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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기울어진 감정의 모순 - 순수 [도서]

사랑과 기만의 지독한 불협화음

by 정예진 에디터
2026.10.20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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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한 국면에는 다수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세밀한 감정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것도, 특별하지 않게 취급하는 것도 세차게 쏟아지는 폭풍우 같은 본연의 마음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완전한 대척점에 머무르는 두 형체가 단단하게 결합할 수 있을까? 두 존재가 하나로 귀결되는 찰나의 순간이 건네는 감정의 보따리는 광기일까, 환희일까. 순수와 지적 오만, 나란히 선 두 형상이 탐탐히 아우러지는 대가는 적나라한 잔혹성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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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데카당스 문학의 거장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대표작, 『순수』. 귀족적 나르시시즘이 자아를 어두운 공허감으로 입혀가고, 차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숨통을 죄어 오는 여정을 그린 심리 소설이다. 복잡한 내면 속 윤리적 긴장과 더불어 기만과 관능적 욕망 그리고 도덕성의 추구, 이상을 위한 몸부림이 어우러진 정신 상태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단눈치오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니체적 초인’을 이상화하는 주인공 툴리오의 역설적 심리 양식을 화려한 필치와 세밀한 감정의 묘사를 통해 드러낸다.


      한 사람의 관능적 욕망과 ‘초인‘이라는 우월한 형상이 상대방을 망가뜨리는 과정과, 그 과정 끝에 감각할 수 있었던 속죄와 수채화처럼 번져 가는 질투, 무고한 존재를 향한 살의 그 모든 이중적인 내막을 샅샅이 파헤치며 독자의 무의식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초인적인 영웅주의


       

      툴리오는 아내 줄리아나에게 더 이상 관능적인 욕망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정의할 수 있는 내면의 맹목적인 이기심이 이성적인 끌림이 아닌 ‘누이‘로서의 사랑을 시작하도록 부추겼고, 그녀의 눈앞에서 냉담할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를 도덕이라는 이데아로 표상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인간의 모든 애정 가운데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랑 중에서 그 누이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위안을 주는 것 같았다.”


      불꽃 튀기는 감상적인 열망은 자연스레 ‘테레사’라는 미지의 여인에게 향했다. 도시 생활의 유해한 기운 때문일까, 그는 섬광처럼 몸의 피가 극도로 뜨거워지는 반응을 ‘희열’로 느끼며 피렌체로 달리고 또 달렸다. 테레사의 편지 하나, 그리고 한 구절이 그의 마음속 모든 이성을 칠흑 같은 원초아로 사그라들게 만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쾌락을 주는 존재에게 상처를 입힐 때 오히려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소름 끼치는 능력을 본성으로 타고난 것일까? 사랑하고 열망하는 모든 인간 속에서 왜 그렇게 증오받아 마땅한 가학적인 사악함의 씨앗이 싹트는 걸까?“


      후회, 그리고 또 후회. 그는 연속적인 후회 속에 가라앉을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가학성은 생명이라는 소중함을, 스스로의 바운더리와 철저하게 동일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줄곧 ‘타자화’라는 독립성을 인정하는 행위가 상대를 객관적인 주체로 바라보며, 배려할 수 있음을 망각한다.


      툴리오는 줄리아나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 급급했다. 자비와 연민의 여신을 만들어 그녀를 마음의 고향으로 정의하였고, 스스로를 구원의 늪에서 정화하는 행위를 되풀이하였다. 꿈틀거리는 욕망을 절실한 갈망과 본능이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하여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광활한 자비에 속박되어 있는 그녀라면 욕망 앞에 발가벗은 자신에게 몇 번이고 입 맞춰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줄리아나는 빌라릴라에 머물고 싶었다. 빌라릴라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툴리오와 자신에게 절망이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며, 그 찰나의 순간 툴리오와 자신이 서로의 의중을 동일시했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배반의 편에 섰다. 또 한 번 마음속 자비의 여신을 극진히 숭배했다. 관능의 이름으로 피어난 갈망이 집 안의 온기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를 환락 속을 떠도는 탕아로 들끓게 했다.


      “그것은 범죄 아니었나? 내가 저지른 범죄 중 으뜸인 범죄였고 결코 사소한 죄도 아니었을 것이다.”

       

       

       

      불씨


       

      줄리아나는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 툴리오가 그녀의 정신을 저버리고 ‘누이’로 둔갑하게 하며 성스러운 연극을 자처할 때 그녀는 ‘단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비틀린 태엽처럼 마음이 일그러진 툴리오는 그날의 어두운 이면을 명확하게 씹어 삼키고 싶었으나, 죽음에 가까운 정신적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줄리아나의 앞에서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속죄를 떠올렸다. 줄리아나를 이해하고 다시금 그녀를 안아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성스러운 여신이라는 형상에게 다시 한번 구원을 받았다. 마음 깊은 곳 니체적 초인이 삶의 동아줄이었다. 지독한 탕자로 살아온 나날들이, 끝내 큼직한 업이 되어 가슴을 압박하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 사람이 정말 깨끗하지 않다 해도 넌 모른 척하거나, 그 사람이 네 잘못을 눈감아 주었듯이 그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건 무슨 이유지?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은 잊어 주길 원하면서 넌 잊을 수 없는 거지?”


      “당신은 유일무이한 사람이야. 당신이 내 집에 있었는데 난 멀리서 당신을 찾고 있었어······. 이제 이해하오? 이해하오?”


      줄리아나를 향한 툴리오의 이상적 열망이 발현되어, 그는 다시 한번 공상 속에서나 그릴 법한 완전한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나 달콤한 염원은 정조를 지키지 못한 줄리아나와, 줄리아나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순결한 생명의 씨앗에 의해 금세 좌절되고 만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소설가 필리오 아르보리오의 분신이 아내의 뱃속에 꿈틀대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툴리오의 봉인된 밑바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시공을 초월한 고상한 자아를 통해 우월감에 도취했던 그는 마음속 선의 여신을 통해 아내를 용서하고, 진리의 원리가 외부적 제약이 아닌 삶에 부여하는 의미에 존재한다는 점을 곱씹어 흐트러짐을 정돈했다.


      수많은 외도로 줄리아나의 신의를 꺾어버렸음에도 ‘빌라릴라’라는 환영과 현실의 아름다운 경계선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축하려 다짐했다. 허나 그 모든 염원은 단 하나의 무고하고 순결한 존재로 인해 허울에 불과해졌다. 툴리오의 완벽한 진리가 일순간의 끝없는 어둠으로 내던졌다.


      “불확실한 대상을 향해 쏟아붓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도덕적 에너지, 영원하리라 믿은 무용한 사랑, 굳건하리라 믿었지만 금방 무너져 버리는 미덕들, 허약함을 드러내는 가장 건전한 의지, 수치, 불행, 이 모든 게 그 순간 내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어떻게 사랑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피조물이 인간이 아닌가. ‘불확실성’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속성이기에 세상의 작디작은 것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자의적인 추론을 만들어내 몇 번이고 스스로를 구원했음에도, 다시금 구렁텅이에 몸을 내던져 주변인을 허황된 미물로 여기기 바빴다. 그의 절대적 동일시는 끝내 세계에 대한 부정에까지 이르게 된다.

       

       


      탐미주의적 순수


       

      줄리아나는 아들 라이몬도를 낳았다. 툴리오와 줄리아나 그 두 사람을 조금이라도 닮지 않은 것 같은 아이. 그 순결하고 투명한 존재가 독자로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때로는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힌 툴리오. 그 환각은 그의 성정을 더욱더 뒤틀리게 만들어 마침내 살의라는 깊은 수렁에 다다르게 했다.


      이 핏덩이만 사라진다면 줄리아나와의 관계 속에서 삶의 순수성을 규명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감정의 편린이 꿈지럭거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이상적 세계가 수십 번 일렁이기를 반복했다.


      툴리오의 살의는 결국 라이몬도를 진정으로 살해하게 된다. 순간적 충동이 아닌, 감정의 동요라고는 볼 수 없는 치밀하고도 냉철한 계획을 통한 완벽한 삶으로의 회귀.


      본능과 죄책감의 희미한 문턱을 넘나들며 신적 자아에 영구히 갇혀있는 툴리오에게, 순백의 무지 상태에 놓여있던 아이는 커다란 위협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고귀한 삶을 절묘하게 끊어놓기 위한 장애물, 라이몬도의 존재 자체만으로 그는 켜켜이 쌓인 진리가 전부 무너지는 고통을 느꼈다.


      이 이야기의 결론. 툴리오가 라이몬도의 죽음을 통해 다시금 줄리아나와의 순수한 사랑을 견고하게 다지고, 그의 이상적인 지적 경지를 맛볼 수 있었는가?


      "이 무결한 아이를 누가 죽였는지 알아?"


      툴리오의 이성은 비루하게 붕괴하고 있었다. 싸늘하게 부패하는 라이몬도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공허감이 그의 발목을 강하게 붙들어 완전하다고 믿었던 삶의 토지에서도 제대로 디딜 수 없게 했다. 남는 것은 순수한 사유의 이상향이 아닌 처절한 고통과 짙은 허무함, 그리고 범죄자인 자신의 악독한 폭력뿐이었다.


      ‘순수’의 상징이었던 무고한 라이몬도는 자기연민으로 무장한 나르시시즘으로 죽음의 늪에 가라앉게 되었고, 장송곡의 소산만이 드넓은 저택을 고스란히 채우게 되었다.


      타인을 진정한 타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하나의 명예로운 신으로 형상화하여, 상대를 동일시하는 이기주의는 여전히 만연해 있다. 숲을 보지 못한 채 나무의 형태만을 확신하는 근시안적 사고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리게 한다.


      우월함을 가장한 옹고집과 이기주의를 통해 단단하게 결집한 자기연민은 현세대에서도 반복적인 형태로 어둠의 장막 아래 도사리고 있다. 초인적 자아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은 본연의 맑음을 회복의 여지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지평선 너머로 흘려보내게 한다. 소중한 상대를 위협하는 감정의 부산물, 그 어슴푸레한 이면이 왜 자신에게는 와닿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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