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우리의 삶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궤도를 맴도는 것만 같다. 인간의 본질이 모순적이기에 우리는 안정적인 삶과 자유로운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한다. 어느 쪽의 대가가 더 무거운지를 묻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결국 하나의 삶만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맛보기 스푼 따위가 없다.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삶’이라는 것은 일종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발을 디디는 순간 금세 깨져버리고 마는 겨울 끝자락의 호수 얼음과 같은 것. 시리도록 차가운 얼음물과 같은 삶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겁쟁이인 자신에게 억지로 씌워놓은 연극의 배경일지도 모른다.
더욱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우리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현대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은 정말, 정말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안락하고 따뜻한, 비교적 안정된 환경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책임’이라는 아주 무거운 무게의 단어가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정말 이기적인 것일까. 실존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와 책임을 저버리는 일일까.
“언니는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 있어? 여태까지 애착을 갖고 있던 것이 지긋지긋해지는 것, 갑자기 이루 지긋지긋해지는 일 말이야. 하루라도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아. 방과 집과 거리 모두가 말이야.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서, 밉고, 참을 수 없이 적막하고, 적의를 품은 듯 보이게 돼. 그러면 떠나야만 하는 거야. 정말 떠날 때가 된 거야. 자기도 모르게 이미 우리는 이 모든 사물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끄집어냈던 거야. 사물들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보니까 사는 거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바로 이러한 삶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삶을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주며, 특히 자유를 향한 강렬한 의지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니나와 그녀와 대비되는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와 낭만을 얻는 대신 시리도록 아프고, 따갑고, 때로는 비참하기까지 한 실존적인 삶을 택해야 하는가. 혹은 안정과 편안함을 얻는 대신 때때로 답답함과 공허함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삶을 택해야 하는가. 어쩌면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감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지를 마주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생의 한가운데』는 바로 그 선택의 순간,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간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삶, 결국 하나의 삶
『생의 한가운데』는 니나의 언니인 마르그레트를 화자로 하여, 니나와 언니의 대화를 큰 틀로 삼고 있다. 그 안에서 평생 니나를 사랑하고 관찰해온 의사 슈타인의 편지와 일기를 언니가 읽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 순서가 뒤섞인 기록들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니나의 삶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보다, 흩어진 조각들을 입체적으로 짜맞추어가며 읽어야 한다. 전통적인 소설의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세 인물의 일인칭 시점이 복수적으로 등장하는 구조는 니나의 삶을 하나의 시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비추어낸다.
주요 인물은 니나, 니나의 언니, 그리고 슈타인이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가장 뚜렷한 대립항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니나와, 비교적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언니이다. 슈타인은 의사이자 교수로서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한없이 우유부단하고 결단을 내릴 줄 모르는 유약함을 지닌 인물이며, 빠져나올 길 없는 권태 속에서 괴로워한다.
세 인물의 삶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이 아니다. 무엇이든 맞닥뜨릴 용기가 솟아날 때도, 한없이 작아진 자신 앞에서 나약함에 울부짖을 때도, 익숙하고 전통적인 가치 속에서 안정을 느낄 때도 모두 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거나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단지 우리는 인생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고독,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인가
소설은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심리 속에서 고독과 우울, 삶의 의미, 사랑,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과 같은 인간 정신의 심연을 건드린다. 말 그대로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인간의 본질을 바라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고독함이란 무엇일까. 무언가 나쁜 일을 겪었을 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도와줄 누군가조차 없는 순간만큼 사무치게 외로운 때가 있을까. 사람이 가득한 거리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듯한 기분. 원래 인간은 고독한 것일까. 매일같이 고민한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괴로운 것이 나을지, 차라리 혼자 외로운 것이 나을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고 두 배나 더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말없는 공감이 제일입니다.”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뼈저린 고독을 느끼는 순간은 홀로 있을 때보다 오히려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타인과 공유했을 때이다. 내가 보여준 것을 상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을 때. 그 순간 어렴풋이 품고 있던 희망에는 찬물이 끼얹어지고, 고독에 대한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내 존재가 어딘가 깊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표면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기분. 내 존재를 확신해줄 타자의 시선이 없기에 오히려 내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기분. 모든 것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가 만들어낸 환상. 인간은 본래 고독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이 고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얄팍한 희망.
니나가 말한 ‘말없는 공감’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거나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나 자신으로 있어도 된다는 안도감에 가까울 것이다. 희망을 깨뜨리지 않은 채,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도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꾸밈없이 존재하는 나 자체가 다른 존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기분. 그것이 어쩌면 내가 찾던 사랑의 형태에 가장 가깝다.
길을 잃은 나그네가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만난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 한 몸 겨우 기대어 잠시 쉬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별것 없어 보이는 밋밋한 나무.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기대고 싶은 존재와 같은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란 없다. 모든 것이 온전하지 않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뒤죽박죽이다. 그렇지만 분명 온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도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에 반드시 앎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난로처럼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따뜻하다고 해서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데이고 만다. 사랑이란 그 적당한 거리를 견디면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일이 아닐까?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애매모호하고 알 듯 말 듯한 세상 속에서 권태와 허무함으로 치장한 심연의 절망. 그 고독한 우울 속에서 우리는 답이 있을 리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멍청하게 계속해서 묻게 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고서. 인생은 그저 인생일 뿐이다.
삶의 의미, 묻지 않는 자만이 아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서머싯 몸의 『인생의 굴레에서』에는 인생을 페르시아 양탄자에 비유하는 대목이 나온다. 양탄자의 무늬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수천, 수만, 수억 갈래로 뻗어갈 수 있으며, 어떤 무늬가 만들어지든 그것은 그저 다른 하나의 무늬일 뿐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아무리 아름답고 뚜렷하고 눈부신 무늬라 한들, 다른 미적 기준에 비추어보면 결국 수많은 무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참으로 덧없다.
삶의 의미는 질문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기에, 물으면 물을수록 멀어지는 신기루와 같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찾으려고 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물으면 물을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 어느 순간 손에 잡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저만치 달아나버린다. 의미를 묻는 행위 자체가 권태와 허무에 빠진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만큼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인생은 고통 아니면 권태로 가득 차 있다. 행복은 지속되지 않고, 결국 일시적인 쾌락에 불과한 것인지도, 행복하다는 것은 잠시 인생에서 빗겨나 도망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서는 무미건조한 인생의 본질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끔 만든다.
살아가는 것에는 어떠한 의미도, 목적도 없다.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에 반드시 의미나 목적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생의 틈 사이로 찾아오는 행복이 있다면, 나를 짓누르는 것들이 잠시 가벼워지고 그들의 괴롭힘에서 조금 멀어져 가볍게 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사랑, 생에 대한 사랑
인간은 고독하고, 삶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을 찾아 헤맨다. 구원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슈타인의 깊은 마음이 녹아든 일기들은 겁쟁이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삶을 극단으로 내몰 줄 모르는 겁쟁이이기에 그는 도저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국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겁을 먹은 나머지 자신의 마음대로 삶의 방향키를 돌리지 못했다.
그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좋아 보인다. 그러나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는 오히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묻어버리게 만든다. 삶의 의미를 도저히 찾지 못한 슈타인은 니나와의 사랑에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기보다 니나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사랑은 그의 삶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자, 끝내 자기 자신에게 다다르기 위한 과정이었다.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생각될 때 이렇게 쉽게, 사는 것이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자기를 구속시키는 데 구원이 있는 것인가? 구속은 몰락으로부터의 안전 장치인가?”
사랑은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완전한 구원도 될 수 없다.
그저 살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 결심을 거둘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족쇄, 혹은 마지막 희망에 가깝다. 사랑은 정말 마지막의, 최후의 순간에 돌아갈 곳을 잃은 인간이 돌아갈 수 있는, 잊고 있었던 낡은 아지트 같은 것이다. 더 이상 안락하지는 않지만, 나 같은 존재도 머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게 되는 마지막 장소랄까.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인간이 정신적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면 삶은 끔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구원은 사랑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반드시 타인을 향한 사랑일 필요는 없다.
허무함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이 미운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결심. 우물쭈물하면서 온갖 타협으로 외면해왔던 운명의 극단 속으로 기꺼이 나를 몰아넣는 것. 삶의 한가운데에서야 비로소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구할 수 없었던 생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느끼고, 내가 살아 있음을 되뇌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에 대한, 나에게 주어진 생에 대한 사랑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체념과 비슷하다.
누구나 지금의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결국 나는 나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물러설 곳 없는 최후의 순간에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마지못해 남은 마지막 동앗줄을 붙잡는 마음, 그러나 그 동앗줄을 붙잡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가장 허약하고 낡고 닳아빠진 것처럼 보였던 동앗줄이 실은 가장 튼튼하고 잡기 편안한 밧줄이었다는 것을. 이제껏 부정해온 내가 결국 나 자신이었다는 것임을 말이다.
모든 소용돌이가 잦아드는 기분이 들 때, 그때가 바로 생에 대한 사랑을 발견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니나가 말한 “생을 경멸하지 않는 고향 잃은 자의 우울한 안식”이 나에게는 그런 것이다.
사랑과 의지, 운명을 끌어안는다는 것
생에 대한 사랑은 니나가 말한 ‘삶에 대한 공포’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내가 인생에서 아무것도,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내 인생은 그냥 사라지고 있으며 나는 살지 않았다는 불안감, 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영원히 내 인생은 작은 궤적 속에서 움직일 뿐이라는 불안감들 …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너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어’하고 나에게 말하고 있다.”
타협한다고 해서, 단념한다고 해서, 포기한다고 해서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홀린 듯 이끌려가는 운명의 속삭임은 마치 저주처럼 나에게 극단을 요구한다. 그 극단을 따라가지 않았을 때에는 후회라는 무시무시한 결과가 따르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모든 아름다운 것이 사라진다는 것,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슬픔.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 철저하게 순수한 절망도 없으며, 값싼 혼합물, 값싼 혼합물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인간은 행복할 수 없으며, 행복을 단념해도 평안에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 … 이 모든 것이 떠나지 않고 항상 내 뒤에 있는 거야. 완전한 삶을 느낄 때도 이런 생각은 어김없이 떠올라 나에게 속삭이는 거야. 아니야. 이것은 네 것이 아니야. … 울어도 소용없고 저항해도 소용없어. 나는 끌려가는 거야.”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묻고 싶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운명의 끝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매 순간 운명이 증오스러운 동시에 이 운명은 곧 나 자신이기에 어쩔 수 없이 끌어 안아주게 된다.
“내가 우는 것이 슈타인의 지난 고통과 니나의 엄청난 이별 때문만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리고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 있듯 자신의 운명에 얽혀 있는 인간들 때문에 우는 것이라는 것을. 대체 누가 그 그물을 찢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그 그물에서 벗어났다 해도 그것은 발치에 걸려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 그물은 아무리 얇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니나의 삶은 단순히 불안정한 삶, 자유로운 삶이라는 말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운명을 지니고 있고, 그 운명은 언제나 우리를 어떤 극단으로 내몬다. 니나는 단지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아파하고 깨져도 자신의 운명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은 인간일 뿐이다.
삶은 그 무엇도 아닌, 생에 대한 사랑과 마음껏 사랑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이다.
Leute, die sich nie hingeben, können auch nicht sterben, weil Sterben die letzte Hingabe ist. (고통과 격정에 자신을 한 번도 온전히 내맡기지 않은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 죽음이야말로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며 살아본 적이 없다면,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는 죽음에도 이를 수 없다.
터무니없는 운명 앞에서 현실이라는 아주 무거운 족쇄가 나를 끌어당길 때, 절벽 끝에서 족쇄와 함께 아래로 떨어질 용기가 없어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면, 그 과거가 다시 새로운 족쇄가 되어 나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실은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실존이라는 것이 참으로 허무맹랑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철이 없는 사람, 세상 물정도 모르고 허황된 꿈을 꾸는 바보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운명을 따라가 본 사람이라면, 그 운명을 따라가는 일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운명이 나를 괴롭게 할지라도, 모든 것을 내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고통을 줄지라도, 도저히 나 자신을 버릴 수 없을 만큼 나의 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단 한 순간만이라도 온전히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뛰어들 것이다.
내가 알던 모든 것에 작별 인사를 고하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나의 삶 속에서 수차례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있는 힘껏 웃어주고 떠났으며, 앞으로도 그런 순간들은 기필코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더욱 있는 힘껏 웃어주고 떠나버릴 것이다.
자유의 대가는 지독하다. 삶의 대가는 너무도 무겁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다시는 사랑할 수 없는 것,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비참함이다.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생의 한가운데에서 생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죽음의 끝에서, 미련 없이 온전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