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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오디세이, 그간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영화]

영화 <오디세이>에 대한 개인적 단상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16 19:16

오디세이.jpg

 

 

 

#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는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등 흥행과 예술성을 모두 충족한 작품들을 필모로 가진 감독은 거의 유일무이하기에 놀란의 신작들은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독특한 점은 놀란 감독이 어떠한 영화를 내보이느냐에 있었다. 그는 이미 흥행의 역사를 지닌 작품들의 연장선에서 새 작업을 시작하기보다 익숙함과 안전함을 전복하는 선택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신작인 오디세이 역시 이전까지 놀란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역사물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세계로 발을 들인 놀란의 대범함을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원작을 한참 읽던 중 영화를 보았다. 대중이 오디세이를 주목한 이유는 단지 놀란의 영화여서는 아닐 것이다. 사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이고, 이미 수차례 여러 다른 형태들로 재현된 역사가 존재한다. 내밀한 세부 묘사를 온전히 다 상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신화를 접한 사람들에게 서사로서 놀라움을 선사하기는 보다 어렵다. 다시 말해 이야기의 신선함과 창의성, 그리고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전율, 이 감각들을 영화 내에 구현해 내기 전보다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놀란의 비범함에 감탄했던 이유는 이러한 난제를 감수하고도 오디세이 신화를 채택한 그가 과거 대체로 어떤 특성의 영화들을 만들어 왔고 흥행시켜 왔는지에 있었다. 대중들이 놀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낸 지점들은 대개 그가 가져오는 창의적인 이야기 소재와 서사, 그리고 그를 구현해 내는 뛰어난 연출력에 있었다. 하지만 놀란은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최근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가 이의 서막이었다고 본다. 영화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전기를 그린 다큐 형식에 가까웠고, 어느 정도 틀이 정해져 있는 인물의 역사적 삶을 구현하며 동시에 그의 작품으로 재구성해야 하였다. 이전만큼의 자유롭고 무한한 창의성을 용인하는 서사적 배경에서 작품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디세이는 오펜하이머 이후 놀란이 멈추지 않고 더욱 과감한 시도로 도약한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대중과 서사의 거리감에 있다.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접한 대중보다 오디세우스 신화를 접한 대중의 수가 가히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하기에, 대중은 오디세이에 더한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창의성이라는 주무기를 내려놓고 새로운 연장을 들어올린 놀란의 신작 오디세이는 그 존재만으로 그의 필모 속에서 압도적 존재감을 감출 수 없다.

 

더불어, 오묘한 점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문학과 역사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실상 구전된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 말은 곧 정확한 문자의 실체를 갖추기까지 어떠한 변형의 과정을 거쳤는지 현대인들이 가늠할 수 없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신화이지만 결국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기에 시대적 격차가 있는 현대인들이 이의 사실성과 진위성을 판가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서사시를 전개틀로 삼은 창작가로서 그저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창조의 고충뿐만 아니라, 편집과 삭제의 고충 또한 따라온다는 것이다.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 창작보다 때로는 한도가 존재하는 틀 안에서 새로운 ‘나의 것’을 구현해 내야 한다는 것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 어느 부분까지가 허용되고, 그리고 어느 부분까지가 기존의 서사를 거스르기 버거운지 스스로의 기준에 대한 신뢰와 신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원작의 흐름과 묘사에 비교하여 놀란이 어떠한 방식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다시 보여주려 하는지는 굉장히 흥미로운 포인트이다.

 

 


#1.


 

소설과 영화를 교차하여 감상하며 놀란이 크고 작게 각색한 부분들을 찾아내며 메모해 볼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흐름을 구성해 내는 방식이다. 원작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부터 시간 순차적으로 그의 여정을 그려낸다. 즉 자연스레 독자들은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적 인물 그 자체에게 이야기의 초점을 넘기고, 그의 여정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시련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몰입한다. 즉, 원작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영웅적 방황과 극복의 서사는 오디세우스의 입으로 직접 구전되는 형식으로 대체된다. 칼립소가 준 로투스를 먹고 기억을 잃은 오디세우스가 잃었던 기억과 고향을 되살려내는 그의 과거 회상 속에서 그의 여정의 파편들이 조립된다. 이는 결국 신화라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붙는 특성을 지닌다는 불완전한 서사시 자체의 특성을 투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출로 인해 영화 오디세이 속에서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여정은 영화 속 ‘한 인물의 전사(前史)’로 수렴하게 된다. 오디세이라는 영화는 그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하면 영화 오디세이가 진정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는 이 다음에서 차차 알아볼 수 있다.

 

 


#2.


 

놀란의 영화에서는 초반부부터 고향 이타카의 모습을 비춘다. 청혼자들이 오디세우스의 성을 점령하고,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압박하는 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타카는 그저 오디세우스 여정의 종점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라는 한 인물이 수십 년의 고난 속에 잃지 않는 희망과 이상 그 자체이다. 한편, 결국 오디세우스가 다시금 뗏목을 엮고, 광폭한 바다에 전신을 내던지는 마지막 귀향의 여정을 결심하는 데 있어 강력한 기폭제가 되는 오브제가 페넬로페가 준 아테나 브로치라는 것 또한 서사 내부에서 ‘귀향’이라는 소재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장치이다.

 

이를 통해 연결해 볼 수 있는 것은, 놀란이 ‘귀향’이라는 소재를 탁월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향은 ‘닿고자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서글픈 향수와 아련함을 선사하는 소재이다. 그렇기에 ‘고향’이라는 존재는 ‘닿을 수 없는 존재’로 정의되는데, 어찌하여 고향이라는 장소가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보존될 수 없는 것인지는 토마스 울프의 소설 『그대는 다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리』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오랜 방황 끝에 마음속 영원한 안식처이자 그리움의 대상인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시간은 흘러 예전의 그 고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결코 과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실존적 진실을 깨닫는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니까 예술적 장치로서의 고향은 그저 현존하는 장소성만을 표방하는 것이 아닌, 그 당시의 시간성과 인물 간의 관계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고향을 그리는 주체의 정체성과 정서까지 포함한다. 말 그대로 그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성 자체를 지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존재성은 과거와 인물이 발 딛고 있는 현재가 동일할 수 없다. 일단 시간성부터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되돌려받고 싶은 과거를 잃은 슬픔뿐만 아닌, 과거를 희망했던 자신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 또한 대변한다. 그렇기에 때론 슬픔 속에 희망이 숨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찬란하면서 동시에 사무치고 결국 허무하지만, 그 허무함마저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고향을 기리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다각적인 묘사는 영화 속에서도 다수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이렌의 노래와 ‘homecoming’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으로 찾아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저승의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듣고 다시 오른 바다 위 여정에서 세이렌들을 조우하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전략적으로 밀랍으로 병사들의 귀를 막았지만, 자신만은 돛대에 묶여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원작에서는 세이렌들이 ‘이리 오세요’, ‘잠시 쉬었다 가세요’라며 그를 유혹하는 대목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 영화에서는 병사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시점부터 관객들 또한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게 묵음 처리하는 연출을 선택하였다. 사건이 종결된 이후, 오디세우스의 묘사를 통해 그 내용을 ‘전달’받는다.


 

에우릴로코스: 세이렌의 노래는 어땠는가?

 

오디세우스: 되고 싶었던 모든 것들과, 바라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지....... 가장 원하는 것은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가졌지만 잃어버린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노래였어.

 

 

그에게 고향 이타카의 존재는 ‘가장 원하지만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이타카는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는 궁극의 이상향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이고 물리적인 거리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상의 복합적인 거리감을 뜻한다고 본다. 주관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연출을 본다면, 원작에서의 고향은 ‘닿고 싶지만 신들이 허하지 않았던 장소’를 의미한다면, 놀란의 고향은 ‘닿고 싶지만 세계의 본질이 허하지 않는 이상향’인 것이다. 단지 신화적 대상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오디세우스의 존재감과 정서를 더욱 강조한 연출이라 생각해 본다.

 

또한, 결국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노파로 변장을 한 뒤, 자신이 떠난 후 참혹하게 변해버린 이타카의 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homecoming’, 즉 집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집이 없다’는 대목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끌어온다. 오디세우스에게 진정한 집, 즉 고향은 이타카라는 장소가 아닌, 그가 긴 시간을 그려오던 지나간 이타카의 추억이 만든 마음속의 이상향에 더 가까운 것이다.

 

 


#3.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에서 보다 다양한 인물들이 목소리를 지닌다는 것에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디세우스 중심의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은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아닌 그저 영화 속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인물로 축소된 권위를 지닌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많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듣고, 더욱 다양한 층위로 서사를 해석하려는 감독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서사를 구성한다. 특히, 페넬로페나 키르케, 헬레네와 같은 여성 인물들이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강조된다. 페넬로페가 왕좌를 수십 년간 지키며 느낀 여성으로서의 허탈감을 텔레마코스에게 토해내는 장면,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병사들로 인해 느낀 위협감에 대해 쏟아내는 장면, 그리고 헬레네가 실상 그녀 때문이 아니었지만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의 잔혹한 잔재들에 대해 속삭이듯 사과하는 장면. 이 모든 여성 인물들의 목소리는 원작에는 담기지 않은 부분이었다. 놀란이 그들의 목소리를 영화 내에 살려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서사를 더욱 다채롭게 만드는 장치에 불과할 뿐만 아닌, 그들 자체로 이야기 외곽에 존재하였던 주목받지 못한 인물들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경우, 친구를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도청 상무관의 시신 수습을 돕게 되는 중학교 3학년 소년, 시신 수습을 돕다 살아남았으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 등 소설의 화자들을 통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영웅’이나 ‘정치인’이 아닌, 그 잘 보이지 않던 비극의 외곽에서 부서져 나간 인물들의 서사를 조명한다. 이를 통해 체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비극을 마주함에 있어 거대한 기둥을 기준으로 이를 파악하고 애도하는 고정된 시각을 비틀어버린다는 것이다. 놀란의 오디세이도 이러한 언어를 사용한다. 전쟁의 거대한 비극의 서사 속에서 지워졌던 이들의 언어를 통해, 비극을 단지 지나간 과거의 통계나 거창한 교훈으로 소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이를 똑바로 응시할 용기가 있는지, 그 정확한 응시를 통해 중심의 빛에 가려져 있는 부분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영화 오디세이에서 유의미한 지점은, 과거의 신화들이 미화되고 우상화되는 고정된 시각의 오류를 규명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는 그 자체로 불완전하기에 완전성과 사실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이것을 읽고 기억하는 이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볼지는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를 보고 느꼈던 인상은, ‘잔인하다, 너무 잔인하다’였다. 나는 고어한 호러 장르의 영화들도 거부감 없이 보는 관객 중 하나인데, 반면 오디세이는 그에 비하면 시각적으로 잔인하다고 느낄 만한 씬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잔인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시각적인 자극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서사나 묘사의 잔혹함을 통해 그러한 감각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트로이 전쟁의 상징물인 트로이 목마를 비추는데, 영화를 보며 경악스러웠던 부분은 트로이 목마 속에 있었다. 더욱 솔직히 표현하자면, 그 안의 참상이 아닌, 신화를 수없이 들어오면서도 그 안의 모습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나 자신이 경악스러웠던 것에 가까웠다. 마치 신화에서 비추는 전쟁이라는 비극의 모습도 트로이 목마와 같다. 밖에서 볼 때는 그저 승리의 전유물이나 비범한 전략가의 작품이지만, 그 안을 보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자신 위에 있던 병사들을 지탱해주느라 압사당하였으며, 하단부의 물에 잠겨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하였는지 드디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놀란은 이를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다시 구현해낸다. 기존의 호메로스의 원작에서는 이제는 이승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적 영웅과 전쟁 영웅들이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토로하지만, 놀란의 각색에서는 전사 후 차마 묻히지 못한 수많은 병사들이 오디세우스를 격렬히 쫓는다. 결국 이야기는 한 자락 노랫소리일 뿐, 남는 이들은 죽는 이들뿐이라는 말이 놀란의 이 연출적 선택을 대변한다.

 

영화에서 가장 큰 반전을 주는 인물은 젠데이야가 연기한 아테나 역이다. 방황하는 오디세우스 옆으로 시시때때로 서글픈 표정의 아테나가 얼굴을 비춘다. 사실 아테나는 상당한 분량의 대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오디세우스가 전쟁이라는 비극에 대해 회의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그의 정서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사실 자신을 수호하는 여신인 줄 알았던 아테나의 얼굴은 자신이 트로이에서 학살을 벌이며 제물로 바친 소녀의 얼굴이었고, 이는 오디세우스를 따라다니며 트로이 전쟁의 지도자이자 지략가로서 결국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자신의 크나큰 죄악을 직시하게 하는 장치이다. 결국,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를 떠난다. 그는 아내 페넬로페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병사들과, 동료들을 진정 기리기 위하여 서쪽 땅으로 떠난다. 결말이 보다 괴롭지 않게 다가왔던 이유는, 오디세우스가 처자식을 만나고 권위를 회복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이 여정의 끝에 진정한 용서와 애도를 위한 또 다른 여정을 떠났다는 데 있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대한 단지 완전한 재현이라기보다는, 동일 서사를 공유하는 다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저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으로서가 아닌, 또 다른 ‘오디세우스’,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을 위해 영화 ‘오디세이’를 관람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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