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삶의 터전을 옮긴다.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떠나고, 익숙했던 동네를 벗어나고, 때로는 도시와 나라를 건너 새로운 일상을 꾸린다. 그렇게 거처가 바뀔 때마다 이전의 집은 조금씩 멀어진다. 그러나 몸은 떠날 수 있어도 기억까지 완전히 이사하기란 쉽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서도호》 전시는 바로 그 ‘떠나온 집’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울에서 성장한 뒤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을 오가며 살아온 서도호에게 집은 소유물이나 재산의 개념이 아니다. 한 사람이 머물렀던 시간과 그곳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손끝에 남은 감각과 기억까지 품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집을 지나온 우리에게 진짜 '나의 집'은 어디일까. 서도호의 작품은 말한다. 우리가 떠나온 모든 집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고.
떠나왔지만, 떠나오지 못한 집

전시의 초입, 벽을 가득 채운 200여 점의 액자 속에서 집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머릿속이 온통 집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부터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부리나케 오르는 사람까지.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한옥이 한 사람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연작이다. 집을 피해 달아나던 인물은 마침내 도망치기를 멈추고, 거대한 한옥 아래 우뚝 선다. 마치 SF 영화에서 인간이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는 장면처럼 보이는 동시에, 오랫동안 외면해 온 자신의 과거와 마침내 마주 선 사람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서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 성북동의 한옥이었다. 이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어린 시절의 집은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옥을 떠나 낯선 문화권의 아파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집은 어쩌면 떨쳐내고 싶은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듯, 한때 나를 품었던 공간 역시 나의 일부로 남는다. 한옥을 피해 달아나던 인물이 마침내 그 아래 초연히 서 있는 작품은, 떠나온 과거를 더 이상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사랑하기에, 오래도록 문지르는 일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집은 전시의 중반에 이르러 실제 공간의 형태를 얻는다. 〈러빙/러빙: 서울 집〉은 서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성북동 한옥을 한지로 감싼 뒤, 그 표면을 흑연과 색연필로 문질러 본뜬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인 ‘러빙/러빙’은 흥미롭다. 문지른다는 뜻의 ‘Rubbing’과 사랑한다는 뜻의 ‘Loving’. 집을 기억하는 방식이 하필 ‘문지르는 행위’라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벽과 문, 창문과 작은 모서리까지 손으로 짚어가며 그 표면을 떠내는 일. 떠나왔기에 그리웠고,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대상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오래 바라보고, 만지고, 되짚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사랑하는 방식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래 살았던 집을 떠난 뒤에도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현관문을 열 때의 감촉, 늘 앉던 자리에서 바라본 창문의 방향, 어느 시간대에 거실로 들어오던 햇빛처럼 너무 사소해서 그곳을 떠나기 전에는 특별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서도호의 작업은 그런 사소한 흔적들을 집요하게 되살린다. 그에게 집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곳에 남겨진 사랑의 흔적을 오래도록 어루만지는 일인 듯하다.
모든 기억이 모인 ‘완벽한 집’

다음으로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에 들어서면 그가 거쳐온 여러 도시의 집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겹쳐진다. 투명한 천으로 재현된 집 안에는 천장의 조명부터 현관의 문고리, 스위치와 콘센트, 욕실 수전까지 각기 다른 집의 흔적이 중첩되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 한곳에서 포개지며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이름은 뜻밖에도 ‘완벽한 집’이다. 완벽한 집이라고 하면 흔히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잘 갖춰진 이상적인 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서도호의 완벽한 집은 정반대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구조가 한데 얽혀 있어 실제로 생활하기에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이 집이 '완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나온 모든 시절의 내가 하나도 지워지지 않은 채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는 데 있다. 어린 시절의 나도,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나도,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나도 어느 하나 지워지지 않은 채 공존하는 공간. 서도호의 ‘완벽한 집’은 그렇게 하나의 주소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품어준다.
집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다시 가족에게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확장되었던 전시는 흥미롭게도 마지막에 이르러 가장 작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바로 가족이다. MMCA 스튜디오에는 서도호의 두 딸과 가족에 관한 작업들이 자리한다. 딸이 성장하며 입었던 옷이 겹겹이 포개지고, 작가와 딸이 서로를 그린 그림과 자라면서 신었던 신발의 발자국이 작품으로 남는다. 일상 속에서는 무심히 지나쳤을 성장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따스한 시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랑의 기억〉 작품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집’이라는 질문을 한곳에 모아놓은 듯하다. 서도호의 코트 안쪽에 가족의 옷에서 떼어낸 주머니들을 달고, 그 안에 함께한 시간을 품은 사물들을 넣었다. 물감이 잔뜩 묻은 붓, 목재 장난감, 낙서가 적힌 노트까지. 타인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물건일지 몰라도, 가족에게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이 된다.
떠나온 집에서 시작했던 이야기가 한 사람의 몸에 걸치는 작은 옷으로 돌아오는 흐름. 이는 집을 이루는 것은 벽과 지붕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쌓아 올린 시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집은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관계와 기억의 형태로 우리 안에 자리 잡는 것. 서도호는 전시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모두 집을 입고 살아간다

집은 떠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만졌던 문손잡이의 감촉, 가족을 부르던 목소리,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 그곳에서 울고 웃었던 시간은 보이지 않는 층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일지라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만큼은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집을 지나온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집이 있다. 어느 하나의 주소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빠짐없이 머무는 곳.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다. 서도호의 집들이 투명한 천 너머로 서로의 모습을 비추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듯, 우리의 삶 역시 지나온 모든 시절이 겹쳐져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
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벗어던지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모든 시절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만큼 내 안의 집을 넓혀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입은 채 조금씩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모든 여정에서 저마다의 '완벽한 집'을 만들어가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