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작품 속 캐릭터의 인격으로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보다, 배역을 벗고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더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크린에서는 누구보다 강렬한 감정을 보여주던 배우가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순간에는 유독 수줍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나 역시 영화에 대한 오피니언을 기고하던 공간에서 내 이야기를 하려니 조금은 쑥스러워진다. 그래서 가장 나다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내 인생 저마다의 시기를 닮은 영화 세 편으로, 나를 소개하는 것.
20대까지의 초년기를 채워준 <굿 윌 헌팅>, 삶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준 <소울>, 언젠가 맞이할 인생의 말년까지 미리 그려보게 하는 <빅 피쉬>. 이 영화들을 따라 나라는 사람에 대해 천천히 소개해 보겠다.
<굿 윌 헌팅>: 어떠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
10대의 나는 조금 시니컬한 아이였다.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는 장난도 웃음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곤 했다. 몇몇 친구들이 ‘포커페이스’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는데, 상처받기보다는 외로움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그렇게 완고하던 내 믿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든 영화가 바로 <굿 윌 헌팅>이었다.
영화 속 윌은 그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한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상처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날카로운 말로 사람들을 번번이 밀어낸다. 그러다 심리학 교수 숀을 만나 진심 어린 공감을 경험하며 조금씩 마음을 열고, 마침내 자신 역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는 세상을 경계하는 윌의 모습에 당시의 나를 겹쳐 보곤 했다.
하지만 영화를 거듭해 볼수록 내 시선은 숀에게 향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그 꿈은 치열한 입시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 심리학 복수전공을 선택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알아갈수록 이해의 폭은 넓어졌고, 애정도 깊어져 갔다. 그 과정에서 숀을 보며 품었던 막연한 꿈이 내가 기꺼이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소울>: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
삶의 방향은 분명해졌지만, 그것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취업난 속에서 수많은 불합격 끝에 나는 브랜드 마케터로 첫 커리어를 내디뎠다. 유명인들과 광고를 촬영하고, 시즌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 브랜드의 성장을 고민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분명 한때는 간절히 바라던 삶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에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새해, 영화 <소울>을 만났다. 영화 속 주인공 조 가드너는 평생 재즈 연주자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어렵게 꿈꿔 온 무대에 오르게 되지만, 기대했던 충만함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허탈함을 느끼던 조에게 한 인물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 물고기가 나이 많은 물고기에게 가서 말했어.
“저는 바다라는 곳을 찾고 있어요.”
그러자 나이 많은 물고기가 대답했지.
“바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로 바다란다.”
어린 물고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예요.”
어쩌면 나도 바다에 있으면서 바다를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직장, 원하는 커리어를 얻으면 비로소 내 삶이 시작될 것이라 생각하며, 늘 다음 목적지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여행을 떠나며,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 기쁘게 몰입한다. 그 경험들을 글로 엮어 누군가에게 작은 영감과 즐거움을 전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소한 일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
바다를 찾아 헤매던 그 물고기는 이제야 알게 된다. 평생 찾아 헤매던 바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빅 피쉬>: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결심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나는 종종 내 삶의 끝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가장 아름다운 답을 들려준 영화가 바로 팀 버튼 감독의 <빅 피쉬>였다.
영화 속에서 아들은 평생 과장된 이야기만 늘어놓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거인과 마녀, 유령마을과 거대한 물고기까지, 아버지의 이야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모두 허풍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아들은 깨닫는다. 그가 평생 들려준 이야기들은 삶을 조금 더 경이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그만의 사랑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빅 피쉬>를 보는 내내 나는 아버지의 삶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여행에서 있었던 작은 해프닝도, 책과 영화를 보며 떠오른 생각도 늘 이야기로 나누며 살아오고 있다. 평범한 하루조차 이야기가 되는 순간을 사랑하면서. 그렇기에 아버지가 거대한 물고기가 되어 사람들의 이야기 속을 헤엄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문득 내 삶의 끝도 그와 닮아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삶의 끝에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졌다. 거창한 무언가를 이루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누군가의 삶에 작은 온기를 더하는 글을 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온전한 가치를 다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최수경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공교롭게 바로 앞 댓글에서 제 일상을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이야기하고 온 길이지만… 저는 <소울>에서 주인공의 손 위로 낙엽이 떨어지는 장면을 좋아해요. 주변의 작은 것들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꼈던 이 장면처럼, 어쩌면 저의 일상에도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드네요.
글 곳곳에서 수경님의 다정함과 자신의 삶에 대해 오래 고민해온 사람의 단단함이 느껴져서 읽는 저까지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었어요.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서 수경님도 수경님만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시는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어떤 상황에서 영화를 만나느냐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제게 딱 필요했던 순간에 알맞게 찾아와 준 영화들이 오래도록 인생 영화로 남아 있더라고요. 세 작품을 경주님은 어떻게 감상하실지도 궁금하네요! 마침 지금의 경주님께 필요한 이야기가 그 안에 담겨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ㅎㅎ
소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름만 알고 있던 영화들인데, 수경 에디터님의 글을 읽다보니 모두 봐 보고 싶어지는 글이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수경 에디터님의 '최애'가 된 이 세 영화들을 만난 일이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경 에디터님께서는 영화 속 인물들과도 같이 멋지고 단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논외로 저는 저의 이야기로 글을 쓰다가 혼자 한참 빠져들거나 때로는 얼버무리듯이 마무리할 때도 있는데, 이렇게 명쾌하면서도 간결하게 진정성 있는 이야기들 엮어낼 수 있다는 점을 배워갑니다.
저도 '엽기적인 그녀'를 주제로 인생영화에 대해 기고를 했던 적이 있는데요, 영화의 전체적인 리뷰와 비주얼에 대한 호감의 표현 정도로 마무리했던 글이지만 수경 에디터님의 글을 계기로 생각해 보니, 두 주인공처럼 저도 마음 한켠에 영원한 사랑과 운명을 믿는, 순수함을 간직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중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라는 점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엽기적인 그녀> 영화를 사실 내용만 얼핏 알고 제대로 시청한 적이 없었는데, 문득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원한 사랑과 운명을 믿는 순수함을 오래 간직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에 저 역시 살포시 마음을 보태봅니다 :) 정성스러운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