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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여기도 경주, 저기도 경주 - 경주기행 (2026) [영화]

경주 없는 경주를 떠나는 여행

by 정희정 에디터
2026.09.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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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영화 <경주기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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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옥실’과 세 딸 ‘장주’, ‘영주’, ‘동주’는 

      8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막내 ‘경주’의 생일을 맞아

      단체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경주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얼핏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여행처럼 보이지만, 

      봉고차 트렁크에는 낯선 한 남자가 실려 있는데…


      여행은 알리바이, 목적은 복수

      확실하게 계획한대로 죽이는 가족여행이 시작된다!


      synopsis

       

       

       

      경주 없는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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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떠난 이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 나의 앞으로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제 내 곁에 그 사람이 없다는 것. 앞으로 그와 함께할 새로운 추억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 한창 진행 중이던 삶에 갑작스레 결론들이 외부에서 날아와 꽂히고 그걸 내 안에 대못처럼 박아 넣는 일.


      그 결론을 스스로 꽂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이 납득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순리 안에서 찾아오고, 그 이유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나마 현재의 상실도, 미래에 대한 미련도, 과거에서 몰려오는 후회도 조금씩이나마 모래처럼 조금씩 흩날려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이해의 범위 밖에서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단칼에 들이닥칠 때, 남겨진 자의 마음은 피나도록 온몸을 헤집고 발악하게 만든다. 악을 쓰고 손톱이 부서져라 붙잡아도 결국 눈앞에 남는 것은 피범벅이 된 나 자신뿐이고,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그 비참한 무너짐을 지켜보면서 또다시 쉴 새 없이 상처 입는다. 남겨진 사람들은 한순간에 껍데기가 벗겨진 갑각류처럼 무력해진다. 평지만 걸어도 상처를 입는 상태의 시간이 끝을 모르게 이어진다.

       

      〈경주기행〉은 그 평지라도 함께 달려보기로 한 네 모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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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럽게 곁을 떠난 막내딸의 이름은 경주다. 경주에 도착하니 경주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경주를 비추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 역시 전에 알던 것과는 다른 경주를 보게 된다. 기억은 그렇게 사람을 짓는다. 무엇을 바라보게 하고, 생각이 향하는 곳을 만들고, 앞으로 걸어갈 방향도 그 길을 따라 정해진다. 경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경주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경주였고, ‘경주’ 간판을 무심코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 눈에는 ‘경주’만 담긴다. 곁에 경주가 없기에 더 사무치게 경주만 보인다. 간판 하나에도 오래 눈길을 주고, 곧장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음속 각자의 경주들을 애틋하게 스쳐 보낸다.

       

      복수를 위해 계획된 경주 여행에서 점차 복수 뒤에 있던 가족이 그들의 눈앞에 세워진다.

       

      그렇게 경주를 천천히 놓아주기 위한 여행이 시작된다.

       

      과거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막내딸 경주는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가해자는 초범이었고, 술에 취해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었으며, 반성문을 제출했다는 이유로 교화 가능성이 인정되어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경주와 경주의 가족이 두 번째로 살해되었다.


      재판정에서까지 난도질당한 뒤,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증오스러운 현실에서 서있지 못하고 법원 옥상에서 자신의 남은 생을 던져버렸다. 남편의 장례식에서 엄마 옥실은 담담하게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써 내려간다. 세상을 향해서는 용서를, 마음속으로는 정반대의 것을 품은 채. 그 탄원으로 형량은 8년으로 줄고, 범인은 그만큼 더 일찍 그녀의 손이 닿는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자신의 가족을 이토록 난도질한 세상 앞에서 자신이라고 못 할 짓이 있을까. 세상이 범인의 편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그 세상을 등지고서라도 제 손으로 그를 처벌해야 했다. 탄원서는 그 첫 번째 손짓이었다.


      옥실은 그래서 보지 못했다.

       

      자신이 등을 돌린 세상, 그 뒤편에서 그 등을 바라보며 함께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던 딸들이 있었다는 걸.

       

       


      서사에는 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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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들에게는 남은 생이 있었고, 꿈이 있었으며, 지켜야 할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장주는 엄마에게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고, 영주는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는 원망을 안고 있었고, 동주는 경주와 부모의 사랑을 둘러싼 오래된 혼자만의 상처를 품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이 마음들을 하나로 묶어준 건 엄마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렇게 자신들이 다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딸들은 각자의 이유로 엄마의 복수에 동참한다.


      하지만 그 복수는 철저히 현실을 등지고 가는 방향이었다. 계획대로 복수가 끝나더라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딸들은 엄마의 복수를 도우면서도 끊임없이 엄마와 현실 사이에 가느다란 끈을 이어놓는다. 범인을 묶어놓은 매듭을 슬며시 느슨하게 풀어두고, 경찰을 계속해서 의식하고, 엄마의 계획을 현실 쪽으로 끊임없이 설득한다.


      <경주기행>의 장르는 범죄 쪽에서 약간 빗겨 서있다. 통쾌한 복수극의 클라이맥스를 담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지독하게 얽혀 있는 삶의 매듭을 부각한다.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살인자가 되지는 못한다. 그들에게는 한 번의 휘두름조차도 스스로 허락하는 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법과 규칙은 모든 악을 막아내기에는 더없이 허술하고 나약하다. 그런데도 법이 미처 지키지 못한 자리에서, 많은 사람은 그 한 번의 휘두름을 끝까지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채 주먹을 슬며시 펴고 다시 걸어간다.


      영화는 이 사실을 은근하게 비춘다. 그 여백에서도 우리는 그들의 떨리는 손을, 그 손이 다시 쥐어지는 순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다. 범인을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있는 수많은 손을 다시 잡은 것이라는 걸 우리는 평범함 속에서 단단하게 지어진 연결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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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기행〉은 범죄자에게 철저히 범죄자의 프레임만 제시한다. 영화는 그가 살아온 환경도, 성격이 형성된 과정도,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도 친절하게 덧붙이지 않는다. 끝까지 그는 하나의 인물로 이해될 만큼 충분한 서사를 부여받지 않은 채 결말까지 온전하게 범죄자, 살인마였다.

       

      복역 중에도 처벌불원이라는 용서의 외형을 빌려 자신의 형을 줄여준 유가족을 향해 도리어 두려움과 증오를 품고, 그들이 자신을 해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해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의 흐름 속에서 반성이나 죄책감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점이 그 인물을 일직선으로 납득되게 한다. 자기보존과 피해의식, 책임 전가처럼 지극히 비루하고 익숙한 감정들만이, 조금의 미화도 없이 그려진다. 출소 후에도 복수를 계획하고, 도망칠 기회가 생겼을 때 더 큰 범죄를 일으키는 면모마저도 그 선상에서 설명된다.

       

      서사는 위험하다. 내 삶을 난도질한 원수조차 용서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서사'의 독성이다. 내 남은 생이 걸려 있고, 남겨질 가족들이 눈에 밟히며, 이미 떠난 이들이 나의 무너짐을 지켜볼까 봐 아픈 상황에서 범인이 뱉는 문장에 단 한 단어라도 납득하고 용서로 이어지는 순간, 결국 이 진흙탕 속에 남는 건 피투성이가 된 나 자신뿐이다.

       

      이 영화는 한치의 미화 서사도 허용하지 않고 범인은 마지막 대사까지 용서와 가장 먼 곳에 있는 이기적인 문장만 뱉는다. 그렇게 영화가 그에게 과거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도 그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 밖으로 빠져나갈 통로가 생기지 않는다. 덕분에 옥실은 타협 없이 자신의 계획대로 그를 벌할 수 있게 된다. 경찰의 앞에서도 범인을 보내지 않는다. 그 누구의 손에도 넘기지 않고 그녀의 손에서 진행시킨다. 원하는 곳까지 온 힘을 쏟아내고, 다시 한번 악을 쓰고 손톱이 부서져라 처절하게 땅을 기어오른다. 나와 내 가족을 버리고 그의 손을 잡았던 세상 꼭대기에 그의 죽음을 매달아 놓고 울부짖는다.

       

      그 장면에 통쾌함은 없다. 그곳엔 오직 옥실의 한과 처절함뿐이었다.

      

       

       

      뒤섞이는 생, 놓지 못하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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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흩어지지 않을 것 같던 옥실의 마음속 응어리가 걸음마다 조금씩 바스러진다. 복수를 완수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흩어 보내야지만 경주에서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 남은 가족과 남은 시간이 더 선명해질 수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 상처받아왔던 딸의 눈물 앞에서, 복수의 끝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이 경주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본다.

       

      꿈에서도 한 번을 나와주지 않던 막내딸 경주가 그제야 옥실의 꿈에 나타난다.

       

      경주가 가장 기다렸을 것이다.

       

      엄마가 다시 호흡할 틈을 찾고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을.

       

      엄마에게 마침내 평온한 잠이 찾아오자, 경주는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남겨진 이들에게 이별이란 이토록 처절하고 살을 도려내는 듯 아픈 일이다. 그렇기에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이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떤 날에는 그것만으로도 견뎌내고, 하루를, 내일을 보낸다. 우리는 모두 ‘나’로 태어나 살아가지만, 한 사람의 생이 오직 자기 자신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의 무게를 받아내는 동안 삶은 조금씩 뒤섞이고, 몫을 나누어 가진다. 나 하나라면 무너져도 되었을 순간에도 쉽게 무너지지 못하는 건, 나에게 기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남겨둔 이 작은 몫들이, 비극이 거듭되는 삶 속에서도 딱 하루를 더 살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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