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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하나, 둘, 셋 하면 누르는 거야!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by 전주현 에디터
2026.09.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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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둘, 셋 하면 누르는 거야!"

      구매 확정 버튼을 누르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로딩 중입니다' 문구가 몇 초간 이어지다가 인터넷 뱅킹 알람이 울렸다. 통장에서 순식간에 130만 원이 빠져나갔다. 내년 1월이 만기일인 적금을 깼고, 나는 이제 파리행 항공권을 가진 여자가 되었다.

      21살 때, 나는 우연히 SNS를 통해 접한 사람의 영향으로 파리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작가였고, 겨울마다 여행을 떠났다. 잘 차려진 밥 대신 라떼로 배를 채우고 저렴한 숙소를 찾기 위해 모르는 사람의 집에서 하숙하는 모습이 낯설고 놀라웠다. 파리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떠나게 되는 걸까? 나는 그녀의 파리 여행기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했고, 그녀가 낡은 캠코더로 찍은 브이로그를 받아보았다. 짤막한 쪽글까지도.

      그녀의 영상과 글을 통해 들여다본 파리는 서울보다 좋을 게 없었다. 기차 시간은 뒤죽박죽 바뀌었으며 소매치기들이 뒷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렸다. 새벽까지 셔터를 올려두는 한국의 가게들과 달리, 파리의 식당과 카페는 대체로 해가 지면 문을 닫는 것 같았다. 몇몇 남자들이 동양인 여자라는 이유로 질 낮은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조차 여행의 낭만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방 가위로 앞머리를 자르고 숙소 호스트를 위해 간식을 준비했으며, 뾰족구두를 신고 자전거를 탔다. 빈티지 옷 가게에서 파리지앵의 사랑을 오래간 받았을 법한 코트를 사 입었으며,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마치 어둠을 무대 삼아 반짝이는 한 밤의 에펠탑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막연히 파리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항공권을 수시로 검색했고, 일기장에 여행 계획을 적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좀 떠나볼까, 싶은 타이밍마다 일이 생겼다.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던 아르바이트 자리 제안을 받는다거나, 연애를 시작해서 데이트 비용으로 나갈 돈이 필요하다거나. 함께 여행 가기로 한 친구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아, 해외여행은 나랑 인연이 아닌가 보다.'

      자꾸 코앞에서 엎질러지는 계획에 심술이 난 나머지, 해외는 나와 연이 아니라 생각했다. 돈이나 모으자,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차피 사서 고생하는 일일 테니, 여행을 못 가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개강을 앞둔 어느 날, 친구로부터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9월에 항공값 오른대. 결제할 거면 지금해야 함.'

      9월이 오기까지 이틀이 남아 있었다. 많은 걸 생각하기에 이틀이란 시간은 너무 짧아서, 생각을 안 하기로 했다.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당장 항공권을 검색했다. 숫자 개념을 잊은 사람처럼 돈 생각은 하지 않고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막상 구매 확정 버튼을 누르려니 손이 달달 떨렸다. 이렇게까지 큰 금액을 한 번에 결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파리.jpg

      * 본 이미지는 제가 직접 그린 손그림을 AI를 통해 수정, 보완한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새벽 내내, 마치 순찰하듯 구글맵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호텔은 아직 결제하지도 않았고, 환전도 안 했는데. 비행기를 탄 것도 아닌데 내 영혼은 벌써 몽마르트르 언덕, 몽생미셸, 디즈니랜드를 유랑했다.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설렜다. 무언가 아주 신나고 재밌는 일이 나를 반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며칠 설레다가 개강하고 나니까 불현듯 불안이 밀려왔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지의 세상에서 치를 법한 곤혹스러운 일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니다. 종강하자마자 곧바로 파리에 갈 테고, 세상의 빛이란 빛은 죄다 모아둔 것만 같은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할 테다. 북적거리는 광장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정신없이 축제 분위기를 즐길 거다. 인파에 휩쓸려 오르골 인형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 테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지우지 못할 테지. 추위를 싫어하는 나는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서울보다 8시간 느리게 새해를 맞이할 거다.

      해피 뉴 이어, 한마디를 외치고 나면 눈 깜짝할 새에 여행이 끝난다는 게 두렵운 것이다.

      지금 나는 대학에서 4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 학기라 12월에 종강하면 사실상 졸업이다. 졸업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여행을 다녀오면 왜인지 돌아갈 곳이 없을 것만 같아서 벌써 불안하고 공허하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가서 또 다른 거 계획하면 되지."

      친구는 왜 그런 걱정을 벌써 하느냐고, 여행을 다녀오면 막상 피곤해서 집에만 있고 싶을 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제 막 2학기가 시작됐으니, 강의를 듣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졸업 후에 하고 싶은 일이 확실히 생길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갑자기 대학원에 진학할 수도, 좋은 기회로 일찍이 취업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사람이다. 만약 여행에서 돌아와 모든 게 끝장난 기분이 든다고 할지언정,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목표를 세우면 된다.
       
       
      많은 사람이 '계획만 세우면 뭐 해, 실행해야지.'라고 얘기한다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반은 성공한 인생이라 말하고 싶다. 무얼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곳 아트인사이트에 매주 성실히 영화나 드라마 리뷰를 쓰겠다는 다짐,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직종의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는 의지도 계획이 될 수 있다. 엄청나게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또, 목적을 당장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이번 여행 준비를 통해 깨달았다. 비행기표를 사는 데에만 해도 자그마치 3년이 걸렸으니까. 뭐가 됐든, 바라는 마음만 있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파리 여행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하고 받았던 글을 다시금 정독했다. 출국을 3달 앞두고 읽은 글은 감회가 새로웠다. 나도 그녀처럼 사서 고생을 하고 싶었다. 무거운 짐을 이끌고 한숨 쉬기, 캐리어 바퀴가 빠질까 봐 전전긍긍하기. 소매치기 감별하기. 밤의 거리를 조심하기. 그래, 나는 이 모든 고생을 낭만이란 이름 아래 과감히 계획하기로 했다.

      나에게는 수많은 플랜이 있다. A부터 Z까지 얼렁뚱땅한 목표가 적혀있다. 자판기처럼 알록달록 반짝이는 버튼들을, 삶에 갈증이 나는 순간 주저 없이 누를 거다. 아, 딱 삼 초만 망설이는 척 좀 해보겠다.

      그러니까,

      "하나, 둘, 셋 하면 누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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