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자아’에 관한 모든 담론이 정말 싫다. 진저리나게 싫다. 자아를 탐색하면서 비대해지는 자아도 보기 싫고 자아를 고정된 하나로만 상상하면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아도 크게 혼쭐을 내주고 싶다. 자아의 ‘자’자만 들어도 지겹고 누가 ‘자아’ 두 글자를 말하려고만 하면, 그 자리에 가서 깽판을 놓을 지경이다. 아 진짜 자아 이야기 그만하라고!
하지만, 저는 오늘 자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바디호러 영화 〈클레이 페이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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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묘사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의 부탁드립니다.
여기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배우, '맷 헤이건'(이하 맷)이 있다. 겸손하고 신사적인 성격에, 카멜레온 같은 얼굴의 맷은 영화제의 가장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꼽히면서 그야말로 고점을 눈앞에 둔다. 그러나 노미네이트 기념 축하 파티에서 범죄 조직 보스의 여친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침대에서 눈을 뜨자, 조직원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있다. 당황한 맷을 두고, 여자는 보스에게 안긴 후, 유유히 침실을 빠져나가 버린다. 혼자 남겨진 맷에게 보스는 '예쁜 얼굴'이 보기 싫다고 말한다. 곧 맷의 팔을 붙잡는 조직원들. 보스는 주머니에서 칼을 하나 꺼내더니 맷의 얼굴을 이리저리 그어버린다. 그렇게 맷의 얼굴은 말그대로 너덜너덜하게 훼손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은 맷에게 불리하게 흘러간다. 맷이 보스의 여자를 추행했다는 식으로 보도되면서, 에이전시는 맷을 버리고 자산관리사는 조직에 붙어서 맷을 파산 상태로 만든다. 심지어 6번의 성형수술까지 전부 실패하면서 맷은 완전히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맷. 잡지를 정리하던 중, 한 과학 기사를 보게 된다. ‘재생의학’ 기술을 개발 중인 과학자 ‘케이틀린’에 관한 기사다. 케이틀린이 연구중인 재생의학이란, 나노셀과 AI기술이 결합한 형태로, 나노셀들이 자체적으로 학습하여 손상된 조직을 모방하는 기술을 말한다. 맷은 동앗줄을 잡는 심정으로 그녀를 찾아간다. 자진해서 얼굴을 실험을 위해 쓰겠다는 맷. 그렇게 맷은 조금씩 치료를 이어가고 놀랍게도 맷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부작용도 함께 찾아온다. 감정이 격해지면, 얼굴이 흘러내린다. 아니, 얼굴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고통에 케이틀린을 다시 찾아간 맷. 케이틀린이 잠시 약을 가지러 간 사이, 고통스러운 맷은 다급한 마음에 눈에 보이는 나노셀 주사를 자체적으로 투입한다. 허용치보다 훨씬 많은 나노셀이 맷의 몸에 들어온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케이틀린의 걱정에도, 맷은 농구를 하며 건강하게 삶을 보낸다. 그러다 경기 중 바닥에 얼굴을 박으며 다친 맷은, 순식간에 자기의 얼굴이 회복되는 걸 본다. 다쳐도 괜찮다고? 맷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찾아간다. 근데 몸이 회복의 수준을 넘어선다. 완전히 변형된다. 자유자재로, 맘대로.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얼굴과 똑같이 만드는 변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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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맷은 한 토크쇼에 출연한다. 빈민가에서 자라, ‘개과천선’ 스타가 된 맷에게 진행자는 묻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당신의 모습이 진짜냐고. 맷은 별 생각없이 대답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 질문을 관객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묻게 한다. 왜냐면 맷의 모습이 자꾸만 변하기 때문이다. 맷은 복수를 진행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꾼다. 저 얼굴의 맷도, 이 얼굴의 맷도, 맷이다. 그는 과연 진짜 ‘맷’일까?
무엇이 진짜 나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이런 질문은 던진다. '진짜 나'를 찾는 작업은 중요해보인다. 그걸로 '나'를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진짜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 중에 진짜는 없을까? 우리가 버리는 가짜는 왜 가짜인가? 단순히 남 앞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밤 중에 깊은 사유에 빠진 나는 진짜 나고 다른 사람 앞에서 억지로 애쓰는 모습은 가짜인가? 진짜와 가짜는 일종의 기호에 따라서 선별되는 개념이 아닌가? 애초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나?
난 '진짜' 자아를 정하려는 자아가 싫다. 진짜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남겨지는 것은 스스로가 무엇을 멋지다고 생각하는지만 공허히 보여줄 뿐이다. 멋진 ‘나’로 구성된 게 ‘진짜’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끈적한 자기애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흘러내리는...)
영화 《클레이페이스》가 기막힌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영화는 무엇이 진짜 맷이냐는 질문을 던져놓고 이 앞에서 고민하며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몸을 따라간다. 그야말로 맷의 ‘몸’이 변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찢기고, 변하고, 흘러내리고, 통제할 수 없고, 회복되고, 변화하는 맷의 몸을 말이다. 그 과정에서 맷은 다르게 감각하기 시작한다. 몸이 갈갈히 찢겼기 때문에, 내 얼굴을 더 이상 내 얼굴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몸을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기 때문에 맷은 변한다. 그렇다. 맷의 변화는 몸의 변화다. 맷의 세계가 흔들리는 건 몸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몸은 이성과 자아에 비하면 그저 ‘덩어리’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걸 몸으로 감각한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도,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기쁨도, 온몸이 타들어가는 사랑도,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이별도, 모두 몸을 통해서 느낀다.
우리는 모두 삶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우리를 고문하는 경험들을 거쳐간다. (…) 고문이란 곧 쥐어틀기다. 단절은,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든 겪어내야 한 것이든, 정신적‧신체적으로 우리를 쥐어틀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가한다. 우리는 정체성과 실존의 형태 왜곡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 형태 왜곡 속에서 우리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 단절은 나의 탄생이자 재탄생의 조건이다.
- 클레르 마랭 《단절들》
그의 몸은 매 순간 변한다. 그렇다면 그는 계속해서 재탄생하는 게 아닌가. 계속해서 이전의 자기와 결별하고 다시 태어나는 존재. 여기서 진짜 맷은 누구인가? 착한 맷? 그렇게 뽑고 싶은 건 우리의 생각이고. 그는 매 순간 맷이다. 시시각각 변화하 그 자체가 바로 맷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에서 닥치는 모든 물질적 사건으로 종잡을 수 없게 되는 바로 그 존재 말이다. 그는 바뀐 몸으로 인해서 이전의 모든 것들과 단절되었지만, 그것이 그의 재탄생 조건이었던 게 아닌가. 이전의 몸과 이별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몸이 됨으로써, 고정된 존재에서 벗어나 순간의 변화들을 모두 다 받아들이면서 그는 '맷'이 된다.
(찰흙같은 그 얼굴.. 이쁘기도 하지요..)
우리는 매 순간 노화하고, 성장하고, 감량하고, 증량하고, 다치고, 회복한다. 누구와 손을 잡으며 안고, 밀어내고 도망친다. 우리 역시 시시각각 변하기는 마찬가지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어떤 얼굴이 보이는가, 거울 속의 존재는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마음과 정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몸과 몸을 둘러싼 세계가 변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고정된 나 자신을 갖지 못한다는 초조함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기대해보자.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니 얼마간 확정된 가능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