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리뷰,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이다. 그러나 나는 원제인 ‘LATE FAME’ 쪽에 마음이 더 끌린다. 시사회는 월요일 저녁 19시 반,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진행됐다. 회사와 가까운 곳이라 부러 느긋한 걸음으로, 덕수궁으로부터 광화문 일대를 서성거렸다. ‘씨네큐브’는 영화 애호가들을 통해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막상 온 것은 처음이었다. 번듯한 고층 오피스 건물의 지하에 있는 영화관, 에스컬레이터를 내리자마자 다른 상가동과 구분되지 않은 공간의 한쪽으로는 책상이 자리해 있었다. 박스 오피스가 따로 없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 줄을 서서 미리 예매한 티켓을 교부받는다. 어딘가 투박한 구성이 썩 마음에 들었다.
동행을 기다리며 다른 영화 팸플릿을 뒤지어도 보았다. 9월 마지막 날에 영화 이방인을 상영한다는데, 보고 싶다는 생각의 한편으로 주인공 뫼르소 연기를 살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동행이 조금 늦었다. 첫 10분은 광고 상영이라 생각해 여유로웠지만, 광고 없이 정각에 상영하니 곧잘 입장하라는 직원의 외침에 갑자기 다급해졌다. 동행은 정확히 정각에 도착해, 헐떡이는 손길로 수정과를 건네주었다. 살얼음 때문에 차가운 결로가 맺혀있었다. 멀리서 수정과를 사 오느라 늦을 뻔했구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는 내내 팝콘 튀기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영화는 별다른 광고도, 시작을 알리는 표지도 없이 스리슬쩍 시작했다. 그저 어제와 오늘, 똑같은 일상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치 않듯이. 막이 열리자마자 주인공 에드 색스버거는 우편물들을 분류하고 있고, 그 눈빛은 담담하다. 아무런 꿈의 흔적도 읽을 수 없는 눈빛의 맑음, 그는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고, 몇 가지 시집도 출판했다지만 그런 것들도 워낙 오래돼 딱히 기억하지 않는 눈치. 비관이나 염세는커녕 지루함조차 없는 말간 눈빛은, 워낙 오래돼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된 일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우편물을 정리하고, 퇴근하면 동네의 단골 바에 들러 친구들과 싱거운 농담깨나 주고받는 삶. 같이 늙어가는 처지끼리 서로 적당한 대화를 나누는 풍경은 호젓하다. 싱거운 농담과 약간은 익살스러운 장난도, 그것을 익숙하다는 듯이 유연하게 되받아치는 말들도, 모두 잘 짜인 양식같이 매끄러운 뉘앙스를 풍긴다. 마치 ‘그건 5년 전에 한 번 했던 농담이었지 아마, 그때 내가 이렇게 답했었던가’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그들의 대화는 매끄럽고 젠틀하며, 반복적이다. 그리고 익숙함과 반복이야말로 일상의 대표적인 속성 아니겠는가.
귀가한 집은 어두웠다. 아내와 자식은 없는 듯하다. 머리맡의 조명을 끄면, 다시 우체국에서 시작되는 다음 장면, 그리고 퇴근, 단골 바의 시퀀스가 몇 차례 반복되려다가는,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서사는 전개부를 알린다. 말쑥한 차림새의 한 젊은이가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에드의 시집을 읽고선 그를 만나고 싶어 어렵사리 찾았다고 말한다.
에드는 불신의 기색을 표한다. 자신조차 밀어낸 꿈이 상기되는 순간은 상실의 두려움부터 일으키기에, 실은 그 두려움이 곧 꿈을 밀어낸 원인이요 깊이 잠든 꿈 위에 덮인 먹빛 천과 같아, 잊힌 꿈을 부르는 것은 그 위에 두터이 덮인 두려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의 경계와 마다함에도 불구, 청년의 상기된 볼과 멋대로 배배 꼬이는 다리는 그가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의 말이 진심임을 가리킨다.
청년은 에드의 시집 ‘WAY PAST GO’에 관해 열정적으로 평하고, 자신들의 모임에서도 이 시집을 모두 읽곤 매료되었노라 말한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이 작품은 천재적이라고 수도 없이 말한다, 열렬한 고백처럼. 이 앞에 누가 있어 기쁘지, 아니 한 순간 체면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한껏 들뜨지 않을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귀하고, 나아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알아주는 것”은 고귀하기까지 하다. 누구나 자신이 알리어지고 발견되기를 소망하나, 보통은 그보다 체념이 더 가까이에 있지 않던지.
우편 분류원인 내가 아닌 어엿한 시인으로서의 나를 알아본다는 것. 표면상 해석되는 나의 피상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나의 자아를 발견해 준다는 것은 분명 황홀한 일. 나아가 자신조차 잊고 흩고 오래도록 풍화시킨 영광의 자아가 그것이었으니, 청년이 자기도 모르게 내민 ‘부름’은 금빛 월계관 같았다. 그래서 참 고약하고, 뉘 말마따나 얄궂다고 생각했다. 우린 왕관의 금빛에 홀려 그것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왕관의 가치는 금칠 된 외양이 아닌 만든 이의 자격으로부터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거듭된 구애로 에드는 마침내 그들의 모임, ‘Enthusiasm Society (이하, 열정의 사회)’에 발을 들인다. ‘열정의 사회’는 극작가, 시인 지망생, 배우와 에세이스트 등의 예술가 모임으로 그들은 진짜 예술, 정확히는 대중 매체의 곤궁함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며 그 심오함에 대해 토론하려는 듯하나, 실상 현학적 애송이들의 모임이었다. 부르주아 자제들의 취미 생활 같달까. 실체와 근거 없는 부정, 비판의 탈을 쓴 비난을 일삼는 그들은 변변한 창작물 하나 없이 대중 매체를 폄하하며, 실상 자신의 현학적 허영만을 충족하려는 듯하다. 그들 사이에 소속감보다는 늘상 위화감이 감돌곤 했지만, “에드”로서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그곳은 자신을 “알아보고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조차 잊어버린 자신의 영광을 소환하며, “LATE FAME”의 달콤한 가능성을 상기시키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열정적인’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자아와 소속감을 누리곤 행복해했지만, 그 결과 자신의 일상과 작별하게 된다. 자기가 구축한 ‘일상’은 자신의 진짜 자아를 포기한 대가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왜 아니랴,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만큼 화합은 먼 것이 되고, 반대로 화합을 위해 우리는 자신만의 특별함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는가, 다름 아닌 외로움의 부름으로, 자기 두 손으로 밀어내지 않나. 누구나 마음 한쪽에 그런 비밀, 자신만의 특별함과 고귀함 하나쯤은 간직하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뒤늦게 찾은 영광’이 이러한 자아의 부활, 내지는 변신을 불러오는 딴에는 가혹한 선택을 수반하는 듯하다. 일상과 이상 사이, 친숙한 일상과 눈부신 자아실현 사이에 놓인 티켓은 하나이고, 대가는 포기이다.
친구들이 자신의 시집을 발견하곤 멋대로 낭독하려 들 때 그는 대단히 분노하며, 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 의해 욕보이는 것을 지레 두려워한 바람에 모진 말을 쏘아댔다. “너희는 나를 몰라, 너희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싼 그런 사람이 아니야.” 자신의 특별함과 다름을 드러내며 ‘어제’의 우리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긋는 에드로부터 친구들은 일종의 모욕감을 느끼게 되고, 에드는 그 길로 단골 술집에의 발길을 끊었다. 자신에겐 새로운 소속, 진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커뮤니티, 즉 대안이 생긴 덕분이겠다.
한편 그의 새로운 소속, ‘열정의 사회’는 그가 오래 머무를만한 곳이었을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낭독회를 기획하고, 에드에게 새 시를 써서 무대 위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오래도록 절필한 에드로서는 자신이 없지만, 자신을 알아봐 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픈 마음을 이기지 못해 승낙하고야 만다. 시상만이 오래도록 입가를 맴돌았지만 당연히 시는 나오지 않고, 좌중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기한을 정해놓고 시를 쓰라 청하는 것은 그들 ‘열정의 사회’가 정작 시라는 예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시 장르와 에드의 시집을 칭송해 왔지만, 정작 ‘시’가 무엇이고, 어떻게 영글어 탄생하는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의 태도는 마치 “예전에 이런 좋은 시를 썼으니, 새 시를 쓰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겠지요? 당신은 천재잖아요”라고 말해오는 듯하다. 시작 詩作의 과정과 원리를 모르기에, 서글프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존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낭독회를 기점으로 모임은 와해되고 만다. 사실 애초부터 품고 있던 균열이 결국 드러나게 된 것에 지나지 않다. 즉 이미 불완전한 모임, 에드의 입장에서 논하자면 오래 머무를 만한 곳이 못 되었다는 뜻. 기획자부터 개개 낭독자까지, 자신을 드러내 알리려는 치기 어린 열정에 급급하였고 프로다운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머리만 굵은 오합지졸끼리 서로를 힐난하며 자멸하는 양상을 보인다. 희구하는 명성에 비하자면 한참 준비되지 않은 애송이들은 졸전을 펼친 뒤 불평불만으로 자신의 모자람과 수치를 덮는 데 급급하던 찰나, 한껏 뒤숭숭해진 백스테이지를 뒤로 한 채 에드가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혼란 가운데에 떡하니, 그리고 버젓이 놓여 있다. 빛나는 조명이나 무대효과 없이, 시에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한 누군가의 지인들이 자아내는 어수선한 웅성거림 가운데로 툭하니 던져졌다. 여느 지인 하나 초대하지 못한 에드, 주목 없이 무대 위에 자리한 이 노인은 무대 구석에 자리한 소품이나 감자 자루 같았다. 그리곤 무심한 좌중을 향해 오래 묵힌 자신의 시를 담담히 낭독하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던 관객들의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시는 이 영화의 서사 전개를 위해, 적당히 대충 “좋은 시였다고 치자”라는 감독의 우격다짐식 통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들처럼 깊은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깊은 밤처럼 까만 무대 장막 앞에 놓임으로써, 더욱 도드라지는 홍옥처럼 붉었다.
영화 ‘피아니스트’가 마지막에 연주될 쇼팽 발라드 한 곡을 위해 그 바깥의 모든 장면 장면을 적막으로 가득 채워두었듯, 이 영화의 절정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기나긴 러닝 타임 전체를 바침으로써, 미학적 반전과 카타르시스를 도모한 듯한 감상. 적당한 일상 밑에 자아를 감춘 사내, 고독한 노인의 일상과 시끌벅적한 부르주아 애송이들, 그들에게 위안을 받지만 그들 사이로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는 환경적 차이 및 이질감, 그리고 영화 내내 배경에 자리했던 적요함마저 지나쳐온 다음 무대 위로 시가 퍼졌고, 그건 아름다웠다. 이 시를 듣기 위해 나는 오늘 여기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곤 안녕, 정해진 결말이 우리를 기다렸다. ‘열정의 사회’는 와해된다. 에드의 낭독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단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LATE FAME’의 신기루는 슬며시 사라진다. 늦은 영광이었지만, 또한 찰나의 영광이었다. 영광이란 그런 것일까. 영예를 알지 못한 자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다시 오래된 선술집 문을 열며,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친구들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일절 묻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랜만이네”하고 화답한다. 그렇게 그는 반복적이고, 익숙하고, 정다운 일상으로 회귀한다.
리뷰를 마무리하며, 문득 유명한 시구 하나가 떠올랐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네게로 가 꽃이 되었다’라. 에드에게 청년의 부름이 딱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는 것은 무척이나 귀해서, 오죽하면 우린 그 우연에 전생의 인연까지 끌어다 붙이지 않는지. 마주 본 두 사람 사이에 말로써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것은 적고, 그래서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나 싶다. 이렇듯 아무리 설명해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한편, 충분히 표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듯이, 알아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분모를 직감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을, ‘그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의 파편을 발견하는 일’이라고도 표현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정녕 부름, 그것만으로 온전해지는 것일까. 거듭 생각해 보아도 아닐 듯싶다. 그의 곁에 가 온전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도 아름다울 일이지만, 꽃의 의의는 피어나는 것보다 유지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화려히 흩날리는 벚꽃보다, 오래지는 수국이 나는 좋다. 그가 상류 인텔리들로부터 익숙한 노동자들 곁으로, 화려한 사교계로부터 하강해 다시 낡은 선술집을 들어서는 마지막 뒷모습에서, 측은함보다 웃음이 먼저 스며나는 이유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