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광화문 쪽으로 걸었다. 덕수궁과 서울광장을 지척에 두어놓고도, 이 길이 왜 이렇게 낯선지를 생각한다. 쏜살같이 지하철로 내려가는 까닭이었을 거다. 마치 1분 1초라도 더 빨리 지하철로 내려가려던 탓이다. 오늘 덕수궁을 지나 광화문을 바라보며 걷는 밤길이 아름답다. 못 보던 전광판도 군데군데 큼지막이 박혀 있었는데, 불빛이 너무 강했다, 약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나뭇잎이 새하얀 백지처럼 보일 정도로 그랬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 버스 정류장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그녀는 종로5가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시간대 종로를 통과하는 버스는 마음처럼 내달려 오지 못할 것을 알았으므로, 그녀가 제시간에 오리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덕수궁 앞에 놓아두고 왔다. 중앙차로에 있는 정류장 펜스에 기대어, 광화문 일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각종 전광판과 조명으로 한껏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좀체 멈추어 굽어볼 일 없는 이 거리를 마주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 의미로서 기다리는 처지란 꽤 즐거운 일임을 알았다. 버스를 바라는 눈길이 아닌, 여행객의 서성이는 눈빛을 드리운 채 떡하니 기댄 자세로는, 꽤 많은 시선이 머물다 갔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의 당당한 권리로써,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게 여길 수 있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이다. 내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걸 보면 마음이란 참 이상스러운 것 같다.
저녁 시사회 일정은 바쁘다. 영화가 시작하는 19시 반까지 50분도 남지 않았지만 우리는 빠르게 저녁을 먹고 그 와중에 세종문화회관 뒤편의 재즈 공연도 잠깐 구경하다간, 마감 1분 전 씨네큐브에 도착했다. 오늘의 영화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여, 안녕’. 나는 원제인 ‘Adios Buenos Aires’ 편이 좀 더 마음에 든다.
포스터에도 적혀있듯 탱고를 주제로 한 음악 영화이다. 탱고하면 여인의 향기 주제가라든지 리베르탱고 정도밖에 모르지만, 그 두 음악이 워낙 강렬한 탓이었던지 탱고를 하면 선뜻 기대하게 되는 감상이 있다. 정열 또는 로맨스, 장미를 입에 물고 투우처럼 스텝을 밟는 듯한 이미지. 하하, 너무 진부한 선입견이려나.
목요일 저녁, 퇴근 후 지친 나를 음악 영화가 잔잔히 쉬게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사회 신청을 눌렀다. 탱고의 에너지가 지친 내 심신을 대신해 오감을 채워 들었으면. 나도, 일행도, 이따금 주말에 만나던 그 화창한 모습이 아닌 일상에 충분히 젖은 모습, 물에 빠진 뒤 바싹 마른 새앙쥐 같은 몰골을 하고 있어 서로 낯설던 참이었으니. 노래에 기대어 별다른 생각 없이, 객석에 흐르는 치즈처럼 녹아 있고 싶었다.
영화는 적당히 낡은 클럽 바에서 시작한다. 식당과 바를 겸 하는 한구석에 밴드셋 무대를 갖추었고, 그 외관과 실내장식이 충분히 낡아서 정겹다. 공간도 인물도, 그 행색이 비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인공 훌리오만 빼고. 훌리오 역을 맡은 사내, ‘디에고 크레모네시’만은 허름한 셔츠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뇌쇄적인 우수를 풍기고 있다. 일순 ‘다니엘 크레이그’를 연상시키는 깊은 안와와 푸른 눈이 인상 깊다가도, 어딘가 제이크 질렌할(젊은, 수염 없는)의 소년미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분위기.
시작과 동시에 탱고 연주가 흐른다. 반도네온 선율이 귀를 조금씩 적셔들며 청각을 깨우기 시작하는데, 완곡과 동시에 보컬이 산통을 깬다. 뜬금없이 이 무대를 마지막으로 유럽으로 떠난다는 소식, 팀원들 몰래 준비한 갑작스런 작별에 그들은 배신의 울분을 토하고, 조금 전까지 예쁜 가사를 읊으며 부드럽게 눈을 감던 보컬리스트는 금세 옹졸한 사내로 돌변한다. 남은 자리엔 흰머리 아저씨와 배 나온 아저씨들뿐, 덩그러니 남겨진 팀원들이 더욱 초라해 보인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주인공의 신발 가게는 안 그래도 오래된 건물 특유의 빛바랜 색으로 가득해 바깥에서 보면 장사를 하는지조차 의심 들게 하는데, 실지 장사도 잘 안돼서 납품업자가 대금 대신 재고를 들고 나가고, 배불뚝이 친구의 카센터도 장사가 안 되는지 늘 친구 놈들뿐이다. 하나는 그나마 학교 선생이라도 하고 있지만, 나머지 하나는 아예 실직자이다. 그는 최근 복권에 빠져 있다.
하나를 빼곤 그래도 본업을 따로 둔 음악인들이지만 본업은 고사하고, 정작 부업도 시원찮다. 그들은 연주의 대가로 클럽 바 주인이 손수 만든 ‘엠파나다’ 여덟 조각을 받는 게 전부이다. 튀긴 왕만두처럼 생겼다. 사람 넷에 만두 여덟이라, 반도네온과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연주 각각의 대가로 만두 2개씩이라니, 그들은 진정 음악을 사랑해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연주를 마친 늦은 밤, 훌리오가 운전하는 차에 타 ‘엠파나다’를 씹어 먹는 그들은 그러나 조금도 처량하지 않았다. 스스로 처량함을 조금도 자처하지 않을뿐더러, 그거로도 모자라 태연함이 넘쳐흐른다. 저녁값은 굳었군- 확실히 그렇지 하고 묻고 답할 때의 그들은, 소 같은 눈망울로 왕만두를 우적우적 씹으며 농담과 함께 무심히 삼킨다. 그때 그들은 한밤의 알시나 다리를 지나고 있었고, 그 배경으로 잔잔한 탱고가 흐른다.
영화에서 접한 탱고는 내가 익히 아는 두 곡과는 결이 다르다. 리베르탱고가 정열과 저돌성을 상기시킨다면, 이 영화의 탱고는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편. 주선율을 잡은 바이올린이 가녀리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이끌고 그 밑에 반도네온이 선이 굵은 음색으로 뒤따라 받친다. 그러다간 전주에 이르러 삽시간에 분위기를 반전해 처량한 분위기로 전환되곤 2절 시작과 동시에 곧잘 본래의 서정으로 복귀하는데, 이 전환의 속도와 전개 방식이 놀랍다. 전조도 없이 뚝 하고 떨어지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낯을 바꾸는 감정선. 이 능청스러움과 감정의 빠른 전환이 곧 탱고 음악의 개성일까 싶어진다. 이런 건 아무래도 직접 듣는 편이 더 빠르다.
이 음악이 내가 영화에서 느낀 바를 대신 설명해 주는 듯하다. 등장인물들의 삶이 순탄하기는커녕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심각해지거나 진지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이 무쇠로 돼 있다거나 모든 슬픔으로부터 면역인 건 아니라서 약간의 슬픔을 겪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약간의’ 슬픔일 뿐이라, 다음 날 게 눈 감추듯 뜨악할 정도로 낙천적인 표정을 짓는다. 낙관에서 슬픔으로의 빠른 전환과 다시 낙관으로의 빠른 회복은, 어쩜 탱고 음악의 주된 전개 방식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는 남미인의 낙천적인 정서가 그들의 음악으로써 자연스레 발현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그들의 얼굴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케세라, 세라.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또는 ‘그걸 고민해서 뭘 어떻게 하겠어, 간절히 고민하면 하늘에서 튀긴 왕만두라도 뚝 하고 떨어진다던가?’
주인공 사내는 아르헨티나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독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차를 내놓았지만, 어느 미친 택시 기사가 신호를 무시해 들입다 갖다 박는다. 그래도 그들은 실망할 뿐, 진지하고 심각하게 격분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받힌 쪽에선 곧잘 뒷 목을 잡고 나올 터이고, 들이받은 쪽에선 스스로 세상없을 죄인을 자처해 어떻게든 선처를 바라는 양의 눈망울을 띄어야 할 터인데, 정반대 상황이 연출된다. 여인은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고 당당하게 굴다간, 정작 보험 처리는 하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 보험 처리에 있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봐선 애초 그렇게 당당할 처지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오히려 뻔뻔히 턱을 쳐들곤 먼저 조건을 제시한다. “사비로 갚을게요. 근데 당장은 돈이 없으니 할부로 하죠, 50개월, 무이자로.” 남주인공은 또 그걸 받아주고 앉았다. 나라면 그렇게 하진 못했겠지만, 한편 사람이 이 정도로 당당하면 밉진 않아지는 것 같다.
그런 그들의 성격과 태도가 좋았다. 진지하지도, 심각해지지도 않는 심장의 강인함과 그 뿌리 깊은 곳에 있는 태생적 낙천성. 삶의 처지에 주눅들긴 커녕, 그를 소재로 뻔뻔한 억지와 능글맞은 농담을 일삼을 줄 아는 사람들. 택시 기사 여인은 싱글맘으로써 아이를 택시조합 사무소에 맡기거나 뒷자리에 태운 채 일한다. 그럼에도 자기 삶을 긍정한다. 누군가에게 손을 벌릴 필요도 없고, 자기 손으로 직접 돈을 벌어 아이 뒷바라지할 수 있게 된 것이 더없이 만족스럽다고, 그 얼굴에 걸린 미소가 편안하다.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표정, 내 고민의 빛을 바래는 미소이다.
그런 와중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디폴트를 선언한다.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선언과 동시에 현금 인출 제한 조치가 내려지고, 훌리오는 독일행을 위해 집과 가게와 사재를 팔아 마련한 돈을 꼼짝없이 저당 잡히고 만다. 그는 닫힌 창구를 향해 분노다운 분노를 터트리지만, 그마저도 하루이틀 사이에 극복하고 만다. 엄청난 회복력과 생명력. 같은 상황에 부닥친 나와 내 동포들이 어떤 가슴과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를 상상해 보면 선명한 대비이다.
시장에 돈이 씨가 말라, 안 그래도 궁한 밴드 친구들의 목구멍 포도청이 비상을 알린다. 그 와중에 부패 정치인, 금번 디폴트의 원흉인 인사로부터 축하 공연 제의를 받는다. 부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하 파티 자리이다. 새-끼, 부패와 횡령을 그렇게 일삼고도 제 부인에겐 잘 보이려고 하다니. 주인공 일행은 망설이고 서로 갈등하다간 콘트라베이스를 제하고 파티장으로 향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들 부부의 생일 축하연에서 부른 노래가 Cambalache였다는 점이다. 지독히도 익살스러운 역설이다.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이들을 욕보이는 이 노래를 부패 정치인의 면전에서 부르는 것도, 가사 내용이 자기네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황홀한 목소리에 박수를 치는 정치가 내외도, 그 가사를 담고 있는 이 선율도 모조리 농담 같다. 그런 와중에 스크린엔 축하연과 시위 폭동 장면이 교차되고, 이 부드러운 익살의 선율이 그사이를 누비며 두 가지 모순된 광경을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
세상이란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 같은 곳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걸
나도 알아…
506년에도 그랬고,
2000년에도 마찬가지겠지.
도둑놈들은 언제나 있었고,
마키아벨리 같은 음모가들과 사기당한 사람들,
행복한 자들과 원한에 찬 자들,
진짜 가치와 번지르르한 가짜들이
언제나 함께 있었지…
하지만 20세기가
이토록 뻔뻔한 악의 전시장이라는 사실만큼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온갖 것이 뒤엉킨 난장판 속에서 뒹굴고,
똑같은 진흙탕 속에서
모두가 더럽혀진 채 살아가고 있지…
오늘날엔 올바르게 사는 것이나
배신자가 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어.
무식한 놈이든 현자든 도둑이든,
베푸는 사람이든 사기꾼이든,
모두 똑같아! 누구 하나 나을 게 없어!
멍청한 당나귀나
위대한 교수나 똑같은 세상.
낙제자도 없고, 서열도 없어.
부도덕한 놈들이 우리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렸으니까.
- Cambalache 가사 中
영화의 하이라이트일 이 장면 위, 흐르는 탱고의 목소리가 꿈결같이 낭만적이라서 유독 인상 깊게 남는다. 백그라운드 뮤직의 마력은 상당해서, 부패 정치가의 못난 얼굴도 불쾌하지 않게 완화하고 폭동의 혈기도 축제처럼 바꿔놓는다. 그리고 농담처럼, 공연 대신 시위에 참여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경찰의 진압 사격으로 사망한다. 그때 여전히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어, 그의 주검 위를 따스하게 맴돌고 있었다.
일행은 곡소리를 내며 울지 않는다. 약간은 무거워진 공기 속에, 짧은 묵념과 추도만으로 그를 마음에 담담히 담고 다시 일전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장면들이 내 가슴속에 지피는 질문은 분명하다. 그렇게나 진지하고 심각할 것이 있었나, 진정?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심각함이란 전부 선입견이고, 오해는 아니었을까? 내 고민의 심각함이라 해봤자 당장 내일 아침의 생계가 아니라, 더 가지고 싶은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일 뿐.
케세라, 세라.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방종과 방만함을 주문하는 게 아니라, 묵묵하고 담대히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너무 젖어 드는 것은 지겨워,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쪼아보려는 것도 한심하지. 오늘을, 오늘만을 온전히 살자고. 그게 요즘 내 마음이 찾고 또 붙잡으려 하던 것들이라 극장을 나서며 가슴이 꽤 가벼워진다. 따뜻하면서도 가벼워지는 이 느낌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홉 시가 넘은 바깥 기온은 꽤 찹다. 내일 또 출근해야 했지만 나와 일행은 꼬리 긴 여운에 이끌려 세종문화회관 앞 벤치에 앉아, 조금 더 감상을 즐기기로 한다. 오늘의 영화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