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평균이 지우는 것들: '패치 인류세'를 과학의 눈으로 읽다 - 패치 인류세 [도서]

도서 『패치 인류세』(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김희정 옮김, 해나무) 서평

by 김예원 에디터
2026.10.24 14:41
이 브라우저에서 최근 읽은 글입니다.
      이전에 읽던 글입니다.

      패치인류세_앞표지_띠지.jpg

       

       

      평균기온이라는 한 줄 요약


       

      뉴스에서 "올해도 지구 평균기온이 올랐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는 선뜻 와닿지 않는다. 평균은 여러 곳의 값을 하나로 뭉쳐 놓은 숫자라서, 어디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그 안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 같은 도시, 같은 날에도 한낮의 아스팔트 위와 나무 그늘 아래는 체감이 전혀 다르다. 일기예보 앱에서 동네만 바꿔 봐도 숫자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지구 전체를 숫자 하나로 줄였을 때 사라지는 차이는 얼마나 많겠는가.


      큰 숫자는 위기의 크기를 알려 준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는 답해 주지 않는다. 『패치 인류세』가 파고드는 곳이 바로 이 간격이다. 인류세를 지구 전체에 고르게 퍼진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말고, 인간이 만든 인프라와 인간 아닌 존재들의 움직임이 얽혀 생겨난 크고 작은 '패치'들의 모음으로 읽어 보자는 제안이다.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을 비롯한 네 저자는 이 생각을 구체적인 장소들의 관찰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책은 인류학 책이지만, 과학을 가까이 해 온 독자에게 오히려 더 흥미롭게 읽힌다. 규모, 측정, 일반화처럼 과학이 늘 붙들고 씨름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이다.

       

       

       

      지질학의 인류세, 현장의 인류세


       

      읽기 전에 하나만 구분해 두면 편하다. 지질학자들이 시대를 나눌 때는 일종의 '도장'이 필요하다. 지구 어디를 파 보아도 같은 시기에 찍혀 있는 표지 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지층에 남은 방사성 낙진 같은 것이 그런 후보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인류세가 오래 논의되고도 공식 지질시대로는 채택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출판사 소개문도 지질학계가 아직 인류세를 공식 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패치 인류세』는 거꾸로 걷는다. 어디서나 똑같이 찍힌 도장을 찾는 대신, 장소마다 도장이 어떻게 다르게 찍혔는지를 본다. 두 접근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그저 질문이 다르다. 층서학이 "언제부터를 하나의 지구적 변화로 볼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이 책은 "그 변화가 이곳에서는 어떤 구조를 거쳐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를 묻는다. 이렇게 보면 책이 지질학에 맞서려는 게 아니라, 같은 세계를 다른 축척으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라는 점이 한결 선명해진다.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


       

      '패치'라고 하면 조각보를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저자들이 그리는 조각들은 반듯하게 맞물리는 퍼즐 조각과는 영 다르다. 칭이 한 강연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인류세의 패치들은 서로 맞지 않는 규모에서 생겨나고, 겹치기도 하며, 세계를 빈틈없이 덮지도 않는다. 또 '패치'라는 말은 공간만이 아니라 공간들 사이의 연결까지 가리키도록 넓혀서 쓰인다. 조각 자체보다 조각들이 이어지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진을 확대하면 보이지 않던 결이 드러나고 줄이면 다시 사라지듯, 관찰하는 규모에 따라 보이는 현상이 달라지는 일은 과학에서도 낯설지 않다. 생태학에는 '규모 의존성'이라는 오래된 숙제가 있고, 지리학에는 구획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통계가 달라지는 '가변적 면적 단위 문제'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제가 덧붙인 연결이며, 책이 직접 언급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페럴 아틀라스』를 소개한 글은 인류세를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규모의 효과들이 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격자 위에 모든 걸 올려놓고 합산하려는 시도가 왜 자꾸 무언가를 놓치는지 짚어 주는 대목이다.

       

       

       

      뇌관은 누가 만들었나


       

      책의 바탕이 된 『페럴 아틀라스』는 현상을 읽는 몇 가지 렌즈를 내놓는다. 첫 번째는 '인류세의 뇌관(detonator)'이다. 식민주의나 자본주의처럼, 이후에 벌어질 일의 판도를 크게 바꿔 놓는 사회적 힘을 가리킨다. 아틀라스 소개글은 이 뇌관을 침입, 제국, 자본, 가속의 네 가지로 꼽으면서 이것들이 연대기 속 한 시점이 아니라 과거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종의 증후군이라고 설명한다. 책 목차에도 같은 이름의 장이 있다. 영어 원서 기준으로 'How to detonate an Anthropocene'이라는 제목이다.


      두 번째는 '넘기는 것(tipper)'이다. 화석연료 연소처럼 생태계를 임계점 너머로 밀어내는 인프라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생태학의 임계점이나 체제 전환(regime shift) 논의를 접해 본 독자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탈(feral)'의 성질이다.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가 함께 문제를 만들어 내는 상호작용, 이를테면 외래종이 들어와 자리 잡는 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이 틀에서 마음에 걸리는 건 책임의 자리다. 칭은 인터뷰에서 제국의 정복이나 산업 개발을 위해 지어진 인프라가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낳았는데, 설계자들이 그 '덤'의 효과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과학 용어로 옮기면 외부효과(externality)를 설계 단계에서 따져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설계도에는 없던 일이 그 뒤로 오래, 그것도 고르지 않게 이어진다. 독성 폐기물이 만들어 낸 변화가 그런 예로 다뤄진다.

       

       

       

      생태학 책장 옆에 꽂아 두고 싶은 책


       

      아래는 책의 주장이 아니라 필자의 연결이다. 경관생태학을 접해 본 독자라면 '패치'라는 말에서 패치-매트릭스-회랑 모형이 떠오를 것이다. 서식지가 조각난 모자이크이고, 조각 사이의 연결이 생물의 이동과 분포를 좌우한다는 그 모형 말이다. 다만 생태학의 패치가 주로 공간의 구조를 그리는 말이라면, 이 책의 패치에는 식민의 역사와 산업 인프라, 그것을 만든 결정까지 함께 담긴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품고 있는 이야기의 폭이 다르다.


      '이탈'도 지위 구축(niche construction), 생태계 공학자(ecosystem engineer), 신생태계(novel ecosystems) 같은 개념과 나란히 놓고 읽을 만하다. 생물이 환경을 바꾸고, 바뀐 환경이 다시 생물에게 작용하는 순환은 생태학이 오래 다뤄 온 주제다. 이 책이 새로운 것은 그 순환의 출발점에 인간이 지은 설비와 이동 경로를 놓고, 의도와 결과 사이의 틈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는 점이다. 자연과 인간을 가르던 오래된 선이 여기서 조금 흐려진다.

       

       

       

      발로 쓰는 데이터


       

      저자들이 택한 길은 직접 가서 보고 적는 것이다. 지구를 통째로 요약한 수치로는 닿지 않는 곳이 있다고 보고, 박물학의 전통을 다시 불러온다. 책이 '현장 안내서'를 자처하는 이유다. 바탕이 된 『페럴 아틀라스』는 분야가 서로 다른 필진이 쓴 현장 보고서 79편을 모은 작업이고, 필진 중에는 지구 시스템 과학자 윌 스테펜도 있다. 현장 관찰과 분야를 넘나드는 협업이 환경 문제를 알아차리고 대응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는 믿음이 이 프로젝트의 뼈대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 방법의 강점은 분명하다. 모델과 위성 자료가 놓치기 쉬운 국소적 상호작용을 건져 올릴 수 있고, 아직 숫자가 되지 못한 현상의 단서를 건네준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같은 장소를 각자의 말로 기록하게 만들어 지식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개별 사례는 대표성을 보장하지 않고, 사례를 고르는 과정에 편향이 끼어들 수 있으며, 서술만으로는 인과를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어렵다. 해명되지 않은 질문도 남는다. 칭의 강연을 듣고 쓴 한 논평은 '이탈'을 규범적 판단 없이 기술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작업이 실천에서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지를 묻는다. 어떤 존재를 '이탈했다'고 부르는 순간 이미 기준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패치가 실제로 얼마나 흔하고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알려 주는 책이라기보다,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관찰의 틀로 읽는 편이 정직하다. 정량 연구와 만날 때 가장 힘을 내고, 정량 연구가 놓친 곳에 가설을 건네준다는 점에서 서로를 보완한다.

       

       

       

      읽기 전에, 조금만 각오를


       

      원서는 2024년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나왔고, 국내판은 김희정 옮김, 해나무에서 출간되었다. 낯선 용어가 자주 나오고 장마다 이야기의 결이 다르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달리기보다는 관심 가는 장부터 펼쳐 읽는 쪽을 권한다. 개념이 막힐 때는 구체적인 사례 쪽으로 돌아가면 길이 보인다. 번역서마다 용어가 다를 수 있으니, 이 글의 영어 병기는 원서와 아틀라스 자료 기준이라는 점도 알아 두면 좋다.

       

       

       

      맺으며: 큰 숫자 옆에 작은 장소를


       

      이 책을 덮고 나면 큰 숫자를 볼 때마다 그 뒤에 숨은 작은 장소들이 궁금해진다. 평균기온이나 배출량 같은 지표는 여전히 필요하고, 『패치 인류세』도 그것을 밀어내려는 책이 아니다. 대신 큰 숫자와 작은 장소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읽으라고 권한다.


      과학이 규모의 언어라면 이 책은 장소의 언어다. 두 언어를 함께 쓸 때 인류세가 더 정확하게 보인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이 건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김예원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잔잔하지만 재밌고 밥먹을때 볼 수 있는 애니 추천해줘 [만화]
      2. 02 [Opinion] 던전에서 밥해 먹는 게 그렇게 재밌어? [만화]
      3. 03 [Opinion] 여성들의 연대, 그리고 일상 속 녹아든 사랑 [드라마]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