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로 태어나 아이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난다. 타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시작해, 자라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마침내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생애의 시작과 끝은 어쩌면 생각보다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좀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특히 노화는 흔히 상실과 쇠퇴, 불편함과 두려움의 언어로 이야기된다. 젊음은 지켜야 할 것이 되고, 늙음은 가능한 한 늦추거나 감추어야 할 것이 된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바로 이 익숙한 인식에 유쾌한 질문을 던진다. 늙어간다는 것은 정말 그렇게 불쾌하고 슬프기만 한 일일까?
극은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아 가족들과 식사하던 춘자 씨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성실하게 살아 두 아들을 키워냈고, 이제는 며느리까지 둔 평범한 할머니. 춘자 씨에게는 약간의 치매 증세가 있다. 가족들에게 그의 실종은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운 사건이지만, 춘자 씨 자신에게는 조금 다른 모험의 시작이다. 가족들이 현실 속에서 그를 찾아 헤매는 동안, 춘자 씨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초현실적인 세계를 떠돈다.
이렇게 극은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펼쳐 보인다. 하나는 춘자 씨를 찾는 가족들의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소원을 찾아 나선 춘자 씨의 비현실적인 여정이다.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지만, 결국 한 가지 질문을 공유한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각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을까?
가족들의 이야기는 춘자 씨의 실종을 계기로 그동안 묻어두었던 상처와 오해를 드러낸다.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감정은 때로 가까운 만큼 더 깊이 묻히고, 일상에 익숙해진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묻는 일조차 생략되곤 한다. 춘자 씨를 찾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을 마주하고, 비로소 이해와 화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반면 춘자 씨의 여정은 현실의 인과관계나 논리에서 한결 자유롭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유년기의 자신을 만나고, 죽음을 앞둔 노년의 자신을 경험한다.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으며, 장면들은 때로 꿈처럼 불쑥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얼마나 개연성 있게 연결되는가보다 춘자 씨가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는가이다. 관객은 그와 함께 낯설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뛰어들며, 익숙한 현실에서는 쉽게 꺼내기 어려웠던 질문들을 직관적으로 마주한다.

노화를 유쾌하게 껴안는 법
이러한 초현실적 세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똥오줌이나 코딱지처럼 흔히 더럽고 불쾌한 것으로 여겨지는 소재들이다. 아이들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 만한 것들이 엉뚱한 상황을 만들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통로가 된다. 통상적인 예의와 체면의 규칙으로 보자면 민망할 법한 장면들이지만, 극은 그것들을 굳이 감추거나 부끄러워할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천진난만한 웃음의 재료로 삼으며, 관객이 당연하게 여겨온 감각의 경계를 슬쩍 허문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는 아직 세상의 규칙을 익히는 중인 존재다. 나이가 들어 다시 그러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한때 익숙했던 능력을 잃어가는 존재로 여겨진다. 둘은 생애의 서로 다른 지점에 있지만, 모두 타인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의 미숙함에는 비교적 너그러우면서도 노년의 미숙함에는 쉽게 초조해하고, 때로는 불편함과 수치심을 덧씌운다. 같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누구에게 일어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셈이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이 차이를 정색하고 비판하기보다 웃음으로 비껴간다. 작품 속에서 배설물과 신체의 부산물은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소재다. 이는 단지 파격적인 유머를 위한 선택만은 아니다. 우리가 부끄럽고 불쾌하다고 규정해온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대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화를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름과 기억력 저하를 긍정적으로만 묘사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몸과 능력이 변하더라도 그 사람의 존엄과 욕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극의 음악과 장면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무겁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 현실의 가족 이야기와 춘자 씨의 초현실적인 모험은 모두 유쾌한 넘버를 통해 진행된다. 특히 춘자 씨의 여정은 논리적인 설명보다 감각과 직관을 앞세우며, 관객을 이해의 부담에서 잠시 벗어나게 한다. 모든 장면을 하나의 메시지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다. 황당한 상황에 웃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고, 그 사이에서 문득 마음에 걸리는 감정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역시 너무 많은 설명과 판단에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마침내 가족들은 교회에서 108배를 올리며 소원을 빌고 있는 춘자 씨를 발견한다. 기독교의 공간과 불교식 절이라는 서로 다른 종교적 풍경이 한 장면에 놓이는 이 재회는, 적어도 극의 맥락에서는 소원을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고도 엉뚱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순간으로 읽힌다. 가족들은 춘자 씨를 찾아 헤매며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춘자 씨는 자신의 소원을 찾아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두 여정은 결국 한자리에서 만난다. 완벽한 이해에 도달해서라기보다, 다시 서로를 마주하고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