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놀이는 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갑자기 뛰다가 멈추기도 하고, 별것 아닌 물건 하나가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그 순간 재미있느냐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별다른 목적 없이도 순간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삶에는 하나둘 '목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어린 시절처럼 즉흥적으로 하기보다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고, 해야 할 일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삶을 즐기는 법도 조금씩 잊어버린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이 연출해 2017년 초연한
예측할 수 없기에 놀이가 된다
1막은 무용수들이 천진난만하게 한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를 동경해 그 사람의 행동을 무작정 따라 해본 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1막은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때로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용수들은 헹가래를 치고, 마이크의 움직임에 재미를 느낀 듯 춤을 춘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미친 듯이 웃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는 사슴처럼 변해 무대를 뛰어다닌다.
무대에는 분명 안무와 질서가 존재하지만 관객에게 그다음 움직임은 쉽게 예측되지 않는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연임에도 마치 무용수들이 그 자리에서 실제로 놀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바로 이 예측 불가능성이 1막을 지배한다.
특히 1막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움직임은 더욱 격렬해지고, 난데없이 무수히 많은 초록색 공이 무대를 뒤덮는다. 무용수들은 쏟아지는 공을 맞으면서도 격렬하게 춤추고 뛰어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씩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한다.
다시 일어나려 비틀거리지만, 그 몸부림은 조금 전까지의 자유로운 움직임과는 어딘가 다르다. 놀이처럼 보였던 움직임에 어느 순간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며든다. 그렇게 1막은 마무리된다.
놀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반복이 남는다
1막에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면, 2막에서는 오히려 다음 행동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초록색 공 안에서 느리지만 규칙적으로 걸으며 2막이 시작된다. 1막의 무용수들과 달리 이들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표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내 회사처럼 보이는 공간에 정장 차림의 남녀가 집단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일정한 리듬에 맞춰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움직임을 이어간다. 1막의 자유분방한 신체와 달리 2막의 신체는 통제되어 있으며, 움직임 역시 형식적이다.
표정에서도 두 막의 차이는 선명하다. 1막에서 무용수들이 천진난만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을 드러냈다면, 2막의 얼굴에서는 그러한 감정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이들이 항상 무표정한 것은 아니다. 안무 중 다른 사람을 향해 '사회적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1막에서 보았던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후반으로 갈수록 반복은 조금씩 균열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같은 움직임을 이어가던 무용수가 쓰러지기도 하고, 집단의 질서에서 벗어난 듯한 행동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이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이를 제지한다. 개인이 흐트러질 때마다 집단은 그를 다시 규칙적인 움직임 속으로 되돌려놓는다.
1막에서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면, 2막에서는 다음 순간을 예상하게 된다.
에크만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놀이의 부재를 단순히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이 1막의 예측 불가능성과 2막의 반복을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성인이 되며 우리가 잃어버린 '놀이의 감각'을 몸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제 1막에서 2막으로 넘어왔을까
1막과 2막의 대비는 어린이와 성인의 시간처럼 다가왔다. 어린 시절의 하루는 즉흥적이기에 예측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놀이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즉흥성이 일상을 '놀이'로 만들었기에 모든 것이 재미있고 흥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성인이 된 우리의 하루는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다. 일어나서 이동하고, 일하고, 돌아와 쉬고, 다시 일어난다. 여행을 떠날 때조차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성취하기 위해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고, 그 계획에 맞춰 움직인다. 물론 계획은 삶을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동안, 어린 시절 일상의 모든 것을 '놀이'처럼 느끼게 했던 재미와 호기심을 어느새 잃어버렸다.
성인의 삶에서는 대부분의 행동에 목적과 결과가 요구된다. 무엇을 배우면 그것이 어디에 도움이 될지 생각하고, 무언가를 시작하면 어떤 결과를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행위가 오히려 어려워진다.
놀이란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무엇을 얻을지 미리 정하지 않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에 자신을 맡기는 것.
그렇다면 놀이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능력, 그 자체를 잃는다는 뜻에 가깝다.
2막을 살아가면서도 1막을 잊지 않기 위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2막과 같은 규칙과 반복이 필요하다. 성인이 된 이상 모든 순간을 1막처럼 즉흥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며, 때로는 즐거움보다 책임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공연의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움직임을 이어가던 무용수들은 때때로 쓰러지거나 정해진 질서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집단의 움직임 속으로 되돌려놓는다.
출처: medici.tv, 영상 캡처
그것은 끊임없이 같은 리듬을 유지해야 하는 삶에 생겨난 하나의 균열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균열이 필요하다. 반드시 무언가를 얻지 않아도 되는 시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해보는 시간 말이다.
어린 시절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이 된 우리의 삶에서 놀이까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1막과 2막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필요도 없다. 2막의 규칙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때때로 1막처럼 다음 순간을 궁금해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에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어쩌면 노는 법을 잊은 게 아니라, 놀 이유를 먼저 찾게 되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무대 위 무용수는 쓰러진 뒤에도 결국 다시 일으켜졌다. 반복의 리듬 속에서 잠시 흐트러지는 순간, 그것은 무너짐이 아니라 균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