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단단한 것을 오래 남는 것이라 생각한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것, 제 모습을 잃지 않는 것, 외부의 힘에도 꼿꼿하게 버티는 것. 반대로 흔들리고 휘어지고 찢어지는 것에는 '연약하다'는 이름을 붙인다.
서울 삼청동의 오래된 한옥 선혜원에서 열린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는 바로 그런 존재들에게 안부를 묻는 전시다. 투명한 유리구슬과 가느다란 케이블, 쉽게 구겨지는 골판지, 얇은 비닐, 식빵 봉지를 묶는 작은 끈.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거나 버려지는 것들이 작품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작가의 손길이 수없이 반복되는 동안 연약한 것들은 서로 연결되고 겹쳐지며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감을 얻는다.
전시는 흔들리지 않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흔들리고 변하는 것 역시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이며, 그 연약함이 시간과 손길을 거쳐 단단해지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모나 하툼 〈Web〉: 집, 덫, 혹은 우리
선혜원의 중심 전각인 경흥각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거대한 거미줄과 마주한다. 팔레스타인계 가정에서 태어나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모나 하툼 작가의 〈Web〉이다. 이 작품은 1,200개의 투명한 유리구슬을 가느다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블에 매달아 거대한 거미줄의 형태로 탄생했다.
1층에서 처음 작품을 올려다보면 투명한 구슬들이 빛을 머금은 채 아름답게 반짝여, 밤새 거미줄에 맺힌 이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 2층에서 다시 작품을 내려다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아름답기만 했던 풍경의 인상이 달라진다. 구슬 보다는 줄의 형태가 선명해지며 그물이나 덫의 이미지가 살아난다.
거미에게 거미줄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집이지만, 동시에 먹이를 붙잡는 사냥의 도구이기도 하다. 하나의 구조 안에 안식과 위협이라는 상반된 성질이 공존하는 셈이다. 〈Web〉 역시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보호막에서 덫으로, 아름다움에서 불안으로 모습을 바꾼다.
모나 하툼에게도 '집'은 마냥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런던에 머물던 중 레바논에서 내전이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그는 이후 집과 경계, 안전과 위협처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작품에 꾸준히 담아왔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집도 한순간에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은,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삶을 알고 나니 〈Web〉을 이루는 유리구슬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가느다란 줄에 위태롭게 매달려 흔들리는 구슬처럼 우리 역시 삶의 불확실성과 연약함을 완전히 없앤 채 살아갈 수는 없다. 때로는 익숙했던 세계가 흔들리고, 예상하지 못한 변화 앞에서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연결되며 다시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바라보면 〈Web〉은 보호와 위협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품은 거미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영어 단어 ‘web’이 거미줄인 동시에 서로 이어진 연결망을 뜻하듯, 작품 속 수많은 구슬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리면서 하나의 커다란 그물을 이룬다. 혼자서는 위태롭게 흔들릴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그 흔들림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이 될 것이다.
김윤수 〈바람의 표면〉: 시간의 흔적이 만든 풍경
하린당에는 김윤수 작가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골판지와 PVC 비닐처럼 가볍고 유연한 재료다. 쉽게 눌리고 휘어지며, 작은 힘에도 형태가 달라지는 것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재료를 반복해서 자르고 이어 붙이며, 연약한 것들이 시간과 손길을 거쳐 새로운 형태와 부피를 얻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지하 회랑의 〈바람의 표면〉에서는 이러한 시간의 축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유모차의 방풍막으로 사용되는 얇은 PVC 비닐 위에 사람들의 발바닥 윤곽을 그리고 오려낸 뒤, 이를 수천 겹 쌓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형태를 반복한다고 해서 처음의 발 모양이 그대로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르고 포개는 과정에서 조금씩 오차가 생기고, 그 미세한 어긋남이 거듭되면서 형태는 점차 퍼지고 흐려진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멀리서 보면 빙하 같기도, 푸른빛을 머금은 거대한 보석 같기도 하다. 가까이 다가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비로소 그 안에 남아 있는 발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수천 장의 투명함이 포개지면 선명한 색과 깊이를 갖게 된 〈바람의 표면〉 앞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 걸음은 너무나 작아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은 때때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흘러가는 것만 같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처음의 모습 그대로 머물지도 않는다. 〈바람의 표면〉속 발의 윤곽이 조금씩 어긋나고 번지며 예상하지 못한 형상을 완성해갔듯, 우리 역시 생각했던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한때 선명했던 모습이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어긋남과 변화까지 층층이 쌓여왔기에 지금에 이른다. 수천 번의 미세한 오차 끝에 작은 발자국이 하나의 풍경이 되었듯, 우리가 지나온 시간도 사라지는 대신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테다.
최성임 〈황금이불〉: 연약한 것들의 온기
빵을 먹고 버려진 끈 하나는 너무 가볍고 연약하다. 그러나 수천 개가 서로 얽히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느다란 끈들은 서로를 붙잡으며 하나의 면을 이루고, 마침내 누군가의 몸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이불이 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덮을 수 없던 존재가 서로 연결되는 순간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수많은 연약함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 단단한 갑옷이 아닌 부드러운 이불이라는 점이다. 갑옷이 외부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몸을 둘러싸는 것이라면, 이불은 연약한 몸을 있는 그대로 감싸며 온기를 지켜준다. 이처럼 〈황금이불〉 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흔들리는 존재들이 연대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보호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가 똑같이 가늘고 쉽게 휘어지지만, 서로의 빈틈을 메우고 몸을 기대며 이전에는 없던 힘을 만들어낸다. 어느 하나가 특별히 단단해질 필요도, 자신의 연약함을 감출 필요도 없다. 연약한 것들이 연약한 채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탱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수천 개의 작은 끈은 누군가를 감싸 안을 만큼 커다란 존재가 될 수 있다.
흔들리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
전시의 제목인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를 처음 보았을 때는 어딘가 위태로운 존재들에게 건네는 걱정처럼 들렸다. 괜찮은지,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안부. 하지만 모든 작품을 만난 뒤에는 이 제목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유리구슬은 가느다란 선에 매달려 흔들렸고, 골판지는 제멋대로 휘어졌다. 투명한 비닐은 얇았고, 작은 빵 끈 하나에는 누군가를 보호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연약한 것들은 서로 연결되고, 시간을 쌓고, 빈틈을 메우며 이전에 없던 형태를 만들어냈다. 연약함을 버리고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연약한 채로 공존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전시가 묻는 '안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건네는 말처럼 느껴진다. 완전히 단단해지지 않아도, 흔들림이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저 서로의 흔들림을 알아보고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선혜원의 오래된 한옥을 나서며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가 건넨 질문에 나 역시 조용히 답해본다.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잘 살아 있다고. 그리고 나를 지탱해 온 수많은 작고 연약한 것들 역시, 부디 무사하기를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