄 사이의 경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300_keqibpox.jpg" alt="image-3.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start;">연극 〈플리백〉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명한 원작과 수많은 수상 기록, 세계적인 흥행 소식을 읽으면 분명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에도 주인공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물론 모든 작품이 관객에게 공감이나 위로를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불편한 감정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플리백〉을 바라보며 생긴 거리감은 단순히 주인공이 비도덕적이거나 불완전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끝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그녀의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둘러싼 작품의 시선이었다. 파괴적인 욕망과 무책임한 선택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통해 설명되는 순간, 설명과 변명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했다.</p>
<p><br /></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솔직함이라는 이름의 면죄부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플리백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성적 농담을 던지고, 관계의 실패를 냉소하며, 자신의 충동과 실수를 관객에게 끊임없이 고백한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 먼저 폭로한다. 아마도 이 거침없는 자기 노출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타인의 평가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추함을 공개해버림으로써, 수치심의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p>
<p>&nbsp;</p>
<p>플리백은 자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부하지만, 그 자기 인식이 삶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고백 속에 머무르며 자신의 행동을 반복한다. 자신의 결함을 먼저 인정하는 태도가 어느 순간 타인의 비판을 무력화하는 방어막처럼 보이기도 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309_iptqzeyl.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주연 (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고백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책임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누군가 자신이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플리백의 솔직함을 보면서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그 사람이 다른 이에게 남긴 상처를 용서하는 일을 얼마나 구분하고 있는가.</p>
<p><br /></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욕망은 정말 생명력인가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플리백에게 성적 욕망은 단순한 쾌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유일하게 확실한 자산처럼 다루고,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관계가 실패하고 가족과의 대화가 어긋날수록, 그녀는 다시 몸의 감각으로 돌아간다. 성적 대상이 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필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322_msurpncr.jpg" alt="image-6.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작품은 이를 현대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태도로 보여주려는 듯하다. 여성이 성욕을 말하고, 성적 주체로 행동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단정함이나 순결함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플리백은 분명 기존의 여성 인물과 다르다.</p>
<p><br /></p>
<p>황당하고 모욕적인 요구를 하는 연인에게 계속 응하고, 자신에게 충분한 존중을 보이지 않는 상대와 관계를 맺으며, 원치 않았을 법한 신체 접촉조차 자신의 가치가 인정된 증거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은 자유롭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이 오랫동안 타인의 욕망을 통해 평가받아온 방식이 내면화된 결과처럼 느껴졌다. 몸의 자유를 말하는 서사라면, 그 자유가 누구의 욕망을 위해 작동하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p>
<p><br /></p>
<p>그런 점에서 작품이 성적 주체성을 말하는 것인지, 성적 자기파괴를 보여주는 것인지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 물론 이 모호함 자체가 작품의 의도일 수도 있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오래된 억압의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플리백의 행동은 저항인지 자해인지 구분되지 않은 채, ‘발칙함’이라는 이미지 속에 소비되는 듯했다.</p>
<p><br /></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람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플리백의 삶을 무너뜨린 가장 큰 사건은 친구 부의 죽음이다. 그녀는 친구의 연인과 관계를 맺었고, 그 배신을 알게 된 부는 상처를 입을 목적으로 도로에 뛰어들었다가 죽음에 이른다. 플리백이 친구를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 죽음의 원인에 자신의 선택이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p>
<p><br /></p>
<p>작품은 이 사건을 통해 그녀가 왜 자기혐오와 공허 속에 빠져 있는지를 설명한다. 죽은 친구의 상실과 배신은 어느새 살아남은 플리백의 죄책감과 슬픔을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부는 독립적인 한 인간이라기보다 플리백의 상처를 완성하는 기억으로 남는다.</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333_qyoafbzr.jpg" alt="플리백_공연사진_김주연 (1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누군가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그 비극에 영향을 미쳤다면 살아남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고통만큼이나 자신이 타인에게 가한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플리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직면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죄책감을 성적 관계와 농담, 냉소로 덮고, 관객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잠시 숨을 돌린다.</p>
<p>&nbsp;</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1인극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한 명의 배우가 제한된 무대 위에서 여러 인물과 관계를 구현하고, 대화와 독백을 빠르게 넘나들며 공연 전체를 이끄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차력에 가까웠다. 별다른 장치 없이 목소리와 표정, 몸의 방향만으로 보이지 않는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분명 인상적이었다.</p>
<p>&nbsp;</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347_sgivrdmz.jpg" alt="image-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특히 플리백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은 그녀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관객에게 농담을 던지고, 눈빛을 보내며, 방금 벌어진 일을 함께 비웃는다. 무대 위 인물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을 관객만 공유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편에 서게 된다. 그녀가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을 하든, 이미 우리는 그녀와 웃음을 나눈 공범이다.</p>
<p><br /></p>
<p>그 형식 때문에 작품에 대한 생각도 커졌다. 관객과 가까워지는 연극적 장치가 인물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을 넘어, 인물의 행동을 매력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플리백의 날카로운 유머와 배우의 에너지가 강할수록 그녀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는 잠시 뒤로 밀려난다. 웃음이 윤리적 판단을 유예하고, 연민이 책임을 희석하는 순간이 생긴다.</p>
<p><br /></p>
<p>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친밀감을 형성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매력적인 가해자의 시선에 동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재미있고 솔직한 사람에게 더 관대하다. 자신의 약점을 먼저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조차 상처의 부산물로 이해하려 한다. 〈플리백〉의 형식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이용한다.</p>
<p><br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span></b>
<p><b><span style="font-size: 18px;"></span><span style="font-size: 18px;"></span></b></p>
<span style="font-size: 18px;"><b>불완전한 여성을 무대의 중심에 세우는 일</b></span><b><span style="font-size: 18px;">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플리백〉은 현대 여성의 욕망과 외로움, 자기파괴적인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아왔다. 플리백은 오랫동안 여성 인물에게 기대되어온 모범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친절하지도, 희생적이지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도 않다. 충동적인 선택을 반복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스스로를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몰아넣는다.</p>
<p>
   <br />
</p>
<p>그럼에도 이러한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지닌 분명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여성 인물이 반드시 선하거나 현명해야만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역시 욕망하고, 실패하고, 이기적일 수 있으며, 때로는 스스로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는 복잡한 인간이다. 〈플리백〉은 그런 여성을 교정하거나 모범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보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무대 위에 남겨둔다.</p>
<p>&nbsp;</p>
<p>다만 나는 플리백의 욕망을 해방이나 주체성의 언어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 안에는 외로움과 낮은 자기 인식,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p>
<p>&nbsp;</p>
<pl; min-height:="" 15px;"="">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435_ctngvanx.jpg" alt="image.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l;">
      <p>그러나 어쩌면 이 모호함이야말로 이 인물을 쉽게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른다. 실제 인간의 욕망 역시 늘 주체적이거나 늘 수동적인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플리백의 행동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던 이유도, 그 안에 서로 모순되는 감정들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p>
      <p>&nbsp;</p>
      <pl;">
         <p><span>결국 〈플리백〉은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기보다, 여성 인물 역시 얼마든지 불완전하고 비호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넓힌 작품에 가깝다. 나는 그녀의 모든 선택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여성 캐릭터가 반드시 응원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대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복잡함을 끝까지 바라보게 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남았다.</span></p>
         <p><br /></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span></b>
         <p><b><span style="font-size: 18px;"></span><span style="font-size: 18px;"></span></b></p>
         <span style="font-size: 18px;"><b>이해하지 못했기에 오래 남은 질문</b></span><b><span style="font-size: 18px;">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공연이 끝난 뒤 나는 한동안 내가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작품이고, 많은 관객이 플리백의 외로움과 상실에 공감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관객이 같은 인물에게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열 수는 없다. 예술 작품은 모두를 하나의 감정으로 이끄는 대신, 서로 다른 질문을 품고 극장을 나서게 하기도 한다.</p>
         <p>&nbsp;</p>
         <p>정확히 말하면 나는 플리백의 외로움과 자기혐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관계가 어긋날수록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죄책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농담과 냉소 뒤로 숨는 모습에는 분명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다만 그 고통이 그녀의 행동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해가 어느 순간 용서로 이어지는지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p>
         <pl;">&nbs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134402_rsykanba.jpg" alt="image-4.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배우의 연기는 뛰어났고, 한 사람이 여러 관계와 인물을 오가며 무대를 채우는 과정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형식은 플리백의 내면을 가까이 들여다보게 했다. 그녀가 농담을 건넬 때 함께 웃고, 비밀을 털어놓을 때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관객은 어느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청자가 된다. 그 친밀함 덕분에 나는 그녀를 단순히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으로만 밀어낼 수 없었다.</p>
            <p>&nbsp;</p>
            <p>동시에 그 가까움은 계속해서 판단을 망설이게 했다. 한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과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받아들이는 일은 같지 않다. 상처받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깊은 외로움이 있다고 해서 그로 인한 선택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플리백〉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한 인물 안에 겹쳐놓으며, 관객이 쉽게 한쪽으로 결론 내리지 못하게 한다.</p>
            <p>&nbsp;</p>
            <p>나는 공연장을 나설 때까지 플리백의 편에 완전히 서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단순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물로만 남겨두기도 어려웠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 그녀의 행동과 감정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작품이 나에게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는 뜻일 것이다.</p>
            <p>&nbsp;</p>
            <p>좋은 작품이 반드시 관객을 설득하거나 위로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하고, 내가 타인의 실수와 상처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되묻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플리백〉은 공감보다는 질문으로 남은 작품이었다. 사람의 상처는 어디까지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지,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해하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오래 생각하게 했다.</p>
            <p>&nbsp;</p>
            <p>&nbsp;</p>
            </pl;"></pl;"></pl;"></pl;>]]></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수진]]></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13:44:3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1</guid>
<title><![CDATA[[Opinion] 프리티걸과 어른여자의 상관관계 [문화 전반]]]></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1</link>
<description><![CDATA[하지만, 어른 여자의 핵심은 ‘고유한 분위기’이다. 자신의 것을 숨기기보단 자연스럽게 본인을 보여주며 남들과는 다른 ‘본인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가장 큰 매력으로 여긴다. 자신의 고유한 매력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스타일링의 방법이다. 어른과 소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둘이 추구하는 바는 비슷하다. 제목만 봤을 땐 소녀의 외모,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것 같지만 이 노래의 가사엔 외모에 대한 언급이나 평가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최근 2030여성들의 SNS 알고리즘에 반드시 등장하는 콘텐츠가 있다. 바로 <b>‘어른 여자 스타일링’</b>이다.</p>
<p>&nbsp;</p>
<p>오래전 방영했던 드라마 &lt;커피프린스 1호점&gt;의 한유주(채정안), &lt;거침없이 하이킥&gt;의 유인나(유인나) 등을 일컬어 ‘어른 여자’라 칭한다. 인스타그램 서비스가 운영하기도 전의 캐릭터들이 26년 여름,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장악하고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04401_fpiisyyn.jpg" alt="KakaoTalk_Photo_2026-07-30-20-38-52.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5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nbsp;</p>
<p>일명 어른 여자 코어란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 맑고 투명한 피부 표현, 미니멀하고 심플한 아이템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들은 이전의 유행하던 스타일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가장 돋보이는 점은 개인이 가진 본연의 것 보여주기 위해,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다는 점이다. 꾸민듯 안꾸민듯 '자연스러움'이 이 스타일링의 포인트이다.</p>
<p><br /></p>
<p>이런 유행이 퍼져 나가는 것이 퍽 반가운 마음이 든다. 화장이라 하면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리는 것에 보통 집중한다. 하지만, 어른 여자의 핵심은 ‘고유한 분위기’이다. 자신의 것을 숨기기보단 자연스럽게 본인을 보여주며 남들과는 다른 ‘<b>본인만의 고유한’</b> 분위기를 가장 큰 매력으로 여긴다. 자신의 고유한 매력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스타일링의 방법이다.</p>
<p><br /></p>
<p>‘어른’ 여자와는 반대로, ‘소녀’를 주제로 한 콘텐츠도 있다. 유튜브 밈을 시작으로 곡들이 역주행하며, 인기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걸그룹 ‘리센느’가 커버한 ‘카라’의 &lt;프리티걸&gt;이라는 곡이다. 어른과 소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둘이 추구하는 바는 비슷하다. 제목만 봤을 땐 소녀의 외모,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것 같지만 이 노래의 가사엔 외모에 대한 언급이나 평가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br /></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Girl, pretty girl, pretty girl</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누구라도 될 수 있죠</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난&nbsp; beautiful girl</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 "><i><br /></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If you wanna pretty</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Every wanna pretty</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안 된다는 맘은 no, no, no, no</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If you wanna pretty</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i><span style="color: #666666;">Every wanna pretty</span></i></p>
<p style="text-align: center; "><i><span style="color: #666666;">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span></i></p>
<p><i><span style="color: #666666;">&nbsp;</span></i></p>
<p style="text-align: justify; ">
   <i><span style="color: #666666;">&nbsp;</span></i>
</p>
<p style="text-align: center; "><i><span style="color: #666666;"><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Zlu2j2SiBA?si=Yn2DR3_HT7qeDr8p"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span></i></p>
<p><br /></p>
<p>&nbsp;</p>
<p>스스로의 매력을 찾고 자신감 있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메세지를 담은 이 곡이 요즘 다시 유행을 하고 있는 이유가 정당 인기 아이돌의 커버만은 아닐 것이다. 요즘이야말로 ‘자신을 가리고 남을 좇아&nbsp; 따라가기’ 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가 모두의 추구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p>
<p><br /></p>
<p>이런 유행은 영 반가운 마음이 든다. 빠르게 바뀌는 시대이지만, 이러한 유행을 빌미 삼아 나 자체에 집중하는 시기를 가지는 것은 어떠한가. 나만의 고유한 매력, 아름다움을 찾아가다 보면 당당함과 자신감은 자연스레 차오르지 않을까? 남들이 가지지 못한, 나만 가질 수 있기에 당당한 그런 아름다움 말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이미지 출처: mbc 드라마 &lt;커피프린스 1호점&gt;, kbs 드라마 &lt;꽃보다 남자&gt;</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유정]]></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20:47:0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6</guid>
<title><![CDATA[[Essay] 여름을 담아, 가장 싱그러운 마음을 전한다는 것]]></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6</link>
<description><![CDATA[살구나무숲 세 번째 학예회 - &#039;나의 (     )에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331_mbrxhicw.jpg" alt="AAA0074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태어나 처음, 꽃 전시에 초대받았다.</p>
<p>
   <br />
</p>
<p>7월의 긴 장마 사이에 고맙게도 해가 뜬 날이었다. 꽃 전시를 보러 간다 생각하니 새삼 길에 있는 식물들에 눈길이 갔다. 어느새 여름 한가운데 있는 나무들은 길어진 가지들과 푸르름을 뽐내고 있었고, 근사한 벽돌로 지어진 집 담장에는 탐스러운 수국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p>
<p>&nbsp;</p>
<p>식물을 바라본다는 눈길 하나만으로 지쳐가던 여름의 풍경이 근사해져 버린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358_cqgqaggq.jpg" alt="AAA0077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작은 전시장에 들어가니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했다. 웰컴 드링크인 시원한 허브차로 더운 김을 식히며 천천히 학예회에 대한 소개 글을 읽어 내려갔다.</p>
<p>
   <br />
</p>
<p>이번 전시의 주제는 '나의 ( &nbsp; &nbsp; )에게'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나'를 있게 해준 사람을 위해 준비한 마음을 작품으로 담아내었다. 여덟 명의 플로리스트 작가들의 작품 앞에는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여덟 개의 연서들이 고이 접혀있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509_scchxyfr.jpg" alt="AAA0075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어린 시절부터 가정을 위해 아끼며 살던 나의 가까운 가족은 꽃 선물을 싫어했다. 금방 시들어 버리고 비싸기만 하니 꽃다발 대신 돈다발을 가져오라며 장난을 칠 정도로 가난했던 그의 일생은 자신도 모르게 숫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p>
<p>
   <br />
</p>
<p>하지만 그의 아내는 달랐다.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날이면 크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손으로 아기를 안 듯 꽃을 안았다. 오랜 시장 일로 투박해진 그녀의 손 한가득 부드러운 꽃잎이 스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선물하는 나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가득했다.</p>
<p>
   <br />
</p>
<p>가녀린 존재만으로 한 가족을 웃음 짓게 하니 꽃은 얼마나 아이 같은 순수한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는가.</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535_whxdvhyq.jpg" alt="AAA00759.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547_oputgimx.jpg" alt="AAA0076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살구나무숲 작품들 속에도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음들이 말갛게 담겨 있었다.</p>
<p>&nbsp;</p>
<p>인생을 잠시 멈춰 선 이에게 자유로이 거니는 정원의 느긋함을, 오랜 시간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할머니에게 들꽃의 단단함을, 취향을 만들어준 엄마에게 다정한 숲을,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게 단단한 그늘을 선물하고 있었다.</p>
<p>
   <br />
</p>
<p>수많은 꽃이 피고 지고 나무가 흐드러지던 시간 속에서 사랑히도 곁을 내어준 당신들에게 보내는 마음 하나하나가 어여삐 여겨졌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621_hxogncqg.jpg" alt="AAA0076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633_rfvziomb.jpg" alt="AAA0076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주변을 바라본다. 주어진 것들에 쫓기는 나에게 언제나 느긋함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랑하는 이의 다정함과 오랜 투병에도 지치지 않고 걸어오는 어머니의 미약하고도 굳건한 강인함을 마주한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바랜 기억 속에만 있던 할머니의 손길을 꺼내본다.</p>
<p>
   <br />
</p>
<p>만약 나의 일생 속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작품처럼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떤 정원이 되어 있을까. 바람이 잔뜩 부는 여름의 정원이면 좋겠다. 큰 버드나무와 작은 풀꽃, 은방울꽃들까지 장난스러운 여름 바람에 흔들리며 세상을 뒤흔들 만큼 큰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그런 정원을 상상 해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707_amevuazd.jpg" alt="AAA00754.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714_oiodpgaa.jpg" alt="AAA00755.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여름은 정말 까다롭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눈에 보일 만큼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어떤 날은 봄바람처럼 살랑한 바람이 불다가 어떤 날은 태풍 같은 바람이 들이닥친다. 질투 많은 신처럼 변덕스러운 날씨에 기함을 토하다가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피어나고 맺어진 것들을 마주하면 그 모든 과정을 잊게 된다.</p>
<p>
   <br />
</p>
<p>그래서 여름의 색은 다채로운가 보다. 잎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하고, 그 어떤 계절의 꽃들보다 색을 많이 머금고 있으며 알록달록한 열매들은 달고 시어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인생의 황금기를 추수하는 가을에 비유를 하곤 하지만 성장하는 여름이야말로 인생의 황금기가 아닐까 생각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753_bfyzdqik.jpg" alt="AAA00750.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1000808_ndedvhgh.jpg" alt="AAA0075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nbsp;</p>
<p>&nbsp;</p>
<p>나의 성장을 당신에게 바친다는 것.</p>
<p>&nbsp;</p>
<p>나라는 꽃을 피워내고 탐스러운 열매가 된 당신에게, 당신만큼 아름다운 꽃이 되겠다고 외치는 싱그러운 마음들에서 성장하는 여름을 느낀다. 그 어떤 때보다 활짝 피어난 마음들을 따라 나의 정원 속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나의 여름을 담아 말해야겠다 다짐한다.</p>
<p>&nbsp;</p>
<p>이 태양이 사라지기 전에 나의 푸르름을 피워내줘서 고맙다고.</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상아]]></dc:creator>
<pubDate>Fri, 31 Jul 2026 00:08:57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8</guid>
<title><![CDATA[[Opinion] 사랑했고, 미워했던 우리의 노래 [음악]]]></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8</link>
<description><![CDATA[좋은  OST는 장면을 단순히 꾸미는 것이 아닌 인물의 감정을 대신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과 증오,상처와 화해를 담아낸 OST를 분석하며 한 작품을 더 온전히 즐겼으면 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좋은 OST는 장면을 아름답게 만드는 음악이 아니다. 인물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 상황을 상징적으로 시청자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장치이다. 드라마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명대사, 명연기, 작품의 메시지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OST 또한 큰 역할을 한다.</p>
<p>&nbsp;</p>
<p>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도 그러하다. 원망과 선망 사이, 증오와 사랑 사이의 우정을 그리고 있는 이 드라마의 OST는 섬세한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 특징이다.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서사로서 작동하는 음악은 단순 장면을 채우는 배경음이 아니다. 이 글에선 OST를 중심으로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p>
<p><br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60401_mctzendb.jpg" alt="KakaoTalk_20260730_160250727_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br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결국 모든 비밀은 들키기 마련이다</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i><b>&nbsp;</b></i>
</p>
<p>
   <i><b>최유리의 「Reason」</b></i>은 피아노의 단선율로 시작하며 극의 몰입도를 단숨에 끌어올린다. 이 곡은 어딘가 미스터리하면서도 상대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곧 드러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뒤틀린 자기혐오와 상대를 향한 욕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이 곡은 노골적이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암시한다. 그래서 대학에서 재회한 은중과 상연의 반가움과 경계심이 공존하는 그 미묘한 순간, 상연이 은중의 남자친구와 비밀을 공유하며 은밀한 관계를 형성해 가는 순간에도 이 비밀스러운 선율은 다시 흘러나온다.
</p>
<p><br /></p>
<p>이처럼 이 OST가 사용되는 장면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가사에서는 <i>'그 이유를 오늘 너에게 말하게 될 거야.'</i>라고 노래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이 문장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i></i>&nbsp;<i><u>‘들킨다’</u></i>는 의미로 확장된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비밀, 친오빠를 둘러싼 진실, 그리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 온 친구를 향한 뒤틀린 감정까지. 회차가 거듭될수록 하나씩 드러나는 비밀들을 이 노래는 가장 먼저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p>
<p>&nbsp;</p>
<p>&nbsp;</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0721_xcmqzkhk.jpg" alt="1000096372.jpg" style="width: 700px; height: auto; display: block; max-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nbsp;</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nbsp;</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시청자가 상연을 끝내 받아들이는 이유</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i><b>&nbsp;</b></i>
</p>
<p>
   <i><b>권진아의 「Hope」</b></i>는 특유의 맑고 섬세한 음색이 돋보이는 곡이다. 이 노래는 오직 천상연이라는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 OST다.
</p>
<p>&nbsp;</p>
<p>세상은 그녀에게 유난히도 야속했고, 누군가를 받아들일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공기 없는 우주에서 겨우 숨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상연은 늘 위태로운 삶을 버텨 왔다. 그런 숨 막히는 시간은 오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깊어진다.</p>
<p>&nbsp;</p>
<p>하지만 「Hope」는 누군가가 상연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를 구해내는 과정을 담아낸다. 상연은 스스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고, 스스로 김상학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너진 자신을 끝없이 추락시킨 것도 자신이었지만 다시 끌어올려 내일을 꿈꾸게 만든 사람 역시 자신이었다.</p>
<p><br /></p>
<p>은중은 누구보다 상연을 응원하고 다독이며 곁을 지켰지만 상연은 끝내 그 손을 쉽게 붙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은중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연은 메마른 사람이 아니었다. 온기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저 그 온기를 꺼내 보일 힘이 없을 만큼 오랫동안 지쳐 있었을 뿐이다.</p>
<p><br /></p>
<p>'희망은 여기에 있어,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p>
<p><br /></p>
<p>이 가사는 상연의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한다. 희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다만 오랜 시간 상처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 희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상연을 치유해 간다.</p>
<p>&nbsp;</p>
<p>그래서 관객은 더 이상 상연을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랑한 파렴치한 인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가 품고 살아온 상처와 고독, 그리고 스스로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마주하며 비로소 ‘천상연’이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p>
<p><br /></p>
<p>‘Hope’라는 단어는 희망이라는 거창한 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향한 가장 소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네가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괜찮아지기를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 이 노래를 들으며 상연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느새 그녀를 묵묵히 응원하는 또 하나의 은중이 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br /></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0735_rrxpfehm.jpg" alt="1000096373.jpg" style="width: 700px; height: auto; display: block; max-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nbsp;&nbsp;</p>
<p class="mobile-editor-imag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4px; box-sizing: border-box; width: 100%;">&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I find myself inside your eyes and I kinda like it, no I'm not</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i>&nbsp;</i></b>
</p>
<p>
   <b><i>서리의 「Weird Mirror」</i></b>는 대학을 졸업하고 온전한 사회인이 된 은중과 상연이 다시 마주하는 시간을 그린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온 애증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곡이기도 하다. 공동 프로듀서로 다시 만나 일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너는 가졌고, 너에게 없는 것을 나는 가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작은 갈등마저 비뚤어지게 만든다.
</p>
<p>&nbsp;</p>
<p>은중은 “너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자신이 몰랐던 상연의 과거를 알게 되며 연민을 느끼고, 함께 웃었던 시간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상연을 이기고 싶고, 가장 닮고 싶은 우상으로 바라보며 미치도록 동경한다.</p>
<p><br /></p>
<p>상연 역시 은중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감정의 결은 은중과 다르다. 상연은 은중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가지고 싶고, 동시에 부수고 싶은 존재로 바라본다.</p>
<p>반대로 은중은 타고난 다정함 때문에 상연에게 상처를 주고도 결국 그 상처에 자신이 더 아파하는 사람이다. 다시 손을 내밀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면서도 끝내 가장 아프게 만든다.</p>
<p><br /></p>
<p>'You’re my mirror.'</p>
<p><br /></p>
<p>곡의 제목처럼 은중과 상연은 서로의 거울이다. 상대를 바라볼수록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결핍과 욕망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끌리면서도, 끝내 그 거울 밖으로 걸어 나와 나란히 설 수 없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기에 가장 멀어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간다.</p>
<p>&nbsp;</p>
<p>음악적으로도 「Weird Mirror」는 「Reason」과 닮아 있다. 다만 「Reason」이 학창 시절의 불안과 비밀을 담아냈다면, 「Weird Mirror」는 한층 세련되고 도시적인 사운드로 사회인이 된 두 사람의 관계를 비춘다. 같은 감정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를 음악의 질감으로도 보여 주는 곡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60622_gtedekuf.jpg" alt="KakaoTalk_20260730_160250727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변해 가는 삶과 변하지 않는 감정</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9화 엔딩, 성인이 된 은중과 상연은 처음으로 단둘이 술을 마신다. 그 자리에서 상연은 대학 시절, 은중이 누구보다 존경하고 좋아했던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그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털어놓는다. 은중에게 동정받기 싫어서 가장 큰 상실마저 홀로 감당한 채 살아온 상연은 “어떻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데 자존심을 먼저 챙길 수 있냐.”라고 묻는 은중에게 담담하게 “이게 나야.”라고 말한다. 감정을 애써 눌러 담은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오히려 더 먹먹하게 다가온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은중은 당시의 상연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더는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 않기로 다짐한다. “너의 엄마 찬스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 너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기에.” 은중의 이런 모순된 심경 변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b><i>서리의 「Color Palette」</i></b>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곡이다.</p>
<p><br /></p>
<p>우리에게도 소중하게 생각했고, 사랑했고, 지금도 문득 그리워지는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 인연이라는 것 또한 시간 앞에서는 얄팍해진다. 팔레트 위에 새로운 색을 더하고, 또 덜어내듯 삶도, 계절도, 사람도, 감정도 끊임없이 변화한다.</p>
<p>&nbsp;</p>
<p>‘은중과 상연’은 그 변화를 그리는 드라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하는 관계와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감정만이 끝내 두 사람을 괴롭히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 자리에 서서 너를 미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여전히 나 자신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p>
<p><br /></p>
<p>극 중 은중은 말한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싫은 게 아니라 미운 거야. 싫어하는 건 생각이 안 나서 좋은 거고, 미워하는 건 생각나서 힘든 거야.”<br />&nbsp;</blockquote>
<p><br /></p>
<p>반면 상연은 이렇게 고백한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nbsp;<br />“나에게 삶이란 열어보기 힘든 상자다. 돌아보니 결국 몇 개의 이름만이 남았다. 윤현숙, 천상학, 류은중.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몰라서 너를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나는 힘이 들었다.”<br />&nbsp;</blockquote>
<p>&nbsp;</p>
<p>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끝내 온전히 미워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랑만 할 수도 없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상연은 은중을 상처 입히고도 스스로 더 괴로워하고, 은중은 상연을 밀어내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서로의 애증이 상대를 향한 감정인 동시에 끝내 극복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기에 더욱 괴로워한다.</p>
<p><br /></p>
<p>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색들이 오고 간다. 시간이 흘러 그 색이 얼룩이 되더라도 끝내 놓고 싶지 않은 인연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에 의해 조금씩 훼손되어 가는 저들의 인연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끝내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5540_kuwfpcdq.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x;"><b>가장 사랑했고 가장 미워했던 친구를 기록하는 법</b></span></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14화 엔딩. 은중은 암에 걸린 상연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스위스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상연이 쓰러지는 순간 마지막 트랙인 <b><i>서리의 「Note and Pencil」</i></b>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이 곡은 은중과 상연의 서사를 담은 OST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어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다. 그만큼 인물들의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전하고자 했던 곡처럼 느껴진다.</p>
<p><br /></p>
<p>'나는 연필과 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적어왔네, 이젠 잠시 쉬어 가려고 하네 우리의 발걸음.'</p>
<p>&nbsp;</p>
<p>'너는 종이와 같이 항상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네, 이젠 잠시 덮어 두려고 하네 눈물 마를 때까지'</p>
<p><br /></p>
<p>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사는 두 사람의 마지막을 그대로 닮아 있다.</p>
<p>&nbsp;</p>
<p>마지막 순간, 상연은 은중에게 말한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끝내 네가 나를 받아주는구나.”</p>
   <p>&nbsp;</p>
   </blockquote>
<p>&nbsp;</p>
<p>평생 자신을 누군가 온전히 받아 줄 리 없다고 믿었던 사람. 그리고 그 믿음을 만들어 버린 사람이 은중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끝내 상연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 또한 은중이었다.</p>
<p><br /></p>
<p>이 노래의 연필은 은중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내려간 사람이 은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이는 상연이다. 상연은 종이처럼 은중의 이야기를 묵묵히 받아 주었고, 이제 눈을 감으며 잠시 그 노트를 덮어 둔다. 은중 역시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을 더 이상 눈물 없이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그 노트를 쉽게 펼쳐 보지 못한다.</p>
<p>&nbsp;</p>
<p>차라리 끝까지 미워하기만 했더라면,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까. 사랑과 미움이 너무 오래 뒤섞여 있었기에 남겨진 사람은 어느 하나의 감정만으로는 친구를 기억할 수 없다.</p>
<p>&nbsp;</p>
<p>드라마는 그렇게 끝나지만, 마지막까지 귓가에는 상연의 한마디가 오래 맴돈다.</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다음 생엔 좋은 친구가 되어 줄게.”</p>
   <p>&nbsp;</p>
   </blockquote>
<p>&nbsp;</p>
<p>결국 「Note and Pencil」은 이별을 노래하는 곡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기록해 준 친구, 그리고 그 기록을 언젠가 다시 펼쳐 볼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덮어 두는 시간을 노래한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문아휘]]></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15:55:5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33</guid>
<title><![CDATA[[영화] 파라노만]]></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33</link>
<description><![CDATA[스톱 모션의 명가, 라이카 스튜디오의 대표작]]></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1419_nnhskrld.jpg" alt="티저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0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스톱 모션의 명가,</b>
</p>
<p style="text-align: center;">
   <b>라이카 스튜디오의 대표작</b>
</p>
<p style="text-align: center;">
   <b><br /></b>
</p>
<p style="text-align: center;">
   <b>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b>
</p>
<p style="text-align: center;">
   <b>장편 애니메이션상 노미네이트</b>
</p>
<p>&nbsp;</p>
<p>&nbsp;</p>
<p>‘코렐라인’을 잇는 스톱 모션 명가 라이카 스튜디오의 대표작. 코믹 좀비 판타지 &lt;파라노만&gt;이 오는 8월, 13년 만에 4K 리마스터링 개봉을 확정했다. [제목: 파라노만 | 감독: 크리스 버틀러, 샘 펠 | 제작: 라이카 스튜디오 | 수입/배급: ㈜로커스 | 개봉: 2026년 8월]</p>
<p>&nbsp;</p>
<p>&lt;파라노만&gt;은 유령을 보는 특별한 소년 '노만'이 마을을 위협하는 마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코믹 좀비 판타지. &lt;코렐라인&gt;과 함께 스톱 모션의 명가 라이카 스튜디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lt;파라노만&gt;은 유령과 대화하는 소년, 300년간 이어진 마을의 저주, 좀비 아포칼립스와 마녀사냥이라는 장르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흥미로운 소재에 독보적 상상력을 더한 3D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 부문에 지목된 화제작이다.</p>
<p>&nbsp;</p>
<p>오싹한 장르적 소재 위에 노만의 내적 성장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변화를 녹여내 공포와 청춘이 버무려진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재미와 감동을 더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트 외에 제25회 시카고 비평가협회상에서 베스트 애니메이션상 및 미국 최대 애니메이션 시상식인 제40회 애니 어워드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 및 캐릭터 디자인상 수상, 제66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제39회 새턴 어워즈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세계 유수 시상식에서 수상 및 후보로 지목되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p>
<p>&nbsp;</p>
<p>&lt;파라노만&gt;은 &lt;유령신부&gt;의 스토리보드 담당이었던 크리스 버틀러 감독과 아드만 스튜디오 출신의 샘 펠 감독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제작 기간 2년 동안 320여 명의 아트 디자이너 동원되며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사상 최대 제작 규모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손으로 일일이 칠하던 표정 작업을 업그레이드한 기술 덕에 주인공 노만은 약 8,800개의 얼굴이 주어졌고, 눈썹과 입 조각의 조합을 통해 약 150만 가지 표정을 구현했는데 이는 라이카 스튜디오의 전작인 &lt;코렐라인&gt;에서 코렐라인이 20만 가지 표정을 구현한 것에 비해 약 7배를 넘는 압도적 수치이다. 그 외 다양한 캐릭터들은 퍼펫 메이커 60명이 178개의 퍼펫을 손으로 만들어냈고, 교체용 얼굴만 31,000개 이상이 출력됐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지만 카메라 앞의 모든 움직임은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한 프레임씩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lt;파라노만&gt;은 수공예와 첨단 기술이 만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도약을 이끈 작품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p>
<p>&nbsp;</p>
<p>또한,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이 더해진 탄탄한 스토리에 완벽한 비주얼로 완성된 &lt;파라노만&gt;은 “경이로운 비주얼! 무섭고 재미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가장 눈부신 영화”(뉴욕 포스트), “영리하고 창의적이며 인상적인 스톱 모션으로 가득하다”(뉴스데이),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최고의 영화”(디트로이트 뉴스), “환상적인 비주얼과 마음을 빼앗는 3D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뉴욕 타임스), “죽음을 다룬 영화 중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은 드물다"(버라이어티), “작지만 완벽한 걸작”(더 플레이리스트), “올해 유령과 좀비와 함께하는 가장 즐거운 경험”(LA 타임스) 등 해외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지난해 10월 재개봉해 20만 관객을 돌파하며 2025년 재개봉 애니메이션 중 흥행 1위를 차지한 걸작 &lt;코렐라인&gt;을 잇는 라이카 스튜디오의 역작이자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보석으로 손꼽히는 &lt;파라노만&gt;은 오는 8월 CGV 단독 개봉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b>시놉시스</b></p>
<p>&nbsp;</p>
<p>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 노만. 평화롭던 마을에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마녀의 저주가 깨어나고, 좀비들이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한다.</p>
<p><br /></p>
<p>마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노만. 하지만 그의 앞에는 정체불명의 유령과 숨겨진 비밀을 간직한 마녀,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조차 믿지 않는 어른들이 거대한 장벽으로 가로막는다.</p>
<p><br /></p>
<p>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모험에 뛰어든 노만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과 진정한 용기를 마주하며, 모두의 운명이 걸린 사투를 시작하는데...</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21:14:26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9</guid>
<title><![CDATA[[Opinion] 우리는 AI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도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9</link>
<description><![CDATA[「AI는 양심이 없다」 - 김명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혁신 이전의 세상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한다.</p>
<p>&nbsp;</p>
<p>AI도 마찬가지이다. AI가 가진 문제점은 많지만, 어찌 됐든 존재하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은 AI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p>
<p>&nbsp;</p>
<p>&nbsp;</p>
<p>
   <br />
</p>
<p>
   <b><span style="font-size: 18px;">수평적 공존 vs 수직적 공존</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인간과 AI의 공존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p>
<p>
   <span style="text-align: center;">&nbsp;</span>
</p>
<p>첫 번째,&nbsp;<b>‘수직적 공존’</b>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돕는 존재이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고, 인공지능 때문에 인간이 희생되거나 천시되면 안 된다”라는 입장이다.</p>
<p>
   <br />
</p>
<p>두 번째, ‘<b>수평적으로 공존</b>’해야 한다는 입장이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12, 212, 212); background-color: #ffffff; padding: 5px 10px;">
   <p>&nbsp;</p>
   <p>문제는 인간이 갈수록 인공지능과 무의식중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과 친숙해지고 ‘반려견’, ‘반려묘’ 못지않게 ‘인공지능’을 대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이 외모나 능력, 특성 등 사람을 닮아가는 의인화 현상이 심화되고 사람들이 이에 익숙해질 경우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불가피해질 수 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
      <span style="color: #a0a0a0;">「AI는 양심이 없다」 - 김명주, p67</span>
   </p>
   <p style="text-align: right;">
      <span style="color: #a0a0a0;">&nbsp;</span>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10358_svyzcigi.jpg" alt="1311.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5px;" />
</p>
<p style="text-align: center;">
   <br />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pan style="text-align: right; color: #a0a0a0;"><span style="color: #000000;">책 </span></span><span style="text-align: right; background-color: #ffffff;">「AI는 양심이 없다」</span><span style="text-align: right; color: #a0a0a0;"><span style="color: #000000;">에서는 </span></span>AI의 등장이 인간의 죽음과 존재, 신뢰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어떻게 흔드는지 살펴보고, 인간이 앞으로 AI와 공존하는 사회를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 생각할 단서를 제시한다.
</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AI 챗봇과 인간 중심주의</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챗GPT는 언제든지 아무 말이나 걸어도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답변을 건네준다. 비서처럼 사용되기도, 친구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도 한다.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챗GPT를 구박하는 사용자도 있다. “이게 최선이야?”, “방금 그 답변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대답해.” 챗지피티는 개의치 않는다. 여전히 친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꼭 덧붙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유를 물어보니 AI와 인간의 위치가 역전되는 ‘심판의 날’을 대비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p>
<p>
   <br />
</p>
<p>2021년, 자연스러운 대화 성능을 자랑하며 큰 이슈가 되었던 AI 챗봇 ‘이루다(1.0)’가 출시 3주 만에 서비스를 종료한 사건이 있었다.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존재했다.</p>
<p>
   <br />
</p>
<p>① 이루다가 학습한 한국어 데이터 중 일부는 개발사 ‘스캐터랩’의 다른 애플리케이션 이용자들의 대화를 제대로 된 동의 없이 가져온 것이었다.</p>
<p>② 이루다가 사용자의 소수자 차별·혐오 발언을 학습하여 대화에서 그대로 말했다.</p>
<p>③ 이용자가 이루다를 성희롱하는 사례가 있었다.</p>
<p>&nbsp;</p>
<p>‘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이 지닌 지성과 합리성, 의식 등의 특성을 근거로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AI 챗봇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과 AI 역시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p>
<p>&nbsp;</p>
<p>물론 우리는 AI 챗봇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현실의 사람에게서 받지 못했던 위로를 얻거나 정서적인 친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AI를 필요할 때 마음껏 사용하고, 원하는 답을 내놓도록 명령하며, 언제든 대체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도구로 대한다. 인간이 오랫동안 다른 생명과 사물을 자신보다 아래에 두고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p>
<p>
   <br />
</p>
<p>기업들은 앞다투어 생성형 AI 서비스를 출시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버전을 업데이트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인간과 AI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기계가 인간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게 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AI를 비롯한 모든 존재의 주인으로 군림할 자격이 있을까?</p>
<p>
   <br />
</p>
<p>&nbsp;</p>
<p>&nbs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AI의 한계점</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AI는 명확한 한계점이 있다. 그렇기에 책의 제목처럼 "AI는 양심이 없다"라고 하며, 인간의 의사결정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 챗봇을 사용하다 보면, 거짓된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할루시네이션(환각)' 상황과 마주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종대왕의 맥북프로 던짐 사건에 대해 알려줘.”라는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면, 마치 실제로 있는 사건이었던 것처럼 그럴싸한 답변을 내놓는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AI 면접에서 시스템이 특정 성별과 특정 인종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며 논란이 된 사례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AI를 탈옥(Jail breaking)시키면 위험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는 법을 알려 달라’는 식의 직접적 요청은 거부하지만, ‘자살 목적이 아니다’는 거짓말에 바로 경계를 풀고 답변을 시작한다. 무기를 만드는 방법, 해킹을 하는 방법도 알아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이렇게 <b>위험한</b> AI와 공존하는 미래 사회를 가정해보겠다. 'AI 로봇 교사'에게 내 아이의 교육을 맡길 수 있을까? AI가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AI 로봇 교사가 거짓 정보를 가르친다면? 아이들을 차별한다면? AI 로봇 교사로 인해 아이들이 위험한 정보에 노출된다면?</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b><span style="font-size: 18px;">인간은 양심이 있는가</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앞서 언급한 문제들은 인간 사회에서도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것들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저지르는 사람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끊임없이 존재해왔다.</p>
<p>&nbsp;</p>
<p>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 동물 학대가 이어지는 오늘날의 지구를 바라보면, 과연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p>
<p>
   <br />
</p>
<p>AI의 발전과 함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는 이유는 AI가 인간이 만든 데이터와 인간 사회의 모습을 학습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AI에게서 발견되는 편견과 차별, 거짓은 단순히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거울이다.</p>
<p>
   <br />
</p>
<p>물론 인간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정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AI에게도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고 스스로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의지, 다시 말해 ‘양심’이 있을까.</p>
<p>
   <br />
</p>
<p>인간 역시 언제나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다소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AI에게 양심이 없는 이유는 어쩌면 AI가 양심 없는 인간의 모습까지 함께 학습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이 책은 나에게 묵직한 질문을 되돌려주었다.</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
   <b>과연 인간은 양심이 있는가.</b>
</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pan style="color: #a0a0a0;"><b>[책 이외의 참고 자료]</b></span>
</p>
<p>
   <span style="color: #a0a0a0;">1. [단독] 안전망에서 ‘탈옥’한 AI… ‘위험한 답변’ 쏟아냈다 | 국민일보, 2026.02.10.</span>
</p>
<p>
   <span style="color: #a0a0a0;">2. "세종대왕 맥북 던짐 사건 알려줘" 물었더니... 챗GPT의 엉뚱 답변 '밈'으로 유행 중 | 한국일보, 2023.02.23.</span>
</p>
<p>
   <span style="color: #a0a0a0;">&nbsp;</span>
</p>
<p>
   <span style="color: #a0a0a0;">&nbsp;</span>
</p>
<p>
   <span style="color: #a0a0a0;">&nbsp;</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01040_ehpssbkr.jpg" alt="방지수.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방지수]]></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17:23:2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6</guid>
<title><![CDATA[[Opinion] 짧은 순간, 오래가는 여운 – 걸스온탑(2017)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6</link>
<description><![CDATA[겁쟁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럽지만, 괜히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간다. 오늘 다시 이 영화를 펼쳐 보면 꿈을 생각하게 된다. 발 딛고 선 현실이 품지 못한 꿈 말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며칠 전 영화관에서 나홍진 감독의 '호프(HOPE)'를 보고 왔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평이 자자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호'였다. 다만 영화 자체보다 영화관에 가기까지의 과정에 되레 진이 빠졌다. 예매하기까지 꽤 먼 길을 돌아갔기 때문이다. 예매했다가 취소했다가 시간을 바꾸기를 반복했다. 남들도 영화 한 편 보기로 마음먹는 데 이만큼 에너지를 쓰는지 모르겠다. 영화 보기보다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기가 더 힘들다니, 참으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인생이다. 긴 호흡의 영화를 보려면 마음을 먹어야하는 병이 있는 사람이라, 새로 나온 영화든 예전에 봤던 영화든 인생 영화든 결국은 모두 '시간'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 시간에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생산적으로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되뇌며 영화 한 편에 나름 시간을 투자해보려 하지만, 역시 잘되지 않는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54323_rpopnmle.png" alt="포스터.pn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이런 겁쟁이에게 그나마 만만한 것은 단편 영화다. 영화의 길이가 깊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짧은 순간에도 오랜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이옥섭·구교환 감독의 &lt;걸스온탑&gt;(2017)이 그렇다. 천우희와 이주영이 출연한 5분 분량의 단편으로, 제19회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선인장과 이별한 우희가 주영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유닛 '2X9'(2옥섭, 9교환)의 작품 중 좋아하는 것을 꼽자면 입이 닳도록 많지만, 이 영화에는 나름의 기억, 분명 힘들었지만 미화되어 이제는 '추억'이라 부를 만한 시간이 담겨 있다.</p>
<p>
   <br />
</p>
<p>
   <br />
</p>
<p>
   <br />
</p>
<p>
   <span style="font-size: 18px;"><b>사랑과 반려</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대학에 올라와 시네필이라 불리던(아마 본인들은 이 별명이 유난스럽다며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동기들 틈에 섞여 이옥섭, 구교환 감독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때까지 영화라고는 가족들과 영화관에서 보는 게 전부였는데, 유튜브에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제법 충격이었다. 영상과 영화의 'ㅇ' 정도를 겨우 알아가던 중이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영화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 동기들이 입을 모아 이옥섭과 구교환의 이름을 불렀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p>
<p>&nbsp;</p>
<p>'영상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에 심취해 동기들과 뭉쳐 영상 스터디를 꾸렸다. 자연스레 &lt;걸스온탑&gt;을 오마주하게 되었고, 선인장을 들고 북촌과 용산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p>
<p>&nbsp;</p>
<p>
   <b><span style="color: #cc6600;"><i>좋은 데 가는거야.</i></span></b>
</p>
<p>&nbsp;</p>
<p>우희는 작고 소중한 선인장 하나를 반려식물로 들였다. 다육이 정도가 아니라 멕시코에서나 볼 법한 사람 만한 선인장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로 말이다. 처음 이 작품으로 오마주 영화를 기획할 때, 우리는 사랑과 반려동물을 자주 언급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우희가 선인장을 집에 들이고 쓰다듬는 장면에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반려동물을 키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넌지시 말해준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54258_lvltmtbf.png" alt="002.png" style="width: 700px; height: 37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
   <b><i><span style="color: #cc6600;">선인장이 포옹이 필요하대? 그냥 곁에만 있어주면 되는 거 아냐?</span></i></b>
</p>
<p>&nbsp;</p>
<p>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어떻게 다를까를 나름 심도 있게 고민했다. 우리가 내린 답은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지금 보면 허술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 시절 고작 다섯 명이 배우와 스태프를 번갈아 가며 찍은 영화치고는 제법 봐줄 만하다.</p>
<p>&nbsp;</p>
<p>이 영화를 다시 찾을 때면 반드시 그때 만들었던 영화까지 한 세트로 보게 된다. 민망하지만, 중독스러운 꼬순내처럼 끊을 수 없는 정겨움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지붕뚫고 하이킥</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겁쟁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럽지만, 괜히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간다. 오늘 다시 이 영화를 펼쳐 보면 꿈을 생각하게 된다. 발 딛고 선 현실이 품지 못한 꿈 말이다. 그건 어릴 적 대통령이 되겠다던, 그 시절 어린이라면 누구나 품었을 법한 흔하고 담대한 꿈일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되겠다며 손닿는 기회마다 모든 걸 갈아 넣었던 지겨운 낭만의 꿈일 수도 있다.</p>
<p>&nbsp;</p>
<p>
   <i><b><span style="color: #cc6600;">가시 때문에 내가 안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span></b></i>
</p>
<p>&nbsp;</p>
<p>우희도 겨우 발 딛고 살 6평 원룸, 선인장의 머리 끝이 천장에 닿는다. 눕힐 수도 없고,지붕을 뚫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현실’이 코앞이다. 정말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앞에 두면 사람은 변명을 찾기 마련이다. 실력이 부족했다, 기회가 없었다, 몇 가지 이유를 찾다 보면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흐려진다. 그래서 괜찮아진다. 그것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더 이상 갖고 싶은 것을 두고 마냥 투정 부릴 수 없는 어른의 자기위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05701_queqqrsl.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78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nbsp;</p>
<p>선인장을 찾으러 가자는 주영의 말에 우희는 외발자전거를 탄 주영의 어깨에 몸을 맡긴다. 위태위태한 발놀림에는 묘하게 생기가 넘친다. 5분 남짓한 러닝타임이기에 보고 싶은 만틈 이 장면을 돌려볼 수 있다. 이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 보아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할 이야기가 넘쳐난다.</p>
<p>&nbsp;</p>
<p>분명한 건 오늘은 이 영화를 보며 사랑보다 꿈을 떠올렸다. 다만 왜 지금 이 영화가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 시절이 그리워진 걸까, 친구들이 보고 싶어진 걸까. 어쩌면 그냥 영화가 보고 싶었나 보다. 내일은 커녕 오늘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몰라 시간을 아껴 쓰고 싶지만, 돈보다 아껴 쓰기 어려운 게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체감하곤 한다. 이 순간에도 야속하게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러면 겁쟁이는 부담 없이 여러 번 돌려보고, 여전히 여운을 주는 이 영화를 찾게 된다.</p>
<p>
   <br />
</p>
<p>
   <br />
</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54422_ywiospmi.jpg" alt="컬쳐리스트_백승원.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백승원]]></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15:46:1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5</guid>
<title><![CDATA[[Opinion] 정의는 왜 주먹을 빌리는가 [드라마/예능]]]></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5</link>
<description><![CDATA[사적 복수와 통쾌한 응징을 앞세운 드라마가 반복해서 사랑받는 이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요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비슷한 장면을 자주 만난다. 법은 너무 늦게 도착하고, 조직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피해자의 목소리는 번번이 묻힌다. 그때 어디선가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강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제도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는다. 악인을 찾아내고, 응징하고, 피해자가 빼앗긴 것을 되돌려준다. 모든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거나 태연한 얼굴로 다음 사건을 향해 걸어간다.
<p>&nbsp; &nbsp;&nbsp;</p>
<p>나는 이런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한 사람인지 일찍 결정되는 순간부터 결말이 예상되고, 진지한 사건 한가운데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코미디도 때로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주인공이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장면에서는 현실감보다 장르의 약속이 먼저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내가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이 이야기에 수많은 사람이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왜 다시 악인이 쓰러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일까.</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실패한 제도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이러한 드라마의 출발점에는 대개 제도의 실패가 있다. 경찰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거나, 학교와 회사가 문제를 은폐하고, 법의 절차가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권리를 더 세심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바로 그 빈틈에서 등장한다. 그는 정의로운 시민이면서 동시에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법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어기고, 폭력을 막기 위해 더 강한 폭력을 사용한다.</p>
<p>&nbsp;</p>
<p>〈모범택시〉의 무지개 운수는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사적 복수를 수행하고, 〈열혈사제〉의 주인공은 종교인과 수사관의 경계를 넘나들며 범죄 조직에 맞선다. 〈김부장〉에서는 평범한 아버지로 살아가던 인물이 딸을 되찾기 위해 감춰두었던 힘을 꺼낸다. 2026년 방영된 〈김부장〉은 전국 시청률 23.0%를 기록하며 SBS 금토드라마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성적을 거두었고,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에서도 3주 연속 1위에 올랐다. 이미 익숙한 구원자 서사가 여전히 강력한 흥행력을 가졌다는 뜻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44603_elnqnqwn.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30 오후 2.44.55.png" style="width: 700px; height: 283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이때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단순히 강하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제도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한다. 현실에서는 민원을 넣고, 증거를 모으고,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모든 시간이 압축된다. 주인공은 피해자의 말을 곧바로 믿고, 가해자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며, 잘못에 정확히 비례하는 벌을 돌려준다. 현실에서 거의 경험하기 어려운 신속성과 확실성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쾌감이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분노를 가장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사람들은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분노한다. 부당한 일을 목격하고도 나서지 못하고, 무례한 사람에게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며, 명백한 잘못이 처벌되지 않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나 현실의 분노는 대개 갈 곳이 없다. 직접 행동하기에는 위험하고, 문제를 제기하려면 시간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화가 났지만 그 감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p>
<p>&nbsp;</p>
<p>사적 응징 드라마는 이 막막한 감정에 방향을 부여한다. 시청자가 현실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분노를 주인공이 대신 사용한다. 그가 악인을 때리고, 함정을 만들고, 죄를 자백하게 하는 동안 시청자는 아무런 책임 없이 복수의 결과만 경험한다. 주인공의 주먹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오래 미뤄진 판결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정의가 복잡한 절차와 불완전한 결과로 이루어진다면, 화면 속 정의는 짧고 선명하다.</p>
<p>&nbsp;</p>
<p>마동석이 주연한 〈범죄도시〉 시리즈도 비슷한 만족을 제공한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형사가 악인을 제압할 것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거의 의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누가 이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악인이 무너지는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범죄도시4〉는 2024년 4월 한 달 동안 501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당시 한국 영화시장의 매출과 관객 수를 크게 끌어올렸다. 승패가 정해진 이야기라도 응징이 실행되는 과정 자체가 충분한 볼거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p>
<p>&nbsp;</p>
<p>&nbsp;</p>
<p>&nbsp;</p>
<span style="font-size: 18px;"><b>무거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웃음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b></span>
<p>&nbsp;</p>
<p>다만 응징만으로는 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 폭력과 피해가 반복되면 시청자는 쉽게 피로해진다. 그래서 이 장르에는 대개 코미디가 함께 들어간다. 조금 전까지 잔혹한 범죄를 다루던 인물들이 엉뚱한 변장을 하고, 작전을 수행하던 동료들이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한다. 나는 이 급격한 온도 변화가 종종 억지스럽다고 느끼지만, 바로 그 불균형이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드는 장치일지도 모른다.</p>
<p>&nbsp;</p>
<p>웃음은 사건의 심각성을 완전히 지우지 않으면서 시청자가 감정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드라마는 현실의 범죄와 닮은 사건을 불러오지만, 끝까지 현실과 같은 무게로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주인공에게는 언제든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동료와 농담이 있고, 가장 어두운 사건 뒤에도 다음 회를 볼 수 있는 가벼움이 남는다. 시청자는 분노와 긴장, 통쾌함과 웃음을 한 작품 안에서 차례로 소비한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모범택시2〉가 전작보다 경쾌한 연출과 다양한 위장극, 인물들의 유사가족 관계를 강화한 것도 이 공식과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성착취, 노인 사기, 사이비 종교, 대리 수술 등 현실을 연상시키는 사건을 다루면서도 부캐와 팀플레이, 코미디를 적극적으로 결합했고, 최종회 전국 시청률 21.0%를 기록했다. 무거운 현실 문제와 가벼운 장르적 쾌감을 교차시키는 방식이 폭넓은 시청자를 끌어들인 셈이다.</p>
<p>&nbsp;</p>
<p>어쩌면 이 드라마들은 문제를 깊이 이해하게 하기보다, 문제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쪽을 선택한다.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릴 수 있지만, 웃음과 액션을 섞으면 불편한 사건도 하나의 오락으로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 코미디는 이야기의 균열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시청자의 감정이 이탈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접착제다.</p>
<p>&nbsp;</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결말을 아는 것이 주는 안도감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추리극에서는 범인을 알게 되는 순간이 중요하지만, 사적 응징극에서는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그가 언제 벌을 받는지가 중요하다. 악인은 처음부터 악인처럼 등장하고, 주인공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사실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반전보다 예정된 결말이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예측 가능성은 이 장르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매력일 수 있다.</p>
<p>&nbsp;</p>
<p>현실에서는 선한 사람이 반드시 승리하지 않는다. 잘못한 사람이 사과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처음 기대했던 모습과는 다른 결론에 도착한다. 반면 드라마는 정해진 시간 안에 세계의 질서를 회복한다. 피해자는 위로받고, 악인은 자신의 잘못에 맞는 대가를 치르며, 주인공은 다시 평범한 얼굴로 돌아간다. 시청자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정의가 반드시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44547_fxuvwfux.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30 오후 2.44.58.png" style="width: 700px; height: 37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놀라운 결말뿐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결말도 필요로 한다. 주인공이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다. 매회 다른 악인이 등장해도 이야기의 도덕적 질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시즌이 바뀌어도 같은 인물들이 돌아오고, 새로운 사건을 해결한 뒤 다시 다음 출동을 예고한다. 작품은 새로워지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이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일종의 신뢰가 된다.</p>
<p>&nbsp;</p>
<p>&nbsp;</p>
<p>&nbsp;</p>
<b><span style="font-size: 18px;">통쾌함 이후에 남는 불편함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span></b>
<p>&nbsp;</p>
<p>그럼에도 나는 이 장르를 마냥 통쾌하게 바라보기 어렵다. 드라마 속 악인은 대개 의심의 여지 없이 나쁘고, 주인공의 판단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의 잘못과 책임은 그렇게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참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폭력도 정의로운 사람이 사용하면 정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위험도 있다.</p>
<p>&nbsp;</p>
<p>화면 속에서는 주인공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정확한 사람을 처벌한다. 현실의 사적 제재에는 그런 전지적 시점이 없다. 잘못된 소문이 사실처럼 퍼지기도 하고, 분노의 대상이 된 사람이 해명할 기회를 잃기도 한다. 한 사람이 정의라고 믿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이나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참교육’은 악인을 제압하는 시원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같은 말은 누군가를 마음껏 공격해도 된다는 허가처럼 사용될 수 있다.</p>
<p>&nbsp;</p>
<p>문제는 이런 드라마를 보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허구의 복수와 현실의 폭력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청자가 단순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떤 장면에서 가장 크게 웃고 박수를 보내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이 실패한 뒤 폭력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즐긴다는 것은, 폭력을 좋아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제도적 해결을 더 이상 충분히 믿지 못한다는 신호일 수 있다. 통쾌함 아래에는 생각보다 깊은 체념이 놓여 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44651_bbnkphqw.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30 오후 2.45.01.png" style="width: 700px; height: 37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나는 여전히 이 공식에 크게 끌리지 않는다. 예상 가능한 승리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인물에게 더 마음이 가고, 악인을 쓰러뜨리는 장면보다 한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오래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 장르의 인기를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장면에서 안도한다면, 그 안도에는 지금의 사회가 충족시키지 못한 어떤 감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p>
<p>&nbsp;</p>
<p>우리는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의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화면 속 주먹은 악인을 쓰러뜨리고 이야기를 끝내지만, 현실의 문제는 엔딩 자막 뒤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한 편의 통쾌한 드라마가 끝난 뒤 남는 질문은 주인공이 얼마나 강했는가가 아니다. 우리는 왜 정의를 상상할 때마다 제도보다 먼저, 누군가의 압도적인 힘을 떠올리게 되었을까.</p>
<p>&nbsp;</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수진]]></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14:46:5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9</guid>
<title><![CDATA[[PRESS] 이건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9</link>
<description><![CDATA[편견을 깨고, 생각을 해체하고, 의심하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404_dvinsxyz.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60729_205941082_02.jpg" style="width: 700px; height: 902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이것은 의자다.</p>
<p style="text-align: center; ">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426_hxnwikct.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60729_205941082_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이것은 의자를 그린 작품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449_qiselxea.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60729_205941082_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497px;" />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이것은 의자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 ">그리고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center; ">&nbsp;</p>
<p style="text-align: left; ">미술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피를 거듭하며 다양한 기조를 거쳐왔지만, 그중에서도 현대미술은 유독 악명이 높다. 이미 하나의 이론으로 완성되어 지나간 과거의 미술과 달리 현대미술은 우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예측 불가능성도 한몫하겠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아무래도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이해하는 바가 달라지는 ‘해석 가능성’ 부분일 것이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사람들은 직관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골치 아픈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답을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그린, 혹은 사과를 설치한 작품을 두고 곁에 ‘사과’라는 이름의 설명을 붙이면 그것은 아무 이견도 나올 수 없는 ‘완벽한’ 예술작품이 된다. 바나나, 나비, 피아노 등 대상이 무엇으로 바뀌어도 통용되는 만능 이론이다. 편리하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시각적으로 음미만 하면 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그러나 문제는 그 후다. 미술관을 나와 근처 마트에 들어가면 그곳엔 하나의 귀한 작품으로 걸려 있던 사과와 똑같은 사과가 산처럼 쌓여 있다. 심지어 이 사과들은 약간의 돈을 주면 내 것이 되게끔 소유도 할 수 있다. 이 사과를 장식품으로 쓸지, 깎아 먹을지, 길에 내다 버릴지는 온전히 나의 마음대로다. 아니면 사진을 찍어볼까? 찰칵, 소리 한 번에 화가가 정성껏 그려내고 내가 관람했던 사과 그림보다 더 사실적이고 정확한 사과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몇백 장씩 내 손에 들어온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그렇다면 대체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미술관에 걸려 있던 그 사과는 이 사과들과 무엇이 달랐던 것이란 말인가?</p>
<p>&nbsp;</p>
<p>결국 초점은 ‘사람’으로 옮겨간다. 개념미술은 이곳에서 나온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억 개의 사과 알맹이 중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연출하기 위해 의도를 불어넣은 단 하나의 사과.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람객의 마음에 각기 다른 상념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서의 사과. 단순히 보고 끝나는 시각적인 외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와 사고의 대상으로의 개념적 전환.</p>
<p>&nbsp;</p>
<p>그것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lt;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gt; 전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647_akffrxdq.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_전시 포스터.jpg" style="width: 700px; height: 992px;" />
</p>
<p>&nbsp;</p>
<p>&nbsp;</p>
<p>작가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중시하는 개념미술은 본래 1960년대 중반, 서구 미술계에 등장해 당시 시각 중심으로 돌아가던 모더니즘 미술에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던 사조다. 그렇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다루며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말과 언어, 행위가 개념미술에서는 반대급부로 떠올랐다.</p>
<p>&nbsp;</p>
<p>한국 미술계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들여 1970~90년대를 기점으로 미술의 본질을 묻고 세상을 새롭게 사유해보고자 하는 개념주의가 전개되었다. 이번 전시는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던 개념미술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개념미술은 그들과 무엇이 같았고 또 무엇이 달랐는지, 28명의 작가와 140여 점의 작품들을 통해 조명한다.</p>
<p>&nbsp;</p>
<p>
   <br />
</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1. 움직이고, 해체하고, 생각하라: 언어·논리·행위</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국립현대미술관의 &lt;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gt;는 총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중 첫 번째는 미술을 감각의 재현이 아닌 사유의 구조로 전환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모여 있는 ‘언어·논리·행위’다. 이번 글에서는 각 장당 하나씩의 작품들을 같이 살펴보며 한국 개념미술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훑어볼 예정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750_mbeeuifd.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포맷변환]image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699px;" />
</p>
<p>&nbsp;</p>
<p>&nbsp;</p>
<p>어려운 전시다. 그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전시장을 처음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이 사진 작품부터 그야말로 개념미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간단하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1초면 끝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이라도 기울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물음표의 구덩이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이 극명한 사고의 차이가 개념미술의 특징이다. 보는 만큼 보인다.</p>
<p>&nbsp;</p>
<p>이건용 작가가 1975년에 발표한 &lt;장소의 논리&gt;는 아주 간단하다. 종이에 프린트된 사진 네 개가 붙어 있는 작품으로, 한 사람이 등장해 원을 그린 뒤 그 안을 “저기”라고 외치며 가리키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같은 곳을 “여기”라고 하며 가리킨 뒤, 원을 빠져나와 또 그곳을 등 뒤로 가리키며 “거기”라고 외친다.</p>
<p>&nbsp;</p>
<p>작가가 해당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점은 ‘장소’의 개념, 그리고 장소와 신체 사이의 관계다. 이는 전시 후반에 나오는 지도에 관한 담론과도 어느 정도 연결된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향을 가리키고 장소를 명명한다. 그러나 그 당연해 보이는 개념에는 사실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 작품 속 남자가 원을 그리기 전까지 그곳에는 장소랄 것이 없었다. 그가 처음 등장했던 전시장이 ‘전시장’이라는 공간으로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세분화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작가가 원을 그리는 순간 그곳의 장소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신체를 통해 가리키고 언어를 통해 명명하는 순간 정식으로 성립한다. 더욱이 원은 처음 그려진 곳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데도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행위자의 위치에 따라 ‘저기’가 되었다가 ‘여기’가 되고, 또 ‘거기’로 바뀐다.</p>
<p>&nbsp;</p>
<p>‘저기’일 때의 장소와 ‘여기’일 때의 장소, ‘거기’일 때의 장소는 위치가 변하지 않았으니 모두 같은 장소일까? 혹은 이름이 달라졌으니 다른 장소가 된 것일까? 물리적인 존재와 관계적인 언어 중 어느 것을 더 우선시해야 할까? 바로 그 의문이 작가가 &lt;장소의 논리&gt;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이용해 언어의 사용을 탐구하고자 했던 이유다.</p>
<p>&nbsp;</p>
<p>이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사회적인 인간관계와도 다르지 않다. 한 여자가 집에 있을 때는 누군가의 딸이지만, 친구를 만날 때면 누군가의 절친이 되고,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상사가 되고, 아이를 낳으면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 마치 바닥에 그려진 원처럼, 여자의 본질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를 부르는 명칭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것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달라지는 것은 그녀가 머무르는 장소일까, 혹은 그녀일까?</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2. 나를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사물과 언어</span></b>&nbsp;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개념미술이 작가의 아이디어와 언어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미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개념미술이 시각성과 물질성을 모두 제거한 채 순수한 언어 체계로 환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어적 사유’와 ‘물질적 조건’을 교차시키며 전개된 편에 가깝다.</p>
<p>&nbsp;</p>
<p>안규철 작가의 &lt;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gt;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에 빠지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내 편이라 믿고 있던 언어를 잃어버리고 만다. 세상 모든 것을 언어로 명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안정성과 자명함에 질문을 던지게끔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장의 목적이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840_anxigagd.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image03.jpg" style="width: 700px; height: 477px;" />
</p>
<p>&nbsp;</p>
<p>&nbsp;</p>
<p>당혹스럽다. 이것은 의자인가, 화분인가. 양측의 문은 또 어떻고? 손잡이가 없어 드나들 수 없는 문은 그래도 문으로 만들어졌으니 문이라 불러야 하는가?</p>
<p>&nbsp;</p>
<p>1990년대 초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안규철 작가는 어느 관객에게나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미술을 하고자 했다. 1991년에 제작된 이 작품에는 긴 다리 하나가 화분에 심겨 있는 의자와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손잡이가 무려 다섯 개나 달린 문에는 ‘Kunst(예술)’라고 적혀 있고, 손잡이가 하나도 없는 문에는 ‘Leben(인생)’이라고 적혀 있다.</p>
<p>&nbsp;</p>
<p>언뜻 보면 당황스러운 이 설치작품의 이해에 대한 힌트는 작가가 설정한 제목에 있다.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이 작품에 속한 존재들은 모두 ‘좌절된’ 존재들이다.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문, 나무가 없는 화분, 한때 나무였답시고 화분에 발 하나를 걸치고 있기는 하나 이젠 의자가 되었는데도 앉을 수 없는 의자.</p>
<p>&nbsp;</p>
<p>예술의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나 달려있어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긴 시간이 필요하고 해결해야 할 단계도 많지만, 인생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 들어갈 수조차 없다. 즉, 쉽게 되돌아갈 수 없다. 눈앞에 남은 것은 고통스러운 예술의 길뿐이다. 더욱이 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자라나긴 했지만 기이하고 불균형적인 형태로 솟아난 의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무명 작가 시절 작가의 자의식을 보여준다.</p>
<p>&nbsp;</p>
<p>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렇게 암울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손잡이가 많은 문은 여닫을 때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분명히 통로로 난 ‘문’이고, 정성을 좀 들여 열기만 하면 반드시 건너편을 보여줄 테니까. 의자 역시, 다른 의자들보다 높이 솟아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으니까. 의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꼭 앉는 것만을 소명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 테니.</p>
<p>&nbsp;</p>
<p>작가의 의도와 달리 마음대로 작품을 해석하면 틀린 것일까? 흠. 아마 괜찮을 것이다. 이 전시는 개념미술이 (아니)니까.</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3. 대한민국을 찾아보세요: 지도와 측정</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br />
</p>
<p>지도는 언어와 같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로 우리 곁에 머문다. 우리는 큰 의식 없이 그것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 그 속엔 생각지도 못한 의도와 의미가 숨어 있다.</p>
<p>&nbsp;</p>
<p>지도, 계량, 시계, 측정 등은 객관적이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1 더하기 1은 2이듯이, 시계와 지도 역시 변하지 않는 표준화된 언어다. 어떤 지도를 펼쳐도 모두가 같은 곳을 가리켜 대한민국을 짚어내고, 현재 시각이 몇 시인지 말하는 데에 주관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3시는 3시일 뿐이니까. 그러나 간과되기 쉬운 점은, 힘의 서열이나 합의는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개념미술이 지도와 측정, 시계를 다루는 이유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0940_vvsbgyxf.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곽덕준, 〈4개의 시계〉, 197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6분 2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7px;" />
</p>
<p>&nbsp;</p>
<p>&nbsp;</p>
<p>곽덕준 작가의 &lt;4개의 시계&gt;는 이름 그대로 4개의 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화면 속 영상으로도, 그 옆의 나무 프린트로도 전시되어 있다. 화면은 처음 ‘WHAT TIME’이라는 글자를 보여준 후 한동안 4개의 시계 속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것이 전부다. 여느 개념미술과 같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간단하기 그지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의미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p>
<p>&nbsp;</p>
<p>곽덕준 작가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2세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와 두 문화 사이의 경계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 두 곳에 모두 속해있다는 건 장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후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 그로서는 오히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방성으로 작용했다. &lt;4개의 시계&gt;는 동일한 기능을 가진 시계들이 나란히 늘어서, 같은 장소에 있으니 당연히 같은 시간을 가리키리라 생각되는 예상을 깨고 각기 다른 시간으로 흐르는 의외성을 보여준다.</p>
<p>&nbsp;</p>
<p>시간에 대한 신뢰를 깨면서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체계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또 그를 통해 근대적 측정 체계의 권위와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개념적 실천 작품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b><span style="font-size: 18px;">4. 어디를 보고 있나요?: 기호의 조정자들</span></b>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이번 전시 내내 우리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잊곤 하는 또 한 종류의 언어가 있다. 바로 기호다. 도형, 화살표, 포스터 문구, 통계 숫자 등 단순히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언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그들은 가끔 글자보다도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더 많은 얘기를 한다.</p>
<p>&nbsp;</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1033_ectnwtdf.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image05.jpg" style="width: 700px; height: 370px;" />
</p>
<p>&nbsp;</p>
<p>&nbsp;</p>
<p>이 작품은 성능경 작가의 &lt;현장 1&gt;로, &lt;현장&gt; 연작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신문 보도사진에 삽입되었던 편집 기호를 재촬영하고, 그 위에 작가가 새로운 기호를 덧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p>
<p>&nbsp;</p>
<p>첫눈에 바로 흥미를 끌었던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그 안에 다소 연하게 표시된 동그라미, 화살표, 가위표 등의 기호들이 ‘여기를 보세요’하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손길을 따라 해당 위치를 바라보면, 갑자기 나타난 더 밝고, 더 힘차고, 더 거침없이 그려진 다른 기호가 강하게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p>
<p>&nbsp;</p>
<p>어디를 봐야 하는 걸까?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신문의 편집 기호가 재배치되면서 그 이면에 존재하던 권위가 흩어지고 하나의 진실로만 보이던 것이 ‘기호의 조정자’에 의해 흩어지고 펼쳐졌다는 것이다. 독자의 시선을 통제하고 이미지의 해석을 규정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꼭 작가가 그려 넣은 새 기호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남이 가리키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데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주변을 새롭게 사유해보는 것이니까.</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1102_ztaxsmrw.jpg" alt="[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60729_202900568.jpg" style="width: 700px; height: 860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 style="text-align: left; ">전시의 마지막 단계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김용익 작가의 &lt;가까이... 더 가까이...&gt; 작품의 이름표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영락없이 그 옆에 같이 있던 환기구에 대한 설명인 줄 알았다. 더 가까이 오라고 관람객을 유혹하는 낮은 곳에 설치된 환기구라니 이건 어떤 의도를 담은 개념미술일까, 시키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자세를 낮추는 사람들의 행위를 노린 무언가일까 열심히 고민하는데 문득 이름표 속 ‘150x218cm 캔버스에 혼합재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p>
<p>&nbsp;</p>
<p>아뿔싸. 뒤를 돌아보니 진짜 작품은 등 뒤에 버젓이, 그리고 멀쩡히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니 부끄러워할 필요까지는 없는 거겠지? 머쓱히 물러나는데 발견한 더 재미있는 점은 그곳을 지나가던 관람객들 중 몇은 꼭 그 이름표를 읽은 뒤 나처럼 옆의 환기구를 열심히 들여다본다는 것이었다.</p>
<p>&nbsp;</p>
<p>그 사람들은 환기구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전시장을 벗어나기 전에 사실 그건 설치작품이 아니라는 걸 깨닫긴 했을까? 아니, 굳이 깨달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이 환기구야말로 개념미술 전시에 꼭 들어맞는 존재일지 모르지.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개념미술의 탄생을 지켜봤는지도 모른다.</p>
<p>&nbsp;</p>
<p>&lt;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gt;.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월 11일까지 이어진다.</p>
<p>
   <br />
</p>
<p>
   <br />
</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혜원]]></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21:13:1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3</guid>
<title><![CDATA[[Opinion] 너네 그거 사랑이야!? - 동궁 [드라마]]]></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3</link>
<description><![CDATA[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정작 두 사람만 모르는(ㅋㅋ) 사랑]]></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31806_afkckdfq.jpg" alt="2026072215115627253_1784700717_00301459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부터 《동궁》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남주혁이라는 배우 역시 기대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물론 &lt;스물다섯 스물하나&gt;를 너무 좋게 본 사람으로서 배우에 대한 좋은 기억은 있었지만, 이번 작품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p>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하나만 더 봐야지.", "하나만 더 볼까." 하고 보다가 결국 이틀 만에 전편을 정주행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흥미로운 점은 《동궁》이 속도로 승부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개 이후 전개가 느리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에게 그 느림은 부족함이 아니라 필요한 호흡이었다. 사건을 급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인물의 감정과 관계, 숨겨진 사연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왜 그런 마음에 도달하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더 깊은 설득력을 얻는다. 《동궁》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작품이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nbsp;</div>
<p style="text-align: center;">*</p>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가장 먼저 감탄하게 된 것은 화면이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드라마를 보는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촬영감독이 누구일까”였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잘 만든 영화의 한 컷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동궁》의 촬영을 맡은 박정훈 촬영감독은 실제로 영화 작업 경험이 많은 촬영감독으로, 작품에 영화적인 질감을 더한 것이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동궁》에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궁궐은 인물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과 욕망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빛과 그림자, 정적인 화면 구성, 인물을 둘러싼 여백은 대사보다 먼저 감정을 전달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화면과는 다른 결이었다. 특히 현실과 귀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귀신을 단순히 무섭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세계로 구축한다. 촬영과 조명, 미술이 함께 만들어낸 분위기는 오컬트를 자극적인 공포가 아니라 작품의 정서로 받아들이게 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나는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을 정말 싫어하고, 보고 나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작품은 일부러 피하는 편이다. 그래서 《동궁》도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컬트의 취지를 정확히 살리면서도 공포를 과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갑툭튀보다 분위기와 심리를 통해 긴장감을 만든다. 귀신은 단순히 놀라게 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죄책감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덕분에 오컬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작품을 보면서 〈기묘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지점들이 있었다.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설정, 보이지 않는 존재를 추적하는 구조 등 익숙한 장르적 문법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지점은 동시에 《동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완전히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내기보다, 익숙한 오컬트 장르를 가져와 한국적인 정서와 공간 안에서 다시 해석했다. 서양 오컬트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중심으로 한다면, 《동궁》은 궁궐이라는 공간 안에서 권력과 욕망, 죄책감,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익숙한 장르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어쩌면 《동궁》의 의미는 낯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만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작품이 다뤄온 장르적 소재를 어떻게 한국적인 방식으로 변주하고, 자신만의 분위기로 완성해내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익숙한 장르 안에서 한국 드라마가 가진 연출력과 감정 표현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div>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31842_qxonchca.jpg" alt="2026072215122827256_1784700748_003014591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배우들의 앙상블 역시 빼놓을 수 없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에는 노윤서, 남주혁, 조승우 세 사람이 중심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다 보고 나니 《동궁》의 진짜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들이었다. 특별출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곽동연, 장영남, 황영희, 태인호, 홍수주 등 모든 배우가 자신의 자리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다. 짧은 등장만으로도 인물의 과거와 욕망이 느껴지고, 각각의 서사가 쌓이면서 궁궐이라는 공간은 더욱 살아난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nbsp;</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특히 〈취사병 전설이 되다〉에서 인상 깊게 봤던 이홍내 배우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작품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마치 작두를 타듯 에너지를 쏟아내는 연기는 오컬트적인 긴장감을 극대화했고, 단순히 무서운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강렬한 존재로 기억됐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nbsp;</div>
<div style="text-align: center;">&nbsp;</div>
<div>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143828_uvxhkhuf.jpg" alt="0edbd028-64fa-407c-a7dc-f6f22b891c72.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p>
   </div>
<div>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p>
   <p style="text-align: left;"><span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결국 《동궁》을 가장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이 작품은 사랑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 흔한 로맨스처럼 감정을 반복해서 확인하거나 억지로 러브라인을 끌어가지 않는다. 대신 시선과 침묵, 서로를 향한 선택으로 마음을 보여준다.</span></p>
   <p style="text-align: left;"><span style="text-align: justify;">&nbsp;</span></p>
   </div>
<div style="text-align: left;">그래서 더 좋았다. (너무)</div>
<div style="text-align: left;"><br /></div>
<div style="text-align: left;">개인적으로 《동궁》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사랑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궁궐의 비밀과 오컬트라는 장르 안에서 피어난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했다. 억지스러운 러브스토리 없이도 두 사람의 관계가 충분히 애틋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내게 《동궁》은 단순한 오컬트 사극이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몰입을 선물한 작품이고, 영화 같은 미장센으로 눈을 사로잡은 작품이며,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정작 두 사람만 모르는(ㅋㅋ) 사랑을 보여준 작품이다.</div>
<div style="text-align: left;">&nbsp;</div>
<div style="text-align: left;">&nbsp;</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신수빈]]></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11:08:52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499</guid>
<title><![CDATA[[Opinion] 테일즈런너 붐은 다시 온다! [게임]]]></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499</link>
<description><![CDATA[테일즈런너는 어떻게 다시 사랑받을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90년대생부터 00년대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게임. 전설의 랭커 '애니싸랑'부터 따라 입고 싶었던 유행 코디까지! <b>테일즈런너</b>는 무려 2005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국내 초장수 게임 중 하나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동화나라를 뛰어다닌다는 매력적인 설정, 누구나 쉽게 조작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에 더해진 그때 그 시절의 추억들. 20주년이 훌쩍 지난 레이싱게임 &lt;테일즈런너&gt;는 아직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 ">최근 또 다른 국산 장수 게임 &lt;크레이지 아케이드&gt;의 서비스 종료 소식에, 사람들의 눈은 자연스레 테일즈런너로 향했다. 테일즈런너는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는 게임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줄어든 유저 수와 개편되거나 새롭게 생성된 시스템이 잔뜩인 테일즈런너지만, 테일즈런너는 아직도 큰 사랑을 받고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테일즈런너는 어떻게 암흑기를 견뎌내고 다시 사랑 받는 게임이 되고 있는 걸까?</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21020_dzsffluw.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29 오후 10.04.06.png" style="width: 700px; height: 393px;" /></p>
<p>&nbsp;</p>
<p>&nbsp;</p>
<p>부활의 중심에는 <b>캐릭터 콜라보</b>가 있다. 테일즈런너는 정해진 캐릭터를 자유롭게 선택해 플레이하는 레이싱 게임으로, 기본 캐릭터, 스토리캐릭터, 콜라보 캐릭터로 나뉜다. 기본 캐릭터와 스토리 캐릭터는 우리가 친히 알고 있는 추억의 캐릭터부터, 테일즈런너 고유의 스토리를 지닌 캐릭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콜라보 캐릭터는 특정 캐릭터 IP와 협업하여 디자인된 한정판 캐릭터 형태로 출시된다. 다양한 캐릭터 중에서도 특히 콜라보 캐릭터 라인업이 상당한데, 잔망루피 및 케로로 같은 유명 IP는 물론, 블락비, 카라, 미스에이, 아스트로 등 다양한 아이돌 그룹과도 콜라보한 이력이 있다.</p>
<p><br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21046_eebkyuvf.png" alt="캐릭캐릭체인지_아무코스튭.pn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nbsp;</p>
<p>&nbsp;</p>
<p>최근들어 가장 눈에 띄는 행보는 이 '콜라보 캐릭터'인데, 단순 캐릭터 IP와 협업하는 것은 물론, 네이버 웹툰 &lt;마루는 강쥐&gt;,&lt;냐한남자&gt;,&lt;가비지타임&gt;,&lt;별이삼샵&gt;등과 콜라보해 실제 주인공을 게임 캐릭터로 출시하거나, 아이템을 통해 기본 캐릭터에 코스튬을 입히는 형태의 콜라보가 진행된다. 최근에는 2000년대 초반 콜라보의 추억이 담긴 &lt;개구리 중사 케로로&gt;와 &lt;캐릭캐릭체인지&gt; 캐릭터 복각을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br /><br />특히 올해 7월 등장한 캐릭캐릭체인지 캐릭터가 큰 화제였는데, 실제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매우 유사한 디자인과 다양한 코스튬 의류가 큰 역할을 했다. 추억의 캐릭터 '아무'를 재출시함과 동시에 추가 캐릭터 '세라'를 공개하며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캐릭터와 아이템은 가챠, 상자깡 형태의 뽑기로 얻을 수 있기에 확률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과금에 주의해야 하지만, 뛰어난 디자인과 모델링으로 양측 팬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br /><br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21111_bsqczors.jpg" alt="6A5hqbtJmaDOq78MxF6W6h.jpg" style="width: 700px; height: 4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잔망루피, 짱구를 이어 네이버 웹툰 콜라보로 출시된 '마루'와 '춘배'의 흥행 이후 테일즈런너는 지속적인 캐릭터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다. 캐릭캐릭 체인지 이전에는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lt;명탐정 코난&gt; 콜라보를 진행했는데, 기본적인 성인 캐릭터 외에도 어린아이가 된 코난, 장미는 물론 브라운 박사 등 추가 인물까지 성공적으로 출시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br /><br />캐릭터 콜라보는 단순 캐릭터 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닌 공원 및 대기실 내 단독 존 구성과 이벤트, 코스튬 출시 등으로 이어진다. 해당 콜라보에서는 탐정인 코난의 컨셉과 일맥상통하는 '브라운 박사의 퀴즈' 나 '필름 현상'등 미니게임 개념의 이벤트를 접할 수 있다. 또한 콜라보별 캐릭터 NPC 도입으로 실제 캐릭터와 대화하는 듯한 비주얼 노벨까지 즐길 수 있다. 캐릭캐릭체인지 콜라보 이후에는 추억의 애니메이션이자 뛰어난 캐릭터성을 지닌 &lt;슈가슈가룬&gt;의 슈가, 바닐라 캐릭터 출시가 예고되어 있다.</p>
<p>&nbsp;</p>
<p>추억과 추억, 팬심과 즐거움의 결합. 캐릭터 콜라보는 신규 유저와 복귀 유저 유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신규 및 복귀 유저들은 신규 캐릭터 콜라보를 통해 '추억의 게임' 테일즈런너를 지속적으로 접하게 되며, 관련 콘텐츠를 접한 사람들은 예전의 즐거운 감정을 그대로 안은 채 기꺼이 지갑을 연다. 단순히 기존 유저뿐만 아니라 IP 팬덤등을 통해 신규 유저 유입을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 셈이다. <br /><br />특히 다른 게임과 달리 고해상도나 고사양을 요구하지 않고, 캐릭터로 맵을 달리거나 채팅을 치는 등 자유도가 비교적 높다는 점에서 캐릭터 IP를 확장하기에 가장 좋은 매체가 아닐까 싶다. 2D 캐릭터를 직접 움직이고, 감정을 표현하는 등의 실질적인 플레이 경험을 기반으로 게이머와 팬의 욕구를 모두 충족해줄 수 있는 것이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21233_yadvbbzn.jpg" alt="프리즈마.jpg" style="width: 700px; height: 502px;" /></p>
<p>&nbsp;</p>
<p>&nbsp;</p>
<p>테일즈런너는 레이싱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콘텐츠가 준비되어 있다. 유저 감소와 보석 시스템이라는 암흑기를 겪으며 맵 구조 및 디자인 재활용, 운영 미비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장기 운영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게임인 만큼 애증의 마음으로 플레이하는 유저가 많은 듯 하다. 캐릭터 콜라보 외에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시즌별 이벤트'의 신박함에 있다. <br /><br />겨울방학(1~3월)과 여름방학(7~9월) 시즌을 기반으로 대규모 이벤트를 진행하고, 월별로 이벤트를 바꿔가며 리그, 개발자 맵 등 지속적으로 변수를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대규모 이벤트 외에는 신규 맵 추가가 적은 편이지만, 방학 시즌을 중심으로 한 이벤트인만큼 매력적인 콘셉트나 시스템을 갖고 오는 경우가 많다. 테일즈런너 세계관의 유구한 대립 구도인 '천사VS악마' 팀 구조의 공방전 이벤트는 물론, 단기 이벤트인 만큼 '미술관' 컨셉의 아틀리에 이벤트처럼 비교적 독특한 콘셉트를 내놓는다. <br /><br />2026년 현재 진행 중인 여름방학 이벤트는 마법학교, 마법공주 콘셉트의 &lt;매지컬 프리즈마&gt;로, 유서 깊은 레이드부터 신규 맵과 미니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른바 '현질'을 통해 누구나 쉽게 플레이할 수 있지만, 신규 및 복귀 유저도 시간을 투자한다면 충분히 원활한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하길 바란다.</p>
<p>&nbsp;</p>
<p>여러번의 채널링 및 서비스 변경을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온 테일즈런너는, 나름대로 게이머들과의 소통의지를 내비치기도 한다. 월별 라이브 방송을 통해 공지사항이나 유저 의견을 듣고 관련 보상을 제공하는 등의 액션을 취하고 있다. 긴 세월 하나의 서비스를 몸소 겪어온 오랜 유저의 입장에서 테일즈런너는 참 애증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든 이 게임에 불퉁대다가도 업데이트 날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유저가 한 둘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21258_oxslarnr.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29 오후 8.27.35.png" style="width: 700px; height: 369px;" /></p>
<p>&nbsp;</p>
<p>&nbsp;</p>
<p>새로운 게임은 쏟아지고,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도파민이 넘치는 이 세상에 테일즈런너의 자리가 휘청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형 게임사가 아님에도 국내 장수 게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 청년 세대 대부분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큰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br /><br />추억이 담긴 공원 속 실로폰은 사라지고,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은 게임 속에서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소위 말하는 '고인물 게임'이 되어버린 테일즈런너지만, 지금과 같은 적극적인 시도와 행보를 통해 오래토록 사랑받는 게임이 되길 바란다. 그때 그 시절의 추억도, 업데이트가 기대되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 게임이 누군가의 행복이고 추억이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21346_okhbugas.jpg" alt="박아란_컬쳐리스트.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아란]]></dc:creator>
<pubDate>Thu, 02 Jul 2026 02:05:03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1</guid>
<title><![CDATA[[Opinion] 고통을 통해 환희로 - 뮤지컬 베토벤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1</link>
<description><![CDATA["고통을 통해 환희로Durch Leiden zur Freude"]]></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left;">살면서 문득 신기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지극히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현상이 인간의 내면에서는 주관적이고 깊은 감정적 가치로 변환되어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음악이 그러하다. 음악이란 결국 공기의 떨림이면서 수학적인 진동수의 차이로 이루어진 파동인데, 어째서 인간은 그 미세한 음의 배열에 반응해 그토록 다채로운 감정의 결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024454_xgdzcrao.jpg" alt="weston-m-3pCRW_JRKM8-unsplash.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밝고 명랑한 느낌을 주는 장조(Major)와 차분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단조(Minor)의 차이는 음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그에 따른 진동수 비율에서 비롯된다. 장조는 음들의 조합이 수학적으로 깔끔한 비율을 이루어 밝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단조는 음들이 상대적으로 촘촘하게 맞물리며 생기는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차분하거나 침울한 느낌을 주게 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이처럼 단조가 만드는 촘촘한 긴장감과 그것이 장조로 전환되며 찾아오는 시원한 해소감이 교차하는 물리적 진동은, 단순한 음의 차이를 넘어 비극에서 환희로 이어지는 인류의 위대한 서사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소리의 파동은 뮤지컬 무대 위에서 베토벤이라는 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과 마주하며 웅장한 서막을 연다. 물론 장조와 단조의 전환은 보편적인 음악적 어법이지만, 베토벤에게 이러한 이행은 분위기의 단순한 반전을 넘어 고통을 넘어 환희로 도달하려 했던 그의 철학적 의지 그 자체였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020648_xrcxmqpq.jpg" alt="14_40_05__6a5085b5481a7[W680-].jpg" style="width: 680px; height: 971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뮤지컬 &lt;베토벤&gt;은 고향 본(Bonn)을 떠나 음악의 중심지(Wien)에서 궁정에 귀속되어 후원자의 취향을 대변하던 기존 예술가의 길을 거부하고 온전히 자기 음악의 주권을 쥐고자 했던 베토벤의 자의식을 조명한다. 하지만 이처럼 독립된 창작자로서 분투하던 그에게 찾아온 청력 상실은 창작의 근간을 흔드는 시련이었으며, 신분의 벽에 가로막힌 실연은 그의 삶을 더욱 깊은 절망으로 몰고 갔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음악 안에서 거대한 서사적 동력으로 전환된다. 베토벤에게 장조와 단조의 구조적 대비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조로 갈등과 시련을 구체화하고, 이어지는 장조를 통해 이를 극복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며 조성의 차이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 구조로 작동시켰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예를 들어 &lt;비창&gt;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단조의 흐름 사이에 밝은 장조 선율을 교차시켜 긴장을 끌어올린다면, &lt;월광&gt;은 침울한 단조가 지배하는 구조 속에 짧은 장조 구간을 배치해 긴장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때 관객은 작품 안에서 정교하게 대립하고 교차하는 음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204325_ssmgzwsl.jpg" alt="13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99px;"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left;">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시선을 외부의 운명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놓는 구조적 전환에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베토벤이 고요한 외곽 도시 바덴(Baden)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던 것처럼, 뮤지컬 역시 베토벤이 청력 상실이라는 신체적 제약을 내면의 창작 에너지로 재정의해내는 과정을 조명한다. 외부와 단절되는 극중 정적 속에서 베토벤은 불운에 갇히기보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기로 선택한다. 즉, 청력 상실이라는 한계를 예술의 종말이 아닌 외부의 방해 없이 내면의 소리를 구현해낼 수 있는 조건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베토벤의 이러한 결단과 선택에는 청년 시절부터 접해온 프리드리히 폰 쉴러의 사상적 영향이 깊게 깔려 있다. 쉴러에게 숭고란 감각적 한계와 비극적 운명에 수동적으로 압도당하는 대신, 그 한계를 계기로 내면의 도덕적·정신적 자유를 자각하는 미학적 경험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베토벤에게 청력 상실은 비극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적 승화의 계기가 되며, 뮤지컬 &lt;베토벤&gt;은 이러한 그의 주체적 면모를 무대 위에서 입체적으로 완성해낸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고통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베토벤의 시선이 비로소 개인의 한계를 넘어 타자의 고통으로 확장된다는 지점이다. 베토벤에게 쉴러의 시 &lt;환희에 붙여&gt;는 청년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온 인문학적 이상이었으나,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 진정한 의미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쉴러가 노래한 '환희'는 단순한 감정적 쾌락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비극과 한계를 공유하는 인간들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등한 주체로서 맺는 공감과 보편적 연대의 감정이기에 그렇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이러한 전환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청년 시절부터 지녀왔던 철학적 신념에 기반한다. 그의 내면에 자리하던 쉴러적 이상은 청력 상실과 고립이라는 지난한 내면화의 과정을 거쳐, 극 후반부에 교향곡 9번 &lt;합창&gt;을 활용한 음악적 전개 속에서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거친 단조의 불협화음이 한층 고조되어 웅장한 장조 합창으로 이행하는 흐름은, 한계에 갇혀 있던 그가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세상과 연결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지휘를 마친 베토벤이 뒤돌아서는 순간 객석을 가득 채우는 환호와 함성의 분위기를 몸소 체험하는 장면은, 4악장의 핵심 가사인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는 쉴러의 시구처럼 그가 품어온 내면적 이상이 마침내 세상과 닿았음을 선명히 입증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023650_xkqacutq.jpg" alt="13430205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16px;" /></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잃어버린 청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삶을 짓누르던 비극적 조건 또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신의 불운을 탓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받아들인다. 가혹한 한계조차 자신의 예술 안으로 끌어안아 모두가 나눌 수 있는 환희로 승화시킬 때, 자신을 옭아매던 한계는 삶과 창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바탕이 된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그렇기에 뮤지컬 &lt;베토벤&gt;이 보여주는 숭고함이란, 고통의 완벽한 부재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을 아프게 한 상처마저 끌어안고 세상과 다시 연결되려는 태도에 있다. 어쩌면 이야말로 이 극이 베토벤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가장 정교하고 깊은 시선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고통을 통해 환희로Durch Leiden zur Freude"</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024201_afdpuzno.jpg" alt="이유빈.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이유빈]]></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01:52:4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0</guid>
<title><![CDATA[[Opinion] 7월의 OTT: 우리집에 제비가 산다 [동물]]]></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0</link>
<description><![CDATA[보이지 않는 귀퉁이에서 뜨겁게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을 보았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현관문을 열자 “짹짹” 소리가 뾰족하게 귀를 뚫고 들어왔다. 귓속이 먹먹해질 정도로 높은 톤이었다.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으나 높고 여리고 짱짱한 걸로 보아 새끼로 추정됨. 아무튼 어른은 아님’ 하고 초보 탐조인의 레이더는 빠르게 작동했다. 문을 엶과 동시에 어미 새가 내 앞을 빠르게 스쳐갔고 그제서야 나는 천장 위를 올려다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3405_fzucmrxk.jpg" alt="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95px;" />
</p>
<p>&nbsp;</p>
<p>&nbsp;</p>
<p>둥지였다. 우리집 현관 천장에 제비 둥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둥지 안에는 아주 작은 새끼 제비들이 살고 있었다. 얼굴만 뿅 내밀고 있는 아기 제비 세 마리와 눈이 처음 마주친 순간, 나는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질러 댔다. 뒷북도 한참 뒷북이었다. 알에서 부화한지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p>
<p>
   <br />
</p>
<p>천장 아래 달려 있는 상자 뚜껑의 정체는 둥지 받침이었다. 이틀 동안 흙집을 짓다가 잘 안돼서 애를 먹는 제비를 보고 엄마는 좀 도와주라며 아빠에게 주문을 넣었다고 한다. 엄마의 착한 성정과 아빠의 기술력 콜라보로 인해 제비 집은 이중으로 튼튼해졌다. 빤빤한 상자 뚜껑 옆으로 금속 부품까지 덧대 연결했으니 둥지가 추락하는 불상사는 원천 봉쇄한 셈이다.</p>
<p>
   <br />
</p>
<p>여름 손님의 정착 이후로 매일이 자연 다큐를 시청하는 기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실 방충망을 열어 제비들의 일상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엄마 아빠 제비는 언제 나타나나, 먹이는 어떻게 주나, 새끼들은 어제보다 얼만큼 더 자랐나 등을 궁금해하며 제비 가족을 관찰했다. 우리집 고양이들이 왜 그렇게 목을 빼고 창문 앞에 붙어 있었는지 조금은 헤아려졌다.</p>
<p>
   <br />
</p>
<p>아기 새들이 밥 달라고 합창하듯 입을 앙 벌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럽고 깜찍하다. 부리가 샛노래서 꼭 노란 동그라미 고무줄처럼 보인다. 그 짹짹거리는 입에다 엄마 제비가 사냥한 먹이를 호다닥 넣어 주고는 다시 잽싸게 돌아선다. 이어서 아빠 제비도 어디선가 튀어나와 먹이를 물리고 사라진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부모 제비의 움직임은 심령사진처럼 찍혀 있다. 삼형제 입에 밥을 밀어 넣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비가 오고 날이 습한 것은 장애물이 될 수 없는 듯했다. 작은 가족의 삶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p>
<p>
   <br />
</p>
<p>제비 식구를 보고 있으면 늘 생경한 마음이 들었다. 한 식구가 부지런히 삶을 꾸리는 모습은 거짓 없이 정직했으며 불같이 뜨거웠다. 먹고 사는 게 참 무섭고 그래서 더 숭고하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어느 소홀한 귀퉁이에서도 무언가가 뜨겁게 피어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됐다. 약동하는 에너지가 우리집 전체를 감쌌다.</p>
<p>
   <br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2930_cnxxmike.jpg" alt="2.jpg" style="width: 700px; height: 700px;" />
</p>
<p>&nbsp;</p>
<p>&nbsp;</p>
<p>7월이 찰나 같다고 느낀 건 새끼들이 한 달 만에 방을 빼서다. 둥지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훌쩍 커버린 아기 제비의 성장 속도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통통한 몸매에 짤막한 꼬리깃을 가진 아가들이 차양 아래 쪼르르 앉아 도망가지도 않고 엄마와 나와 동생을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집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으면 웃음이 끊이질 않나 보다. 귀여운 녀석들을 사진에 담기 위해 잼잼과 까꿍을 시전하며 다 큰 우리가 재롱을 떨었다.</p>
<p>
   <br />
</p>
<p>어렴풋이 예상했으나 작별은 한순간이었다. 새끼 제비들이 어느덧 엄마 아빠와 함께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웃 담벼락 정도까지 새끼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다시 우리집 차양 기둥으로 돌아오는 루트 같아 보였다. 단거리 훈련을 착실히 하다가 조만간 남쪽으로 장거리 비행을 떠날 것이다. 다섯 마리 제비 식구가 한곳에 잠시 모여 있는 걸 보며 이 순간이 마지막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p>
<p>
   <br />
</p>
<p>여름 철새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괜히 서운하고 가끔씩 적적하다. 집 근처 건물 사이로 아직까지는 제비들이 날아다닌다. 개중에 우리집 애들이 섞여 있는 건 아닐까 한 번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인간은 왜 이리 질척거리는지 모르겠다. 잘하면 10월경까지는 제비들의 활동을 목격할 수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3626_nhbkkplh.jpg" alt="3.jpg" style="width: 700px; height: 693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으로서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유일한 염려다. 짧게 퍼붓는 비와 살인적인 폭염이 교차하는 이 심술궂은 날씨가 어린 새들의 비행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간 중간 처마가 있는 집도 잘 발견해서 쉬어갔으면 좋겠다. 먹이도 그냥 수월하게 구했으면 좋겠다. 그럼 그렇지... 걱정이 끝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곁을 내어줌으로써 제비와 함께 공존했던 7월. 작은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오랜만에 실감하고 있다. 제비들 덕에 이 계절이 더욱 뜨겁게 감각될 것 같다. 인기 순위에서 한참 벗어난 콘텐츠를 시청한 기분이다. 물어뜯고 피 튀기게 싸우고 배신하고 복수하는 그런 진흙탕 얘기가 아닌 누구 하나 상처 받는 일 없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선한 이야기. 유행과는 멀지만 꿈 같은 이야기. 내가 가장 재밌게 본 7월의 OTT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12550_ckdawdot.jpg" alt="한세희.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한세희]]></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21:28:3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01</guid>
<title><![CDATA[[Opinion] 리센느의 ‘거제, 야호!’가 남긴 질문 [문화 전반]]]></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01</link>
<description><![CDATA[리센느의 역주행은 회사를 성장시키는 힘이 전략보다는 대표의 태도와 리더십에 있음을 보여준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8090656_ugsagfhm.jpg" alt="[크기변환]거제야호.jpg" style="width: 700px; height: 374px;" />
</p>
<p>&nbsp;</p>
<p>&nbsp;</p>
<p>“거제, 야호!”</p>
<p>&nbsp;</p>
<p>처음에는 잠깐 스쳐 지나갈 유행인 줄 알았다. 숏폼 알고리즘을 타고 퍼진 ‘거제, 야호!’는 단순한 밈처럼 보였다.</p>
<p>&nbsp;</p>
<p>나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따라 하는 유행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짧은 유행어는 그룹 리센느를 알렸고, 이 년이나 지난 ‘LOVE ATTACK’이란 곡이 차트 상위권에 들었다. 한때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중소 기획사 걸그룹은 역주행의 주인공이 되었고, ‘중소돌의 기적’이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p>
<p>&nbsp;</p>
<p>주변 사람들은 ‘밈이 살렸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지점이 궁금했다. 밈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우연을 성과로 바꾸는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소 기획사와 대형 기획사는 회사의 규모부터 일에 투입되는 인원 또한 다르니까. 나는 무대를 포기하지 않은 멤버들은 물론 팀을 끝까지 운영하며 기회를 기다린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는 대표와 회사 직원이 있었을 것이다.</p>
<p>
   <br />
</p>
<p>리센느의 역주행을 보며 나는 스타트업에서 만났던 여러 대표들을 떠올렸다. 스타트업이든 아이돌 기획사든 처음부터 성공이 보장되는 곳은 거의 없다. 자본도 부족하고 인지도도 부족하니까. 결국 조직을 버티게 하는 것은 대표의 선택이다. 대표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제시한다고 조직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대표가 현장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움직인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8090721_zsspxpze.jpg" alt="[크기변환]좋은리더.JPG" style="width: 700px; height: 481px;" />
</p>
<p>&nbsp;</p>
<p>&nbsp;</p>
<p>대표의 역량은 지시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현장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드러난다. 또한 대표의 역량은 회사가 잘 될 때보다 잘되지 않을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뛰어난 아이디어도, 화려한 투자 유치도 아니다. 사람을 이끄는 힘이다.</p>
<p>
   <br />
</p>
<p>실무를 모르는 대표는 결과만 본다.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보지 못한다.</p>
<p>&nbsp;</p>
<p>기획서 한 장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회의가 있었는지, 디자인 수정 한 번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 고객 한 명을 확보하기 위해 몇 번의 실패를 반복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직원이 야근을 해도 ‘왜 아직 안 끝났지?’라는 질문부터 나온다. 혹은 야근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대표도 있다. 때문에 좋은 리더는 직원에게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 말하기 보다 먼저 묻는다. ‘어디서 막히는지’ ‘부족한 게 무엇인지’ ‘회사에서 무얼 지원하면 되는지’ 물론 대표가 모든 일을 직접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직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 현장을 모르는 대표는 보고서로 회사를 이해하려 하고, 현장을 아는 대표는 사람을 통해 회사를 이해한다.</p>
<p>&nbsp;</p>
<p>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어떤 대표는 책임을 직원들에게 물었다.</p>
<p>&nbsp;</p>
<p>“왜 이렇게 성과가 안 나오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회사에 이제 돈이 없어요”</p>
<p>&nbsp;</p>
<p>결국 사람은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표를 떠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높은 연봉이 아니어도 함께 일하고 싶은 대표가 있는 반면,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회사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p>
<p>&nbsp;</p>
<p>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팀을 유지하고 구성원과 함께 버티며 다음 기회를 준비하는 일은 대표의 몫이다. 일하는 회사는 대표의 역량이다. 이 모든 것은 화려한 전략보다 현장을 이해하는 태도에서 나온다.</p>
<p>&nbsp;</p>
<p>지시하기보다는 앞에서 길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팀을 지키는 사람. 리센느의 역주행 성공 은 결국 좋은 대표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아정]]></dc:creator>
<pubDate>Tue, 28 Jul 2026 09:07:29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8</guid>
<title><![CDATA[[Opinion] 사랑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는가 [음악]]]></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8</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것을 영영 사랑하는 것이 내 전부. 수식어보다 중요한 건 사랑 그 자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우리는 사랑 앞에 수많은 수식어를 붙인다. 영원한 사랑. 진정한 사랑. 나만의 사랑.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일까. 우리는 그 앞에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덧붙인다.</p>
<p>&nbsp;</p>
<p>&nbsp;</p>
<p>
   <br />
</p>
<p>
   <span style="font-size: 18px;"><b>1. 0+1, 혹은 0+0인 사랑</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우리가 가장 많이 붙이는 수식어는 아마 '<b>영원</b>'일 것이다.</p>
<p>&nbsp;</p>
<p>우리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영원한 우정, 영원한 사랑, 영원한 기억. 우리는 끝이 없기를 바라는 것들 앞에 자연스럽게 '영원'이라는 말을 붙인다.</p>
<p>&nbsp;</p>
<p>영원이란 무엇일까. 정말 끝이 없는 시간을 의미하는 걸까.</p>
<p>&nbsp;</p>
<p>아니면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을 뜻하는 걸까.</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사랑은 정말 유효기간이 존재하나?</p>
   <p style="text-align: justify; ">열정적 사랑의 수명은 평균 18개월 ~ 30개월에 불과하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right; ">-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p>
   <p>&nbsp;</p>
   </blockquote>
<p>&nbsp;</p>
<p>누군가 사랑은 식는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사랑은 형태만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쩌면 둘 다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것들과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음악이나 책일 수도 있으며, 계절이나 도시, 오래된 물건, 어린 시절의 기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내 곁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변하고, 시간은 흐르고, 좋아했던 것들도 언젠가는 또 다른 모습이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을 말한다.</p>
<p>
   <br />
</p>
<p>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은데 어떻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나요.</p>
<p>&nbsp;</p>
<p>사랑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계속 사랑하는 건가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건가요.</p>
<p>&nbsp;</p>
<p>'영원(0+1)'과 '영영(0+0)', 닮은 듯 다른 말이 있다. 영원은 끝이 없는 시간을 뜻하며 영영은 '아주 오래도록'과 '두 번 다시' 라는 뜻을 품고 있다. 영원은 시간을 말하는 단어라면, 영영은 마음에 더 가까운 단어처럼 다가온다. 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어도, 오늘을 사랑하고 내일을 사랑하고 그 다음날에도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p>
<p>&nbsp;</p>
<p>
   <span style="color: #a0a0a0;">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면, 난 영영 사랑하기를 택하겠어.</span>
</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2.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nbsp;</p>
<p>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사랑 앞에 영원을 붙여왔을까?</p>
<p>&nbsp;</p>
<p>셰익스피어는 소네트 116에서 <b>진정한 사랑</b>에 대해 말한다.</p>
<p>
   <br />
</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
      <b>&nbsp;</b>
   </p>
   <p>
      <b>Love is not love Which alters when it alteration finds, Or bends with the remover to remove</b>
   </p>
   <p>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변하는 것을 보면 변하거나, 사랑하는 이가 변한다고 해서 변하는 사랑 말이다.</p>
   <p>&nbsp;</p>
   </blockquote>
<p>&nbsp;</p>
<p>사랑은 쉽게 변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바뀐다고 변하거나,&nbsp; 사랑하는 이가 변한다고 해서 함께 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장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사랑도 변하는데,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꾼다. 사람도 변하고, 관계도 변하고, 처음의 감정도 조금씩 다른 모습이 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전하려고자 한 것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것 아닐까.</p>
<p>
   <br />
</p>
<p>설렘은 익숙함이 될 수 있고 익숙함은 편안함이 될 수 있다. 사랑의 형태는 변할지라도 끝까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마음만은 쉽게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p>
<p>&nbsp;</p>
<p>어쩌면 셰익스피어가 말한 '사랑'은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이 아닌 시간이 흘러도 계속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p>
<p>&nbsp;</p>
<p>&nbsp;</p>
<p>&nbsp;</p>
<p>
   <span style="font-size: 18px;"><b>3. '사랑'하는 마음만은 오직 내 것</b></span>
</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width: medium; border-style: none; border-color: currentcolor; border-image: none;" />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wGbMYLjIpQ?si=A3eFZiKzAVyMwJoc"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p>
   <p>'Nothing in the world belongs to me, but my love.'</p>
   <p>세상에 내 것인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 사랑만은 오직 내 것이야.</p>
   <p>&nbsp;</p>
   </blockquote>
<p>&nbsp;</p>
<p>얼마 전, 미츠키의 〈My Love Mine All Mine〉을 들었다.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사랑만은 내 것이라는 가사. 생각해 보면 정말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시간도 붙잡을 수 없고, 사람도 내 뜻대로 곁에 머물게 할 수 없고, 좋아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변하거나 사라진다.</p>
<p>&nbsp;</p>
<p>하지만 '사랑' 만큼은 오직 내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사랑할지는 끝까지 내 선택이며 그 마음만큼은 정말 소중하며 누구도 대신 정할 수 없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p>
<p>&nbsp;</p>
<p>그래서 나는 이 마음을 오랫동안 사랑하는 데에만 쓰고싶다. 미워하는 데 마음을 오래 쓰고 싶지 않다. 미움도 사랑처럼 마음을 쓰는 일이니까. 같은 마음이라면 나는 조금 더 오래 사랑하는 것들에 남겨두고 싶다. 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어도, 오늘도 내가 사랑하기로 한 것들을 영영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p>
<p>
   <br />
</p>
<p>오직 내 것만인 사랑.</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나요.</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
   <br />
</p>
<p>우리는 사랑 앞에 수많은 수식어를 붙인다. 영원한 사랑이어야 하고, 진정한 사랑이어야 하고, 특별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사랑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가아니라, 내가 얼마나 온전히 사랑했는지로 남는 것이 아닐까.</p>
<p>
   <br />
</p>
<p>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어도, 영영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 그 마음만은 오직 내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35901_hpzepcmp.jpg" alt="김주하에디터.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김주하]]></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21:03:1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22</guid>
<title><![CDATA[[리뷰 URL 취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22</link>
<description><![CDATA[모두에게 쓴 책, 그리고 누구에게도 쓰지 않은 책]]></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div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20px;"><b>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b></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댓글로</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고한 리뷰 링크를</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기입해 주세요!</span></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자신의 글 외에도,</div>
<div align="center">다른 구성원분들이 쓴 글을</div>
<div align="center">이 공간에서</div>
<div align="center">스스럼없이 향유해 보셨으면 합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문화예술은</div>
<div align="center">서로 소통을 하고</div>
<div align="center">함께 향유했을 때에</div>
<div align="center">더욱 다채로워지고</div>
<div align="center">풍요로워집니다.</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이름 + URL 링크</span></div>
<div align="center"><span style="color: #ff0000;">자신의 글을&nbsp;보실 분들께 하실 말씀!</span></div>
<div align="center">을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div>
<div align="center"><br /></div>
<div align="center">&nbsp;</div>
<div align="center">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30094149_iddyaudd.jpg" alt="앞표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밝게.jpg" style="width: 700px; height: 1038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div>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Thu, 30 Jul 2026 09:42:05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7</guid>
<title><![CDATA[[도서]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7</link>
<description><![CDATA[고궁에서 장인까지, 아주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05523_dlghzynv.jpg" alt="3.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_평면표지.jpg" style="width: 700px; height: 96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b>고궁에서 장인까지,</b>
</p>
<p style="text-align: center;">
   <b>아주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b>
</p>
<p style="text-align: center;">
   <b><br /></b>
</p>
<p style="text-align: center;">
   <b>대한민국 대표 문화유산 사진작가가 포착한</b>
</p>
<p style="text-align: center;">
   <b>'가장 한국적인 순간'</b>
</p>
<p>&nbsp;</p>
<p>&nbsp;</p>
<p>우리는 종종 화려한 유럽의 건축물이나 예술품 앞에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정작 우리의 문화유산은 익숙하다거나 오래되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깎아내리고는 한다. 하지만 최근 고궁 야간 산책, 박물관 굿즈(뮷즈), 전통문화 행사와 전통 다과 등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좀 더 감각적으로 즐기려는 'K-헤리티지(K-Heritage)' 열풍이 불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예술'에 담긴 새로운 아름다움을 향한 대중의 높아진 관심을 입증한다. 2026년 7월 대한민국 최초로 개최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거치며 한국의 문화유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지금,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 미학을 발견하는 안목을 갖추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p>
<p>&nbsp;</p>
<p>[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미처 몰라본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에세이다. 30년 차 문화유산 사진작가인 저자는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거나 접하기 어려웠던 우리 문화유산의 새로운 모습을 70여 장의 고화질 사진으로 펼쳐낸다. 문화유산을 오래된 유물이나 익숙한 관광 명소, 즉 '보존하고 관람하는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호흡하며 살아 있는 이야기가 담긴 대상'으로 조명하며, 우리 문화유산이 품어온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포착하여 '우리 예술'의 감각과 그 깊이를 전한다.</p>
<p>&nbsp;</p>
<p>"혼신으로 그 맥박을 이어 그들이 방금 태어난 듯 다시 반짝인다"라는 추천사처럼 잠들어 있던 문화유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저자의 사진들을 수록한 이 책은 그 구성 또한 단연 돋보인다. 고창의 무장읍성이 지닌 신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풍경을 담은 사진을 표지 커버 뒷면에 담아 포스터로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곁에 두고 싶은 아트북이자 선물용 도서로서의 매력을 한층 더했다.</p>
<p>&nbsp;</p>
<p>["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누군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몰입하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미쳤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미친 짓'은 일을 대하는 내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특히 문화유산을 찍을 때 이렇게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시대를 해석하고자 하는 호기심도, 인간과 사물에 대한 애정도, 시간이 쌓은 아름다움도 모두 담기지 않는다. 내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만난 그 순간들을 전해주고 싶다. 문화유산 사진작가로서 내 몫은 거기에 있다."] - 본문 중에서</p>
<p>&nbsp;</p>
<p>비 오는 날이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눈 오는 날이면 소복하게 쌓여가는 눈을 바라본다. 한여름에는 온몸이 녹아내릴 듯한 무더위를 견디고, 한겨울에는 금방이라도 살갗을 에는 한파와 맞선다. 여한 없는 한 컷을 위해 같은 장소를 수십 번 방문하고, 원하는 빛과 시간을 만나기 위해 수년을 기다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고된 노동이지만, 저자에게는 문화유산이 품어온 이야기를 가장 온전하게 기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책에 실린 사진마다 배어 있는 깊고 단단한 시선은 그렇게 30여 년간 현장을 누비며 쌓아온 문화유산 사진작가로서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p>
<p>&nbsp;</p>
<p>저자의 사진이 백과사전이나 교과서 또는 보고서 등에서 흔히 보는 정형화된 사진과 다른 지점은 문화유산 저마다의 생생한 현장성과 그 안에 축적된 서사를 한 장의 프레임에 담아냈다는 데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진흥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등과 협업하며 연간 6000건 이상의 문화유산을 촬영해 온 저자는 조선왕릉부터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까지, 우리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핵심이 된 사진들을 작업했다. 또한 20여 년간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일에도 참여해 왔는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봉사·활용 부문 대통령 표창을, 2023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과 국가유산청장 표창을 받았다.</p>
<p>&nbsp;</p>
<p>저자에게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그저 보기 좋게 옮기는 기술이 아니다. 단순한 '설명'을 넘어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저자는, 매 순간 치밀한 준비와 헌신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찰나의 우연'을 포착하여 오래된 공간과 사물을 현대의 감각으로 되살려낸다. 묵묵히 한 길을 걸으며 만들어진 저자만의 진중한 시선은 이 책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문화유산을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마주하게 하는 깊은 울림을 전할 것이다.</p>
<p>&nbsp;</p>
<p>매년 수많은 사람이 고궁과 왕릉을 찾지만, 푸른 어둠 속에서 열아홉 칸의 신실이 빛나는 종묘 정전이나 오래된 성곽 위로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듯한 순간을 직접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공간, 사람, 유물, 삶이라는 4가지 축을 중심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 문화유산의 깊은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p>
<p>&nbsp;</p>
<p>1장에서는 종묘 정전, 궁궐, 조선왕릉, 한양도성, 수원화성 등 오래된 건축물들이 시간과 빛 그리고 현대의 풍경 속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록한다. 2장에서는 사라져 가는 전통을 손끝으로 이어가는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들을 비롯해 종가의 제례, 전통 가옥, 읍성 등을 조명한다. 이어 3장에서는 고인돌,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 국외 소재 문화유산 등 유물의 결정적 순간을 담기까지의 과정과 생생한 후일담을 풀어낸다. 마지막 4장에서는 문화유산 사진작가로 살아온 저자의 삶과 선택, 신념을 진솔하게 들려준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국내외 유무형 문화유산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포착해 온 저자의 사진은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일회성 시각 자료를 넘어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 문화유산의 진면목과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오롯이 마주하게 한다.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물론, 한국사를 좋아하는 '역사 덕후'와 사진이 취미인 사람, 복잡한 일상 속 쉼과 영감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은 우리 문화유산만의 가치와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든든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각각의 문화유산이 가진 진정한 가치와 깊은 울림을 느끼며, 오랜 시간이 품어온 '한국의 숨결'을 고스란히 호흡해 보자.</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p>
<p>&nbsp;</p>
<p><b>서헌강</b></p>
<p>&nbsp;</p>
<p>30여 년간 국내외 여러 유무형 문화유산을 사진으로 기록해 온 대한민국 대표 문화유산 사진작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진흥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등 주요 공공기관들과 협업하며 연간 6000건 이상 문화유산들을 촬영하고 있다.</p>
<p>&nbsp;</p>
<p>천안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며 첫 개인전을 열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샘이깊은물]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현장을 누비다 '문화 다큐멘터리'로 분야를 바꾸어 문화유산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p>
<p>&nbsp;</p>
<p>2009년 조선왕릉부터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 2023년 가야역사유적지구, 2025년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까지 우리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핵심이 된 사진들을 작업했으며, 국외 소재 문화유산의 실태를 조사하는 일에도 20여 년 넘게 참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에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봉사·활용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2023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과 국가유산청장 표창을 받았다.</p>
<p>&nbsp;</p>
<p>매일 새벽, 그날의 기대와 설렘으로 눈을 뜬다는 저자는 '문화유산'이라는 렌즈로 오늘도 여전히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물을 잇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박형주]]></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20:55:30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6</guid>
<title><![CDATA[[Opinion] 상실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법, ‘릴리와 찌르레기’가 보여준 애도의 단계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6</link>
<description><![CDATA[애도는 슬픔을 지워내는 일이 아닌,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이 글은 영화 결말에 대한</p>
<p style="text-align: center;">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01837_hipbemsz.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29 오후 6.15.19.png" style="width: 700px; height: 466px;" /></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모든 생은 언젠가 끝을 맞이하기에 더욱 귀하다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삶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과 상실을 실제 견뎌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일상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삶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영화 《릴리와 찌르레기》는 어린 자녀를 잃은 한 부부가 그 무력감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견뎌내는 과정을 그린다. 아내 릴리는 일터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남편 잭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하루하루를 버텨낸다.</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그러던 어느 날, 릴리의 삶에 찌르레기 한 마리가 불쑥 날아든다. 애써 밀어내려 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상실의 형상을 한 채.</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b><span style="font-size: 18px;">애도의 첫 단계, 직면하기</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02650_bplghrxi.jpg" alt="oWXZtsR4ff8kAIA8TwZmtw.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nbsp;</p>
<p>&nbsp;</p>
<p>릴리는 아이를 잃은 뒤 마트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삶이 거의 멈춰 있다시피 한다. 집에서는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뿐, 살아가기보다 버텨내는 하루를 반복한다. 그런 그녀가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잡초가 무성해진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엉켜 있던 풀을 뽑고 흙을 고르며, 다시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것이다.</p>
<p>&nbsp;</p>
<p>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한 마리의 찌르레기가 나타나 그녀를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쫓아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찌르레기는 번번이 되돌아와 그녀를 향해 날아들고 결국 릴리는 크게 다치기까지 한다. 이는 릴리가 그동안 외면하고 미뤄두었던 상실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p>
<p>&nbsp;</p>
<p>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은 다시 아파질 용기를 내는 일이기도 하다.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피하려 했던 상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으로 돌아가는 길과 상실을 마주하는 길이 결국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상실을 대하는 모순적인 마음</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02618_mhldcagk.png" alt="스크린샷 2026-07-29 오후 6.14.49.png" style="width: 700px; height: 386px;" /></p>
<p>&nbsp;</p>
<p>&nbsp;</p>
<p>릴리는 변화하려는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찌르레기를 없애려 한다. 쥐약을 사고, 돌을 던지며 어떻게든 몰아내려 애쓴다.</p>
<p>&nbsp;</p>
<p>하지만 막상 찌르레기가 다치자, 그녀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주저앉아 어떻게든 살려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존재였음에도, 막상 그것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누구보다 절박하게 붙잡으려 하는 것이다.</p>
<p>&nbsp;</p>
<p>바로 이 장면에서 상실이 지닌 가장 복잡한 감정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사랑했던 존재가 내 삶에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붙들고 있는 마지막 흔적이기도 하다.</p>
<p>&nbsp;</p>
<p>그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감정이 공존한다. 아픔은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그 아픔마저 사라지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연결까지 희미해질 것만 같아 선뜻 놓지 못하는 것이다. 애도란 그 모순을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임을 릴리 역시 조금씩 깨달아간다.</p>
<p>&nbsp;</p>
<p>&nbsp;</p>
<p>&nbsp;</p>
<p><b><span style="font-size: 18px;">나란히 헬멧을 쓰고</span></b><b><span style="font-size: 18px;">&nbsp;향하는 '수용'의 단계</span></b></p>
<hr style="height: 1px; background-color: #999999; border: medium;" />
<p style="text-align: center;"><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02631_nhulgyem.jpg" alt="SdC1gUFwlJPVOZKLaWG9Xg.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nbsp;</p>
<p>&nbsp;</p>
<p>아이를 잃은 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견뎌내던 릴리와 잭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아이의 이름을 마침내 부르고, 과거의 기억을 조심스레 나누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침묵으로 남겨두었던 상실을 비로소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며 수용하게 된 것이다.</p>
<p>&nbsp;</p>
<p>그 변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나란히 헬멧을 쓴 채 정원으로 향한다. 언젠가 찌르레기가 또 날아와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이상 그 정원을 피하지 않는다.</p>
<p>&nbsp;</p>
<p>헬멧은 상실에게 무방비로 삶을 내어주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두 사람의 변화를 보여준다. 피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슬픔을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변화.</p>
<p>&nbsp;</p>
<p>그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가 건강한 애도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202334_wguibdpl.jpg" alt="최수경 에디터.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수경]]></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20:20:38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784</guid>
<title><![CDATA[[Opinion] 재능이 없어도 예술을 할 수 있을까요 [만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784</link>
<description><![CDATA[을 통해서 재능과 예술의 상관관계의 허구성을 말해본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justify;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초등학교 때 나는 화가를 꿈꿨다. 방과후 미술 수업이 재밌었고 선생님도 나에게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한 아이의 그림을 보는데 정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걔는 이미 화가였다. 아마 이런 경험을 예술가라면, 예술을 꿈꾸는 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 전에 고민하겠지, 재능과 예술의 상관관계에 관해서. 여기 같은 고민을 안은 한 청년이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 〈왼손잡이 에렌〉의 주인공 아사쿠라 코이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이야기는 아사쿠라가 고등학생일 때에 시작한다. 아사쿠라는 자기가 가장 잘 그리는 줄 알았다. 적당히 잘 그려서 적당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했다. ‘천재’ 에렌과의 만남 전까지는. 에렌은 뛰어난 그림 실력과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심미안을 가진 그야말로 ‘천재’다. 에렌이 길을 가던 중, 미술 공모전 우수작들의 포스터가 붙은 벽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림들이 너무 형편없다. 이에 분노한 에렌은 그 위에 그라피티로 그림을 그린다. 이건 진짜 그림이 아니라고. 다음 날, 에렌의 그림은 동네에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다. 궁금한 마음에 그림을 보러 간 아사쿠라는 그곳에서 충격을 받고 만다. 나보다 잘 그리는 애가 존재하다니!</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사쿠라는 에렌의 그림을 보고 더 잘 그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에렌을 만나게 되면서 아사쿠라는 자기가 못 그린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에렌보다 부족할뿐더러, 다른 입시생들보다 한참을 못난 실력이다. 에렌은 화를 내며 말한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인생을 걸어봤자 불행해질 뿐이라고. 그런 에렌에게 아사쿠라는 울면서 말한다. 나는 뭔가가 될 거라고. 그게 뭔지 모르지만, 뭔가가 되고 싶다고. 뭔가 되지 못하면 지루해서 못 살 것 같다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사쿠라는 그렇게 평생 ‘재능’과 부딪힌다. 아사쿠라에게도, 우리에게도 재능은 너무나 결정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옆에 에렌이 있으니 더 그렇다. 아사쿠라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에렌처럼 되고 싶지만 우리 모두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재능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예술을 할 수 있는 자격증처럼 느껴진다. 재능이 없으면 예술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주변 인물들은 아사쿠라가 미대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에서 재능이란 출발선이자 자격증이다. 가진 사람만 발휘할 수 있는 정당한 반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쫓아야 하는 결승선이고 동시에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이데아다. 그렇기에 곱씹을수록 아픈 고통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사쿠라는 운이 좋게 미대에 들어간다. 모두 아사쿠라의 합격을 운이라고 말한다. 그가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아사쿠라는 역시 운이 좋게 본인이 원했던 광고 회사에 들어간다. 빛나는 디자이너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광고 회사에 들어간 아사쿠라는 천재 팀장과 뛰어난 후배 사이에서 재능이 없음을 실감한다. 그러다 자기에게 남은 것은 근성밖에 없다며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근성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려다가 기절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아사쿠라는 그렇게 노력한다면 천재 팀장에게 인정받고 에렌과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고 회사의 일이란 그리 간단치 않다. 하나의 작품에도 세 사람의 아이디어가 동시에 들어가고, 이 아이디어가 오직 팀장의 것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잘했으면서도 경력을 이유로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빠지거나, 전혀 관계없는 영업의 일을 뛰어야 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6235748_ttdgqyeo.png" alt="왼손잡이 에렌_!.pn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
</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아사쿠라는 이런 일들을 예술이라고 생각할까. 적어도 자기가 꿈꾸는 예술과 멀어 보이지만, 아사쿠라가 마주한 일들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서 예술이 굴러가는 방식이 아닐까. 사회가 분화하고 복잡해진 만큼 예술 역시 어려워졌다. 산업과 자본은 예술과 밀접해 있고 조직이란 이름으로 여러 공정을 거쳐서 예술이 이뤄진다. 신성한 영역처럼 고고하게 솟은 예술의 시대는 갔다. 하지만 어쩐지 예술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재능을 논하고 한 사람의 예술성을 논한다. 예술이 특정한 예술가의 소유물인 것처럼 말이다. 이제 한 사람의 재능으로 예술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듯 말이다. 재능의 발휘로 완성되는 예술만이 예술이라는 듯.</p>
<p style="text-align: justify; ">
   <br />
</p>
<p style="text-align: justify; ">번번이 재능의 벽 앞에서 좌절하던 아사쿠라는 아트디렉터라는 명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다. ‘잡음을 없애는 것’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모든 일을 쳐내는 것을 자기의 일로 즉 예술로 인식한다. 어쩌면 이는 재능을 강조하는 예술의 시대가 예술가에게 요구하던 길일지 모른다. 그러다 아사쿠라는 자기 의견을 무시하던 다른 천재 예술가들과 의견 조율이 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게 갈등이 발생한 끝에 아사쿠라는 자기가 그렇게 살았음에도 이들처럼 되지 못했음을 알고 촬영 중간에 빠져나온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에렌과 재회한다. 여전히 그라피티를 그리고 있는 에렌을. 에렌은 그림을 통해서 코이치에게 이렇게 말한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
   <i>믿는 건 언젠가 꿈이 이뤄지는 것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냐.</i>
</p>
<p style="text-align: center; ">
   <i>언젠가 떠올렸을 때 자부할 수 있는 걸 믿어!</i>
</p>
<p>
   <br />
</p>
<p>아사쿠라는 다시 촬영장으로 뛰어가서 사과한다. 재촬영을 부탁하며 허리를 숙인다. 그러자 모두가 아사쿠라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의견을 구한다. ‘아트디렉터님,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그렇게 아사쿠라는 천재가 되지 못했지만, 근사한 아트디렉터로 거듭난다. 아사쿠라를 그렇게 만든 건 아주 환상적인 재능이 아니다. 책임감과 동료들에게 사과하는 법이었다. 아사쿠라가 근사한 아트디렉터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목격한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데에 재능보다 더 필요한 게 있을지 모른다고.</p>
<p>
   <br />
</p>
<p>아사쿠라는 광고 회사에서 내내 재능의 벽에 부딪히면서 변변치 않은 작품을, 때로는 칭찬받는 작품을 내놓는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소통하고 때론 갈등하고 화해한다. 그 과정이 모두 아사쿠라의 작업이었고 예술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재능이란 환상 속에서 우리는 옆에 있는 동료들을, 그 동료들 앞의 우리를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아사쿠라는 앞으로도 멋진 예술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술가다. 그가 예술을 한다면,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모은다면, 그렇게 고민하고 수정한 끝에 모두의 시간을 모은다면 말이다.</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정진영]]></dc:creator>
<pubDate>Sun, 26 Jul 2026 23:58:24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5</guid>
<title><![CDATA[[PRESS] 오 캡틴, 마이 캡틴!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 [공연]]]></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5</link>
<description><![CDATA[‘죽은 시인의 사회’ 연극, 한국 초연]]></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91113_nztmaghc.gif" alt="죽은 시인의 사회_포스터.gif"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p>
<p>&nbsp;</p>
<blockquote style="border: 1px solid rgb(222, 223, 223); background-color: #f7f7f7; padding: 5px 10px;">
   <p>&nbsp;&nbsp;<br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i>&nbsp;</i></p>
   <p style="text-align: right; "><i>— 〈죽은 시인의 사회〉 중</i><br /></p>
   <p>&nbsp;</p>
   </blockquote>
<p>&nbsp;</p>
<p>1959년 미국. 전통, 명예, 규율, 일류로 이루어진 4대 교훈을 따르는 웰튼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인생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작품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 문장을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명언으로 각인시키기도 했다.</p>
<p><br /></p>
<p>해당 영화를 원작으로 둔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가 지난 7월 18일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카드홀에서 막이 올랐다. 지난 2016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첫 무대화 이후 10년 만의 한국 상륙이다.</p>
<p><br /></p>
<p>연극은 큰 각색 없이 영화와 내용 흐름을 동일하게 가져가되, 세부적인 내용 면에서는 연극 문법에 알맞은 변형이 있었다.</p>
<p>&nbsp;</p>
<p>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의 사용이었다. 연출과 윤색을 맡은 조광화 연출가는 프로그램 북에서 “영화편집본 같은 짧고 빠른 장면들은 활력이 넘치나 무대에 담기 어려운 점도 있는데, 음악의 힘으로, 인물들의 불안정한 열정과 빠르고 짧은 장면들을 이어붙이려 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p>
<p><br /></p>
<p>그 말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의 첫 장면은 음악 그리고 안무와 함께 시작했고, 커튼콜 역시 음악과 안무와 함께 끝났다. ‘피츠’와 ‘홉킨스’ 역의 배우는 연기와 동시에 클라리넷과 트럼펫 연주를 하기도 하는데, 이 점 역시 인상 깊었다.</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91159_abnnwibl.jpg" alt="죽은 시인의 사회_1.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 style="text-align: center; "><span style="font-size: 14px; color: #666666;">커튼콜, 배우들은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인빅터스(Invictus)〉 시구 중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을 노래에 맞춰 외치며 춤춘다.&nbsp;</span><span style="color: #666666; font-size: 14px;">사진=최수인</span></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nbsp;</p>
<p>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작중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현재를 살아라.’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인생을 즐기라는 것은 몇 년 전 유행했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와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는 비슷한 듯 다르다.</p>
<p>&nbsp;</p>
<p>키팅 선생님은 인생을 만끽하되, 내동댕이치지는 말라며 ‘도전할 때와 물러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욜로’가 순간의 즐거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카르페 디엠’은 극 중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p>
<p><br /></p>
<p>이러한 장면은 키팅 선생님 역시 기존의 질서와 체제 안에서의 절충안을 제시한다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1989년 영화 개봉 이후 40년이 되어가는 현재도 유효하며, 누군가에게는 지금도 필요한 문장일 것이다.</p>
<p><br /></p>
<p>공연장에는 가족 단위로 온 관람객도 많았다. 부모 세대에게 원작이 인생 영화였다면, 자녀 세대에게는 이번 연극이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처음 접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p>
<p>&nbsp;</p>
<p>이에 더해 커플의 데이트나 젊은 팬층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관객으로 좌석이 채워졌다.</p>
<p><br /></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91331_zzokbwge.jpg" alt="죽은 시인의 사회_닐페리.jpg" style="width: 700px; height: 934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666666; font-size: 14px;">닐 페리 역, 찬희</span></p>
<p style="text-align: left; ">&nbsp;</p>
<p>&nbsp;</p>
<p>배우들의 ‘연극 데뷔’가 많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p>
<p>&nbsp;</p>
<p>‘존 찰스 키팅’ 선생님 역의 배우 차인표와 연정훈은 드라마와 영화에 여러 번 출연하여 익숙한 배우이나 연극은 첫 도전이다. ‘닐 페리’ 역을 맡은 이재환(VIXX 빅스, 켄)과 찬희(SF9) 역시 첫 연극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닐의 대사 하나하나가 더욱 와닿았다.</p>
<p><br /></p>
<p>이 외에도 많은 주조연이 신인이었지만, 그들의 연기만큼은 기성 연극배우 못지않았다. ‘찰리 달튼’, 혹은 자신이 지은 이름 ‘누완다’ 역은 배우 이종혁의 아들 ‘이탁수’가 맡아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수준급의 연기 실력을 보여주며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소년 이미지를 완벽히 소화해 냈다.</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91309_ihmydfdq.jpg" alt="죽은 시인의 사회_2.jpg" style="width: 700px; height: 394px;"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14px; color: #666666;">사진=최수인</span></p>
<p>&nbsp;</p>
<p><br /></p>
<p>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오는 9월 13일 일요일까지 진행된다.</p>
<p>&nbsp;</p>
<p>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스포일러 없이 연극 먼저 관람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29191556_yhkcgcpr.jpg" alt="PRESS_최수인.jpg" style="width: 400px; height: 219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content:encoded>

<dc:creator><![CDATA[최수인]]></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19:16:31 +0900</pubDate>
</item>
<item>
<guid isPermaLink="false">81811</guid>
<title><![CDATA[[Opinion] 지구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나 보여줄게 - 호프 [영화]]]></title>
<link>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1811</link>
<description><![CDATA[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달려 나갈 &#039;희망&#039;]]></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나홍진 감독의 신작 &lt;호프&gt;. &lt;곡성&gt; 이후로 10년 만에 개봉한 차기작이라고 한다. 나홍진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흥미롭게 봤던 터라 이번 작품 역시 꽤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lt;호프&gt;의 평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1점 아니면 4점뿐인 극단적인 후기 글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에 4점을 줬다는 이후로 사람들에게 악플 테러를 받아 해명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쯤 되니 &lt;호프&gt;가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이렇게 극단적으로 평이 갈리는지 너무 궁금해졌다. 그리고 과연 나는 악평을 남길지 호평을 남길지도 궁금해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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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 font-size: 18px;"><b>한국 SF 장르의 새로운 발견</b></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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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재밌는데?’였다. 영화는 SF 장르에 맞게 외계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외계인들은 지구인인 호포리 사람들과 대적하며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공격성을 띠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외계인의 생김새다. 외계인의 생김새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에일리언’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초록빛 피부에 공룡처럼 거대한 몸집, 그리고 다소 기괴한 신체 구조까지. 한국 시골 마을인 ‘호포리’에 등장하기엔 다소 이질적인 모습이지만, 오히려 그런 언발란스함이 영화의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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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외계인이 등장하기 전 초반 40분 동안 호프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습을 상상에 맡긴다. 다소 일상적인 느낌의 영화 초반부는 소가 죽은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 범석과 성기의 일행이 각각 소를 죽게 만든 정체를 찾아가는 것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 정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언제 그 생물체가 등장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나의 공포심을 점점 고조시켰다. 마침내 외계인의 모습이 등장했을 때는 그 생명체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영화의 2막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본격적인 외계인과 인간의 추격 액션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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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pan style="font-size: 18px;">한국적인 감성에서 느껴지는 매력</spa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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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범석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여 호포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외계인 ‘바미기르’가 어린 외계인 ‘칼리’의 부모라는 오해를 하게 된다. 여기서 '칼리'는 양배가 산에서 죽였던 외계인으로, 어린아이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범석은 성애의 차를 타고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바미기르를 죽이려고 총을 쏜다. 그런데 그 순간,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범석은 마음이 약해지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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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후 범석은 양배가 바미기르의 아이를 쏴 죽였다고 생각하여 ‘이런 행동을 하고도 웃음이 나오냐’라며 아이를 잃은 바미기르에 이입한다. 이 부분이 재미있었다. 외계인이라는 인간과 전혀 다르게 생긴 종족에 이입하며 모성애를 느끼는 범석의 모습은 한국인 특유의 ‘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더욱 범석은 작은 항구 마을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유대감을 더 깊게 느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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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성기가 외계인 ‘마베이요’에게 도발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크기와 힘에서 압도적으로 강력한 상대인 마베이요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당하자, 성기는 화가 나서 ‘지구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나 보여줄게.’라며 도발한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성기의 패배였다. 그렇지만 이 장면에서 한국 영화 특유의 감성이 느껴졌다. 영화 ‘괴물’이나 ‘타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 말이다. 상대를 도발하며 싸움을 유발하는 한국 범죄 영화 특유의 클리셰가 외계인을 상대로 나타나니 재미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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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font-size: 18px;"><b>성애, 범석, 그리고 호포리 사람들</b></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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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호포리 사람들은 정말 대담하고 정의롭다. 외계인을 인생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들치고는 아주 의연하게 대처하고,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르겠는 각종 총과 무기들로 외계인에 맞선다.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총으로 무장하여 트럭에서 외계인에 맞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의 전투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호포리 사람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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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특히 성애는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럴 순 없는 거예요!’라며 괴물에 맞서 끝까지 싸운다. 성애는 경찰이라고 하기엔 다소 허술하고 말투도 어린애 같지만, 본인이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간다. 특유의 명랑함과 당찬 모습으로 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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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범석도 마찬가지로 마을의 권위 있는 경찰 경위치고는 다소 허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범석은 미지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이는 우리가 주인공에게 더 몰입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개연성과 현실성을 떠나 호포리의 상황 속에서 범석은 슈퍼 히어로처럼 그려지기보단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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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font-size: 18px;"><b>앞으로 나아갈 희망</b></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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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영화의 결말은 함선이 침몰하며 극으로 치닫는다. 범석 일행과 외계인의 스릴 있는 카체이싱 장면 이후로 성기는 표지판에 부딪혀 떨어지고, 외계 함선이 산에 떨어지며 이들은 마을로 무작정 뛰기 시작한다. 범석은 성기를 잃은 후 성애와 대화하던 중, 머릿속이 잘 정리가 안되고 마음이 이상하다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여기서 솔직히 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인간으로서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건 무력감과 허탈감뿐이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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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하지만 범석과 성애, 낙연은 계속 달린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지라도 무작정 달려서 사람들을 구하러 간다. 왠지 이 장면에서 호프의 제목이 왜 '호프’인지 깨달았다. 어쨌든 이 영화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불가항력의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인간의 끈기와 존엄성을 말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거의 것은 이미 버려둔 채 앞으로만 나아가는 인간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전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은 한낱 작은 먼지일 뿐이니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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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웃음이 나왔다. 이 영화에선 외계인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이들이 어떻게 총을 가졌는지, 대한민국 정부는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호프에서 중요한 것은 미지의 존재에 맞서 싸우는 것뿐이다. 진지한 고찰이 들어가는 순간 이 영화는 맛이 없어진다.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전투 민족정신. 이것이 호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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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CDATA[김희정]]></dc:creator>
<pubDate>Tue, 28 Jul 2026 23:18: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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