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추천받은 한 음반은 유난히 커버가 마음에 들었다. 날이 밝아 오기 전 감도는 새벽의 빛처럼 푸른 배경 한가운데 연한 노란색의 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도이치그라모폰의 노란색 로고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대표곡인 「Petites Vagues」는 드뷔시의 「Rêverie」를 닮기도 하고 라벨의 물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곡의 제목처럼 또렷하고도 투명한, 유리알 같은 방울들을 뿜어내는 작은 물결 같은 연주에 빠져들어갈 때쯤 음반명과 연주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율리우스 아살의 《SIENA TAPES》였다.
지난 20일 저녁,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체임버홀 무대에 선 율리우스 아살은 음반에서 확인한 모습보다 조금 더 앳된 소년의 인상을 풍겼다. 청중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는 곧바로 「 버르토크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긴장을 한 탓인지 음이 다소 납작하게 들리나 싶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부피감이 생겼다. 버르토크의 이 작품은 타악기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곡인데, 통-통 튀어 오르는 음들에서 강한 탄성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강약의 폭이 넓어서인지 음악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여러 민속 음악의 리듬과 선법에 현대적인 언어를 결합한 버르토크의 작품들은 항상 어려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싫지 않은 낯섦이다. 불협화음, 알 수 없는 움직임, 그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재치, 알 듯 말 듯한 순간들. 한 발 앞으로 내디디려 하면 다음의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첫 번째 곡이 루마니아 민속 음악풍의 춤곡이었다면, 세 번째 곡은 아랍 농민 음악의 영향을 받은 낯선 리듬의 곡이었다. 천진난만하면서 율동적인 선율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점차 격렬해지면서 마침내 어두운 거리로 들어선 듯한 순간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거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춥거나 외롭지는 않고 가끔은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리송한 곳이었다.
Julius Asal [크레디아 제공]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한층 장엄하게 바뀌었다. 낮은 음역에서 으르렁거리듯 등장한 주제는 대위적으로 확장되며 강렬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음악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어지는 2악장에서는 1악장의 긴장과 대비되는 차분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앞선 버르토크의 음악에서도 반복되고 강조되는 박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약간은 어렴풋했다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에서는 더욱 분명해졌다. 머릿속에 그리는 선율의 모양에 따라 박동이라 말할 수도, 어떤 걸음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살이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발견했다고 이야기한, 앞으로 나아가려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연주에서 연상되는 박동, 혹은 걸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을 듯 단단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젊은 연주자가 내딛는 자유로우면서도 단정하고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Julius Asal [크레디아 제공]
2악장의 후반부의 춤추는 듯한 선율은 잠시 행복한 순간을 만들었다. 잘게 나뉘는 독특한 리듬에서나 재즈나 부기우기의 느낌도 스쳤다. 이 또한 음악에 어떤 추친력을 만들어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에는 높은 음역의 긴 트릴이 이어졌는데, 아살의 트릴은 빈약하지 않고 힘이 있으면서 풍부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자신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프로그램 변경 전이라면 이번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했을 곡은 기대만큼이나 긴 여운을 남겼다.
고전 소나타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표현 세계를 드러내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그중에서도 2악장은 특히 기대하던 작품이었다. 첫 번째 주제는 베토벤이 열다섯 살 무렵 작곡한 피아노 사중주 3번 2악장에서 가져왔다. 1악장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차분하게 흐르는 선율을 중심으로 주제가 반복되고, 장식음이 더해진다. 높은 음역의 자유로운 2 주제가 이어지는데, 아살은 마치 유리를 정성스럽게 세공하는 사람처럼 소리를 냈다. 음 하나하나가 맑고 투명했다.
레라 아우어바흐의 「엠마 하우크의 러브 레터」는 한국 초연 작품으로, 아살은 이 곡에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연주에 앞서 이 작품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던 엠마 하우크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하우크는 남편의 키스가 자신에게 독을 옮겼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편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임이여, 오라’라는 문장이 수천 번 반복된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끝내 남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어쩌면 문장이 그토록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곡에는 편지 속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주문과도 같은 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 그리고 억눌린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는 앞서 연주된 버르토크와 베토벤의 작품에서 느꼈던 끝없이 반복되는 박동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의 주문 역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들렸다.
Julius Asal [크레디아 제공]
공연의 마지막 순서인 「버르토크의 세 개의 벌레스크」 이르렀을 때, 그가 어떤 의도로 프로그램 순서를 재배치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변경 후의 구조가 버르토크 - 베토벤 - 베토벤 - 버르토크로 이루어진 데칼코마니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음악적 긴장감이나 구조적 균형감 중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창작 행위라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뷰에서도 미적인 것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연주자인 동시에 창작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그만큼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그러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이번 무대를 잘 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그의 다른 면을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답하듯 아살은 일곱 개의 앙코르 곡을 통해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쇼팽과 스카를라티의 작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는 방식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특히 음량을 점진적이고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는 부분은 꿈결 같이 부드럽고 음색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반짝였다. 정식으로 피아노 교육을 받기 전부터 소리를 듣고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어온 아살에게 음악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대상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는 음악이 실재로 만들어지는 순간과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아살은 음악이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돌아보면 그의 음악은 첫 순간부터 인상 깊었던 옷차림과 닮아 있었다. 올블랙의 단정하지만 앞 단추 몇 개를 풀어 목을 답답하게 하지 않은, 부드러운 소재의 옷. 이번 공연에서 들려준 연주가 꼭 그랬다. 어두운 색조를 띠면서도 흐르는 소재의 유연함, 부드러움, 자유로운 움직임이 모두 그의 음악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