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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추락할 각오로 도약하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개인적 단상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2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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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죽었다? : 그는 왜 '신'을 부정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혼자가 되자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가 숲에 사느라 아직도 듣지 못했구나!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차라투스트라가 '신'이라는 초월적 우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건가 묻는다면, 그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겨냥한 '신'은 단순히 기독교의 하느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인간을 지배해 온 절대적 진리, 도덕적 규범, 그리고 별다른 의심 없이 세습되어 온 관습의 총체다. "이게 원래 옳은 거야", "사회적으로 이건 당연한 거야"라는 말들이 만들어내는 틀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조금씩 내어주게 된다. 사람들은 이 틀이 자신을 지켜 준다고 믿지만, 실은 그것이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형체 없는 감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이 나온 시대적 맥락을 짚어보면 니체의 문제의식은 더 선명해진다. 근대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며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던 시기, 성경을 중심에 둔 세계관은 크게 흔들렸고 교회의 권위 역시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문제는 외부의 변화 속도를 인간의 내면이 전혀 따라잡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신과 절대적 도덕이라는 오래된 버팀목은 무너졌는데,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내면의 중심은 아직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과학과 자본이 가져다준 편리함에 취해 삶의 주체성을 서서히 잃어갔고, 니체는 이 상태가 결국 방향 없는 정신적 공허, 즉 허무주의로 귀결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렇다면 니체는 인류를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 이 진단을 내놓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낡은 버팀목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제 비로소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빈 도화지를 손에 쥐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대한 변화의 물살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이들에게, 낡은 기준에 기대는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라는 것__이것이 급변하는 시대에 니체가 건넨 가장 급진적인 지침이었다.

 

 


2. '위버멘쉬'에서 '아모르 파티'까지 :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진정한 삶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흔히 초인(超人)으로 번역되지만, 그 실체는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기준을 새로 세워 나가는 사람에 가깝다. 세상이 정해 놓은 잣대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 매 순간 자기 자신을 넘어서며 나아가는 태도를 뜻한다. 그리고 이 위버멘쉬적 태도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 완성에 가까이 놓여 있는 것이 '아모르 파티'다. 위버멘쉬가 삶에 도전하고 나아가는 진취적인 태도라면, 아모르 파티는 그 도전 끝에 따라오는 고통마저 회피하지 않고 껴안아, 삶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다. 결국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삶이란, 뛰어올라 보고 떨어져도 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자리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든다. 왜 굳이 추락까지 감내하는 도약이어야 하는가. 안전하게 머무를 수는 없는가. 니체는 이 질문에 이미 답을 준비해 두었다. 그는 모든 도약에는 추락이 뒤따른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바로 그 추락이 두려워 도약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약을 멈추고 익숙한 감옥 __안일함, 기존의 규범, 편안함__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이유는 명백하다. 감옥 안에서는 크게 다칠 일도, 비참하게 실패할 일도, 남들의 비웃음을 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되묻는다. 상처 입지 않는 그 안전한 감옥이 과연 진정으로 '살아 있는' 상태인가. 그는 도약 없이 평생을 안전하게 늙어가는 삶을, 살아 있다기보다 서서히 질식해 가는 삶이라 여기며 가장 경멸했다.


우리는 보통 도약과 추락을 성공과 실패의 관계로 이해한다. 그래서 추락이 무서워 도약조차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이 둘은 승패의 개념이 아니다. 높이 뛰어오른 자만이 그만큼 깊이 추락할 수 있고, 반대로 깊은 추락을 겪어본 자만이 인간의 한계와 고통의 밑바닥을 알게 되어, 비로소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줄타기 광대의 일화가 이 지점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줄 위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은 광대를, 차라투스트라는 조롱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아예 줄을 타지 않아 추락조차 겪지 않는 삶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섰다 떨어지는 삶이 훨씬 더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이다. 추락은 부끄러운 결과가 아니라, 내가 살아 있고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추락이 두려워 스스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태도를 권하는가. 먼저 그는 도약 뒤에 따라오는 고통과 추락을 원망하거나 애써 합리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추락조차 내가 선택한 삶의 한 조각임을 인정하고 온전히 끌어안는 것, 그것이 곧 아모르 파티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가벼움을 회복하라고 권한다. 세상이 정해 놓은 성공과 실패의 잣대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넘어져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는 아이의 마음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아이는 넘어질까 두려워 걸음마를 포기하지 않는다. 넘어지면 넘어지는 대로 웃으며 다시 일어설 뿐이다.

 

 


3.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 이 시대의 현인을 찾아서



이 책을 덮고 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질문은,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차라투스트라는 누구를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였다. 언뜻 보면 오늘날의 성과주의,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계발 열풍은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이나 위버멘쉬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매일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하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성취를 쌓아가는 모습은 얼핏 초인의 자화상처럼 비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위버멘쉬와 오늘날의 성과주의자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첫 번째 차이는 동기에 있다. 오늘날의 성과주의자는 사회가 이미 성공이라 정의해 둔 기준 __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높은 연봉, SNS 위의 화려한 이미지__ 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인 뒤, 그 트랙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린다. 다시 말해 이미 짜여 있는 게임판 안에서 가장 유능한 부품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 넣는 것이다. 반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세상이 정해 놓은 성공의 기준 자체를 거침없이 부수고, 자기만의 새로운 가치와 삶의 척도를 스스로 세우는 사람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트랙 위를 더 빨리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에 그 트랙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그려내는 사람인 것이다.

 

두 번째 차이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현대의 성과주의는 흔히 "지금의 고통은 더 나은 성공을 위한 투자야",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뒤처지는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인다. 고통을 성공을 향한 불가피한 통과의례로 포장해, 결국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소모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은 고통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태도이지, 고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반면 위버멘쉬가 감내하는 고통과 자기 극복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시련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껴안는 아모르 파티에 가깝다. 위버멘쉬는 성과를 위해 억지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정면으로 견디면서도 아이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


결국 니체가 겨냥한 것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를 외치는 성취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진짜로 묻고 싶었던 것은, 그 성취가 누구의 기준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나는 어떤 얼굴로 마주하고 있는가였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트랙 위에서 지치도록 달리기만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차라투스트라라면 아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오르고 있는 그 줄은, 정말로 당신 자신이 놓은 줄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오래된 책이 지금까지도 낡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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